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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 자체로는 재해가 없다. 인간이 대응에 실패할 때 재해가 되는 것이다. 고베지진은 지진이 발생할 거라고 예상되지 않는 지역에서 발생한 것으로 관심 밖의 영역에서 래드 플래그가 발생하며 허를 찌른 것이다. 고베 지진은 그 자체로 연구 대상이지만, 초기대응이나, 이후의 조치에 있어 많은 점을 시사하고 있다. 경영상에 나타나는 문제점을 사후에라도 제대로 대응하는 방식을 엿 볼 수 있다. 요는 문제가 아니라, 그에 대한 대응력일 것이다.

1995년 1월 17일 오전 5시 46분. 일본 야와지시마(西宮) 북부에서는 지축을 뒤흔드는 지진이 12초간 이어졌다. 도시 바로 밑 지하 14km에서 리히터 7.3 규모의 강진이 발생한 것이다. 이 같은 지진은 우리에게 관동대지진으로 익히 알려진 1943년의 진도 7.2 지진과 1948년의 진도 7.1지진이 있은 다음 일본 열도에서는 거의 처음 있은 강력한 것이었다. 더구나 도시 바로 밑 얕은 지층에서 발생한 지진으로는 매우 드문 일이었다. 이 지진은 고베(神戶)시, 인시야시, 니시노미야시 등 여러 도시를 강타하며 엄청난 피해 입혔고, 일본은 물론 전 세계적으로도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지진으로 인한 인명피해는 사망이 5,502명, 부상 41,521명, 그리고 이재민만 29만 명에 달했다. 주택피해도 총 39만719동에서 발생해 전파가 100,209동, 반파가 107,074동, 일부파손이 183,436동에 달했다. 공공건물 피해도 549동, 기타 건물 피해는 3,120동, 도로피해는 9,403개소에서 발생했고, 약 100만 세대가 정전에 곤란을 겪었다. 식수도 약 120만 세대에 공급 중단되었다. 통신은 25퍼센트 가량 차단되었고, 가스공급도 80퍼센트나 단절되었다. 한마디로 도시의 기능이 제대로 돌아가기에 불가능한 상태가 벌어진 것이다. 일본 국토청 조사에 따르면, 재산 피해만도 약 13조 엔을 넘어설 정도였다.

고베대지진은 1923년 9월 1일 발생해 14만 명의 사망자를 낸 관동대지진과 비교해 볼 때, 사망자 수는 적었으나, 전후 일본에서 일어난 자연재난으로는 최대 규모였다. 자연활동이 인간 거주지에 미칠 때 발생할 수 있는 최악의 시나리오가 전개된 셈이다.

하지만 고베 지진의 피해를 단순히 자연 탓만으로는 돌릴 수는 없다. 지진의 발생은 그 자체가 인간의 능력으로는 제어할 수도, 정확하게 예측할 수도 없는 불가항력적인 자연현상이지만, 피해는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자연현상이 인간에게 악영향을 미칠 때 우리는 단순히 인간의 관점에서 재난이라고 부른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자연 활동에 대처하는 사람들의 활동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고베 지진은 1년 전 미국 캘리포니아 노스릿지에서 지진이 일어났을 때, 미국이 보여준 성공적인 재난관리와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대응방식에 초점을 둬 보면, 우선 지진 다발국인 일본에서 한신 지역은 지진 안전지대로 분류되어 있었다. 따라서 지진에 대한 경각심은 상대적으로 낮을 수밖에 없었다. 즉, 허를 찔린 셈이었다. 이 지역은 지진보다는 태풍과 강수에 중점을 둔 방재시스템을 구축해 운영해 오고 있었다. 그러나 예상을 뒤엎은 지진발생은 풍수해에 맞는 방재방법으로는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했다.

지진 규모가 상상을 초월할 만큼 컸다는데 무엇보다도 일차적인 원인이 있지만, 인구ㆍ건물ㆍ산업시설 등이 고도로 밀집해 있는 도시부에서 발생했기에 재해가 엄청나게 커졌다. 어떤 점이 그랬을까?

고베시의 교량은 1989년 이후부터 개정된 시방서에 의한 내진설계 기준에 따라 건립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그 이전의 교량은 어땠을까? 역사적으로도 지진활동은 없었고, 있다 해도 경미해서 크게 관심을 가지지 못했다. 또한 고베시의 건물은 목조건물이 많았으며 건물간격도 매우 좁았다. 이처럼 뒤늦은 도시계획과 무분별한 건물들은 지진이나 화재에 아무래도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의 허술한 재난관리 시스템도 지진의 피해를 가중시킨 원인이었다. 이때까지 일본의 재난관리 시스템은 제도적인 면과 법적인 면에서 많은 문제점을 지니고 있었다. 우선, 당시 일본의 행정체제는 긴급사태 발생시 신속한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는 구조가 아니었다. 재해법상 주관부서는 국토청 방재국으로 중앙방재회의의 실질적인 사무국 기능을 수행하고 있었다. 하지만 방재국의 권한은 중앙성청 간의 조정에 국한되어 있었다. 또한 각 기관 간의 관할권 의식이 팽배했다. 이를테면, 재해대책 중 의료후생 관계는 후생성, 도로 관계는 건설성, 수송통제는 운수성, 식량 관계는 농림수산성과 식량청 등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따라서 긴급사태 발생시 긴밀하게 대응할 수 없었다. 그러다보니 관계기관과의 조정도 복잡했고, 심지어는 조정은 불가능하기까지 했다.

또한 1961년 제정된 일본의 방재법인 「재해대책기본법」이 지닌 허점도 피해를 증폭시킨 원인이었다. 이 법은 재해대책의 일차적인 책임을 지방자치제에 두고 있다. 자치제 책임 하에 재해대책에 임하게 되어 능력의 범위를 벗어날 때에만 지원을 요청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런 이유로 중앙정부가 긴급재해대책본부를 설치한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비상재해대책본부장을 맡고 있는 국토청도 긴급사태에 대응할만한 실행조직을 갖추고 있지 않았다.

그 외에도 문제점은 많았다. 그 예로 대규모 재해 발생시 군(軍)의 활용문제를 들을 수 있다. 재해 발생시 자위대는 인명구조 활동의 중추가 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재난발생시 2차적인 존재에 불과했다. 그런 까닭에 일본에서는 대규모 지진이 발생하더라도 자위대의 출동은 요청이 있어야만 움직일 수 있었다. 군이 당연히 늦게 출동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지진 발생 후 효고현 지사가 자위대 파견을 정식 요청한 것은 4시간이 지난 시점이었다. 게다가 효고현 지사의 파견요청이 있기 전, 자위대의 최고지위에 있는 니시모토 통합막료회의 의장은 고베지진을 대규모 재해라고 하면서도 ‘통사의 재해파견절차’를 무리하게 바꿔가면서까지 대처하려고 하지 않았다. 당시 「자위대법」은 긴급을 요하는 경우에는 독자적인 판단 하에 출동할 수는 있게 되어 있었지만, 자위대는 민간에의 출입과 필요에 의한 가옥파괴 등 경찰이 가지고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따라서 현 지사의 파견요청을 받지 않을 경우에는 아무래도 활동에 많은 제약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극단적인 요청주의와 환경 적응력이 문제였던 것이다. 그러다보니 당연히 지원 태세에 있어 소홀했다.

이러한 인위적인 재난방재시스템의 한계와 더불어 환태평양 지대에 위치한 지진다발국인 일본이 비교적 지진 안전지대로 분류된 지역에 대해서는 평소에 관심을 두지 않은 점도 작용했다. 따라서 위험 요인에 대한 대비책이 미국 노스릿지의 대응에 따라갈 수는 없었다.

물론 효고현이 평상시 지진대비 방재훈련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방재 훈련시 지진 진도를 6으로 한정한 것은 문제가 있었다. 더구나 라이프 라인이 정상적이라는 가정 하에 형식적인 훈련을 했다. 그러다보니 지진이 발생하자 지방자치단체의 책임자와 공무원들조차도 정보전달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교통장애 및 사무실 파괴로 대책을 수습할 수도 없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고베시는 소방차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이러한 것은 자연재해가 인재로 인해 더욱 커져가는 예를 잘 보여준다.

캘리포니아 노스릿지의 대규모지진은 진도 6.7 규모였지만, 사망자가 61명, 부상자가 1만여 명, 피난소 수용자가 약 2만여명에 그쳤다. 여러모로 1995년 일본의 대지진과 비교해 볼 때 경미한 피해였다. 노스릿지 지진의 경우에는 미연방재난관리청(FEMA; Federal Emergency Management Agency)를 중심으로 해서 효율적인 방재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이는 과거 실패의 경험을 살려 개선해 낸 결과였다.

미국은 1993년에 발생한 LA폭동과 1992년 허리케인 앤드류의 재해시 FEMA의 실패를 거울삼아 각종 개선책을 강구했다. 그런 까닭에 FEMA를 주축으로 하는 복구부흥계획안이 1994년 1월 13일에 이미 완성되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FEMA는 여러 형태의 국가적 위기관리를 위해 설치된 기관으로 최고결정권자에게 권한이 집중되어 있었다. 따라서 빠른 의사결정과 대응책을 마련할 수 있었다.

반면, 고베시의 경우에는 어땠을까? 예상 밖의 지역에서 지진이 나자 그간 간과된 여러 문제점이 동시에 중첩되어 나타났다. 잠재된 징후들이 지진발생을 통해 표면위로 급부상한 것이다. 예를 들어, 사전 위기상황에 대비한 각 조직의 대응 매뉴얼화와 역할분담은 미흡하기만 했다. 미국의 경우, 평상시에도 각 조직의 대응과 역할 분담 및 정보 전달체제가 잘 갖추어져 있어서 시․군․주․연방의 각 조직과 민간 봉사단체가 독자적인 판단에 따라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도록 매뉴얼화 되어 있다. 반면, 일본의 경우에는 재해 이전에는 매뉴얼조차 제대로 정비되어 있지 않았다. 따라서 중앙정부, 지방공공단체, 자원봉사자들간의 활동을 조정하고 결합시킬 수 없었다.

이와 더불어 조직적인 구원활동 체제의 미비를 꼽을 수 있다. 미국의 경우에는 특수조직이 결성되고 각종 분야의 전문가 팀이 조직되어 신속한 구조 활동을 전개할 수가 있었지만, 일본은 전문적인 팀에 의한 조직적인 구조 활동체계는 갖추어져 있지 못했다. 또한 현장 투입도 지연되었다. 게다가 행정, 민간기업, 자원봉사 활동이 단발적으로 이루어져서 오히려 교통체증만 가중시켰다. 이는 일본이 평상시 조직적인 구원활동 시스템을 잘 갖추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행정편의 위주의 대비훈련과 재난관련 각종 대응 매뉴얼의 공유 부족, 역할 분담의 미비, 그리고 구원활동체제 등에 있어서 개선 및 발전을 꾀하지 못한 점은 결과적으로 고베 지진의 피해를 가중시킨 것이다.

방재기관에서는 지진은 발생 후 초동 72시간이 가장 중요하다. 이 초동72 시간이 승부수다. 그 만큼 이 시간은 앞으로 재난이 어떻게 관리되고, 통제되느냐 하는데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고베 지진의 경우에는 이 72시간 동안 초동조치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지진 발생 5시간 지나서야 비상재해대책본부가 설치되었고, 심지어는 이때까지만 해도 지진이 전후 최대 규모라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초동대응 실패에는 여러 원인이 있지만, 국토청 방재국이 현지에 조직을 전혀 갖추고 있지 못한 점도 주요 이유였다. 게다가 무라야마 수상은 적극적으로 리더십을 발휘하지 않은 채 초동대응 지연을 방치했다. 수상은 지진이 발생한지 53시간이 지난 다음에야 피해현장을 찾았다. 지진이 발생한 당일에도 일상적인 업무만 수행했다. 다음날 오전에는 재계인과의 조찬을 갖는 등 사태의 심각성을 정확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수상 스스로도 지진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적극 대응하지 않은 것은 고베지진을 보는데 있어 매우 상징적인 일이라고 여겨진다. 물론 지진발생 당일 오전 중에 수상은 ‘재해대책기본법’에 의거해 비상재해대책본부를 설치하고, 국토청 장관을 본부장으로 임명하는 조치를 취했다. 하지만 국토청은 실질적으로 손발이 없는 기관이었고, 더구나 일본인의 나와바리(관할권) 의식과 다테와리(횡적인 연결이 약한 성청별 종적 행정 시스템) 행정관행으로 인해 초동대응이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최고의사결정권자에게 보고하는 정보전달 상의 문제도 있었다. 노스릿지 지진의 경우에는 FEMA의 24시간 준비태세로 지진 발생 10분 후에 대통령에게 연락이 취해졌지만, 일본은 1시간 40여 분이 경과한 다음에야 총리대신에게 최초로 연락이 취해졌다. 한마디로 재난 대비 총체적 리더십이 결여되어 있었던 셈이다.

더구나 소방 협력체제가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점은 피해를 더욱 가중시켰다. 화재현장에는 소방대의 활동이 별로 눈에 띄지 않았고, 더욱이 헬리콥터에 의한 공중진화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소방은 필요에 의해 근린자치제와 협정체결을 맺고 있다. 협정이 없는 경우에는 여러 군데의 협조를 거쳐야만 한다. 그런데 문제는 고베시와 오사카는 협정을 맺지 않았다는 점이다. 따라서 오전 10시경 고베시장이 오사카와 도쿄의 소방청에 직접 요청하여 오사카시의 응원부대가 도착했지만, 이는 교통체증으로 인해 3시간 40분이나 지난 다음이었다. 더욱이 수도관이 파괴된 상태라서 바닷물을 퍼 올려 소화용수로 써야 할 만큼 상황은 최악이었다.

지진 후의 구원활동은 어땠을까? 구원체제 또한 평시에 역할 분담이 되어 있지 않아서 훈련과 경험이 부족하다 보니 지체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행정, 민간기업, 자원봉사, 군인, 경찰 등 각 조직은 조직적으로 구원활동을 할 수 없었다.

여러 문제점이 피해를 가중시켰지만, 긍정적인 점도 발견되었다. 예컨대 지역주민들과 자원봉사자들의 활약과 각급학교와 교육자들의 대처는 대응단계에서 효과를 발휘했다.

고베 지진이 훑고 간 다음 일본은 총체적인 재난관리 시스템을 재정비했다. 복구도 단순 복구차원이 아닌, 도시부흥차원에서 이루어졌다. 일본 정부는 16조 3,000억엔의 예산을 투입해 새롭게 인프라를 재구축했다. 한신고속도로는 철근 강도를 3배로 늘렸고, 교각 기둥도 폭을 2배나 늘렸다. 수도관이 터져서 진화에 애로를 겪은 당시 상황을 반영해 시내 곳곳에 개당 100톤짜리 방화 수조 200개를 지하에 묻었다. 한편, 위기관리실에는 시내 전체를 감시하는 방재 모니터가 운영 중이며, 자위대와 적십자사, 그리고 고베 해상본부 등과 전용 핫라인도 설치되어 있다. 해안지역을 위주로 52곳에 반경 300m까지 들리는 옥외 스피커가 설치되어 있고, 2,000여 개의 가옥별 무선경보기가 작동되고 있다. 고베 시는 지금 일본에서 가장 재난에 강한 도시가 되어 있다. 자연으로부터 호된 교훈을 얻고 난후에야 시스템이 바뀐 것이다. ⓒ카인즈교육그룹, 인문경영연구소, 전경일 소장



 

 

<고베지진의 교훈>

자연재해는 불가피한 것이지만, 대부분 인재로 인해 극대화되는 면이 적지 않다. 고베지진의 경우에는 인재가 자연재해를 가중시킨 면이 있는데, 총제적인 문제점은 커뮤니케이션 오류, 초동 대응 실패, 예측 불허의 자연재해에 대한 단선적 대응, 재난관리 시스템상의 문제, 최고의사결정권자의 리더십 부재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이는 기업 경영에서 나타날 수 있는 모든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 주요 문제점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고베시의 재난관리 방식을 보면, 지진 다발국인 까닭에 어느 지역에서도 지진발생 가능성은 상존하지만, 한신 지역에 대해서는 지진대비책이 미흡했다. 다른 방식의 재난에 대해 적합하지 않은 방재시스템을 구축하고 있었던 것은 위기대응방식이 적절하지 못했음을 뜻한다.

-재난관리에 부적합한 법, 제도, 행정체제는 래드 플래그 발동시 신속하고 유기적인 대응책을 펴기에 역부족이었다. 지방자치제에 기반한 재해대응방식은 상호협조의 구조를 이끌어 내기에 아무래도 하참 모자랐다. 게다가 복잡한 의사결정 구조는 관계기관과의 조정 자체가 불가능하기까지 했다.

-원활하고 정확한 커뮤니케이션의 부재는 긴급한 상황에서 정보전달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게 한 요인이다. 결과적으로 유관기관간의 커뮤니케이션 혼선은 피해를 더욱 가중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무라야마 수상의 안이한 대처와 리더십 부재는 국가적 위기에 대응해 신속한 초동대응을 가져오지 못한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래드 플래그시 사태의 심각성을 알고, 신속히 대응했더라면 결과는 현격히 달라졌을 것이다.

 

 

래드 플래그 제13법칙: 인재(人災) 확산의 법칙

-우리는 경영에서 최악의 상황을 상정하지 않는 안일한 태도로 위기에 직면해 기업이 무너지는 결과를 종종 목격하곤 한다. 외환위기 전까지 우리 기업들이 환차손에 대해 관심을 가진 예는 그리 많아 보이지 않는다. 위험에 대한 대응은 현실의 수위를 훨씬 뛰어넘는 최악의 상항을 염두에 두고 실행되어야 한다. ‘훈련은 실전처럼 하라’는 조언은 기업들이 최악의 시나리오에 대비해야 하는 것의 중요성을 일깨운다. 가장 단순한 충고를 무시할 때, 그 충고에 내포된 수많은 경험적 상황은 아무런 교훈이 되지 못하고 묻혀 버리고 만다. 우리의 조직은 어떤 상황대처 방식을 염두에 두고 경영해 나가야 할까?

 

<징후 예측과 위험 발생에 효과적으로 대처하는 방법들 >

-어느 기업에서나 발생하는 문제는 개별적인 것이 아니라, 경영상 발생할 수 있는 다양한 문제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래드 플래그 발동시 초동대응이 미비하면, 이에 대한 댓가는 비용 면에서 뿐만 아니라, 기업 이미지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힌다. 하지만 많은 기업들이 문제의 전면에 나서서 진화하려 하기보다는 문제를 축소하고, 회피하려는 경향을 보이다 문제를 더 불거지게 한다. 요즘에는 초동 대응이 72시간 내가 아닌, 발생 후 실시간으로 절어져야 한다. 이미 그때를 놓치면 네티즌들은 온갖 억측으로 실시간 보도를 하며 기업에 치명상을 입힌다. 초동대응 자체가 위험발생과 함께 실시간으로 진행되어야 할 이유이다. 한때 CNN 뉴스의 현장성을 두고, “전쟁이 벌어지는 곳에 CNN이 가는 것이 아니라, CNN이 있는 곳에 전쟁이 벌어진다.”고 한 적 있다. CNN을 세계 최고의 뉴스 채널로 만든 이유이다. 마찬가지로 부정적인 뉴스에서도 기업들은 실시간 대응력을 항시 갖추어야 한다.

-평소 기업들은 적극적으로 위기에 대응하기 위한 다양한 요건들을 갖추어야 한다. 사ㆍ내외 커뮤니케이션이라든가, 예방훈련의 중요성 부각, 관련부서간의 긴밀한 협조 같은 것들은 기업경영에서 반드시 실행되어야 할 부분들이다. 자연재해와 마찬가지로 기업 경영상에 돌발변수로 나타나는 위험요인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 자체의 위험성보다는 그것이 몰고 오는 대응방식에 따라 향후 전개방식이 달라지는 것을 알 수 있다. 문제를 푸는 방식은 문제가 잘못 다루어졌을 때의 파급효과를 염두에 두고 찾아져야 한다. 쉽게 꺼질 수 있는 문제를 더욱 키우는 원하지 않는 방식 또한 사람들의 손에 달려있다. 우리의 기업현장은 이런 대응력을 갖추고 있는가? 한번 점검해 보자.

 

<참고자료>

신명철, 『지진재해 수습체계 및 대응능력 연구』, 재난방재연구소 연구보고서, 1998.

김경동, 『일본 사회의 지진관리』,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7.

 


새로운 경영 패러다임
새로운 경영 패러다임으로 ‘혁신과 성장’, ‘분배’가 결합한 ‘지식기반경제의 동반성장 모델’이 제시되고 있다. 빌 게이츠나 워렛 버핏의 ‘창조적 자본주의’는 일단의 경제 패러다임 변화에서 ‘상생, 협력, 우호, 동반, 공존’의 원리를 제시하고 있고, 이는 궁극적으로 기업이 차원 다른 성장과 지속가능한 성장을 위해 산업내·외부의의 협력자들이 어우러진 사업 생태계를 선순환적으로 창조해 낼 것을 요구하고 있다.

중소기업 현황
우리나라 중소기업 현황을 보면, 소기업은 업체 수 기준 전체 기업의 97.4%, 중소기업의 90.8%를 차지하고 있다. 중소기업과 기술협력, 상생 모델을 만들어내지 않고는 새로운 차원의 기업문화, 품질혁신, 고객만족을 이끌어 낼 수 없다는 교훈을 토요타의 부침에서 읽게 된다. 대기업과 중소기업간 상호보완적 관계 설정은 (상호보완적) 자원 활용, 혁신 학습, 지식과 정보 축적을 통해 산업의 가치사슬을 동반 생태계로 만드는 과정과 맞닿아 있다.

혁신과 동반성장의 'LGism'
LG그룹의 기업사를 보면, LG는 구인회 상점 때부터 진주거점의 혁신적인 포목 사업으로 흥기하게 된다. 조선흥업사 시절부터 본격적으로 오늘날 LG그룹의 모습이 서서히 윤곽을 드러내게 된다. 수많은 혁신적인 아이디어는 사업 참가자들의 헌신적인 공헌과 피나는 노력을 통해 이루어졌고, 굵직굵직한 사업의 원류는 상생, 동반성장이라는 모델을 확대재생산 하는 가운데 얻어진다. 외부의 협력사를 파트너로 인식하는 창업자 구인회 회장의 유교적 리더십은 해외 제휴의 전통으로 자리매김되어 창업 초기부터 유니온카바이트사와 협력, 금성사의 기술제휴, LG 칼텍스(오늘날 GS 칼텍스)의 출범으로 나타난다. 이 모든 정신의 원류는 창업자의 협력 정신에 기초한다.

산업 생태계내 협력 관계
산업 생태계내 협력 관계가 성장의 디딤돌이 되었음은 오늘날 바이오테크 산업의 창업기업들을 살펴보아도 잘 알 수 있다. 기업간 협력과 혁신 성과의 관계를 살펴보면, 기업이 맺고 있는 협력관계의 수가 기업의 혁신 성과에 긍정적 영향을 미쳤음[Walker & Kogut]을 알 수 있다. 일본의 산업도 강한 부품산업 없이 안정적인 조립산업의 성장은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나, 상호 동반성장의 철학이 밑바탕 되어 세계 시장에서 확고부동한 위치를 선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협력이란?
협력이란? 협력 당사자들이 공동의 과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거나 공동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상호간에 기꺼이 노력하는 과정[Anderson & Narus]이다. 기업 구성원들이 자신들의 이익만 추구하고 구성원들간에 상호 협력하지 않을 때 기업의 성과향상은 고사하고, 유지·존속하기도 어렵다. 구성원들 상호간에 매력을 느끼고 함께 일하고 싶어 하는 공감대, 기업의 목표달성을 위해 구성원들간에 개인적 차이나 동기를 초월하는 ‘하나 되는 자세’가 형성됨으로써 구성원들간 협력이 증진될 때 기업 성과는 향상된다.

혁신 주도형 동반성장의 대원칙
혁신 주도형 동반성장의 대원칙은 노동과 자본 투입 위주의 양적 성장 전략에서 창조적 관계성을 획득하는 것이다. 상호 백 업퍼(back upper)의 역할이 약화되면, 대기업 또한 ‘성공의 실패’나 핵심경쟁력이 변화한 환경 대응력에 실패하며 핵심경직성(core rigidity)로 급전직하 놓일 가능성 높다. 독일경제는 현재까지 강력한 기술집약적 중소기업과 ‘품질’경쟁력의 혜택을 누리고 있다. 한국 기업들은 최근 중대한 전환점(critical junctures)맞이하고 있는 바, 기업들은 동반성장을 통해 환경 주도형의 최적의 적응(optimal adaptation)을 협력사와 이끌어 나가는 새로운 경영 모델을 보여주어야 한다.

건설 환경의 제 조건
건설 환경은 경쟁 격화, 다양한 건설시스템의 출현 예상, 사회 문화적 요구의 다양화, 복잡화가 급속히 진행되고 있다. 사업개발 능력이 떨어지는 건설업체는 단순 시공업체로 전락할 위험마저 있다. 초우량 기업이 되기 위해 건설업(플랜트)은 (1)건설분야 단독 사업에서 이종 산업/기업간 융합을 통한 신사업영역 창출, (2)공사수익 중심에서 수익원 다양화 및 안정화 촉구[발주자가 찾아오는 비즈 환경化], (3)단기성장 중심에서 내실을 중시하는 점진적 성장 추구[성장과 함께 기초 체력 강화], (4)실물 자산 중시 경영에서 무형자산 및 인재 중시 경영 지향[‘문화적(cultural oriented) 직원’], (5)정책/정치 의존적 경영에서 투명/윤리 경영 지향[긍정적 낙리효과(trickle down effect)] 등을 통해 경영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한다. 여기에 핵심은 ‘나홀로 혁신’이 아닌 ‘철저한 파트너십’으로 본질적 경쟁력을 획득해야 한다는 점이다.

동반성장을 위한 제조건
기업들은 동반성장(Shared growth)를 위해 혁신주체의 저변을 확대하는 리더십을 발휘하여야 한다. 협력사는 자체적으로 혁신주체가 되어 새로운 지식과 성과를 창출하고, 지식과 정보를 공유, 확산시키는 체제를 구축해야 한다. 그러기 위한 과정으로 (1)조직문화의 유연성(internal & cross-in&external relatuionship), (2) 품질(quality) (3) 고객중심(customer central)으로 새로운 경영 틀로 전환해야 한다. LG그룹의 성장사는 ‘협력’의 힘을 체감케 한다. 21세기 혁신의 동반체로써 초일류 기업상을 구현하는 것이 동반성장이 지향하는 골(goal)이다.#

강의 요약: 전경일 카인즈교육그룹, 인문경영연구소장 <구씨이야기 허씨이야기>의 저자.

-해마다 되풀이 되는 같은 위험을 넘기고도 다음 해에도 똑같은 반응을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름이면 한반도에 몰아치는 태풍과 그 피해는 오랫동안 겪어온 재난의 유형이며, 이에 대한 대책은 해마다 제기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비슷한 결과가 나타난다면, 그것은 다분히 인재에 적잖은 원인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태풍 ‘루사’와 ‘매미’는 이에 대한 적절한 예에 해당될 것이다.

한반도는 지정학적으로 태풍의 영향권 내에 있다. 어쩌다 운이 좋아 피해 간다고 해도 그것은 요행수일 뿐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환경은 바꿀 수 있는 변수가 아닌, 상수에 해당된다. 태풍은 매년 주기적으로 발생하는 자연현상이지만, 우리에게는 재난으로 다가온다. 피해액도 막심하다. 통계에 따르면, 지난 100년간 한반도를 강타한 태풍으로 사망한 사람만 대략 1만 명에 이른다. 어떤 자연재해보다도 가장 큰 재난을 몰고 오고 있는 것이다. 2002에서 2003년 사이 1년간 한반도를 휩쓴 태풍 ‘루사’와 ‘매미’의 피해액은 가히 천문학적 액수에 달했다.

2002년 제15호 태풍인 ‘루사’는 8월 23일 9시경 북태평양 괌섬 동북쪽 약 1,800킬로미터 부근 해상에서 열대폭풍으로 발달하기 시작했다. ‘루사’는 서~서북진을 거듭하다가 일본 가고시마 남쪽 해상을 지나 고흥반도 남쪽 해안을 직상륙하여 한반도 내륙으로 북동진한다. ‘루사’는 과거 한반도에 상륙한 유사태풍과는 달리 이례적으로 강력한 태풍으로 끝까지 세력을 유지하였고, 무엇보다도 ‘태풍의 눈’이 뚜렷했다.

‘루사’는 8월 31일과 9월 1일 사이 한반도의 중부지방을 톱으로 썰듯 관통하며 단 이틀 만에 사상 최고의 피해를 끼쳤다. 강원도 강릉 지역은 하루에 898mm 폭우가 쏟아져 도심 전체가 물에 잠겼다. 삼척은 연평균 강수량(1,294mm)의 63퍼센트에 해당하는 기록적인 강우량을 보였고, 4시간 이상 지속된 시간당 45mm 집중호우가 수해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루사’의 경우에는 전국적으로 사망 및 실종이 246명, 재산피해액만 5조1,479억 원이라는 엄청난 피해액을 남겼다. 초강력 자연재해였던 것이다. 특히 강원도 영동지방의 피해가 막심했다. 그 원인은 태풍이 북상하는 가운데 강원도 영동지방의 주변 기압장이 북태평양 고기압 가장자리에 놓여있었기 때문이다. 저온 다습한 동풍이 지속적으로 유입되자 습윤 지역이 강화되고, 상공 1.5킬로미터 등압면 부근의 하층대기는 매우 불안정했다. 이때 상층의 강한 제트 기류가 북한 지방을 지나며 동해북부 해상은 태풍의 입구에 위치하여 지상 기압계 발달을 유도했다. 또한 강원도 영동지방은 태풍의 우측 반원에 위치하여 열대해상에서 수송된 고온 다습한 남동 계열의 불안정한 대기가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강한 강수에코를 지속적으로 발생시켰다.

이듬해인 2003년 몰아닥친 ‘매미’도 ‘루사’ 못지않게 대단한 위력을 떨쳤다. 9월 6일 괌섬 북서쪽 약 400km 부근 해상에서 발생해 느린 속도로 북서진하다가 열대폭풍에서 중심부근 초속 41m의 태풍으로 발달한 제14호 태풍 ‘매미’는 11일 오후에 방향을 북쪽으로 바꾸며 빠르게 북상하기 시작했다. 6일후인 9월 12일에 제주도 서귀포시 남동쪽에서 시속 40km의 속도로 접근해 마침내 한반도에 상륙하게 된다.

13일에서 12일 이틀 동안 약 7시간가량 한반도에 머물면서 ‘매미’는 경남일대를 강타하며 131명의 사상자와 4조 7,810억 원이라는 막대한 재산피해를 가져왔다. ‘매미’는 ‘루사’가 지나간 다음 해 한반도에 다시 찾아온 강력한 태풍이었다. 바람의 영향도 거세기만 했다. 순간 최대 풍속이 초속 60m였다. 강풍과 호우가 몰아치며 해안가에서는 파고가 높아져 부산항의 경우에는 대형 크레인이 붕괴되고 선박들이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매미’의 피해가 가중된 것은 2004년 당시 남해상의 수온이 약 28℃ 가량 높아져 있는 상태여서 태풍이 북상하면서 따뜻한 수증기를 공급받아 세력이 커졌기 때문이다. 2007년 현재 한반도를 둘러싼 해수면의 온도는 더욱 상승하고 있어 태풍 발생 시 상승작용의 가능성은 앞으로도 점점 더 커지고 있다. 여름이면 상시적인 태풍의 래드 플래그가 띄워지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태풍의 진로를 예측해 미리 대비할 수는 없는 걸까? 해마다 치루는 연례행사를 피해나갈 방법은 과연 없는가?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요즘같이 과학이 발전한 시대에는 태풍이 언제쯤 발생해 언제 한반도에 상륙할지 예측가능하다. ‘매미’의 경우에는 상륙하는데 꼬박 6일이 걸렸다. 이처럼 예측 가능하고, 한반도에 도달할 때가지 여유시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막을 수 있는 피해조차 번번이 놓치고 있는 이유는 무어일까? 위기에 대한 사전 학습이 해마다 있어왔음에도 불구하고 매년 똑같은 결과가 나타나고 있는 이유는?

누구나 알듯 태풍은 자연재해지만, ‘루사’의 경우에는 인재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해마다 닥치는 피해에 대해 위험을 감소시키기 위해 피해감소대책을 구조적으로 마련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대책은 늘 신통찮다. 피해 자체를 없애지는 못해도, 그것을 얼마든지 줄일 수는 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인위적 피해 요인을 살펴보자면, 무분별한 도로건설로 인해 절개된 산은 태풍에 쉽게 무너지고 그로인해 하천은 더욱 범람한다. 태풍 전의 안전한 공사 마무리가 미흡한 것도 사실이지만, 제도적인 면에서 절개지 관련 규정과 하천정비가 오히려 산사태를 유발하고 하천범람을 초래하고 있는 셈이다. 이처럼 자연재해의 피해에는 인위적 요인이 크게 작용한다.

산사태를 유발하는 ‘절개지 규정’을 살펴보면 인위적 요소가 얼마나 개입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건설교통부는 산을 깎아 도로를 만들 때 바위의 위치와 결ㆍ상태와 상관없이 획일적 기준을 정해놓고 있다. ‘절개지(切開地) 규정’은 자연 상태와 무관하게 일정하게 63도 경사각을 유지하도록 규정화 되어 있다. 지형의 특성이나 지역상황을 고려해 융통성 있게 규정이 적용되는 게 합리적임에도 불구하고 공사는 획일적으로 이루어진다. ‘루사’가 불러일으킨 인명피해의 발생 원인은 산사태에 의한 것이 가장 높다. 특히 산불 발생지역은 산불이 발생하지 않는 지역에 비해 많은 산사태가 발생해 집중 호우의 타켓이 된다. 이는 물론 과도한 토사와 유목(流木)이 하천에 유입되어 호수 피해를 가중시킨 결과이다. 특히 삼척지역은 2000년 4월 7일에서 15일까지 9일간 발생한 대규모 산불로 연약해진 지반과 지지력을 상실한 토층의 표층부가 하류로 흘러내려가면서 더욱 피해가 확대되었다.

2002년 8월 31일. 강릉시 왕산면 35번 국도에서 발생한 산사태로 차량 10여대가 매몰되고 구조작업에 나선 경찰관 63명이 고립된 것은 이 점을 잘 보여준다. 태풍 ‘루사’의 피해액은 심각했다. 국토의 동맥인 경부선․영동선․태백선․정선선․함백선 등 주요 철도망이 파괴됐고, 경부․영동․동해 고속도로가 마비됐으며, 경부고속도로는 70년 완공 이래 처음으로 불통되었다. 강릉 지역은 산사태와 토사유입으로 도로를 따라 매설된 케이블이 끊기면서 유무선 통신망이 완전히 끊겨 버렸다. 1만여 개의 전봇대가 파괴되거나 유실되었고 영동화력발전소는 가동이 중단됐다. 전국 125만여 가구가 정전사태를 겪어 이로 인해 130여억 원의 피해액이 발생했다. 또한 국가주요시설인 울진원전 취수용 배관과 경남 마산과 충북 영동의 도시가스 배관이 노출됐고, LPG충전소도 3곳이나 침수됐다.

하천 범람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하천 범람의 주요 원인도 따지고 보면 지형의 특징을 무시한 공사 때문이었다. 공사에 용이한 방향으로 하천이 정비되다보니 자연 상태의 물길이 인위적으로 뒤틀어지고, 그로인해 피해를 가중시켰다. 솟구치던 물길은 편의대로 쌓아올린 제방을 밀어내고, 거침없이 휘몰아쳤다. 여기엔 산림훼손이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특히 통수로가 과다 수량과 토사의 하천 유입으로 기능을 잃어버리면서 피해가 더욱 가중되었다. 이러한 통수기능 부족의 원인은 하천부지를 좀 더 이용하려는 둔치설치, 도로의 개설, 하천부지의 농경지화 등으로 인해 하천부지가 축소된 탓이었다.

바다 매립도 하나의 이유이다. ‘매미’로 인해 경남 마산시 해운동 일대가 해일 피해를 입었는데, 그 원인은 무분별하게 추진된 바다 매립의 결과였다. 마산항 매립지의 침수 가능성은 이미 96년 감사원 조사 때 지적됐지만, 이것은 무시되었다. 자연재해는 불가항력적인 것이지만 보다 적극적으로 대처하면 피해는 최소화 될 수 있다. 무관심과 소홀로 방치해 버리는 것과 대응책을 마련해 놓고 행동에 옮기는 것 사이의 차이는 본질적으로 위기관리의 내용이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태풍 ‘매미’는 ‘루사’가 할퀴고 간 다음해 한반도에 들이닥쳤다. 그런데 1년 지난 다음에도 재난에서 우리는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다는 점이 드러났다. 이 같은 경고는 지방자치단체와 담당 공무원들에게 어떠한 각성도 주지 못했다. 재난의 경고는 여러 군데에서 흘러 나왔다. 오래전부터 래드 플래그가 발동된 상태였지만, 시간은 흘러 다시 풍수의 계절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 한 예로 기상청에서는 비교적 정확하게 태풍의 진로를 분석해 주었고, 피해에 대한 대비와 경고를 내보냈다. 특히, 국립방재연구소 해일연구팀은 해일에 의한 피해에 대비해야 한다고 사전에 경고했다. 경남 해안지역의 경우 1959년의 태풍 ‘사라’때부터 ‘셀마’, ‘루사’ 모두 해일 피해를 겪은 지역이었다. 하지만 이 들 지역도 ‘루사’가 피해를 입혔던 제방이 다음해에 ‘매미’가 몰아닥쳤을 때 똑 같이 피해가 발생한 것을 알 수 있다. 원인은 배수시설과 관련되어 있다. 고성군 북천 하류부의 경우에는 태풍 ‘루사’ 때 유실됐던 제방을 복구하기 위해 본류와 합류되는 지점에 2련 박스 암거를 설치하였는데, 이 시설들은 ‘매미’때 또 다시 유실되었다. 이것은 분명 설계 잘못이라고 할 수 있다. 보다 심각한 것은 당초 실시설계 보고서상에는 2련 박스 암거가 설계되어 있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나마 시공과정에서 소하천의 유입통로가 없는 것을 발견한 현장소장이 발주처와 설계변경을 하여 설치했기에 그나마 나았다.

이처럼 똑같은 징후에 똑같은 경고가 반복적으로 일어났으나, 결과는 매번 같은 일이 반복된다. 매년 되풀이되는 피해와 경고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유형의 인명 피해와 막대한 재산손실이 발생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장기적이고 구조적인 재해대비계획과 노력이 미흡했기 때문이다. 언제 닥칠지 모르는 대형재난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는 보다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예방책을 마련해야 한다. 특히 재난방지 예산이 예산편성 우선순위에서 항상 밀리고 있는 것은 인재를 키우는 요인이 된다.

재난에 대한 예방과 대비에 드는 예산은 피해복구액보다 훨씬 덜 들지만, 닥친 다음에야 조치를 취하게 된다. 래드 플래그를 무시한 결과는 엄청난 대가를 가져왔다. 예컨대, ‘루사’에 의한 피해복구비만 따져도 7조 1,778억 원이나 되었다. 엄청난 인명과 재산 손실이 발생하고 난 다음에 피해복구비를 집행하는 것보다, 재난이 발생하기 전에 예방을 위한 예산을 편성해 집행하는 것이 훨씬 더 효과적임에도 불구하고 이는 좀처럼 지켜지지 않고 있다. 태풍과 같은 자연재해는 불가항력적인 자연현상이지만 철저히 대비만 한다면 피해를 최소화시킬 수 있다. 그러나 태풍 ‘루사’와 ‘매미’는 사전대비에서 제외됐다. 래드 플래그를 경고신호로 받아들이지 않는 한, 어느 조직이건 그 댓가를 지불해야 하는 것은 피할 수 없다. 시지프스처럼 밤새도록 고통스러웠으나, 아침이 되면 그 일을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는 마는 자에게는 재앙은 가장 적절한 공격대상이 될 것이다.

<태풍으로부터 얻는 교훈>

주기적인 자연 현상인 자연 재해가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쉽게 망각되고 마는 이유는 무엇인가? 거대한 자연 현상인 태풍 자체가 지닌 파괴력으로 인해 그것에 맞서기보다는, 대비ㆍ대피하는 것이 자연의 래드 플래그에 대한 인간이 대비책이라는 주장에 이의를 달 사람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해가 속출하는 이유는? 태풍의 발생에서부터 이동 경로까지 추적 가능한 오늘날에도 피해가 적잖은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이것은 자연으로부터 얻은 정보를 인간이 대응 가능한 형태의 래드 플래그로 발동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벌어지는 재해이다. 자연재해를 증폭시키는 인간의 활동엔 무엇이 있을까? 태풍 ‘루사’와 ‘매미’의 경우를 통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태풍 피해에 대해 응급복구방식이 아닌, 장기적이고 항구적인 복구대책이 필요하다. 하지만 적은 예산과 장시간의 투자가 필요하다는 이유로 항구적인 대책은 요원하다. 더구나 임야가 72퍼센트를 차지하는 강원도 지역의 경우, 지형 구조상 곡선화 되어 있는 도로, 하천의 수해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직선화 작업이 필요하다. 또, 현지 실정에 맞게 환경불럭, 돌망태, 돌붙임, 석축 등의 공법을 적용하는 것이 요구된다. 그뿐만이 아니다. 도시지역의 면적이 확대되고 있는 추세라 배수시설, 저류시설, 지하침투시설 등 홍수방지수단 마련도 절대적이다. 도시개발에 따른 체계적인 홍수방어 대책이 병행될 때 도시지역 침수를 예방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향후 치수(治水)에 대한 원칙을 엿볼 수 있게 한다.

-태풍은 집중호우를 동반하는 특징을 가진 태풍이어서 사전에 위험이 경고되지만, 현장위주의의 즉각적이고 시기적절한 대응은 미흡했다. 또한 대책본부의 근무조별 활동도 잘 이루어지지 않아서 각 부서별 업무 처리 수준에 머물러 재해에 능동적이고, 신속하게 대처하지 못했다. 산사태 위험예상지역 거주 주민들에게 적극적으로 미리 대피 권고를 했다면, 인명피해는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매미’의 경우에도 이미 마산지역에는 해일에 의한 침수피해가 예견됐으나, 이 지역에 대한 경고 및 대피 방송은 없었다. 피해가 가중된 이유는 한 두가지가 아니었다.

-재난방송에도 문제가 많았다. 태풍 ‘루사’가 전국을 강타하는 동안 지상파 방송은 뉴스특보를 편성하는 등 이틀 동안 평소보다 2~3시간 늘려서 태풍피해를 보도했으나, 주말 낮 시간대 드라마 재방송을 그대로 내보내는 등 본격적인 재해방송의 편성에 소홀했다. 더구나 방송사들은 간추린 종합보도와 피해보도로 일관했지 대피절차, 대처요령 등 태풍의 시간별 규모변화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를 알려주는 정보성 보도에는 소극적이었다.

-태풍의 천문학적인 피해에도 불구하고 마땅한 법 규정이 없었다. 정부는 급히 「자연재해대책법」을 개정해 제62조 2항의 ‘특별재해지역’을 신설했다. 뒷북치는 법 입안, 탁상행정이었다. 이와 더불어 정부 내 분산된 재난관리 시스템에도 문제가 많았다. 13개 부처가 업무를 나눠 맡고 있어서 일사불란하게 피해상황을 집계하기 어려웠던 점은 이를 잘 증명해 준다. 또한 비상연락망이 제대로 가동되지 않아 피해접수도 신속하게 이루어지지 못했다. 시ㆍ군 방재계에는 기술직 직원 2~3명이 근무하는 정도여서 사고현장에 나가 정확한 조사를 한다는 것을 기대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해당 공무원들의 비전문성도 문제였지만, 기술관료 자리에 행정 관료가 해당업무를 맡고 있는 조직운용도 재난 대책과는 거리가 멀었다.

- ‘루사’ 복구 때 강원도의 수해복구 지침은 ‘강원도형 개량복구‘였다. 이것은 친환경적 항구복구로 해석할 수 있다. 설계조건도 대폭 강화되어 지방 1, 2급 하천의 경우에는 100년, 소하천의 경우에는 50년 이상의 빈도를 가진 강우가 발생하더라도 안전한 설계로 시공되었다. 이점은 그나마 향후 태풍 대비책으로서 유연한 변화라고 볼 수 있다. 위기 상황에 처해 현장상황파악, 실시간 대응, 응급조치 등에서의 권한이 부여되지 않는다면, 실질적 효과를 거두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래드 플래그 제12법칙: 고통스러울 때만 결심하고 마는 시지프스의 후회의 법칙

-한반도를 강타한 두 개의 대형 태풍에 대한 분석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자연 재해를 줄일 수 있는 모든 수단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도적ㆍ의식상의 한계로 말미암아 재난이 연례행사가 되고 있다는 점이다. 더구나 늘 같은 위기를 넘기고도 똑같은 반응으로 일관하고 있다는 점에서 기업 내 개선되지 않는 문제점을 보고 있는 듯하다. 우리 조직에 이 같은 문제를 감지하고 예방할 수 있는 방법에는 무엇이 있을까?


<징후 예측과 위험 발생에 효과적으로 대처하는 방법들 >

-기업이 생산 현장에서의 불량품 양산, 고객 불만의 접수, 불합리한 프로세스에 대한 대책 마련 소홀 등 래드 플래그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그 기업은 재난 앞에 대책없이 노출되는 것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요는 경영상의 방심과 매너리즘이 피해를 키운다는 것이다. 자연계나 경영상에 있어서 거의 동일한 현상은 래드 플래그 없이 갑자기 나타나는 일이 비일비재하는 점이다. 래드 플래그가 주기적으로 발동되는 식이라면, 그나마 다행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같은 결과가 발생하는 것은 문제 아닐까? 경영에서의 가장 본능적인 원칙은 감지하는 자만이 살아남는다는 점이다. 경영의 가장 일반적이고, 중요한 법칙이 이것이다.

- 어떤 조직이든 늘 같은 문제에 노출되고, 그로 인해 쓰디쓴 대가를 지속적으로 지불해야한다면, 이는 정상적인 경영활동은 물론이고, 기업 전반에 더 큰 위기를 초래하고 말 것이다. 상황에 대한 정확한 인지와 판단, 주요한 커뮤니케이션, 개선에의 노력 등은 위기를 기회로 전환시키는 전환점이 될 수 있다. 오늘날 경영자들과 많은 관리자들은 이런 질문에 뚜렷한 해답을 내 놓아야 한다. 이런 준비는 계기판과 같아서, 위기시 효과를 발휘할 것이다.

<참고자료>
김열수,

* 일본 쓰나미 재해 현장을 안타까이 지켜보면서 예전에 집필한 <Red Flag> 중 쓰나미 관련 내용을 올려봅니다. 
 

-늘 같은 파도지만, 어떤 파도는 쓰나미를 몰고 온다. 우리의 경영환경엔 때로 쓰나미가 몰아치지만, 우리는 그런 위험은 전혀 인지하지 못한 채 해변에서 조개 줍는 일에만 몰두하고 있는 아이들과 같다. 위험을 철저히 응시하고, 그에 대한 대비책을 미리 세운다면 설령 피할 수 없는 위험이라 할지라도 피해를 줄일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비마저 없는 위험과의 조우는 생명을 한순간 잃게 만든다. 대자연 앞에서 우리가 접하는 위험과 그 징후들에 대해 살펴보자. 

                                                                           ***
2004년 12월 26일 오전 7시 59분. 인도네시아 북 수마트라 서쪽. 지진은 성난 짐승처럼 북동방향의 경사진 섭입대(subduction zone)를 한순간 뒤흔들어 놓았다. 나중에야 파악된 것이지만, 이 지진은 1900년 이후로 네번째로 큰 강도의 것이었다. 인도 판은 미얀마 판으로부터 무서운 속도로 북동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번 지진이 발생하기 전, 이 지역에서는 지난 10년간 규모 5.5보다 큰 지진이 40여 차례나 발생했다. 그러나 이번 지진처럼 쓰나미가 발생하지는 않았다. 한편, 지난 200년 동안을 살펴보면 규모 8 이상의 대규모 지진들로 말미암아 쓰나미가 수차례 발생하며 수백 명이 목숨을 잃었고, 그 이전에 발생한 것까지 계산에 넣으면 평균 230년마다 큰 사건이 발생했다.

주지하다시피 해양에서의 지진은 많은 양의 바닷물을 순간 이동시켜 가장 큰 해일을 만들어 낸다. 연대기적으로 볼 때 태평양 주변에는 30미터의 파고를 지닌 대형 쓰나미가 20년 주기로 발생해 왔다. 이런 쓰나미는 단지 시간상의 문제이지, 앞으로도 또 일어날 재앙임에 틀림없다. 이곳은 수백 년 동안 섭입대가 막혀 있어서 위에 있는 버마판이 나무처럼 천천히 휘어졌고 휘어진 판이 원래대로 펴지며 규모 9의 지진이 발생한 것이다. 규모로 볼 때, 판이 펴지면서 다른 판 밑으로 15미터 정도 미끄러져 들어가면서 해저바닥을 수 미터 상승시켰을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인도판과 버마판의 남북 경계의 전체길이에 해당하는 1,200킬로미터의 섭입대가 갑자기 파괴되어 그 동안 쌓여왔던 엄청난 양의 변형 에너지가 방출된 것이다. 이 지진 때에는 바로 남동쪽에 있는 오스트레일리아판, 버마판 경계지역은 파괴되지 않았지만, 1833년에 일어난 규모 9.3의 지진은 앞으로도 언제나 일어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재해결과는 그야말로 비극적이었다. 수마트라, 태국 및 그 주변 국가들은 산이 많은 까닭에 대부분의 주민들이 해변에 거주했다. 따라서 이 지역은 10미터 높이의 쓰나미에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깊은 바다에서 생성된 쓰나미 파고는 50 쎈티미터 정도에 불과했지만, 그것이 수심이 낮은 못에 이르게 되면 속도는 느려지고 파고는 높아진다. 그런데 이 지역의 대부분의 집과 건물들은 해발 3미터 가량의 높이였다. 호텔만이 쓰나미 파고보다 높은 유일한 인공시설물이었다.

(쓰나미 파의 주행시간(단위: 시간). 등고선은 쓰나미 파가 퍼져 나가는 것을 보여준다. Copyright: Donald Hyndman, David Hyndman, 『자연재해와 재난』, 시그마프레스, 2006. 105쪽.)

쓰나미가 해안에 피해를 입히는 정도는 다른 파도와 같지만 지형이 평탄한 곳에서는 1킬로미터 이상이나 내륙으로 진입한다. 그 결과 자동차, 사람, 건축물 및 쓰레기 등을 모두 쓸어가 버린다. 아무리 수영을 잘하는 사람도 여러 물체와 부딪히기 때문에 생존의 확률은 매우 낮다. 최초의 쓰나미가 몰려온 다음, 2차 쓰나미가 도달하기 전까지 놀랍게도 1차 해일이 후퇴하면서 많은 잡동사니들을 해변으로 휩쓸어 갔는데 이때에도 속도가 빨라서 1차 해일이 밀려올 때 못지않게 매우 위험했다. 1차와 2차 해일 사이의 시간 간격은 보통 30분 이상이 되어 그 동안 사람과 쓰레기 등이 먼 바다에까지 쓸려 나갔다.

1차 해일이 물러가자 사람들은 해일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잠시 후 1차보다 더 큰 2차 해일이 닥쳐왔다. 30분이라는 시간은 준비하기에 충분하지 않았고, 시간의 많고 적음을 떠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해일이 완전히 물러간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해일이 끝나자 파손된 물건들은 한곳에 집중적으로 쌓였다. 사망자 중에는 따뜻한 기후를 즐기려고 휴가를 온 외국인들이 많았다. 30분 동안 생존자를 찾으려 했지만, 또 다른 위험이 몰려오자 그러한 노력마저 무위로 돌아갔다. 이제 살아 있는 사람들은 2차 거대 쓰나미와 맞닥뜨려야 했다.

사체는 열대 기후 아래서 곧 부패하기 시작했고, 식수는 오염되어 콜레라, 장티푸스, A형 간염 및 이질이 곧 확산됐다. 더구나 수영장 물이 모기의 서식처로 변하며 말라리아와 뎅기열병이 번졌다. 사망자를 매장하는 데에도 심각한 문제가 뒤따랐다. 물 머금은 땅은 스펀지처럼 되어 있어 매장할 수도 없었다. 해일에서 살아남았던 사람들은 상처오염, 부상, 골절, 항생제 및 의료진 부족으로 후속적으로 많이 사망했다.

이 규모 9의 지진은 8분 동안이나 격렬하게 흔들며 이 지역 일대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수마트라에서는 앞뒤로 흔들리고 동시에 엘리베이터의 하강 가속도보다 훨씬 빠른 상하진동 때문에 서 있기조차 어려웠다. 무너지는 주변 건물에서 피하기란 도저히 불가능했다. 해저가 갑자기 상승해 생긴 큰 파도는 시속 700킬로미터 이상으로 이동해 15분 만에 주변의 해안에 도달했다.

수마트라 북부에서 보고된 첫 번째 지진피해는 교량, 전봇대, 전신주가 심하게 파손된 정도였다. 건물도 무너져 내려 공포에 질린 사람들은 도로로 내달렸다. 설상가상으로 작은 규모의 지진들이 섭입대 북쪽에서 잇달아 발생했다. 잠시 후, 5미터의 파도가 수마트라 북부 반다아체 25제곱킬로미터를 덮쳤다. 24미터 높이의 파도가 내륙으로 1킬로미터까지 피해를 주었고, 일부 지역은 8킬로미터까지 피해를 입혔다.

두 시간도 채 안 돼 첫 번째 쓰나미 파도가 태국의 서부, 스리랑카의 동쪽 해안, 인도의 동쪽 해안에까지 돌진했고, 그 다음 7시간 후에는 아프리카 해안의 소말리아에까지 도달했다. 스리랑카에서는 1,000여 명의 승객을 태운 열차가 탈선하여 늪지에 빠져 그중 800여 명 이상이 구조의 손길을 기다려야 했다.

오후 4시까지만 해도 피해는 적은 것으로 알려졌다. 희생자는 인도네시아에서 150명, 태국이 55명, 말레이시아가 8명, 인도가 1,000명, 스리랑카가 500명이었다. 하지만 다음날 공식 발표된 피해는 전날에 비해 엄청나게 불어난 것이었다. 1월 13일까지 추정된 사망자는 238,000명 이상, 실종자만 해도 수만 명에 이르렀다. 소말리아에서는 지진 발생 후 쓰나미까지 꽤 많은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수백 명이 사망했다. 최소한 스리랑카에서는 31,000명, 인도에서 10,750명, 태국에서 5,400명이 사망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최소 230,000명이 죽거나 실종되었다. 반다아체에서만 건물이 모두 파괴된 지역에서 시신 3만여 구가 발견되었다. 구호기관조차 총 11개 나라에 걸쳐 발생한 이 어마어마한 피해에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 세계 원조국들은 식량, 물, 의약품, 의료진 및 구호 기금을 지원했다. 과거 재해를 경험한 사람들은 자원봉사로 나섰다. 그러나 극도의 절망감과 더불어 이 지역 사람들은 물과 식량을 얻기 위해 서로 다투었다. 더구나 계속되는 여진(aftershock)으로 또 언제 다시 발생할지 모르는 쓰나미에 겁먹고 바닷가로 나가려하지 않았다. 5백만 명이 집을 잃었고, 수십만 명이 대피소에 수용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수마트라 쓰나미의 피해는 왜 이렇게 컸을까, 하는 점이다. 조사결과 여기에는 불가항력적인 자연 현상이 당연히 1차적 원인이었지만, 인재(人災)도 크게 작용했으리라는 분석이다.

우선, 재해에 대해 사전 경고 부재나 커뮤니케이션 상의 문제점을 들 수 있다. 해안 저지대에 사는 주민들은 쓰나미가 발생했을 때 어떠한 해일 경보도 받지 못했다. 대부분의 주민들은 지진에 대해서 알고 있었지만, 쓰나미가 발생할 거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해수면이 상승할 때에는 실제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 당시 바다를 주시하지 않았던 사람들에게는 밀려오는 쓰나미가 자동차가 빠르게 다가올 때 들리는 소리 정도로 들렸다

피해를 가중시킨 다른 요인도 있었다. 우선, 정부의 무책임한 대응이 쓰나미 피해를 증폭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주민들에게는 어떠한 경계경보도 전달되지 않았다. 태평양지역 쓰나미 경보시스템은 태평양에서 발생하는 지진을 감시하고, 해일 발생과 도달 시간을 26개 국가에 통보한다. 그러나 인도양에는 이런 경보 시스템이 없었다. 인도양 대륙주변에는 수마트라와 자바의 남서 해안을 제외하고는 활발한 섭입대가 없다. 설사 경보 시스템이 작동됐다고 하더라도 진앙과 수마트라 사이는 너무 가까워 해일이 순식간에 도달했을 것이기 때문에 인명을 구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스리랑카나 인도와 같이 진앙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지역주민들은 경보체계만 잘 갖추어져 있었다면 충분히 목숨을 구했을 것으로 보인다.

커뮤니케이션 문제가 컸던 셈이다. 예컨대, 하와이에 있는 태평양 쓰나미 경보센터는 회원국에만 경보를 전달하고 인도양 지역은 해일이 발생 가능한 국가에만 일부 내보내고 있다. 인도양에는 쓰나미가 뜸하여 국가나 국가 간 쓰나미 경보 전달체계조차 없었다. 이처럼 쓰나미 정보를 교환하는 네트워크조차 조성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허를 찔린 셈이었다.

더욱 심각한 사실은 주민들은 물론이고 관련 공무원들조차 지진이 쓰나미를 발생시킨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스러웠던 것은 최근 수업시간에 쓰나미를 배웠던 열살 된 한 초등학교 여학생이 쓰나미가 몰려오기 전 해수가 밀려나간 것을 보고 주변 사람들에게 높은 곳으로 대피하라고 외쳐댔다는 점이다. 또 다른 경우는 내셔널지오그래픽 잡지에서 쓰나미 특집을 읽었던 인도 외딴 섬에 사는 한 부두 노동자가 지진을 감지하고 이웃들에게 큰 파도가 밀려온다는 점을 알리기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결국 이 두 사람이 1,500명 이상의 목숨을 구해 냈다. 민간에서의 자발적인 래드 플래그 발동이 귀중한 인명을 구한 셈이었다.

안타까운 점은 더 있다. 수마트라의 한 관리는 한 시간 이상이나 지진을 확인하고 자카르타에 있는 국가기관에 연락을 취하고자 했으나 실패했다. 그 후 자카르타에서도 한 관리가 다른 기관에 전자메일을 보냈지만 반응이 없었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도 한 지진학자가 국가비상센터와 해외주재 오스트레일리아대사관에 경보를 보냈으나, 다른 외국 정부에 외교적인 문제가 생길까봐 보내지 못했다. 태국의 관리들은 한 시간 전에 경보를 받았으나, 주민에게 전달되지 못했다. 주민들 대부분은 쓰나미에 대한 지식도 없었고, 또 지진으로 쓰나미가 발생한다는 사실을 알지도 못했다. 그 당시 퇴임한 국가 기상대장은 재임시 조만간 대형 쓰나미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고 이미 1998년 여름에 경고했지만, 정부각료들은 관광객이 감소한다는 이유를 들어 그를 정신 나간 위험한 사람으로 몰아세웠다. 그는 쓰나미 발생 후 영웅이 되었다.


(2005년 크리스마스 연휴 기간 중 수마트라에 갑자기 쓰나미가 몰아닥쳤다. 아이들이 위험을 전혀 감지하지 못한 채 쓰나미가 몰려오는 바닷가에서 놀고 있다.
copyrights: Video Shows Tsunami Hitting Malaysian Coast; AP Video - Dec 30 4:02 PMInternet: http://news.search.yahoo.com/search/news/?ei=ISO-8859-1&c=av&p=Tsunami+Hitting+Malaysian)

 과학자들은 인도양 부근에 해일 경보체계가 미흡하다고 몇 차례 경고했으나, 태국과 말레이시아 관리들은 쓰나미를 태평양에만 관련된 문제로 취급했다. 수천만 달러가 소요되는 네트워크는 예산문제로 뒷전으로 밀렸다. 더구나 그 날은 크리스마스 다음날이면서 일요일이어서 모두 휴무상태였다. 따라서 지진의 크기를 결정하는 데 그만큼 시간이 많이 걸렸다.

지진의 발생 위치(진원, 진앙)는 여러 관측소에서 입수한 지진파의 도달시간으로부터 자동으로 신속하게 결정된다. 처음 인도네시아 정부가 산정한 규모는 6.6으로서 대형 쓰나미를 만들 수 없는 크기였다. 그러나 대형 지진의 크기는 표면파(surface wave)의 진폭으로 결정되고 큰 지진은 저주파수 특성을 띠기 때문에 그 크기를 결정하는 데 1시간 이상이나 걸린다. 이 시간이면 해일이 수마트라를 강타했을 시간이어서 이미 때는 늦었다. 인위적으로 조성된 적지 않은 오류, 시스템 부작동, 방심과 간과 등이 수많은 인명을 앗아가는 자연 현상에 덧붙여져 더 큰 피해를 불러들인 셈이었다.

그럼에도 재해 자체에 대응한 가장 영웅적인 행동도 보인다. 바로 쓰나미를 경고한 초등학생이나 부두 노동자와 같이 래드 플래그를 외친 샤우터(shouter)들이다.


<수마트라 쓰나미가 가져 온 교훈>
지질학자은 자연은 2,000년마다 새로이 얼굴을 바꾼다고 말한다. 지금 안전해 보이는 지각도 쉴새 없이 변하고 있으며, 우리는 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인간은 자연 현상을 유심히 관찰하고, 이에 적응함으로써 생존해 왔다. 자연 재해는 우리가 접하는 가장 일반적인 ‘위험의 항상성 이론’이 적용되는 분야이다. 모든 재해가 그렇듯, 대재앙이 몰아치기 전 수차례의 사전 경고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래드 플래그가 무시되는 까닭은 무엇인가? 수마트라 쓰나미 교훈은 바로 이런데서 찾아진다.

 -자연 재해는 주기적이다. 현대적 예측 시스템은 자연 재해를 막을 수는 없더라도, 이에 적절한 대응을 함으로써 피해를 최소화하거나, 피할 수 있게 해 준다. 시스템이 잘 갖추어져 있는데도 피해가 발생하는 것은 방재시스템의 준비에 대한 인지부족, 시스템 작동상의 문제, 업무 해태나 소홀 등으로 인해 피해가 확산되는 것이다. 수마트라 쓰나미 피해의 적잖은 원인은 바로 여기에 있다. 결국, 인위적 요소만 잘 조절해도 피해의 상당 규모는 줄일 수 있다.

-위험은 쉽게 물러가지 않는다. 2차 여진이나, 후폭풍 같은 것들은 자연 재해의 일반적 양태 중 하나이다. 수마트라 쓰나미의 경우, 사람들은 1차 해일이 물러가자 보다 큰 규모의 2차 해일이 몰려올 거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게다가 30분이라는 시간은 대비하기에도 충분하지 않았다. 1차 여진이라기보다는 1차 위기를 통해 잠재되었던 더 큰 위기(심지어는 꼬리가 아닌 개의 몸통)가 드러나는 것이다. 적절한 주의노력, 주의환기는 대재앙에서 벗어 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수마트라 쓰나미에는 인재(人災)가 크게 작용한다. 자연재해 앞에서의 사전 경고 부재나 커뮤니케이션 문제는 피해를 더욱 가중시켰다. 또한 주민들에게 전달되지 않은 해일경보, 인도양에서의 쓰나미 경보시스템의 부재, 국가간 자연재해에 대한 협력체계의 미구축, 비회원국가들에는 전달되지 않는 경보정보, 국가기관간 연락 부재, 외교적 문제를 우려한 정보공유의 제한, 관광 수입 감소를 우려한 정부당국의 미온적 태도, 쓰나미 네트워크 구축에 들어가는 예산문제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것들이 총체적 원인이 되어 피해를 가중시켰다. 이런 요인들은 자연재해라는 재앙에 플러스알파가 더해지며 피해를 증폭시킨 원인이 됐다. 래드 플래그는 그 원인을 제거하려는 모든 노력이 뒤따를 때에야만 실효성을 발휘한다는 점을 여실히 증명해 주고 있는 셈이다.


래드 플래그 제2법칙: 위험을 예고하는 주객전도의 법칙
-우리의 경영환경은 관성적으로 상시적 일상에 묻혀 있다. 따라서 주의를 환기시켜도 위험 요인이 발생할거라는 생각은 좀처럼 하지 않는다. 갑작스런 경쟁사의 등장으로 인한 시장 교란, 적대적 M&A, 이율배반적인 경영지침으로 인한 내부 혼란, 안일한 제품개발 및 고객 응대 등은 ‘꼬리가 개를 흔드는’ 법칙을 잘 보여주고 있다. 조직 내 쓰나미를 몰고 올 이런 위험상태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에는 무엇이 있을까? 


 
<징후 예측과 위험 발생에 효과적으로 대처하는 방법들 >
-조직 내 어느 일정한 사업 부분이 경쟁사에 의해 도전 받거나, 점유율이 침식당할 때에는 그것이 국지적으로 어느 한 분야에서만 그런 것은 아니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이 1차적인 파동 뒤에는 다른 면에서의 전면적이고 대대적인 도전이 준비되고 있는 경우가 많다. 하나의 래드 플래그를 통해 해당 산업 전체의, 심지어는 사회적 경제기반 자체가 이동하고, 요동치며, 쓰나미로 다가올 수 있다는 점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한국은행 보고서의 단 한 줄에서 시작된 불확실성은 한국경제를 외환위기로 몰아넣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모래 한 알이 움직이기 시작해 산 전체를 무너뜨린 식이었다. 경영의 눈이 매의 눈처럼 더욱 날카롭게 긴장해야 하는 이유이다.

-원활한 조직은 일사불란하다. 이 말의 뜻은 군대식 명령과 하달체계가 다른 어떤 방식보다 탁월하다는 뜻은 아니다. 대신, 원활한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문제 자체는 물론이고, 문제의 원인, 대처 방안, 대응후의 보고 등이 물 흐르듯 공유되며, 해법을 찾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조직이 붕괴될 때의 조짐을 보면, 커뮤니케이션은 뒤엉키고, 이중 삼중의 복선이 의사결정 과정에 끼어든다. 만일 기업 내 이런 실타래 화법이 전개되고 있다면, 말 뿐이 아닌, 조직 붕괴를 전초를 미리 보라.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거기엔 반드시 뭔가가 있다.

-태평양에만 치는 파도란 없다. 경영에서의 위기는 가장 완벽해 보이는 조직에서조차 발생할 수 있는 상시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며, 늘 주시하는 태도가 요구된다. 오히려 도전을 받지 않는 회사나 개인은 가장 완벽할 것으로 생각하지만 역으로 그 때문에 가장 취약한 구석을 갖고 있다. 장점 요인에서 단점과 위기 요인을 찾아내라. 항시 걸르고 솎아내는 밭에서만 튼실한 채소가 나온다는 점을 알고 문제에 더욱 가까이 접근하라. 그것이 안녕과 번영을 기약하는 한 방법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어느 조직에건 래드 플래그를 알리는 샤우터(shouter)들이 있다. 이들은 조직 내 누구건 될 수 있다. 현실에서 문제점을 보고, 이의 긴급성ㆍ중차성을 알고 래드 플래그를 발동하는 그들의 신호에 주목하자. 간과된 보고가 문제가 커진 다음에야 간과될 수 없는 사항으로 분류된다면, 경영에서의 피해는 너무나 막대할 것이다. 

<참고자료>
Donald Hyndman, David Hyndman, 『자연재해와 재난』, 시그마프레스, 2006.
Tsunami Hitting Malaysian Coast; AP Video, Dec 30 4:02 PM, 2005.
ⓒ카인즈교육그룹, 인문경영연구소, 전경일 소장, 출처: <레드 플레그>, 전경일 저.



 


제11법칙: ‘같은 방법이 계속 통할 거라고 믿는’ 착각의 법칙

  -한번 성공한 방식이 매번 통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예전처럼 또 성공할 거라고 믿는 경향이 있다. 과거에 운이 좋았으니까, 이번에도 같은 방식이 통 할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심지어는 이를 신앙으로 삼아 집단 체면에 빠지는 경우도 있다. 여기 그 같은 착각의 전형적인 예가 있다.


약 4천 년 전, 고대 이집트인들을 서부 아시아와 이집트를 잇는 너비 169 킬로미터의 수에즈 지협을 가로 지르는 운하를 파기 시작했다. 이른바, 역사상에 등장하는 최초의 고대 운하인 셈이었다. 이들의 고상한 뜻과 달리 운하는 얼마 후 사용할 수 없게 되고, 아랍인들의 침공이 있은 뒤인 서기 775년에 다시 묻혀 버리고 만다. 그 후로 운하는 인류사에 영원히 자취를 감추는 듯 했다.


사라졌던 운하는 한참 지나서야 다시 등장했다. 고대에 팠던 운하의 가치를 인식한 사람은 다름 아닌 나폴레옹이었다. 그는 유적을 발견하고, 홍해와 지중해를 연결하는 통상로를 개척하려는 대계획을 세운다. 이때 나폴레옹의 운하 건설공사에 뛰어든 사람이 바로 프랑스의 외교관이자 정치가였던 페르디난 드 레세프스(Ferdinand de Lesseps, 1805~1894)였다. 그에 의해 1859년 운하건설은 재개된다. 토목기사였던 그는 운하에 대한 교육을 받은 적은 없었지만, 젊었을 때부터 운하건설에 대해 강한 집념을 품어왔었다. 그것은 그가 지닌 조국 프랑스에 대한 애국심의 발로이기도 했다. 무엇을 향한 것이든 신념이란 대단히 놀라운 것이다. 더구나 그것이 대중적인 센세이셔널을 불러일으킬만한 것을 때에는 말이다.


첫 삽이 떠진 후 근 10년 동안 레세프스는 다른 일에는 관심없이 오로지 7,460만 입방미터에 달하는 엄청난 양의 흙을 파내는 대규모 토목공사에만 집중했다. 그의 신분은 공사 감독책임자였다. 레세프스는 먼저 건설기지를 세우기 위해 포트 사이드에 인공 항구를 만들고, 약 2만여 명의 노동자들을 끌어 들였다. 그리고 그들에게 먹일 신선한 물을 공급하기 위해 나일강에서 수에즈 지협까지 수로를 팠다.


북에서 남으로 공사를 진행시켜 나간 레세프스는 육지에 깊이 7미터의 수로를 파서 도중에 있는 호수들을 하나씩 연결해 나갔다. 그리하여 남부의 대(大)비터 호가 홍해와 연결되어 호수는 바닷물로 가득 차게 되었다. 노동자들에게 음료수를 공급하기 위해 3천 마리의 낙타가 동원되었고, 낙타는 등에 음료수를 가득 싣고 사막을 지나 맨잘라호까지 날랐다. 그리고 거기서 다시 거룻배로 음료수를 운반했다.


징용된 지방 어민들은 얕은 호수위에 손으로 수로를 팠다. 인부들은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뗏목 위에서 잤다. 이 공사에는 대단위 규모의 인력이 투입되었는데, 공사가 최고조에 달했을 때는 약 8만여 명의 농민들이 고용되었다. 그들의 일급은 단 3 피아스터, 당시 미화로 3센트 밖에 되지 않았다.


인력만이 동원된 것은 아니었다. 1863년 이래 노동자수는 점차 줄어들었고, 인력을 대신해 준설기와 굴착기가 등장했다. 그리고 마침내 1869년 들어 운하는 완공을 보게 되었다. 운하가 완공된 뒤 프랑스 기선 루이즈에 마리호가 처음으로 이 운하를 통과해 외해로 나갔다. 이때가 1869년 10월의 일이었다. 그러나 지중해와 홍해를 연결하는 길이 16킬로미터에 이르는 수에즈 운하가 공식적으로 개통된 것은 1869년 11월 17일의 일이었다. 그 날짜 파리 신문들은 “위대한 사업, 두 바다를 결합하려는 위대한 희망은 이제 실현되었다.”고 보도했다. 이처럼 수에즈 운하는 당시 전 유럽을 떠들썩하게 한 관심사였다. 또한 유럽 여러 나라들의 공통된 이해가 얽히고 섥힌 국제프로젝트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개통식에는 유럽의 거의 모든 왕가의 대표들이 기념식에 참석했다.


그런데 때마침 불길한 소식이 들려왔다. 개통일 자정이 되기 바로 조금 전에 이집트의 프리기트함 한 척이 포트사이드 밖 30킬로미터 지점에서 좌초하는 불행한 사고가 일어난 것이다. 이 사고로 인해 개통식 날 운하를 통과하기로 되어 있는 프랑스, 러시아,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영국, 미국 등을 포함한 많은 나라의 선박들이 운하 앞에서 더 이상 항진을 할 수 없게 될지 몰랐다. 이 시점에 각국의 선박들은 사고현장에서 불과 5분 거리 밖에 안되는 곳에 이미 당도해 있었다. 파리에서는 개통식이 연기될 거라는 뉴스가 급전으로 날아들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다음날 이 배들은 운하를 통과할 수 있었다. 개통식은 차질 없이 진행되었고, 이 기념비적인 운하는 교역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이날 불린 오페라가 바로 ‘아이다’였다.
 

 


(왼쪽: 멀리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사막의 대지에 마치 조각도로 홈을 판 것 같이 운하의 수로가 보인다. 오른쪽은 공사 당시의 전경. 수에즈 운하의 길이는 165킬로미터, 그 가운데 34킬로미터는 호수를 지나고 있다. 꼭대기의 폭은 150미터, 내려갈수록 폭이 좁아져 밑바닥은 폭이 60미터이다. 총공사비는 1억 5백만 달러가 든 것으로 추산된다. 이것은 원래 예산의 두 배가 넘는 액수지만 세계 무역에 대한 운하의 가치에 견주어 본다면 미미한 돈에 불과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이런 역사적인 수에즈 운하를 개발한 프랑스 외교관 레세프스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는 원래 프랑스 귀족출신이었다. 외교관으로 리스본 영사, 마드리드 공사 등을 지낸 경력이 있다. 그는 그 후 튀니스 총영사로 있을 때, 나폴레옹 3세가 제창한 권위국가를 세우려는 리더십에 크게 감명을 받는다. 프랑스의 실리는 물론, 외교적으로도 권위를 크게 떨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를 고민하다가 그는 운하의 잠재성에 주목해 운하 건설에 뛰어들게 된 것이다. 이는 자국의 이익과 권위를 내세우는 외교관 업무와 같은 맥락에서였다.


외교관으로 닦아 놓은 인맥을 바탕으로 레세프스는 이집트 마지막 왕조인 마호메트 알리왕조의 4대 군주인 사이드 파샤(Said Pasha)에 접근한다. 그가 수에즈 운하의 개굴권을 얻어낸 것은 1854년의 일이었다. 그가 개굴권을 따냈다는 소식은 삽시간에 전 유럽으로 퍼져 나갔다. 19세기에 접어들면서 유럽 열강들이 서로 다투어왔던 수에즈 운하 개굴권을 일개 총영사급 외교관이 얻어냈다는 것에 경쟁자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는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레세프스의 성공에는 몇 가지 요소가 작용했다. 그의 성실성과 인품, 그리고 사이드 파샤국왕과의 우정이 크게 작용한 것이다.


그런데 레세프스가 파샤 왕로부터 얻어낸 특허는 레세프스의 주재 하에 <만국(萬國) 수에즈 해양운하회사>라는 국제회사를 설립할 수 있는 권리였다. 이 회사를 통해 운하건설을 추진할 수 있었으므로, 개굴권은 따논 셈이었다. 그런데 여기에 단서조항이 있었다. 특허의 내용은 운하가 개통되는 날부터 99년 동안 효력을 갖는다는 것이었고, 그 무렵 터키가 이집트의 종주국이었기 때문에 사업을 개시하기 전에 터키 정부의 비준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어쨌든 사이드 파샤 왕이 각국의 외교관들 앞에서 수에즈 운하개굴권이 레세프스에게 부여되었다는 뉴스를 발표하자 유럽 각국은 자국의 이해에 따라 입장이 갈렸다. 프랑스와 오스트리아는 환영했으나, 영국은 반대했다. 동방무역에서 경쟁력을 상실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레세프스가 넘어야 될 첫 번째 장벽은 영국의 동의를 이끌어 내고, 터키 왕으로부터 비준을 얻어내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 무렵 터키 왕에 대해 절대적인 발언권을 행사하는 사람이 영국대사였기 때문에 영국의 찬성을 얻어내는 일은 무엇보다도 급선무였다. 다급해진 레세프스는 다음해인 1855년 6월 영국으로 달려간다. 그는 런던에 도착해 파머스톤 수상을 만났다.


당시 71세의 고령이었던 파머스톤은 두 가지 반대 이유를 밝혔다. 첫째, 수에즈 운하를 만국민에게 개방하게 되면 영국이 누리고 있는 동방무역의 기득권이 상실된다. 영국으로선 반대할 분명한 명분이 있었던 것이다. 둘째, 프랑스가 수에즈 운하를 미끼로 이집트에 지배력을 행사하게 되는 걸 원치 않는다는 것이었다.

레세프스는 영국의 강경 반응에 직면해 다른 전략을 모색했다. 영국정부는 반대하더라도, 무역업계는 찬성하고 있는 만큼 그들을 지지 기반으로 삼아 민간여론을 유리하게 이끌어 나가려는 전략이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수에즈 운하 건설이 망상이 아니라, 실현가능한 계획임을 입증해 내는 것이었다.


그는 반대의견을 물리치는 한편, 운하회사의 설립을 서두른다. 1856년 1월에는 수에즈운하회사의 정관을 작성하여 파샤 왕에게 보고하였다.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항에 회사의 중앙사무소를 설치하고, 자본금은 액면가 500프랑의 주식 40만주를 발행하여 2억 프랑을 조달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어느 회사의 투자가이든 주식을 소유할 수 있도록 했다. 자신의 프로젝트에 국적을 불문하고 자본 참여를 가능하게 해 놓은 것이었다.

레세프스는 이러한 정관을 해설하는 팜플렛을 작성해 영국의 산업 중심지와 무역중심지를 순회하면서 수에즈운하가 실현가능한 것임을 설명하였다. 지금으로 얘기하자면 IR 로드 쇼를 다닌 셈이다. 드디어 영국정계의 원로인 글래스톤이 찬성하고 나섰다. 그는 파머스톤 정부의 반대론을 비판하는 운동을 벌이는 역할을 맡게 된다.


영국의 반대를 뒤집어 놓은 다음 레세프스는 주식모집을 개시했다. 주식은 열광적으로 팔려 프랑스에서 절반이 소진됐고, 영국에서도 많이 팔려 나갔다. 초기 창업 자본을 조달한 레세프스는 마침내 1859년 봄 수에즈운하의 개굴공사에 착수한다. 일은 순조로워 1866년 3월에는 터키 왕이 수에즈운하 회사를 비준하였다. 이는 두 가지 의미를 지닌 사건이었다.

첫째로 그동안 터키 왕이 비준하지 않는 것은 영국이 비준하지 않겠금 압력을 넣어왔기 때문인데, 비준을 통해 영국의 수에즈운하 반대의견이 대폭 완화되었다는 것을 뜻했다. 둘째로는, 터키 왕이 결과적으로 비준하고 말았으니 영국으로서는 방해공작을 펼 수단이 없어졌다는 것을 뜻했다. 수에즈 운하의 개굴공사는 이처럼 순풍에 돛 단듯 순조롭게 진전돼 나가 10년이 지난 1869년 11월 17일 마침내 개통식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수에즈운하가 개통되자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은 레세프스에게 인도 성훈위대십자장(印度 星勳位大十字章)이라는 훈장을 수여했다. 아울러 런던 명예시민으로 임명했다. 이처럼 수에즈 운하 건설을 줄기차게 반대해 오던 영국의 태도가 극렬 반대에서 극렬 찬성으로 돌변한 것은 정치적 계산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상외로 수에즈운하회사의 영업실적은 부진하기만 했다. 초년도에 운하를 통과한 선박수는 채 500척에도 이르지 못했고, 수입금은 4,345,758프랑에 지나지 않았다. 벌써 파탄의 우려가 유럽 전역에 떠돌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반대하다 급선회한 영국은 이때 재빨리 수에즈운하회사를 매수할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수에즈운하의 지배권을 영국이라는 한 나라가 소유하면 만국공동 소유물이 되게 하자는 정관정신에 위배되는 것이어서 레세프스는 쉽사리 동의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 무렵 레세프스에게 결정적으로 불리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집트 왕실의 재정난이 그의 목을 옭죈 것이다. 레세프스와 이상을 같이 했던 파샤 왕은 이미 1863년에 사망했고, 5대 왕으로 등장한 이스마일 파샤는 정사보다 사치와 낭비를 일삼아 이미 크리미아 전쟁 때문에 멍들기 시작했던 이집트왕실의 재정은 파탄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재정 파탄을 면하기 위해 왕실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왕실보유의 수에즈 운하회사 주식 17만 6,602주를 내다 파는 것이었다.


오랫동안 수에즈 운하의 지배권을 노려온 영국정부는 레세프스도 모르는 사이에 이집트 왕실의 소유주식을 1억 프랑(400만 파운드)에 인수해 버린다. 이때가 1875년 11월 17일이었다. 이는 수에즈 운하가 개통된 지 만 5년 후의 일이다.


그런데 영국정부는 어떻게 해서 이집트 왕실 소유의 주식을 모조리 사버릴 수 있었을까? 이 대목에서 국제적인 수완을 발휘한 사람이 바로 영국 수상이었던 디즈렐리였다. 디즈렐리가 이때 이집트 왕실의 주식을 매수한 것은 훗날 정치사극의 주제로 자주 떠오르는 유명한 사건이 된다.


주식 인수에는 두 가지의 방법이 동원되었다. 첫째는 디즈렐리가 이집트 왕실의 구석구석에 정보원을 배치해 왕실의 살림살이까지 한눈에 파악할 수 있을 만큼 정보전에 탁월했다. 두번째는 디즈렐리가 정치자금의 조달 능력이 탁월했기 때문에 이 자금을 순식간에 조달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전자는 그리 간단하지만은 않았다. 제국주의 분위기에서 이 시기 영국은 이집트를 침공해 엄청난 사업을 이집트 정부의 이름으로 벌리고 그 재원을 영국의 차관으로 조달하도록 하여 이집트 정부의 재정적자를 부풀린 다음 그 댓가로 수에즈 운하를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초기 5년간의 운하 운용의 적자는 영국의 교묘한 방해책이 작용한 것일 수 있다. 홍해와 외해를 잇는 이권에 처음 발의하지 못해 반대하며 발목을 잡기는 했으나, 운하의 가치를 누구보다 눈여겨 본 영국으로선 이를 소유하고자 호시탐탐 노려왔던 것이다. 유럽 여러 나라들은 허를 찔린 셈이었다.


한편 단기간 자금을 동원할 수 있는 능력을 들 수 있는데, 400만 파운드 거금을 확보하기 위해 디즈렐리는 비서관을 로스차일드 회사로 보냈다. 비서관이 도착했을 때 로스차일드 2세는 포도를 먹으면서 씨앗을 접시에 뱉고 있었다. 비서관이 수에즈 운하의 주식을 살 자금 400만 파운드가 필요하다고 말했더니 포도를 먹는 일을 멈춘 이 영국재계의 거물은 담보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비서관은 디즈렐리가 지시한 대로 ‘영국정부’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로스차일드 2세는 ‘You shall have it'이라고 말한다. 군말 없이 400만 파운드를 빌려드리겠다는 뜻이었다. 능숙한 정치가인 디즈렐리는 이 건을 가지고 빅토리아 여왕에게 달려가서 자랑스럽게 보고하지 않았다. 대신 작은 메모지에‘You have it, 미터ada미터'이라고 적어서 비서관으로 하여금 여왕에게 전달했다. 여왕전하가 수에즈 운하를 소유하게 되었다는 뜻이었다.


수에즈 운하를 차지하기 위해 이집트를 침공하고, 내부 경제를 마비시키고, 정관 유착으로 자금을 동원하고, 유럽 어느 나라도 모르게 거래를 성사시킨 영국은 그 후 그 좁은 영토에도 불구하고 군사력 우위의 호조건을 이용해 약탈한 전 세계 자원을 통해 자본 증식을 꾀하며 인도, 중동, 아프리카 등지에 대한 지배를 강화해 나간다. 제국주의 시대의 자본 획득이 오늘날 중동의 석유조차 주물럭거리는 영국의 재력이 된 셈이다.    


이집트 왕실의 소유주식을 인수함으로써 영국은 수에즈운하회사의 총주식의 5분의 3을 소유하게 되어 드디어 그 운영권을 손 안에 넣게 되었다. 닭 쫓던 개 신세가 된 프랑스는 어떻게 되었을까? 수에즈 운하를 성공적으로 열고, 회사까지 만들고 했지만, 그들은 지분의 중요성에 대한 몰이해로 결국엔 뒤처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설령 지분의 중요성을 깨달았더라도 400만 파운드를 조달할 능력도 없었다. 사실 프랑스가 수에즈 운하의 경영권을 빼앗기게 된 데에는 지분 문제가 아닌, 영국이 이집트를 장악하면서 이미 예상된 결과였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1882년 알렉산드리아 항에서 이집트인의 폭동이 발발해 수에즈운하회사에서 일하는 50명이 넘는 유럽인들이 살해되었다. 이때부터 프랑스는 수에즈운하 회사의 운영에서 완전히 손을 떼고 말았다.


자신이 만든 회사가 영국에 넘어갈 위기에 처해 있을 때 레세프스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그는 또 다른 시도를 하고 있었다. 수에즈 운하가 개통된 다음부터 그는 태평양과 대서양을 연결하는 파나마 운하의 개굴사업에 뛰어 든다. 수에즈 운하에서의 성공을 복제해내려고 한 것이었다.

 

(파나마 운하의 건설에는 10년 동안 3억 5천2백만 달러의 경비가 소요되었으며, 5천6백9명의 인명이 희생됐다. 파나마 운하가 개통되었을 당시 뉴욕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의 뱃길은 2만8백킬로미터에서 8천3백킬로미터로 3배 이상 단축됐고, 이는 상품 유통에 혁신을 불러왔다. 그러나 오늘날 트럭과 비행기의 발달로 운하의 역할은 크게 줄어 줄었다. 더구나 현재 5만척의 세계 화물선 가운데 약 7%는 정도는 운하를 통과할 수 없을 만큼 크다.)


스페인의 탐험가 누네즈 데 발보아가 중앙 아메리카의 좁은 허리에 운하를 파서 대서양과 태평양을 연결하는 가능성을 생각해 낸 것은 1517년의 일이었다. 그러나 이런 아이디어가 실행에 옮겨지는 데에는 4백년이나 걸렸다. 케이프 혼을 경유하지 않고 파나마 운하를 이용하는 경우에는 운하통행료의 약 10배가 절약될 수 있다는 파나마운하회사의 공식보고서 내용은 운하개통의 필요성을 인식시키기에 충분했다.


1870년 레세프스는 수에즈 운하의 성공경험을 살려 전혀 다른 지역에 진출한다. 1878년부터 레세프스는 콜럼비아 정부로부터 파나마지협에서의 운하건설권을 따내 운하건설공사를 시작한다. 그러나 레세프스의 의도는 결국 결실을 맺지 못하고 만다. 그가 설립했던 파나마운하회사는 계획의 미비, 공사곤란, 자금결핍 때문에 결국 파산하고 만다.

특히 당시 수에즈의 운하의 사업성이 회의적이었던 때라 레세프스는 자금을 끌어 모으는데 곤란을 겪고 있었다. 더구나 중남미 지역은 중앙이 높아 수에즈 운하처럼 수평식 운하를 만들 수도 없었고, 무엇보다도 풍토병인 황열병과 말라리아가 극성을 부렸다. 인부들은 대책 없이 쓰러져 갔다. 레세프스의 파나마 운하회사는 채 10년도 못가서 파산하고, 그 운영권은 1902년 미국으로 넘어갔다. 이는 레세프스가 세상을 떠난지 5년 후의 일이었다. 예기치 못한 사업 환경에 악전고투하다가 실패를 맛본 것이다.


그러나 레세프스가 시도한 이 대륙횡단의 파나마 운하의 가치는 1898년에 이르러서 새롭게 인식되기에 이른다. 미국-스페인 전쟁을 치르면서, 미국은 전함 오리건호를 샌프란시스코에서 쿠바로 보내는 데 근 2만 8백 킬로미터에 달하는 긴 항해를 해야 했던 것이다. 미국은 적극적으로 운하건설 건설지역을 모색하기 시작했는데, 지역선정의 임무를 맡은 워커(Walker)위원회는 니카라구아를 적격지로 보고했다.

파나마로 결정할 경우 콜럼비아 정부로부터 이미 파나마에 건설권을 가지고 있던 프랑스 운하회사와 협상해야 하는 문제가 놓여 있었다. 더구나 운하자산 및 이권양도 댓가로 프랑스 운하회사는 1억 9백만불을 요구했다. 워커 위원회가 니카라구아를 선정한 것은 경제적인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이것은 프랑스운하회사가 운하건설에서 손 뗄거라는 것을 감지하고 가격조건을 낮추기 위해 미국이 속임수를 쓴 것에 불과했다. 왜냐하면 파나마야말로 운하를 놓기에 최단지역이었기 때문이다.


프랑스운하회사의 구성원인 바리야는 파나마지협에서 운하건설공사에 투자된 자산을 회수하기 위해 미국의 관심을 끌고자 했다. 하지만 그의 이런 생각은 미국이 시도하고 있는 보다 정치적인 해법을 뛰어넘을 수 없었다. 1903년 1월 미국은 넓이 10마일 지역을 99년간 미국에 임대해 줄 것과 이의 댓가로 콜럼비아 정부에 1천만불을 지불하고 매년 25만불 추가지불하는 조건에 서명한다. 하지만 콜럼비아 의회가 비준을 거부하자, 미국은 애당초 생각해 온 계획을 밀어 붙이게 된다.

1903년 11월 3일 파나마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나도록 지원하고, 이를 계기로 파나마지역 주민들의 독립을 부채질한 것이다. 수에즈 운하를 장악하려 했던 영국의 교묘한 술책과 거의 동일하게 미국은 당시 내쉬빌(Nashivill)호를 통해 파나마주민 독립을 저지하려는 콜럼비아 군대의 상륙을 저지했다. 파나마 반군을 지원하고, 독립국을 만들어 줌으로써 그 댓가로 운하를 획득하고자 한 것이다.


11월 3일 오후 파나마 공화국 독립이 선언되고, 며칠 후 미국은 파나마의 독립을 승인한다. 이제 운하건설계획을 지체할 이유가 없어졌으므로 미국 대표와 파나마 측 대표로서 바리야가에 1903년 조약에 서명하게 된다. 미국은 1903년, 파나마의 새 공화국 정부로부터 폭 16킬로미터의 운하지대를 영구적으로 관리하는 권리를 얻는다. 먼저 1천만 달러를 지불하고, 다시 1913년부터, 해마다 25만 달러를 지불한다는 것과 파나마의 독립을 보장한다는 약속의 댓가였다.


그러나 프랑스 운하회사가 겪었던 것처럼 운하건설의 최대의 적은 질병이었다. 1904년, 아바나에서 황열병 치료에 성공한 바 있는 월리암 C. 고거스 대령이 위생상태 개선의 책임을 맡았다. 첫 2년 동안은 병균을 퍼뜨리는 모기가 번식하는 광대한 지역의 풀숲과 잡초를 베어 없애는 것이 운하건설단이 해야 할 일이었다. 미국인들은 프랑스인들이 이미 파낸 6천만 입방미터 이외에 다시 1억 4천 2백만 입장미터의 흙을 파냈다.

공사가 최고조에 달했을 때에는 4만3천명이 넘는 일꾼들이 일하고 있었으며, 주요공사는 1914년에 완공되었다. 이 해 8월 15일, 하객선 안콘호가 처음으로 이 운하를 완전히 통과하여 대서양에서 빠져 나갔다. 그러나 산사태가 일어나는 등 한동안 운하는 쓰지 못했다. 그러다가 1920년 7월 12일,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정식으로 이 파나마 운하를 개통했다.


파나마 운하는 진입로 부분까지 합하여 전장 81.15킬로미터에 해당된다. 태평양과 대서양쪽이 모두 3단계로 되어 있으며, 길이 300미터, 폭 33미터의 갑문이 설치되어 있다. 파나마 지협은 동서로 달리고 있고, 운하는 이것을 비스듬하게 가로 지르고 있기 때문에, 대서양에서 태평양으로 나가는 배는 카리브해 쪽 입구보다 약 32킬로미터 동쪽으로 나가게 된다. 해마다 약 1만 4천척의 외양선이 이 운하를 통과하고 있으며, 한척이 약 4천 달러에서 5천달러의 통행료를 지불해야 한다. 배 한 척이 통과하는 데에는 보통 15시간이 걸린다. 전문가들은 파나마 운하가 1년에 통과시킬 수 있는 배의 수는 2만 5천 5백 50척인데, 21세기 초에는 이 한계에 이를 것으로 보고 있다.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은 태평양과 대서양을 잇는 총연장 80킬로미터의 이 파나마 운하 건설 현장을 1906년 11월 방문한다. 그는 자신의 흰 양복이 더러워지는 것에 개의치 않았다. 그가 증기 굴착기 운전석에 올라가 수석 엔지니어에게 작동법을 묻는 장면의 사진은 루스벨트 시대를 대표하는 가장 유명한 사진으로 꼽힌다. “내가 파나마 지협을 장악했다.”콜럼비아로부터 강제로 분리 독립시켜 새로운 나라를 만들어 내고, 운하 건설에서 막대한 손실을 본 프랑스를 지칠대로 지치게 만드는 전략을 통해 미국은 마침내 파나마 운하를 손에 넣은 것이다. 루스벨트의 이 같은 환희는 가히 정복자다운 태도였다. 결국 이번의 운하도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되놈이 버는 식이 돼버렸던 것이다. 나아가 각기 두 개의 운하를 장악한 나라가 세계 패권이 주역이 되었음을 의미하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파나마 운하에서는 수에즈 운하에서 성공한 건설 영웅을 찾아 볼 수 없었다. 파나마 운하 에서 레세프스가 실패한 이유는 여러 치명적인 원인이 있지만, 그 중 하나는 과거에 한번 성공한 사람이 자기 능력과 방법으로 새로운 도전에 나섰을 때의 주의점을 환기시켜 주고 있다. 자기 우상화나 지나친 확신은 금물이다. 수에즈와 파나마 지역은 지형과 기후도 다르고, 풍토병도 있다. 더구나 20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과학과 기술도 변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레세프스는 수에즈 운하 건설에서 사용한 방법을 고집하다가 파나마에서 실패했다.


이런 일은 기업에서 왕왕 일어날 수 있다. 과거에 한번 성공한 방법이 혁신 없이 미래에도 계속 차용된다면 결과는 불을 보듯 훤하다. 조직도 마찬가지이다. 끊임없는 혁신, 외부 환경에 대한 예리한 주시가 없으면, 성공의 재창조는 불가능하게 된다.


창조적 소수가 그 성공으로 인해 교만해 지고, 추종자들에게 복종만을 요구하며, 인의 장막에 둘러싸여 지적, 도덕적 균형을 상실하고, 가능과 불가능에 대한 판단력가지 잃게 되는 현상을 토인비는 휴브리스(hubris)라고 부른다. 우리나라의 경우, 60~70년대까지 크게 성공을 거둔 국내 기업 중 1990년대에는 흔적조차 찾아 볼 수 없는 기업이 부지기수이다. 대표적인 예로 동명목제는 지금 흔적조차 찾아 볼 수 없다. 어디 그뿐인가? 지금 성장을 구가하고 있는 기업 중에 10년 후에 남아 있을 기업은 과연 몇 개나 될까? 


우리 사회는 ‘한반도 대운하’로 여전히 혼동스럽다. 이 같은 주장을 펼친 측은 1996년 7월 제15대 국회의원 시절부터 경부운하의 건설을 역설하며 운하가 건설되면 물류비용이 3분의 1로 줄어들 수 있다는 주장을 펴왔었다. 그 후 그는 서울시장이 되었고, 자신이 구상한 정책 하나를 실현해 낼 수 있었다. 70년대에 복개해 버린 청계천을 복구해 낸 것이다. 청계천 복원은 그를 일약 대통령으로 만들어 주었다. 청계천에서의 성공은 그에게 또 다른 자신감을 불어 넣었음에 틀림없다. 그는 다음 차례로 한반도대운하 계획을 관철시키고자 했(한)다. 대선당시엔 통일을 대비한 북한운하 구상까지 염두에 둔 것이라고 주장했었다. 


그러나 공사비, 사업성, 환경 문제, 타당성 등은 여전히 논란중이다. 지난 정부에서는 물동량만을 놓고 보더라도 500만톤 정도에 머물러 사업성이 없을 것으로 보기도 했다. 수지 타산이 맞지 않는다는 얘기이다. 물론 내부적으로도 완벽한 의견일치를 보고 있지는 못하다. 게다가 2010년 경부고속철도 완공이 예정되어 있는 상태에서 48시간이나 걸리는 수송시간이 장점이 되기에는 아무래도 무리 있다는 주장도 팽배하다.

후에 대통령이 된 이명박 후보는 한 번의 성공을 두 세번 더 확대재생산하고자 했으나, 이미 자신의 주장을 번복하기에는 너무 늦었고, 그러기에는 너무나 큰 정치적 모험을 감당해 내야 했다. 휴브리스에 빠진 것이다. 리더에게는 이미 엎질러 진 물이라도 예상과 다른 방향으로 흘러 갈 때에는 번복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러나 그러한 조언을 하는 사람은 없어 보인다. 경영에서 착시는 치명적 판단 착오를 가져온다. 



<스웨즈 운하>


스웨즈 운하는 중동전쟁의 가장 뜨거운 감자였다. 전쟁으로 폐쇄되었던 운하는 1975년 6월 5일 7년 만에 재개통된다. 이는 중동 전쟁이 원인이었다. 운하 사용으로 인한 경비절감은 상당히 크다.

예컨대, 로델담으로부터 케이프타운을 경유하여 인도로 수출되는 소맥 및 소맥분의 가격은 톤당 15.4불이며 운하를 이용할 경우에는 톤당 9.22불이 소요되어 6.18불의 가격을 절감할 수 있다.

1976년 당시 유조선은 톤당 2불의 통행료를 지불하고, 기타화물은 1.6불을 지불하고 있다. 1967년과 1975년 초기 사이에 영국과 홍해항국간의 선임(船賃)은 40~50퍼센트가 증가되었다. 페르시아만으로부터의 선임은 25퍼센트, 남부아시아로부터의 선임은 17.5퍼센트, 호주로부터의 선임은 5퍼센트가 각각 증가되었다.

UN이 조사한 바에 의하면, 1967년 스웨즈 운하의 폐쇄로 발생한 수송비의 추가부담은 1967년 6월~1975년 초기 사이에 87억불에 달하는 무역상의 손실을 초래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 무렵 사우디아라비아의 지다시(市)에 거주하는 소비자들은 계란 12개에 1.8불을 지불했으나, 스웨즈 운하를 통해 레바논이라 불가리아에서 도입되는 계란은 12개에 1불 이하로 살 수 있게 되었다.


<파나마운하>


현재의 파나마 운하는 미국에 의해 1904년에 착공되어 4만 여명의 사망자를 낸 난공사 끝에 10년 만에 완공되었다. 당시 규모로는 최대 6만 5천톤의 배 밖에 지나가지 못했다. 더구나 80킬로미터의 운하를 지나는데 무려 9시간 30분이나 걸려 시대의 요구에 맞지 않는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대책으로 제2의 운하 안이 이미 1950년대에 재개되었다. 1982년에 이 운하는 총 3억2천5백만불의 통행료를 거둬들였다. 통행량이 하루에 약 42척으로 늘어났으나, 이 수준은 1982년에 달성된 것이며 84년에는 경기침체로 하루 평균 32척으로 줄어들었다.

경제성 면에서 운하 운용의 위협요소도 있다. 알래스카의 노스 슬로프(North Slope) 산 원유를 지협을 통과해서 운반하는 파이프라인을 사용한 첫 해인 1983년에 운하는 5천만불의 통행료에 상당하는 1,500회의 유조선 통과를 빼앗겼다. 파나마 운하 개통 전에는 발보아 항구에서 대서양 포르트 베요까지의 산악 정글지대를 통나무를 배 밑바닥에 깔아 끌어서 배를 운반했다고 한다.


     


<두 운하의 교훈>

오늘날의 경영자들은 분명한 하나의 사실, 즉 처음의 성공이 다음번의 성공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기업의 흥망사를 살펴보면, 시대와 환경, 그리고 기술여건 등이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같은 사고와 전략을 구사한 나머지 역사의 뒤안길로 쓸쓸히 퇴장하는 기업들이 부지기수이다. 기업사는 흥망의 역사로 가득한 것이다. 과거에 성공을 가져다 준 경영방식은 그 시대의 조건에 부합한 결과였다. 하지만 시대와 환경이 바뀌었어도 예전 방식을 그대로 고집한다면, 그 기업과 경영자는 휴브리스의 우를 범하게 된다.


오늘날 한국 사회ㆍ경제의 가장 큰 딜레마는 과거에 성장 원천이었던 핵심경쟁력이 환경이 바뀌며 핵심 경직성(core rigidity)로 전환되는 극적인 현실에 직면해 있다는 점이다. 과거의 방식으로는 새로운 미래를 담보하는 성장 엔진을 얻기도 어렵거니와, 이전의 틀을 뛰어 넘는 발상조차 할 수 없다. 현실의 모순에 대한 각성은 과거에 일어난 창조적 활동을 새로운 차원에서 보도록 하며, 이는 미래를 열어 나가는 활로로 작용할 수 있다. 특히, 국가나 기업의 경영이 원천적 소스(source)보다는 어플리케이션(응용분야)에 급급했던 우리 현대 국가ㆍ기업의 경영사는 창조의 본질을 보다 적극적으로 희구하고 있는 상황이다.


현재는 과거의 성공을 창조적으로 계승할 때 유지될 수 있다. 과거 한국경제의 성장 동력이었던 어플리케이션은 이제 원천적인 가치가 요구되는 시점에 더 이상 작동하기 어렵게 됐다. 이제는 가장 성공적이었던 경험을 파괴하고 새로운 질서를 세워 나가야 한다. 21세기 경영은 그렇기 때문에 복잡계의 사고가 절실히 요구된다. 단순한 모방, 반복적인 복제의 덫에 갇혀서는 시대를 관통하는 창조적 경영을 이뤄낼 수 없다. 현재 처한 경영한계를 뛰어 넘어야 한다. 그것이 현재의 문제에 대한 해법 및 미래의 비전을 제시할 것이다. 새로운 방법을 찾는 일은 기업 생존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레세프스가 실패 이유는 과거에 한번 성공한 방법이 혁신 없이 미래에도 계속 차용된 결과로 볼 수 있다. 또한 환경부적응의 결과이다. 우리의 조직은 끊임없는 혁신, 외부 환경에 대한 명확한 인지가 요구된다. 새로운 시각이 없다면, 성공의 재창조는 불가능하다.




래드 플래그 제11법칙: 휴브리스의 법칙


-한번 성공한 방식이 다음번에도 성공하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경영상의 치명적인 실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조직들, 개인들은 이 같은 오류를 범한다. 과거의 영광에 대한 향수에 빠져 미래를 예측하지 못하거나, 욕망에 눈이 어두워 현실을 예리하게 파악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현상이다. 환경이 바뀌었는데도 이전의 방식으로 경영하려 하거나, 개인사에 있어 과거의 영예에 집착하려는 태도가 여기에 해당된다. 이런 오판은 궁극적으로 기업경영에서 쓰디쓴 대가를 지불하게 만든다. 이는 개인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오류를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가?


<징후 예측과 위험 발생에 효과적으로 대처하는 방법들 >


-예전의 방식을 선호하는 조직 분위기가 팽배해 있는가? 우리 회사는 관습, 관례만을 중시하지는 않는가? 만일 회사 분위기가 이렇다면, 지금 당장 혁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꼼짝없이 앉아 있다간 좌초하고 말 경쟁의 한가운데 우리 기업은 놓여 있다. 죽지 않기 위해서는 움직여야 한다. 결국 우리가 죽게 되는 것은 움직이기 않기 때문이다.


-조직 내 변화의 무풍지대가 있는가? 말로만 변화를 외치며 실질적인 행동으로는 보여주고 있지 않는가? 만일 이런 조직이라면 위기는 언제든 찾아올 수 있다. 개인적으로도 자기 계발이라든가, 지속학습의 노력이 없다면, 그런 직원은 도태하기 십상이다.


-조직 내 차원을 달리하는 변혁이 이루어지고 있는가? 변혁이란 무엇인가? 예전의 방식을 뒤엎는 환골탈퇴, 혁명적 변화가 없다면 단순한 개선밖에는 얻을 게 없을 것이다. 과거와는 다른 전략과 경쟁방식을 택하지 않는다면, 현재의 상태조차 지키기 어렵다. 조직혁신이란 현재의 상황을 뛰어넘는 것이다. 그것을 기회로 받아들이지 않을 때 조직은 위기의 나락으로 한없이 빠져든다.    


-기업이나 개인은 변화하는 환경에 유연하게 대처하고 있는가? 비판은 건전하게 받아들여지며, 현재 안고 있는 문제에 대해 자유스럽게 토론할 수 있는가? 과거에 지닌 자신의 경쟁우위를 지금도 믿고 있는가? 변화하며 생존하는 조직과 개인은 이런 질문에 대해 뚜렷한 답을 내 놓아야 한다.



 <참고자료>

「파나마 운하」,  『라이프 가족』, 1990.10. 통권 43호, 36~37쪽.

 고승제, 「페르디난 드 레세프스」, 『유공』, 1984.7. 통권 137.

『NewsWeek』, 1999.12.22.

『Chief Executive』, Feb. 2007, Vol. 51.

 이상영, 「불야성을 이루던 파나마 운하」, 『선경』, 1987.2.

『국토정보 다이제스트』, 1985.3.1. 제3권 제5호.

「격론에 부딪친 파나마 운하의 앞날」,  『삼성건설』, 1984.7.

  ⓒ전경일, <레드 플래그>



 제10법칙: ‘조직을 송두리 채 갉아먹는’ 큰 쥐의 법칙

 -어느 조직이건 상부에서 벌어지는 은밀한 행동은 쉽게 감지되지 않는다. 그러나 상층부의 도덕적 해이나, 방만한 경영, 혹은 무능과 부정 따위는 그 영향력의 크기나 비중으로 인해 터지고 나면 후폭풍조차 만만치 않다. 어떤 때에는  조직을 단숨에 날려버리기도 한다. 이들을 견제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가?

작은 소용돌이는 어느 불안정 상태를 만나면 폭발적 반응을 일으키곤 한다. 엔론(Enron)은 그와 같은 사례로 가장 적당한 예에 해당될 것이다. 래드 플래그의 누적을 의도적으로 무시한 결과 붕괴는 표면화 되고 만다.

1986년 이후, 미국연방에너지규제위원회(Federal Energy Regulatory Commission)는 기존 천연가스 생산에 대한 가격 규제를 해제한다.  60년간 지속되어 온 전력 산업에서 규제가 벗겨지는 순간이었다. 이에 따라 1990년대 후반 들어 미국 전력산업은 생산과 유통 가격이 완전 자유화 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천연가스의 가격변동성이 높아지면서 생산자나 소비자는 많은 부담을 갖게 된다. 가격 변동성이 높다는 것은  그 만큼 시장에 변화가 생긴  것을 뜻한다.

이러한 변화에 생산자와 소비자간의 부담을 제거하는 은행 기능을 맡아서 시장 개척자로서 등장하는 회사가 엔론이다. 이 회사는 금융기관처럼 천연가스의 가격 변동성을 축소시킬 금융 상품에 주목한다. 아직까지는 미답의 새로운 시장이었고, 그래서 가능성은 매우 높았다. 엔론은 천연가스의 생산자와 소비자 간 중개기능을 수행하면서 이에 대한 스프레드를 통해 급격히 성장해 나간다. 천연가스를 가스은행에 예금하고, 일반 소비자는 예금된 가스를 대출받는 대출자 식의 비즈니스 모델이 먹혀들어간 것이다. 엔론은 이처럼 금융기관과 천연가스 회사의 혼합을 통해 장기적으로 고정가격에 생산자와 소비자를 연계함으로써 이익을 추구해 나갔다.

성장 일로 있던 이 회사의 연혁을 한번 살펴보자.
엔론은 1985년 텍사스 휴스턴의 내추럴 가스와 네브라스카 주의 오하마에 있던 천연가스 공급업체인 인터노스의 합병으로 탄생한다. 1980년대 후반까지 엔론은 천연가스 회사로 미국 내 최대의 천연가스 파이프라인을 확보하고, 독립적인 가스개발회사로서 가스 생산에 주력했다. 2000년 매출액은 1,008억 달러(약 131조원)로 포춘 글로벌 500대 기업에서 16위를 차지했다. 또한 미국 내 7위 기업으로서 에너지 분야에서 10년 동안 성장을 거듭하였다.  닷컴이 유행하는 9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는 중후 장대형 에너지 사업에서 경박 단소형 첨단사업으로 변신하는데 또 한번 성공한다. 그런 성공으로 인해 1990년대 후반에는 e-비즈니스 업계의 기린아로 여겨지기까지 한다. 더구나 구조조정의 선두주자로 주주들로부터 각광을 받기도 했다. 이런 엔론은 한순간 거품이 꺼지듯 붕괴되고 만다. 실적부진, 분식회계 소문이 난지 불과 2개월도 안돼 1,000억 달러짜리 회사가 하루아침에 문을 닫게 된 것이다.

엔론의 파산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지만, 당시의 사회상도 크게 한 몫 했다. 당시는 9.11테러로 미국 사회 전반이 뒤숭숭하기만 할 때였다. 그런 와중에 회계부정이 불거지자 여론이 급냉했고, 미국 사회는 흥분하게 된다. 국민감정은 급격히 악화되었고, 수사 확대와 응징요구가 분출했다. 이로 인해 엔론의 회계를 맡았던 세계 최대의 회계법인인 아더 앤더슨까지 한꺼번에 무너지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엔론은 어떻게 해서 파산에까지 이르게 되었을까?
엔론의 사업은 크게 에너지 중개, 에너지 유통, 초고속통신 사업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업별 매출 규모는 에너지 중개와 관련된 매출액이 대부분으로 971억 달러에 달했고, 에너지 수송 등 유통 관련된 매출액은 27억 달러, 초고속통신사업은 9억 달러의 매출을 보이고 있었다. 엔론은 2001년 3/4분기 실적을 발표하기 전까지 주목받는 잘 나가는 회사였다. 그 예로 포춘지가 조사한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기업 25위에 랭크되기도 했고, 5년 연속 ‘가장 혁신적인 기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최고경영자이자 설립자인 레이(Lay)는 미국에서 가장 우수한 CEO 25인 중 한명으로 뽑히기도 했다. 영국의 파이낸셜 타임즈는 2000년 최고의 에너지 업체로 엔론을 선정하기까지 했다. 겉으로는 누가 봐도 화려하기만 했다.

여기다가 경영을 숫자로 보기 좋아하는 경영학자들은 한술 더 떴다. 하버드대 경영학 교수 바틀렛은 “엔론의 최고경영자 스킬링과 창립자 레이는 기업가적인 행동양상과 성장엔진을 창출했다”고 치켜세웠다. 경영 컨설턴트인 하멜은 “엔론은 무한한 성장가능성이 있는 혁신적인 e-비즈니스 개념을 창출하고 있다”고 극찬하기까지 했다. 이들 경영학의 주술사들에게 취한 투자자들은 열광했다. 그리하여 1991년부터 2000년까지 엔론의 주가상승률은 1,415 퍼센트로 S&P 500의 주가상승률 383 퍼센트에 비해 3.7배나 더 높게 올랐다.

하지만 열광은 오래가지 못했다. 저조한 실적 발표가 나온 이후 SEC의 내부자 거래 조사, 회계장부 조작, 합병 실패 등 잇따른 악재가 터져 나온 것이다. 미국 속담에 “비가 오면 몰아친다”는 말이 있다. 바로 여기에 딱 들어맞는 경우가 되었던 것이다. 엔론은 파산보호 신청을 하게 되고, 이에 따라 주주는 630억 달러, 채권자는 176억 달러, 파생상품 거래 파트너는 40억 달러의 손해를 입었다. 더욱 심각한 것은 2만 여 명의 직원들이었다. 이들은 회사의 파산으로 일자리를 잃게 된 데에다가 설상가상으로 자사주를 매입한 까닭에 평생 저축한 돈을 한순간 날려 버렸다. 퇴직연금 자산의 60퍼센트 정도를 엔론 주식을 사왔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잘 나가던 엔론은 왜  갑자기 붕괴한 것일까?  몰락의 원인은 여러가지였다. 래드 플래그는 눈에는 잘 띠이지 않는 곳에서부터 펄럭이고 있었다. 우선, 사업다각화에 문제가 있었다. 90년대 중반부터 사업 구조를 재편한 엔론은 가스, 전력 등 에너지를 개발, 생산하고, 이를 소비자에게 유통하면서 가치를 창출하는 자본집약적 사업에서 벗어나 사업자간 에너지 거래를 중개하는  신부가가치 사업에 더 주력했다. 이 시기 엔론이 가장 역점을 둔 분야는 e-비즈니스 강화와 첨단 금융기법이었다.  오프라인에서 쌓은 노하우를 바탕으로 2년간 준비 끝에 1999년 11월 인터넷에서 에너지를 거래할 수 있는 ‘엔론 온라인(Enron Online)’이 그 무렵 출범된다. 전자상거래를 통해 당시 붐이 일던 인터넷에서 가스, 전력, 철강, 목재 등 다양한 상품거래를 취급하기 시작한 것이다. 엔론 온라인은 출범한지 얼마 되지 않아 대박을 터뜨렸다. 하루 거래금액이 30억 달러에 달할 정도로 고객들의 반응은 좋았다. 에너지를 기초자산으로 한 상품거래에서 재미를 본 엔론은 그 범위를 확장해 이번에는 순수 금융상품도 취급하게 된다.

이 무렵 엔론이 개발한 대표적인 상품 하나가 날씨 파생상품이었다. 날씨변화로 기업들이 입게 될 손익을 일종의 권리형태로 사고 팔 수 있는 상품이었다. 신상품 도입 초기에는 에너지 관련 업체들이 주요수요자였지만, 나중에는 기후에 영향을 받는 모든 회사들이 관심을 갖게 되었다. 새로운 금융기법개발을 위해 엔론은 상위 비즈니스 스쿨에서 매년 250명의 신입사원을 채용했다. 사업구조 재편으로 인해 매출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매출액이 1996년 132억 달러에서 1997년 203억 달러, 1998년 313억 달러, 1999년 401억 달러, 2000년 1008억 달러로 늘어나면서 연평균 66 퍼센트의 성장세를 과시하기도 했다. 총 자산도 약 650억 달러에 이르며, 2000년 한때 엔론의 주식은 90 달러 이상을 호가했다. 물론 이 같은 신장은 나중에 회계조작에 의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런데 이때 엔론의 매출 증가에서 특별히 주목하게 되는 점이 있다.  인터넷상의 에너지중개 플랫폼인 엔론 온라인이 설립된 이후 매출액이 급증한 것이다. 하지만 매출액의 급성장과는 대조적으로 수익성은 급감하고 있었다. 자기자본이익률(ROE)은 1996년 15.7 퍼센트에서 2000년에는 8.5 퍼센트로 줄어들었다. 매출액이 급성장한 5년(1996~2000) 동안에는 자기자본이익률이 절반 정도 줄어들었다.

수익성이 저하된 원인은 사업다각화에 따른 투자 실패와 에너지 거래업에서의 경쟁심화가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인도의 다브홀 발전소에 투자해 10억 달러의 손실을 보았고, 최대고객은 전기 사용료를 지불하지 않고 있었다. 또한 영국에서 추진 중인 수력 발전 사업은 당국의 요금 인하 정책으로 지진부진 했다.

게다가 해외사업의 영업마진은 1.5퍼센트로 미국 내 영업 마진(2.7퍼센트)의 절반에 불과했다. 또 에너지 중개사업의 경쟁 격화로 수익성이 낮아지자, 2000년에 야심차게 시작한 초고속통신망 사업에서도 별다른 수익을 내지 못하고 있었다. 광통신 시설 매수에도 12억 달러나 투자했으나 닷컴 열풍이 잠잠해 지자 한꺼번에 무너졌다. 게다가 2001년 10월 엔론의 10억 달러 규모의 자산이 부채로 밝혀지면서 엔론의 회계 투명성은 의심을 받게 된다.

주력 중 하나였던 에너지 거래도 경쟁이 격화되고 있었다. 엔론이 인터넷상에서 가스, 전력 등 에너지 거래를 할 수 있도록 한 비즈니스 모델은 초기 투자부담이 적어 진입 장벽이 낮았다. 이런 약점을 발견한 신설업체들은 엔론의 우수한 직원들을 스카우트하면서 에너지 거래 사업에 진출했다. 당연히 경쟁은 심화되고, 수익성은 악화되어 갔다. 에너지 거래의 평균 마진도 1998년 5.3퍼센트에서 2001년에는 1.7퍼센트까지 하락했다. 사업다각화란 이름으로 신규사업을 진행했지만, 결과는 참패였다.

회사가 여러모로 어려움에 봉착해 있을 때, 경영층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위기를 극복하겠다는 자세보다는 불법적인 행위로 이를 은폐하고자 했다. 엔론의 최후를 장식하는 내부 통제시스템이 드디어 전방위적으로 붕괴되기 시작한 것이다. 경영층의 모럴 해저드, 이사회의 독립성 부족, 경영자와 회계법인간의 담합 등은 부적절한 관계의 극치를 이룬다. 이사회 멤버를 살펴보면, 그들 중 상당수가 엔론과 거래관계에 있다. 이런 상태에서 이사회가 경영진을 제대로 감독할 수 있었을까?  이사회 구성 멤버인 웨이크함은 엔론과 컨설팅 계약을 맺고, 그람과 멘델손은 엔론이 기부한 재단의 책임자로 앉아 있는 식이었다. 고양이 앞에 생선을 맡긴 꼴이었다.

경영자의 경영능력에도 문제가 있었다. 이사회 멤버들은 기업 재무에 전문적 지식이 부족했다. 사설 펀드를 통한 부외금융, 파생상품 등 복잡한 금융기법을 통해 부채를 숨기고, 이익을 부풀리는 것을 잘 알지도 못했다. 더구나 CEO인 스킬링과 CFO인 앤드류 파스토우가 갑작스럽게 사퇴하게 되자, 잇따른 악재를 맡아 신속하게 조치하지 못해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다. 더구나 이사회는 최고경영자인 스킬링이 이룩한 과거의 성공담을 맹신하고 있어 이사회 본연의 감독업무를 망각하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사회는 독립성이나 전문성이 부족해 스킬링과 파스토우를 빼면 자회사와의 거래, 부외금융 등과 같은 복잡한 사업 내용을 완전히 이해하는 사람도 없었다. 물론, 파스토우가 엔론의 CFO로 있으면서 동시에 가장 규모가 큰 파트너십인 LJM Cayman LP를 소유하고 이를 엔론이 인수하는 과정에서 3천만 달러 이상이나 이익을 챙긴 것은 별도로 하더라도 말이다. 이처럼 이사회의 사업 내용에 대한 이해부족과 이해상충은 혼동 그 자체였다.

이런 엉망진창인 회사에 끼어들어 부정을 단합하며 따로 한몫을 챙기려는 회사가 있었다. 바로 세계적인 회계 법인이었던 아더 앤더슨이었다. 도덕적 해이의 대명사가 된 이 회계감사법인은 엔론의 회계감사와 컨설팅 서비스를 동시에 수행하면서 거액을 챙겼다. 엔론의 분식회계를 도운 댓가였다. 2000년 한 해에만 이 회사가 회계감사 수임료로 챙긴 돈은 2,500만 달러에 달했고, 그 외에도 컨설팅 서비스 대가로 2,700만 달러를 거머줬다. 짜고 치는 고스톱 판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나중에 문제가 터지자, 이 회사는 엔론 관련된 서류를 파기해 파문이 더욱 커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런 일련의 과정에서 엔론의 경영자들은 떠날 때를 확실히 준비해 둔 듯했다. 그 예로 레이 회장은 2001년 1월부터 7월까지 자신이 보유하고 있던 엔론 주식 2억 5천만 달러어치를 팔아 치웠고, 스킬링도 얼마 지나지 않아 1,750만 달러어치의 주식을 팔아 치웠다. 또 최고경영영자인 루 파이는 6천만 달러 이상을 챙겼다. 나아가 회계장부에 기록되지 않은 거래에 참여했던 경영진과 외부 투자자들도 수백만 달러를 챙겼다. 파산 보호 신청을 하루 앞두고 500여명의 직원과 11명의 임원에게 50만 달러에서 5백만 달러에 이르는 특별 상여금을 지급했다. 배가 침몰할 것을 미리 알고 쥐떼들이 피하는 꼴이었다.

이런 행태는 직원들이 퇴직연금을 부어가며  연금 자산의 60퍼센트를 자사주에 투자하고 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더군다나 회사 간부들은 주식을 처분하면서 직원들에게는 퇴직 연금주식에 대한 매각 금지 조치를 내렸다.

특히 엔론 사태가 알려진 후, 정관계 유착이 일부 밝혀졌는데, 레이 회장은 부시 대통령의 아버지인 전 부시 대통령이 ‘케니 보이’라는 별명을 붙여 줄 정도로 특히 부시 집안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 오고 있었다. 레이는 부시 현 대통령이 치른 두 번의 주지사 선거와 대통령 선거에서 가장 많은 기부금을 낸 사람이었다. 2000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부시 대통령에게 50만 달러를 기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 외에서 딕 체니 부통령과 칼 로브 대통령 정치 고문 등은 에너지 정책을 마련하는데 있어서 엔론의 간부들과 자주 접촉해 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몸통을 이루는 부분이 어디까지 인지 의구심을 불러오는 대목이다. 

판단컨대, 엔론의 경영층들은 머리로만 사업을 하려했던 게 분명하다. 그들은 파생상품 및 신용파생상품 거래 등 금융성격이 강한 사업구조로 재구축하는 과정에서 편법적인 자금조달 기법을 동원했다. 사업보다는 머니 게임에 머리가 돌아간 것이다. 가스, 전력, 철강, 목재 등의 중개사업, 날씨와 같은 파생상품 구축시에 신금융기법은 교묘하게 쓰였다. 편법적으로 자금을 조달하고 운용하는 능력이 탁월해 이들은 금융성격이 강한 거래를 원활히 수행하기 위해 거래 상대방이 엔론의 신용과 자금조달 능력을 신뢰할 수 있도록 부채규모를 축소하고 자본을 확충하도록 했다. 이런 방식으로 높은 신용등급을 유지했던 것이다.

자본조달 방식상의 문제도 불거졌다. 내부유보, 유상증자 등을 통한 자본 확충보다는 부채를 통해 자금을 조달하는 방식이었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막대한 부채를 장부상에 나타나지 않는 부외부채로 조달한 점이다. 엔론은 사설 펀드(SPEs:Special-Purpose Entities)를 만들어 자산과 부채를 이곳에 매각했는데, 이러한 사설 펀드는 회계장부에는 전혀 드러나지 않았다. 이는 사설 펀드에 외부 투자자가 3퍼센트 이상 투자하게 되면 모회사와 독립적인 것으로 간주해 연결재무제표를 작성하지 않아도 되는 규정을 악용한 것이었다.

예를 들어, 엔론은 마틴 워터 트러스트와 합작해 아틀랜틱 워터 트러스트라는 사설 펀드를 만들었다. 이 사설 펀드는 출자금과 추가 차입을 통해 마련한 자금으로 엔론의 자산과 부채를 인수함으로써 엔론은 상당 규모의 부채를 줄일 수 있었다. 하지만 엔론은 이면계약을 통해 엔론의 신용등급이 하락하거나 주가가 하락하면 이 회사가  보유하고 있는 지분을 되사도록 되어 있었다. 이로 인해 상황이 악화될 때에는 사설 펀드의 부채 9억 달러를 엔론은 떠안게 되는 식이었다. 따라서 사설 펀드의 부채에 대한 위험을 최종적으로 떠안는 것은 엔론이기 때문에 이는 엔론의 회계장부에 나타나야 하지만 실제로는 엔론의 재무제표에 표시되지 않았고 회계감사에서도 지적되지 않았다. 용케 발각되지 않은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엔론은 30여 개가 넘는 파트너사로 부터 돈을 차입하였고, 가스, 전력 등 에너지 거래를 중개하면서 신용이 낮은 기업들에 대해서 지급 보증을 하는 업무도 수행했다. 파산보호 신청 당시 엔론의 부채규모를 살펴보면, 모회사의 부채가 131억 달러였고, 자회사의 부채는 181억 달러에 달했다. 여기에다가 공식적인 부채 외에도 200억 달러의 추가 부채가 더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1997년부터 2001년 3/4분기까지 엔론의 투자자산 처분이익이 순이익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8 퍼센트나 되었다. 엔론은 매출인식에 있어서도 분식회계를 자행했다. 가스와 전력 등 에너지 거래에서 상품의 양수도 시점이 아니라, 계약 체결 시점에서 매출과 이익을 반영함으로써 이익을 부풀렸다. 미국 SEC가 엔론의 사설 펀드에 대해 조사가 들어간 후 엔론은 1997년부터 2001년 3/4분기까지의 재무제표를 재작성하게 된다. 재무제표의 재작성으로 1997년부터 2001년 3분기까지 엔론의 순이익은 29억 달러에서 23억 달러로 줄어들었다. 2000년 매출액은 당초 발표한 1,007억 달러가 아니라, 3억 달러에 불과해 매출 기준 기업 순위도 7위에서 287위로 하락한 실정이었다. 이처럼 과거 5년간 엔론은 순이익을 6억 달러인 20퍼센트 정도 부풀려 왔던 것이다.

무디스(Moody)가 엔론의 신용등급을 투자부적격으로 하향조정하면서 엔론과 연계된 투자조합에 대해 신용등급을 하향 조정하였다. J.P. 모건은 엔론의 신용보강을 위해 많은 투자를 해왔으며, 이로 인한 손실 규모는 수 십억 달러가 넘을 것으로 추정됐다. 엔론 사태 피해액이 반영된 2001년 4분기 JP 모건 체이스는 5년 만에 처음으로 3억 3,200만 달러의 적자를 보았고, 세계 최대의 금융그룹인 시티그룹은 2억 2,800만 달러의 손실을 기록했다. 뿐만 아니라, 미 생명보험회사들은 엔론에 대해 총 여신의 2퍼센트에 달하는 39억 달러 규모를 대출해 주었는데, 존 헨콕이 3억 6천만 달러, 푸르덴셜이 3억 1천만 달러, AIG생명이 2억 6천만 달러에 달했다.

잘 나가던 시기, 엔론은 금융성격의 에너지 거래를 중개하면서 철저한 위험관리로 정평나 있었다. CEO가 자신의 시간 중 1/3을 위험관리 업무에 할애했고, 에너지 상품을 거래하는 트레이더의 올바른 정신 무장과 업무규정을 준수할 것을 강조하기까지 했다. 현물과 선물 거래에 있어 이익을 남기는 투기거래 보다는 위험을 줄이는 헤지거래가 원칙이며, 트레이더의 투기거래를 제한하기 위해 보너스의 75퍼센트는 위험조정성과(Risk-Adjusted Performance)에 연동되었다. 또한 현물과 선물 포지션에서 이익과 손실 규모가 잔고의 1퍼센트를 벗어나면 바로 반대매매를 통해 위험을 제한하도록 내부적으로 규정하였다.

이런 규정에도 불구하고 회사가 어려움에 처하자 엔론의 위험관리 시스템은 작동되지 않았다. 가스와 전력 파생상품의 가격이 올라갈 것으로 예상하고 상당수의 매수포지션을 취했지만, 이러한 예상이 맞지 않자 큰 손실을 보았고, 손실을 만회하기위해 추가적인 투기를 감행했다. 과욕이 끝내 화를 부른 셈이다.

엔론은 2001년 3/4분기의 저조한 실적 발표 이후 채 두 달도 되지 않아 파산 보호신청을 하게 된다. 엔론이 이렇게 단시일 내 파산하게 된 원인은 시장 신뢰의 상실이 주요 요인이었다. 3분기 실적발표 당시 33.8달러였던 주가는 신용등급이 투기등급으로 하향 조정되면서 1.1달러로 급락했다. 실적 악화, SEC의 내부자 거래 조사, 분식회계 발표 등 악재가 잇달아 발표되자 투자자들은 엔론에 대해 신뢰를 완전히 상실했고, 이로 인해 신규자금의 조달이 불가능해졌다. 이 같은 요소가 엔론이 재기의 기회를 갖지 못하게 된 이유이다.



  <엔론 몰락의 교훈>

  기업사는 한 때 잘나가던 회사들이 내부시스템이 무너지며 한순간에 붕괴된 과정을 생생히 보여주고 있다. 기업 붕괴의 원인은 성장정체와 매출 급감, 과도한 부채, 새로운 경쟁사의 도전, 변화하는 시장 환경에의 부적응 같은 것 이외에도 부정과 비리를 막는 내부 위기관리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때 벌어지기도 한다. 위기가 점증되다가 결국 막을 수 없는 한계에 이르러 터져 나오며 문을 닫게 되는 것이다. 엔론의 경우도 이 같은 사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어느 경우든 붕괴의 공통점은, 사전에 적잖은 래드 플래그가 펄럭인다는 점이다. 이를 인지해 조기대응만 잘해도 기업이 무너지는 일까지는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살펴본 엔론사는 끊임없이 발동하는 래드 플래그를 무시했고, 경영층은 심지어 이를 조장하기까지 했다. 그렇다면 엔론 붕괴의 징후들은 어떻게 나타났을까? 

     

 -이 회사는 기업 성장에 소요되는 자금을 주로 외부차입에 의존했다.  수익성보다는 차입에 의존한 성장위주의 경영을 지향했고, 실물투자나 자본집약적 사업보다는 금융 중개성격이 강한 중개업에 집중했다. 수익이 동반되지 않는 성장, 차입위주의 경영은 곧 소비 둔화로 인한 매출 부진, 경쟁 격화로 인한 수익성 악화, 자금시장의 불안 등 경영 환경에 부정적 영향을 미쳤다. 정상적인 경영과 거리가 먼 곳에서 이미 래드 플래그는 표면화 되고 있었다.


  -경영자를 적절히 견제할 수 있는 내부통제 시스템이 없었다. 이사회는 유명무실했고, 오히려 부정과 비리의 온상이었다. 회계법인은 독립적인 감사를 하지 않았고, 오히려 과다한 수수료를 챙기며 부정의 대열에 합류했다. 이 같은 여건은 내ㆍ외부로 걷잡을 수 없을 만치 모럴 해저드가 일어나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조직적인 부정행위가 기업을 갉아 먹어 마침내 침몰시킬 거라는 징후는 여러 곳에서 나타났으나, 배가 가라앉을 때가 되어서야 위험은 감지됐다.


   -엔론의 경영층이 지닌 재무 이해 정도는 파생상품을 다루기에 부적절했다. 자신이 잘 모르는 분야에 진출함으로서 더 큰 실책을 범한 것이다. 또한 금융 감독 기관은 2,000개가 넘는 파생금융상품을 제공한 엔론에 대해 금융규제 및 관리감독을 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못했다. 이는 대대적 부정을 방치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엔론은 회계 처리에 있어서 법이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 경제적 사실을 숨길 수 있는 규정을 찾아 내는데 몰두했다. 이 과정에서 경제적 사실은 상당부분 왜곡됐다. 엔론의 경영자들은 건전한 사업을 펼치고, 수익성을 개선하기 위해 골몰하기 보다는 법망을 피해나가는 방법에 더욱 몰두한 듯하다. 경영자가 기울이는 관심사가 기업 성패의 가늠자라는 점은 새삼 강조할 나위가 없다.  


   -기업의 생명은 경영투명성, 책임경영과 철저한 내부통제시스템이 있어야 한다. 엔론의 경우, 시장의 신뢰 상실은 즉각적인 주가 폭락과 도산으로 이어졌다. 엔론의 최후는 우리기업에게 지속경영을 위한 기본적인 조건이 무엇인지 잘 보여주고 있다.




래드 플래그 제10법칙: 썩은 물고기 눈의 법칙

-조직 상부의 도덕적 불감증, 윤리의식 실종은 조직을 위험에 처하게 하고, 처음에는 작기만 한 문제도 일파만파로 키워 나간다. 그리하여 건전한 부분조차 도미노 현상을 일으키며 붕괴되게 만든다. 부패가 확산되는 순서는 마치 물고기는 썩게 하는 요인으로 머리 근처의 눈에서부터 부패가 일어나기 시작하는 것과 흡사하다. 어느 조직이나 맨 윗층에는 위기가 잠복해 있으며, 이는 터지기 전의 마그마와 같은 형태를 취하고 있다. 조직 성원 전체가 예측하고, 감지하고, 대비하려는 자세가 없다면, 위기는 현실화 될 것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는 무엇이 있을까?   


<징후 예측과 위험 발생에 효과적으로 대처하는 방법들 >

-조직 내부의 원활한 커뮤니케이션 능력은 ‘대화를 잘하는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그 보다는 문제가 될 수 있는 요인들에 대해 상호교류, 침투의 과정을 거치며 적절하고 신속한 초등대응을 통해 회피해 나가는 것이다. 만일 기업이나 개인이나 이 같은 진정한 의미의 커뮤니케이션에 소홀하다면 위기는 악몽으로 표출된다. 모든 래드 플래그를 공유하고 이를 통해 문제의 원인을 원천적으로 해결하고 넘어가자. 이 보다 급하고, 중요한 일은 없다.
  

- 신뢰를 얻지 못하는 기업에 시장이나 투자자, 고객이 애정을 갖기를 바란다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공유하고 이의 해결을 위한 모든 노력을 다하는 것은 위험이 동반된 것이기는 하나 기업을 더 큰 위기에서 건진다.  1982년 타이래놀 독극물 주입사건이 발생했을 때,  존슨앤존슨이 대응한 방법은 고객과의 솔직한 위험공유와 해결책을 제시한 것이었다. 오늘날 기업들은 위험요인을 보다 적극적으로 홍보하고 이를 해결하려는 적극적인 자세를 보일 필요가 있다.  


   - 개인 파산에 이르고, 이로 말미암아 가정까지 잃게 된 많은 신용불량자들은 말한다. 초기에 가족들과 어려움을 공유하고 극복하려는 태도를 가졌다면, 파산이 되었어도 일어설 수 없는 상황에 빠지지는 않게 되었을 것이라고. 개인 파산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자기 관리를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온갖 위험에서도 이를 이겨낼 수 있다. 문제에 대한 가장 적극적인 대응책은  문제가 곪기 전에 아픔을 겪더라도 터뜨려 버리는 것이다. 이 같은 자정능력 없이는, 위기는 항시 폭발될 위험을 내재하고 있다. 



 <참고자료>

 박상수,「엔론사 파산이 던져 준 교훈」,『LG주간경제』, 2002.1.30.

 양두진, 「미 엔론(Enron)사의 몰락과 교훈」,『세계경제』, 2002.1.

『Cases in Financial Engineering』,1994. Harvard Business School.

『Enron Annual Report』. 2000. www.enron.com.

「Editorial Comment: Houston we have a problem.」,『Financial Times』.2002.1.12.

「Investors to be more wary of credit products.」,『Financial Times』.2002.1.7.

「거대기업 쇠퇴에서 배우는 교훈」, 『CEO Information』, 삼성경제연구소, 2005.6.15.

「엔론의 파산과 미국 정계」, 『Asia-Pacific Review』, 2002.2.

 
  ⓒ전경일, <레드 플래그>



 제9법칙: ‘딱 한번만 더’를 부르는 유혹의 법칙

  -사업의 세계에서는 진퇴를 알아야 한다. 질주할 때가 있는가 하면, 멈춰야 할 때가 있다. 이 점을 모른다면 그 기업은 필시 매우 고통스런 곤경에 처하게 될 것이다. 진격을 통해 성취를 얻었다고 할지라도 그 성취는 여러 제조건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자신만을 믿는 순간, 스스로 독안에 든 쥐가 된다. 여기 그러한 적절한 예가 있다. 

비즈니스 세계에서 과도한 야망은 사업을 위기로 끌고 가는 것은 물론, 끝내 개인적 파탄으로 몰고 간다. 앨버트 J. 던랩이라는 사람이 이런 예에 적합할 것이다. 인수합병, 구조조정을 통해 승승장구하던 던랩이 한 순간 무너지게 된 것은 원칙 없는 욕망이 불러일으킨 예측된 결과였다.

우선 그의 배경을 알아보자. 던랩은 뉴저지 조선소에 다니는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언젠가 빈민가에서 벗어나 크게 성공한 자기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욕망이 있었다. 지칠 줄 모르는 욕망은 그의 삶을 고무시키는데 주요 목적인 것으로 비춰졌다. 고등학교를 다닐 때에는 미식축구 선구로 활약해 베르겐 카운티 올스타팀에 선발되기도 했고, 대학은 웨스트포인트를 나왔다. 군대에 가서는 낙하산부대에서 근무했다. 사업을 시작했을 때, 그는 저돌적으로 재빠르게 자신의 계획을 행동에 옮겼다. 이익구조를 개선하기 위해 경비를 사정없이 줄였고, 구조조정을 단행하는 등 말 그대로 냉혈한의 모습을 취했다. 그는 회사 내 무서운 보스로 통했다. 조직 내부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지만, 그의 경영방식은 짧은 시간 내 확실한 결과를 가져왔기 때문에 처음에는 투자자들로부터 환영을 받았다. 짧은 시간 내 투자회임을 원하는 투자자들의 욕구에 부응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철학을 종종 이렇게 표현하곤 했다.

“나는 열심히 일하고 대가를 치르면 성공할 수 있다고 배웠다. 오늘날까지 내 자신을 증명하고 또 증명해야 한다고 느끼고 있다. 잘 해나가지 못하면 그 순간 나는 내가 얻은 부와 성공을 누릴 자격을 잃게 된다. 유별나게 들릴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런 생각에 지배되어 왔다.”

기업이 여러 이해집단과 관련되어 있고, 어느 한 퍼즐이 빠질 때 생길 수 있는 치명적 문제를 좀 더 일찍 깨달았더라면 그는 보다 신중해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1983년, 던랩은 기업 인수 후 빚더미에 올라앉아 있는 일회용 컵 제조회사인 릴리 튤립(lily Tulip Co.)의 CEO로 취임한다. 그는 평소 자신이 가진 경영철학을 즉시 실천에 옮겼다. 본사의 직원 수를 십분의 일로 줄이고, 공장 문을 닫고, 회사의 전용비행기를 팔아버렸다. 그리하여 1980년대 중반 그가 회사를 떠날 때, 릴리 튤립은 건강한 기업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의 방식이 먹힌 것이다.

1980년대 후반, 그는 유명한 기업사냥꾼 제임스 골드스미스 경과 손잡고 그가 인수한 크라운 젤러박(Cnfwn Zellerback)과 인터내셔널 다이아몬드(Intemational Diamond)의 구조조정에 관여한다. 1991년에는 엄청난 부채에 시달리는 호주 재벌 기업인 컨솔리데이티드 프레스 지주회사(Consolidated Press Holdings)를 위해서 일했다. 2년에 걸친 무지막지한 구조조정 끝에 회사는 부채 청산에 성공한다.

제임스 경은 그를 격려하고 그가 전에는 겪어 보지 못한 전혀 다른 세상인 엄청난 부와 권력의 세계에 눈을 뜨게 해 주었다. 그를 처음으로 ‘양복 입은 람보’라고 부른 사람도 제임스 경이었다. 던랩은 자신의 다른 별명인 ‘전기톱’에 대해서는 싫어했지만 ‘람보’라는 별명은 좋아했다. ‘전기톱’이라는 별명은 케리 패커를 위해 기업 구조조정을 담당하면서 호주에 체류하던 시기에 호주 언론이 처음으로 붙인 것이었다.

“나는 람보 영화를 좋아한다. 람보는 승산이 전혀 없는 상황에서도 항상 이기는 사나이다. 머리통이 산산조각 날 것 같은 최악의 상황에 뛰어 든다. 그렇다고 실제로 머리가 산산조각 나는 법은 없다. 결국 그는 성공하고 악한들을 모두 제거한다. 전쟁을 끝내고 평화를 찾아준다. 내가 하는 일도 그와 같다.”

성과에 대한 보답으로 그는 졸지에 1억 달러를 거머쥔 억만장자가 된다. 그때 그의 나이 55세였다. 이 무렵, 스코트 제지는 던랩에게 회사를 맡아줄 것을 제의했다. 영입 조건으로 스코트 제지는 플로리다에 있는 던랩의 320만 달러짜리 집을 회사에서 매입하겠다는 제안을 해왔다.

스코트 제지는 오랜 역사에도 불구하고, 1989년 이래 매출이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었다. 주당수익률은 61퍼센트나 떨어져 있었고, 1993년에는 2억7,700달러의 손실을 냈다. 스코트 제지의 부진 요인은 상업용제지 사업부인 S. D. 워렌 때문이었다. 1990년, 스코트는 워렌의 생산용량을 대폭 증가시키기 위해 막대한 투자를 단행하는데, 당시는 대공황 이후 최악의 경제 불황이 몰아치는 최악의 시기였다. 스코트는 세 차례에 걸친 구조조정을 단행했으나, 만족스러운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버둥대고 있었다. 당시 스코트의 실적이 얼마나 저조했는지는 이 회사의 주요 경쟁사인 P&G와 킴벌리 클라크(Kimberly-Clark)와 비교해 보아도 잘 드러난다.


<매출대비 순익비율>

스코트, 킴벌리 클라크, P&G 간의 비교(1990~1993년)

 

1990

1991

1992

1993

스코트

3.8%

-1.8%

4.3%

-7.7%

P&G

6.6

6.6

6.4

-2.1*

킴벌리 클라크

6.8

7.5

1.9

7.3

• 출처 : 기업 연례 보고서

* 1993년 P&G 적자는 회계변경으로 인한 특별비용이 원인임.

극단의 처방을 쓰지 않으면 회사는 문닫을 형편이었고, 이 병을 치유하는 데 던랩이 적임자로 떠올랐다. 던랩은 1994년 4월 스코트 제지의 CEO로 취임한다. 그는 취임하자마자 그의 특유의 ‘사슬톱 전략’으로 구조조정에 들어갔다. 취임하던 날, 그는 구조조정의 성공을 장담하며 자신의 돈 2백만 달러를 스코트에 투자했다. 그리고 기업가보다는 투자자 마인드로 몇 달 후 이 회사의 주가가 30퍼센트 오르자, 다시 2백만 달러를 추가로 투자했다.

취임한 지 몇 시간 지나 그는 이전에 자신과 함께 일했던 3명의 자기 수족을 중역으로 영입한다. 그리고 이튼 날에는 회사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경영위원회를 해체시켜 버렸다. 그리고 세 번째 날에는 그 회사의 중역 11명 중 9명을 자른다. 또한 네 번째 날에는 예전의 경영진이 준비한 책장에 꽂혀있던 서류들을 모두 폐기시켜 버린다. 구조조정의 선수를 친 것이다. 상부층에 대한 그의 이러한 구조조정은 나름대로 자기 설득력을 지니고 있었다. 당신 스코트 제지 경영층에 대한 던랩의 생각은 명확했다.

“경영진은 게으르고 잠만 잤다. 그러나 그들은 살찌고 행복했다. 현실을 도외시한 급여와 상여금 덕분이었다. 이러한 거짓이 꼬리를 잡히면 목을 잃을 것이라는 점을 그들은 알았다. 그래서 방패삼아 황금낙하산을 탓다. 낙하산은 무능한 사람이 내쫓길 경우에 최종적인, 받을 가치가 없는 거액을 보장해 주었다.”

그의 말마따나 당시 스코트 제지에는 관료주의가 미친듯이 날뛰고 있었다. 게다가 명분에 휩싸여 1993년에는 2억 7,700만 달러의 손실에도 불구하고 1994년에 300만 달러를 자선기부금으로 따로 떼어놓고 있었다.

취임한 지 두 달이 지난 1994년 6월 연례모임에서, 그는 향후 1년 동안 추진할 4가지 주요 목표를 발표했다. 첫째, 이 회사의 비전략적 자산, 특히 과거 수년 동안 이 회사의 주요 확대자금의 수혜자였던 인쇄 및 출판용지 전용사업부인 S. D. 워렌 사업부를 팔아버린다. 둘째, 능력 있고 추진력 있는 고위 간부들로 구성된 핵심기획팀을 수립한다. 셋째, 단 한 번에 대대적이고 전방위적인 엄청난 구조조정을 실시한다. 넷째, 스코트의 상품을 전 세계에 판매하기 위해 새로운 마케팅 전략을 수립한다.

이때 던랩이 추진한 구조조정 규모는 미국 기업 역사상 최고의 기록으로 남는다. 며칠 새 전세계에 흩어져 있는 2만 5,900개의 자리 중 1만 1,000개가 없어졌다. 여기에는 본사직원이 71퍼센트, 전체 사무직원이 50퍼센트, 생산직 근로자가 20퍼센트나 해당되었다. 이런 엄청난 구조조정으로 던랩은 일단은 경비를 줄일 수 있었다. 직원 해고 외에도 던랩은 일부 생산 및 서비스 아웃소싱을 통해 다른 부분에서도 경비를 삭감해버렸다. 그해 말까지 그는 세전금액으로 3억4,000만 달러를 절약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발표했다.

1994년, 그가 비전략적 자산으로 처분하고자 했던 S. D. 워렌이 한 국제투자 그룹에 16억 달러에 팔렸다. 그와 함께 다른 재산도 처분해서 스코트 제지는 20억 달러를 회수했다. 다른 한편, 던랩은 부채를 15억 달러나 낮추고 스코트 제지의 주식을 3억 달러 어치를 사들여 회사의 신용등급을 상향 조정시켰다. 이 같은 그의 구조조정은 대단한 것이었다. 2분기 들어 수익은 71퍼센트가 늘고, 3분기 매출도 73퍼센트나 늘었다. 이는 4년 만의 최고의 실적이었다. 이어 4분기에는 수익이 1993년 동기 대비 159퍼센트나 신장하고, 순익은 82퍼센트나 상승했다. 주가도 연일 뛰었다.

그러나 구조조정의 효과가 숫자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숫자의 이면을 유심히 살펴보면,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시장점유율이 문제였다. 1995년 4월, 이 회사의 화장실용 화장지의 미국 내 시장점유율은 1퍼센트에 멈추어 섰고, 키친타월의 경우에는 오히려 5.2퍼센트나 역신장 했다. 겉만 화려한 숫자에 많은 사람들이 현혹된 셈이다. 1995년 7월, 던랩은 그의 무자비한 구조조정과 숫자의 현란한 포장을 통해 스코트 제지의 인수자를 찾게 된다. 킴벌리 클라크가 이 회사를 73억 8천만 달러에 인수하자, 던랩은 구조조정의 대가로 막대한 현금을 싸서 짊어지고 유유히 회사를 빠져나갔다. 그에게는 또 다른 신화를 꿈꾸는 기업이 기다리고 있었다.

던랩이 죽어 가던 스코트 제지를 살려냈다는 신화는 믹서, 전기담요, 가스그릴 등 사업에서 지진부진하기만 한 선빔으로서는 군침이 넘어갈만한 일이었다. 던랩은 개선장군으로 선빔으로 향했다. 시장도 덩달아 요동 쳐 던랩이 선빔의 대표직을 수락하던 날, 선빔의 주식은 50퍼센트나 수직상승했고, 그 후에도 300퍼센트나 뛰었다. 이번에도 던랩이 할 수 있는 전략은 같았다. 선빔의 CEO가 되자마자 던랩은 1만 2,000명의 직원 중 절반을 해고하고,  생산시설도 반으로 줄였다. 선빔의 가구, 침대시트 등 아이템은 정리되었고, 차후 주력 사업으로 그릴, 가습기 등 주방가전제품에 집중했다. 1996년, 던랩은 3억3,800만 달러어치의 감가상각처리를 했는데 그 중 1억 달러가 재고였다.

1997년 들어 구조조정의 성과는 또 숫자의 마법에 빠져들었다. 판매가 22퍼센트나 상승하며 11억 6,800달러에 이르렀고, 1억9,600만 달러의 손실을 본 전년도 대비, 1977년에는 1억2,300만 달러의 수익을 기록했다. 이에 따라 주주들은 주당 1.41 달러의 순익을 챙길 수 있었다. 선빔에 대한 던랩의 경영진단은 현실 인식에 기인한 바 있다. 예컨대, 공장과 배송센터의 불합리한 운영을 개선하는 것이었다.

“선빔은 30여 개 공장에서 전혀 연관성이 없는 제품을 생산하는 하나의 집합체였다. 경영진은 합병한 회사를 선빔으로 통합시켜 큰 회사로 만들기보다는 거래 자체에 홀려 있었기 때문에 공장마다 다른 정책을 취하고 있었다. 선빔이 소비자 인지도가 높은 강력한 상표라는 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그들의 가장 큰 자산을 잃어가고 있었다. 더욱 어안이 벙벙한 일은 미시시피주 해티즈버그에 1억 달러를 투자하여 제조, 보관 및 배송센터를 건설하는 일이었다. 해티즈버그는 고속도로와 항공 등 교통편이 부족했다. 더구나 대부분의 공장 가동율이 40퍼센트 수준에서 허덕이고 있다. 가동률이 50퍼센트도 넘지 않았는데 대규모 생산설비 건설이 필요하다고 도대체 누가 생각해 냈단 말인가? 결국은 다른 곳의 설비를 해티즈버그 설비에 통합시켜 존속하기로 결정했다. 그곳은 선빔 구조조정의 초점이 되었다.”

선빔 공장을 구조조정한 결과 2억 2,500만 달러의 회사전체의 연간 비용을 절감했다. 공장은 전 세계적으로 26개에서 8개로 줄었다. 재고창고는 61개에서 18개로 줄었고, 전체 1만 2,000명에 달하던 인력도 절반으로 감축되었다. 감축한 인력의 절반은 영업조직 매각을 통해, 나머지는 해고를 통해 줄인 것이었다. 던랩은 상급자부터 해고해 나가기 시작해 본부 인력을 308명에서 123명으로 60퍼센트 잘라냈다. 기타 경영진이나 행정지원 인력은 1,529명에서 697명으로 줄였다. 첫 주에 회계감사 수수료를 50퍼센트나 삭감했으며, 보험 수수료는 80퍼센트를 줄였다.

대표직을 맡은 지 1년이 지난 1997년 10월, 던랩은 선빔이 완전히 위기에서 벗어났다고 공표한다. 1996년에 12달러에 불과했던 주가는 50달러로 치솟았다. 그러나 이런 주가 상승이 선빔의 발목을 잡으리라고는 그 당시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다. 선빔의 주가가 50달러가 되자 선빔의 시가총액은 46억 달러로 늘어났다. 이는 선빔 매출의 4배나 되는 수준이었다. 애시당초 기업을 정상적으로 지속 경영하는데 관심이 없던 던랩은 회사를 매각 처리해 버림으로써 또 다시 신화를 쓰며 손을 떼고자 했다. 오래 유지하면 들통이 난다는 점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엄청난 시가총액으로 인해 선빔을 인수하겠다는 회사는 나타나지 않았다. 게다가 단기 약발에 취한 주주들은 던랩이 계속 회사를 맡아주기를 원했다. 액싯 플랜(Exit Plan)이 차단된 것이다.

생각과 달리 일이 꼬이자, 던랩은 연일 회사 매각을 위한 파티를 열며, 한편으로 사업영역을 확대시켜 나가는 전략을 펼쳤다. 24억 달러를 들여 콜먼 컴퍼니(Coleman Company), 시그너처 브랜즈(Signature Brands), 미스터 커피(Mr. Coffee), 퍼스트 얼럿(First Alert)을 묶어서 인수한 것은 새로운 비전을 구체화하기 위한 작업으로 비쳐졌다. 인수 비용 중 일부는 7억5,000만 달러어치의 전환사채와 현금화할 수 있는 매출채권 6천만 달러어치로 충당했다. 이 무모한 인수에 의구심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지만, 인수로 인한 문제는 선빔의 장부에서 드러나지 않았다. 실제 상황을 감추었기 때문이다.


<선빔의 매출 및 순익 변화(1991~1997년)

(단위 : 백만달러)

 

1991

1992

1993

1994

1995

1996

1997

매출

886

967

1,066

1,198

1,203

964

1,168

순익

47.4

65.6

88.8

107

50.5

-196

123



기업 연례 보고서에서 보듯, 선빔이 1997년에 1억2,300만 달러의 순익을 기록하며 흑자로 돌아서자 사람들은 이 놀라운 사기꾼을 희대의 경영영웅으로 떠받들었다. 그의 구조조정 사례는 IMF 직후 우리나라에도 풍적인 인기를 끌어 1999년 국내에서 출간된 던랩의 자서전『던랩의 기업수술』이란 책의 추천사를 당시 전경련 부회장이 쓸 정도였다. 그는 던랩의 구조조정 방식을 예로 들며 한국의 경영자들이 구조조정에 대한 자신감을 갖으라고 소리쳤다. 

 
“던랩은 올바른 경영진 구성, 최저수준으로의 비용삭감, 비핵심사업부문 매각을 통한 대차대조표 개선, 가장 중요한 사항인 제대로 된 경영전략의 수립과 시행을 기업회생전략으로 삼았다. 그리고 이 네 가지 기본전략은 20여 년 동안 7개 기업을 회생시키는데 거의 예외 없이 적용된다. 누구나 기업을 분할하여 적정규모로 축소할 수 있다. 그러나 던랩은 핵심사업에 역량을 집중하여 기업을 회생시키고 이를 주주의 이익으로 연계시켜 왔다는 점에서 다르다. 그것도 예상기간보다 훨씬 빠르게 말이다. 특히, 그는 성공적인 구조조정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기 위해 자사의 주식 매입에 자신의 거의 모든 재산을 투자하고, 스톡옵션제를 철저히 활용하였다. 동참할 중역들에게도 자사주를 매입토록 해 성심껏 희생 프로그램에 동참하도록 유도하였고, 항상 주가상승이라는 선물을 안겨 주었다. 결국 주주들에게도 막대한 이익을 선사하였다. 그러면서도 정상화 과정에서 일자리를 잃은 근로자들에 대한 인간적인 고뇌를 엿볼 수 있다. 그러나 65퍼센트를 위해 35퍼센트를 버려야만 하는 현실 앞에서 노조와의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협상을 통해 한 건의 마찰도 없이 일자리 수를 조절해 가는 탁월한 경영능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무렵 대한민국 경영자들의 생각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리하여 던랩 특유의 경영관, 구조조정 성공사례, 저돌적 추진력, 뛰어난 통찰력과 실행력은 높이 평가되었고, 심지어는 ‘참된 경영자’로 평가되기조차 했다. 본질을 파악하지 못한 채 수박 겉핥기식으로 서구의 구조조정 사례를 도입하던 때의 해프닝이었다.

던랩이 이룬 성과는 그러나 나중에 거짓임이 판명됐다. 던랩은 분식회계, 장부조작, 구조조정에 든 비용 미계산 등 여러 가지 방법으로 수치를 조작한 것이다. 1997년의 순익을 부각시키려고 그는 1996년의 손실을 부풀렸다. 자신이 1억9,600만 달러라는 최악의 손실을 본때에 CEO로 취임해 이룩해 낸 성과로 포장해 내고자 한 것이다.

기업의 구조조정은 그 효과가 서서히 드러난다. 1998년 1분기 들어 선빔은 매출이 하락하고 손실이 기대치를 넘어섰다. 손실은 4천460만 달러에 달했다. 주가는 곤두박질쳐 50퍼센트 급락하해 25달러로 폭락했다. 그리고 2사분기에 가서는 4.62달러로 완전 추락하고 만다.

이에 대해 던랩은 어떤 태도를 취했을까? 그와 그가 데려온 고위 중역들은 콜먼 컴퍼니 등이 안고 있는 문제점을 축소해 나갔다. 다른 한편 마진이 적은 야외용 그릴 등에 집중한 것을 후회했다. 하지만 이제 그의 환상적인 행진은 종착점에 접어들고 있었다. 신마저도 그를 외면했기 때문이다. 출시한 신상품이 계속 리콜 되었고, 엘니뇨현상이 주기적으로 찾아오며, 폭풍우가 몰아쳐 누구도 야외용 요리 기구를 사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위기를 만회하고자 인수한 기업들의 직원을 또 3분의 1이나 줄였다. 그러나 회사가 정상으로 돌아오기에는 선빔은 너무 멀리 가 있었다.

1998년 6월 15일 일요일에 급히 소집된 이사회는 던랩에게 해고통지를 했다. 해고된 사람에게 거액의 퇴직금을 줄 수 없다는 회사 측과 기어코 받겠다는 던랩 측의 추잡한 소송이 시작되었다. 그가 해고되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반응들은 대체로 이랬다.

 
“드디어 그 인간은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한 그대로 되돌려 받았다.”
“이제야 그 회사가 제정신을 차린 것 같다.”


소송이 벌어지고, 서로 유리한 상황을 조성하기 위한 자료들이 수집되었다. 던랩이 경영을 맡던 1997년과 1998년에 수익을 부풀리는 회계조작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확인되자, 2001년 5월, 미 증권거래위원회는 증권법을 위반한 혐의로 던랩과 그 밑에서 일하던 몇 명의 중역들을 고소했다. 매출 과장 방법으로 1997년의 경우, 소매점들에게 다음 분기의 상품 판매분을 서둘러서 보고토록 함으로써 미래의 수익을 당겨서 계산하는 수법도 동원되었다. 실적에 쫓기는 경영자들이 범하기 쉬운 유혹을 그도 여김 없이 범했던 것이다. 그는 한번 거짓말을 통해 다음번 거짓말을 예약해 놓았다.

그는 이런 혐의를 모두 부인했다. 그리고 수치를 “해석하는 방법이 다를 뿐”이라고 억지 주장을 했다. 2001년 2월 선빔은 18개월간의 재무상황을 재조사한 바를 발표해야만 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 회사는 2월에 법정관리에 들어갔다.

2002년 9월, 던랩은 증권거래위원회에 50만 달러의 벌금을 내고 다시는 어떤 상장기업의 경영자나 중역으로 일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고소를 취하 받았다. 한 달 후, 던랩은 주주들로부터 받은 고소를 해결하기 위해 1,500만 달러를 지불했다. 한편 증권거래위원회는 던랩이 스코트 제지를 경영했을 때도 틀림없이 같은 방법으로 장부조작을 했을 거라는 결론을 내렸으나, 구체적인 조사에는 들어가지는 않았다. 그보다 몇 백배가 더 큰 엔론 사태가 터져 버렸던 것이다.



<던랩의 무리한 구조조정과 확장의 교훈>

-기업의 경영진은 재무제표상의 위험을 식별하고 지속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체제를 구축해야 한다. 재무건전성을 획득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실행하게 되는 구조조정에 대해서도 파급 효과를 십분 고려해야 한다. 직원들의 사기 저하라든가, 구조조정을 통해 장기적으로 얻게 될 실질적인 이득이 뭔지를 냉철하게 파악해야 한다. 하지만 한가지 명심해야 할 것이 있다. 기업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더라도 기업을 이끄는 힘의 원동력은 직원들에게 있다는 점이다.


   -던랩 신화의 좌초는 바로 무리한 사업구조조정, 직원들에 대한 인간적인 면의 결여, 단기 목표 중심주의, 치고 빠지는 경영 스타일, 회계 부정과 매출 의혹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며 벌어진 현상이다. 게다가 유명무실한 경영진, 이사회와 감사기능의 부재는 던랩이 숫자를 감추기에 너무나 적절한 환경으로 작용했다.
 

-던랩은 자신의 대부분 이력을 기업회생 전문가로써 쌓아 오면서 20여 년간 죽어가는 7개 기업을 회생시켰지만, 결국 경영이란 신화를 써나가는 일이 아니라, 현실에서 생존하고 성장하기 위한 기초를 튼튼히 하는 가운데 마련되는 것이라는 점을 실천하지 못했다. 던랩의 신화에 환상을 갖게 된 기업과 투자자들은 어떤 래드 플래그를 무시한 것일까?


  - 단순히 숫자에 현혹돼 주가를 끌어올리는데 급급한 회사의 내부사정을 유심히 살펴보면 반드시 뭔가 꺼림직한 일이 있기 마련이다. 기업의 경쟁력, 내실이 전제되지 않는 경영상의 숫자란 한낱 신기루에 불과하다. 화려한 살적발표, 비전 설명회의 개최, 신사업의 진출 등 수사(修辭)에 급급한 회사들에게는 래드 플래그를 꽂고 보자.


  - 조직 내부에 무엇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일어날지를 알 수 있도록 강력한 점검과 제어 장치를 만들어라. 문제가 있다면 확대되어 통제할 수 없게 되기 전에 재빨리 문제점을 파악하고 조처를 취할 수 있어야 한다.
과도한 레버리지, 자기 과신, 하석상대의 자금 조달  같은 것들은 충분한 래드 플래그가 되어 준다.


  - 던랩 식으로 밀어붙이는 방식과 속도감은 겉으로 보기에는 매우 뛰어난 위기관리능력 같지만, 이런 방식은 장기적으로는 기업의 생존과 발전에 치명적인 장애물이 된다. 해고되지 않고 살아남은 직원조차 사기가 떨어지고, 만회는 어려울 수 있다. 경영층이 빠른 결과를 바라는 조급증을 보일 때에는 그 같은 행동의 이면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 던랩은 스코트 제지 때처럼 선빔의 경우 치고 빠지는 작전을 구사하려 했지만, 그의 계획에 차질이 생겨 그것이 발목을 잡는 역할을 했다. 너무 띄워 놓은 기업가치 때문에 인수자를 찾을 수 없었다. 선빔을 팔 수 없게 되자 투자가들은 던랩을 잡고 늘어졌다. 이는 그 자신 ‘치고 빠지는 상황’을 맹신한 결과이다. 럭비공처럼 목표에는 이르렀으나, 목적에는 이르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한 결과였다. 경영이란 이처럼 불확실성과의 대면이다. 가장 긍정적 요소로 볼 수 있는 부분이 던랩으로서는 래드 플래그가 되리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 너무 무리한 구조조정을 한 결과, 기업의 미래를 위해 붙잡아 두어야 할 꼭 필요한 인재들과 사업부서가 잘려나갔다. 이 같은 현상은 IMF 시기 한국 기업들의 구조조정 모습과 많이 닮아 있다. 한국 경제는 그 후 경기 상승기에 인재와 시설 부족으로 성장의 기회를 놓치게 되었다. 바람직한 구조조정 방식이 아니었던 셈이다.


  - 던랩 스코트 제지의 성공으로 자신감에 넘쳐 있던 탓에 선빔의 경우에도 같은 방식이 먹힐 거라고 확신했다. 그는 상황이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고, 스코트 제지에서 사용했던 전략을 그대로 선빔에 적용한 끝에 실패했다. 융통성이나 상황에 대한 조사 없이 자신이 외우고 있는 공식을 그대로 적용한 셈이다.


  - 던랩은 선빔에서 납득되지 않는 기업 인수를 세 차례 결정했고, 그 때문에 회사는 수십억 달러의 빚더미에 앉게 되었다. 돈을 계속 잃고 있는 콜먼을 22억 달러에 인수한 것은 회생 가능성이 있는 선빔을 완전 좌초시켜 버린 결정적인 실수였다. 이 같은 결정은 상세한 조사 없이 개인적 충동에 의해 결정을 내린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런 경영자가 어느 시기 일정한 면에서 숫자상 좋은 지표를 보일 때 열광하는 투자자들의 행동도 비난받아 마땅하다.


  - 던랩은 기업을 포장하기 위해 분식회계를 했다. 갑작스런 실적 상승 등 의심받을 일이 있었지만, 누구도 나서지 않았다. 이는 결국 선빔의 파산으로 이어졌다. 경영층의 도덕성 부재는 투명기업을 강조하는 오늘날 경영에서 가장 작으면서도 가장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 요소임에 틀림없다. 요는 충분한 내부 제어장치이다.




래드 플래그 제9법칙: 문제 외연화의 법칙

-자신을 속일 수는 있어도 세상 모두를 다, 계속해서 다 속일 수는 없다. 한 가지 성공의 방식이 모든 면에서 지속적으로 맞는다면 경영환경은 고정되어 있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이다. 현실 자체가 문제가 될 수 있지만, 현실을 대하는 자신이 문제인 경우도 허다하다. 스스로 지닌 문제가 어느 상황에서는 표출되지 않다가, 다른 상황에서 드러나기도 한다. 내내된 문제가 마침내 외연화 과정을 거치게 되는 것이다. 경영자, 관리자는 물론 개인적으로도 자신의 본질적 문제를 철저히 규명해 나가야 한다. 이 점을 모른다면 끝내 래드 플래그는 악몽이 되고 말 것이다.


<징후 예측과 위험 발생에 효과적으로 대처하는 방법들 >

-오늘날 기업은 윤리의식을 크게 강조하고 있다. 협의의 윤리는 부정행위를 금지하는 것이지만, 보다 광의적으로 해석하면 사업의 안정성과 성장성을 동시에 견인해 내지 못하는 것이다. 위기는 어느 한 측면으로 편향되는데서 나타난다. 위기의 본질을 알고, 이에 대처하는 감식안을 키우자.


   -도덕적 해이 또는 불감증은 기업을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지게 할 수 있다. 특히나 영향력이 큰 상층부의 도덕성 부재는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온다. 오늘날 한국기업의 주요 문제 중 하나는 소유주, 경영층의 문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직을 살리는 도덕적으로 무장된 투명한 리더십이 절실히 요구되는 이유이다.


   -개인적으로 과거의 성공사례에 집중하다보면 착시현상에 빠지게 된다. 다른 환경에서도 관성의 법칙처럼 예전의 잣대를 들이대는 게 바로 이런 것이다. 조직의 위기는 부적응이나, 일탈로 나타나기도 한다. 성공습관은 간직하되, 그 방식은 달리하자. 그것이 개인적으로도 지속적으로 자기의 성공을 관리해 나가는 방법이 될 수 있다.   



<참고자료>

로버트 F. 하틀리, 『피말리는 마케팅 전쟁 이야기(Marketing is...War)』, 아이엔컴퍼니,

 2004.

『The New Scott 1994 Annual Report』, 5쪽.

 Joseph Weber and Paula Dwyer, 「Scot rolls Out a Risky Strategy」, 『Business Week』, 22 May

  1995. 

 Martha Brannigan,「Sunbeam Audit to Repudiate '97 Turnaround」, 『Wall Street Journal』, 20        October 1998.

 「Audit Shows Sunbeam's Turnaround Really a Bust」, 『Cleveland Plain Dealer』, 21 October 1998.

 Martha Brannigan, 「Sunbeam's Slashes Its 1997 Earnings in Restatement」, 『Wall Street

   Journal』, 21 October 1998.

 Jill Barton, 「Sunbeam's 'Chain Saw Al', to Pay $500,000 Judgment」, 『Associated Press as

   reported in Cleveland Plain Dealer』,  5 September 2002.

 앨버트 던랩, 밥 안델만, 『던랩의 기업수술』, 1999. FKI미디어.


ⓒ전경일, <레드 플래그>



제8법칙: ‘깨뜨리지 않고도 속을 보는’ 투시透視의 법칙

-위험의 싹은 외부에서 오는 것 같지만, 실은 내부에서 은밀히 자라난다. 어떤 때에는 독버섯처럼 급속히 자라나며 조직 전체의 시스템을 마비시켜 버린다. 이런 위험요인은 처음에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속은 곪아가고 있는 중이라는 걸 알게 한다. 그것이 표면에 드러났을 때에는 이미 늦으며 손 쓸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버린다. 베어링스의 파산은 그 적절한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닉 리슨(Nicholas Leeson)이라는 젊은 딜러는 누구보다도 열심히 일했다. 놀라운 성과에 대한 보상으로 그와 그의 아내 리사는 세상에서 모든 걸 얻은 것 같았다. 엄청난 급여와 보너스를 받았으며, 주말에는 이국적인 장소나 아파트에서 파티를 즐겼다. 적어도 창업한지 232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이 유명한 영국은행이 파산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운명의 사건이 터지기 전날 밤, 리슨은 자신의 책상위에 손으로 "I’m Sorry."라고 쓰적여 놓고는 노트 따위를 챙겼다. 그러고는 밤 11시 30분 싱가폴을 떠났다. 그는 말레시아 쿠알라룸프에서 200마일 떨어진 호텔에 숙소를 정했다. 다음날 아침 7시 30분, 닉의 아내 리사는 급히 택시에 올라타 공항으로 향했다. 아침에 닉이 깨어났을 때, 세상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리슨은 워포드에서 미장 일을 하는 노동자 아버지 밑에서 태어났다. 그는 마지막 수학 시험에서 낙방하고, 학교를 떠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80년대 초 로열뱅크인 코우트스(Coutts)에 취직할 수 있었다. 그의 인생에서 바야흐로 은행 경력이 시작된 것이다. 1989년, 베어링스에 입사한 리슨이 처음 맡게 된 일은 결재업무였다. 그는 상급자들에게 재빨리 인상을 심어 주어 거래업무를 맡게 된다. 이것은 그가 보다 중요한 일에 관여하게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이 무렵 베어링스는 아시아 선물시장에 진출하려는 목적으로 싱가폴에 자회사인 베어링스 선물회사(Baring Futures, Singapore)를 설립하게 된다. 이때 이 불행을 몰고 온 사나이는 선물을 담당하는 매니저로 합류하게 된다.

그는 1992년부터는 인도네시아 지사를 설립하고 일본의 내부사기 혐의 조사에 참여하는 등 일련의 업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면서 조직에서 인정받기 시작한다. 그 무렵, 베어링스가 싱가폴에서의 입지강화를 위해 베어링스 선물회사를 설립하자, 리슨은 일본 오사카거래소(OSE)와 싱가포르거래소(SIMEX)간 니케이(Niklei) 225지수선물의 차익거래를 담당하면서 1992년 3월부터 이곳에서 일하게 된다. 그가 맡게 된 차익거래란 두 거래소 중 지수가 싼 곳에서 매입하고 동시에 비싼 곳에 매도하여 위험 없이 차익을 얻고자 하는 거래전략이다. 선물 거래를 통하여 수익을 올리자 리슨은 머잖아 베어링스 싱가폴 지사의 이사로 승진한다.

문제의 발단은 여기서부터 였다. 통상 금융회사들은 거래과정에서 발생하는 경미한 실수를 처리하기 위해 가공 계좌를 두는데, 베어링스의 ‘계좌 99905’가 그것이었다. 1992년 여름, 런던에 있는 베어링스 본사는 리슨에게 별도의 에러 계좌를 개설하여 그간의 작은 실수들을 자체적으로 정리하도록 지시한다. 이는 본사의 업무 편의를 위한 것이었다. ‘계좌 88888’는 이렇게 해서 생겨난다. 그로부터 몇 주 뒤, 본사는 다시 본래 사용하던 ‘계좌 99905’를 통해 본사와 연락하라고 지시하는데, 이때 가장 치명적인 실수가 발생한다. 리슨이 이미 개설한 ‘계좌 88888’가 폐기되지 않고 남게 된 것이다. 그 계좌가 훗날 베어링스를 좌초시켜버리는 주요 역할을 담당하게 되는 것이다.

문제는 닉 리슨이 거느리는 팀이 저지른 사소한 거래실수에서 시작되었다. 1992년 7월 17일, 리슨의 부하직원인 짐 왕이라는 딜러가 니케이지수 선물을 매입하겠다는 고객의 요구를 매도로 잘못 입력하는 바람에 2만 파운드의 손실을 냈다. 손실액이 꽤 컸던 탓에 리슨은 이를 ‘88888 계좌’에 감춘다. 다시 1993년 1월에는 조지 서가 800만 파운드의 손실은 냈다. 이번에는 이를 본사에 보고하면 담당직원은 물론이고, 리슨 자신도 자리에서 물러나야할 판이었다. 이제 본격적으로 리슨은 자신이 만든 ‘계좌 88888’을 보다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한다. 문제가 점점 커져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이익이 나면 이를 정식계좌에 등록하여 보고했지만, 손실이 난 경우에는 정식계좌에서 빼내 ‘계좌 88888’에 감추어 두었다. 이런 식으로 처리하게 되니까 리슨은 항상 이익을 낸 것으로 되어 있었다. 당연히 뛰어난 실적으로 그는 회사 내에서 주목받는 기린아로 등장한다. 선물거래는 포지션과 시장가격의 움직임에 따라 이익이 나거나 손해를 보게 된다. 리슨은 초기의 작은 손실을 만회하기 위해 차익거래뿐만 아니라, 시장가격의 움직임 방향에 배팅을 거는 투기거래에 나선다.

손실은 점점 커져갔다. 1992년에 200만 파운드였던 것이 1993년에는 2,300만파운드로 늘어났다. 선물거래는 주식이나 채권거래와 달리 이익이나 손실이 거래만기에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매일매일 시사평가에 의해 이루어진다. 손실에 대비해 초기 증거금을 납부하지만, 그 이상의 손실이 발생하면 해당금액을 거래소에 추가로 납부하게 되어 있다(Margin call). 리슨은 선물거래에서 계속된 손실로 인해 상당한 금액의 마진콜을 납부해야만 했다.

처음에 리슨은 영국 본사에 적당히 둘러대어 자금을 융통했다. 그러나 규모가 점점 커지자 다른 방법을 모색하기로 했는데, 그것은 니케이 225 주가지수의 스트래들(straddle)을 매도하는 것이었다. 스트래들은 동일한 행사가격을 갖는 콜옵션과 풋옵션 1개씩을 합친 것이다. 따라서 주가가 행사가격 중심에서 큰 변화를 보이지 않으면 옵션 프리미엄으로 인해 이익이 나지만, 급등 또는 급락할 경우에는 무한대의 손실이 발생하는 것이다.


리슨이 스트래들을 매도한 것은 향후 주가 변동폭이 작을 것으로 예측하고 이익을 내려는 것보다 선물거래의 마진콜에 필요한 자금동원이 목적이었다. 스트래들 매도는 콜과 풋옵션의 프리미엄 수입 두 가지를 한꺼번에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사실 한때, 리슨은 스트래들 매도로 큰 돈을 벌어 1993년 7월에는 600만 파운드에 달하는 ‘88888 계좌’의 손실액을 모두 메우고도 남았다. 그런데 그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당시 옵션시장은 높은 변동성으로 프리미엄이 기초자산가격의 5퍼센트라는 높은 수준을 유지되고 있었다. 리슨은 기초자산의 가격등락이 곧 안정될 것으로 예측했다. 하지만 시장은 리슨의 희망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니케이 225 지수가 크게 하락해 선물매입과 스트래들 매도에서 누적 손실이 1994년에 2,800만 파운드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런 손실은 모두‘계좌 88888’에 감추어졌다.

이런 손실에도 불구하고 가공거래를 통해 리슨은 계속 훌륭한 실적을 내는 것으로 평가되었다. 리슨은 1994년 중 2,850만 파운드의 이익을 낸 것으로 보고하였고, 그 댓가로 15만 달러의 연봉과 함께 100만 달러의 보너스를 받았다. 리슨의 상사와 동료들도 추가적인 보상을 받았다.

1994년 7월 ‘88888 계좌’의 손실액은 다시 5000만 파운드가 되었고, 그는 내부감사에서 발각되지 않도록 베이링스 은행이 시티은행에 예치한 5000만 파운드의 현금을 ‘88888 계좌’에 입금시키고, 시티은행 게좌를 위조했다. 리슨의 이런 도박에 대해 그는 자신이 고객들의 요구에 따라 거래를 해나가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설명했고, 베어링스 은행은 그의 말만 믿고는 그 거래에 엄청난 리스크가 놓여져 있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또한 1994년 2월 첫주에 리슨이 1000만 달러를 벌어들이자 베어링스 은행의 경영진은 일제히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리슨이 앞으로도 매주 이런 식으로 실적을 올려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1995년 1월 일본에서는 고베지진이 일어났다. 그에 따라 니케이 225 지수는 다시 하락했다. 당연히 손실이 늘어났다. 이 때 리슨은 이제까지의 손해를 일시에 회복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큰 모험을 했다. 고베지진 복구를 위한 재정지출 증가로 일본경제가 회복되고 주가도 상승할 것이라는 전망을 근거로 그간의 누적손실을 일시에 만회하기 위하여 주가지수선물을 대량 매입하였다. 한편으로는 계속되는 증거금 납입요구(Margin call)에 맞추기 위해 스트래들을 추가 매도했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주가지수는 하락을 거듭한 결과 1995년 1~2월 중 15퍼센트 이상 하락하여, 리슨은 주가지수선물거래에서만 3억 파운드의 손실을 내게 된다. 더불어 스트래들 추가 매도에 따른 손실 1억 2천만 파운드, 일본국채 선물거래 손실 1억 9천만파운드로 합계 6억 1천만파운드라는 막대한 손실이 발생했다. 마지막 순간, 베어링스의 총손실 금액은 13억 달러에 달한 것으로 보고되었다. 결국 베어링스의 주주들은 10억 달러에 달하는 회사 자기 자본의 시장가치가 완전 소멸되어 사실상 빈털털이가 되었으며, 채권자들은 채권액의 20분의 1만큼만을 겨우 건질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 엄청난 도박에 운명을 건 리슨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는 도피 중 프랑크프루트에서 체포되어 싱가폴로 송환되었다. 체포 후 리슨의 변호인은 런던에 있는 리슨의 상사가 리슨의 행동을 제어하지 못한 것을 비난했다. 그리고 자신은 개인적인 이득을 취한 게 없다고 항변했다. 그는 보고해태로 6년, 문서위조 및 허위로 6개월의 총6년6개월의 징역형을 언도받고 복역하던 중 4년이 지난 2001년에 결장암 진단을 받고 감옥에서 풀려나왔다. 그는 복역 중이던 감옥에서 자신의 자서전 <Rogue Trader(악덕거래인)>을 펴냈는데, 이 책은 훗날 이완 맥그리거가 주연한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그의 아내 리사는 그가 싱가폴 감옥에 복역 중 그를 정기적으로 만나고자 항공사 스튜디어스로 취직했다. 하지만 나중에 리슨이 일본 게이샤 여성과 불륜을 피우자 더는 못 참고 이혼했다. 감옥에서 나온 후 리슨은 암에 걸렸지만, 미들 썩스(Middlesex) 대학에서 심리학을 공부했다. 그의 책 <Rogue Trader>이 영화화되고 나서 그는 얼마만큼의 돈을 손에 쥘 수 있게 되었다. 그는 현재 아일랜드 갈웨이 축구클럽의 단장이다. ‘악마의 손’이라는 과거의 악명 덕분에 투자위험을 분석·경고하는 고액강사로 변신해 투자사에 위험성 분석에 관한 강의를 종종하곤 하는데 회당 강연료가 9,800달러(약 910만원)에 이르는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지금도 온라인 거래회사를 통해 외환거래를 하고 있다.

베어링스 파산 사건은 헤지 없는 거래의 위험성에 대해 충분히 경종을 울린 사례였다. 리슨은 주가지수선물거래에서 투기적 포지션을 취하면서 헤징을 하지 않았다. 또한 손실규모가 늘면서 이를 단번에 만회하기 위해 포지션 규모를 늘려가면서도 여전히 헤징을 무시했다. 베어링스의 파산은 높은 수익률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높은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기본 원리를 무시한 결과였다.


또 다른 교훈으로는 무엇이 있을까? 내부통제시스템 상의 문제점을 들 수 있다. 닉 리슨은 본인이 금융거래를 하고, 이에 대한 장부정리까지 함으로써 사실상 대규모 부정을 감출 수 있었다. 또한 당시 베어링스 선물회사의 조직체계는 매트릭스 구조로 되어 있어서, 리슨은 지역본부장과 담당 금융거래팀장에게 교차 보고하고 있었다. 파생금융상품이라는 전문화된 거래에 대해 리슨의 상사들은 자신이 아닌 다른 편에서 챙기고 있겠지 하는 안이한 자세를 보였다. 결국 리슨은 아무런 내부통제를 받지 않고 일을 벌일 수 있었던 셈이다.


한편, 리슨은 거래기간 내내 손실규모를 감춘 채 허위로 이익이 나는 것처럼 보고했기 때문에 상위감독자들이 감독을 소홀히 하는 요인을 제공했다. 남들보다 더 높은 성과를 보이는 거래담당자는 능력이 뛰어난 경우도 있으나, 남들보다 더 큰 위험을 감내한 결과일 수도 있다. 따라서 상위감독자는 리슨과 같이 성공적으로 보이는 거래담당자들에 대해서 오히려 더 면밀한 감독을 했어야 했다.


통제시스템의 결핍은 리슨의 포지션 관리에서도 잘 드러난다. 최후 순간 베어링스선물이 보유한 니케이 225 선물계약수는 43,000건으로 금액으로는 70억 달러에 달했다. 이는 SIMEX의 미결제 잔고의 30퍼센트에 달하는 엄청난 규모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슨의 과도한 포지션 보유에 대해 제동을 걸 수 있는 시스템은 없었다. 위험관리의 핵심은 포지션에 대한 위험을 측정하고 적정 위험수준과 비교하여 위험을 줄이거나 늘리는 것이다. 그러나 베어링스는 위험을 측정하지도 않았고, 설령 측정했다고 할지라도 포지션을 통제할 내부시스템이 없었다.


결과론적인 얘기지만, 베어링스는 파산을 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온갖 래드 플래그는 무시되고 교묘하게 뒤얽혔다. 그 예로, 1995년 2월 8일, 베어링스 런던 본사의 한 고위 임원은 직접 싱가폴로 날아가서 리슨과 그가 주도하는 팀의 거래에 대한 내부감사를 실시했다. 또 2월 20일에는 도쿄 지사의 책임자가 리슨에게 니케이지수 선물 보유량을 줄이라고 충고했다. 1992년 3월 베어링스 내부문건에서도 다음과 같이 지술돼 있다.

“현재 재앙이 초래될 수 있는 위험한 상황에 처해있다. 완전한 규정이 수립되어 있지 않아 재정적인 손실은 물론 고객들의 신뢰를 잃는 결과가 초래될 수 있다.”

그러나 이 경고는 이상하게도 경영진에게 심각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1995년 1월 11일에는 싱가폴 선물거래소의 회계팀에서 베어링스에 서신을 보내 리슨이 ‘88888’계좌를 보유하고 있는 것에 의문을 제기했다. 같은 시기 리슨이 매일 같이 런던 본사에 추가증거금 지불 명목으로 1000만 파운드가 넘는 금액을 요구했음에도 불구하고, 베어링스 본사에서는 이 점에 대해 추호의 의심도 품지 않았다. 게다가 싱가폴 베어링스선물 회사의 사장도 그를 전적으로 신임하고 그에 대한 모든 감사를 접었다. 리슨은 시티은행의 계좌에 5000만 파운드가 있는 것처럼 위조했지만, 누구도 직접 확인해 보지는 않았다. 모든 징후가 붕괴로 몰고 가는 조건이 형성되고 있었던 것이다.


베어링스 사건 이전에도 국제 금융시장에서 터진 잇따른 금융 사고들로 위험 관리에 대한 주의가 지속적으로 환기되어 왔다. 그 예로
1993년 선진국의 은행가, 금융가, 학계 인사로 구성된 ‘G-30’은 관련 사고들의 후유증에도 불구하고 파생금융상품의 활용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 시가 기준으로 포지션의 가치를 평가하고 적극적인 위험관리를 할 것을 주창하였다. 이와 유사한 주장은 이미 Moody's, S&P 등 신용평가회사 및 ISDA(International Swap and Derivatives Association)에 의해서도 발표된 바 있다. 1994년 8월 파생금융상품 관련 공공정책을 다루는 DPG(Derivatives Policy Group)는 민간부문의 거래에 특별한 규제를 하지 않는 대신, 자체적으로 위험측정치를 활용한 내부통제제도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금융사고경험을 통한 위험관리 중요성의 교훈은 1994년 10월 J.P. Morgan의 Riskmetrics 발표와 더불어 극대화되었다. Riskmetrics는 처음에는 14개국 300개 금융상품의 분산 추정자료를 제공함으로써 이들에 대한 위험을 측정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 같은 모든 조치와 레드 플래그가 베어링스에서는 간과되고, 무시되었던 것이다.

한 은행의 파산이 아닌, 국가적으로 파산 위기의 경험이 우리에게 있다. 우리에게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온 1997년의 IMF 관리체제는 분명 위험관리의 소홀로 빚어진 쓰라린 교훈이었다. 그 당시 침몰하는 한국경제에서 베어링스의 닉 리슨과 같은 역할을 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우리 중 누군가가 막대한 성과를 보이고 있을 때, 군중은 위험을 인지하거나, 심지어는 의도적으로 인지하려들지 않는다. 또한 위험이 가중될 때 혼탁한 흙탕물 속에서 이익을 취하는 사람은 금방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IMF 10년 만에 그
윤곽을 알고자 한다면, 전모를 파악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베어링스 파산은 교훈을 남겼으나, 한국의 IMF는 금반지를 내다 판 기억만 남긴 채 묻혀버린 건 아닐까?



<베어링스 금융사고의 교훈>


 베어링스는 1862년 영국에서 설립돼 233년의 유구한 역사와 명성을 지닌 세계 유수의 금융회사였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을 고객으로 모시고 있었던 이 영국 최고의 은행은 닉 리슨이라는 28세의 젊은 직원으로 인해 하루 아침에 망하고, 1995년 2월 네덜란드의 ING(Internationale Netherisnden Groep)에 단돈 1파운드에 구제 합병되고 만다. 베어링스 사건은 한 직원으로 인해 거대한 회사가 망했다는 점에서 전 세계적으로 큰 충격을 안겨 다 주었다. 나아가 금융위험관리 측면에서 전 세계적으로 파생상품거래의 위험성에 대해 불을 지핀 계기가 되었다. 최근 수년간 베어링스 그룹의 도산과 같은 주요한 금융 사고는 주로 운영리스크 관리 실패에서 비롯된다. 이 같은 금융사고의 원인을 통해 살펴볼 수 있는 기업의 래드 플래그와 대응책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베어링스 증권의 닉 리슨은 파생상품 담당 트레이더인 동시에 자신의 실적을 조작할 수 있는 계리담당자 역할까지 수행했다. 베어링스 내부에는 이런 문제를 통제할 내부관리시스템이 없었다. 이는 기업이 조직 관리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는 부분에 집중해 시스템을 개선 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문제가 터지고 나서 시스템의 한계를 발견하는 것은 위험을 방조 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경영진은 효과적인 내부 회계관리제도를 구축하고 각 업무프로세스 수준에서의 통제활동을 명확히 수립하고, 일상 업무의 일부로서 통제활동을 수행해야 한다. 직원관리, 조직 관리에서 누수가 생기면 기업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흘러가 버리게 된다.


-경영진은 관련 정보가 효과적으로 임직원에게 전달될 수 있도록 하향의 의사소통경로와 함께 상향의 의사소통경로를 구축하여야 한다. 특히, 관련 법규나 행동강령의 위반에 대한 내부고발자 보호제도 및 악의의 내부 고발자에 대한 징계제도도 균형 있게 마련해 두어야 한다. 베어링스는 이 같은 내부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은 까닭에 그 피해가 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다. 




래드 플래그 제8법칙: 사무실 내 독버섯의 법칙


-어떤 조직이든 관리감독을 소홀히 했을 때 위험요인은 서서히 커지며 끝내 걷잡을 수 없을 상태로 조직을 몰고 간다.
이런 문제를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가?


<징후 예측과 위험 발생에 효과적으로 대처하는 방법들 >

 
-기업에서 내부통제 시스템의 결여, 경영진의 직원관리감독의 해태, 회사 규칙을 강제하지 못하는 것, 거래부서와 관리부서의 분리를 통한 효과적인 감시ㆍ감독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는 것은 오늘날 기업 곳곳에 독버섯처럼 자라고 있다. 이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일을 맡는 사람과 내부시스템을 보다 건전하게 유지하는 것이다. 래드 플래그를 발동할 시스템을 갖추어 놓지 않은 채 직원 개개인을 탓하는 것은 계기판 없이 운행하는 차량과 다를 바 없다. 경영진은 위기관리를 위해 상호견제와 점검의 장치를 마련해 두어야 한다.

  
-경영진이 수익률 제고에만 관심을 뒀지 위험관리에는 소홀하다면 이는 의심해 볼 여지가 있다. 이럴 때에는 위험의 징후가 나타나더라도 사전 대응은 미흡해 진다. 통계에 의하면, 많은 경영자들이 공장이나 건물이 화재위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보험에 드는 것을 내켜하지 않는다고 한다 .‘설마 ’‘그럴리 없다.’ ‘나한테는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와 같은 맹신이 위험을 증폭시키고 있다. 위험을 방치하는 것은 물론, 심지어는 종종 위험에 뛰어들고자 하는 자기 파괴적 행태를 보인다. 위험의 독버섯은 내부에서 더 완강이 자리잡고 있는 셈이다.


-조직 내 ‘무조건 잘나가는’ 직원이나, 갑작스런 실적향상 또는 실적 하락, 고객의 특이한 움직임 같은 요인들은 충분한 래드 플래그가 된다. 이 같은 점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안이하게 대처했다가는 막을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작은 래드 플래그라도 세심히 관찰하면 위험은 그 만큼 줄어든다.


-자기에 대한 과도한 확신이나, 업무 추진시 멈춰야 할 때를 모른다면, 이는 결정적인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경영자나 직원 개개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자기 통제력을 갖추는 것이다. 절제나 통제 능력이 부족해 문제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고 간다면 기업이나 개인이나 마찬가지로 파산에 이르게 된다. 조직은 직원들에게 보다 정교한 통제역량을 갖추도록 교육 훈련에 더 큰 관심과 투자를 기울여야 한다.


 <참고자료>

 오세경, 김진호, 이건호, 『위험관리론』, 경문사, 1999.

 왕중추, 『작지만 강력한 디테일의 힘』, 올림, 2005

 닉 리슨, 『금융가의 불한당(원제: Rogue Trader)』, 시공사, 1997.

 김규영, 양채열 외, 『금융구제-이유, 방법, 방향』, 학현사, 2002.

 『TIME』, March, 13, 1995.

 「New life for Leeson?」,『BBC NEWS』, Monday, 25 June, 2001.


ⓒ전경일, <레드 플래그>




 제6법칙: 금단(禁斷) 무시의 법칙

  
-일어날 사고는 반드시 일어 나겠끔 되어 있다. 사고의 속성은 다름 아닌, 반드시 지켜져야 할 금단(禁斷)의 원칙이 무참히 깨져 버리는 순간 발생한다.


1977년 11월 11일 밤 9시 15분. 올림픽 출전권을 다투는 한국과 이란 축구대표팀간의 경기를 보고 있던 대다수 국민들은 TV 화면을 흘러가는 자막에 순간,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같은 시간, 1970년대를 풍미한 22살의 인기절정 가수 하춘하 씨는 이주일 씨와 함께 공연 중이던 무너진 이리역 부근 삼남극장의 담벽을 타넘고 있었다. 그들은 그 순간, 전쟁이 난 줄 알았다. 폭발음 이후, 이리역 근방에는 피투성이의 환자들이 즐비했고, 거리는 아비규환 그 자체였다.

불과 몇 분 전만 하더라도 500여명의 관객 앞에서 오프닝으로 히트곡을 10여분 부르고 다음 공연을 위해 옷을 갈아입으려 분장실로 들어간 하씨였다. 11월의 쌀쌀한 날씨에 하씨는 난로를 쬐고 있었고, 전속 사회자였던 이주일씨는 무대에 나가기 위해 거울을 보며 나비넥타이를 만지고 있었다. 그는 “뭔가 보여주겠습니다!”라며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그려보였다. 그 순간, 쾅 하는 폭발음과 함께 극장 지붕이 무너져 내렸다. 

 
초대형 폭발음은 15초 간격으로 세 번이나 이어졌고, 현장은 곧 아수라장이 되었다. 폭발음이 들리더니 순간적으로 전기가 나가고, 벽이 무너지고 유리파편이 튀는 등 역 주변의 집은 완파에 가까운 상태가 되었다. 세워 놓은 차들도 뭉그려지긴 마찬가지였다. 집이 무너진 사람들은 흙더미속에 갇혀 구조대원들의 도움을 기다려야만 했다. 

 
이리역을 중심으로 반경 500미터 이내의 가옥 등 건물들은 완전히 파괴되었고, 반경 1킬로미터 내의 가옥은 반파, 반경 4킬로미터 이내의 가옥은 창문이 떨어져 나가나갔다. 반경 8 킬로미터 이내에는 유리창까지 파손되었다. 판자집이 밀집해 있던 모현동의 경우에는 60가구의 부락 하나가 송두리째 날아가 버릴 정도였다.

















(화약열차가 서 있던 4번선 일대는 지름 30여 미터에 5층 건물 높이로 패어 흡사 분화구인양 사고발생 12시간이 지난 후에도 열기와 연기를 내뿜고 있었고 종잇장처럼 찌그러진 열차와 휘어진 철로가 무참하게 나뒹굴었다. 이리역을 중심으로 반경 500미터 이내의 가옥 등 건물은 완파되었고, 반경 1킬로미터 이내의 가옥은 반파, 반경 4킬로미터 이내의 가옥은 창문이 떨어져 나갔으며 반경 8킬로미터 이내의 유리창까지 파손됐다. 특히, 서민 주거 밀집지역인 창인동의 경우 거의 쑥대밭이 되었다. 판자집이 밀집해 있던 모현동의 경우도 60가구의 부락 하나가 송두리째 날아가 버릴 정도였다. 모든 피해는 당시 폭발 위력과 후폭풍에 의한 것이었다.) (참고: 『위험관리 100호 특집 大韓民國災難47年』)


















그 당시 이리역 주변의 모현동은 마살매 부락이라고 불렸는데, 모현동과 창인동 지역에는 소매치기도 많았고, 노동자와 영세민이 많이 사는 동네였으며 윤락가도 있었다. 전부 어렵게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이리역 건물의 피해는 말할 것도 없었다. 천정과 벽이 무너져 내렸으며 객화차 사무소와 보선사무소는 기둥과 뼈대만 남고, 역사 구내에 있던 객화차차량 117량이 파괴되거나 탈선해 넘어졌고, 선로는 휘어지고 모두 1천6백50미터가 파손됐다. 모든 피해는 당시 폭발 위력과 후폭풍에 의한 것이었다. 당시 폭발력이 얼마나 셌던지 현장에서 700미터 떨어진 곳에까지 화차 상판이 날아올 정도였다.

사고 후 최종 집계된 자료를 살펴보면, 사망이 59명, 사상자가 1,400명, 재산피해액이 61억원, 이재민이 7,500여명, 건물피해가 9,539동에서 발생했다. 이재민 수는 1천6백74세대 7천8백73명에 달했다. 사망자 중에는 주민들 외에도 근무 중이던 철도 공무원들이 16명이나 포함되어 있었다. 당시 피해규모는 우리나라 폭발사고 중 가장 큰 규모였다. 한국전쟁 말고 폭발사고로는 당시까지 10명이상의 사망자를 낸 사고가 없었기 때문이다. 사망자만 59명이었으니 엄청난 사고였음에 틀림없다. 이후로는 각종 폭발이나 화재, 붕괴 등 각종 안전사고로 수십 명에서 100명 이상에까지 이르는 사망자를 내기도 했지만, 당시에는 그야말로 사상 최대의 참사였다.

당시 이리시는 인구 13만의 조용한 도시였다. 이 소도시는 폭발음과 함께 한순간 암흑과 공포, 아비규환의 생지옥으로 변했다. 폭발의 진원지는 인천에 있던 한국화약에서 민수용 화약 24.810톤을 싣고 광주로 가기 위해 하행선에 대기 중이던 대전기관차사무소 소속 제1052 화물 열차가 이리역 구내 입환(入換) 4번선 철로에서 폭발하면서 벌어진 것이었다. 이 열차는 영등포역에서 하룻밤을 대기한 뒤 10일 아침 9시 26분 다시 영등포를 출발, 이리역에 도착했다. 이리역에 도착한 것은 밤 11시 31분이었으며, 목적지인 광주로 출발할 예정으로 사고 지점인 4번 입환 대기선에 머물고 있었다. 이때 열차에는 다이너마이트 1천139상자, 초산 암모니아 200개, 초육폭약 100상자(2톤), 도화선 50개(1톤) 등 도합 30.28톤이 적재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 초대형 사고의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어처구니없게도 역구내에 정차 중이던 화약열차가 호송원의 부주의로 인한 것이었다. 누가 봐도 전형적인 인재(人災)였던 셈이다. 그렇다면 그날 이리역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당시 수사를 맡았던 당국의 발표에 따르면, 한국화약공업주식회사(현재의 한화)의 호송원 신무일(당시 36)씨가 술을 마시고 화차 속에서 양초에 불을 붙이고 잠든 사이 불이 마분지를 타고 화약상자에 옮겨 붙으면서 대폭발로 이어졌다고 한다. 호송원 신무일씨는 수사과정에서 “인천을 출발해 이리까지 오는데도 무려 36시간이나 걸렸고, 이리역에 도착해서도 화차배정을 받지 못해 하루 동안 역구내에 대기하고 있어 화가 나서 술을 마셨다”고 진술했다. 호송원 신무일 씨는 화약류의 직송원칙을 무시한 채 수송을 지연시키고 있는 이리역 측에 항의를 했으나 묵살되고 말았다고 진술했다. 화차 배정을 받지 못해 하루를 더 기다려야 했고, 화가 나 술을 마신 채 촛불을 켜고 잠들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속내를 헤아리는 직원은 아무도 없었다. 이제 사고가 일어나기 위한 조건들이 서서히 형성되어 가기 시작한 것이다.

신씨가 잠든 사이 양초로 인해 불이 붙은 침낭과 화약상자는 순식간에 걷잡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그러다 15초 간격으로 세 차례의 굉음과 함께 천지를 진동시켰다. 술을 마신 신씨는 화재가 나자 진화에 실패하고 도주했다가 붙잡혔다. 그는 당시 검은색 점퍼 차림이었다. 사고 직후 기자와의 대면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기자: 당신 혼자 화약 호송을 맡았나요?

신씨: 그렇소. 나는 이제까지 7년간 혼자서 화약 호송을 했지만 별다른 사고가 없었어요.

기자: 이 사실을 회사 측과 가족에게 알렸나요?

신씨: 알리지 못했죠. 지금쯤 내가 죽은 줄 알겁니다. 가족들이 보고 싶군요.


사고 후 신씨는 너무나 태연한 표정이었다.
당시 사고의 책임을 물어 한국화약(주) 신현기 사장을 비롯해 화약회사, 철도청, 대한통운 관계자 등 7명이 무더기로 사법처리를 받았다. 하지만 이들은 재판과정에서 대부분 형이 감량돼 중형을 선고받은 이는 없었다. 폭발사고의 주범인 신무일씨는 1978년 2월 10일 방화 및 폭발물 파열 치사상죄로 10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이리역 폭발사고는 어떤 징후를 드러내고 있었을까? 모든 징후가 종합적으로 드러난 것은  호송원 신무일 씨가 화차 내부에 촛불을 켜놓은 순간, 이미 정점으로 치닫고 있었다. 더구나 화차 내부에 초기에 번진 불을 끌만한 진화장구가 없었다는 것은 막을 수도 있었던 일을 막을 수 없는 극한의 상태에로까지 끌어 올려놓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사고가 일어나기 전, 제 조건들은 하나같이 어떤 하나의 원인이 다른 잠재원인들이 충분히 현실화될 수 있도록 작용하고 있다. 즉, 제 여건 간의 ‘앤드(and)조건’이 형성되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문제점에는 또 무엇이 있었을까? 우선, 한국화약(주)과 철도청의 허술한 수송과정과 호송 방법을 들 수 있다. 즉, 한국화약(주)측은 총포화약류단속법과 이에 따른 시행령 등의 규정을 무시한 채 다이너마이트 등 폭약과 뇌관 36상자를 실었으며, 또한 위험물 취급 무자격자를 열차에 동승하게 하는 과오를 범했다. 위험물질을 운반하면서도 호송원 1명이 책임졌다. 역 당국도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고 있었다. `목적지 직송원칙'을 어기고 구내에 장시간 대기시킨 것은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철도청은 철도운송규정 제46조 2항에 의거, "화약류는 되도록 도착정거장까지 직통하는 열차에 의하여 운송되어야 한다"는 규정을 무시한 채 화약열차를 역 구내에 22시간 이상이나 방치시켰으며, 또한 위험표지판의 부착이나 비상소화전 등의 방화시설을 제대로 갖추고 있지도 않았다. 위험물을 적재한 열차는 정해진 시간에 주기해야하는데 열차 통과가 선로 배정 이상으로 자꾸만 미뤄졌다. 규정이 무시되면서, 호송원 신씨는 짜증이 났고, 홧김에 술을 마시고 와서 촛불을 껴놓은 채 잠이 들었다가 폭발 사건이 벌어지게 된 것이라는 얘기다.

화약회사 호송원의 허술한 안전의식도 문제지만, 그보다는 화약류 등 위험물은 역 구내에 대기시키지 않고 곧바로 목적지로 통과시켜야 하는 직송원칙을 준수했더라면 이 같은 참사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기본적인 관리지침만 지켰어도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사고가 원칙 무시로 인해 벌어진 것이다. 이리역 폭발 이전에도 이 같은 원칙 무시, 시스템 작동상의 문제는 계속되어 왔을 것이다. 그러던 것이 이리역 폭발을 계기로 표면에 드러났을 뿐이다.

이 사건 이후 결과적으로 철도운송과 화약류 등 위험물은 운송 시스템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철도 위험물 수송원칙을 새로 보완하거나 점검하게 되었으며, 화약류 운반 열차가 역내에 진입하면 우선적으로 경찰에 신고하는 등 행동요령까지 만들어졌다. 그러나 그 후 이 시스템이 완전하게 정착된 것인지, 또 다른 문제는 없는지 등은 드러난 바 없다. 문제 자체가 문제를 먹어 버린 것인지, 여전히 불발인 채 남아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이를 위해서는 보다 정밀한 시스템에 대한 조사가 필요하다.

이리역 폭발 사고뿐만 아니라, 내부 시스템의 불작동으로 벌어진 사태는 그 후로도 지속적으로 나타났다. 삼풍백화점 붕괴, 성수대교 붕괴 등 원인을 내재한 사고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이는 두말할 나위 없이 사회 전반에 작동되어야 할 시스템이 작용되지 않은 결과였다. 이 사건에 대해 여느 사건과 동일하게 수사당국이나 언론은 사람들의 `안전 불감증'이 문제라고 규정하곤 하지만, 실은 문제는 거기에 있지 않다. 바로 시스템이 부재가 원인인 것이다. 

이리역 폭발 사건이 터지자 한국화약은 두 번에 걸쳐 사과문을 신문에 게재했다. 한번은 회사 이름으로, 다른 한번은 앞의 사과가 여론에 우호적으로 작용되지 않자 회장의 이름으로 내보낸 것이었다. 그런데 2차 사과문은 사고발생 80시간이 지나서야 발표된 것이었다. 1차와 2차의 사과문의 내용은 여러 면에서 차이를 보이는데, 1차 때에는 “깊은 사과”를 했던 것을 2차 때에는 “거듭 사죄”로 바뀌었다 그 외 1차 때에는 없던 ‘법적, 도의적 책임’, ‘피해 복구에 전력’ 등의 보다 구체적인 내용이 포함되었다. 내용을 보기만 해도 두 번 다 경황 중에 작성된 사과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1945년 일제가 남기고 간 적산(敵産)을 정경유착에 의해 정부로부터 헐값에 인수받아 성장해 온 이 회사는 전후복구로 사세를 키워 가다가 1959년 들어서서 다이너마이트를 생산하게 된다. 이 다이너마이트가 이 회사 성장의 배경이 되지만, 다른 한편 안전 불감의 이리역 폭발사건을 초래케 하는 원인이 되는 것이다.


<이리역 폭발사고의 교훈>
  사회학자 울리히 벡(Ulrich Beck)은 현대 사회를 ‘위험사회’로 규정하고 있다. 오늘날의 기업들은 ‘속도와 성장’을 중심으로 하는 사고로 모든 게 짜여 있어서 앞으로만 질주하다보니 미처 못본 곳을 돌아 볼 기회조차 놓치곤 한다. 조직 내 안전망의 부재는 비정상적인 사고가 빈발하겠금 유도하고 있으며, 기업들은 일상적 위기 하에 놓여 있다. 어느 기업과 사회 내부의 정상성과 비정상성의 두 면은 일반성의 양상이 되고 있다. 다시 말해, 상시적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것이다. 아무리 사소한 위기가 발생하더라도 잠재적으로는 더 큰 위기를 초래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우선, 위기관리(crisis 미터anage미터ent)를 위한 가이드라인을 설정해야 한다. 사전대비, 사전대응의 발상전환을 통해 위험관리체계를 마련하고, 현장 대응력을 높여야 한다. ‘예상치 못한 리스크를 최소화’하는 전략보다는 미약한 초기 징후를 찾아내, 원천적으로 위험의 진앙지를 제거하려는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또한 위기유형 및 빈도를 측정해 미래의 위기요소에 대처하는 능력을 키워나가야 한다. 기업들이 취하는 효율적인 위기관리 프로그램은 상시 실행단계에 있어야 한다.  “Naver say naver”의 자세로 임할 때, 기업은 지속가능경영을 꾀할 수 있다.


  이는 개인도 마찬가지이다.
급격한 경영환경 변화에 따라 개인에게 닥치는 위기도 돌발적으로 발생한다. 따라서 위험 자체를 순간순간 점검하는 상시적 점검 체계는 무엇보다 긴요하다. 특정 위험을 바라보는 관심을 높이고(리스크 인식risk perception), 위험의 근원을 찾고 열거하고 특성화 하는 과정(근원 구명source  identification)에 강도 높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그럴 때 어디서든 갑자기 날아오는 위험을 피할 수 있다.


  어느 기업이든 기업 활동에는 숙명적인 리스크가 도사리고 있다. 모든 상황이 통제 가능한 것도 아니다. 따라서 사후약방문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안전 전략, 즉 조기경보 시스템을 가동해야 한다. 시스템을 통해 선행 관리를 해야 하는 이유이다. 다이너마이트는 불변의 속성을 지니고 있다. 다름 아닌, 터질 것은 언제고 터진다는 것이다.


  이리역 폭발 사고는 시스템 결함과 사소한 부주의가 마이너스 상승작용을 일으킨 예의 하나에 해당된다. 조직 내 어디에 폭발 잠재성이 있는 위험요소가 있는지를 찾아내는 것은 위기관리를 통한 생존 모색이라는 점에서 결코 간과될 수 없을 것이다. 우리의 기업 내부에는 어떤 다이너마이트가 있는지 유심히 관찰해 보자.



래드 플래그 제6법칙: 위험 표면화의 법칙

- 어떤 사고든 사고가 일어날 수 있는 환경과 조건이 본질적으로 개선되지 않고는 사고는 언제고, 반드시 일어나게끔 되어 있다. 위험의 표면화 법칙은 위험 아래 감추어진 위험의 진앙지를 찾아내 미리 불을 꺼버리는 것이다.


<징후 예측과 위험 발생에 효과적으로 대처하는 방법들 >

-위험이 표면화되지 않았을 때에는 위험 요인이 전혀 없는 것인가? 현상적으로는 평화롭고 조용하기만 한 수심이 언제나 깊고, 그 속을 헤아리기 어렵다는 점을 알고 조직의 위험을 감지하는 능력을 배가하자. 만일, 겉으로만 드러나는 것이 본질로 오인된다면 그 기업은 문제가 표출되기 전에 이미 모든 것이 내면으론 엉망이 되어 있을 것이다.  


   -대형사고의 경우에는 피해규모가 엄청나고, 파급효과가 즉시 나타난다. 이런 위기를 폭발적 위기(exploding crisis)라 한다. 이런 폭발적 위기시에는 위기 자체에 대한 통제력을 확보할 수 없다. 이때 조직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피해의 확산을 최소한으로 줄이는 것이다. 


   -조직은 무엇을 보아야 하는가? 조직 내부의 만성적인 관례, 습관적으로 반복해 온 관성적인 업무, 커뮤니케이션의 부재, 무책임 주의, 직원 교육의 부재가 이리역 폭발사건을 일으킨 주요 원인이다. 우리가 늘상 하는 일이 조직의 위험을 키우고 있는 것은 아닌지 유심히 살펴보자. 


  -잠재된 위험은 어떤 식으로 드러나는가? 사소해 보이는 일 속에도 얼마든지 래드 플래그가 잠재되어 있다. 직원의 불만을 야기하는 업무 절차도 문제지만, 그 불만을 해소하려는 노력이 없다면, 한국화약 호송원처럼 술 마시고 촛불을 켜놓고 잠잘 수 없는 곳에서 그 같은 규정 위반을 하게 되는 것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요는 작은데에서 부터의 원칙 준수이다.  


  -위험이 몰고 오는 결과는 무엇인가? 한국사회 특유의 적당주의, 망각주의가 위험을 키우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위험을 대하는 태도도 결코 온정주의로는 대할 수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조직 내 이런 적당주의가 판치는 이유는 무엇인가? 토론해 보자.


  -위험은 왜 간과되는가? 위험이 무시되거나 위험을 키우는 태도들은 무엇인가? 위험이 표면화되는 것은 단독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하나의 원인은 연쇄적 원인과의 작용결과이며, 그것이 다음의 원인이 되어 재해를 일으키거나 확대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같은 원인과 결과는 복잡계처럼 서로 얽히고 섥혀 원인도 결과가 되고 결과가 다시 원인이 되기도 한다. 이처럼 초기에는 매우 작은 원인이 매개가 되어 대재앙으로 발전한다. 작은 원인을 제거할 때 기업은 궁극적으로 괴멸적 타격을 피할 수 있게 된다. 조직내 위험이 간과되는 이유들을 파악해 보자.


  -우리 회사는 숨은 위험요인을 찾아낼 역량이 있는가? 위험을 방지하는 조직 내부의 인적 자원에 대해 토의해 보자. 위기관리 의식에 대해서는 특정 조직, 부서만의 책임이 아닌, 누구나가 안전관리 책임자라는 의식을 갖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직원들이 위험에 대해 간과하는 조직은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기업을 쇠락으로 이끌 것이다. 내부의 조직화된 위험관리 능력을 점검해 보자.



<참고자료>

『광주일보』, 2004. 5.12, 5.19. 6.2.
안재기,『BC 뉴스』, 2007.4.12. 14:15
이승준,『전북도민일보』, 2006.11.12.
『Oh my news』, 2004.4.30. 11:03


ⓒ전경일, <레드 플래그>


제5법칙: '문제 없어요' 뒤에 숨은 진짜 문제의 법칙


-주관적 바램과 객관적 사실이 같다면 그보다 만족스러운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경영에서 그것은 오류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현실은 나의 의지와 별개로 존재한다. 문제는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할 때부터 문제일 가능성이 크다. 가능성은 어디든 있기 마련이다.  '문제없어요(No Ploblem)'는 흔한 관용구이지만 경영에선 이런 경우란 좀처럼 없다. 문제를 인식하지 못해 문제를 키운 예를 한번 살펴보자.  

사소한 일로 프로젝트가 결실을 맺지 못하고 엄청난 손실을 끼치는 경우가 왕왕 있다. 거대한 계획과 야심찬 목표를 가지고 시작한 덴버 국제공항 프로젝트는 그런 사례의 가장 적절한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1988년 미국 콜로라도 주 덴버 시는 신공항 건설에 착수한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무렵부터 운영되던 기존의 스태플레턴(Stapleton) 공항을 대체 할 야심한 계획이었다. 구(舊)공항이 도심과 인접해 있어서 항공기 소음피해가 심각한데다 부지마저 비좁다는 불만이 대두되면서부터였다.

새로 건설되는 신공항은 기존 공항에 비해 비용절감 효과와 공해를 줄이는 것은 물론, 항공 교통의 체증도 일시에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나아가 덴버 시의 성장을 상징하는 공공시설로 부각되리라고 생각되었다. 신공항 건설을 위해 덴버시는 시민채권발행 등으로 42억 달러를 투입했다. 공항 면적은 우리나라 여의도의 46배, 뉴욕 맨하탄 섬의 2배나 되는 어마어마한 규모로 전체 4천2백만 평이나 되었다. 이는 미국이 자랑하는 덜레스, 케네디, 오하이오 등 3개의 공항을 합친 것과 비슷한 크기의 면적이었다.

공항의 위치도 사막 한가운데 위치해 사실상 공항부지의 경계선이 별도로 없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제다 공항을 제외하고는 세계 최대의 규모였다.  3천6백미터의 활주로는 동서와 남북으로 각각 2개, 3개씩 5개나 설치되어 풍향에 관계없이 항시 동시 이착륙이 가능했다. 게다가 3개의 콘코스(광장형 청사)가 마련돼 전용지하철을 타야만 여객 터미널로 이동할 수 있었다. 이 터미널은 4만2천여평에 달했다. 여기다가 1일 평균 수하물 취급량도 8만개에 달했고, 주차장 용량도 무려 1만3천대나 되었으며, 여객탑승구도 세계에서 제일 많은 94개나 되었다. 실로 어마어마한 인공조성물이었다.

덴버 국제공항(Denver International Airport, DIA)은 이처럼 웅장한 위용을 갖춘 세계 최대 규모의 공항으로 누가 봐도 전혀 손색이 없었다. 덴버 공항의 장점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공항은 해발 1천6백 미터에 위치해 있어 ‘1만 마일 도시’로 불렸다. 고지대의 장점은 항시 맑은 날씨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지리적으로도 록키산맥의 서쪽 주변에 위치해 있어 겨울철에는 스키를 타고 오는 관광객들이, 여름철에는 피서차 산을 찾는 사람들에게 인기 있는 휴양지였다.

이 같은 덴버공항이 자랑하는 것은 세계 최대의 공항답게 수많은 여객의 짐을 처리하는 완벽한 수하물 처리시스템이었다. 덴버공항은 DCV로 불리는 첨단설비와 재래식 설비 등 2가지 방식으로 수하물을 처리하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DCV시스템은 광산의 궤도를 달리는 운반구 형태처럼 설치됐는데 궤도에 장착된 2천1백여개의 선형유도모터가 총연장 32킬로미터나 되는 궤도를 컴퓨터 제어에 의해 상하좌우로 이동하며 수하물을 나르도록 되어 있었다. 또 행선지에 대한 정보가 항공사의 예약 컴퓨터나 바코드 수하물표에서 레이저 스캐너로 자동 반복돼 수하물컴퓨터로 입력되며 이에 따라 수하물은 승객의 행선지로 자동 분류돼 이송되게 되어 있었다. 따라서 수하물이 잘못 옮겨지는 경우란 거의 없다는 게 공항당국자의 설명이었다. 이러한 덴버공항은 첨단 수하물 처리 시스템의 도움으로 아무리 늦어도 15분이면 자신의 짐을 찾아 공항을 나설 수 있었다. 그 당시에 우리나라 김포공항은 수화물을  처리하는데 통상 30여분 이상이나 소요되었다. 이와 비교해 보면 덴버 공항의 시설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그런데 덴버 국제공항은 완공을 앞두었을 무렵,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었다. 그것은 건물의 기초나 외관도 아닌, 앞서 덴버공항이 자랑하는 자동화물처리시스템과 관련된 소프트웨어 문제였다. 거대한 최첨단 시설은 완공되었는데,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소프트웨어가 전체 프로젝트의 발목을 잡은 것이다.  


당초 계획대로라면 덴버 국제공항은 1993년 10월 31일에 개통되었어야 했다. 그러나 뜻밖의 문제가 불거졌다. 자동화물처리시스템(Automated Baggage Handling System) 개발을 맡은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들이 문제를 일으킨 것이다. 10월 31일이 되었을 때, 이 거대한 공항의 전 부분은 개항준비가 완료되어 있었으나, 마지막 점검에서 자동화물처리시스템의 미비점이 발견되었다. 소프트웨어 개발자들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심하는 동안, 공항에 투입된 모든 자본은 대책 없이 묶여 있을 수밖에 없었다. 개항이 지연될수록 공항은 점점 돈 먹는 하마가 되어 가고 있었다. 


눈치 빠른 언론은 이 문제를 놓치지 않았다. 개항 지연의 징후가 보이자 언론은 1993년 초부터 대서특필해 댔다. 언론의 스폿 라이트는 부분적으로 개항된 1995년에까지 덴버 국제공항문제에 집중되었고, 개항 지연을 가져온 데에 대한 비난이 끊이지 않았다. 사이언티픽 아메리카지는 덴버공항 개항 실패 책임이 소프트웨어 업계의 엉성한 개발관리 문제점이라고 고발했다. 그러나 그 내막을 유심히 살펴보면, 그것은 소프트웨어 문제만은 아니었다. 소프트웨어 제작 프로세스가 중요한 요소의 하나이기는 했지만, 화물 처리 소프트웨어를 제외한 나머지 부분도 개항 당일 날 100 퍼센트 준비되어 있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이는 신공항 측이 언론의 비난에 대해 소프트웨어 때문에 개항이 불가능하다는 식으로 몰고 갔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면서 다른 프로젝트들은 이미 완수되었으나 화물 시스템 운영 소프트웨어가 미비되어 모든 것이 안되는 식으로 뒤집어 씌웠을 수가 있다. 문제가 먼저 터진 어느 한 곳에 주의가 집중될 때 겉으로는 눈살을 찌푸리는 척하면서도 내부에서 미친 듯이 각자의 일 마무리에 매진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화물 처리 소프트웨어가 전체 프로젝트의 핵심에 있었기 때문에 공항을 운영하는데 매우 중요한 것이긴 했지만, 그것 없이는 단 하루도 공항 내에서 승객들이 움직일 수 없었을까? 다시 말해 화물 처리 소프트웨어 없이는 개항할 수는 없었을까? 실제로 화물 처리 소프트웨어 없이는 텔레-카트(tele-cart), 바코드 판독기, 스캐닝 장치, 전철기(switch point), 카트 언로더(cart unloader) 등을 전혀 사용할 수 없기에 그런 주장은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이는 책임을 면피하기 위한 하나의 이유에 불과했다.


예컨대 임시방편으로 건장한 짐꾼들이 짐을 나르도록 할 수도 있었다. 또 기존의 방법처럼 작은 트럭을 활용해 카트를 여러 개 연결해서 나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방법들은 화물 처리 소프트웨어 문제만 줄곧 얘기하며 시도되지 않았다. 뭔가 다른 문제를 숨기려는 의도가 교묘하게 개입됐던 게 아닌가 의구심이 이는 부분이다.


바로 여기에 개항을 준비하는 프로젝트 전반의 문제점이 드러난다. 즉, 어느 하나가 제대로 작동되지 않을 때의 대안은 전혀 고려되지 않았고, 무수히 숨은 사유들은 드러나지 않은 채 개항지연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 개항 지연의 래드 플래그가 곳곳에서 눈에 띄지 않게 펄럭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 예로 자동 텔레-카트 시스템을 염두에 두고 설계된 터널들은 사람들이 다니기에 너무 낮았다. 당연히 트럭이 통과할 수도 없었다. 확장성이 전혀 고려 안된 터널설계가 다른 대안의 가능성마저 원천봉쇄한 것이다. 이것은 세계적인 공항답지 않는 졸속 시공이었다.


전체 개항을 준비하는 관리자들의 태도에도 문제가 있었다. 그들은 소프트웨어가 늦어질 거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대안 마련에 소홀했다. 그들은 그저 추상적으로 터널을 개조하는데 걸리는 시간이면 소프트웨어를 완성할 수 있을 거라고 매우 작위적으로 판단했다. 터널을 좀 더 일찍 개조할 수 있었으나, 관계자들은 터널 개조에 들어갈 돈과 시간이 있으면 소프트웨어가 제때에 인도되도록 하는 데 투자하는 편이 낫다고 확신했을 것이다. 개발 상태와 무관하게 자신들의 주관적인 바람만이 반영되었던 것이다.


처음부터 개발 지연이 예상되었지만, 누구도 그것을 개항의 잠재적인 리스크로 보지 않았다. 심지어는 이 경우는 다를 거라고 라고 까지 생각했다. 신공항 관리자들은 개발자들과는 전혀 다른 동상이몽의 늪에 빠져있었던 셈이다. 그러한 사실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으로 공항관계자들은 덴버공항과 동일한 설계에 따라 구축된 독일 뮌헨의 프란츠 조셉 스트라우스(Franz Josef Strauss) 국제공항을 방문한 적이 있다. 이때 뮌헨 소프트웨어 팀은 시스템 오픈 전에 도합 2년의 테스트와 6개월간의 24시간 운영을 통한 튜닝을 거치도록 권고했다. 하지만 덴버공항 관계자들은 이러한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더군다나 그런 테스트와 튜닝을 할 시간이 없었으므로, 그렇게 하지 않기로 임의로 결정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화물 처리 소프트웨어 개발 건은 처음부터 재앙을 자초한 것이었다. 예컨대, 공항 이사진들이 이 프로젝트를 입찰에 부쳤을 때, 계획된 납기 일자를 보고는 아무도 입찰에 응하지 않았다. 모든 입찰자들이 보기에도 그 같은 일정을 맞추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결국, 공항 측은 BAE 오토메이션 시스템과 최선의 노력을 전제로 계약을 체결했지만, 그것은 다분히 개발 로드맵에 대한 충분한 검토를 통해 리스크를 줄인 가운데 정한 일정이 아니었다. 그런 이유로 프로젝트 기간 중 계약자 측에서는 일찍부터, 그리고 자주 납기 일자를 맞추는 데 문제가 있다고 주장해 왔다. 더구나 매달 그리고 매번 새로운 스펙이 추가되고 변해서 그로 인해 프로젝트가 점점 더 지연되고 있었다. 모든 관계자들은 4년짜리 프로젝트를 2년 내에 끝내려고 하는 이런 시도가 제대로 끝날 수 없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개발 실패의 징후들은 무시되었다. 개발지연으로 인한 개항지연이 불 보듯 뻔했지만, 이런 래드 플래그는 정책을 수정하기에 리스크가 너무 많다는 판단을 내린 공항관계자들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문제가 터지기 전에는 언제나 크고 작은 징후가 여러 번에 걸쳐 나타난다. 그런 징후들을 포착해 내지 못한다면, 위험에 전면 노출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리스크 관리가 없으면 모두가 공격만 하고 수비는 하지 않는 축구를 하는 것과 같다. 이런 상황에서 승리의 전략은 오로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행운이 내게 일어나도록 바라는 것뿐이다. 운이 전략의 일부가 되어 버릴 때, 모든 프로젝트는 수렁에 빠진다. 문제가 터진 다음에 아는 것은 바보나 하는 짓이다. 하지만 전 세계적으로 오늘날 경영 현장엔 이 같은 바보들이 넘쳐난다.


덴버 공항이 내부적으로 이런 문제에 골머리를 끓고 있을 때, 당시 한국정부는 연간 승객 수용 규모 3천5백만명 수준의 터미널과 4개의 활주로를 갖춘 서울 신국제공항(지금의 인천국제공항) 개발을 위해 현지답사를 했다. 그 무렵 정부는 인천국제공항 건설에 총공사비가 대략 8천7백억원이 소요될 것으로 내다봤다. 1990년 현지답사를 통해 한국관계자 일행은 덴버국제공항의 지상수송시스템과 새로운 CADD/FM(컴퓨터보조설계 및 개발/시설관리) 시스템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덴버 신국제공항이 보유한 자동 트레인은 그 무렵 아틀란타 하스필드국제공항과 유사한 것으로서 메인터미널로부터 3개의 보조터미널 어느 곳으로도 승객 이동이 가능한 시스템이었다. 김포국제공항관리공단의 한국 대표단은 인천국제공항에도 지상수송 시스템이 설치될 예정이라고 말했다. CADD/FM 시스템을 새로 건설될 공항에 설치하는 것이 기존의 공항에 설치하는 것보다 훨씬 빠르기 때문이었다. 한국관계자들의 관심을 반영한 듯, 덴버공항의 캐롤 루더 여대변인은 “기존의 공항에 이런 시설을 설치하는 데는 2년 반 정도의 기간이 소요되지만 신공항에는 건설단계부터 정보가 입력되기 때문에 설치기간이 짧아진다.”며 브리핑을 했었다.


아무튼 우리의 견학활동과는 별개로 그 무렵 덴버 공항 관계자들의 속은 이만 저만 아니었을 것이다. 엄청난 돈을 허비하고 나서 결국 근 2년 정도 지연된 뒤 덴버 국제공항은 개항하기에 이른다. 그 무렵 상황으로, 개항은 했어도 프로젝트 전체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지금까지 갖게 되는 의문은 그 당시 덴버공항 건설 관계자들이 소프트웨어가 개항 지연의 문제가 될 것이라는 점을 몰랐을까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한국관계자들에게는 그러한 개발 리스크에 대해 전혀 언급이 없었던 점은 자존심 때문이거나, 감추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 후 인천국제공항은 덴버 공항을 비롯해 여러 국제공항을 벤치마킹해 설계되었고 건설되었다. 덴버에서와 똑 같은 문제점이 생기지 않은 것은 그나마 극히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천공항에서는 지금도 원인을 알 수 없는 이유로 외관을 이루는 대형 유리가 종종 금이 가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인천국제공항에는 총 2만9000여장의 유리가 촘촘히 짜여 있는데, 매년 외벽유리 60~80여장이 깨져 나가고 있다. 그런데도 정확한 원인조차 파악되고 있지 않다. 2001년에 72장, 2002년에 81장, 2003년에 64장 등 개항 후 3년간 200여장이 넘게 깨졌고, 2004년 상반기에 만에도 27장이 파손됐다. 2004년 상반기까지 유리 교체비로 쓴 돈만 4억원이 넘는다. 비록 강화유리로 시공되어 있어 아래로 추락하면서 이용객들을 덮친 사례는 아직 없지만, 2004년 5월 드골공항 붕괴와 같은 사고가 발생치 않도록 근본적인 대책마련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있다.

   
출국자 수하물을 싣는 기기의 오작동 문제도 있었다. 2007년 5월 공항 컨베이어벨트 시스템이 승객들의 수하물에 표시된 바코드를 잘못 인식하면서 국제선 이용객 수하물을 싣지 않은 채 항공기가 출항하기도 했고, 운용시스템 문제로 항공기가 지연되거나 결항되는 일도 발생했다. 이에 대해 항공 전문가들은 “공항 운용시스템 등 ‘소프트 웨어’ 부문이 개선되지 않는다면 지연·결항을 근본적으로 줄이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개항 후 덴버공항과 같은 사태가 일어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이도록 만드는 사례이다.

 
어느 조직, 어느 시설이든 개발, 운용에는 리스크가 뒤따른다. 그러나 그러한 위험 요인들은 갑자기 나타난다기 보다는 시간을 두고 수차례에 걸쳐 래드 플래그를 펄럭인다. 요는 이 점을 알면서도 많은 조직이 대응책 마련에 소홀하다는 것이다. 덴버국제공항의 개항지연과 막대한 손실은 자동화물처리시스템 소프트웨어의 개발지연으로 인해 발생했지만, 그런 징후를 발견했으면서도 대안 마련에 소홀한데서 보다 근본적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인천국제공항의 깨진 유리창이나 수하물 시스템은 작으나마 다른 어떤 기능들과 함께 결합될 때 더 큰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문제는 이에 대한 본질적 해결을 위한 접근법이다. 모든 문제가 그렇듯 진인(眞因)이 밝혀지고 해결되지 않는다면, 원인은 잠복상태를 지니고 있다. 뿌리부터 샅샅이 살펴보지 않으면 보일만한 것도 찾아지지 않는다.



<개발 관리 리스크의 교훈>

프로젝트를 수행하며 나타날 수 있는 개발 리스크는 어떻게 줄일 것인가? 원인 파악과 대안 마련은 어떻게 할 것인가? 이 점은 기업 경영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생산, 유통, 마케팅, 판매, 판매이후의 고객대응 등 기업 활동 전 과정에 걸쳐 리스크는 잠복해 있다. 그러다 어느 한 순간, 경미한 오류에 의해 크게 불거지기도 하고, 위기의 도미노 현상을 일으키기도 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전체를 통제불능의 상태로 끌고 가곤 한다. 덴버공항의 문제점으로부터 얻는 교훈은 다음과 같다.


-덴버공항 화물처리시스템 소프트웨어 개발 프로젝트의 가장 큰 문제점은 리스크 관리를 위한 노력이 전혀 없었다는 점이다. 최소한의 공식적인 리스크 관리노력만 있었더라도 소프트웨어 납기지연이 개항일정에 심각한 리스크로 부각됐을 것이다. 하지만 이 같은 징후들은 최종 단계에까지 계속 무시되어 왔다. 리스크 관리와 차단을 어느 단계에서 관여해 줄일 것인가 하는 점이 보다 중요하다.


   -리스크에 대한 노출비용 분석을 했더라면, 화물 처리 소프트웨어가 핵심 경로상에 있었고, 그것의 지연이 개항을 연기시키고 따라서 매월 3천 3백만 달러의 경제적 손실을 초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사전에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런 유지 비용(carrying cost)은 처음부터 쉽게 계산될 수 있었지만, 공항 관계자들은 이를 무시해 엄청난 손실을 초래했다.


   -리스크 관리는 감당할 만한 목표와 일정을 제시하여 프로젝트가 처음부터 끝까지 성공적으로 실행될 수 있도록 계획되어야 하지만, 이 점은 제대로 고려되지 않았다. 또한 초기에 수백만 달러만 투자해서 적절한 화물 처리 대안을 확보했더라면 소프트웨어 납기 지연으로 인한 5억 달러의 손실을 입지는 않았을 것이다. 덴버공항 관계자들은 어떤 대안이 될 수 있는 방법도 취하지 않았다.


   -계약자들이 이미 화물 처리 소프트웨어가 납기 내에 인도되지 못할 것이라고 수없이 강조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는 무시되었다. 5억 달러 초과 지출의 책임은 리스크를 무시한 대가였다. 그리고 이 책임은 책임을 치를 의무가 있는 모든 관련자들에게 있다.


   -납기 일자에 대한 불확실성의 범위가 너무 컸다. 개발사 입장에서도 납기일을 지키기 어렵다면 계약을 포기하는 편이 차라리 나았을 것이다. 그들은 초기에 개발일정에 대한 소프트웨어 프로젝트 관리자들의 요구를 냉정하게 판단한 후 결정 내렸어야 했다. 하지만 그들은 공항 관계자의 요구를 수용함으로서 결국 책임이 자신에게 귀속되도록 한 결과를 가져왔다.


   -소프트웨어 업계에는 ‘할 수 있다’는 식의 생각이 팽배해 있지만, 그것은 매우 추상적인 얘기이다. 누구도 수주를 할 때 ‘할 수 없다’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들이 ‘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 가운데 지켜질 수 있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을 선별해 내는 것이 관리자의 능력이다.


   -불확실성에 대해 상호 명쾌한 정의를 내리지 않았다. 기껏 낙관적으로 상상해서 도달할 수 있는 결과라고 해봐야 결국엔 실패다. 리스크 관리 없이 혁신적인 목표와 합당한 기대 수준을 구분할 방법이란 없어 보인다.


   -공항 측은 리스크에 대비해 예비비를 마련하지 않을 까닭에 리스크가 현실화되었을 때 훨씬 많은 대가를 지불해야만 한다. 결국엔 분별없는 관리가 불러일으킨 엄청난 손실이었다.




래드 플래그 제5법칙: 징후 통찰의 법칙

-조직에서 발생하는 문제는 드러나는 문제 자체보다는 내재된 문제가 더 큰 위험을 자초한다. 문제 뒤에 숨어 있는 진짜 문제를 꿰뚫어 보지 못할 때 문제는 식인상어가 돼서 조직 전체를 삼켜 버린다. 이는 개인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자신에게 생길 수 있는 문제를 예측하거나, 어느 한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 문제의 이면에 있을 위험 요인을 파악하지 못한다면 나중에는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린다. 이런 최악의 상황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가?


<징후 예측과 위험 발생에 효과적으로 대처하는 방법들 >

-기업경영과 개인사에 있어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리스크를 평가해 보고, 이를 원천적으로 제거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문제가 발생하면 그 문제가 단발적이고, 일회성이어서 곧 원상태로 돌아갈 것이라고 믿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조직 내 어느 문제가 생기면 어느 조직이나 불끄기에 여념 없다. 이럴 땐 그 대신 문제가 어디서부터 생겨났는지 유심히 살펴보라. 미리 막을 수 있는 잠재적 문제 덩어리를 발견해 내는 쾌거를 올릴 수도 있지 않은가.


   -전체를 망가뜨리는 것은 부분적 오류나 실책이다. 부분에 의해 전체가 작동하지 않을 때 에 문제는 더 이상 부분적인 게 아닌 게 되어 버린다. 조직의 위험을 감지하는 것은 부분을 보면서도 전체를 조망하는 것이다.

 
   -자신의 의지치만 가지고 현실을 대하려 할 때에는 현실이 빗겨나가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개발 프로젝트, 납기일정 준수, 목표설정 등 모든 면에서 우리는 한 발이라도 객관적 시각에 설 수 있게 노력할 필요가 있다. 이 점이 무시되거나 간과되면, 징후를 보는 눈조차 흐려지게 될 것이다.     



<참고자료>

톰 디마르코, 티모시 리스터,  <소프트웨어 프로젝트에서의 리스크 관리>, 인사이트, 2004.

윤승용,「첨단기술과 디자인이 조화를 이룬 뉴덴버공항」, <<신공항>>, 1996.8. 통권 제5호.

짐 스트리트,「세계 최대의 덴버 국제공항」, <<항공>>, 1990. 통권 제14호.

「인천공항은 '깨진 유리의 城'?」, <<조선일보>>, 2004.07.29. 

「인천공항 수하물 기기 오작동 여행객 짐 빼놓고 국제선 출발」, <<경향신문>>, 2007.5.29.

 박병진, 「인천공항 지연·결항 88%가 항공사 잘못」, <<세계일보>>, 2007.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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