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촌 생활은 좀 어떠냐?”
“시골이라서 바뀔 것도 없지, 뭐. 후후...”
오랫동안 못 만난 대학친구를 동창 어머님 팔순 잔치에서 만났다. 근처 다방으로 몰려간 친구들은 서로의 근황을 묻느라 얘기에 여념 없었고, 나는 말없이 기대앉은 시골친구를 바라봤다. 그에 대한 나의 기억은 강렬하다. 작은 키에 다부진 팔뚝을 걷어 부치고 늘 저돌적인 모습으로 세상을 응시하는 이미지로 내게 남아 있다.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바라봤다. 대학을 떠난 지 이 십여 년만의 일이었고, 삶과의 싸움에 화염처럼 그을린 얼굴들이 거기에 놓여 있었다. 이마엔 영락없이 시간이 든 회초리 흔적이 선명하다. 삶이 남긴 상채기가 어딘들 가겠는가...
오랜 시간이 흐른 뒤의 만남이 가져오는 짧은 순간의 어색함이란... 겸연쩍어 비싯 웃음이 났다.
궁색한 시골 살림살이는 외모에 그대로 배어나왔지만, 그는 전혀 초라해 보이지 않았다. 너무나 당당했다. 겉으로만 그런지 궁금증이 일어 짐짓 그의 속이 얼마나 깊은지 꾹, 찔러 보았다.
“너는 아직도 꿈속에 살고 있는 건 아니냐? 꿈 밖에선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아냐?”
“꿈이라... 그러냐? 나는 다만 내 자신을 잃지 않고 살 뿐이다...”
시골에서 이장을 하며 살고 있다는 친구. 우리의 생활은 너무나 달랐고, 사는 방식도 멀찍이 떨어져 있었지만, 왠지 그의 삶이 한 수 위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 그런 생각이 들었을까...
그에게선 나와 달리 내가 잊어버린 꿈 하나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런 아마도 - 삶에 대한 뜨거움 같은 것일 게다. 우리는 몇 마디 화두를 던지다가, 늦은 시간 그는 시골로 내려가는 막차 시간에 맞춰 일어났다.
“언제든 사는 게 답답하거든 머리 한번 식히러 내려와라.”
나는 그러 마, 하고는 그를 보냈다. 그에게서 나는 무엇을 찾으려 했던 걸일까?
그는 세상의 기준으로는 뒤쳐져 있었고, 내가 회사에서 겪는 치열한 경쟁 따윈 알 턱도 없었다. 느려터진 시계를 꿰차고 있는 촌부의 이미지랄까... 반면, 나의 처지는 다르다. 세상의 속도계에 맞춰 째깍째깍 움직여야하고, 바삐 뛰어야 먹고 산다. 아이들을 학원에 보내야 하며, 등짝이 시리기만 할 노후를 준비해야 한다.
이유란, 핑계라고 할지라도 유리하게 하고 싶을 땐 수도 없이 떠오르는 법이다. 그와 마주한 자리에서 내가 그랬다. 그런데도 그가 훨씬 더 커 보였다. 여전히 처음 그대로 있는 친구, 초심을 간직한 친구, 누가 그를 미련한 곰탱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가지치기가 이루어진 가로수를 올려 보았다. 상금머리를 한 나무들은 겨울 동안엔 솟대처럼 서서 온 몸으로 바람을 맞아야만 한다. 내 삶이 저렇듯 을시년스러울 것 아닌가. 거두어 들였으나, 장례 쌀을 빌어다 먹은 듯한 찝찝함... 늘 돌려막기식 삶이 가져오는 다급함...
그간 나는 무엇을 해 왔는가, 무엇을 놓아 버렸는가, 무엇에 매달려 왔는가, 우리는 어떻게 다시 만나야 하는가? 나는 그가 보내 온 문자를 열어본다.
“꼭 오렴. 가끔은 천천히 가는 것도 중요하지. 경쟁 없는 곳도 살만하다...”
전경일 <아버지의 마음을 아는 사람은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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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대, 일에 대한 프로의식을 갖추라.
김재남 차장은 47살 때 회사를 그만뒀다. 그는 평소 농원을 갖고, 화초를 재배해 보는 게 꿈이었다. 회사를 그만둔 다음 이것 저것 알아보다가 화원을 하나 냈다. 농장을 경영할만한 전문적 식견이나 자금이 부족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조그마한 사업체를 위험부담 없이 키워보고 싶기도 했다. 다행히 목 좋은 자리라서 손님들이 들락거렸다.
그는 지금 꽃과 함께 하루를 보내고 있다. 물건을 떼고 돌아와 꽃더미 속에서 차를 한잔 마시는 시간이면 젊은 날의 추억이 아련히 떠올라 미소짓게 된다. 김사장은 죽을 때까지 이 일에서 손에서 놓치 않겠다고 한다. 김사장의 하루 총매출액은 45만원 정도. 월 순수입 375만원 정도다. 그는 지금 버는 것보다도 더 적게 쓸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다.
“그래도 괜찮아요. 지금은 남에게 아쉬운 소리 안해도 되니.”
이 점이 그가 더 큰 수입을 찾는 것 보다, 덜 쓰면서 행복한 이유다.
하루를 어떻게 보내나
윌리엄 포크너는 이렇게 말한 적 있다. “사람이 하루 여덟 시간씩 매일 할 수 있는 것은 일 밖에 없다. 하루 여덟 시간 동안 계속해서 먹거나 마신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여덟 시간 동안 계속해서 사랑을 나누고 있을 수도 없다.”
맞는 말이다.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우리는 일하는데 보낸다. 일을 통해 배우고 인생의 참맛도 느낀다고 볼때, 우리는 일과 함께 하루라는 시간을 즐기기도 하는 셈인 것이다. 게다가 자신의 노력으로 김사장처럼 남에게 손도 벌리지 않을 수 있다면, 그만한 행복이 어디있을까?
40대는 그런 차원에서 일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사회적 위신을 세우며, 성장해 가는 시기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지금의 40대에게는 일은 즐거움만은 아니다. 오늘날 한국의 40대는 하루 8시간이 아니라, 10시간 이상 일을 해야 한다. 우리나라 40대의 과로사가 세계 1위라는 것은 일이 즐거움 일 수만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만큼 일이 스트레스이기도 하다.
내게 맞는 내 일을 돌려다오
일에 대한 부담감은 일하는 것 만큼이나, 일하지 못하는 상황 때문에 커지고 있다. 40대에는 일조차 빼았기게 될거라는 두려움이 급격히 몰려든다. 단순히 나이에 따른 은퇴의 순차성 때문에 물러설 수 밖에 없게 되기도 하고, 그보다 좀 더 영악한 자본의 논리가 40대들을 내몰기도 한다. 가장 활동적이어야 하며, 가장 왕성한 생산-소비의 주체이어야 하는 시기에 말이다. 정년 연령이 낮아지는 것은 이미 오십대를 지나 40대에게 가장 큰 위협이 되고 있다. 일을 할 수 있는 사람들로부터 일을 강제로 빼앗아 버리고 있는 것이다.
세상에 일을 할 수 없는 나이의 인간은 없다. 일을 할 수 없는 것은 몸이나, 정신이 그렇게 만들 뿐이다. 이제는 늙은 청년의 시대를 지금의 40대가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진지하게 고민해 봐야 한다. 지금 평균 수명은 10년전보다 10년이나 더 늘어낫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년은 일에서 손을 떼야하는 나이를 의미하게 됐다. 정년은 자신이 사회적 일을 놓고, 자신의 일에 투자하는 가장 황금같은 시간이다. 그런데도 정년=퇴출이 당연시되고 있다.
일: 세상과 만나는 가장 중요한 방식
누구나 알다시피 40대는 경험과 숙련도에서, 그리고 젊음의 끝자락과 노년의 초입에서 일과 인생의 풍미로움을 맘껏 드러낼 수 있는 시기다. 인생 전반에서 가장 큰 성과를 드러내기 시작하는 나이다. 이 시기의 일은 보람찬 시간을 유지시켜주기 때문에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일을 손에서 놓는 순간 당신은 세상과 만나는 주요한 방식 하나 놓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살기 위해 일하고, 일하기 위해 산다. 그렇기 때문에 사는 방식을 다시 알아야 한다. 예전의 40대와 달리 이제는 좀더 깊이 있어져야 한다. 특히 일에 대해서는 더욱 영-육이 완성되어가는 모습을 취해야 한다. 100여년 전에 애나 로버트슨 브라운이라는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이 일이 꼭 필요하고, 내 자신의 인격을 강화해주고, 다른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고, 이 세상에 도움이 되는가?”
이 말은 100여 년 전에나 지금이나 똑같다.
일을 소중히 여겨라. 지금부터는 나이들며 특별히 무슨 일을 할 수 있는지 곰곰이 따져보라. 만일 무엇이든 하려거든, 자신의 취미, 평생 꼭 해보고 싶었던 일을 찾아라. 그리고 그 일 속에 자신을 놓고 키워보라. 그러면 자연히 당신도, 당신이 하고 있는 바로 그 일도 커질 것이다.
전경일 <마흔으로 산다는 것>
40대의 숲은 다르다
40대는 거추장스러운 나이다. 이전 세대에 대한 부채감에서 결코 자유스럽지 못하다. 그만큼 한 세대를 만들기 위해 전세대가 기울인 노력은 지난하다. 웬만한 사람이라면, 소 팔고 논 팔아 학비를 대야 했던 농투사니 부모님을 기억할 것이다. 경우는 달라도 바로 그런 부모님을 둔 세대다. 산업 시대서 정보 시대로 넘어온 만큼 누릴 수 있는 사회적 풍요도 이전 세대나 이후 세대와 많이 다르다.
겪어온 역사적 환경도 남다르다. 이전 세대가 극단의 이념 대결 양상을 띤 반면, 40대는 참여적 입장을 띠면서도, 객관적 시각을 지니려고 부단히 노력한 세대다. 앞의 세대로부터는 철모르는 진보주의자로, 다음 세대로부터는 아직도 이념에 찌든 보수주의자로 인식되기에 십상이다.
40대는 불완전 시대를 사는 세대
더불어 정치적으로는 자주적이고 독립적인 역사를 만들고자 직, 간접적으로 노력한 세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결실은 여전히 미완인 채로 후대에 되물림 해줘야 하는 세대이기도 하다. 저 유명한 5.18이나, 직선제 쟁취, 6월 항쟁, 이어 전지구적 차원에서 진행된 동서간 이념 붕괴는 40대가 몸소 겪어온 역사적 흔적이다. 이전 세대로부터 얻었으나, 그것은 불완전하기만 했고, 다음 세대에 넘겨주려하나, 여전히 완성되지 못한 역사를 사는 세대. 그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40대다.
이런 세대가 지금 오십대, 나아가 60, 70대 노년기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거침없이 몰아치는 세월에 힌머리는 늘어가고 어느덧 나이는 중년의 백미인 오십줄을 향해 치닫는다. 부질없는게 나이다. 나이가 들어찰수록 40대는 유독 자기 삶을 만들고자 안간힘을 쓴다. 그런 모습이 안쓰럽기도 하다.
내 주변을 살펴보면, 새벽반 어학원에 등록하기도 하고, 헬스클럽에서 조깅을 하며 땀을 흘리는 동료들의 모습도 쉽게 보인다. 아니면 거래처 임직원을 데리고 야간업소 투어에 나서야 하는 중간 관리자로써 살고 있거나, 아니면 임원이 되어 몇 년 더 직장에 다닐 수 있을지, 곧 물러나야 할지 막막해 하는 처지에 놓여 있기도 하다.
그러다 보니 본인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내면으로 향한 도전은 세상을 향한 도전 만큼이나 40대가 맞닥뜨려야만 하는 현실이다. 좀 더 마음을 추스르고 살아가려면 말이다. 이것이 우리가 직면한 조건이다.
40대가 이루는 숲
물론 가끔은 대접받지 못하는 세대라는 생각에 분통을 터뜨리기도 한다. 그러다보니 한편으론 이전 세대들처럼 대접 받으며 사는 환경을 그리워하게 되기도 한다. 이전 세대와 같아지고 싶지는 않지만, 그들이 누렸던 지위를 누리고 싶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우리의 바램을 받아 줄 세대는 대한민국 어디에고 없다. 40대는 40대만의 군락을 이루는 숲과 같다. 저들끼리 몸을 부비며, 그 나름의 숲을 이루면서 산 하나는 거뜬히 지켜내야 하는 그런 세대 말이다.
당신도 40대로써 나와 같은 생각을 하게 될런지 모른다.
만일 당신이 다음 세대들로부터 대접을 받고자 한다면, 그런 생각은 하루 빨리 버려라. 쉽게 말해, 꿈 깨라. 더 이상 전(前)세대를 존경하는 의식(儀式)을 젊음이들은 베풀지 않을 것이다. 이제는 우리만의 세대를 구가하며, 나름의 문화와 추억과, 경험을 쌓으며 살아가야 한다.
다음 세대는 그 다음 세대를 리드하며 살아야 한다. 그들의 몫 중에 우리 지분은 없다. 만일 당신이 자신이 이전 세대에 한 것에 대한 보상 심리 때문에 다음 세대에 기대고자 한다면 그것만큼 우스꽝스러운 일은 없을 것이다. 우리 다음 세대는 그런 당신의 바램을 유산으로 물려 받지 않았다. 그들은 별개다.
40대는 별개
지금 당신이 가지고 있는 생각은 한국 역사상 천 여 년을 이어온 생각이다. 그러나 지금의 패러다임은 완전히 다르다. 다른 종에게 같은 생각을 불어 넣으려 하는 건, 넌센스다. 그렇지 않은가? 그렇다면 양 세대의 조화는 어디서 올까? 인정하는 것이다. 같을 수 없다는 것을, 오히려 같아져서는 안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지향해야할 참다운 참여 정신이다. 상대에 대해, 다음 세대에 대해, 무한히 배려하며, 자기 세대의 삶을 멋지게 살아가는 것, 그것이 우리가 지향해야할 삶이다.
정신적으로나, 경제적으로 그들에게 뭔가를 바라고, 기대고, 그것으로 그들을 불편하게 하지 말고, 우리는 우리만의 산에 머물며 그 산을 아름답게 수 놓아야 한다. 그들이 별개듯, 우리도 별개다. 우린, 우리가 다르다는 것 하나만으로, 우리 시대를 구가한 세대들 아닌가? 이것이 40대인 당신이 치러 내야할 세대의 숙제다. 다음 세대가 조금이라도 나아지려면. 그러려면 우리는 뭔가 다른 삶의 가치를 행동에 옮겨 보아야 한다.
전경일. <마흔으로 산다는 것>
20만부
베스트 셀러
40만명
독자가 읽은
40대의
영원한 필독서『마흔으로 산다는 것』이
5년 만에 다시 대한민국 40대를 만난다!
대한민국 사십대여, 다시 일어서라!
아무리 살아도 어렵고 힘든, 이 시대의 사십대!
직장 동료이기도 하고, 옆집 아저씨 같은 우리 주변의 40대는 누구이며, 어디로 향하는가?
대한민국 40대는 누구인가? 온갖 굴곡진 한국 현대사와 함께 성공과 좌절, 희망과 절망을 함께 해온 사람들. 대학에서는 민주주의를 외쳤지만, 세상에 나와서는 ‘사는 건 다 그런 거라고’ 변명을 일삼기도 하는 사람들. 올곧이 떫은 땡감으로 자신의 뜻을 꺾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 민주주의를 얻었지만, 쉽게 쪽박을 깨버린 사람들. 지역주의와 학벌, 연고로 가득 찬 기득권 층을 증오하면서도 개인의 영달을 위해서는 기꺼이 거기에 뛰어 들고 싶어 안달하는 사람들. 돈과 명예가 따르는 성공을 누구보다 열망하는 사람들. 성공을 위해서라면 초심을 헌신짝 같이 내던져 버리기도 하는 사람들. 자신의 신념과 달리 밥벌이를 위해서라면 철저히 달리 행동하는 사람들. 그러면서도 세상 탓에 그런 거라고 자기 합리화로 위안하는 사람들. 학력 차별 철폐를 주장하면서도 내 자식은 누구보다도 남의 윗자리에 가 있게 하려고 사교육에 몰두하는 사람들. 머잖아 인생의 장년기를 외롭게 보내야만 하는 사람들. 자기 세대의 짐 때문이라는 핑계로 다음 세대를 돌볼 여유조차 없는 사람들. 20대 실업문제를 해결하기보다, 성난 개처럼 그들과 밥그릇 싸움을 해야만 하는 비정한 사람들.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가장으로서 누구보다도 책임이 막중한 사람들. 노후가 불안정한 사람들, 외면 받는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 소외를 키워 가는 사람들… 직장인들, 실업자들, 퇴직자들, 구조조정의 희생자들, 힘겨운 비정규직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머리띠 둘러 맨 사람들, 철탑 위에 올라 간 사람들, 한강 철교 위에 위태로이 선 사람들… 힘든 사람들, 무거운 사람들, 버거운 사람들, 길 잃은 사람들, 전짓불 들고 어렵사리 어둠을 헤쳐 나가는 사람들. 내면의 어둠으로 세상을 밝히지 못하는 사람들. 촛불든 사람들. 촛불을 끄는 사람들, 나이든 사람들. 초조하고, 불안한 사람들. 잠 못 이루는 사람들. 삶의 여울목에서 혼돈스러워 하는 사람들… 그럼에도 어느덧 이 사회의 중추가 되어 세상에 뒤섞여 세상을 움직이고 있는 사람들. 어디선가 묵묵히 자기 소임을 말없이 수행하는 옆 집 아저씨 같은 - 당신과 나같은 사람들. 다시 도전하려고 신발 끈 단단히 조여매는 사람들.
-우리는 눈물도 나는 사십대, 힘 내서 다시 뛰어야 하는 대한민국 사십대들이다.
이 나이에 인생의 닻을 어디에 내려야 할까? 다시 활짝 돛을 펴고 인생 항해에 나설 수 있을까?
돌아보면, 다들 힘겹고 눈물난다. 그래도 삶은 지속되는 것이라 출근길이면 ‘파이팅!’을 외치며 현관문을 나선다. 하루를 힘차게 시작하는 나와의 약속을 매일 매일 반복한다. 두 주먹 움켜쥐고, 더 뛰기 위해, 삶을 단단히 부여잡기 위해 삶의 응원가를 부르며, ‘오늘도 힘차게!’를 외친다.
노후 불안에 심적허기에 살아온 인생보다 살아 갈 인생이 더 가파를 것임을 알기에 스스로 채찍질하면서, 지금까지 쌓아온 것들을 중간 갈무리 하면서 오늘도 뛴다.
마흔, 지나 온 세월은 아쉽지만 인생을 알게 했다. 세월의 힘이 느껴진다.
내 나이 마흔에야 쓴 탕약 같은 인생의 맛을 알게 됐다. 마흔 들며 곱씹어 본 마흔살이는 어느덧 쉰살이 앞으로 다가서고 삶은 노후 불안 앞에서 사시나무 떨듯 한다. 하지만, 오늘도 가족이 있고, 삶은 여기서 끝나는 게 아니다. 내겐 완주해야 할 인생 코스가 있기에 희망의 용기를 내어 본다. 젖 먹던 힘까지 다 내서 앞으로 달려본다. 우리에겐 아직 가야할 길이 있고, 나를 만나 반평생을 함께 한 아내가 있고, 알토란히 같이 커가는 아이들이 있다. 이 시퍼런 나이에, 세상은 얼마든지 나아질 수 있는 것이기에 용기백배한다.
눈물은 마흔에 어른다움을 얻게 하고, 한 남자로 성숙시킨 열매였다.
누구나 마흔에 들면, 텔레비전 드라마만 봐도 눈물이 울컥 난다. 멋진 집을 보면, 나도 저렇게 살아야 하는데, 하는 생각이 굴뚝 같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다. 아이들에게 희망의 부모가 되고자 하지만, 현실은 버겁기만 하다. 농사짓던 아버지, 평생 그럴듯한 명함없던 내 아버지처럼 살지는 말아야 하는 데… 나이가 들수록 점점 아버지를 닮아 간다. 그럴 땐 마흔으로 산다는 것의 의미를 곱씹어 본다. 마흔이 무엇인지 외투깃 여미며 진저리 친다.
<마흔으로 산다는 것>
젊은 날의 꿈은 아스라이 멀어져 간다
내겐 아직 뜨거운 열정이 남아 있는데
어디로 가야할지 어디로 흘러갈지
다다를 수 없는 외로운 인생의 길
외로운 항해와 같이 나를 혼자 위로하곤 하지
바람불면 밀려가고, 바람 멎으면 밀려오며
마흔으로 산다는 건 뼛속 깊이 외로움을 곱씹는 것
몸살앓듯 누군가를 그리워 하는것
나이들어 이제는 사는 게 뭔지 알것 같은데
어느새 머리는 반백, 울고 싶어도 울지 못해
젊어선 아버지와 달리 멋진 삶 살리라 다짐했는데
돌아 와 거울에 비친 내 아버지같은 이여!
아직 펄펄 뛸 수 있는 나이이기에 용기내지만
목젖 가득 울꺽거리는 건
나이 때문만은 아니라고 위로를 하네
이제 외로움도 너를 닮아 반백이 되었다고
마흔으로 산다는 건 외로움을 술잔 가득
인생 가득 붓는 것이라고 허허이 웃으며.
우리들의 마흔은 외롭고 쓸쓸하지만, 돌아보면 가장 힘을 낼 나이이기에 오늘도 뛴다. 나와 같은 우리 시대 마흔들에게 희망이 되고 싶다. 다시 일어서서 보듬고 달리는 희망의 메시지가 되고 싶다. 나로부터 인생의 마지막까지 올곧게 성장해 나가고 싶다. 아직 시퍼렇게 젊은 이 나이에 영원한 청춘의 노래를 부르며 오늘도 달리고 싶어진다.
● 마흔은 세상을 통해 알게 된 자기 목소리를 서서히 듣게 되는 시기이다. 그래서 매사에 조심해야 할 나이다. 어느 시기나 상황은 변해 왔다. 그에 따라 승패도 항시 다르다. 나이 들면 금방이라도 게임이 끝날 것 같아 갑작스런 두려움이 일기도 한다. 득점은커녕 인생의 전반전을 놓고 보면 지금 몇 골이나 먹고 있는지 알 수도 없다. 사십대의 초조함은 이런 데서 온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강박관념이 머리 속을 복잡하게 만든다.(30쪽)
● 나는 어디서건 잘 나가는 아들이 되어야겠기에, 사는 것에 깊은 천착 없이 살아온 시간들이 쌓여 지금의 내가 된 것이 아닌가? 나의 사십대는 그냥 그렇고 그런 시간뿐인가? 사십대의 고충은 경제적인 문제를 떠나서 바로 이런 데에 생각이 미치면 가슴 한 구석이 꽉 막힌 배수구 마냥 그냥 답답해진다. 어머니를 생각하면 나는 내가 아직도 어른이 되지 못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지금부터라도 내 인생의 나머지 절반을 제대로 살아낸다면 나는 스스로 개척한 삶과 거기서 우러난 정신의 폭을 확장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이제는 내 나이대의 진실과 마주하고 싶다.
“세상엔 계속 커 가는 나무가 있다. 그게 바로 너다.”
언제나 어머니 목소리는 내 주위에서 울린다. 내가 휘청거릴 때에도 내가 작은 것에 들떠 있을 때에도….(56쪽)
● 애들이 자라면서 부모는 살인적인 사교육비에 허덕이고, 치솟는 물가에 입을 다물지 못한다. 왜 이 사회는 경제적 안정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을까? 부자들은 왜 돈을 안 쓰면서 부의 파업을 일삼고, 노동자는 왜 경쟁력을 상실해 가는가? 정부정책은 왜 그토록 지지부진하며 기득권의 편에 서있는가? 월급쟁이의 월급봉투는 왜 그렇게 투명한가? 곳곳이 탈세 현장인데, 왜 그런 데서 세원은 보충되지 않고, 애꿎은 월급쟁이 주머니만 터는 걸까? 우리처럼 월급쟁이들의 불만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한 달 용돈을 생각하면 동창들과 술 한잔 제대로 못하고, 친한 친구가 상을 당해도 부의금도 수표 한 장 자신 있게 내지 못한다. 그러면서도 사람 구실은, 인사는 해야 한다. 이런 내가 좀스럽다.(90쪽)
● 아직 푸른 젊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자. 아직 할 일이 많은 것에 감사하고, 그런 사람으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게 해준 모든 것들에 고마움을 표시하자. 여전히 뜨겁게 달아오를 열정의 불씨가 남아 있는 것에 감사하자. 그런 나를 아직 사랑하고 받아주는 아내에게도 고마워하자. 하루살이지만 생각과 행동에 따라서는 무엇에도 견줄 수 없는 긴 시간을 누리며 살 수 있다. 이건 정말로 대단한 축복이다. 마흔은 하루를 천년처럼 살 수 있는 나이다.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렇게 노력한다면, 우린 행복의 절정에 다다르게 될 것이다. 적어도 세상에서 한 인간으로, 한 남자로 누릴 수 있는 만큼의 행복은 다 누릴 수 있다.(122쪽)
● 지금까지 세상을 살아오며 당신은 크든 작든 자기 목소리를 많이도 내 왔다. 그러나 정작 우리는 작은 목소리로 승리해 왔다는 것을 이제는 알게 되었다. 만약에 소리를 질러야만 하는 경우가 생긴다면, 아이들이 뛰어 노는 운동장이나 야구장, 축구장처럼 넓게 트인 곳을 찾아가 맘껏 소리를 질러라. 화도 삭히고, 자기를 위로해 주기도 하라. 운동 경기에서 자기가 좋아하는 팀을 응원하다 보면 당신은 마음속이 다 후련해질 것이다. 또 젊은이들도 기꺼이 당신과 어깨동무를 할 것이다.(146쪽)
● 더욱 더 중요한 것은 인생의 주요한 고비를 넘기며 슬기롭게 자기를 안착시킬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사십대는 어느 때보다도 가장 큰 시련과 혼돈이 있을 수 있는 시기다. 인생을 통해 시도해 본 것의 가치를 아는 나이이면서, 동시에 앞으로 가장 불확실한 시기를 앞두고 있다. 그런 까닭에 나는 이제 삶의 좌표를 분명히 찍고 가야 한다. 자칫하다간 표류하기 십상이다. 아무튼 마흔이란 나이는 세상을 더 알고, 세상에 대해 바로 참여하기 위해서라도 더 많이 배워야 할 나이다.(176쪽)
출판사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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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으로 산다는 것』은 40대를 위한 삶의 노래이다.
누구나 나이 마흔이 되면 삶을 돌아보게 된다. 갈 길은 멀지만, 돌아봄으로써 마음과 몸을 추스린다. 앞으로 나가는 힘은 돌아봄으로써 얻어지고, 삶은 격려와 응원의 메시지를 얻는다. 때로는 생체 변화가 가져오는 ‘눈물’에 온 몸이 흔들리지만, 흔들림은 좌절이 아니라 뽑히지 않는 풀처럼 다시 일어서게 한다. 가족은 그 버팀목이다.
때로는 눈물을 보이고, 가슴이 먹먹하기도 하다. 회사에서는 갑작스런 변화 앞에 허둥거리고 망연자실해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삶은 지속되고 우리는 살아가는 힘,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는다. 마흔이란 청장년의 시점은 용기백배해 인생의 완성을 위해 치닫는 나이이다.
마흔은 영원한 청춘! 사십대에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사십대를 위한 저자의 글이 가슴에 콕콕 와 닿는다.
40대의 삶의 애환은 공감 부족에서 기인한다. 어려울 때 ‘나 어렵다’고 말하고 진지하게 들어 줄 친구가 필요하다. 가족한테도 못하는 말, 직장 생활의 어려움 등 마음을 다 받아주는 사람이 내 곁에 있으면 좋겠다. 삶의 애환을 어디서건 훌훌 털어내고 싶어진다. 그러나 다들 사는 데 바뻐 주변을 돌아보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그 결과 마흔은 우리 모두 각자가 외로운 섬으로 떠돌며 홀로 남는다. 우리 시대 40대를 위한 격려의 메시지는 없는가? 누가 그들의 등을 어루만져주고, 등을 토닥여 줄 수 있을까?
저자는 40대라는 공감대를 통해 삶을 일으켜 세워주는 힘을 보여준다. 힘이란 육체적인 것이 아니라, 정서와 삶에 대한 뚜렷한 의지에 맞닿아 있다는 것을 일상의 소소하고 다양한 이야기를 통해 풀어내고 있다.
『마흔으로 산다는 것』은 정신없이 앞만 보고 달려오다 어느 날 문득 텅 빈 들판의 허수아비처럼 느껴지는 대한민국 40대 남자들의 삶의 애환과 희망을 담은 책이다. 대한민국에서 40대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그렇듯 동시대의 아픔과 고민, 못다 이룬 꿈과 미련에 대해 저자는 소줏잔을 높고 이야기하듯 솔직하면서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대한민국에서 40대로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와 희망 찾기를 진솔하게 이야기한다.
나이듦은 거추장스러운 짐이 아니다. 마흔의 자화상을 통해 삶의 디딤돌을 놓는 작업이다. 인생을 알게 하는 것도, 인생이란 깊은 우물 맛을 음미케 하는 것도 나이듦의 덕택이리라. 그러니 삶에 희망을 가질 필요가 있다. 모두들 분투하고 있기에 함께 심호흡하고 용기를 내어 본다.
마흔을 넘어 쉰으로 치달으며 저자는 지난 5년의 마흔 궤적과 살아온 전생애를 파노라마처럼 보여준다. 가족과 부모님과 직장과 성공이란 말과 인생의 의미에 대해서도…. 이 책이 40만 독자의 마음을 흔들어 놓은 베스트 셀러였던 이유를 잔잔하게 흐르는 강물 같은 삶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다시 확인하게 될 것이다. 그 강물에서 우리의 거친 가슴은 부드럽게 씻기고 삶은 재충전된다.
그간 독자들의 열화와 같은 요청이 편지로 다가왔다. 출판사 편집자는 독자들의 편지를 함께 읽으며 가슴 벅찬 감동과 글의 힘을 느끼게 됐다. 특히 『마흔으로 산다는 것』을 읽으며 “마음에 박혀 있던 녹슨 칼을 뽑아버리게 되었다.”는 내용에서는 모두들 잠시 숨을 멈추어야 했다. 삶이란 대단한 것이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이 책 『마흔으로 산다는 것』을 세상에 다시 선보이는 이유이다.
40대여! 희망을 갖고 다시 일어서라, 그대는 혼자가 아니다. 그대는 더는 ‘홀로’라는 섬이 아니라 ‘함께’라는 섬이 되어 서로의 손을 잡아 줄 수 있다.
독자들이 보내 온 편지 중 일부를 다시 이 책을 접할 새로운 독자들을 위해 옮긴다.
<마흔으로 산다는 것>에 보내온 독자 편지
토론토에서『마흔으로 산다는 것』을 의미 있게 읽은 애독자입니다. 나라가 다르고 '성'이 달라서 삶의 배경이 많이 다르지만 40대라는 공통분모 속에서 동감하는 많은 것들을 가끔 웃어가며 고개 끄덕이며 많은 도전을 받았답니다. 마흔이라는 숫자 개념보다는 '40'(사십)이라는 숫자가 주는 느낌을 더 좋아합니다. 왠지 비장한 각오가 느껴지거든요~ 뭔가 새로 시작해도 20대나 30대에게 뒤지지 않을 비장함... 인생의 뜨거운 통찰력을 지니신 분이라 생각하며 존경합니다. 감사합니다. (40대 jinnyyoo64님)
이 책을 우연히 읽게 되었습니다. 책을 읽으며 내 마음에 꽂혀 있던 칼을 뽑아낼 수 있었습니다. 그 사람에 대한 칼은 녹슬지 않았지만 이젠 용서하고 집착을 버리고 아이들과 내 인생을 살고자 합니다. 고맙습니다. (40대 kimjaya62님)
마흔은 한마디로 만만찮은 일에 직면한 세대이면서 동시에 끊임없이 자신에 대해 질문을 던져야 하는 세대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이해하고, 문제를 어떻게 풀어 나가야 할까? 이 책엔 바로 나와 같은 40대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 있습니다. 40대답게 뭔가 중후하며, 삶을 생각하게 만드는, 단순하지만은 않은 인생을 사는 법 말 입니다. (40대 mommia63님)
지금까지 살아온 날들과 앞으로의 살아갈 날들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좋은 시간이 되었습니다. 『마흔으로 산다는 것』을 읽으며, 지금 나와 관계되어 있는 모든 것에 감사하고 향후 더불어 사는 삶, 베푸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더욱 깊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40대 seacloud님)
책을 구입하여 불과 몇 시간 만에 정독을 했습니다. 새로이 태어난 기분이라고나 할까요!? 이렇게 가슴 깊이 와 닿고 현실적이면서도 어느 누구에게나 공감을 줄 수 있는 책의 내용에 자신을 다시 뒤돌아보게 되었습니다. 남편의 입장에서 뿐만이 아니라 아내의 입장에서도 40대의 주인공들을. 책을 다 읽을 때까지 손에서 놓을 수 없을 것 같은 진솔한 이야기에 메일을 쓰게 되었습니다. 저도 왠 만큼 열심히 살아온 인생이었는데 아직도 꿈도 있고, 이룰 수 있다는 희망도 갖고 있습니다만, 이 책으로 인하여 우리들의 삶에 촉진제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새로운 삶에 도전 할수 있는 계기가 되어 감사 하다는 말씀은 꼭 드리고 싶습니다. ‘40대를 위한 삶의 지침 28’을 토대로 아름답고 멋진 자신의 삶을 만들어 가렵니다.(40대 kawa2님)
선생님과 동갑이라서 그런지 마음에 와 닿는 글들이 많았습니다. 책 줄거리 마지막 부분에 마흔에 필요한 여러가지 지혜를 알려주셔서 감사하구요. 혼자 알고 있기에 아까운 생각이 들어서 회사 동료들에게 몇 자 퍼 나르려고 합니다. 좋은 글 많이 쓰시구요. 성공한 인생 만드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40대 ejeyong님)
내용을 보니 구구절절 나의생활과 비슷하여 공감하는 부분이 많더군요. 사회생활이나 같은 40대라 그런지 깊은 공감을 받았습니다. 저 혼자만 알기에는 부족한 것 같아 제가 자주 들리는 사이트에 좋은 내용을 소개 하려고 합니다. (40대 yhl2022002 님)
남편 나이가 어느덧 40대 중반을 바라보고 있고 저 또한 내년이면 40이 되는 요즘 이것 저것 후회도 되고 갑자기 조급한 마음이 듭니다. 하나도 이뤄낸 것이 없다는 일종의 위기감 같은 거겠죠? (39세 hana님)
『마흔으로 산다는 것』잘 읽고 제 인생에 커다란 지침서로 삼아 살고 싶습니다. 용서할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항상 가슴에 분노와 상심만 가득하게 살아왔습니다. 벌써 마흔이 훌쩍 넘어서 돌이켜 보면 내 인생은 오직 원망과 분노에 멍들었던 듯합니다. 이젠 내가 먼저 노력해야할 듯합니다. 고맙습니다. (40대 kmy1438님)
시대상이 표현되어 있었다고 얘기해야 할까요? 남편에 대해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을 잠깐이나마 갖게 되었네요. 삶의 무게는 저울질하자면 서로가 똑같을 것 같네요. 선생님의 책을 독파하고선 치열한 생존 현실을 더더욱 실감케 하네요. 4학년을 달리는 즈음 마흔으로 산다는 것이 가슴에 잔잔하게 다가오네요. 덕분에 좋은 책, 참 잘 읽었습니다. (40대 ldw4904님)
대학 4학년이 되어서 진로에 대해서 고민도 하고 나의 한계에 대해서 그리고 인생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다가 선생님께서 쓰신 『마흔으로 산다는 것』이라는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어른이 된다는 것에 대한 의미 그리고 나의 아버지에 대한 이해, 그리고 20년 후의 나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책을 읽게 되었고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어떤 분인지 실제로 알고 싶은 마음과 청년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도 많을 실 것 같아서 지혜를 얻고자 이렇게 편지를 씁니다. (20대 hongxray님)
회사에서도 40대 선배들이 겪는 갈등들을 보면서, 40이 되기 전에 그 때를 준비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너무 공감이 많이 갔고, 40이 되기 전에, 그리고 40이 되더라도, 더욱 충만한 삶을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30대 yunsi4님)
ⓒ카인즈교육그룹, 인문경영연구소, 전경일
이 시대 사십대들은 누구이며, 어디로 향하는가?
대학 시절에는 군부독재와 맞서 민주화를 이뤄낸 사람들. 온갖 굴곡진 현대사의 성공과 좌절, 희망과 절망의 경험을 함께 해온 사람들. 대학에서는 민주주의를 외쳤지만, 세상에 나와서는 '사는 건 다 그런 거라고' 변명을 일삼기도 하는 사람들. 올곧이 떫은 땡감으로 자신의 뜻을 꺾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 민주주의를 얻었지만, 쉽게 쪽박을 깨버린 사람들. 다시, 민주주의 회복을 갈구하는 사람들. 지역주의와 학벌, 연고로 가득찬 기득권층을 증오하면서도 개인의 영달을 위해 거기에 뛰어 들고 싶어 안달하는 사람들. 돈과 명예가 따르는 성공을 누구보다 열망하는 사람들. 성공을 위해서라면 초심을 헌신짝 같이 던져 버리기도 하는 사람들. 자신의 정치적 신념과 달리 밥벌이를 위해서라면 철저히 달리 행동하는 사람들. 그러면서도 세상 탓에 그렇다고 자기 합리화를 하는 사람들. 학력 차별 철폐를 주장하면서도 내 자식은 누구보다 남의 윗자리에 가 있게 하려고 사교육에 몰두하는 사람들. 머잖아 인생의 장년기를 외롭게 보내야만 하는 사람들. 자기 세대의 짐 때문이라는 핑계로 다음 세대를 돌볼 여유조차 없는 사람들. 20대 실업을 해결하기보다, 그들과 함께 밥그릇 싸움을 해야하는 삶의 여울목에 놓여있는 비정한 사람들. 가족을 부양해야 할 가장으로서 누구보다도 책임이 막중한 사람들. 직장인들, 실업자들, 퇴직자들, 구조조정의 희생자들, 힘겨운 비정규직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힘든 사람들, 무거운 사람들, 버거운 사람들, 길 잃은 사람들, 전짓불 들고 어렵사리 어둠을 헤쳐 나가는 사람들. 내면의 어둠으로 세상을 밝히지 못하는 사람들. 촛불든 사람들. 나이든 사람들. 초조하고, 불안한 사람들. 잠 못이루는 사람들. 그럼에도 어느덧 이 사회의 중추가 되어 있는 사람들. 어디선가 묵묵히 자기 일 수행하는 옆 집 아저씨 같은 주변의 사람들. 다시 도전하면 이번에 뭐든 잘 해 낼 것 같다고 불끈 주먹쥐는 사람들...
이처럼 대한민국 사십대의 이야기는 오늘날 우리 사회의 모든 표정이 투영돼 있다.
지금, 대한민국 사십대, 우리는 어디로 향하는가, 사연 많고, 눈물 나는 이여! 가장들이여!
오늘부터 우리들의 이야기를 다시 쓰고자 한다.
프롤로그
세월의 칼날이 내려친 자리에 어느덧 반백의 중년으로 남아 있는 사십대들. 그들이 사는 세상은 눈물겹다 못해 가슴 저리다. 극단의 양극화로 신분 상승 기회조차 꿈꿔보지 못하는 사회, 선택의 여지가 없거나 폭이 너무 작은 사회, 열심히 달렸으나 텅 빈 자신만 뎅그라니 놓여 있는 걸 알게 되는 세대...
사십대에게 희망은 있는가? 마중물처럼 나를 부으면 희망을 길어 올릴 수 있을까? 사는 게 각박해도 울고 웃으며 주먹을 쥐고 달려가야만 하는 나이, 마흔….
대한민국 사십대의 애환을 달랜 20만부 베스트셀러 <마흔으로 산다는 것>을 쓴 후 7년여의 세월이 흘렀다. 도서관 대여까지 합치면 대한민국 40대 인구 100만명이 읽었다는 내 생애 최고의 베스트 셀러...
이제 나는 사십대 중반을 넘어 지천명의 나이로 달려가고 있고, 대한민국은 언제나 그랬듯, 변함없는 격랑의 소용돌이에 놓여있다. 지난 7년 사이, 정치적으로는 참여정부에서 실용정부로 바뀌었고, 두 전직 대통령이 안타까이 유명을 달리했으며, 부동산과 펀드 열풍이 불길처럼 번지더니, 세계경제위기 이후로는 주춤하다가 다시 상승세를 보이는 듯 하다가 다시금 한없는 추락의 길로 접어드는 듯하다. 10년 전이나 7년 전이나 지금이나, 기업의 구조조정은 늘 현재 진행형이다. 그래서 혼동스럽고, 두렵고, 불안하다고들 한다.
세상이 혼동스러운 만큼 사십대 잠자리는 뒤숭숭하다. 지난 7년 사이, 적잖게 나이도 들고, 시련도 겪어봤을 대한민국 사십대들. 격랑 속에서 억척스럽게 살아가고 있지만, 살면 살수록 나아지는 건 별로 없다는 사십대들…. 자녀 양육비, 사교육비, 집값, 구조조정, 해고, 비정규직 문제 등등… 무엇이 문제일까?
그간, 주변의 사십대들처럼 나도 많은 부침을 겪었다. 유력 포털사 임원에서 이동통신사 팀장으로 이직했다가 본의 아니게 회사를 떠나 내 일을 시작해야만 했다. 아마도 이런 개인적 경험은 우리네 사십대가 처해있는 고통스러운 현실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회사형 인간에서 내 일을 시작했다는 걸 두고, 사람들은 인생 2막의 이정표가 될 수 있을 거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나의 마흔살이를 다시 보여 달라고들 했다. 내가 사는 삶의 궤적이 이 시대 사십대들의 공통분모라며….
<마흔…> 이후 대한민국 사회는 어떤 빛과 그림자를 투영해 내고 있는가. 갈수록 탁탁하고 돌밭뿐인 사십대를 위한 희망의 등불은 무엇인가? 목숨을 걸고라도 지켜야 할 마흔 삶살이는 무엇인가?
지난 7년간 나의 경험을 통해 생활 속에서 돌아보고, 느낀 것들, 삶은 이래야 되겠구나, 하는 것들을 기록했고, 한데 묶기도 했다. 누구나 겪고 생각해 봤음직한 이야기를 독백하듯 잔잔하게 풀어내며 사람들과 공감하고 싶다. 나의 바램, 지향과 궤를 같이 하는 세상의 벗들의 삶을 고스란히 담아내는 스냅 사진을 찍고 싶었다. 내 소명을 다하고 싶다. 해서 이제 본격적으로 <마흔으로 산다는 것2>를 쓰고자 한다.
살며 느끼는 것이지만, 평범한 하루라도 삶에 불꽃처럼 터지는 희망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할 때면 기운을 얻는다. 마흔엔 속으로 우는 것도 때로는 힘이 된다는 것을 안다. 때로 하늘을 올려다보면, 울컥함이 목젖을 뒤흔들며 눈물이 핑 돌지만, 사십대,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그대는 복되다. 동년배들과 호흡하며 이 순간을 사는 것만으로도 선택받았기에 할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해서 우리는 다시 한번 더 행복하다.
앞으로 써내려갈 상념스런 글편을 통해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갖게 될 것 같다. 짧으나 긴 이 이야기들은 일상의 부유물이 차분히 가라앉는 침잠과 동시에 정신을 맑게 부상시킬 것을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작은 것들이 흔들어대는 힘이란, 아이들의 웃음처럼 얼마나 놀라운가!
우리는 자신에 주목하기 위해 타인이 남긴 긴 그림자를 유심히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내가 남긴 그림자를 누군가가 밟듯, 남들이 달린 그 길을 내가 지금 걸어가고 있다. 이것만으로도 엄청난 동질감이 생긴다.
<마흔>의 글편을 주워 모으며 이 시대 동년배들과 함께 걷는 오솔길에는 오늘따라 유난히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져 있다. 가끔, 홀로 묻는다. 그대도 외롭고 서러운 마흔인가? 뻔한 TV 드라마를 보면서도 때로는 눈물이 왈칵 쏟아지는, 그런 마흔인가? 굳게 마음 먹고, 세상을 행해 당당하게 소리쳐야 하는 마흔인가? 자라나는 우리 아이들을 위해 부모로서 최소한의 예의와 책임을 다하고 있는 마흔인가?
묻고 또 물으며 내 인생의 뚜렷한 길을 가고자 한다. 지천명이 낼 모레다. 종이 위에 떨어진 물방울처럼 누구에게나 짧은 생애일지라도 우리 삶을 돌아 보며 세상에 조그마한 보탬이 되고 싶다. 그런 마음으로 글을 쓰고, 인생을 살고, 세상에 환한 전짓불 하나 큼지막히 밝혀두고 싶다. 나는 당당하고, 또렷하며, 사람들과 함께 하고 싶다.
ⓒ전경일, <마흔으로 산다는 것 2>
큰딸애가 멋진 숙녀가 되어가고 있다는 징후를 곳곳에서 발견하곤 한다. 아직 십대인 아이가 거울에 얼굴을 비추며 여드름을 짜고, 머리를 매만지고, 표정 연기를 하고, 맵시를 돋보이게 하려는 것은 성장기 아이들에겐 그 어떤 일보다도 중요할 것이다. 그것은 성장하고 있다는 증거이며, 사람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법을 자연스럽게 터득해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딸이 이렇게 멋지게 커서…….’ 속으로 흐뭇한 마음이 들곤 한다.
큰 딸애에게 생긴 가까운 변화를 나는 최근에야 눈치챘다. 아이가 왜 앞의 머리로 이마를 가리고 싶어하고, 샤기 컷을 해야 하고, 반 친구와 다투고 온 날 왜 침대에 누워 번민에 사로잡혀 있어야 하는지…….
그날 그 애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멋진 딸: “아빤 정말 모르세요? 여자애들이 가장 고통스러운 때가 언젠 줄 아세요?”
미련퉁이 아빠: “왜? 친구하고 싸웠을 때?”
멋진 딸: “거봐요? 아빤 전혀 모른다니까요. 여자애들은요. 세 가지 상황을 가장 두려워해요. 첫째는요, 나와 누구도 짝이 되려하지 않을 때고요. 둘째는요, 점심을 같이 먹으려고 하는 친구가 없을 때고요. 셋째는요, 집에 돌아오는 길에 같이 올 애가 없어 혼자 오게 되는 거예요. 그것도 모르면서 아빠가 나를 이해한다구요?”
나는 그만 말문이 막히지 않을 수 없었다. 속으로는 그까짓 거야, 네 또래 때에는 다 그랬단다, 얼마든지 있을 법한 일이지, 그게 뭐 큰일이라도 되냐…… 고 대꾸해주고 싶었지만, 잠시 생각을 가다듬은 나는 내가 들려주고 싶은 정답 대신 전혀 다른 질문을 던졌다.
미련퉁이 아빠: “아빠가 가장 두려워하는 게 뭔 줄 아니?”
딸애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나를 쳐다본다.
미련퉁이 아빠: “아빠가 언제 회사를 그만두어야 할지를 모를 때, 너희들이 아빠의 바람과 달리 나갈 때, 엄마나 너희들이 아플 때…….”
큰애는 그저 나를 쳐다본 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건 아빠의 고민이라는 듯이……. 이로써 우리는 서로가 가장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부모와 자식 간에는 서로를 알아가는, 서로가 지닌 두려움이라는 게 뭔지 잘 알 필요가 있다. 하지만, 내가 지닌 두려움을 딸애 앞에서 계속 강조하거나 반복하는 것은 의미 없어 보인다.
그날 밤이었다. 나는 내 책상에 메모지가 한 장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아빠, 두려워 마세요. 아빠의 두려움이 제 것보다 더 크다고 말씀하지도 마세요. 하지만 모든 게 잘될 거예요. 사랑해요.” 메모지에는 하트 모양이 여러 개 그려져 있었다. 사랑의 징표에는 우리가 나눈 두려움이 써져 있었다. 그것을 극복해야 한다는 메시지도 함께 들어 있었다.
아직은 철없다고 믿었던 딸애에게서 나는 적잖은 충격과 감동을 받았다. 큰애가 지닌 따뜻한 마음을 온전히 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모로 봐도 맞는 말 아닌가!
과연 내가 지닌 두려움이 아이가 가지는 두려움보다 크다고 말할 수 있을까? 어떤 두려움이든 사랑으로 극복해갈 수 있다는 딸애의 생각은 편지에 고스란히 묻어났다. 아이들은 참으로 대단하다. 그들이 하는 이야기를 느낄 수 있고, 기꺼이 받아들이는 부모에게는 정신적 성장통을 부여한다. 아이들이 부모를 이끄는 방식이 이런 것인가?
ⓒ전경일.이민경, <부모코칭이 아이의 미래를 바꾼다>
우리 부부가 진지하게 아이들 가정교육에 대해 토론한 적 있는데, 어느 면에서 서로 약간씩 어긋나는 점을 발견했다. 부부가 생각이 다 같을 수 있다면, 같이 살아가며 배울 게 무엇이 있을까. 물론, 상호보완적 기능도 많이 떨어질 것이다. 특히 내 경우는 아이들하고의 대화 중 그 같은 문제점이 크게 부각되곤 한다. 여러 면에서 나는 아직 ‘덜 된 아버지’인 게 분명하다.
아이들과 소통하는 방식에 대해 주로 부모는 가르치려 들지만, 실은 많이 들어주고, 많이 말하도록 하는 것이 아이들을 배려하는 것이다. 나는 이 점을 종종 잊곤 한다. 물론, 이 점에 관한 한 나는 덜 배웠거나, 덜 깨우친 아버지임에 틀림없다. 가장은 카리스마를 발휘해야 하는 것으로, 그것이 권위인 것으로 오랫동안 생각해왔으니까 말이다. 아버지는 강한 것, 뭐 그런 게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건 오산이다. 아버지에게 가장 필요한 건 인간다움이다.
기존에 내가 가졌던 신념은 너무나 한순간에 어이없이 무너졌다.
딸아이에게 ‘인생에서 승자가 되는 법’ 따위의 열변을 토하다 나는 그만 방귀를 뀌고 말았던 것이다. 그때 가족 중 누군가가 재치 있게 농담을 했다.
“아빠는 위아래로 열변을 토하시는군요!”
나는 그때 무안했지만, 아내는 재치 있게, “아버지가 열정적으로 얘기하다보니까 생긴 거다. 이건 NG니까 빼주렴.”
나는 이쯤에서 열변을 멈춰야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그때의 일로 아버지 됨의 다른 의미를 생각해보게 되었다. 온몸(?)으로 말한다고 먹히는 게 아니다. 나직하게 얘기하고, 진심으로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백번 열변을 쏟는 것보다 훨씬 큰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물론, 생리적 실수를 할 리도 없다.
그동안의 나의 아이들에 대한 태도는 ‘세상에 너희들이 알아야 할 것이 너무 많아 아버지가 가르침의 대화를 독차지할 수밖에 없다’는 식 아니었을까? 아니면 ‘너희들과 참된 대화를 실컷 나누지 못했던 것은 시간이 너무 없고 너희들에게 가르쳐야 할 것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야’ 이런 식 아니었을까? 일방이 지닌, 스미지 않고 그저 흘러가버리고 마는 현상을 간과했던 셈이다.
만일 나처럼 이 같은 생각을 해온 아버지가 있다면, 그건 자녀와의 관계가 총체적 냉담 상태에 놓여 있다는 것을 뜻한다. 좋은 대화란 추임새 있는 대화를 말한다. 상대의 의중을 헤아리면서 말하고 듣는 능력은 어려서부터 배우지 않으면 성인이 되어서는 쉽사리 배울 수 없다. 그것은 인성을 형성하는 하나의 태도이다. 그런 대인관계의 성공적인 태도는 어렸을 때부터 자연스럽게 생활 속에서 체화된다.
요즘 아이들의 문제점으로 상상력이 낮거나, 문장 구성력이 허술하거나, 인문학적 배경이 없어서 다양한 사고를 전개시킬 수 없다는 것 등은 학교나 학원에서 공부하는 것으로 어느 정도는 채워질 수는 있다. 그러나 아이들이 타인의 이야기를 잘 듣게 하려면, 그것은 부모의 피나는 노력이 뒤따라야 한다. 인내, 끈기, 이 두 가지가 전제되어야만 한다. 자신과 대화를 하는데 익숙하지 않은 부모는 자녀에게 듣기 공부를 가르치는데 맹점을 드러낸다.
자녀와의 최선의 대화는, 필연코 나를 듣는 사람이 되게 만드는 기술이다. 그건 뛰어난 인성과 분리되어 생각할 수 없다. 부모의 삶을 생활로 듣게 하고, 부모의 행동을 일상에서 보게 하며 느끼게 만드는 것이다. 세상에 부모의 이 같은 행동보다 더 큰 울림이나 웅변이 어디 있을까.
ⓒ전경일.이민경, <부모코칭이 아이의 미래를 바꾼다>
한여름, 회사 워크숍차 찾아간 남한산성 숲속엔 매미들이 극성스럽게 울어대고 있었다. 여름 한 철을 살기 위해 삼 년간 굼뱅이 시절을 겪어야 한다는 그 흔한 얘기는 집어 치우고, 그런 굼벵이나 매미나 다들 아득바득 살아간다고 생각하니, 사람 사는 것도 그와 전혀 다를 것 같지 않아 헛헛하기만 했다. 특히 한 가정의 가장으로, 이 사회의 중심으로 살아온 40대라면 누구나 가끔은 그 허전함에 소줏잔도 기울일거라고 생각하니 40대 직딩 모두에게 파이팅을 외치고 싶었다.
생각해 보면 사회에 나와 근 이십여년을 뒹군 이 시간이 긴 것 같아도, 지내놓고나면 정말 짧은 시간이었다. 이런 인생의 짦음은 구태어 역사책의 연대표에 비교해 보지 않아도 쉽게 알 수 있겠지만, 구태어 연표에 빚대어 본다면 대뜸 이같은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내 인생의 시간은 점 하나도 되지 않는구나!’
긴 인생은 하나도 없다
그렇다. 우리의 시간은 유구한 인류의 역사에 비추어보면 점 하나도 되지 않는다. 그런 시간을 살다 가는 것이다. 마치 짧은 시간 동안 나타났다 사라지는 반딧불과 같다. 그런데도 순간을 마치 영원처럼 착각하고 산다. 갑자기 타임 머신을 타고 사라졌다가 백년 후에 지금 있는 장소에 나타난다면, 지금처럼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 사람들의 웃음 소리, 물건 값을 외치는 장사꾼의 고함 등등 그 모든 것은 한순간에 사라지고 없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정말 짧지 않은가? 그런데도 매순간 그걸 잊고 산다. 사는데 무지한건지, 알아봐도 소용없는거니까 이렇게 살아야만 하는건지조차 모르는 것 같다.
그렇다면 마흔이 넘은 나이엔 이 짧은 생에 대해 당신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 삶이 허망해 보이기 때문에 염세주의에라도 빠지라는 건가? 아니다. 그건 삶을 방기하는 것이지 책임있게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인간의 문제를 풀기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다.
당장 퇴장을 하더라도 인생이란 놀이터가 엉망이 되지 않도록 만들 책임은 당신에게 있다. 모두가 하루살이의 삶을 사는 거지만, 나는 더욱 내 삶을 전심투구로 살아가야 한다. 그리고 그런 성취를 다음 세대에 넘겨주어야 한다. 삶에 대한 태도에 있어서도 단 한번뿐이므로 여름날 저녁 무렵 땅 속 깊은 곳에서 길러 올린 우물물 처럼 그런 쾌적함을 갖고 살아야 한다.
행복은 챙기기 나름
마흔이란 나이는 지나온 시간 때문이라도 남아있는 시간에 더 민감해져야 한다. 대충 흘려보낼 시간이란 없다. 더구나 주위에서 누군가 쿵, 쓰러졌다는 소식이라도 들리면 더욱 의미있는 생의 시간을 보내고자 애써야 한다. 이것은 일 만큼이나 소중하다. 매일 매일 잊지말고 행복을 찾아라. 자기의 행복을 챙겨라. 오늘 행복하지 못하면, 앞으로 영영 행복해 질 수 없을지 모른다. 참을성 있게 목적의식적으로 삶에 대해 강인함과 열정을 보여라. 마흔에는 다시 다가오지 않을 젊음을 생각하며 젊음이 맥없이 손에서 미끌어지지 않도록 꽉 움켜 쥐어야 한다. 힘차게 일하고 노력하는 건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 위한 필요 요소다.
아직 이렇게 푸르른 젊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에 감사드려라. 아직 할 일이 많은 것에 감사하라. 그런 사람으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게 해 준 그 모든 것에 고마움을 표시하라. 여전히 뜨겁게 달아 오를 수 있는 열정의 불씨가 남아 있는 것에 감사하라.
하루살이지만, 생각과 행동에 따라서는 역사에 버금가는 긴 시간을 누리며 살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축복이다. 마흔은 바로 하루를 천년처럼 살아갈 수 있는 나이이다.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렇게 노력한다면 당신은 행복의 절정에 이르게 될 것이다. 적어도 세상에서 다 누릴 수 있는 만큼의 행복은 자신이 다 누릴 수 있을 것이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하루 하루를 살았으므로 당신은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다. 마흔이라는 숫자는 바로 그런 하루의 합인 것이다. 오늘 가장 멋진 하루를 살아라. 하루 하루는 당신의 인생을 열어주는 내일이라는 것을 알고 멋진 하루살이가 되어라.
ⓒ전경일, <마흔으로 산다는 것>
“형, 그런 거 나 못해요. 뭘 그런 부탁을...”
나는 피식 웃으며 재차 요청을 했다.
“나를 좀 요약해 보라고. 왜 그런 거 있잖아? 캐리커천가 뭔가 하는. 뭐, 이렇게 비싸게 굴거야야? 술 한잔 산대두.”
후배를 한참 다둑거려서야 예술작품으로 그려 주는 것이 아니라는 꼬리표를 달고 그림 하나를 얻었다. 거기에다가 나는 내 나름대로 제목까지 덜렁 붙였다.
<나의 summary.>
후배 왈, 내 얼굴을 요약하면 이렇다나. 안경을 꼈고, 코가 크며, 머리는 쭈뼛쭈뼛하다. 내 머리카락은 너무 굵다 등등. 아무튼, 나는 이 캐리커처를 종종 보게 된다.
한참 지나서 생각해 보게 된 것인데, 그때 나는 왜 후배에게 내 얼굴의 그림을 요청한 것일까?
분명한 것은 그 무렵 나는 생각이나, 생활이나 모든 게 헝클어져 있었었다. 은행 잔고는 바닥나 있었고, 몇 달 째 실직상태였으며, 쥐고 있던 주식은 휴지조각이 되어 버렸다. 한마디로 거덜난 인생이었다. 그 무렵, 인간에 대한 배신감이 정점을 이뤘다. 그러다보니 몸도 마음도 말이 아니게 피폐되어 있었다. 헝클어진 실타래를 끊어내고 처음부터 다시 이어 갈 수만 있다면? 그런 욕망이 그런 요구를 하게 만들었는지 모른다. 후배에게 요청한 ‘나의 요약본’도 그런 내 상태를 반영한 게 아닌가 싶다. 그땐 그랬다.
그 후, 나는 용케도 복잡하고 뒤엉킨 상태에서 벗어났다. 아마 나를 요약해 봄으로써 구질구질한 잔가지는 다 쳐내고 나의 본질에 다가갈 수 있었기 때문 아닐까? 그때의 경험으로 나는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되었는데, 그건 삶을 단순화시키면 더 많은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었다.
우리가 하루 종일 느끼는 감정과 상태는 사실 삶을 구성하는 모든 부분들은 단순히 늘어 뜨려 놓은 것에 불과하다. 만일 이런 것을 간단히 모아 보라면 인생을 대하는 방법은 훨씬 더 간결하고 정밀해 질 것이다. 가치 있는 것들이 가장 중요한 집중 대상이 될 것이다. 사랑, 우정, 믿음, 도움, 희망, 의리, 노력, 땀, 웃음, 가족, 껴안음, 입맞춤, 탄생, 슬픔, 죽음... 이 모든 가슴 벅찬 감정 앞에서 가장 간결하게 힘이 되는 부분은 키우고, 어렵고 복잡하게 만드는 일은 요약해 내는 단순 명료한 가치만 남는다. 그걸 알게 되었다.
내 캐리커처를 볼 때면 늘 눈이 가린 얼굴 때문에 생각해 보게 된다. 단순히 안경알 때문에 이렇게 그리게 된 것일까? 아니면, 세상을 보는 눈이 없어서 그런가? 내 삶엔 화룡점정의 마무리가 없다는 뜻일까? 요즘에도 이 캐리커처를 볼 때면 내 삶을 간결하게 하려고 몸부림치던 그 시절이 떠오른다. 나는 이제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갖게 되긴 했나? 그림 속 나는 여전히 허공만 응시하고 있는 건 아닌가? 적지 않은 질문이 계속 떠오른다.
ⓒ전경일, <나에게 묻는다>
“아니, 퇴원이라뇨?”
“환자분 데리고 집으로 가시지요. 맛있는 거나 실컷 드시게 해드리세요.”
건강검진 때 위 내시경 검사를 해봤더니 급히 큰 병원엘 가보라는 말을 듣게 된 친구였다. 부랴부랴 큰 병원에 예약을 하고 검사해 보니 위장 암 말기라고 했다. 병원에서는 묻는 말에 그저 같은 말만 되풀이 했다. 주치의는 조직검사 결과 수술을 해도 이미 늦었다고 말했다. 환자가 고통만 받을 뿐이지, 아무런 효과도 기대할 수 없는 수술은 뭐러 하냐는 거였다. 친구의 아내는 순간, 실성한 사람처럼 눈이 팽 돌더니, 다리에 힘이 풀리며 주저앉았다. 나는 엉거주춤 친구 부인을 부축해 의자에 앉혔다.
암-. 안 걸리면 팔십까지는 무조건 산다는 얘기처럼 암은 정말로 무서운 병이었다. 어떻게 멀쩡한 사람 속에 저렇게 파고들어 썩은 사과 속처럼 다 망가뜨릴 수 있나 싶었다. 겉으로는 멀쩡하고, 아무 이상 없어 보이는데 말이다.
며칠 후, 친구 부인한테 전화를 해보니 퇴원해서 지금은 시골에서 요양 중이란다. 그러며 남편이 먹고 싶다는 거 다 해주고 싶은데, 별로 먹고 싶은 게 없다고 한단다. 그러며, “당신 나 죽으면 어떻게 살래?” 자주 같은 말을 물어 온단다. 그럴 때면 둘이 껴안고 한참을 운단다. 서러워서. 속아 산 인생이 서럽고, 남편을 더 위해 주지 않은 자기가 미워서.
차를 몰아 친구가 머무는 요양소까지 가는 길에 나는 착잡한 심정뿐이었다. 마음만 무거웠다. 그러면서도 알 수 없게도 마음 한편에서는 ‘조금 일찍 가는 거지.’하는 경박한 생각이 고개를 들었다. 사람은 참 알 수 없는 존재다.
친구를 만나서 시골 길을 같이 산책했다. 친구 부인은 쑥물을 받치고 있을 테니 나갔다 오라고 했다. 무슨 얘기를 한단 말인가?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까? 망설이는 내게 친구가 먼저 말했다.
“이렇게 살아서 걸을 수 있는 것만도 기막힌 일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을 언제 또 보지? 머지않아, 나는 죽어서 땅 속에서 누워 있을 텐데...”
“다 죽잖아.” 나는 담담하게 대꾸해 주었다.
“내 집사람... 재혼, 부탁한다. 아직 젊잖아. 어디 좋은 사람 있으면 소개 좀 해 줘. 나 죽어서도 너 고마워할게.”
친구나 나나 고개를 돌렸지만, 그건 서로의 눈물을 감추려 한다는 것을 모를 리 없었다.
“대학 다닐 때, 너 나 때문에 아버지한테 진땅 얻어 맞었지? 소 판 돈으로 친구 학비 도와줬다고?”
“그랬었나?”
“나, 그 돈 못 갚고 가네... 인생이 너무 짧아서 못 갚는 거야.”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친구는 하늘을 바라보며, 목울대를 울렁거렸다. 그렇게 친구와 마지막 밤을 보냈다.
친구와 헤어지고 나서 섟 달 뒤, 나는 친구의 장례식에 갔다 왔고, 첫눈이 내리는 광경을 휴게소에서 차를 세워놓고 바라보았다. 사람들은 수없이 어디로 갔다 오는지 차량의 행렬은 끝이 없다. 나는 잠시 멈추어 섰다.
‘이런 아름다운 풍경을 언제 또 보지?‘
친구의 말이 환청이 되어 들렸다. 그랬다. 산다는 건, 매일 매일 새로운 날들을, 인생의 첫날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라는 걸, 왜 몰랐던가? 무수한 인연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 죄를 짓고, 돈 버느냐고 아등바등 거리고, 예쁜 여자 얻어서 새끼도 낳고 하면도, 왜 하루하루를 속절없이 살기만 했었던가?
고속도로는 연말 차량으로 정체였지만, 나는 천천히 차를 몰며 이 어둠이 가시고 나면 보다 용기 있는 삶을 살리라 다짐했다.
‘산다는 거, 그거 아무나 하는 거 아니잖아. 그런데도 그걸 모르고 살다니. 인생? 정말 처음처럼, 태어난 첫날처럼 사는 거라구.‘
그런 생각을 하며 부지불식간에 나는 친구 부인에게 소개할 만한 사람이 누구일지를 생각해 보고 있었다.
ⓒ전경일, <나에게 묻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