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딸애가 멋진 숙녀가 되어가고 있다는 징후를 곳곳에서 발견하곤 한다. 아직 십대인 아이가 거울에 얼굴을 비추며 여드름을 짜고, 머리를 매만지고, 표정 연기를 하고, 맵시를 돋보이게 하려는 것은 성장기 아이들에겐 그 어떤 일보다도 중요할 것이다. 그것은 성장하고 있다는 증거이며, 사람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법을 자연스럽게 터득해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딸이 이렇게 멋지게 커서…….’ 속으로 흐뭇한 마음이 들곤 한다.
큰 딸애에게 생긴 가까운 변화를 나는 최근에야 눈치챘다. 아이가 왜 앞의 머리로 이마를 가리고 싶어하고, 샤기 컷을 해야 하고, 반 친구와 다투고 온 날 왜 침대에 누워 번민에 사로잡혀 있어야 하는지…….
그날 그 애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멋진 딸: “아빤 정말 모르세요? 여자애들이 가장 고통스러운 때가 언젠 줄 아세요?”
미련퉁이 아빠: “왜? 친구하고 싸웠을 때?”
멋진 딸: “거봐요? 아빤 전혀 모른다니까요. 여자애들은요. 세 가지 상황을 가장 두려워해요. 첫째는요, 나와 누구도 짝이 되려하지 않을 때고요. 둘째는요, 점심을 같이 먹으려고 하는 친구가 없을 때고요. 셋째는요, 집에 돌아오는 길에 같이 올 애가 없어 혼자 오게 되는 거예요. 그것도 모르면서 아빠가 나를 이해한다구요?”
나는 그만 말문이 막히지 않을 수 없었다. 속으로는 그까짓 거야, 네 또래 때에는 다 그랬단다, 얼마든지 있을 법한 일이지, 그게 뭐 큰일이라도 되냐…… 고 대꾸해주고 싶었지만, 잠시 생각을 가다듬은 나는 내가 들려주고 싶은 정답 대신 전혀 다른 질문을 던졌다.
미련퉁이 아빠: “아빠가 가장 두려워하는 게 뭔 줄 아니?”
딸애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나를 쳐다본다.
미련퉁이 아빠: “아빠가 언제 회사를 그만두어야 할지를 모를 때, 너희들이 아빠의 바람과 달리 나갈 때, 엄마나 너희들이 아플 때…….”
큰애는 그저 나를 쳐다본 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건 아빠의 고민이라는 듯이……. 이로써 우리는 서로가 가장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부모와 자식 간에는 서로를 알아가는, 서로가 지닌 두려움이라는 게 뭔지 잘 알 필요가 있다. 하지만, 내가 지닌 두려움을 딸애 앞에서 계속 강조하거나 반복하는 것은 의미 없어 보인다.
그날 밤이었다. 나는 내 책상에 메모지가 한 장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아빠, 두려워 마세요. 아빠의 두려움이 제 것보다 더 크다고 말씀하지도 마세요. 하지만 모든 게 잘될 거예요. 사랑해요.” 메모지에는 하트 모양이 여러 개 그려져 있었다. 사랑의 징표에는 우리가 나눈 두려움이 써져 있었다. 그것을 극복해야 한다는 메시지도 함께 들어 있었다.
아직은 철없다고 믿었던 딸애에게서 나는 적잖은 충격과 감동을 받았다. 큰애가 지닌 따뜻한 마음을 온전히 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모로 봐도 맞는 말 아닌가!
과연 내가 지닌 두려움이 아이가 가지는 두려움보다 크다고 말할 수 있을까? 어떤 두려움이든 사랑으로 극복해갈 수 있다는 딸애의 생각은 편지에 고스란히 묻어났다. 아이들은 참으로 대단하다. 그들이 하는 이야기를 느낄 수 있고, 기꺼이 받아들이는 부모에게는 정신적 성장통을 부여한다. 아이들이 부모를 이끄는 방식이 이런 것인가?
ⓒ전경일.이민경, <부모코칭이 아이의 미래를 바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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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05/21 [부모코칭이 자녀의 미래를 바꾼다] 아이들이 부모를 키운다
우리 부부가 진지하게 아이들 가정교육에 대해 토론한 적 있는데, 어느 면에서 서로 약간씩 어긋나는 점을 발견했다. 부부가 생각이 다 같을 수 있다면, 같이 살아가며 배울 게 무엇이 있을까. 물론, 상호보완적 기능도 많이 떨어질 것이다. 특히 내 경우는 아이들하고의 대화 중 그 같은 문제점이 크게 부각되곤 한다. 여러 면에서 나는 아직 ‘덜 된 아버지’인 게 분명하다.
아이들과 소통하는 방식에 대해 주로 부모는 가르치려 들지만, 실은 많이 들어주고, 많이 말하도록 하는 것이 아이들을 배려하는 것이다. 나는 이 점을 종종 잊곤 한다. 물론, 이 점에 관한 한 나는 덜 배웠거나, 덜 깨우친 아버지임에 틀림없다. 가장은 카리스마를 발휘해야 하는 것으로, 그것이 권위인 것으로 오랫동안 생각해왔으니까 말이다. 아버지는 강한 것, 뭐 그런 게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건 오산이다. 아버지에게 가장 필요한 건 인간다움이다.
기존에 내가 가졌던 신념은 너무나 한순간에 어이없이 무너졌다.
딸아이에게 ‘인생에서 승자가 되는 법’ 따위의 열변을 토하다 나는 그만 방귀를 뀌고 말았던 것이다. 그때 가족 중 누군가가 재치 있게 농담을 했다.
“아빠는 위아래로 열변을 토하시는군요!”
나는 그때 무안했지만, 아내는 재치 있게, “아버지가 열정적으로 얘기하다보니까 생긴 거다. 이건 NG니까 빼주렴.”
나는 이쯤에서 열변을 멈춰야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그때의 일로 아버지 됨의 다른 의미를 생각해보게 되었다. 온몸(?)으로 말한다고 먹히는 게 아니다. 나직하게 얘기하고, 진심으로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백번 열변을 쏟는 것보다 훨씬 큰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물론, 생리적 실수를 할 리도 없다.
그동안의 나의 아이들에 대한 태도는 ‘세상에 너희들이 알아야 할 것이 너무 많아 아버지가 가르침의 대화를 독차지할 수밖에 없다’는 식 아니었을까? 아니면 ‘너희들과 참된 대화를 실컷 나누지 못했던 것은 시간이 너무 없고 너희들에게 가르쳐야 할 것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야’ 이런 식 아니었을까? 일방이 지닌, 스미지 않고 그저 흘러가버리고 마는 현상을 간과했던 셈이다.
만일 나처럼 이 같은 생각을 해온 아버지가 있다면, 그건 자녀와의 관계가 총체적 냉담 상태에 놓여 있다는 것을 뜻한다. 좋은 대화란 추임새 있는 대화를 말한다. 상대의 의중을 헤아리면서 말하고 듣는 능력은 어려서부터 배우지 않으면 성인이 되어서는 쉽사리 배울 수 없다. 그것은 인성을 형성하는 하나의 태도이다. 그런 대인관계의 성공적인 태도는 어렸을 때부터 자연스럽게 생활 속에서 체화된다.
요즘 아이들의 문제점으로 상상력이 낮거나, 문장 구성력이 허술하거나, 인문학적 배경이 없어서 다양한 사고를 전개시킬 수 없다는 것 등은 학교나 학원에서 공부하는 것으로 어느 정도는 채워질 수는 있다. 그러나 아이들이 타인의 이야기를 잘 듣게 하려면, 그것은 부모의 피나는 노력이 뒤따라야 한다. 인내, 끈기, 이 두 가지가 전제되어야만 한다. 자신과 대화를 하는데 익숙하지 않은 부모는 자녀에게 듣기 공부를 가르치는데 맹점을 드러낸다.
자녀와의 최선의 대화는, 필연코 나를 듣는 사람이 되게 만드는 기술이다. 그건 뛰어난 인성과 분리되어 생각할 수 없다. 부모의 삶을 생활로 듣게 하고, 부모의 행동을 일상에서 보게 하며 느끼게 만드는 것이다. 세상에 부모의 이 같은 행동보다 더 큰 울림이나 웅변이 어디 있을까.
ⓒ전경일.이민경, <부모코칭이 아이의 미래를 바꾼다>
중견 기업의 중역인 이 씨는 어느 날 집에 일거리를 가져갔다가 급히 이메일을 체크할 일이 있어 아이 공부방에 놓인 PC를 켜게 됐다. ‘뷁’, ‘방가방가’ 등 온갖 언어가 늘어선 PC 자료실을 보고는 이 씨는 기겁을 했다. 도저히 자신의 상식으로는 납득할 수 없는 문화에 대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난감했기 때문이다.
이 씨는 “애들 세상이 딴 세상이라는 얘기는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며 “내가 이렇게 아이들 세계와 완전히 다른 세상에 살고 있는 아버지라는 걸 처음으로 알았다”라며 실망하는 눈치였다. 자녀의 언어는 물론, 그들의 문화에 빠져 들지 못하면서 아이들과 소통한다는 건 무리다 싶었다. 아이들에게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그 후로 그는 짬짬이 시간을 내어 아이들의 문화를 익혀보기로 마음먹었다.
인터넷에는 그들 나름의 문화가 있고, 그곳에는 소위 커뮤니티라는 게 있어, 시대적 정서나 담론을 생산해 내고 있다. 특히나 사용자들이 만들어 내는 문화는 한 순간 전 네티즌들에게 전파된다. 실험삼아 몇 개의 채팅어를 수첩에 적어 암기한 후, 그는 토요일 저녁 아이들과 함께 한 식사 자리에서 써보기로 했다. 적당한 단어가 쓰일만하게 대화를 유도한 뒤, 그는 기회다 싶을 때 익힌 표현을 쓰기로 했다. 때마침 아이가 이번 주에 잘한 일을 자랑삼아 늘어놨다.
“역쉬, 우리 아들 훈남이야!”
일순, 어안이 벙벙해지는 듯하다가 얘가 갑자기 웃어젖히며, “아버지도 그런 말 쓸 줄 아세요?” 하고 반문했다. 가족들은 식탁에서 한참을 배꼽잡고 웃어댔다.
그날의 에피소드는 이 씨가 자녀와 가까워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 씨는 자녀에게 이런 속어가 좋은 건 아니지만, 아버지가 너희들과 어울리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으로 이해해달라고 설명했다. 그날의 식탁 풍경을 그는 이렇게 묘사했다.
“아이들이 당연히 놀랬죠? 아버지가 뭐 딱딱하지 않고 젊어졌다나, 아마 덜 고지식하게 보였나 보죠…….”
자녀와 대화가 막히는 것에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주요원인은 다른 세대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데 인색하기 때문이다. 아이들 세대는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이미 새로운 생활 방식에 뛰어들었을 수 있다. 이전 세대가 다음 세대를 바꾸려 한다면, 그건 갈등만 초래할 뿐이다. 어느 시대건 주도권은 다음 세대로 자연스럽게 넘어갈 수밖에 없고, 그게 자연의 법칙이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양보하시고, 그들 세대에 오히려 소속되려고 노력하시라.
이전 세대는 다만 자녀를 잘 이끄는 것만으로 만족하면 된다. 세대 간 갈등을 줄이는 건, 내 방식이 아닌, 그들의 방식을 알고 그들 방식대로 행하는 것이다. 그들 시대에 우리는 이방인일 뿐이다. 그걸 모르는 가장은 늘 자녀와 소통에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다. 물론, 잦은 호통 소리와 아이들이 귀를 막는 살풍경도 벌어질 것이다. 원하는 게 이런 건 아니지 않는가?
노먼 M. 롭센즈는 <화목한 가정을 만드는 10가지 방법>에서 우리는 “식구들 개개인이 특별히 싫어하는 일과 좋아하는 음식 등은 잘 알고 있지만, 식구들의 감정에 대해선 아는 바가 별로 없다” 고 말한다. 동거자로 같이 살고는 있지만, 정작 아는 게 별로 없다는 뜻이다. 같은 공간에서 살기에 어쩔 수 없이 부대끼며 알게 되는 것들, 사소한 공동의 경험들, 욕구나 요구들 외에 정서적인 부분까지 깊숙이 들어가 본 적은 거의 없다. 마치 가까이 있는 타인 같다. 그러면서도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불평을 늘어놓기 일쑤다.
자녀를 사랑한다면, 그들과 함께 서로 알기 위한 시도를 먼저 해보자. 그들의 말이나 행동에서 상호 이해의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알고자 하는 노력은 대화로 이어지고, 이는 서로의 벽을 허물 수 있는 계기가 된다. 서로 간에 특별히 관심을 갖지 않았던 것들을 알게 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자녀와 그저 일상적으로 만나는 것이 아닌, 그들의 진정한 면을 찾을 수 있도록 각별한 관심을 기울여보자. 사랑이 적극적으로 표현되는 가정은 뭐가 달라도 다르다. 이런 관심은 부모의 자녀에 대한 가장 강력한 격려와 후원의 메시지가 되며, 아이들이 부모 가까이에 정신적으로 접근하는 계기가 된다. 물론, 아이들이 부모를 잘 알게 되는 것은 보너스에 해당된다. 부모와 자식 사이, 많이 알 것 같지만 의외로 아는 게 적다. 이거 의외로 놀라운 일 아닌가?
ⓒ전경일.이민경, <부모코칭이 아이의 미래를 바꾼다>
다른 집에 비해 이사를 자주 해야 했던 우리 부부는 항상 버려야할 짐이 너무 많았다. 둘째 아이가 태어나기 전 이사를 하면서 나는 아무 생각없이 큰 딸 아이가 가지고 놀던 오리알 인형을 버린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것은 치명적인 나의 실수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느날인가 아이와 놀아주면서 오리알에 대해 이런 동화를 들려주었었다.
“아가, 이 오리알이 시간이 지나면 오리가 되고, 또 착한 오리는 백조로 다시 태어날거야.”
딸 아이는 그 말을 잊지 않고 그 인형이 오리가 되고, 다시 백조가 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나는 내가 들려준 동화는 까맣게 잊고 별로 쓸모없고 이미 그런 장난감과는 맞지 않는 나이에 접어든 딸에게 필요 없을 것으로 생각해서 아무 설명없이 덜컥 버린 것이다.
아버지의 동화를 기억하며 오리알이 백조가 되기를 기다리던 딸아이에게 인형은 더 이상 인형이 아니라 친구였다. 순진무구한 아이의 희망이었으며, 꿈이었고, 친절하고 따뜻한 아버지의 추억까지 함께 할 수 있는 상징이었다. 그 아름다운 꿈을 나는 아무런 설명도 없이 버렸으니 아이가 받은 상처가 오죽했을까? 물론 나는 정중하게 사과하는 것을 잊지 않았고, 그 사과를 아이는 받아주었지만 그 후로도 딸 아이의 원망은 오랫동안 계속되었던 것을 잊지 못한다.
퓰리처상 수상작가인 애니 딜러드는 <어린 시절>이라는 책에서 자기가 다섯 살 때 집 뒤 골목길에서 막대기로 땅을 파다가 1919년에 주조된 10센트짜리 은화를 발견한 얘기를 적고 있다.
그 은화를 아버지한테 보였더니 아버지는 땅에 버려진 은화 위에 오랜 세월에 걸쳐 흙이 쌓여 은화가 땅속에 묻히게 되는 경위를 자상하게 설명해주었다. 그때 일을 계기로 그녀는 일생을 땅속에 묻힌 보물을 찾는 데 바치기로 결심했다. 아마도 그 은화는 그녀에게 꿈이었으며, 희망이었을 것이다.
부모와 함께하는 삶은 아이에게 많은 의미를 준다. 그래서 집안에서 아이와 다양한 의견을 교환하고 성장하는 것을 돕는 것은 부모로서 보람이자 큰 기쁨이 아닐 수 없다. 아이의 성장을 올바로 지지하기 위해 부모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부모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아이가 커서 갖게 되는 사회적 관계에도 많은 영향을 미친다.
오리알 사건은 시간이 흘러서도 내게 항상 잊혀지지 않는 교훈이 되었다. 아이들의 꿈은 어른들의 그것과 얼마든지 다를 수 있다. 아이의 입장이 되지 않으면 훌륭한 부모가 될 수 없다. 나를 부모로 키우는 건 적어도 8할 정도는 우리 집 아이들이다.
아이들은 부모와 함께 돛단배를 만들어 냇물에 띄우는 놀이를 하며 자랄 수 있지만, 후에 그 배의 선장이 되어 홀로 항해하게 된다. 아이가 항해를 무사히 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다독여주는 것은 부모가 해야 할 일이다. 부모와 자녀 간의 가장 바람직한 관계의 시작은 자녀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이다. 쉽지만은 않지만 부모가 먼저 다가가고 용기를 내 보라. 오리알이 백조가 되는 꿈을 키워주기 위해서라도.
ⓒ전경일.이민경, <부모코칭이 아이의 미래를 바꾼다>
부모인 내게는 낡은 감정이 우선하고, 지배적이었던 때가 있다. 이 같은 낡은 감정은 주로 생활 속에서 나타나며, 여전히 꺼지지 않는 화산과 같이 때로 폭발하곤 한다. 한번은 내가 아이들에게 버럭 화를 낸 적이 있는데 큰아이가 그런 ‘경우 없는’ 나를 맞받아치며 이렇게 대꾸했다.
“아버지가 화내는 건 우리 때문이 아니라, 실제론 회사 일 때문에 그렇거나 엄마하고 다퉈서 그런 거 아녜요?”
딸아이의 말을 듣고 나는 아이에게 도저히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 내가 만일 자기 합리화에 빠져든다면, 나는 가장 가까운 사람으로부터의 충고도 외면해버리게 되는 것 아닌가. 그럼으로써 더 큰 성숙의 기회를 저버릴 수 있다. 그건 부모로서 떳떳한 일도 아니다. 나는 솔직하게 나의 심적 상태를 인정했다. 양쪽 모두가 작용한 것 같다고, 이 점은 인정한다고, 그리고 미안하다고.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나를 위로했다.
“아버지 다 잘 될 거예요. 아빤 이미 많은 걸 얻었잖아요.”
“뭘?”
“회사도 남들이 다 아는 회사에 다니시고, 글도 쓰시고, 무엇보다 우리 아버지잖아요.”
나는 아이를 덥석 끌어안아 주었다.
그 일로 인해 나는 많은 것을 배웠다. 때로 부모는 자신의 일이 잘 안 풀린다고 자기 분노나 좌절감을 아이들에게 드러내는 경우가 있다. 극단적인 경우로 홧김에 일가족이 물속으로 뛰어드는 것이나, 약을 털어 넣는 비극적인 일들이 신문지상에 비일비재하게 등장하고 있다. 가정뿐만이 아니다. 사회 전반적으로도 총체적인 ‘화(禍) 관리’가 필요할 정도다.
화를 내는 순간, 부모는 자녀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한다. 자녀가 겁을 먹는 것은 화의 불똥이 자기에게 튀지 않도록 움츠리는 태도이지, 부모의 화가 설득력을 가져서 그런 것이 아니다. 부모가 적절하게 감정 절제를 하지 않는다면, 그 결과 아이들은 자존심과 자부심을 상실하게 되고, 부모와 멀어지며 상황은 더 악화된다. 이때 아이들이 느끼는 실망감을 별것 아닌 것같이 취급하고, 아이들의 감정은 중요하지 않다는 식의 태도를 취한다면, 아이들과 가까워질 기회는 점점 더 멀어질 것이다.
자녀가 심한 실망감이나 부정적인 감정을 표시할 때에는 절대로 즉각 반박하지 말고, 그들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감정을 함께 존중해주어야 한다. 그런 부모의 태도는 아이를 정신적으로 성숙한 인간으로 자라게 한다. 아이들의 문제가 아닌, 부모의 문제가 되도록 하라. 부모가 지속적으로 인성 훈련을 쌓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치미는 화를 견딜 수 없더라도 야구장이나 축구장에서 응원할 때 쓰도록 고함만은 아껴두자. 원칙과 규범 하에 실행하는 따끔한 체벌과 달리 부모가 절제 없는 폭력을 행사한다면, 아이는 부모로부터 자제력을 배우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런 아이는 교훈 대신, 두려움을 익히게 되고, 자라며 남에게 두려움을 주거나, 두려움을 받는 상황에 점점 더 익숙해지게 된다. 아이가 커서 폭력을 행사하는 부모가 되지 않게 하려면 부모가 무엇에 가장 주의를 기울여야 할지 잘 알 것이다. 나를 통제하지 못해 생기는 감정의 찌꺼기 따위를 버리고, 분명히 제어 가능한 감정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아이들로부터 미처 배우지 못한 내게 큰 딸 애의 지적은 가장 뼈아픈 교훈으로 남았다. 나는 이 점에 대해 변명할 여지없다. 할 수만 있다면, 나를 가르친 아이들에게 부모로서 고마워할 밖에…….
<좋은부모되기> 바람직한 부모가 되기 위한 5가지 방법
우리는 자녀의 인생을 대신 살아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의 인생에 너무 깊이 관여하고 있지는 않은지 항상 돌아봐야한다. 레이 가런디는 <완벽한 부모가 될 필요는 없다>에서 다음과 같이 충고하고 있다.
1.아이를 남과 다르게 키운다는 생각을 하지 마라
사랑, 행복, 아이들의 건강한 성장, 정서적 안정, 믿음, 굳건한 부자간의 유대 같은 것들은 이 사회에서 ‘예외적인 것들’이 아니다. 그것은 보편적 가치이며, 일반적이다. 너무 자녀를 ‘사랑해야 한다’라고 생각하거나, ‘남달리 키우고 싶다’는 따위의 생각을 할 필요는 없다. 세계적인 야구 선수는 아빠와 공 던지기를 하거나, 동네에서 먼지 묻은 공을 던지던 그런 가장 흔한 경험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이다.
2. 완벽한 부모는 없으며, 완벽에 가까운 부모도 없다
완벽에 너무 강박되어 있으면 정신적 혼란을 맞이하게 될 우려가 있다. 우리는 얼마든지 완벽하지 않아도 된다. 완벽한 부모가, 남편이, 아내가, 자녀가, 직장인이, 시민이, 친구가, 연인이 ‘내’가 아니어도 좋다. 보통의 가치관과 불안정성으로도 우리는 즐겁게 살아갈 수 있으며, 부모와 자식 간에도 바람직한 관계를 이룰 수 있다. 이러면 되는 것 아닌가? 부모라는 지위로 혹여 신이 되겠다는 건 아니지 않는가? 그러면 됐다.
3. 자녀에게 항상 호감만 줄 필요는 없다
모든 부모는 때로는 자녀의 미움을 받는다. 이것은 건전한 부모가 겪는 현실이다. 부모가 싫어하는 입장을 거의 취하지 않고 규율을 지키라고 강요하지 않을 경우 아이들은 그들의 기분에 맞는 결정에 익숙해지고 마음에 안 드는 결정에 대해 인내심이 줄어들게 될 것이다. 호감, 그것은 때때로 구하기만 해도 된다.
4. 모든 일을 올바르게 할 수는 없다.
최선을 다하려고 전력을 하는 부모를 자녀가 몰라준다면? 완벽한 부모가 되려고 애쓰다 보면 오히려 부족감과 죄책감만 느끼게 되고 효과는 줄어든다. 최고의 선택이 아니라 최선의 선택이 중요하다는 것을 명심하라. 중요한 것은 아이들이 부모가 노력하고 있고, 그들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점이다. 부모도 인간이기 때문에 자신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해서는 곤란하다. 신처럼 전지전능해 지는 대신에 따분해지고 싶은 건 아니지 않는가?
5. 부모의 역할을 포기하지 않으면 실패할 가능성은 없다.
부모는 자신의 역할이 기대 이하일까 봐 두려움을 갖고 있다. 자녀를 더 좋은 환경에서 살게 해주지 못하는 것에 대해 미안해하고, 경제적으로 더 뒷바라지 못해주는 것에 대해 늘 안타까워한다. 그러나 지금 이 정도도 당신은 아이에게 충분히 해 주고 있다는 것을 잊지말라. 부모의 역할을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자녀교육은 실패하지 않을 것이다.
ⓒ전경일.이민경, <부모코칭이 아이의 미래를 바꾼다>
몇 해 전, 통계청이 발표한 인구 분포표를 기초로 어느 일간지에 특별한 기사가 실렸다. 기사 제목은 ‘우리나라 인구 4734만 명 중 나는 몇 번째 어른에 해당될까?’였다. 기사는 친절하게도 입시생들의 전국 수능성적 누적분포표처럼 나이대별 순위를 매겨놓았다. 아쉽게도 내 나이대인 1964년생에 대해서는 자료가 보이지 않아 자세히 알 수는 없었지만, 부모님 세대의 순위에 대해서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아버지: 1924년생 /전체 순위: 86만 1809(1.82%) / 남자 중 순위: 26만 5568(1.11%)
어머니: 1932년생 /전체 순위: 236만 7358(5.00%) / 여자 중 순위: 152만 847(6.38%)
재작년 초에 돌아가신 아버지나, 미망인이 되신 연로한 어머니는 전체 생존자 중 채 5퍼센트를 넘지 않았다. 특별히 불행한 일이 없다면, 자식들에 비해 부모님의 백분율은 당연히 낮을 것이다. 피라미드형이든, 항아리형이든, 인구분포도상 많은 나이층에 놓여 있다가 서서히 낮은 분포도로 이동해가는 게 인생일거라고 생각하니 숫자에 대해 남다른 감응이 일었다. 나는 상위 몇 퍼센트에 이를 때까지 앞으로 살게 될까? 그런 생각을 하자, 불현듯 지금의 나이를 살아온 내 삶의 자욱이 눈에 밟히는 듯 가까이 다가왔다.
십여 년 성사, 그 사이 결혼해 애들이 둘씩이나 생기는 인생 최대의 횡재를 하고, 용케도 삶의 언저리에 낀 빙판에 넘어지지 않고 잘도 내딛으며 살아왔다. 지난 삶을 돌이켜보면, 무엇보다도 내게 아이들이라는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선물을 보내주신 신께 감사드리고 싶다. 태어나서 새끼를 보고, 귀염 떠는 것을 지켜보며 하루를 살고, 때로는 자식을 무릎에 앉힌 채 살을 부빌 때 부모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런 건 정말이지 놀라운 경험이다! 이로 인해 가정에 늘 조잘거리며 울고 웃는 크고 작은 소리가 악기처럼 난다는 것은…….
얼떨결에 낳은 첫애 때에는 몰랐던 것을 둘째 애를 낳고서야 알게 되었다. 내가 어른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 말이다. 라이센스도 없이 얻은 ‘어른’이란 타이틀이었다. 그러나 때로 애들 앞에 서면, 내가 정작 어른이 되긴 했는지 자문하게 된다. 아이들 앞에서 억제하지 못한 화를 쏟아내고, 분에 겨워 감정 통제에 실패하는 날이면, 이유야 어찌되었건, 내가 부모 이전에 어른이 되었는지 묻게 된다.
나이대별 백분율은 그렇다 치고, 부모로써 내가 이룬 어른스러움은 과연 몇 퍼센트에 해당될까? 내가 세운 목표대에 도달한 것인지, 나의 점유대는 얼마인지 궁금하다. 나는 이런 질문에 뚜렷히 이렇다고 대답을 꺼내놓을 수 있을까?
돌이켜 보면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채, 형식적으로 나이라는 숫자만 집어먹은 어른이 우리 집에 버티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런 사람이 가장이 되고, 이 사회를 떠맡은 책임의 주체로 제 몸에 맞지 않은 옷을 걸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 반성케 하는 대목이다. 결국엔 내가 나 다울 때 부모로서의 자리도 격에 맞고, 의젖한 것 아닐까. 결국엔 에비로서 나의 수신(修身)의 문제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닦고 사는 게 인생이라고 했다. 해서 나는 부모라는 이름의 나를 바라볼 때면, 아이들 앞에서 아이들보다 더 작아지는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이때처럼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워지는 적 있을까? 아이들은 부모를 믿고 의지하며 자라나지만, 그 작은 아이들은 자가 반추하는 부모에게는 부모다움을 재는 저울이 된다. 따라서 아이들이 부모를 만들고 어른을 만든다. 나는 스스로 내 자신에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아이들에게 어떤 부모가 되어야 할까? 어른으로서, 부모로서 나의 자리는 무엇인가? 밥을 먹이고, 옷을 해 입히고, 학교를 보내는 것만이 아닌, 아이가 내게 와 깃드는 큰 나무로서 부모가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저녁 무렵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부모는 자신을 돌아본다. 부모 세대가 내게 드러내준 것 이상을 이룩하고 싶어진다.
“요즘 애들은, 애가 애를 키우는 것 같더구나…….”
서른 안팎까지 가끔 듣게 되었던 부모님의 혀를 차는 말씀이 요즘 들어서는 때로 그리워진다. 아버지는 이태 전 이후로 내게 더는 이런 말씀을 해주시지 못한다. 그분의 말씀은 기억 속에나 남아 있다. 바쁜 일상에 문득, 모든 것이 정지해버릴 듯한 찰나에 아버지에 대한 추억이 나를 훑고 지나간다. 그럴 때면, 나는 어른의 빈자리에 엉거주춤 어른 자리를 물려받은, 몸에 안 맞는 옷을 엉터리로 걸치고 있는 자식으로 서 있다. 부모만한 자식이 어디 있으랴! 나라면 그분들과 같은 희생을 감수나 했겠는가? 이 점에서 나는 늘 부끄럽다.
자식을 키우며 무던히 속을 썩든, 아이들이 재롱떠는 모습에 삶의 시름을 잊든, 100점 맞은 시험지를 코 앞에 내밀 때 한없이 흐뭇해지든, 모든 감정들이 동물적 사랑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걸 안다. 아이들을 눈에 넣어도 안 아픈 거야 어느 부모나 다 똑같은 것 아닌가. 그게 어디 사람만 그런 거겠는가. 돼지 새끼도 처음 태어났을 때에는 얼마나 귀여운지, 하룻강아지는 또 얼마나 보드랍고 따뜻한지……. 다들 본능적으로 제 새끼를 품고, 키우며, 새끼 때문에 용기를 낸다.
세상 수많은 인연 중에 부모와 자식으로 만난다는 것, 그건 정말 대단한 인연이 쌓여 만들어 진 것이다. 그런 인연으로 아직 어린 아이들을 고이 보살피라고 부모에게는 자식을 사랑하는 애틋한 감정이 솟아나는 것 아닐까?
얼마 전, 나는 부모가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다.
부모가 된다는 것은 100℃의 물에 이르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정신적 성숙이 99℃에 머물러 마지막 1℃를 넘지 못한다. 이 최후의 1℃를 넘을 때, 궁극적으로 부모다운 어른이 되는 것이다. 바로 이 부분에서 부모는 자신의 훌륭한 인성, 사람 됨됨이, 책임감 같은 걸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제 아무리 노력을 해도 대부분의 부모가 좀처럼 넘기 어려운 지점이 여기이다. 그걸 넘어서는 사람에게는 부모 됨의 라이센스를 부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아이들에게 부모가 된다는 것은 자식을 낳아서 기르는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가장 본능적인 행위를 통해서도 우리는 자신을 부단히 성장시켜나갈 수 있다. 하물며 이성적으로 단련되고, 훈련된 자신이라면 보다 내면이 견고해 질 것은 분명하다. 이런 내공은 자식들이 부모를 바라볼 때, 존경심과 경건한 마음을 자연스럽게 갖게 한다.
살며 그런 부모가 돼야 할 텐데, 나는 여전히 부모다움에서 너무 멀리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세상 모든 부모의 마음을 품은 채, 내가 그런 어른이 되는 날이 온다면, 나는 지금의 작은 역할을 뛰어넘어 부모로서 더 큰 성장을 이루게 될 것이다. 부모가 된다는 것은 때로, 내 인생의 족적을 돌아보는 것이다. 아이들이 있어 나는 부모로서 나를 돌아보고, 그런 나는 어른다운 부모가 되는 것이라 믿는다.
[이번에 제 아내 이민경씨와 공저로 책을 한 권 냈습니다. 아이들을 키우며, 코칭에 대해, 참다운 부모와 자식됨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한 결과물이자, 부모됨의 과정에 있는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소개하고자 합니다.]
두 딸아이를 키우는 나는 때로 내가 아이들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나를 키운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첫 애를 낳았을 때에는 누구나 얼떨결에 부모가 된다. 곧 새 식구가 늘어난 환경에 익숙해지고, 아이들이 자라면서 가족으로서 보다 큰 정신적 유대와 교감을 나누게 된다. 아이들은 부모의 가장 가까운 데서 보호를 받으며 자란다. 자연스럽게 보호자와 피보호자의 관계가 생긴다.
때로 약하기만 한 아이들이 부모의 가장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는 걸 깨닫게 된다. 세상을 향해 더욱 힘내게 만든다. 아이들을 생각할 때 어느 부모인들 힘껏 달리지 않을 수 있을까? 아이들은 마치 부모를 비로소 어른이 되게 만드는 존재와 같다. 아이들은 그런 놀라운 힘을 지니고 태어난다.
자녀가 자라는 것을 볼 때, 우리는 부모로서 한없는 기쁨을 느낀다. 그런 기쁨은 어른으로서의 사명감과 책임 의식을 내면에 불어넣는다. 나아가 아이들을 키우는데 많은 관심과 애정을 쏟게 만든다. 아이들을 통해 우리는 부모가 되고, 어른이 되며, 부모로 산다는 것의 참된 의미와 진정한 책임감을 깨닫는다. 부모로서 점차 성숙되어 간다. 나는 이것을 부모가 맞이하는 성장과 숙성의 시간이라고 부르고 싶다. 누구나 그렇듯, 자동차를 운전하는 것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한 일에 면허도 없이 부모가 된다. 무면허로 결혼하고, 자녀를 낳고 길러낸다. 그러며 온갖 세상 경험을 하며 부모의 길을 걷는다.
가정교육은 아이들을 가르치려는 것이지만, 이를 통해 정작 커가는 사람은 부모다. 교육의 효과를 양쪽 다 누리지만 더 큰 수혜자는 부모가 될 수 있다는 얘기다. 아이는 배우고, 부모는 조심하고, 서로가 익히고 가리며 사랑하는 법을 배운다. 이것이 가정 내에서 우리가 익히는 교육의 본질이다. 사람 됨됨이를 터득하고, 사람다움의 진정한 모양새를 갖춰간다.
많은 교육 관련 매뉴얼이 있지만, 이상적인 훈육에 관한 기술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자녀 교육 방법은 세상 모든 가정의 숫자만큼이나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가정에서나 보편적인 원칙이 있다. 앞으로 우리가 얘기할 것들이 이런 것들이다.
아이들과 함께 보내는 법, 아이들의 잠재적인 능력을 드러내도록 하는 법, 아이들이 보다 슬기로워지도록 만드는 법 등은 모두 스킬에 해당된다. 그 이면도 주요 관심사다.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 뒤에는 보다 궁극적인 삶의 자세가 자리 잡고 있다. 사람다움을 키워나가는 것이지, 육체적으로만 성인이 되는 자녀를 키우는 건 아니다. 그러기에 정신적인 만남과 대화의 장은 가정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의 핵심을 이룬다. 학교나 사회 활동을 통해 자아를 보다 큰 거울에 비추며, 성숙한 성인으로 자녀가 커가도록 인도하는 책임감이 뒤따르는 건 이 때문이다.
양육 과정에서 부모도 정신적으로 단련된다. 겸손, 배려, 칭찬, 우호적 감정들을 통해 사회화 과정을 다시, 심지어는 제대로, 경험하게끔 인도되기도 한다. 아이들이 부모를 자가 교육의 과정에 뛰어들게 만드는 셈이다. 부모는 이 과정에서 자신이 어려서 경험했던 가치들을 재경험하곤 한다. 이런 이유로 가정에서 자녀와 함께 보내는 시간과 대화ㆍ접촉은 결코 적은 의미를 지닌 게 아니다. 이런 것들은 우리에게 사랑이란 감정, 깊은 신뢰라는 신념 체계를 형성시켜준다. 아이들을 매일 만날 수 있는 가정이란 둥지보다 더 놀라운 세계가 있을까!
이 책은 몇 가지 조언들로 이루어져 있다. 내가 누구보다 잘 지키고, 수행의 모범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교훈적인 말들이 아니다. 다만, 몸소 익히고, 어떤 것들은 마음속에 새겨 본 것들이다. 나와 아내를 가리키는 우리 부부는 세상의 많은 부모와 마찬가지로 결코 완벽하지 않다. 여전히 부모가 되기 위한 과정에 놓여 있는 사람들이다. 그렇기에 부모의 성찰과 성장을 다룬 팁들은 이 책에서 비껴갈 수 없는 주제이다.
이 책을 통해 지켜야 할 몇 가지 기준들을 살펴보고, 생활 속에서 작은 실천을 하고, 스스로 다스려간다면 보다 부모다운 행동을 할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물론, 부모다움이 쉬운 일만은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다. 자신을 먼저 다스리는 과제가 앞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떤 것을 먹느냐에 따라 몸이 달라지듯, 우리가 어떤 ‘부모 훈련’을 통해 아이들에게 다가가야 자녀들이 자기 모습을 갖추게 될지 결정된다. 여기에 나열된 많은 조언들은 자녀와 부모가 다 같이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되어줄 것으로 믿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