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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아름다운 모습


스티븐 코비는 성품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성품이라는 것은 삶의 방향, 의미, 깊이를 부여하는 원칙들과 가치들로 형성된다. 이러한 것들은 처신의 법칙이나 기준이 아니라, 자신의 인품에 바탕을 둔, 무엇이 옳고 그른가에 대한 우리 내면의 인식을 구성하고 있다. 여기에는 성실, 정직, 용기, 공평, 관용 등의 특성들이 포함되는데 이들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맞게 되는 어려운 선택의 순간에 발휘된다.”


내면의 성찰이 간과되거나 무시되던 때가 있었다. 그 시기는 젊음이란 열병이 돌아 내게서 이는 열기가 세상을 다 녹일 것만 같았다. 저돌적인 돌진 앞에서 멈춰서거나, 돌아보는 일은 금기시 되었다. 그것이 뜨거움의 매력이자, 한계였다. 삶의 어느 시기에 자기 성찰을 하게 되거나, 코비가 하는 말처럼 성실, 정직, 관용, 용기, 공평 같은 말들이 은연중 쓰일 때면 그땐 이미 나이든 세대에 속해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조차도 자기를 돌아볼 수 있는 삶에서나 발견된다.

중년 이후를 멋지게 물들여 나갈 인생 승리가 되는 열쇠는 정서적이고, 정신적인 영역에서 발견된다. 노년을 준비하는 노테크 목록에서 빠질 수 없는 대목이 이것이다. 경제적 안정은 물론, 한 개인으로서 삶을 완성해 나가는 시기를 맞이한다는 것은 가슴 벅찬 일이다. 이런 성찰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를 완성시킬 책임이 있다. 개인적으로 성품을 연마하는 것은 자기 인격의 완성을 추구한다는 측면에서 지극히 아름답다. 우리의 내면적 노력은 중년 이후에 나타난다. 세월과 함께 물렁한 회반죽처럼 덜 굳었던 얼굴의 표정은 뚜렷히 자기 모습을 남긴다. 내가 완전히 늙었을 때의 얼굴 표정은 어떻게 될까? 항시 미소를 머금고 있을까, 지지리궁상의 얼굴을 하고 있게 될까? 이런 생각을 할 때면 의식적으로도 웃는 연습을 해 본다. 얼굴이 굳기 전에 온화하고, 선한 얼굴 모양을 주조해 내고 싶기 때문이다.  

요즘 우리 사회를 보면, 많은 면에서 성숙해 가고 있다는 인상이다. 온갖 부작용과 갈등에도 불구하고 건전성을 유지하고 있다. 기업내에선 윤리경영이 강조되고 있고, 봉사활동 같은 세상을 향한 선한 활동 등은 확산되고 있다. 이 사회의 적극적이며 성숙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가정과 사회 곳곳에서 붕괴되며 갈등을 일으키는 요인들도 개인의 영역에서는 이미 엄청난 변화를 겪으며 밝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 아무리 시끄러운 소리도 사회 곳곳에서 샘처럼 솟는 낮은 목소리를 잠재우지 못한다. 여전히 세상은 바람직한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

사회가 성숙해 질수록 한 개인의 완성도도 중요해 진다. 사회 곳곳에서 내면적 목소리에 귀 기울이기 시작하는 자기반성과 노력 덕분에 이 사회의 정신적 기반이 더욱 튼튼해지고 있다. 이런 현상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이것이야말로 우리 사회가 성숙되어 가고 있다는 증거 아닐까? 우리가 사는 시대는 이미 새로운 질서로 진입해 들어가고 있다. 세상을 돕고자 하는 온갖 비영리 단체의 활동이 지금처럼 확산된 시기는 일찍이 없다. 이런 사회적 움직임은 개인적 영역으로도 퍼져나가 정신적 흐름을 형성하고 있다.

나는 어느 모임에 나가게 되었을 때, 우리 사회가 발전하기 위해 해야 할 게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은 적 있다. 잠시 망설이다가 내가 한 대답은 이런 것이었다.

“각자 자기가 있는 곳에서 성숙해야 한다.”

남을 이야기하고, 거창한 것을 쫓는 시대는 앞으로는 크게 환영받기 어려울 것이다, 다원화되었다는 얘기는 세크멘트화(segmented)되었다는 말이고, 이 이야긴 작은 기여와 헌신을 필요로 하는 사회적 요청에 우리가 직면해 있다는 애기다. 왠만한 것은 사회적 시스템이 해결할 수 있다. 대한민국 사회는 언론에서 부각되는 수많은 부정적 요인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건강하다. 그러기에 다음 세대를 위한 우리 세대의 몫은 결코 작지 않다. 우리가 살 환경을 잘 가꾸는 것은 경제적으로나 정서적으로 쾌적한 삶의 조건을 위해 모두가 노력해야 할 일들이다. 같은 시대를 살며 우리가 고민해야 할 개인적 사회적 숙제가 이것이다.

아름다운 노년의 모습이 어떠해야 할지 생각해 보라. 자기 생각에 내면에 충실하지 않다면 그건 성공적이지 않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나이 들어서도 가치를 못 찾은 인생이라면 그 일생이 얼마나 후회스럽겠는가? 깨달음이 있을 때, 우리 인생은 의미로 가득차 지기 시작할 것이다. 생각만 해도 멋지지 않는가?


ⓒ전경일, <남자, 마흔 이후>



액티브 시니어가 목표


무슨 일이건, 팔을 걷어 부치고 하자 꾸나 하고 덤비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될 일도 소심하게 임해 그르치는 사람이 있다. 개인적인 취향은 그렇다 치고, 사회적으로 가장 왕성해야 할 시기에 정신적인 면에서나, 생활의 면에서 자라기를 멈춘 사람들이 있다. 인생을 적어도 몇 십 년 살아왔다면 수령 사, 오십 년 된 나무처럼 하늘을 가릴 줄 아는 도량은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 나이 들수록 반듯한 자기 모양을 만들어 내지 못한다.

정서적으로는 보수, 안정을 희구하나 그건 바램일 뿐 현실은 적극적으로 뛰어야 한다. 흔한 얘기로 우리 세대는 ‘젊은 노년’을 살아가야 할 운명에 놓여 있다. 젊음은 이전 세대와 비슷했으나, 늙어 가는 방식은 전혀 다르다. 은퇴를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앞으로 지금보다 더 활동적인 노년이 기다리고 있다고 얘기하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수긍할까? 내 연령 전후로 나를 먹여 살릴 세대를 기대할 수 없기에 지금부터라도 앞으로 30년을 위해 무한 변화의 시대에 적응해 나가야 한다. 베이비 붐 세대로 태어나서 같은 연령대의 사람들과 살다가 무덤까지 그들과 경쟁하고 협력도 하면서 살아가야 할 사람들이 우리들이다. 또, 같은 세대 간 유연하며 우호적인 사회적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활동도 지속적으로 해야 한다. 죽을 때까지 펄쩍 펄쩍 뛰어야만 산 걸로 대접받는 게 당연하다. 뒷방 늙은이? 그런 건 거들떠도 보지 말아라.  

활동성이 요구되니 만큼 고립되고 소외감을 느끼며 소멸해 가던 이전 세대와는 확연히 다른 각오와 모습을 가지는 건 당연하다. 우리 앞에 다가온 노년은 소멸과 낡음으로 방치되는 삶과 청장년이 재생되는 두 가지 인생 모습으로 다가온다. 후자의 삶을 살아갈 사람들을 부르기에는 ‘액티브 시니어(active senior)층’이라는 말처럼 딱 떨어지는 표현이 없다. 고령층이라도 젊은 라이프스타일을 유지하며, 삶을 적극적으로 주도하는 사람들에게 쓰는 표현이다. 세상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어 자기 삶의 방식을 끝까지 추구하고 구현하는 사람들, 그들이야말로 노년을 가장 효과적으로 대비하고, 삶에 능동적인 사람들 아닌가.

내 아버지는 평생 농사꾼이셨는데, 서울에 올라오셔서도 대학 소유 부지에 밭농사를 지으시며 동네 분들을 능숙하고 정확한 작농 경험으로 코칭하셨다. 아버지의 경험은 농사에 관한한 가장 전문가였기에 그 앞에선 대학교수를 하다 은퇴한 분들도 학생의 신분이 되어야 했다. 다들 은퇴하셨으나 아버지는 활동성 측면에서 보면 새미 리타이어(semi retire)를 하신 셈이었다. 그런 농사 코칭은 심장병이 발발하기 전까지 계속되었다. 분야는 다르겠지만, 내가 지향하는 은퇴 없는 라이프도 이런 것이다. 인간의 한 부류로 태어나 늙어가면서 오히려 시원적(始原的)인 일을 통해 인생의 의미를 깨닫게 되는 것, 그것만큼 축복받은 인생은 없을 것이다. 아버지는 땅을 어루만지며, 인류가 오랬 동안 경작해온 평범한 진리를 인생에 축적하셨을 것이다.   

평범하지 않은 진리는 흔하기만 한 모습으로 다가와 우리가 잘 알아볼 수 없도록 한다. 나이에 대한 이해는 과거처럼 천편일률적인 것이 아니라, 천차만별이다. 이런 다양성의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거기서 삶의 어떤 진리를 퍼올릴지는 각자의 몫이다.  


ⓒ전경일, <남자, 마흔 이후>

떨어진 벼이삭 줍기


얼마 전, 주말을 이용해 시골에 갔다 왔다. 문득, 생각난 것이 있어 농부가 밭가는 장면을 디카로 찍었다. 회사에 돌아 와 노트북 컴퓨터에 파일을 저장했다. 바탕 화면에 깔고 나자, 수시로 볼 수 있어 무엇보다 좋았다. 가끔 그 사진을 볼 때마다 생각하게 되는 게 있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나는 지금 인생의 씨를 뿌리는 봄철을 맞이하고 있는가? 추수하는 가을을 맞이하고 있는가? 그도 저도 아니면 나는 지금 저 농부처럼 밭을 갈고 있는 것인가?’

밭 가는 장면에서 씨도 뿌리고 거두는 내 인생의 종착점을 생각해보며, 시간이 갈수록 더 먼 길을 갈 수 밖에 없는 내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인생은 짧다지만, 또 질길려면 쇠심줄같은 것 아닌가. 마흔 무렵, 아직 가야할 길은 멀고, 시간은 촉박하기에 때론 조바심이 나기도 한다. 이러다간 쭉정이로 인생을 마감하는 것은 아닌지. 서둘러 간다면 몇 안되는 낙수(落穗)라도 더 주울 수 있지는 않은지, 허허로움이 밀려온다. 어느덧 그런 나이에 나는 접어든 것이다. 

밭가는 농부의 사진을 보며, 혹시나 있을지 모를 내 인생의 휴경지가 어딜지 생각해 보았다. 가장 소중한 것인데도 둘러보지 못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아직, 내게 주어진 충분한 여분의 시간이 있을 때, 이를 찾아서 채워가야 하리라. 그럴 때, 비어 있는 인생퍼즐의 한쪽이라도 더 메울 수 있을 것이다. 마흔 넘어 줄행랑치는 시간 앞에서는 누구나 속수무책일거라는 생각도 들 것이다. 내 나이대 사람들은 직장생활에서도 이골이 날 만큼 격전을 치룬 용사들이니 별의별 경험이 다 있을 것이다. 경험이란 것은 자기가 겪어 본 바를 의미하기에, 간혹 가슴 아픈 일도 있었을 것이다. 실직의 쓰라림도 있었을 것이고, 사람과 조직에 대한 배퇴감(背退感)도 있었을지 모른다. 가슴 답답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을 거라는 것이다. 누구든 붙잡고 나는 아직 열정 있다고 말하고 싶기도 했을 것이다. 나는 아직 쌩쌩하다고. 두 팔의 알통을 걷어 부치며, 누구든 그렇게 말하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이 말이 백 퍼센트 맞는다 해도 지금까지 내게는 결코 작지 않은 허점이 있었다. 

‘나는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여전히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중년에 접어들었는지, 중년을 가까이에 두고도 이러는지, 내 나이엔 누구라 할 것 없이 이점이 문제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그에 대한 대안도 딱히 떠오르지는 않는다. 그렇다보니 굳건한 신념이나, 확신은 말처럼 쉽지 않다. 중년 고개에서 방황할지 모르는 당신,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가?

가슴을 쭉 펴는 일, 그것이 그대가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이다. 삼십대보다 더욱 가슴을 넓게 펴고 자신을,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러면 가슴 속이 그나마 후련해진다. 이 나이가 되도록 뭘 했나, 하는 자괴심이 들어 자신이 한없이 초라하고 처량해 보일지라도, 날개를 펴듯 가슴을 쭉쭉 펴자. 좀 더 근사하게 말하자면, 세상에 대해, 사람에 대해, 내가 모르는 새로운 것들에 대해 적극적이고 개방적으로 대하자. 이제 우리는 인생을 조금은 아는 나이가 되었으니 새가슴 따윈 집어 치워도 된다. 새가슴에서 날개가 돋아야 얼마나 큰 깃이 나겠는가? 큰 깃을 달면 하늘 높이 날테니까 설령 떨어진 벼이삭을 줍는다 해도 더 잘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컴퓨터 바탕화면의 밭가는 농부는 내게 그것은 말하려는 것은 아닌가?

  

ⓒ전경일, <남자, 마흔 이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