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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경영/누르하치: 글로벌 CEO

누르하치, 나는 오랑캐다

by 전경일 2010. 4. 25.

1583년 한 젊은이가 명나라 군사들에게 쫓기는 몸으로 백두산에 숨어든다. 얼마 후 그는 의협심이 가득 찬 여진 소년 7명과 의형제를 맺고 13명의 기갑병으로 처음으로 군사를 일으킨다. 비록 그에게는 아버지가 남긴 13벌의 갑옷 밖에 없었지만, 이는 13명의 창업 동지의 몸을 감싸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거병을 했어도 다른 동지들은 쉽게 모이지 않았다. 게다가 일족들도 외면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적극적으로 방해하는 자 마저 나타났다. 얼마 지나자 그 밑에는 30여명의 동지들과 수하의 100여명의 부하가 생겨난다.

사나이는 이제 최소한의 자원을 가지고 뜻을 펴고자 일어선다. 때마침 조선에 일어난 임진왜란은 동북아의 세력판도를 급변시켰고, 그는 이 틈을 타 사분오열되어 있던 자기 부족을 통합시켜 나간다. 그 후 사나이는 민주족 특유의 발 빠른 기마전술과 대륙의 웅혼한 기상을 품은 채, 신출귀몰하는 전술을 이용해 100만 명나라 대병을 대파한다. 이어 그의 아들은 창업을 더욱 공고히 하고, 마침내 손자 대에 이르러서는 만리장성을 뛰어넘어 중원에 청(靑)의 깃발을 힘차게 내리꽂는다. 그는 누구인가? 바로 청(淸)태조 누르하치다.

누르하치는 1559년 건주여진이라 불리는 여진의 한 부장(部將) 집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교챵가(覺昌安)라고 하였고, 건주 우위(建州 右衛)의 추장 왕고의 부하 무장이었으며, 아버지는 다끄시(塔克世), 어머니는 왕고의 딸로 이름은 에메치(厄墨氣)였다. 

누르하치라는 이름은 여진어로는 ‘멧돼지 가죽’이라는 뜻이 있다. 멧돼지의 가죽은 질기다. 또 그것만큼 뜨거움과 차가움을 잘 이겨내는 물건도 없다. 누르하치란 이름은 천만가지의 어려움과 고통을 이겨내고 자기 부족을 이끌어 나가라는 염원에서 그의 조부가 지어 준 이름이다. 그래서 그런지 그는 짐승들이 활동하는 어두운 밤에 태어났다. 운명적으로 야생의 기질을 갖고 태어난 것이다.

누르하치의 아명은 ‘한자(罕子)’다. ‘귀하다’는 뜻이다. 그의 이름이 이렇게 지어진 것은 누르하치가 태어날 때 불이 났는데, 불 속에서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이 점이 나중에 뭔가 큰일을 할 사람이기 때문에 타죽지 않게 된 거라는 강한 믿음을 주었다. 불사신을 만들어 낸 믿음이었다. 우연히도 그의 이름이 뜻하는 ‘한(罕)’은 왕을 뜻하는 ‘칸’ (汗- 임금의 호령(號令)과 뜻이 같다. 결국 그는 이름처럼 칸이 되었다.

누르하치는 매우 총명했다.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깨우쳤다. 열 살이 되었을 때에는 이미 말을 타고 활을 쏠 줄 알았으며 검술과 봉술에도 능하였다. 귀신같은 활솜씨 때문에 신전수(神箭手)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그의 조부는 금나라를 건국하여 천하를 호령한 아구타(阿骨打)식 자식 교육법을 따랐다. 아구타는 자식을 가르치기 위해 사슴이나 돼지의 관절로 만들어진 인형인 ‘가추하’로 단련시켰다.

그 같은 것을 생각해 누르하치의 조부는 손자를 강하게 키우고자 했다. 아구타나 칭기스칸과 같은 인물로 단련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누르하치는 어렸을 때부터 자신이 본받아야 할 벤치마킹 대상이 있었고, 그들을 내면에 투영해 보면서 성장했다고 할 수 있다. 그만큼 생각이 커질 수 있는 조건이 형성된 것이다. 이 점이 그가 한 족속의 인재로 커서 중원의 주인공으로 발전해 나가는 과정을 짐작하게 만든다.

누르하치의 어린 시절은 참담했다. 그는 명나라 장군 이성량 집안의 노비였다. 어깨 너머로 한문을 배워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와『수호전(水滸傳)』을 즐겨 읽었다. 그가『삼국지연의』를 처음으로 듣게 된 것은 무순성의 장사 부호 동양성(冬養性)으로 부터였다. 동양성은 당시 제2의 제갈량이라 불렸던 사람으로 여진지리에 매우 밝았다.

이 무렵 누르하치는 ‘삼고초려’라는 고사도 처음으로 듣게 된다. 천하를 얻고자 하는 그에게 인재를 얻음에 있어 이 같은 교훈은 아마 머릿속 깊이 아로새겨졌을 것이다. 훗날 중국과 맞서 싸울 때 보여준 그의 지략은 천성적인 면도 있었지만, 이 두 소설에서 받은 영감이 컸으리라고 본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누르하치 자신은 지혜와 용기를 두루 갖춘 인물이었지만, 그에게는 총명하고 용감한 아들들과 조카가 있었다. 한 부족장의 지위는 결국 집안 내부의 튼튼한 뒷받침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누르하치가 거병 후 힘을 축적하고, 수많은 전투에서 승리한 데에는 수족과 같은 피붙이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희생이 뒤따랐다.

광활한 중국 대륙은 한시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 천하를 재패하고자 수많은 영웅호걸이 북방에서 일어나 대의(大義)의 깃발을 내걸었으나 대부분 실패했다. 우리 겨레의 광개토대왕, 거란족의 야율아보기, 여진족의 아구타, 몽고족의 칭기스칸 정도만이 이름을 날렸을 뿐이다.

누르하치는 이러한 영웅들의 성공과 실패의 발자취를 가슴에 담고 일어나 중국을 지배한 민족의 영웅이 되었다. 사실 여진족은 서주(西周)시대부터 수(隋), 당(唐)을 거쳐 송(宋), 요(遼), 금(金), 원(元)에 이르기까지 흥망성쇠를 거듭했다. 민족으로써 고난과 즐거움을 반복한 역사였다. 여진족에게 고통과 쇠퇴의 시기는 대부분이 내부에 분열이 있어 서로를 죽이고 다툴 때였다. 누르하치 등장시기에도 여진은 건주부(建州部), 해서부(海西部), 동해부(東海部), 장백부(長白部) 등 네 지역으로 갈라져 있었다.

건주부는 혼하(渾河), 소자하(蘇子河), 동가강(佟佳江) 일대에 살고 있었고, 해서부는 송화강의 서쪽, 요하의 동쪽에 살고 있었고, 동해부는 영고탑(寧古塔)의 동쪽에 살고 있었으며, 장백부(長白部)는 백두산에 살고 있었다. 누르하치가 속한 건주삼위만 해도 혼하부(渾河部), 완안부(完顔部), 동고부(董鄂部), 저천부(哲陳部), 소극소호하부(蘇克蘇護河部)의 다섯 부로 나뉘어져 있었다.

여진족은 광할한 여진의 초원 지대에 펼쳐져 살고 있었으나, 그 무렵까지 통합되지 못했다. 통합되지 못했으므로, 힘을 한 방향으로 끌고 나갈 수 없었다. 방향 없는 힘은 동족간 상잔으로 이어졌다. 여기엔 한족(漢族)의 교묘한 이간책이 크게 한 몫 했다.

 

 

<여진족의 분포>

그러던 차에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에 동북아시아에 거대한 변화의 소용돌이가 치기 시작했다. 임진왜란이라는 동북아의 큰 혼란을 틈타 고구려의 옛 터전인 여진 허투알라에서 건주여진의 후예로, 누르하치가 나타났던 것이다. 누르하치는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면서 스스로 군사력을 키워 독자적인 국가의 성립을 선언하게 된다. 이를 위한 과정으로 그는 엄밀한 군사적 제도를 마련했다. 엄격한 군기를 앞세워 소수민족인 여진족을 통합하고, 마침내 그 여세로 중원으로 나아갔다.

25세에 독립하여, 68세로 숨을 거둘 때까지 약 40년에 걸친 누르하치의 생애는 실로 눈부신 것이었다. 정복을 위한 전쟁으로 날이 새고, 해가 저물었다. 그의 정복전은 언제나 CEO가 앞장서는 친정(親征)이었다. 스스로 앞서서 나아감으로써 백성들이 따르게 했다. 여기에 바로 창업 CEO다운 그의 면모가 드러난다. 누르하치, 그는 분명, 시대를 앞섰던 사람이며, 동시에 21세기형 경영을 실천한 미래의 개척자였다. 

<아이신길로 누르하치(愛新覺羅 奴兒哈赤) 연표>

1559 가정(嘉靖) 38년: 누르하치 탄생

1577 만력(萬曆) 5년: 춘씨 가문에 데릴사위로 들어감

1583 만력 11년: 조부 교창가와 아버지 타쿠시가 구레성에서 전사, 누르하치 거병

1586 만력 14년: 원수 니칸 와이란 토멸

1587 만력 14년: 흥경(興京)에 구 노성(舊 老城) 축성

1593 만력 21년: 9국의 연합군 격파

1595 만력 23년: 명에 의해 용호장군(龍虎將軍)으로 봉해짐

1596 만력 24년: 조선 사진 신충일(申忠一)이 구로성 방문

1599 만력 27년: 에르데니와 가가이에게 명해 만주문자를 만들게 함(누르하치가 고안했다고도 함)

1603 만력 31년: 흥경 노성(老城)에 천도(허투알라성)

1613 만력 41년: 오랍부 정복

1615 만력 43년: 팔기(八旗)제도 완성

1616 천명(天命) 원년: 한(han: 王)에 오름

1618 천명 3년: 명에 7대한(七大恨) 천명. 무순성(撫順城) 공략

1619 천명 4년 : 사르후 전투. 엽혁부를 멸함. 후금국 천명황제 인(印)을 사용

1619 천명 6년 : 심양성(瀋陽城)  요양성(遼陽城) 공략

1625 천명 10년: 심양으로 천도(성경(盛京)이라 개칭)

1626 천명 11년: 영원성(寧遠城) 공격중 홍이포 파편을 맞고 부상당함. 심양성 외 23킬로미터 떨어진 애계보에서 사망

9월 1일: 태종(太宗) 홍타이지 즉위

 

ⓒ전경일, <글로벌 CEO 누르하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