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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밀꽃 피는 동네

국민학교 6학년 때의 일이다.
내게는 영수라는 친구가 있었다.


우리는 머잖아 중학생이 될 거라는 막연한 기대와 설렘 속에서 마지막 학기를 보내고 있었다. 담임선생님은 때로는 중학교 생활에 대해 이것저것 얘기해 주곤 했는데, 어떤 아이들은 중학교에 가게 되면 영어를 배운다는 얘기에 이미부터 알파벳을 외우거나, 읽기도 했다. 그런 녀석들은 공책에 알파벳을 적어가며 은근히 자랑하는 눈치였다.

영수는 공부를 썩 잘해 중학교 진학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정작 녀석은 진학 얘기가 나오면 교실 뒤편에 앉아 고개를 푹 떨군 채 아무 말이 없었다. 선생님은 쉬는 시간이면 녀석을 불러 설득하곤 했다.

“진학을 안 하면 뭘 하려고 그러니? 아버지께 말씀 드려서 꼭 중학교는 가도록 해라.”

하지만 선생님의 이런 당부에도, 녀석은 늘 같은 대답으로 일관했다.

“저는 아버지를 도와드려야 해요. 벽돌 공장 일이요.”

영수의 아버지는 벽돌공장 인부였다. 하루의 품삯을 받아 생활하는 형편이라 영수를 중학교에 보낼 만한 여력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그 시절은 그야말로 먹고사는 게 고되고 엄중한,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곤궁허기만 했던 시절이었다.
영수는 가끔 친구들에게 벽돌 만드는 법을 자세히 설명해 주곤 했다. 공장에서 어른들이 모래와 시멘트를 섞어 반죽을 한 다음, 틀에 부어 모양을 만들고 나면, 영수는 그 틀을 벗기는 일을 한다고 했다. 며칠이 지나 벽돌이 마르면 차곡차곡 쌓아 두는 것도 영수의 몫이었다. 아마도 영수는 그 일을 하면서, 자신이 같은 반 또래들보다 훨씬 빨리 어른이 되어가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마지막 학기에, 녀석이 볼을 붉히며 설명해 주었던 ‘벽돌 만들기’는 겨울이 가다오면서 우리들 머릿속에서 잊혀져 버리고 있었다. 나 역시 중학교에 간 다음에는 그를 까마득하게 잊어 버렸다. 새로운 친구들이 영수의 자리를 채워 나갔고, 영수는 끝내 기억속에서도 지워진 친구가 된 것이었다.

그랬던 그의 소식을 고향 친구 편에 듣게 된 것은, 내가 군대를 갔다 오고 대학에 다시 복학할 무렵이었다. 스무 살이 끝자락을 향해 치닫던 시절이었다.


“장사를 한다더라, 시골 장을 돈다던데.”

나는 가슴이 뭉클해지며, 갑자기 미안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그 친구는 그렇게 살아왔구나.’

이미 고향의 벽돌공장은 사라진 지 오래였지만, 내 기억 속에 그가 만든 벽돌은 오랜 시간 차곡차곡 제 나름의 집을 짓고 있었다. 이제 그도 자신의 길을 걸으며 그 고사리 같던 손이 왕사발만 해졌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 목구멍을 막는 무엇인가가 느껴지며 가슴 깊은데서 뭉클한 무언가가 솟구쳐 오르는 것을 느꼈다. 미안한 감정이었다.

그렇게 나는 대학의 마지막 학기를 맞이했다. 어느 날, 같은 과 친구가 내게 과제를 부탁해 왔다. 영미시 과제로 내게 시 한 편을 써달라는 것이었다. 불현듯 나는 그때 왜 영수가 떠올랐을까.
장돌뱅이로 전국을 떠돌며 살아간다는 그를 떠올리며, 나는 한편의 시를 써내려 갔다. 머릿속에서는 강원도 5일장을 떠도는 그의 모습이 아스라이 그려졌다. 그 또한 <메밀꽃 필 무렵>에 나오는 동이처럼 메밀꽃 피는 수십, 수백리 마을들을 돌며 살아 갈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 시를 통해 그의 운명에 한 걸음이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다. 나는 녀석이 제 몫의 삶을 끈질기게 붙잡고 살아가는데 숙연함 마저 느꼈다. 나는 그가 누구보다도 멋진 인생을 살기를 바라면서, 순식간에 써내려간 시에 마침내 마침표를 찍었다.


나는 영수는 어렸을 때 이후로 얼굴을 본 적이 없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교실 뒷자리에 묵묵히 앉아 몽당연필을 쥐고 있던 그 소년을 기억하고 있다. 나는 그날 쓴 시를 마음속으로 그에게 선물했다. 지금이면 그도 나처럼 마흔 넘은 중년으로 이 한 세상을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그를 생각할 때면, 나는 지금까지 내가 누려 온 행복이 얼마나 컸는지 깨닫는다. 또 예전에는 몰랐던 애뜻한 마음이 인다. 서로 다른 모습으로 한 시대를 살아가는 먼 곳에 있는 친구... 우리가 말하는 이 시대의 가벼운 친구가 아닌, 인생의 숙연함을 알게 해 주는 친구는 내 마음 속에 여전히 남아 있다.
ⓒ전경일, <남자, 마흔 살의 우정>


* 독자들을 위해 25여년 전 썼던 시를 여기에 소개할까 한다.



장꾼의 꿈

           -장돌뱅이 친구에게


허어,
새벽 장터도 사람의 숨결이
묻어있는 곳이라
거침없이 주고받는 장꾼들의 욕지거리에도
허리춤을 풀어헤칠 만큼 넉넉하다

좌판은 걷어지고 장터는 전지불을 내다 건다
입에 단 소줏잔이 돌려지고
어우러져 돌아가는 한판이 무르익으면
취기에 벌어진 마음은 초겨울을 재촉하는
북새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들판을 불어 볼에 닿던 건들마도
뿌연 비포장도로를 달려 장으로 가던
노곤함도
모두 트럭위에 실려 어느새 눈발은 희끗한데,
오일장이라 발걸음은 빠르고
묻어 둔 장터의 각시도 볼 겸해서
마음은 얼간히 멀찍이 앞질러 간다

신포리쯤에서 꼬기 꼬기 뭉쳐 둔
고향 땅 편지에 섞어
막 돈 서푼이나마 홀어미에게 동봉했을 때
그래도 나이를 거져 먹은 건 아닌지

남 모르게 눈두덩을 훔쳤다

내년이면 꺽어진 육십이라고
다들 놀림이지만
혼사 걱정에 태산을 베고 누워계실
홀어머니는 오늘도 경대 앞에서
쇤 머릿결을 빗고 계실지

객지 생활에
찬밥 한술 못 뜨는 적도 많건만
그래도 아랫목에 파묻혀 있을 밥주발
어머니 정성에 몸은 축나지 않고
화투장도 넘겨보지 않았다

남들은 죄다 전답 치워 상경 한다 더구만
이제 삼년이다
고향땅 물코 좋은 상답이라도 몇 마지기 될 듯하면
결심처럼 삽자루는 손에 익을까

오일장에 한 번 씩 돌아가는 화천 장터에
눈 맞은 색시하고는 혼례라도 치르고 나면
오일에 한번 씩 그 짓을 하라는 건가

사랑삼아 새끼도 내지르고
마누라쟁이도 쪼그라들 때면
손자 본 단 말 나오겠지

세상은 또 어떨 건가
비루먹을 무식 잡놈만
장바닥 떠돌던 그 오랫 적 얘기는 아니겠지

내일 장이 서고 나면 느즈막히 때를 봐서
각시한테 언질 주고
장인어른 마음도 붙잡아 두고
장터 국수집도 어떻게 해야 할 텐데...

다 된 셈이지, 이러면 어떨까
네에, 꾸벅 절하며 합가라도 하고
두 분 모시고 살림 차려 보는 건
그리고 각시 옷고름도
손끝 바르르 떨며 풀어헤치고
새살 소리 들어가며 새벽잠도 설치고...

어느새, 읍내가 이만치 와 있다

오랜만에 진짜배기 꿈 하나 키워보는데
아랫도리 그 녀석도 눈치를 챘음인지
덩달아 용을 쓴다
더덩실 달빛 안고 화천 장바닥으로 간다.

ⓒ전경일

친구여, 용서를 비네


한국전쟁이 한창이었던 때, 아버지는 일제시대 때 보통학교, 즉 지금의 초등학교를 나왔다는 이유로 적잖은 핍박을 받으셨다. 어느 날, 아버지는 견디다 못해 친구를 찾아가 함께 월남하자는 제안을 했다. 어려서부터 함께 자라온 옆집 친구이니 이 정도는 믿어도 되겠구나, 싶어 속의 얘기를 꺼낸 것이었다. 그러나 학교 문턱이라곤 다녀본 적이 없는 친구는 아버지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반응을 보였다. 그는 버럭 화를 내더니, 내무서에 보고를 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아버지는 일이 커지게 될 때 닥칠 후환을 염려해, 그 자리에서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것이니 오늘 얘기는 듣지 않은 것으로 용서해 달라고 하고는 신신당부했다.


그 일이 있은 후, 아버지는 당신의 얘기가 다른 사람 귀에 들어가지 않을까, 밤잠을 못 이루셨다고 한다. 그러나 끝내 아버지는 내무서에 갔다 왔고, 거기서 심한 고초를 겪어야만 했다.


아버지가 야음을 틈타 월남한 것은 몇 개월 후였다. 다시는 고향에 못 돌아가는 구나, 라고 생각했는데, 휴전이 가까워 오면서 다시 고향땅을 밟게 되었다고 한다. 아버지가 다시 돌아왔을 때, 예전에 아버지를 고발했던 그 친구는 무릎을 꿇으며 사과를 구했다. 세상이 바뀌자 남쪽 진영의 사람들은 그를 장작 패듯 두들겨 패고 있었다. 그는 아버지의 바지가락을 붙잡고는 눈에 뭐가 씌워 보이는 게 없어서 그랬으니 용서해 달라고 사정을 했다. 아버지는  친구를 구했고, 그 일이 있은 후로 다시는 예전 일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종전이 다가올 무렵, 남과 북이 서로 밀고 당기는 통에 이번에는 그 친구가 야음을 틈 타 북으로 넘어갔다. 그리고 곧이어 휴전선이 그어졌다. 아버지는 그와 그렇게 헤어졌다. 


지금도 아버지는 사상이 뭐길래 친구를 원수로 만들고, 목숨 걸고 죽자 살자 싸우게 만드는 것인지 모르겠다며 혀를 차신다. 그때의 그 친구는 지금도 살아 있는지, 그는 그때의 일을 기억이나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며 되뇌이곤 하신다.


“그 친구가 살아 있다면 팔순이 넘었을 텐데……. 아마도 고향 땅을 그리워했을 게다.”

당시 많은 이들이 아버지와 비슷한 경험을 했을 것이다. 작은 시골 동네에서 헤엄치고 뛰어놀며 함께 자란 친구가 다른 이념 때문에 영영 얼굴을 마주할 수 없게 된, 이 같은 기막힌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그 분들 사이에 진정 이념이란 게 있기나 했는지조차 의문이다. 단지 서로를 살해하는 무고한 전쟁이 두 사람을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니었을까?


우리는 살며, 어느 길목에서는 친구를 만나고, 어느 모퉁이에서는 그와 헤어진다. 어느 길이 만나고 헤어지는 장소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심지어 그런 일은 선택의 문제가 아닌 경우도 있다. 친구가 한순간 적으로 바뀌는 일도 있으며,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눈물을 머금고 결별해야 하는 순간도 있다. 그러나 그런 친구조차도 기억엔 오래 남는 것은 왜 그럴까? 그토록 미워하거나 실망했던 얼굴이 오랜 시간이 흘러도 남은 까닭은...


심지어 우리는 친구로 인해 고통을 겪었다고 해도 그를 용서하고 우호적으로 대하기까지 한다. 머릿속에서는 떠났지만, 마음이 아직도 그를 친구로 받아들이고 있기도 한다. 이런 감정은 쉽게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다. ‘관계’라는 것은 그야말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공통의 무엇이 함께 하기 때문인가. 둘 사이에 간직한 끈끈한 무엇이 작용하기 때문일까.


이런 관계에서조차 우호적인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은 친구가 주는 소중한 감정 때문일런지 모른다. 아무리 어렸을 때부터 마음이 맞던 친구도 결국엔 내 인생의 길을 끝까지 함께 가 줄 수는 없다. 하지만 설령 어쩔 수 없는 이별이 온다고 해도, 그 순간에조차 관용과 이해, 용서의 자세를 가질 수 있다면, 그와의 관계는 아름다운 추억으로 영원히 남을 것이다. 이런 용서의 태도는 우리를 인간답게 만든다.


우리는 아무리 불가항력적인 경우에라도 자기 삶을 책임지고 또 그것을 남과 함께 나눠야 한다. 아버지 친구의 얘기를 들으며 내가 관계가 지닌 무게를 되새겨 보게 된 것은 이 때문이다. 친구를 고발해야 했던 아버지 친구의 상황은,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씁쓸하기만 하다. 그는 아버지를 고발함으로써 무엇을 얻었을까? 종국엔 그 자신의 인간다움마저 잃고 말지 않았을까. 그 시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차마 인정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을 했을까?


그러나 정작 고통을 받고도 복수하려 하지 않은 많은 선한 사람들은 그런 몹쓸 기억 앞에서도 떳떳하다. 그들은 인간다움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쟁이 한창이던 시절, 그 시기엔 알고도 행동하지 않은 양심이 많았을 것이다. 그들은 무엇을 얻었을까? 우정은 어떤  시험을 원하는가.   

ⓒ전경일, <남자, 마흔 살의 우정>


친구는 서울로 갔었네


시골 작은 역에 기차가 도착했다. 이십 년 전 고향을 떠난 친구가 돌아온다는 소식에 가슴 설레이며 마중 나가는 중이었다. 그 친구는 오래 전 도시로 나가 꽤나 근면하게 일해 돈도 모으고, 결혼도 하고, 탐스러운 과일 같은 아이들도 주렁주렁 낳았다. 누가 보기에도 그 정도면 성공한 인생이었다.


열차가 멈추어 서자 웬 중년의 사내가 내려섰다. 나는 첫눈에 그 남자가 열다섯 살 때의 친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달라진 거라고는 그 시절 곰배무늬 바지 대신 양복을 입고 외투를 걸쳤다는 것뿐이었다.


나는 친구에게 다가가 반가운 마음에 덥석 그 어깨를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힘을 주어  손을 잡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막상 친구는 내 요란벅적한 환영 인사에도 불구하고 선뜻 손을 펴 악수하기조차 주저하고 있었다. 나는 멋쩍은 분위기를 만회하고자 다소 크게 말했다.


“여보게! 악수나 한번 함세.”

그러자 그가 마지못해 손을 내밀었다. 손을 쥔 순간, 나는 깜짝 놀랐다. 그가 주춤한 이유를 직감적으로 알았다. 친구의 손은 손가락 세 개가 사라져 있었다.


"사고나 났었네. 전기톱이 훑고 지나갔지. 십 년도 넘게 지났어."

그렇게 말하는 친구의 표정에는 문득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상경한 뒤 어느 공장에서 일을 하다가 손가락을 잃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친구는 그 점이 부끄러워 악수하기를 주저했던 것이다.


"뭘 그러나? 그럴 수도 있지. 그만하니 다행이네. 자네는 이 고장에서 몇 안 되는 성공한 친구 아닌가."

나는 그를 근처 식당으로 데리고 갔다. 걸어가는 길에 이번에는 그가 약간 다리를 절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가 말했다.


"예전에 교통사고까지 나지 않았겠나? 서울이라는 데가 그렇더군……."

그는 말끝을 흐리며 자리에 앉아 내 술잔을 받았다.


"그래, 다들 무고하시고?"

"애들이나 마누라나 다 잘 있네. 큰 애는 대학엘 갔지. 기숙사에 있어서 요즘엔 찾아오지도 않는다네. 제 에미 죽은 후로는……."

"그렇게 됐군……."

그는 품에서 꺼낸 사진 한 장을 내게 보여 주었다. 거기에는 놀랍게도 한 동남아 계통의 혼혈아로 보이는 여자아이가 있었다.


"내가 얘기했었던가? 나 재혼했다고? 전처는 몇 해 전 죽었지. 큰 애는 그래서인지 학교 간 뒤로는 찾아오지도 않는다네. 내 재혼이 못 마땅했던 거지. 어디 이 나이에 한국 여자랑 언감생심 결혼할 생각이나 할 수 있겠나?"

친구는 어느새 눈가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없이 사는 게 서러워서 서울로 갔고, 열심히 일해서 재산도 조금 모았는데, 이상하지. 살면 살수록 계속 무너지고 있다는 느낌이네. 뭔가가 나한테서 자꾸 떨어져 나가는 느낌이야. 자네를 찾아 온 것도, 죽기 전에 천진무구했던 시절로 한번 돌아가 보고 싶어서였네."


우리는 어색한 분위기를 감추려고 잠시 옛 시절로 되돌아가 개울가에서 물장구치던 일, 수박 서리에 된통 혼쭐 빠져 달아나던 일을 꺼내며 박장대소 했다.


“사는 게 다 허접스럽네. 사실 나 말일세, 여기 온 이유가 따로 있네. 나, 아무래도 오래 못 살 것 같네. 암이라고 하더군……. 억울한 거 있지? 이렇게 악착같이 살았는데 암이라니……. 나 죽으면 이 젊은 마누라하고 철모르는 애한테 죄 짓는 것 같아서 미안할 뿐이네. 이를 어쩌면 좋겠나?"


친구의 얘기에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무슨 일을 해서든 이 상황을 수습해야 할 것만 같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이 사람아. 왜 이렇게 나약하게 구나? 병이야 고치면 되지. 자네나 나나 아직 젊지 않나?"


짐짓 그렇게 말은 했지만, 마음속으로는 아무래도 그가 마지막 인사를 하러 나를 찾아 왔다는 불길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 순간에는 뭐라고 대꾸해줘야 할지 어떤 위로의 말도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다. 우리는 꼬박 그렇게 밤을 새워 얘기를 했다. 새벽 무렵이 되었을 때, 나는 친구의 손을 이끌었다. 그러자 그는 왕복 열차표를 끊고 왔다며 극구 사양했다. 그는 나를 만나는 것 외에 더 이상 볼 일도 없었을 것이다. 열차가 희뿌염한 안개를 뚫고 사라질 때, 나는 그와의 만남을 다시 떠올렸다.


그렇구나. 누구나 세상을 떠날 때가 되면, 의지할 사람이 필요하구나. 저렇게 정리하고 싶어지는 거로구나…….

갑자기 눈시울이 붉어졌다. 식당에서 그가 화장실에 간 사이에 나는 그의 가방을 열고 얼마간의 여비와 메모 한 장을 집어넣었었다. 그는 그것들을 서울에 도착할 쯤이면 발견하게 될 것이다.


"여름에 쏘가리 잡아 놓고 연락하겠네. 몸보신하러 냉큼 내려오게나."


어쩌면 그가 영영 내려오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느낌이 들었지만 나는 애써 그 생각을 떨쳐 버리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그 친구가 단 하나만은 놓치 않기를 바랬다. 설령 천국에 먼저 가는 일이 벌어질지라도 오래 묵은 장 맛 같은 이 친구를 잊지는 말라고 말이다. 그리고 누가 먼저 찾든, 그곳에서 다시 만나자고......

그해 여름이 끝날 때까지 그 친구에게선 연락이 없었다. 그리고 나는 가을쯤, 그의 부고를 받았다. 

ⓒ전경일, <남자, 마흔 살의 우정>


함께 나이 들며 얻게 되는 감정


내가 어렸을 때에는 요즘과는 달리 형제 관계에서 위아래가 분명했다. 형에게 덤비는 것은 물론, 말 놓는 것조차 상상하지 못했다. 형과의 사이에 생기는 긴장감이 상대적으로 컸던 만큼, 누나들에게는 편안함과 안정감이 느껴졌다. 암묵적으로 여성은 약한 자를 보호해 줄 것이라는 보호본능 때문이었거나, 아니면 누나들이 자발적으로 모성애적 사랑을 쏟아 부어 주었기 때문일지 모른다.


그런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형제들 사이의 확고했던 이런 서열도, 나이가 들고, 결혼해 각자 얘들을 키우면서부터는 훨씬 희박해지는 것 같다. 그때부터 형제들 간의 관계는 좀 더 평등한 방향으로 발전한다. 손위 형제들이 그렇게 어려워 보이지도 않고, 지나치게 과묵하게 굴어 화난 것처럼 보이던 형제도 이제는 그것이 성격상의 차이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또한, 지난한 삶이 우리를 어른으로 만들어 내서 그런지 감정 표현에 있어서도 더 이상 헤프지 않다. 아무리 부딪쳐도, 산다는 게 다 그런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면 옳고 그르다는 이유로 아웅 다웅 할 필요도 없어진다. 그저 수긍하면 되는 게 삶에는 대부분인 것이다.


그렇다. 무엇이 옳고 그른가의 문제보다는,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방향의 문제가 더 중요하다. 삶이 진행되는 방향에 좀 더 집중하게 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사람이 세상과 부딪치며 겪게 되는 경험이 작용한 결과이다. 어쨌든 이 길고 긴 인생의 터널을 지나오면서, 나는 형제들 사이에도 혈육 간의 정과는 다른 우정의 감정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피를 통해 형성된 정과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어렸을 때 내게 큰형은 정말이지 무서운 존재였다. 형에게 혼날까봐 어쩔 줄 몰라 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얼마 전, 나는 그토록 높고 멀게 느껴졌던 형이 사실은 아주 약한 면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무렵 형은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었다. 형은 나와 더불어 동시대를 살아가는 평범한 중년남자의 애처로운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오십 줄에 들어선 형을 바라보면 왠지 모를 측은지심까지 일었다. 그러자 가슴 속으로 알 수 없는 감정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때 나는 그것이 중년남자끼리 느끼는 우정이나 의리 같은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


한번은 큰형이 내게 “자네”라는 표현을 쓰며 말을 건넨 적이 있었다. 그것은 이전에는 결코 들어 본 적 없는 인칭대명사였다. 이름을 부르거나, 어깨를 툭 치거나, 누구 애비라고 불러 주던 때의 느낌과는 사뭇 달랐다. 그것은 내가 머리가 굵고 나이가 들면서, 형도 이제는 나를 손아래 동생으로만 대하기보다, 사회적 관계 속에서 나를 인식하고 있다는 증표였다. 이제 나보다 세상을 더 살은 형은, 동생을 이전과는 다른 모습으로 받아들이려고 있고, 해석하고 있었다.


작은 일상의 경험이긴 했지만, 나는 그 일이 있은 후, 형에게 형제간의 우애와는 조금은 다른 감정을 알게 됐다. 그럴 때 형의 어깨는 예전처럼 다부지거나 넓게 느껴지지 않았으며, 이제는 그 뒷모습에서 원만하고 순리대로 살아가는 한 중년 남자의 모습이 읽혀졌다.


속마음이야 어떻든, 나는 이 일을 계기로 형을 대하고 함께 나누는 감정의 행태가 바뀌었음을 느꼈고, 형이 나를 사회를 이끌어가는 당당한 일원으로 받아들였음을 깨달았다. 그뿐이 아니었다. 형의 그런 태도는 내게 각성의 동기를 부여해 주었다. 혈연관계에 있는 사람들과 멋진 우정을 나눈다는 것은, 달리 말해 우리가 좀 더 성숙해졌다는 것을 뜻한다. 우정을 친구 간에 느낄 수 있다는 감정이라고 생각해왔던 내 생각은, 그제서야 제 궤도를 찾을 수 있었다. 형에게 그 같은 감정을 느낀 뒤, 나는 친지간에 느끼는 우정의 감정이 우리의 관계를 더 공고히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람은 흔히 주어진 환경 내에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가끔 변화된 환경은 새로운 인식의 기회를 만들어 준다. 같은 맥락에서 내가 나를 “자네”라고 불렀던 형에 대해 느꼈던 우정은 내가 이미 적지 않은 나이를 먹었으며, 이제는 그에 걸맞은 사고와 행동을 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었다. 또 그런 호칭으로 불리고 나니, 왠지 내가 가족 사이에서 당당히 어른으로 자리 잡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까지 했다. 단순한 호칭의 변화였지만, 그것은 이처럼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가족 관계와 발전적인 감정의 교류를 보여주었다. 내게는 충분히 의미 있게 다가온 순간이었다.


‘형제들 간에도 우정이란 감정을 느낄 수 있구나!’

누군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면, 그건 그가 한층 어른스럽고 성숙해졌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지금 이 순간, 대한민국에서 중년남자로 살고 있는 형과 나 사이에 좀 더 농도 짙은 우정의 감정이 싹트지 말란 법은 없지 않은가?    

ⓒ전경일, <남자, 마흔 살의 우정>


일상의 평화, 내 오랜 친구


여름휴가로 제주도를 찾았다. 눈앞에서 펼쳐지는 바다는 남태평양 쪽으로 뻗어 있었다. 끝없이 넓고, 한낮의 햇빛 속에서 코발트빛과 에메랄드빛으로 어우러져 빛나는 바다는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수영장에서 아이들이 노는 것을 바라보며 햇살 아래 누워 있다가 드디어 파라솔 안으로 기어들어와 시원한 음료수를 한잔 마셨다. 이럴 땐 마티니나, 키스오브 파이어 같은 칵테일도 제격일 텐데... 한가롭고, 평화롭기 그지없는 시간이었다. 

정말 얼마만의 휴가인가? 나는 아내가 눈을 감고 잠들어 있는 것을 보며 휴대폰을 꺼내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제주도다, 와, 정말 죽인다.”

“뭐라고? 누굴 약 올리냐?”

대뜸 저 너머에서 불평이 터져 나왔다.

“약을 올린다고? 자식! 그래, 우린 돈 없어 동남아도 못가고, 제주도에 와 있다, 너는 이 땡볕 더위에 휴가도 안가고 돈을 쓸어 담는 모양이구나?”

“하하…… 그래, 즐겨라. 움직일 수 있을 때 실컷 놀아야지.”

친구는 무더운 서울 한복판에서 수출이다 뭐다해서 돈 벌기에 여념 없었다. 기껏 안부전화를 걸었더니 언구럭만 떤다. ‘돈맛을 아는 놈이 돈도 버는 거지…… 나처럼 월급쟁이야, 상상이나 하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돈은 벌어야겠고 휴가는 오고 싶고, 친구 놈에게 약을 오를 대로 올려놓고는 전화를 끊었다.

그런데 전화를 끊고 나니 갑자기 멋쩍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와 무슨 인연이 있길래 휴대폰이 생긴 이래로 서로의 전화번호를 저장해 놓고 수시로 접속하고자 하는가. 나는 왜 무시로 버튼을 눌러가며 저 너머에서 바쁘게 살아가고 있는 그에게 휴가 이야기, 사는 얘기를 줄창 해대는 것인가.

대학을 다닐 때는 공중전화 박스가 그를 불러내는 도구였다. 최루탄이 날리는 길거리에서 시위가 끝나면 어디에 있는 막걸리 집에서 보자며 전화를 넣었고, 먼저 군대 가서는 외박 나와 전화를 걸었다.

“야, 임마! 잘 지내냐? 나는 전방에서 뺑이 치는데…… 야, 민간인이 한잔 사라……!”

서로가 열심히 물들인 때국물 같은 정감 때문에 인연은 이어지는 것일지 모른다. 참, 많이도 어울렸다. 나는 쏜살같이 지나간 시절들을 회상하며 상념의 바다에 풍덩 마음을 던졌다.

생각해 보면 기이한 일이다. 대체 친구가 뭐길래 이 먼 바닷가에 와서도 회사 일처럼 잊지 못하고 떠올리게 되는 걸까. 친구라는 건 그렇게 익숙한, 아니 뼛속에 밴 습관과 같은 것일까? 부부가 같이 와서도 친구 놈이 생각나다니 참으로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혹시 내가 커밍아웃을 한 것은 아닐까, 혼자 생각하다가 낄낄 웃어대고 말았다.

저녁 무렵 해지는 바다를 바라보며 그와 자리물회 한 접시에 소주라도 한잔 꺾고 싶었던 모양이다. 마누라도 좋지만, 척척 죽이 맞는 놈들을 한둘은 꿰차고 있어야 인생이 외롭지 않은 것 아닌가. 그마저도 없다면, 살아가는 일이 너무 심상하지 않을까 말이다.

생각해 보면 녀석과의 만남은 정말이지 끈질긴 인연으로 이어졌다. 다들 만났다가 헤어지고, 아무리 친했어도 사회라는 포구 앞에서는 바다로 빨려 들어가는 거북 새끼처럼 겁 없이 큰 세상으로 나갔다가 연락이 끊겨져 버린 친구들이 하나 둘이 아니었는데 말이다. 정말이지, 잊혀 지거나 지워졌거나, 누가 먼저 그랬든지 떠난 친구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도 아직도 나는 그와 함께 있다. 욕망만 부풀리며 달리던 때에는 그와의 만남도 불같은 경쟁 속에서 이루어졌지만, 지금은 다르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인생의 방향이 자연스레 바뀐 순간, 문득 평생 편하게 만날 수 있는 사람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그래야 죽을 때 조금은 덜 서글플 것만 같았다. 고만 고만한 자랑거리로 질투하고, 시기하고, 경쟁하다가는, 친구는 고사하고 인생마저 잃게 되지 않을까 걱정되었다.

세상을 살아가다보면 어떤 땐 아무 긴장감 없이 만날 친구가 필요한 법이다. 주말에 아이들 야구 시합이 있을 때, 같이 가자고 얘기할 수 있는 친구가 있다면 얼마나 좋은가. 가볍게 산책 하면서 살아가는 얘기를 나눠도 지루하지 않은 친구. 빨래를 개거나 식기세척기를 비우며 친구와 전화로 이것저것 얘기를 나눌 수 있다는 것, 이런 건 얼마나 좋은 일인가.

언뜻 보기에는 별 것 아닌 것 같은 이 같은 평화로움이야말로 바로 친구가 주는 행복인지 모른다. 마음의 평화는 댓가 없이 얻어지는 게 아니다. 게다가 지금처럼 개인주의가 심화된 시대엔 이런 공감지대가 더 필요할지 모른다. 언제든 이런 친구를 그리워하는 건, 바로 우리가 홀로 살고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적어도 내게, 혼자만이 아닌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는 걸 알게 하는 친구가 있다면, 이미 그 자체로 성공한 삶 아닐까. 태평양은 마냥 푸르다. 하늘은 거기서 만난다. 나는 흘러가는 구름 아내 놓여 있다.

ⓒ전경일, <남자, 마흔 살의 우정>


친구의 인생엔 비가 내렸네


“나는 어쩌다가 흠뻑 젖어 버린 셈이지. 비 오는 줄도 모르고 살아온 거야. 내 스스로 나를 유기해 온 것인지도 몰라. 인생 퇴물이 되어 버린 거지. 요즘은 통 의욕이 일지 않네. 이렇게 무감각해진 삶이라니. 아침에 일어나면 습관처럼 회사에 나가고, 너무나 뻔한 일로 목청을 돋우고, 그러다가 집에 돌아올 때쯤이면 말 못 할 정도로 마음은 불안하고 흔들린다네. 사는 게 극도로 피곤하지. 아주 오래 전에 나라는 존재는 닳아 없어진 것 같아. 매일 쓰는 세수 비누처럼 닳고 닳아서 점점 녹고 작아지는 것 같아. 아무 의미 없이 지워지는 그런 존재가 되는 거지…….”

그날, 나는 가슴이 먹먹했다. 친구가 했던 말이 떠올랐고, 그가 걱정되어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제법 커다란 평수의 아파트를 장만하고 회사에서는 사십대 초반에 탄탄한 대기업 임원이란 훈장까지 달은 친구였다. 누구보다도 잘 나가고 있던 그 친구가 어이없이 무너지고 있다는 걸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친구는 세상 전부를 얻은 것처럼 자신만만했었다. 그랬던 그에게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

결국 나는 이부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서 서가에 꽂혀있는 심리학책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랬다! 친구는 분명 병을 앓고 있었다. 중년에 접어들면서 생긴 병, 정신과 용어로는 러스트 아웃 증후군이었다. 그는 힘도 좋고, 건강했고, 늘 의욕에 넘쳤다. 세상을 당차게 살았고, 문제라고는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활기찬 삶을 살았다. 무쇠처럼 단단해서 전혀 무너질 게 없어 보이는 그런 사람이었다. 최고로 정상적이고, 가장 열심히 살았고, 누구에게나 본보기가 되는 사람, 이런 것이 그 친구의 이미지였다. 그런 그가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한다니……. 나는 오히려 그 점이 이해되지 않았다. 평소 골골 앓던 친구라면 그럴 만도 하겠건만, 하필 그라니! 

그가 들른 정신과 의사는 그에 대한 상담 내역을 개략적으로 내게 설명해 주었다.

“누가 봐도 정상일지지라도 마음의 일은 누구도 장담하기 어렵습니다. 안에 자기도 모르는 병이 자라고 있는 경우가 간혹 있어요. 이런 정신적 상태는 무기력과 우울증과 피로를 동반하지요. 사람은 약한 존재입니다. 강해 보이는 건 오히려 겉모습일 뿐입니다. 속으로는 다들 곪아가고 있지요. 특히나 이런 과중한 경쟁사회에서는 말이죠.”

정신과 의사의 얘기에 나는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무언가가 서서히 젖어들듯 마음을 좀 먹고 활력을 둔화시킨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 친구에게 이런 병이 있으리라고는 전혀 상상치도 못한 일이었다. 손쓰기에는 이미 늦었을지 모른다는 의사의 한마디가 가슴을 더욱이나 철렁하게 만들었다. 유일한 해결책은 스스로 그런 상태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자신은 물론, 가족이나, 친구들의 도움도 절대적이라고 의사는 말했다.

어느 날, 퇴근길에 그 친구를 붙잡아 두고 위로랍시고 말을 꺼냈다.

“네가 이렇게 흔들리면 안 된다. 기운을 내라. 아직 팔팔한 우리 나이에 왜 이렇게 의기소침해졌냐……?”

찻잔이 식을 때까지 무수히 떠들어 댔지만, 나는 내가 하는 말이 그에게 전혀 위안이 되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그의 표정에는 몇 십 년간의 피로가 무겁게 쌓여있었다. 세상에 치이고, 사람에 치이고, 자신의 기대에 치인 보잘 것 없는 사내……. 그게 그렇게 잘 나가던 친구의 모습이었다.
  “나는 지쳤어. 삶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구. 살면 더는 뭐가 되는데?“

무엇이 친구를 이렇게 만들었을까? 그와 헤어지고 난지 몇 달 후, 나는 친구가 회사를 그만두고 낙향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한참만에야 그를 만났다. 충남의 고향에 안착한 그는, 오히려 편안해 보였다.

“여기엔 경쟁 같은 건 없어서 좋아.”

그 말 한마디로, 나는 그가 사회적 성공의 가도에서 왜 물러나게 되었는지 짐작하게 되었다.

“자연과는 그저 함께 살아가면 되고... 사람들과 부대낄 일도 없고, 마음 상할 일도 없고…… 여기선 나보고 ‘배운 사람’이란다. 나처럼 주제도 모르는 놈을…우습지?”

아이들과 부인을 서울에 떼놓고 홀로 시골에 내려와 지내는 그를, 집에서는 ‘요양 중’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었다. 애들까지 끌고 내려오면 교육이니 뭐니 다 망친다며, 떨어져 살아도 그렇게는 못하겠다고 아내가 결사반대하더란다. 게다가 아내는 남편의 좌절을 인정하려 들지 않더란다. 당신이 원래부터 그렇게 약한 사람이었느냐고…자기 머리를 쥐어뜯으며…. 그래서 혼자 내려왔단다.

“집사람은 너무 똑똑해. 그렇게 애들 키워 뭘 하려는 건지 몰라. 나는 그냥 순응하며 살고 싶은데, 아내는 매일 투쟁하듯 사는 걸 좋아하거든. 남들이 인정하는 게 왜 그렇게 중요하지?”

남들 눈에는 이게 패배로 보일지라도, 자신은 그런 경쟁의식이 만들어 낸 인정이나 평가 따위엔 이제는 관심 없다는 게 친구의 주장이었다. 그의 삶은 매우 단순해져 있었다. 너무나 단순한 단 하나의 선을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우리처럼 삶을 치렁치렁 치장하면서 복잡하게 만들고 스스로 혼란스러워 할 이유도 없었다. 나는 한여름 햇살이 내리쬐는 시골 원두막에서 그와 수박을 쪼개 놓고 앉아 묵묵히 시선을 강 너머 옥수수 밭에 두었다. 그랬다. 내가 몰랐던 것을 그가 먼저 깨달은 것이다. 더 이상 어떤 설명도 없었다.

“제길……팔자 좋은 놈…….”

서울로 올라오는 차에서 그런 생각이 든 것은 왜일까? 모르긴 몰라도 그게 내가 하고픈 애기 아니었을까.  ⓒ전경일, <남자, 마흔 살의 우정>        



따뜻한 그때 그 술집


나처럼 평범한 직장생활을 하는 친구가 하나 있다. 그 친구는 음악이 취미인데, 함께 술을 마시면 어느새 피아노가 놓여 있는 술집으로 나를 이끈다. 거기서 우리는 잔을 부딪쳐가며 애들 크는 얘기를 하고, 회사 얘기를 하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처량함과 도전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적당히 취하고 나면 친구는 피아노 앞에 앉아 건반을 두드리고, 나는 가끔 거기에 맞춰 노래를 부른다. 6월의 넝쿨 장미처럼 흐드러지게 피어나지는 못해도, 10월의 맨드라미처럼 우리는 소박하게 살아가고 있다. 맨드라미 같은 친구라서 나는 그가 좋다. 서로 생활인으로서 느끼는 고독이나, 아픔에 대해서도 동병상련으로 대할 수 있으니 말이다.

“사는 거 어떠냐?”

“다 그렇지, 뭐. 몰라서 물어?”

짧은 대화만으로도 친구와의 자리는 충분히 즐겁다. 자리를 마칠 때까지 미처 못 다한 이야기가 있어도 아쉬움은 남지 않는다. 놔뒀다 나중에 보자기처럼 풀어 보아도 되지 않을까? 마음 편안한 관계란 이런 것이다. 세상을 어느 정도 산 사람들끼리는 대강 봐도 인생의 밑천이라는 걸 송두리째 다 들여다 볼 수 있다. 구구절절 사연을 얘기하지 않아도, 서로가 지그시 눈 감고 듣기만 해도 알 것은 다 안다. 그거면 됐다. 우리는 친구 아닌가. 굳이 길게 말할 필요도, 댓글 달듯 맞장구를 쳐주지 않아도 무방하다. 적당히 알아서 술 마시고, 인생을 흥얼거리며 살면 되는 거 아닌가. 빡빡한 세상에 나나 저나 이 정도면 됐지. 인생을 알 만치 아는 나이가 아닌가. 이 정도면 정말로 됐다는 생각이다. 관계에 대해선 말이다. 우리가 나누는 우정에 대해서는 말이다.

그와 만날 때면 나는 가끔 경이로운 수수께끼를 눈앞에 두고 있는 느낌이다. 대한민국에서 비슷한 나이에, 비슷한 환경에서 살며 같은 고민으로 중년을 살아가는 사내들끼리 나누는 대화라는 건, 가끔은 침묵만으로도 큰 웅변이 된다. 정말이지, 놀랍지 않은가. 동질감이란 것 말이다.

이 친구를 만날 때면, 종종 살며 겪는 우울한 일에 대해 얘기를 들을 때에도 그저 입 꾹 다물고 들어 주기만 해도 된다 싶다. 귀를 여는 것만으로도 그의 울적한 기분을 풀어 줄 수 있고,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친구와 나는 정이 통하고 마음이 함께 한다. 어느 누구와 만나든, 최고의 만남이란 마음과 마음끼리의 만남이며, 그런 만남은 우리 생활의 중요한 부분을 형성한다고 믿게 된다. 그나 나나 이 정도는 나누는 사이 아닌가. 후덥지근한 회사 얘기를 마중 인사로 시작하지만, 사실 그건 그저 서로의 근황을 물어보는 것에 불과하다. 술 한잔 마신 우리는 인생의 실타래를 풀기 시작한다. 그도, 지치긴 한 모양이다.
   “근데 말이지. 김광석이 노래는 인생을 좀 알고 부르는 것 같단 말이야. 왜 있지? 또 하루 멀어져 간다. 내 꿈은 담배 연기처럼, 작기 만한 내 기억 속에 무얼 찾아 살고 있는지…… 뭐 이런 거 있잖아…….”

중년이 되면서 자기가 무얼 찾으며 살아가고 있는지 알 수 없게 되어 버렸다는 이 친구는, 가끔 인생이 신기루 같다고 한다. 신기루, 그래! 인생은 무언가를 찾아 나서는 과정이다. 그게 신기루든 아니든, 혹은 인생 자체가 신기루에 불과한 것이든 어쨌든 누구나 달리는 과정에서 하차라는 걸 하게 되어 있다. 나는 그가 부린 호기가 술에 취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저 약간 흐트러진 모습을 즐기고 싶어서 그러는 것이라는 걸 안다. 조금은 흐트러지고 싶은 거겠지. 가끔 세상살이라는 건 어쩌면 뼈라고는 가져 본 적 없는 연체동물처럼 흐느적거리며 살기도 해야 하는 거다. 그게 슬기롭게 이 세상을 견디는 법이다.

“너무 가슴 아픈 척 하지 마라. 나는 네가 내일 아침이면 쌩쌩 날아다닐 거라는 걸 다 안다. 너나 나나 안 달리면 어쩔건데?”

오랜만에 만난 그와의 자리는 그렇게 마감된다. 택시가 와서 멈추고, 나는 친구를 보내 다음에야 집으로 돌아온다. 그는 가끔 내 손을 잡고 위로해 주는 인생과 사회생활의 단짝이다. 그건 더없는 행운이다. 가족도 형제도 아니고, 이 세상에서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사람이건만, 그 무엇보다도 소중하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타인과 두텁게 맺은 인연인 셈이다. 그래서 가끔은 그를 호출해 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저녁 때 좋은 술이 있으니까 좀 나와라. 한번 호탕해져 보자.”

술집이든, 식당이든, 길거리 모퉁이에서든, 우리는 언제나 함께 같이 있을 것이다. 다소 청승맞아 보일 수는 있어도 세상에 술이 있다는 것은 무척이나 다행스러운 일이다. 더구나 늙어 죽을 때까지 술잔을 겨눌 상대가 있다는 것은…… 안 그런가, 친구?    

ⓒ전경일, <남자, 마흔 살의 우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