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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스 오버를 필요로 하는 다중경력 시대

 

정보화 시대 이전까지만 해도 전공개념은 어느 정도 선을 긋고 있었다. 대학에서 일반 전공영역으로 치부된 문과대, 상경대를 제외하고 이공계, 예체능계, 의대 등은 주로 전공 분야별로 해당 사회의 산업군, 직업군으로 편입되어 들어갔다. 물론, 전공을 불문하고 이른바 대학 간판을 따기 위해 좀 더 지명도 있는 대학을 선택한 사람들도 부지기수였다.(이런 현상은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전공에 대한 관심이 낮다보니 이들이 상급 학교 진학을 통해 방향 잡은 분야는 주로 사회적으로 효용성이 높은 경영학 분야였다. 1990년대 이후 급성장한 경영학 전공 대학원이나, 각종 경영자 과정 교육 프로그램의 확산, 해외 MBA 학위자들의 급증은 이 같은 현상을 잘 보여준다.

 

특정분야에 대한 선호는 경제 경영적 마인드를 제고한 면은 있으나, 다른 분야에 대한 상대적 무관심, 소홀, 박탈감으로 나타났다. 전공에 대한 몰개념과 마찬가지로 한쪽으로 치우친 학문적 편식은 복잡한 경영 현상을 포괄적으로 해석해 내는데 그간 한계로 작용해 왔다. 서구가 학제간 연구를 통해 통합적 시너지에 학문적 지향을 하고 있을 때 우리는 기껏해야 복수전공 개념이 도입됐다.

 

전공에 있어서도 대학 선택시까지 구체적으로 어떤 학문을 하겠다는 생각보다는 막연한 전공 선호, 보다 나은 대학으로 가겠다는 기준이 지배적이었다. 현재의 입시 시스템은 자신의 뇌의 구조나 특성에 맞는 전공보다는 갈수록 힘들어 지는 경제 여건을 반영하듯 보다 유리하게 직장을 잡는 일로 자연스럽게 귀결되며 심각한 전공쏠림 현상까지 벌어지고 있다. 그들을 막는 건 관심이 아닌, 점수에 의해 정해진 학과, 계열 선택이다. 한국 대학에서의 상상력의 부재는 단순 지적 기능인을 키워 내는 식이지, 미래의 창조인으로 청년들을 키워 내고 있지 못하다. 엄연히 직장을 잡게 하는 게 웬만한 대학 교수들의 하나의 직무인 판에 이론과 현실의 차이라고 주장할 수 있겠지만, 이것은 우리 스스로 창조의 씨앗을 짓밟는 결과가 되고 있다.

 

기업이 단순히 경제경영 영역에 국한해 사업을 영위해 나가는 것이라면 모든 임직원을 경영학도로 다 채울 수는 있겠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 경제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타방면의 지식이 요구되고 있고(must requirement), 단순조립 공정상의 일이 아닌 한, 다양성은 가치 증진에 절대적으로 중요한 몫을 차지한다. 개인의 경력에 있어서도 단일경쟁력보다 복수경쟁력이 부각되고 있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과거와 달리 앞으로는 더욱 단일 경력으로 자신의 직업을 유지할 수 없게 된다. 개인들 역시 지속적인 자기계발을 통해 연관분야, 타분야와의 연계성을 모색하게 되고 그것이 실질 업무 성과에 효과적으로 대응하는 방식으로 인식한다. 이를 반영하듯, 새로운 경력을 찾거나, 다수 경력을 찾고자 하는 시도는 과거 어느 때보다 각광받고 있다. 한 개인이 지닌 크로스 오버는 여러 개의 지식, 경험을 보유하는 다중경력으로 자리매김 되며 복잡성의 경영환경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가는 인재형을 요구하고 있다. 조직도 변화적응력을 키우고 빠른 의사결정을 위해 조직구조를 수평적ㆍ평면적 조직, 네트워크 조직, 매트릭스 조직, 학습조직 등으로 변화시키고 있다. 다양한 경력, 직무 능력, 지식경험을 통해 다중경력을 확보하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전통적 경력경로와 네트워크 경력경로>

 

                                                          <도표1>                         (도표2> 

 

<도표 1>에서 보는 바와 같이 과거에는 자신의 전공을 통해 경력 경로가 진행되며 단일한 궤적을 밟아왔다. 심지어는 주로 인문, 경상계열은 직장 내에서 맡은 바 업무가 전공이 되기도 했다. 여기서 좀 더 진화한 모델이 복수전공으로 불리는 전공-부전공의 경우다. 예컨대, 사범대 전공자가 경영학을 부전공으로 하는 경우는 이미 일반적인 교과이수과정이 되고 있다. <도표2>는 과거에는 철저하게 개인적 영역으로 맡겨졌던(앞으로도 통섭형 자기계발이 진행되기에는 적지 않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며, 이를 위해서는 교육 시스템 전체가 뜯어고쳐져야 할지 모른다. 물론 사회적 합의도 선결과제로 남아 있다.) 다중경력이 기업 내 교육 프로그램, 직무 전환에 사용되고 있는 흐름을 예시하고 있다. 단일한 전공, 경력 유관 지식, 새로운 직무를 추가 배치함으로써 보다 생산적인 인재상을 구현한다는 얘기다. 물론 직무 순환 배치상의 효과를 노리는 인재교육 및 운영전략의 일환이다.

 

다중경력은 통섭형 지식과 궤를 같이 하고 있다. 다만, 그것을 고무하는 기업 내 활동은 적지 않은 저항과 비용의 문제라는 현실에 부닥칠 위험이 있다. 다중경력에 대한 관심은 지속적으로 높아져 이와 비슷한 의미로 프로틴 경력(protean career)과 무경계 경력(boundaryless career)이 제시되고 있다.

 

“프로틴 경력은 경력변화의 시간적 측면을 강조한다. 즉, 시간이 진행되면서 개인들은 지속적인 학습을 하고 이러한 학습의 과정에서 여러 단계에 따라 여러 개의 경력을 확보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반면, 무경계 경력은 공간적 개념에서 다중경력을 설명한다. 즉, 조직 내에서의 경력을 조직 간에서의 경력이라는 개념으로 확대한다. 하나의 조직에서만 경력을 갖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여려 개의 조직에서 경력을 동시에 확보할 수 있다는 점에서 다중 경력의 또 다른 측면을 설명한다. 다중경력은 한 개인이 다양한 복수의 경력을 시간과 공간속에서 확보하게 되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과거에는 하나의 조직에 포함되어 그 조직 내에서 경력의 이동과 계획에 따라 자신의 삶을 경영해야 했던 개인은 이제 스스로 자신의 경력을 경영하고 개발하는 주체적인 입장으로 변화되는 경력 상의 변화를 겪게 된다.“

 

그간 우리의 성장을 촉진시켰던 전공분야는 새로운 통섭의 시대를 맞이해 ‘묶인 지식’ ‘다발 지식’을 요구하고 있다. 장미꽃으로만 구성된 꽃다발이 아닌, 경영 생태계가 고스란히 반영된 수많은 꽃들이 묶인 꽃다지이어야만 한다. 죄뇌 기반의 사고는 이제 우뇌기반내지 좌우뇌의 결합형 직무, 직업으로 변하고, 통합되며 균형을 맞추어야 한다. 창의력, 직관력, 감각적 기능이 강조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디지털 분야는 좌뇌 중심에서 출발해 우뇌로 이동하고 있다. 고객과 참여자의 감성 가치를 높게 평가하는 것은 이런 배경에서이다.

 

창의력이 중시되는 시대에는 좌우뇌의 결합이 필요로 하고, 특히 통합분야에서 새로운 유형의 산업이나 직업이 창조될 것으로 보인다. 지적 경계가 무너지고, 무경계의 지식 생태계가 펼쳐지는 세상이 오고 있는 것은 우리 사회가 창조기반의 사회로 이전하고 있는 한 단면을 잘 보여준다. 이럴 때 지식 간 벽을 허물며(또한 지식을 대하는 사고의 편견이 해체되며) 통섭의 역량은 강화된다.

 

앞으로의 기업은 그간 파편화된 지식 유형의 직원들을 필요로 하기 보다는 지적 통합을 이뤄낼 인재들을 필요로 한다. 고도로 분석적이고 통찰력이 넘치면서도 감성적인 직원이야말로 고객의 이성과 감성 모두를 잡아낸다. 변화하는 고객의 인식과 감성 패턴을 읽어 내기 위해서도 경영자들은 감성능력을 보다 강화해야 한다. 전공에 정통하되, 인문학적ㆍ문화예술적 소양을 전공 수준으로 쌓아야 한다. 그럴 때 기업은 통섭의 힘을 경영에 반영할 수 있고, 개인도 다중경력을 갖춤으로서 미래형 경쟁력을 쌓을 수 있다. 미래를 이끌어 나갈 인재들의 역량을 배가시키는 것은 경영자의 본분이다. 경영자 한 사람이 지닌 품격 있는 취향, 지적 깊이, 다름과의 조화, 통섭 역량이 전체 조직의 역량을 결정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경영자의 성장은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인문경영연구소, 전경일 소장 

미래의 경력닻 내릴 곳 찾기

미국의 심리학자 쉐인(Schein)은 30년 전 ‘경력 닻(career anchor)이론’을 밝히며 개인들이 변화의 풍랑에 좌초되지 않는 무게중심을 가질 것을 강조한 바 있다. 어느 한 두 가지 주요 가치, 목적에 닻을 내림으로써 직업적 자기 정체성을 가질 수 있다는 얘기다. 그가 말하는 경력 닻 개념은 크게 세 가지로 구성된다. “자신의 재능과 능력에 대한 지각, 요구와 동기에 대한 지각, 조직과 삶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태도와 가치에 대한 지각이 그것이다.” 이러한 경력 닻 이론은 발전해 현재 8가지 유형으로 분류되고 있다.

1. 기술, 기능 역량의 닻 : 주로 일 자체에 흥미를 갖고 자기 역량의 기술적 내지 기능적 영역에서의 진보를 선호한다.

 

2. 관리 역량의 닻 : 정보가 부적하거나 불확실한 상황에서 문제 해결 내지 분석에 관심이 높다. 공통의 목표를 성취하기 위한 관리를 도전과제로 여긴다.

 

3. 안전, 안정의 닻 : 직무안정과 장기간 한 조직에 복무하는 것을 선호한다. 조직 가치와 기준에 잘 적응하며 변화가 잦은 직무를 기피하는 경향이 있다.

 

4. 사업가적 창의성의 닻 : 자신의 프로젝트를 통해 무언가를 창조하거나 얻어 내는 것을 즐긴다. 이 프로젝트에서 다른 프로젝트로 이동하는 것을 좋아하며, 완성된 무언가를 관리 하는 것 보다는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는데 더 흥미가 있다.

 

5. 자율, 독립의 닻 : 최대한 자유가 있는 작업 상황을 선호한다. 스스로 작업 일정을 계획하고 작업 속도도 스스로 조절하는 것을 원한다. 보다 많은 자유를 얻기 위해 승진의 기회를 기꺼이 포기하기도 한다.

 

6. 봉사, 헌신의 닻 : 세상을 개선하는 것을 추구하고, 사회를 돕는 것에 대해 자신의 가치와 작업 활동이 일치하기를 원한다. 기술보다는 가치에 맞는 직업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7. 순수 도전의 닻 : 장애를 극복하거나 해결되기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 관심이 높다. 일상적인 관행이나 업무로 인해 열정을 쏟을 수 없는 것을 참을 수 없어하고 한 가지 목적만을 추구한다.

 

8. 생활양식의 닻 : 자신의 일상생활과 직장생활간의 조화와 균형을 추구한다. 가족 우선의 가치와 지원 프로그램을 지닌 조직을 선호한다.

 

이런 경력 닻은 본질적으로 개인의 직무선호도를 보여주는 것으로, 조직의 관점에서 보다는 개인의 경력에 대한 의지를 반영하는 면이 있다. 따라서 개인의 경력 추구와 맞물린 조직성과의 향상은 상호연계 되어 있다. 경력 닻 이론은 인간이 가진 복잡한 지향성을 어느 한 두 가지로 국한하는 게 아니다. 대신 다양한 관점에서 어떤 가치에 주안점을 둘지 선택하는 문제라고 본다. 어느 분야에서건 경제활동을 하는 사회인은 현실적으로 자신의 선호도나 조건에 맞는 경력 닻을 내려야 한다. 즉, 자신의 욕구에 의한 경력 닻 보다는 시대의 요구에 맞는 닻을 내리는 것이 개인에게도 성취동기를 크게 부여할 수 있고, 기업에도 직무에 맞는 직원들을 뽑아 일을 맡길 수 있다는 얘기다.

 

이런 경력 닻은 다양한 개인 선호도를 반영하는 것이지만, 지금은 보다 복잡하고 중층적인 가치가 기업과 개인 간에 요구되고 있다. 물밀듯이 밀려오는 전 세계적 경쟁이 생존 자체를 위협하고 있고, 그러다보니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에서는 단순히 개인 선호도를 반영하거나 밀도 높은 경쟁을 피하려는 개인 의지에 쐐기를 박고 있다.

 

불과 30년 전의 개인 옵션 사항은 크게 위축되고 있다. 물론 어느 부분에서는 여전히 남아 있다고 하더라도 주로 비지니스가 이루어지는 경쟁 분야의 현실을 감안해 본다면 선택의 폭은 확연히 줄어들고 있다. 21세기 들어 기업조직 내 인재관에 대한 가치 변동이 급격히 진행되고 있는 것은 기술진보와 세계화에 기업이 결정적인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네트워크 조직의 강화, 다기능 전문가의 등장, 혁신·창조의 강화, 팀웍 중시, 자기개발의 강조, 수평적 관계의 확산, 직급 파괴, 팀제 확산 등은 경영에서 시대 변천사를 한 눈에 볼 수 있게 만드는 요인으로 ‘경력 닻’ 이론으로만은 다 설명하기 어렵다. 효율성과 효과성에 기반한 능력 및 성과주의는 단순히 업무 성과만을 바로메타로 해서 존재하지도 않는다. 그 보다는 보다 본질적이고 지속적인 가치를 창출해 내려는 욕구로 개개인들을 바라보게 한다.

 

이제는 과거처럼 맡은 바 업무를 충실히 수행해 내는 단순근로자 의식으로는 창조는 커녕, 현실의 장벽조차 뛰어넘지 못한다. 조직은 개인에게 경쟁력 차원에서 다차원적 가치를 지닐 것을 주문하고 있고, 이 대열에서 낙오하는 개인은 점차 설 곳이 없어진다. 다시 말해 만능형 인재상이 기술이 백업되는 시대에는 인간 고유의 능력으로 평가받고 있는 것이다. 특히 개인은 창의, 혁신, 비전, 가치, 생산성, 성장 등 다방면에 걸친 생존과 직결된 요소들에 경력 닻을 내리지 못한다면, 수시로 변화하는 경영현실에 쉽게 침몰하고 만다.

 

과거 어느 때보다도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는 개인은 엄청난 심리적 부담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육체노동자에서 지식노동자로의 전환이 대세라는 피터 드러커의 진단은 이제 지식노동자에서 전인형(全人型) 지식노동자로 개인 성장을 꾀하지 못할 때 성공과 발전의 조건이 날아가 버린다는 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각 개인이 지닌 경력은 복합적 구조를 띠어야 하며, 혼융될 필요가 있다. 이미 테크놀로지의 변화는 통신 기술과 가전 기술의 통합을 통해 가사노동에 대한 개념을 송두리 채 바꾸어 가고 있다. 지식조차도 단순 지식이 아닌, 정보로서 가치를 지니기 위해서는 해체와 재조립을 통한 새로운 부가가치가 부여돼야 한다. 경력 닻은 모든 닻을 내릴 수 있든 사람에게 어느 닻도 내릴 수 있도록 유도하고 있다. 만일 경쟁 환경을 도외시 한 채로 무풍지대에 닻을 내리고자 한다면, 거대한 쓰나미에 한 순간 휩쓸려 가고 말 것이다. 한 두 개의 닻이 아닌, 수십, 수백 개의 대안을 마련해 폭풍이 몰아치는 현실과 당당히 맞설 때 기업과 개인인 산다. 미래의 경력닻은 우리가 어디에 정박할지를 보여주며, 우리가 어디서부터 다시 항해를 시작해야 할지를 보여준다. 닻은 올리고, 돛은 펼쳐들면, 항해를 도우는 순풍은 불어온다. 

ⓒ인문경영연구소, 전경일 소장

 

동양평화의 보전

일본에 3대 사명이 있다는 것은 전술한 바와 같다. 그 중에서도 특히 동양평화의 보전은 가장 중대한 사명이다. 그러나 이 곳 동양만큼 평화가 흔들리기 쉬운 곳은 없다. 이곳에는 세계 저기압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중국이 있다. 그리고 그 부근에는 수많은 국부局部 저기압의 중심이 있다. 몇 년 전까지는 영일英日동맹이 있어 이 저기압을 어떻게든 진압하여 큰일로 번지지 않고 항시 무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제1차)세계대전의 결과 여기에 미합중국이라고 하는 대 고기압이 발생하였다. 그들은 힘이 있는 것을 무기로 빈번히 주변 국가를 압박하며 특히 동양의 대 저기압인 중국을 노리고 단번에 커다란 야심을 채우려 한다. 그들은 야심을 채우는 첫 단추로써 오랫동안 동양평화를 보장해왔던 영일동맹을 폐기시키고, 황금을 뿌리며 중국의 민심을 선동하여 일본에 반기를 들도록 부추기고 있다. 또한 중국의 국내통일을 방해하는 한편 국제연맹의 규약과 부전조약, 9개국 조약 등을 통해 이중 삼중으로 굴레를 씌워 일본의 손발을 묶고, 그 사이에 자신들의 야망만을 마음껏 채우려 하고 있다. 이 후 동양의 정세는 계속 악화되어 왔다.

중국은 열국이 간섭하지 않자 신이 나서 불법적 횡포를 자행하며, 밖으로는 외세배척 운동에 광분하고 안으로는 군벌의 사투가 끊이지 않아 동양의 평화는 완전히 깨져 버렸다. 이러한 때에 자국의 사명을 충분히 자각하지 못한 일본의 태평한 정치가들은 스스로가 동여맨 연맹규약, 부전조약, 9개국 조약 등에 발이 묶여 움직일 수조차 없는 상태가 되었다. 인식이 부족한 중국은 앞뒤 전후 생각지 못하고 그저 다른 나라가 부는 피리소리에 춤이나 추며 일본을 배척하고 모욕하고 있다. 그러던 중 1931년 9월 18일 중국 선양瀋陽의 류타오후에서 만주철도 파괴사건이 일어나 일본도 더 이상은 참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일본군은 분연히 일어나 일본배척의 원흉인 장쉐량을 무찌르고 난징南京 일파가 상하이에서 항전하며, 질풍노도와도 같이 군함과 폭격기를 파견하여 하룻밤 사이에 상하이의 환락지를 초토화시켜버리면서 일본을 깔봐선 안 된다는 기개를 보여주었다. 이제 일본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한계에 다다랐다. 국제연맹이든 9개국이든 동양평화를 흐트러뜨리는 그 모든 것을 우리의 자위권으로 무찔러야 한다. 치치하얼齊齊哈爾 지역도, 후룬베이얼呼倫貝爾 지역도, 러허熱河지방도, 마잔산馬占山 장군도, 쑤빙원蘇炳文 장군도, 탕위린湯玉鱗 주석도 순식간에 평정하여 이듬해 3월 9일에는 신만주국이 지평선상에 우뚝 서게 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후버 대통령도, 스팀슨 장관도, 맥도널드 장군도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백 가지 위협도 천 가지 간계도 사명으로 우뚝 선 일본을 어찌할 수 없었던 것이다.

국제연맹은 미국을 옵서버로 하여 대일본정책을 구상하고 마침내 리턴 경을 중심으로 한 리턴조사단을 동양에 파견하였으나 열국의 이해를 대표하는 이기주의자들이 공평한 판단을 할 수 있을 리가 만무하여, 결국 42대 1의 결과로 일본은 연맹을 탈퇴하게 되었고 올(편역자주: 1933년) 3월 27일에 이를 연맹에 통보했다. 이제 일본은 연맹에서 나와 고립의 영광 아래서 신만주국을 구하고 혼자의 힘으로 동양평화를 유지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걸로 문제가 끝난 것이 아니다. 아니 앞으로가 진정한 시작이다. 집착이 큰 앵글로색슨 민족이 만든 국제연맹이 이 정도로 물러나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예상대로 맥도날드는 오타와 협정을 만들어 전 영국 영토를 연합하여 일본을 경제적으로 봉쇄하려고 책략하여 동양에 대한 무기수출금지, 일인日印통상조약 파기, 일아日阿통상조약 파기를 비롯하여 일본상품을 배척하려고 관세 장벽을 높이거나 네덜란드령 인도차이나에도 이를 사주하는 등 일본 경제를 무너뜨리려고 혈안이 되어 있다. 또한 미국에서는 루즈벨트와 스완슨이 한꺼번에 2억3천만 불의 거액을 투자하여 30여 척의 군함거포를 만들어 군사적으로 일본을 위압하는 동시에, 러시아에까지 접근하고 있다. 이런 정세 속에서 이이제이以夷制夷 주의가 정치외교의 요체라고 여기는 중국이 얌전할 리 만무하여 장기 항일, 강력한 협조거부 등을 외치며 소란을 피우는 것에 대해서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이제 연맹탈퇴의 효력이 2년 후(1935년 4월)에는 완료될 것이고 남양 위임통치 문제, 런던 군축조약의 만기(1936년 4월) 등이 눈앞에 닥쳐있음을 생각할 때, 동양의 앞날을 애타하지 않는 자는 일본의 남아男兒라 할 수 없다. 비유하자면 지금의 일본은 고작 1천의 소병으로 곤고산金剛山의 치하야성千早城에 들어가 89만의 북조군을 상대로 천하를 다투던 무장 구스노키 마사시게正成의 처지와 같은 처지이다. 무기는 어떻게 하고 식량은 어떻게 할 것인가. 삼척동자도 백 살 먹은 노인도 모두가 각오를 다져야 하는 비상시국을 맞게 된 것이다.
참고: <경성천도: 도쿄의 서울 이전 계획과 조선인 축출공작>





광개토경영의 핵심은 벡터와 점선면 전략

새해 벽초부터 중국이 그간 추진해 온 동북공정의 완결판으로 고구려사는 물론 발해사까지 중국사로 둔갑시켜 버리고 있어 한중간 갈등이 재점화될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때에 우리 역사상 가장 큰 영토와 강력한 국력을 자랑하던 광개토태왕 시기의 국가 경영이 큰 주목을 받고 있다.

태왕은 어떻게 그 엄청난 영토를 확장해 나갈 수 있었을까? 태왕 전략의 핵심은 무엇이었을까? 이 점을 알기 위해서는 우선 태왕이 태어나 활동하던 시기에 대해 알아 볼 필요가 있다. 광개토태왕은 서기 374년 출생하여 392년 5월 고구려의 제19대 국왕으로 즉위한다. 즉위 시 그의 나이는 불과 18세로 소년왕이었다. 왕제(王弟) 시절에는 군중(軍中)의 한 장수에 불과했으나, 태왕이 왕이 된 배경은 강력한 주전론으로 중국에서 일고 있는 세력들과 싸워 국가를 지켜야 한다는 공감대가 현실적 요구로 작용하였기 때문이다.

태왕이 즉위할 무렵 국제정세는 극히 혼란에 혼란을 거듭하고 있었다. 전진이 멸망한 이후 후진, 후연, 서진, 후량 등이 중국의 북방과 서방에서 세력을 확대하고 있었고, 남방의 맹주인 동진은 꾸준히 영토를 확장하며 신진세력들과 다투고 있었다. 한반도에서는 5세기에 접어들며 삼국 간에 전쟁과 화친이라는 양 국면이 동시에 진행되어 백제는 산동과 요서 지역을 차지하며 한편으로 가야와 왜를 끌어들여 연합세력을 형성해 고구려에 대항하고 있었다. 황해중부의 해상권을 완전 장악하기 위해 북방진출을 꾀한, 언필칭 백제의 팽창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때에 태왕은 국왕의 자리에 오르게 되는 데 태자시절부터 백제와 연(燕)을 상대로 전투에 참가하고 지휘한 경험은 그가 훗날 3군을 통솔하여 친정(親征)하는 배경이 된다. 그리하여 태왕은 재위 20여년 만에 광대한 대제국을 이룩하며 정복(外征)군주로서 팍스코리아나의 리더가 된다.

태왕이 이룩한 성취는 그 이름에 잘 나타나 있는데 태왕이라 함은 왕중왕(王中王)을 뜻하는 말로 중국의 황제에 해당된다. 광개토경평안호태왕이라는 긴 이름도 고조선의 고토를 회복하는 것이 절대사명이었던 고구려인의 역사적 책무를 태왕이 외정(外征)을 통해 완성하고 백성들을 평안하게 다스렸다는 탁월한 경영 성과가 반영된 것이다. 광개토경을 확보함으로써 고구려가 더는
변방의 나라가 아닌, 세계의 중심임을 선포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태왕 시기 고구려 확장의 주요 요소는 무엇일까? 우선, 중국의 분열을 들 수 있다. 국가나 기업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환경적 요인이 친화적으로 작용할 때 내재된 역량이 더욱 힘을 발휘하는데 당시 중국의 분열은 고구려 성장의 밑받침이 된다. 일테면 오늘날 약진을 거듭하고 있는 구글의 성장이 야후의 인수합병 실패와 구글 키워드 광고의 특허권을 가지고 있는 오버추어(Overture)를 뒤늦게 인수함으로써 구글이 키워드 광고 시장에 진출할 기반을 제공한 것과 일맥상통한다. 그만큼 국세가 크게 일어난 데에는 상대적 요인이 크게 작용한다.

여기에다가 급변하는 동북아 변화를 예리하게 통찰하고, 신속한 행동으로 기회를 획득한 태왕 리더십이 크게 작용한다. 이를 통해 고구려는 국제무대에서 막강한 비중을 차지하며 주도적이고 능동적으로 대약진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동북아 국제정세의 환경을 만들어 내는 주역이자 대륙의 운명을 결정짓는 주체로 자리매김되었던 것이다. 압록강 중류유역에서 거친 땅을 기반으로 보잘 것 없이 출발한 고구려가 드넓은 영토를 확장해 가며 천지사방으로 뻗어 가는 대제국이 된 것은 이 때문이다.

그렇다면 광개토경영을 이뤄낸 태왕의 리더십의 핵심은 무엇일까? 그것은 힘과 방향을 모아 벡터, 즉 지향점을 한곳으로 모아가는 경영을 한 점이다. 태왕이 설정한 지향점은 대륙경영이자, 제국을 이루는 것이었다. 지정학적으로 고구려는 매우 불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강대국과 힘이 맞부딪치는 접점에 있어서 늘 불안했고, 고구려 지명에 왕왕 드러나는 홀(忽)이라는 명칭처럼 협곡이 많았다.

모든 상황은 불리했지만, 태왕은 이런 불리한 여건을 오히려 유리하게 전환하는 역발상의 기회로 삼았다. 마치 오늘날 기업 경영에서 환경을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국가나 기업의 위상이 달라지는 것과 같다. 예컨대 오늘날 많은 선진 기업들은 세계 시장을 무대로 활동하며 불리한 조건을 유리한 국면으로 전환시키고, 기반 기술이나 상품을 개발해 이를 전 세계 시장을 겨냥해 확대해 나간다. 글로벌 시장은 본질적으로 강자들이 명멸하며 시차적으로 출몰하는 다이내믹한 무한 경쟁 공간인데, 이 시장을 공략해야만 새로운 판로를 개척하게 된다.

태왕은 전통적인 육지 위주의 질서를 기본으로 하면서 한편 새롭게 성장하는 해양적 질서를 수용하는 복합적인 전략을 구사했다. 또한 광개토제국을 이루기 위해 점, 선, 면의 전략를 취했다. 군사지역인 영(營)을 점으로 하고, 정복지를 따라 뻗어가는 공격선을 따라 점선과 선을 잇고 정복한 지역의 촌(村)을 기본으로 면지배를 구사했다. 고구려 사회가 식량공급원이자, 동시에 방어 목적으로 요충지마다 성을 세운 것은 이 때문이다. 이를 통해 태왕은 무한확장의 천하경영을 이루고 제국을 통치했던 것이다. 고구려제국의 중흥을 통해 우리가 벤치마킹할 수 있는 게 있다.

기업이 한 방향으로 집중해 가며 동시에 점선면 전략으로 기존의 성과를 지키고 사업 영역을 확장하는 전략을 수행하는 것이야말로 제국경영의 전략이라는 점이다. 경영자라면 글로벌 위기가 거세질수록 그 이면에 잠재된 기회의 요인을 면밀히 읽을 수 있어야 한다. 위기를 기회로 전환시켜 오히려 가장 강대한 제국 만들기에 나섰던 광개토태왕의 경영정신이 오늘날 경영자들에게 던지는 메시지가 바로 이것이다.#

ⓒ인문경영연구소, 전경일 소장

* 이 책은 1933년 일본 제국주의자가 저술한 책의 편역본으로, 시대상 및 관점이 일본 군국주의자의 시각을 철저하게 반영하고 있다. 오늘날 일본의 극우주의적 뿌리를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싣는다. 역사를 징비하고 경계하는데 참고자료가 되리라 믿는다.


1절 제국의 운명과 사명
인생에는 우리의 힘으로 자유롭게 좌우할 수 있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이 있다. 우리의 힘으로 자유롭게 좌우할 수 없는 것을 운명, 숙명 또는 사리의 필연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범인凡人의 힘으로는 좌우할 수 없는 것도 위인호걸의 힘으로는 좌우할 수 있는 경우가 있다. 소위 ‘불가능이라는 말은 어리석은 사람의 사전에만 있다’고 갈파했던 나폴레옹의 명언이 바로 그것이다. 개인의 힘으로는 좌우할 수 없는 일도 전체의 힘을 이용하면 좌우 할 수 있다. ‘세 사람이 모이면 문수보살의 지혜가 나온다’는 말도 그런 뜻이다.

작은 단체의 힘으로는 좌우할 수 없는 일도 국가의 힘을 모으면 좌우할 수 있는 경우가 있다. 또한 한 국가의 힘으로는 좌우할 수 없는 일도 몇 개 국가의 힘 또는 세계 전 인류의 힘으로는 좌우 할 수 있는 경우가 있다. 또한 인력으로는 평상시 좌우할 수 없는 일도 이상시(즉 비상시의 비상력, 신비력, 초인적 기력, 호연지기)에는 이를 좌우할 수 있는 경우가 있다. 결국 운명 또는 필연이라 하는 것은 상대적인 말에 지나지 않는다. 즉 운명이라는 관념은 사람에 따라 달라지고, 개인과 전체에 따라 달라지며, 평상시와 이상시에 따라 다르다. 그런고로 운명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행복을 불러오는 것으로 이를 행운 또는 순운順運이라고 하며, 다른 하나는 불행을 가져오는 것으로 이것을 불운 또는 역운逆運이라고 한다. 행운은 그를 통해 의식적으로 복리를 추구하면 한층 더 높은 효과를 볼 수 있고, 불운의 경우는 인력으로 최선을 다해 이를 배격하여 행운으로 바꾸는 것도 결코 불가능하지 않다. 소위 전화위복은 세상살이의 기본으로, 사람을 죽이는 살인도가 사람을 살리는 활인검이 되는 일이 다반사이다. 때문에 운명에 대처하는 길은 이를 먼저 알고 예지하는 것이 최선이다. 이를 예지 달관하여 그에 따라 우리의 태도와 방침을 결정한다면 실수 없이 앞날에 대처할 수 있게 된다. 이처럼 운명을 예지 달관하여 대성공(행운인 경우)으로 이끌거나 배격(불운인 경우)하고자 할 때, 그러한 결의를 우리는 사명 또는 천직이라고 한다.

인생의 가치는 각자에게 주어진 사명 또는 천직을 예지 달관하여 제 임무를 수행하느냐 마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마찬가지로 국가의 흥망성쇠도 그 사명 또는 천직을 국민들이, 그 중에서도 특히 위정자들이 스스로 배워 수행하느냐 마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한 나라의 정치, 경제, 문화, 사명을 예지 달관하는 것은 그 국가의 지식인이나 지도자에게 가장 필요한 일이다. 앞날을 읽지 못해 부질없이 우민을 선동하거나 혹은 매수하여 일을 추진하는 것은 백해무익할 뿐 아니라, 결국에는 국운을 가로막아 각종 불상사를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

30여년 전 세계의 예언자들은 ‘20세기는 태평양의 시대’라고 하였다. 지금 그 20세기도 마침내 3분의 1 지점을 넘어 이제 1934년을 맞이하려 하고 있다. 이러한 시기를 맞아 제국의 앞날을 생각하매, 여기에 커다란 세 가지 사명이 있다 하겠다. 즉 동양평화의 보전, 동서문화의 융합, 동아시아 부원富源의 개발이 그것이다. 그것들을 차례로 따져 보겠다.

1. 동양평화의 보전

일본은 아시아주의 유일한 독립강국이다. 주변에서는 피폐함과 고달픔에 시달리는 약소민족들이 구원을 요청하고 있다. 만일 일본이 철저히 이기주의적 태도를 취해 중국에 대해서도, 만주에 대해서도 ‘타국의 일이니 일본정부는 상관할 바가 아니다’라며 방임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이는 마치 옆집에 불이 나거나 전염병이 도는데도 ‘남의 일이니 끼어들지 말아야지’하며 모른 체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얼마 안가 비슷한 종류의 액운을 맞이하게 될 것이 뻔하다. 청일淸日전쟁도, 러일露日전쟁도, 독일獨日전쟁도, 또한 만주사변과 상하이사변도 모두 동양평화를 보전하기 위함이었다는 것은 모든 뭇사람들의 견해이다. 이는 피하려 해도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일이다. 하물며 지금은 이 보다 더 중대한 난관이 닥쳐오고 있다.

우치다内田 외상은 “국가가 초토화된다 해도 만주滿洲국의 독립을 지지한다”고 단언하였다. 이처럼 동양평화 문제는 분명 일본의 사활이 걸린 문제이다. 더 이상 피할 수 없다면 사전에 충분히 조사하여 동양평화를 위한 방책을 확립하고 적어도 그에 해가 되는 것을 엄중히 단속하여야 할 것이다. 또한 사태가 불거지기 전에 필요한 모든 조치 공작을 취해 놓는 것이 현명하다 하겠다.

전술에 공격적 방어라는 것이 있다. 동양평화의 보전을 위해서는 항상 예민한 의식을 유지하여 화근의 싹을 잘라 행복의 꽃봉오리를 키워가야만 한다. 이것은 자위권自衛權 발동이며 국제법에서도 충분히 승인된 부분이다. 그런데도 앞날을 예견하지 못하고 눈앞의 안락을 위해 평화만을 바라며 국가의 중대 사명을 잊은 듯 행동하는 자들을 생각하면 유감천만이 아닐 수 없다. 예를 들어 인종차별 철폐를 관철하고자 국제연맹에 들어간 일, 이시이 랜싱 협정을 폐지하고 9개국 조약을 맺은 일, 부전조약不戰條約 및 군축회의에 무조건적으로 들어간 일 등이 그것이다. 특히 최근 중국의 배일排日교육이나 일본상품 배척을 방치하여 그들이 일본을 경시하고 모욕하는 태도를 갖게 한 것은 전부 외교의 책임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결국 만주사변이 어쩔 수 없이 일어난 일이 아니라 모두 정치가가 제국의 사명을 제대로 알지 못해 일어났다는 뜻이다. 그러나 과거는 과거로 묻어두기로 하자. 다만 앞으로는 두 번 다시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2. 동서문화의 융합

동양문화와 서양문화는 그 성질이 전혀 다르다. 동양인은 서양인을 오랑캐로 보고, 서양인도 동양인을 열등하다고 생각하며 귀화할 수 없는 유색인종으로 차별대우한다. 세계의 앞날에 있어 가장 큰 화근은 바로 이 인종적, 문화적 차별관에 있다. 그리스도의 사랑도 마르크스의 변증법도 이 문제만은 여전히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결국 이 난제를 해결하기 위한 임무는 일본에게 있다 하겠다. 왜냐하면 일본은 한편으로는 동양문화의 대표자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서양문화의 대표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일본은 동서양의 중간에 서서 이지적 또는 감정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지위에 있다. 이 역시 피할래야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반드시 적극적으로 나서 알렉산더 대왕이나 쇼토쿠 태자의 위업을 완성해야만 할 것이다. 이제 서양류의 물질문화도, 동양류의 정신문화도 모두 갈 곳을 잃었다. 지금 전 세계는 우리의 앞길을 비춰 줄 신문화의 출현을 학수고대하고 있다.


3. 동아시아의 개발

일본은 인구가 많고 국토가 좁기 때문에 주변의 부원을 개발하여 그 부를 이용하지 않으면 생계를 꾸려나가기 어렵다. 주변이란 즉 태평양을 말한다. 지금 세계의 부원은 거의 다 개척되었고 오직 태평양 주변만이 남은 상황이다.

그 중에서도 미국, 하와이, 캐나다, 호주 등 유망한 부원은 모조리 그 문호를 폐쇄하여 우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이제 남은 곳은 제국의 대척점에 있는 남미 일부와 소위 우리의 생명선이라 할 수 있는 동아시아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두 곳, 특히 가까운 곳에 있으면서 우리의 보호의 손길이 충분히 닿는 동아시아 개발에 전력을 쏟아야 할 것이다. 이것은 제국의 일대사명이 아닐 수 없다.

이 밖에도 일본이 달성해야 할 일은 얼마든지 있겠지만 가장 중대한 세계적 사명은 바로 이 세 가지이다. 그리고 이 3대 사명이 각각 별개가 아니란 것 또한 두말 할 필요가 없다. 서로 어우러져 제국의 국시國是를 이루고 국책을 이루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만 행하고 다른 것을 버릴 수는 없다. 그러나 경중을 따지자면 아무래도 동양평화의 보전이 가장 근본이며 이를 이루지 못한다면 일본의 독립은 무너지고 국가로서의 존립도 어려워진다. 그렇기 때문에 제국은 여기에 7할의 힘을 쏟아야만 한다. 이를 위해서는 고립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아니, 국가가 초토화 된다고 해도 단행해야만 한다. 옛날 그리스도는 ‘주 우리를 먹이시사, 생명을 얻는다’고 했다. 사명을 자각하고 이에 대한 태도를 결정하면 천하에 그 보다 강한 자가 없으리라.

몰아쳐라 폭풍이여, 우리는 두렵지 않다. 춤춰라 파도여, 우리는 흔들리지 않는다. 지금은 국가의 비상시이다. 이러한 때에는 생사를 가리지 않고 명리를 버려 비상력을 발휘하는 것이 우리의 진정한 숙명이며 사명이다. #


80년간 봉금서封禁書! 국내 최초 완역본 출간 서문에 붙여

일제가 조선을 합병 한 후 23년 지난 1933년, 서울 경성제국대학(현 서울대학교) 앞에는 흥아興亞연구소라는 특수 목적의 조직이 비밀리에 꾸려진다. 서울대학교 앞에 이 연구소가 특별히 세워진 이유는 아직도 비밀에 붙여져 있다. 연구소의 수장 도요카와 젠요豊川善曄는 이곳에서 본격적으로 일본 제국주의의 팽창책의 일환으로 이 1급 문건을 작성한다.

이 비밀 작업은 일본의 수도 도쿄東京를 서울로 이전시켜 만주와 일본열도를 잇는 거점이자 대동아공영권의 중추로써 한반도를 영구 지배하려는 야심찬 공작 차원에서 추진된 것이었다. 일본 제국주의의 항구적 대륙경영을 위해 ‘일본과 만주의 통제공작에 화룡정점’을 찍으려는 계획 차원에서 벌어진 거대 음모였다. 이뿐만이 아니다. 보고서를 통해 도요카와는 한반도 영구 지배를 위한 한만韓滿경제 침탈의 마스터플랜까지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오늘날 자유무역협정(FTA)을 연상케 하는 ‘일만日滿경제블록’을 만들자고 주장하는 것이다. 나아가 800만 조선인을 조선반도 밖으로 내쫓고 800만에 달하는 일본인을 이주시켜 일본 영토화 하는 강제 이주 계획을 구상하고 있다.

이 책<경성천도京城遷都-도쿄 서울 이전 계획과 조선인 축출공작>은 만주와 한반도를 아우르는 대동아공영권을 목표로 일제가 대륙 침략을 더욱 가열차게 벌여 나갈 것을 주문하고 있다. 그러면서 저자는 일본 정부가 만주와 조선에 이민 정책을 쓰고 있지만 더 나아가 도쿄를 서울로 이전시키지 못하는 것에 대해 “일본의 대륙경영이 이토록 부진하게 끝나는 것인가”라며 신랄하게 비판을 가하고 있다. 맹렬한 일본 제국주의자의 침략주의적 사고를 낱낱이 살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도요카와는 일본 제국주의가 더 크게 식민지를 확보하지 못하는 이유를 대륙을 향해야 할 제국의 수도인 도쿄가 영국 런던처럼 대륙을 등에 돌리고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그로 인해 국력이 뻗어나가야 할 방향과 맞지 않아, 극동의 모든 공작을 지도하기에 불리한 상황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태평양과 중국 만주를 동시에 통제하고 지배하기 위해서는 조선의 서울로 수도 이전을 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일본 도쿄와 만주 지린吉林의 중간지점으로 대륙과 해양 모두를 총괄할 수 있는 요지로 서울을 적지로 지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며 그는 “극동을 지배하는 자가 태평양을 지배한다”며 경성으로 천도를 단행하여 극동을 지배할 때 미국과 맞서 서태평양 제패가 가능하다고 강력 주문하고 있다.

이와 같은 논리에 힘입어 일본은 1905년 조선에 대해 일본의 종주권을 인정하는 대신 미국의 식민지인 필리핀을 침략하지 않겠다는 미국과 일본이 맺은 ‘태프트-가츠라 밀약’을 폐기하고 마침내 1941년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게 된다. 도요카와의 주장과 예언이 맞은 것이다. 이는 일본 제국주의가 태평양을 거쳐 극동을 완전 지배하고 영구 장악하려는 계획에 다름 아니었다. 극동 지배와 서태평양의 지배야말로 일본이 역사적으로 꿈꾸어 온 위업을 완성하는 역사적 임무라고 도요카와는 강조하고 있다. 나아가 극동방위의 첫걸음인 후방기지 선정을 발판 삼아 자급자족적 경제블록을 실현하는 것이야말로 천황 중심의 일본을 되찾는 첫 지표라고 당당히 제국주의자다운 포부를 밝히고 있다.

이 책에서 그는 ‘극동점거론’, ‘경성천도론’, ‘잘못된 도쿄 수도제 문제’ 등을 주장하며 극동은 자연스런 자급권ㆍ자위권ㆍ문화권이며, 조선반도는 이러한 극동의 통합지점이자, 일본 민족의 마음의 고향이라고까지 추앙하였다. 따라서 조선을 영구 지배하기 위해서는 ‘대아세아연맹大亞細亞聯盟’ 결성이 반드시 필요하다며 적극적으로 나설 것을 촉구하고 있다. 일본 침략의 거대 음모와 계획이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는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오늘날 FTA를 연상케 하는 ‘일만日滿경제블록’을 만들어 일본 경제를 완전히 한반도와 만주에 착근시킴으로써 경제 근간조차 완전히 식민지 상태로 만들겠다는 침략적 의도를 뚜렷이 밝히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일본의 조선 침탈이 가속화된 것은 1875년 운양호 사건과 이를 이은 1876년 강화도 조약으로 일본의 상품이 무관세로 쏟아져 들어오며 조선 경제가 완전히 초토화된 데에 있다. 이미 78년 전, 오늘날 FTA과 같은 제국주의적 경제 침탈이 구체화 되어 나타났던 것이다. 이 점에서 오늘날 자유무역 협정이 가져올 후폭풍에 대한 우려는 결코 과거의 역사적 사실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이 책은 일본 제국주의가 최고조에 이르던 때에 일제의 침략논리가 어떻게 변화해 갔는지 살펴볼 수 있는 대단히 유용한 자료이다. 일본이 한반도를 영구 지배하기 위해 수도를 한반도로 옮김으로써 대륙 침략을 공고히 하는 공작에 몰두했고, 내선일체를 통해 궁극적으로 한국인을 없애버리려는 음모를 꾀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반도에 사는 조선 민중 800만 명을 만주로 이주시켜 버리고 대신 일본인 800만 명을 조선에 이주시켜 완전한 극동 지배, 조선 지배를 관철시키고자 한 것은 그들이 구상한 조선 지배가 얼마나 철저한 계획 속에서 진행된 것인지를 알게 한다. 이 점을 강조하기 위해 도요카와는 “한민족은 4천년 동안 조선반도에 거주해 왔을 뿐 지금까지 이곳을 지배했던 적이 없다”고 단언까지 하고 있다. 또한 한반도가 일본 영토라는 억지 주장을 스스로 맹신하고 있기까지 하다. 따라서 일본이 조선을 식민 통치하는 것은 극히 당연하다는 주장이다.

이 책은 단순히 7, 80여년 전 한 전쟁 미치광이가 작성한 몽상적 보고서가 아니다.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일제는 식민 지배를 위한 치밀한 연구에 몰두하였으며, 오늘날 우리의 인식을 뛰어 넘는 조선과 중국에 대한 역사적 연구와 분석 작업을 수행하였다. 해양, 지리, 지질, 역사, 풍속, 문화, 군사, 일본 및 국제 정세에 대한 해박한 지식은 지금 생각해도 놀라움을 자아낸다. 나아가 구체적으로 한반도와 만주 침탈의 마스터플랜까지 제시한다는 점에서 식민지 계획의 전모를 파악하게 된다. 광포한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 지배가 무력에 의한 학살 통치뿐만 아니라, 구체적이고 집요한 연구 속에서 정교한 학술적 성과를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연구가 제국주의의 거대한 사상괴思想塊를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몸서리쳐지는 전율마저 인다.

오늘날 한반도가 처한 상황은 여러 면에서 일제 침략기와 크게 다를 바 없다. 당시 제국주의 열강의 무력 침공은 무관세 경제 교역 강요로 한반도 경제를 초토화 해 버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 점에서 오늘날 FTA가 가져올 우려스런 후폭풍과 자연스럽게 중첩되기도 한다. 또한 일본 자위대의 해외 파병을 공식화한 2002년 일본⟨유사법제⟩는 독도 영토 침구의 가능성을 제공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본 군국주의의 부활의 조짐으로 읽힌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일본의 극우주의적 행태는 근대 일본 제국주의가 거침없이 팽창해져가는 상황과 많은 점에서 유사성을 보이고 있다.

필연코 역사에서 불변의 법칙 중 하나는 반복성에 있을 것이다. 식민 족쇄를 채우려 했던 저들의 교묘한 책동을 파악하려는 노력이 부재하다면 역사를 대하는 현재의 의미는 저감될 우려마저 있다. 이 같은 차원에서 일제의 침략이 얼마나 치밀하고 정교했으며, 완벽주의를 추구하고자 했는지 아는 것은 우리의 대왜對倭 대응 태세에 큰 몫을 차지할 것으로 본다. 이 같은 취지로 일본을 알고 대비하는데 적잖은 교훈을 줄 것으로 판단해 78년간 실질적인 봉금封禁상태에 묶여 있던 제국주의 침략을 위한 이 비서秘書를 번역 출간한다. 오늘의 현실을 돌아보는데, 큰 교훈을 줄 수 있을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2012년 1월

출간에 도움을 준 이들을 대표하여

전경일


역사는 냉철한 시선으로 바라볼 때 교훈을 얻는다. 일시적 분(憤)에만 사로잡히거나, 상대의 존재를 부정하고 외면하는 것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적이 미울수록 적에 대한 본능적 거부 반응만 보인다고 될 일도 아니다. 우리가 일본에 대한 ‘혐오(嫌惡)’가 부족해 오랜 시간 왜(倭)의 침략을 받아왔고, 근현대사에 이르러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고 뒤쳐진 게 아니다. 한․일사는 우리 역사의 한 축과 뗄래야 뗄 수 없는 ‘왜구’의 존재를 보다 명확히 꿰뚫어 볼 때 그 전모를 파악할 수 있다. 왜구와 일본의 연결성을 알 때 대응책도 찾을 수 있다.

쓰디쓴 자기비판은 냉혹한 역사 현장에서 살아남기 위한 전제조건이다. 조선은 임진왜란을 겪었지만 그 후 300년을 공상 속에서 위안 받고, 주관적 우월성에 빠져 구한말 합방의 비극을 맞이했다. 우리에게는 치가 떨리도록 악행을 저지른 왜구조차도 우리의 강토를 900여회나 침범한데에는 그들 나름의 강점요인이 있을 것이다. 그러기에 적을 알고 나를 아는 지피지기(知彼知己)의 자세는 이 민족의 생존 조건을 튼튼히 하고, 미래를 사는 지혜를 얻는 첩경이 된다. 오랜 시간 끈질기고 주도면밀하게 한반도를 계속 침구해 온 왜구로부터 배운 게 없다면, 우리는 뭐가 잘못돼도 크게 잘못된 것이다. 우리에게는 역사적으로 전시대를 통괄해 북방의 외적(外敵)과 남방의 왜구(倭寇)가 상시적이며 고질적인 난제로 작용해 왔다. 앞에서는 이리떼가 달려들고, 뒤에서는 여우떼가 물어뜯는 형국이었다. 한국과 일본 간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침구의 현재성’은 이 같은 사실을 극명히 보여준다.

한반도가 속한 동아시아의 역학적 지형도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다. 이 지역은 공존만큼이나 치열한 대립이 우선되었다. 우리는 일본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진 듯하나, 기실 일본의 행태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단지 ‘학습된 증오’나 막연한 동경내지 무관심으로나 일관할 뿐이다. 다른 한편, 오늘날 한국의 사대 보수주의자들처럼 투항적, 기회주의적, 의존적 태도마저 보이는 면도 분명히 있다. 이런 생각과 자세로는 일본의 본질을 간파할 수 없고, 일본의 재침을 겪지 말라는 법 없다. 백주대낮에 서울 한복판에서 일본 군국주의의 상징인 자위대 창설 기념행사가 벌어지고, 전범(戰犯) 일족인 일왕(日王)의 생일축하연에 참석하는 정치인과 기업이 줄을 서는 나라가 이 나라이다. 전범 일족인 일왕을 ‘천황’으로 높이는 굴욕적 행태를 어떻게 꾸짖어야 하는가? 이 참담한 현실을 어떻게 바로 잡을 것인가? 오랜 구원(舊怨)에 대한 만족스런 사과와 미래를 동반하기 위한 일본의 참회와 해법 없이 일본을 어떻게 ‘가까운 이웃’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한반도에 물린 재갈을 발판으로 고도성장을 이뤄낸 일본을 뛰어넘는 남다른 사고가 뒤따르지 않는 한, 재침의 위험을 막아낼 방도란 없다. 물리적 침탈이든 경제·문화적 다툼이든 원칙은 같다. 어떻게 하면 이 민족의 생존의 조건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이 지난한 질문에 대한 답은 일본의 침구사를 제대로 보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일본을 알려면 왜구의 존재를 알아야 한다. 일왕은 물론, 일본 총리를 지낸 고이츠미를 비롯한 일본 전현직 관료들이 만행을 일삼고 있는 신사 참배가 전형적인 ‘왜구 전술’이라는 것을 안다면, 일본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더욱 담금질되어야 한다. 독도에 대해 끊임없이 침구하며 억지 주장을 펴는 것은 일본이 보여줘 온 ‘왜구적 특성’의 전형적 모습이지만 우리는 거기까지 깊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또한 친일적 기반을 가진 세력이나, 일본 언론에 서기만 하면 부끄러운 줄 모르고 제 나라와 민족 깎아 내리기에 여념 없는 인사들의 행태도 알고 보면 그 역사적 배경은 같다. 그 연원도 침구사와 같다. ‘왜구의 탈을 쓴 거짓 왜구’라는 뜻의 ‘가왜(假倭)’나 친일파 같은 ‘부왜(附倭)’들이 바로 여기에 해당될 것이다.

독도문제와 일본 역사교과서 왜곡 사건은 ‘왜구의 현재성’을 잘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다. 어디서부터 이 난제를 풀어가야 할까? 단순히 미워하고 책망하는 대상으로만 삼을 게 아니라 한걸음 더 나아가 대국적 견지에서 일본(민)을 동반 상대로 이끌어 낼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이 모순의 실타래를 풀기 위해서는 왜구의 오랜 침구라는 외부적 요인을 찬찬히 살펴보아야만 한다. 그런 까닭에 900여회나 상시적 침탈을 자행한 왜구의 본질을 꿰뚫어 보고, 왜구를 불러들이는 한반도 내의 역학관계를 냉철히 살펴보는 것은 임진왜란 발발 7주갑, 일제강점 100여년이 넘어 선 현 시점에서 반드시 짚어봐야 할 요소이다. 역사를 긴 안목으로 바라보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인문경영연구소, 전경일 소장


한족(漢族)의 허구적인 적자 확대론


누르하치 시기에도 대(對)중국 무역은 활발해 약 200명에서 600명에 이르는 여진족 사신들이 북경을 방문했다. 방문할 때마다 이들은 그들의 지도자만큼이나 영리한 방법으로 명 조정에서 일어나는 정보를 파악하고, 수집했다. 누르하치의 전략상 가장 뛰어난 것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는 이 첩보전은 이미 이 시기부터 시작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를 우려해 명은 남여진의 북쪽 경계인 무순에다가 마시(馬市)를 세워 여진사신들이 만리장성내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했다. 또 망루를 세워 각기 5명의 군사로 수비케 하여 여진 부족원들의 이동을 철저히 감시, 경계하였다. 나아가 회유책도 동원했다. 이는 한족이 오랜 역사 동안 변방의 민족에게 써오던 지극히 일반적인 수법이었다. 예를 들어, 1467년 명조는 여진족 추장들에게 조서(詔書)를 보내 다음과 같이 회유한 바 있다.


“너희 지역의 백성도 모두 적자(赤子)로 생각한다.”

얼마나 가당찮고, 기고만장한 언사인가? 한족의 중국은 바로 이와 같은 회유와 협박이라는 양면 전략을 구사하며 그들의 기득권을 유지하는 정책을 지켜왔다. 이에 대해 여진족의 대응은 변함없었다. 여진족은 습격과 약탈 행위를 지속적으로 수행하였고, 마치 이리가 죽어서도 그 근성을 버리지 않는 것처럼 굴복하지 않았다. 명에 대해 공순한 입장을 취한 것은 결정적으로 유리한 시기가 도래하기 전까지의 태도에 불과했다. 그들은 전통적인 수렵 및 목축 경제로 대외 교역을 하지 않으면 아예 경제 활동 자체가 불가능했다. 따라서 이 같이 표리부동한 대 중국 태도는 여진족으로서는 겉으로라도 취할 수밖에 없는 정책이기도 했다.

적의 아군은 나의 적

나아가 명과 손을 잡은 다른 여진 부족들은 철저하게 누르하치의 적이 되었다. 명에 의해 그 많은 재화와 세력을 형성할 수 있던 누르하치였건만, 그는 끝내 지배자의 하수인이 되지 않았다. 대신 지배자를 지배하는 자로 거듭났다. 그럼으로써 스스로 강대해져 여진 사회의 오랜 침체와 유약함을 몰아냈다. 명을 원수 대하듯 대한 것은 살아생전 한 치도 변함없는 신념이었다. 그에겐 유약함이란 결코 들어설 곳이 없었다.

한편 명에게 고분고분하지 않았던 여진 내부의 다른 적대 세력들에 대해서도 누르하치는 가혹했다. 겉으로 보기에 누르하치가 그들을 제거해 나갔던 것은 친명(親明)적 태도로 보였으나, 그것은 여진을 통일해 나가는 지난한 몸짓에 다름 아니었다. 이를 통해 누르하치는 통일된 힘을 얻어 마침내 명과 대적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1595년에 명은 누르하치에게 ‘용호장군(龍虎將軍)’이란 칭호를 주었는데 여진 추장으로서는 전례가 없는 대우였다. 누르하치는 여진 부족을 어느 정도 통합한 후 소수 추장들의 충성을 받아들여 1590년 백 여 명의 사절단을 이끌고 북경으로 공물을 바치러 간다. 이러한 조공 외교는 1609년까지 계속되었다.

북경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해 있는 산해관을 지나며 누르하치가 무엇을 생각했을는지 너무나도 자명하다. 그는 눈에 밟히는 모든 것들을 필름처럼 각인시켜 머릿속에 저장해 놓았을 것이며, 언젠가 이 길을 정복군의 대열을 이끌고 지나가고 싶었을 것이다. 그에게 북경행 여정은 살아 있는 정보들을 모으는 적에 대한 데이터 베이스 축적 과정과도 같았다. 북경을 오가며 누르하치는 무엇을 생각했을까? 그는 미래를 설계하지 않았을까. 굴신하되, 굴신하지 않는 그의 자세는 대륙 경영자의 기세이자, 기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정치적 행태의 묘책이었다.

ⓒ카인즈교육그룹, 인문경영연구소, 전경일 소장


작금의 일본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3.11 동일본 대지진 이후 몰아친 쓰나미와 후쿠시마 원전 사태는 1923년 일본 간토(關東) 대지진, 1948년 대지진(진도 7.1), 1995년 고베 대지진(진도 7.3)과 더불어 가장 최근에 벌어진 일본이 겪은 초비상 국가 재난 사태이다. 3.11 대지진 이후에는 ‘4년 내 도쿄 대지진 가능성이 70%’(아시아경제 2012.1.25)나 되고, 도쿄를 비롯한 일본 수도권 일대에 직하(直下) 지진 우려가 커지면서 일본이 향후 대내·외 정책에 있어 어떤 태도를 취할지 주목하게 된다.

역사적으로 자연 재해 등 위기시마다 일본은 국내·외에서 위기의 해법을 찾아왔고, 내부 결속을 위해 주변국(민)들에 대한 침탈을 감행했음을 상기해 볼 때, 최근 자연재해와 함께 일본의 극우주의적 움직임은 심상치 않다. 자칫 일본발(發) 한반도 위기 국면으로 치달을 조짐마저 읽힌다.

최근 일본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해야 하는 것은 우리의 생존과 직결된 문제로, 몇 가지 징후를 드러내 보이는 바, 다음과 같은 일련의 현상들은 앞으로 매우 중시해서 봐야 할 점들이다.

그 중 하나는 일본이 관동지역의 지진, 쓰나미 등 재난에 대비해 부산, 경남, 거제 일대를 석유 비축 후보지로 삼고자 우리 정부와 협상 중(CBS 2011.12.3)에 있다는 점이다. 일본의 의도는 일본 내 재난 발생 시 즉각적인 재외 비축 석유를 운송하려는 계획으로 아사히신문은 일본 경제산업성이 한국의 지식경제부에 석유 비축지 확보 문제를 비공식적으로 요청해 동의를 이미 얻었고(2011.1)이르면 올해 안에 구체적인 방법을 협의할 예정이라고 보도했다.

일본 정부의 석유 비축지 확보 움직임과 별개로 이미 일본 석유판매 대기업인 이데미쓰코산(出光興産)과 JX에너지(JX닛코닛세키에너지)는 한국기업과 손을 잡고 석유제품 중 하나인 등유를 한국 내 비축하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한국과 에너지 저장 협력 관계를 맺고 있는 재팬에너지(Japan Energy Corporation)가 선두에 서고 있다. 이 회사는 일제의 조선침탈이 강화되던 1929년에 설립된 회사로 당시 일본 군국주의의 연료 공급처를 자임해 온 많은 군수기업들과 그 활동상이 일맥상통하였음을 주목하여야 한다.

자연재해에 민감한 일본으로써는 “에너지 확보는 안전보장에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에 한국에서 곧바로 쓸 수 있는 석유 제품을 비축해 두려는 것으로 그 의미를 풀이하고 있다. 일본이 석유비축법 개정안을 2012년 정기국회에 제출하기로(매일경제 2011.12.4)한 것이나, 일본 정유업계 관계자가 “일본 정부가 한국 정유업체와 미리 계약을 체결해 유사시 석유를 공급받을 수 있는 권리를 확보하는 형태로 석유 비축이 이뤄질 것”이라고 내다보는 것은 일본이 처한 자연 재해적 환경요인과 함께 자원 확보, 저장 수단으로써 한반도를 바라보는 시각을 명확히 보여준다. 이와 함께 일본 내에서는 대지진 이후 ‘유사시 한국과 전력공급 협정을 맺어야 한다’는 목소리도 흘러나오고 있다.

외견상 양국 모두 자연 재해가 지닌 불예측성의 특성상 향후 어떤 재해를 서로 입을지 알 수 없으므로 한일 간 에너지 협력을 통해 주변국의 어려움을 상호 대비케 하는 것은 선린적 방책이 될 수는 있다. 이 점은 나아가 경제적 가치를 제고하는 한일 교역의 한 방편으로 인식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문제는 좀 더 깊이 다뤄 볼 필요가 있다.

즉, 일본 법규에 대한 이해를 우선시해야 한다. 1997년 일본은⟨신(新)미·일 방위협력지침(뉴 가이드라인)⟩과 1999년 5월 ⟨주변사태법⟩을 제정하고 2002년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郎) 내각은 ‘한반도 유사시 대량 난민이 도래하는 것에 대처한다’는 구실로 <유사법제(有事法制)>를 제정해 일본 주변지역에 자위대가 개입할 수 있는 길을 터놓았다. 이는 일본이 21세기에 들어서면서 본격적으로 신군국주의로 방향을 튼 신호탄으로 볼 수 있는 사건으로 향후 동북아 국가들의 안위에 크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바였다.

일본이 최근 제1야당인 자민당을 통해 일왕(일본 내 ‘천황’이라 불리는)을 ‘국가원수’로 명기하고 비상시 총리의 권한을 대폭 강화하는 ‘긴급사태조항’을 신설하는 내용의 헌법개정안을 추진하고 있는 것은 <유사법제>제정 이후 정확히 10년이 지난 지금 매우 중시해서 보아야 한다. 이 법은 오는 4월 28일까지 최종 확정될 것으로 보인다.

일본은 본격적으로 평화헌법에서 국가의 ‘상징’으로 표시해 온 일왕을 '국가원수’로 표기함으로써 이제 왕의 위상은 구체적이자 실재적으로 국정 전반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총리의 권한을 대폭 강화해 총리는 외부로부터 무력공격이나 대규모 자연재해가 발생하는 상황을 ‘긴급사태’로 규정하고 자체 판단으로 재정을 동원할 수 있으며, 국민의 사적 권리를 제한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총리의 권한 강화를 위해 헌법에 ‘긴급사태조항’을 추가한 셈이다.

또한 현행 헌법에서는 허락되지 않는 집단적 자위권의 행사를 허용하는 한편 군사재판소의 설치도 추가할 계획(연합뉴스, 2007.5.3)인 것으로 알려진다. 이 같은 움직임은 일본이 근대 제국주의 단계에 들어설 시기 군부가 취한 법적 근거나 행태와 매우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이 같은 일본 내 헌법 개정안은 일본이 국가적으로 대외정책을 취하기 위한 사전 포석으로 우리에게는 면밀한 주의를 기울이고, 국제관계의 가변성을 심도 깊게 통찰할 것을 요구한다. 즉, 일본 내 긴급 사태 발생시, 혹은 한반도 내 유사시, 한국 내 일본의 국가적 자원인 석유 자원 보호 조치를 위해 일본 자위대(자위군)의 파견(병)을 검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일본이 왜 자연 재해에 대한 대비책 이상으로 한반도 내 석유 비축지 설치를 희망하고 있는지 잘 알게 해 준다. 즉 겉으로의 목적 이상으로 이면에 깔린 저의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일본 정부의 법제적 움직임과 더불어 최근 일본 후쿠시마(福島) 지역 주민이 전북 장수를 방문, 집단 이주 가능성을 타진한 것은 매우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전북도와 장수군은 5일 “후쿠시마 지역의 교회 목사 A씨가 서울의 개발업체 관계자와 함께 지난달 초 장수군청을 방문, 집단 이주 가능성을 타진했다”고 밝혔다.(연합뉴스 2012.3.5). 장수군은 “이 목사가 ‘어린이들이 원전사고로 고통 받지 않았으면 좋겠다. 부모들은 안전한 지대에서 아이들이 자라기를 희망하고 있다’고 말했다”고 전하며, 장수 나들목(IC)과 가까운 계남면과 천천면 일대를 둘러보았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이에 대한 한국 언론의 관심은 어떠했을까? 다분히 단순 호기심과 궁금증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었다. 즉 일본 민간 단체의 움직임의 저변에 깔려 있을 수 있는 '집단 이주 타진' 문제의 중층적 의미 및 목적에 전혀 접근하고 있지 못하다.

일본 주민의 한반도 이주 문제는 역사적 선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역사적으로 왜구의 한반도 침범이 극에 달했던 시기는 려말선초이다. 왜구 문제를 풀기 위한 회유책의 일환으로 조선정부 들어 등장한 것이 이른바 ‘항왜(降倭)’인데, 이는 평화적 통교자와 귀화자를 우대하려는 조선 정부의 양면정책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순수한 목적의 회유책은 이후 조선 정부의 회유와 포옹책으로 귀화한 일인 무리들의 숫자가 늘어나면서 왜인들의 경제적 비중이 늘게 되고, 더욱 심각하게는 조선의 군사기밀을 일본에 제공하는 자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당시 조선정부는 회유책을 폈지만, 많은 수의 왜인들이 진심으로 귀화하거나 항복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생활이 곤궁하거나 일본에서 살 수 없어서 조선에 온 자들이 허다했고, 심지어는 통제가 가해지자 곧바로 침략적 근성을 드러내 조선 연안을 침구하기도 했다. 자신의 욕구가 관철되지 않자 평화로운 왜인에서 약탈집단으로 돌변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조선은 회유책을 썼지만, 끝내 왜구의 본성을 바꾸어 놓지는 못했다. 조선 정부가 ‘신(信)’을 강조했지만, 왜인들의 일시적인 귀화는 조선의 향화정책과 왜구의 욕구가 맞아 떨어지며 생긴 일이지, 왜구의 본질이 바뀐 것은 아니었다. (전경일, <남왜공정>)

근대 들어서, 일본의 조선 식민 정책이 극성을 부리던 1930년대에 일본은 대대적으로 일본인 800만명을 한반도로 이주시키고, 그 수에 머금 가는 조선인을 만주로 이주시켜 조선을 완전히 '일본화' 하려 했다. 창씨와 개명은 그 중 하나로 문화와 영혼을 박상(剝喪)시키려는 책동이었다.

당시 일본이 취한 척식 정책은 지금도 여전히 일본 신군국주의 팽창책의 대(對)한반도 정책의 기저를 이루고 있다. 이 점에서 우리는 역사의 반복성을 눈여겨보아야 한다.(도요카와 젠요, <경성천도>) 당시 일본의 이민 송출 목적은 ‘자신과 더불어 국가를 운반하는 것’으로 인식되어 일본을 한반도 내로 확장하려는 확장책의 일환이었다. 이 점에서 일본인의 한반도 이주 문제는 역사적으로 일본 팽창주의와 깊은 관련성을 지니고 있다.

최근 일본 후쿠시마(福島) 지역의 주민이 전북 장수를 방문, 집단 이주 가능성을 타진한 것은 일본의 자연 재해로부터 벗어나려는 목적이 클 것이다. 그리고 순수한 민간 차원의 이주 타진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어느 국가의 국민(國民)이 이주하려는 것은 그 지역의 문화와 습생에 동화나 귀화의 성격을 띨 때 양 문화 집단간 갈등 요소가 완화된다. 물론 적(籍)을 어디에 두느냐의 문제도 정체성과 관련되어 매우 중요한 문제일 것이다.

최근 언론에 오르내리는 이들의 집단 이주 타진이 귀화 목적인지, 혹은 일시적 피난 목적인지도 불분명하며, 이들에 대한 보호 구실로 일본 정부가 한국에 어떤 태도를 취할지에 대한 면밀한 검토도 없이 흥미 위주로 접근하는 것은 자칫 한일 간 민감한 문제를 국제적 안목 없이 관망할 소지마저 있다. 게다가 경제적 효익만으로 볼 수 없는 문제가 있다. 구한말 일본의 조선에의 군대 파견(병) 이유 중 하나는 재한 일인의 안전 보장이 목적이었다는 점을 눈여겨 보아야 한다. 이는 매주 중요한 역사적 선례임에 틀림없다.

한국은 올해 4.11. 총선, 대선 등 정치적 격변을 치르느라 대외 문제에 대해 별로 신경 쓰고 있지 못하다. 정권의 향배와 함께 심각한 내부 경제 문제로 모든 관심이 온통 내부에 쏠리고 있다. 이 시기, 일본의 극우주의적 활로 모색은 매우 심각한 사전 포석으로 자연재해의 일(一)해법과 헌법개정안을 통해 일본 내부 문제를 외부에서 풀려는 시도로써 한반도를 엮고 들어가려는 움직임으로 나타나고 있다. 일본 내 자연재해에 따른 한국 내 석유 비축지 확보 문제와 집단 이주 타진은 바로 이 점을 잘 시사해 주고 있는 것이다.

지금은 역사상 가장 중요하게 21세기 전체를 좌우할 국제 정치 역학관계를 포석하는 시기이다. 일본의 교묘한 한반도 착근 책략을 꿰뚫어 보는 정치·외교적 혜안이 필요하다. 앞서 이 두가지 문제에 대해 우리 정부의 공식적 입장이 밝혀진 바는 없다. 이는 우리가 늘 내부 쟁투에 골몰할 때, 일본이 한반도 진출(침탈)의 호기로 삼아온 역사적 선례를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한다. 또한 늘 그 방식이 교묘하고, 지속적이며, 좀이 쓿듯 야금야금 한반도를 부식해 들어 온 일본식 침탈 방식과 궤를 같이 하고 있다는 점을 알아야만 한다.

우리에게는 한일사에 대해 보다 깊이 있는 인식과 국제 정세를 어떻게 끌고 갈지에 대한 뚜렷한 방책이 있어야만 한다. 하지만, 거대한 동북아 변동 요인의 징후 앞에서 우리는 가십거리로 국제 정치의 밑바탕에 깔린 본질적 욕구를 몰인식하는 면이 크다. 그런 까닭에 한반도를 둘러싸거나, 한반도를 매개로 하려는 일본의 대외 정책에 깊이 있게 천착하고 있지 못하다.

이 같은 문제를 보다 멀리 내다보는 정치가가 전무하다시피 한 게 아쉽기는 하나, 그 또한 현재의 한국 정치의 한계임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국서(國書)를 보내 와 일본은 조선 침략 의도를 분명히 밝혔으나, 이를 단순한 협박 수준으로 위암 삼았던 조선 정부는 그 댓가를 혹독하게 치러야만 했다. 운양호 사건과 이듬해 강화도 조약 이후 34년만의 한일 병탄도 진행방식은 마찬가지였다. 일본과 선린을 위해서도 우리의 깊이 있는 역사 통찰이 필요한 때이다. #

문화적 개방성과 다양성의 앙상블

지정학적으로 볼 때 고구려는 다양한 자연환경이 만나는 매우 독특한 지역에 위치해 있었다. 따라서 문화도 이국적 요소가 산재해 있었다. 연해주와 흑룡강 일대의 수렵삼림문화, 대홍안령 산맥에서 몽골로 이어지는 초원유목문화, 화북의 농경문화, 중국 양자강 유역의 남방문화, 그리고 한반도 문화 등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졌다. 영토 확장에 따라 수많은 종족들이 다양한 문화를 보존한 채 고구려제국의 백성이 되었으며, 고구려는 이들을 수용해 독특하고 수준 높은 문화를 완성시킨다. 이종의 문화를 융합해 새로운 문화를 창조해 낸 것이다. 이는 점차 고구려 독창적인 문화로 발전해 나간다. 고구려 문화가 지닌 자유는 독특한 지리적, 문화적 특성과 유목민족의 문화가 함께 어우러진 것이었다. 이 같은 자유로운 정신은 개방적 문화와 보편성을 지닌 세계관과 어울려 문화 대 활력을 가져온다. 국토의 확장이 문화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셈이다.


태왕 재위기간 동안 고구려는 영토가 급속히 확장된다. 이때 북쪽으로는 송화강, 동쪽으로는 연해주의 바다, 서쪽으로는 요하에 이르는 국경선을 이루게 된다. 그리고 남쪽으로는 국경선이 임진강 유역에까지 뻗친다. 영토가 확장됨에 따라 비옥한 농토를 갖게 되었고, 농업의 발전과 함께 생산성 눈에 띄게 향상되었다. 또한 막강한 국력에 바탕을 두며 주변 국가들과 활발한 교류를 가진다. 특히 중국 북방의 여러 국가들은 물론 서역으로부터도 발달된 문화를 대대적으로 받아들였다. 제국다운 포용의 자세가 발휘된 것이다.

이런 다양성은 인구동태학적인 면에서도 나타났다. 고구려인을 구성하는 부족도 각기 다양했다. 벽화에 의하면, 아랍계 인종이 분명해 보이는 사람들조차 고구려에 들어와 어울리며 사회 구성원이 되고 있다. 다른 종족에 대해 편견 없이 교류하고, 수용하면서 고구려는 동북아의 최강국으로 발전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짐작케 하는 것으로 신라 선덕여왕이 황룡사 구층탑을 지을 때 각 층마다 극복해야 할 아홉 종족의 이름을 붙였는데, 그들은 중화, 왜, 말갈 같은 부류들이 있었다. 물론, 고구려가 포함된 것도 당연했다.

영토가 확대되고 새로 편입된 주민들이 늘어나자, 이들을 이용해 고구려 문화는 급속도로 확장돼 나간다. 수준 높은 문화는 막강한 국력과 원활한 문화교류 하에서 이루어진 셈이다. 다문화를 수용하면서도 고구려인들은 자기 집단과 문화에 대한 자아의식이 강해 종족 정체성에 충실했다. 정치 군사적으로 제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민족들을 힘으로 억압하지 않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상생과 화합의 비전을 제시한 문화의 국제주의를 구현한 것이다.

고구려인들의 정체성과 포용력 있는 문화는 개방성과 다양성의 앙상블이었다. 그리하여 고분벽화를 유심히 관찰해 보면 자유를 끊임없이 희구하는 정신이 풍부한 상상력과 자유로운 표현으로 표출되고 있다. 나아가 태왕비 등의 유물과 유적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웅대하고 성스러운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지금도 남아 있는 고분벽화나 태왕 비문은 고구려의 정체성을 그 무엇보다도 강하게 선언하고 있다.

고구려는 정치, 군사적으로 강국이었으며, 제국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고, 동시에 자유로운 정신을 가진 문화국가로 발전한다. 고조선과 부여를 계승했기 때문에 초기부터 문화는 발달했으며 5세기에 이르러 급속히 영토가 확장되면서부터는 더욱 질적으로 성숙해졌다. 물론 영토 확장에 따라 다양성은 더욱 보편화되고, 증폭되었다.

고구려 문화를 살펴보면 중국의 것과 다른 점이 많다. 문화의 주체가 되는 종족부터 다르다. 중국문화는 유교적 전통이 강하고, 농경문화를 바탕으로 한다. 문화를 수혈 받는 지역도 서역 일부와 남쪽에 불과했다. 하지만 고구려는 서역 및 북방초원, 그리고 대삼림 지대의 문화를 수용했기 때문에 경제형태도 다양했고, 문화도 각양각색이었다. 더구나 이동성이 강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중국적인 요소, 서역의 요소, 북방 유목국가 요소, 남방 요소 등 다양한 문화가 함께 조화를 이루며 공존했다. 개방성과 다양성을 특징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고구려는 오히려 중국문화를 자극하고, 중국 문화에 영향을 주었으며, 전체적으로 동아시아 문화에 활력과 개방성을 불어넣었다.

이 시기 고구려가 문화강국으로 자리매김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동북아 정세가 크나큰 영향을 미친다. 즉, 태왕 시기 중국지역은 극도로 혼란하여 문화의 중심을 이룰 만한 나라가 없었다. 이는 북방 초원지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때에 태왕은 고구려를 강력한 제국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고, 더불어 백성들의 삶마저 안정시킴으로서 다음 시기 동북아 문명의 중심이 고구려로 옮겨 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5세기 이후 고구려는 범세계적인 국제성과 함께 독자성이 빛나는 화려한 문명을 꽃피운다. 서역과 중국의 문화를 받아들이기도 하지만, 서역과 중국에 문화를 수출하며 중국의 북조문화와 서역의 돈황 문화에도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일본열도에 고구려의 앞선 문화가 전파되는 것도 태왕 시기에 이루어진 성과였다. 

이처럼 태왕은 문화적 역량을 통해 탁월한 글로벌 경영을 펼치며 문화 군주의 역할을 톡톡히 수행해 내는 것이다. 그리하여 장수왕 때의 평양 천도는 고구려 문명의 폭을 대폭 넓히는데 크게 일조하게 된다. 물론, 그 기초는 태왕시대에 완성된 것이다.

이 같은 문화강국이었던 고구려가 망하자 이후 만주지역은 문화적 공간이 사라짐으로써 동북아 문화는 중국문화의 영향력 아래 일방적으로 놓이게 된다. 중국의 한족을 견제함으로써 진정한 세계주의를 구현한 고구려의 멸망은 그 문화도 함께 쇠퇴내지는 소멸해 가는 과정이 놓이게 된 것이다. 이 같은 역사적 사실은 강력한 경영능력이 지속적으로 밑받침될 때, 문화도 유지된다는 것을 뜻한다. 또한 바꾸어 말하면, 문화적 쇠퇴는 국가의 흥망과도 직결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어느 기업이 지닌 주력 산업에서의 경쟁력 쇠퇴는 기업 문화마저도 고스란히 희생물이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셈이다.

ⓒ카인즈교육그룹, 인문경영연구소, 전경일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