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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서는 고구려에서는 “밤만 되면 각 읍과 부락의 남녀가 귀천에 상관없이 모여 함께 춤추고 노래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는 고구려인들이 놀이를 통해 하나가 되었음을 뜻한다. 놀이를 통해 남녀 간의 만남이 밤마다 이루어지다 보니 상대방을 이해하는 폭도 훨씬 넓어졌다. 젊은 남녀는 이렇게 공동체 행사를 통해 자연스럽게 만났고, 자신의 배필을 골랐다. 이 같은 풍속은 고구려가 공동체의식이 매우 높으며, 동시에 개방적 사회였음을 보여준다. 결혼제도도 마찬가지였다. 고구려에서는 연애혼이 일반적으로 행해졌다. 또한 성도 개방적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개방적인 면은 풍속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고구려인들은 길을 가다가도 서로 마주치면 잘 안다는 표시로 손을 흔들어 주었다. 공동체의식을 확인하는 작업은 일상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표출되었던 것이다.

개방적 태도는 공연예술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고구려의 공연예술은 수준이 매우 높아서 훗날 중국의 궁정 무악으로 채택돼 수대(隋代)의 칠부기(七部伎)와 당대(唐代)의 9부기, 10부기에 포함되기에 이른다. 즉, 고려악, 고려악기라는 이름으로 불리어진 고구려의 공연예술에 대해서『수서(隋書)』나『구당서(舊唐書)』및『통전(通典)』등 중국 문헌에서는 그 내용이 지금도 전해지고 있다. 당나라 두우(杜佑)의 『통전(通典)』에는 “고려악에 악공들은 새 깃으로 장식한 자색 비단 모자를 쓰고, 큰 소매가 달린 황색옷에 자색 비단띠를 띠었으며 넓은 바지에 붉은 가죽신을 신고 오색끈을 매었다.”고 쓰여 있다. 또 “4명의 춤꾼들이 머리카락을 뒤로 틀고 붉은 수건을 이마에 동이고 금귀고리로 장식했다. 그 중에 두 사람은 적황색 바지를 입었는데, 그 소매가 매우 길었으며 모두 검은 가죽신을 신고 쌍쌍이 서서 함께 춤을 추었다.”고 되어 있다. 나아가 이 춤에 사용된 17종의 악기를 밝히고 있다. 대단한 문화 지향적 사회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고구려 문화는 그 특징이 대륙 지향적이었다. 지리적으로 중국과 서역에 가까웠으므로 대륙문화의 영향을 받아 이를 창조적이고 독특한 예술로 발전시켰다. 고구려 무용은 동맹을 비롯한 여타 제천의식에서 시작해 나중에는 샤머니즘 무속에서 탈피하여 세련되고 체계화된 춤으로 발전된다. 춤은 고구려인의 용맹스럽고 강건한 기질이 반영돼 동적이고 직선적이었다. 몸동작을 씩씩하게 놀리는 춤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요소는 춤꾼이 모두 남자이며 이들은 저고리와 바지를 입고 칼, 창 또는 북을 들고 씩씩한 몸놀림을 보이며 춤을 추고 있는 점이다. 이는 고구려인들이 전투적 기상을 좋아한 데서 나온 춤일 것으로 보인다. 대표적인 무용으로는 호선무, 광축무, 지서무, 고구려무 등이 있었다.

고구려 벽화를 보면 무용수들은 대개가 소매가 길고 넓은 옷을 입고 손이 보이지 않도록 춤을 추고 있는데, 남녀가 옆으로 늘어서서 함께 추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동수묘의 벽화에서도 의식무용으로 연희된 ‘검무’를 발견할 수 있다. 또 다른 나라 무용으로 보이는 그림을 통해 볼 때 왕실에서는 서역의 문화와 교류를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고구려 무용은 바다건너 일본에까지 전파되어 대제국 고구려의 문화 역량을 마음껏 드러냈다. 고구려 사람들의 춤 동작에 대해 당나라 시인 이백(李白)은 그의 시에서 이렇게 찬미하고 있다.

 깃털모양 금장식 절풍모를 쓰고
하얀 신 신고 망설이고 머뭇거리다가
재빨리 넓은 소매 저으며 훨훨 춤추어
마치 요동에서 날아온 매처럼 나래를 펼치누나. 

金花折風帽白馬小遲回
翩翩舞廣袖似鳥海東來
(

어느 시대, 어느 환경에서나 강대국은 군사, 경제, 문화 등 모든 면에서 글로벌 리더십을 발휘한다. 어느 한 면에 편향된 경쟁력은 상호 보완적 효과를 내기에 어렵다. 이는 기업도 마찬가지이다. 중소기업의 영역에 머물 때에는 어느 한 분야의 특화된 부분만으로도 경쟁력을 지닐 수 있지만, 글로벌 기업으로 뻗어나갈수록 주력이 흔들리지 않는 탄탄한 경쟁력 위에 유관 분야가 수준급으로는 올라와 줘야 한다. 그럴 때 주력도 힘을 받는다. 군사적 대국이었던 고구려는 다양한 면에서 경쟁력을 지녔고, 이를 강화하고자 했다. 대표적인 분야가 문화역량이었다.

그렇다면 천하경영을 지향한 고구려의 문화적 역량은 어떠했을까? 중국 측 사료에는 “고구려는 그 종속과 법속이 중국과 다르다.”고 기록되어 있다. 특히 언어나 복식, 혼인과 예의범절이 중국과 달라 중국인들의 눈에조차 특이하게 비쳤다. 고구려인들은 중국과 달리 치마와 저고리를 입었고, 정치적으로도 중국의 3성 6부와 같은 제도를 끝내 수용하지 않았다. 독자적 세계관을 가진 것처럼 문화적으로도 독자적인 특성과 역량을 지녔던 것이다. 이는 대륙의 패자다운 문화적 자신감에서 나온 것이었다.

고구려인들은 대륙 경략을 통한 자신감과 그에 따른 경제력 및 문화적 역량이 확대되면서 사회 전반적으로 강한 긍정적 분위기가 팽배했다. 이는 어느 시대, 어느 여건에서나 활발한 문화적 역량이 꽃피는 전제 조건이 된다. 생활의 편익이 있어야 문화가 싹트는 것이다. 이 같은 요소들은 고구려가 우리민족의 정통성을 지닌 강국으로서 중국에 맞서 민족의 긍지를 한껏 발휘한 국가였음을 새삼 알게 하는 대목이다.

알다시피 고구려는 여러 부족이 복합된 다민족 국가였다. 게다가 가진 자원도 미약하기만 했다. 아무리 힘들여 일해도 배를 채울 수 없을 정도로 사회적, 지리적 환경이 불리했다. 따라서 그 같은 열악한 환경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국민적 단결이 가장 중요했다. 그런 이유로 범법자, 모반자, 투항자들은 부족장회의의 결정으로 사형에 처해졌다. 강력한 왕권이 확립되고 이를 기반으로 국가 리더십을 제왕들이 발휘하게 된 배경이다. 벽화에서 보듯이 다양한 악기와 행렬도는 공공생활의 질서유지의 한 면을 보게 한다. 이와 더불어 범법자의 공동처리가 고구려의 공동의식이었다.

중국의 한족조차 고구려 사람들을 평하기를 “길가에 물건이 떨어져도 줍지 않았다.”고 말할 정도였다. 이는 제국 유지에 요구되는 정신적, 도덕적 기준을 의미한다. 제국이란 단순히 영토만이 넓어지는 개념이 아니라, 그 구성원의 수준 높은 의식이 밑바탕 될 때 유지되는 것이다. 따라서 고구려의 문화적 역량은 그 사회가 왜 성공했는지를 알게 하는 하나의 단초이다.

ⓒ카인즈교육그룹, 인문경영연구소, 전경일 소장


중국 한인(漢人)들의 기록인 <삼국지 동이전>에는 “고구려인들은 성질이 흉악하고 급하며 노략질하기를 좋아한다.“고 적혀있다.

또 <후한서 고구려전>에는 ”고구려 사람들의 보통 걸음걸이가 마치 달리는 것 같다.“는 기록이 나온다. ‘걸으면 뛰고 뛰면 싸우는 나라’라는 이미지가 박혀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고구려인들이 매사에 얼마나 신속한 자세를 보여주었는지 알게 한다. 절을 할 때에도 발 하나를 빼고 한다고 했는데, 이는 유사시 다음 동작을 민첩하게 취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고구려인은 매사에 빈틈없었다. 고구려인과 달리 중국에 협조적이었던 부여인들은 강하고 용감하며 삼가 함이 있고 너그럽다고 묘사되어 있다. 중국인들이 고구려인들을 얼마나 눈엣 가시로 여겼는지 알 수 있다.

이런 고구려 사람들은 상무정신이 드높아 무예를 숭상했다. 평소에도 씨름과 수박 같은 무예를 익혔다. 지금도 남아 있는 고구려 벽화들은 이 같은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고구려의 숭무정신은 강한 힘과 격파력 외에도 상대방의 약점을 빨리 알아차리고 즉각 공격에 나설 수 있는 순발력과 민첩한 기동력을 지녔다. 적의 공격을 격퇴하는 전투력은 평소의 무예 숭상과 강한 의지에서 나왔다.

그렇다면 고구려는 왜 이렇게 상무정신이 높았을까? 그 이유는 고구려가 처한 지역이 끊임없이 싸우지 않으면 안되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불리한 지정학적 위치를 극복하고 생존과 번영을 꾀하려는 고구려인의 피눈물 나는 노력이 오히려 고구려를 뻗어나가게 하는 원동력이었다.

<삼국사기 온달전>에 기록된 고구려는 어려운 환경과 불리한 조건을 극복하기 위해 3월 3일에는 군민(君民)이 함께 사냥을 했으며, 정월 보름에는 패수의 물놀이를 통해 상호간의 공유의 자리를 마련했다.「온달전」은 사냥대회 광경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고구려에서는 해마다 봄 3월 3일을 기해 낙랑 언덕에서 사냥을 하여 잡은 멧돼지와 사슴을 갖고 하늘과 산천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그 때 왕이 직접 여러 신하와 5부의 군사들과 사냥을 나갔다. 이 때 온달은 기르던 말을 타고 왕을 따라갔다.

공동체 의식이 강했던 고구려인들은 공동목욕을 하거나, 공동사냥을 하는 등 조직적으로 행동했다. 고구려군이 중국의 만리장성을 넘어가 공격한 사실은 이처럼 국가의 적극적인 지원 하에 열린 사냥대회를 통해 쌓아올린 기병전술의 결과였다.

고구려인들은 누구나 목축과 사냥을 하였기 때문에 말타기와 활쏘기가 중요한 생활의 일부였다. 방목하는 가축들을 맹수로부터 보호하고 식량을 구하기 위해 산과 들의 짐승을 사냥했다. 이 같은 풍토는 상무적 기풍을 진작시키기에 충분했고, 이런 평상시의 기마 훈련에서 고구려의 강력한 철기병은 탄생하는 것이다. 또한 주변의 국가들을 정복하고 나아가 중국이나 백제, 신라와의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도 상무적 기풍은 필요했다. 상무정신의 일환으로 각 지방에 설치된 경당에서는 청소년들에게 무술을 연마시키는 것이 상시적인 일이었다.

주로 즐긴 놀이로는 장기·바둑·투호·축구 등이 있는데, 장기·바둑·투호는 중국에서도 행해졌고, 축구는 격구처럼 원래 유목민이 즐기는 놀이였다. 국가 차원에서 열리는 모든 경기에서뿐 아니라 민간오락에서도 무술이 기본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무예를 숭상하는 상무정신은 고구려인들의 생활의 구석구석에까지 뿌리를 내렸다.

중국의 침략을 막기 위해 국민들은 함께 산성을 쌓았으며, 무덤 속 그림을 통해 화려한 내세관을 구가했다. 고구려인들은 이와 같이 하나의 테두리 속에서 함께 즐기고 나라를 위해 싸울 수 있는 자세를 갖추었다. 고구려인들은 항상 강고한 공동체의식을 염두에 두고 계속적인 체력단련과 훈련에 임했으며, 이를 통해 700 년 동안이나 나라를 지킬 수 있었다.

상무적 정신은 고구려인의 피에 새겨진 유전자와 같은 것이었다. 그런 연유로 그들은 시조 주몽을 모시는 사당에 창이나 갑옷과 같은 무구를 봉안했다. 언제나 그들 의식에는 상무정신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 예로 7세기 초 당군(唐軍)이 요동성을 공격해와 성이 함락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외군(外軍)을 물리치기 위해 주몽사(朱蒙祠)에 기원한 사실은 이를 입증해 주고 있다.

요동성에는 주몽사가 있는데, 사(祠)에는 쇄갑(鏁甲)과 섬유(銛矛)가 모셔져 있다. 이것들은 전연(前燕) 때에 하늘이 내려준 것이라고 말해지고 있다. 성(城)이 포위되어 위급하게 되자, 무(巫)가 말하기를 미녀를 치장하여 주몽에게 부신(婦神)으로 바치면, 주몽이 기뻐하여 성이 무사하게 될 것이다, 고 하였다.

주몽사당에 갑옷과 창을 모셔 놓고, 이를 하늘로부터 내려진 것이라고 한 것은 시조에 대한 두터운 믿음과 생활 속에 뿌리박은 상무적 기상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같은 고구려의 상무적 정신은 불교, 도교의 영향으로 점차 퇴색하여 운명론적인 내세관을 바뀌게 되고, 특히 평양 천도 후에는 안일에 빠져 스스로 상무적 기풍을 포기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천하제국을 지향했던 고구려는 후세로 가며 지속혁신을 위한 뼈를 깎는 노력의 부재로 끝내 대제국의 종말을 맞이하는 것이다.
ⓒ전경일, <광개토태왕, 대륙을 경영하다>





 “밭이 없어 아무리 힘써 농사를 지어도 배를 채울 수 없다." (無良田 雖力佃作 不足以實口腹)-<삼국지 고구려전>
 
고구려를 일대 동북아의 최강국이자, 대륙 경영의 거점으로 삼은 광개토평안호태왕을 찾아가는 길... 내 머릿속엔 어떻게 하면 우리나라가 세계 최강국이 될 수 있을까? 우리의 숙제는 무엇인가? 하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뻗어 나가지 않으면 주변 세력들에 의해 생존이 끊임없이 위협당하는 형국, 그러기에 피나는 생존 투쟁을 해야만 지속가능한 경영이 이루어지는 환경요인은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가 처한 여건 아닌가. 기업이 처한 여건도 이와 크게 다를 바 없다.

이번 태왕 유적지 답
사는 내게 태왕의 경영정신을 되새기며 천하경영 리더십을 익히게 한 계기였다. 그 정신을 되새겨 팍스코리아를 이루고,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고 싶다는 강한 의욕이 자석처럼 나를 끌어 당겼다.

오늘날 세계경영이라는 상상력의 무대가 되는 만주... 동북공정으로 나라의 역사마저 빼앗기는 판에 내게 드넓은 만주 대륙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고구려와 우리 역사란 대체 무엇인가?

태왕비를 보고 나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내 안에 있을 광개토 정신 - 나는 그것을 올곧게 복원해 내고 싶다.


ⓒ전경일, 인문경영연구소


얼마전 신문을 보니까 백두산이 4~5년내 다시 분출할 거라는 예측이 있었다.

백두산에 다녀온지 얼마되지 않았는데, 그 소식을 접해 들은 느낌이 자못 가슴 두근거리게 했다.

백두산! 민족의 영산이자 한반도의 등뼈를 이루는 모든 산맥들의 시원 - 그 산에 올랐다.

산은 - 심경호가 역어 낸 <산문기행-조선의 선비, 산길을 가다>에 나오는 뭇 선인들의 글처럼 웅장하고, 가슴 설레게 하며, 벅차오름으로 나를 맞았다. 홍세태가 그러했을 것이며, 서명응이 그러했을 것이다. 특히 서명응(徐命膺)의 <백두산 유람기遊白頭山記>에는 "백두산은 우리나라의 진산으로 아래 백성들이 우러러봅니다 "라는 역자가 뽑은 제목처럼, 나를 흥분시키고, 울음 터지게 만들었다. 나는 이 조국, 한반도 떵덩이에 탯줄을 묻은 자식이자, 아들 아니던가!

그 산을 오르며, 동파, 남파가 아닌, 서파, 북파로 밖에 오르지 못하는 한을 달랬다. 우리는 중국 길을 디뎌 서파로 올랐다.

싱겁긴! 여행이란, 너무 오래 차를 타면, 영혼을 울리는 감격을 경험하기란 어렵다. 버스에서 내려 산정까지 대략 30여분이면 끝나는 여정이 내가 그리 바라오던 서파길이었던가. 그럼에도 그 초입에서부터 나는 이미 그 위용에 나는 백두와 한 몸이 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산 속에 내가 있으며, 내가 나로써 나를 일으켜 세운다면 내 안에 백두를 집어 넣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자작나무 숲을 지나, 산 구비를 넘었다. 나는 산에 올라 산을 키웠고, 산은 나를 받아, 나를 다시 키워냈다. 남녀간의 뜨거운 입맞춤처럼 서로의 호응이 있었다. 저 태초의 산을 바라볼 때 내게는 울부짖음이 있었다.

운무 가득한 천지를 바라보며, 나는 태왕비의 한 구절을 무심결에 소리질렀다. "
‘천제지자(天帝之子), 황천지자(皇天之子), 일월지자(日月之子)’ 가 여기 왔다. 나를 위해 문을 열어라!"
운무가 가시는 듯 했다.

이 외침은 오래 전 내가 쓴 <광개토태왕 대륙을 경영하다>에 나오는 태왕비문의 한 구절이다. 비문엔,
추모왕이 염리대수에 이르러 “나는 황천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하백녀인, 추모왕이다. 나를 위해 갈대를 엮고, 거북은 떠 올라라.”라고 명한 대목이 나온다. 이 풍광을 보고 어찌 호연해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 추억을 되새기며, 여기 구구절절한 설명은 략하고, 이번엔 대략 사진만 올린다. 길손들은 백두에 오른듯 즐감하시라.

 
 
    ⓒ전경일, 인문경영연구소

고구려인들은 스스로 믿기를 그들은 자신을 ‘천손(天孫)’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들의 국가는 하늘의 자손들에 의해 통치되는 ‘천손국(天孫國)’이며, 그러기에 그들은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또한 제국의 시민답게 고구려인들은 자주 의식이 매우 강했고, 민족 자아성이 무척 강했다. 고구려인의 독자적 천하관은 중국과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다시 말해, 이 같은 천손 개념은 중국 한족 왕조의 추상적인 천자 개념과는 확연히 대비되는 것이었다. 당당한 독립 국가라는 점에서 보다 고구려다운 색깔이 뚜렷히 나타난다. 그러기에 모든 면에서 자신감에 가득 찼고 위풍당당했다. 이 같은 믿음은 천하를 경영하는데 거침없이 나타난다. 광개토태왕비와 중원고구려비는 이런 면을 잘 보여주고 있다.

능비의 서문과 모두루 묘지명에는 고구려의 시조 추모왕을 ‘천제지자(天帝之子), 황천지자(皇天之子), 일월지자(日月之子)’ 등으로 최고의 존칭을 써가며 존엄성을 기리고 있다. 즉, 하늘과 맞닿아 있다는 것이다. 이런 표현은 고구려가 천손국으로 하늘과 혈연으로 이어져 있다는 것을 보여주며, 또한 왕의 초월적 지위를 강조하는 말이기도 하다. 따라서 왕이 지배하는 고구려는 신성국이며, 왕의 권위가 미치거나 미쳐야 한다고 여기는 공간은 고구려인들이 생각하고 있던 천하(天下)인 셈이다. 따라서 천하는 고구려왕의 권위 하에 종속되어 있거나, 종속되어 있어야 한다고 여기는 주변 나라들을 아우른 공간이다. 그러기에 고구려와 이들 주변국과의 관계는 상하(上下) 조공(朝貢) 관계였다.

그들은 고구려를 중심으로 상하 질서를 형성한 국제질서를 유지해 나가는 것을 ‘수천(守天), 즉 ‘천도(天道)’ 또는 천제(天帝)의 뜻을 지켜 나가는 것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고구려왕은 수천의 주체임을 자임한다. 이처럼 고구려인들에게는 사방 천지가 자신들의 천하였던 셈이다. 능비의 표현은 이 같은 사실을 재삼 확인시켜주는 일 과정인 셈이다.

태왕의 업적은 비문으로 보거나,『삼국사기』로 보아도 탁월함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이것은 태왕의 살아서의 놀라운 경영실적, 즉 치적에 근거하고 있다. 태왕은 국가경영의 정신적 뿌리를 고조선의 성전인 홍익인간(弘益人間), 즉 홍범구주(洪範九疇)에 두었다. 이를 사람이 지켜야 할 떳떳한 도리인 이륜(彛倫)으로 생각하고 국가경영에 임했던 것이다. 태왕이 지향한 부국안민의 국가경영 실천은 바로 이 같은 경영이념에서 나온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이 같은 이념을 실질적으로 이뤄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힘에 의한 실력주의로 국가경영을 이끌어 나가고 있는 것이다. 실력 없이 대의만 부르짖지 않았다는 점에서 태왕의 경영 평가는 냉철한 것이었다. 열국이 평화로운 세상을 이루기 위해서는 패도 자체가 강력한 힘을 바탕으로 할 때 실천 가능하다는 점을 누구보다 잘 알았던 것이다.
그 예로 태왕의 치적 중에 북연(北燕)의 모용왕(慕容王)이 수십 년 이래에 침략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태왕은 그들을 평정하고 북연왕이 원래 고구려의 고양고씨(高陽高氏)의 지속(支屬)이었다는 점을 내세워 종족의 은의(恩誼)를 베푼다. 이는 강대국과 약소국이 형제국의 은의로 유지되는 것, 즉 회맹(會盟)에 의한 패도의 사상의 실천이라 할 수가 있다. 힘에 의한 평정과 후속적인 평화천명으로 북연왕 고운(高雲)은 태왕의 패도 경영에 승복하는 셈이다.

이렇듯 태왕은 힘에 의한 국가경영을 자신의 중심 국가경영철학으로 삼았다. 백제가 왜의 원병을 얻어서 신라를 침공한다는 신라 내물왕의 요청을 받고 백제를 친정할 때에도 태왕은 백제와 왜군은 평정했지만, 백제를 병합하지는 않았다. 이것은 백제를 존속시키되 다만 회맹으로 친선을 유지하려는 평화적 정책의 발로였다. 형제국의 예우로서 신라의 실성왕자(室星王子)를 인질로 삼은 것은 회맹을 통해 친선을 유지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런 태왕은 어려서부터 부친 고국양왕(故國壤王)을 따라 침략해 오는 중국의 열국과 싸우며 동북아 열국을 제패하는 패도통치를 완성한다.

태왕의 패도 사상은 신의를 존중하고 동맹국과 선의의 국교를 지속한 것이 특징이다. 당시 한족과 북융(北戎, 즉 突厥), 그리고 고구려 3국 사이에 일어나는 분쟁을 제거하기 위해 돌궐과의 동맹에 태왕은 형제국의 우애로써 국교를 지속해 나갔다. 돌궐과의 동맹은 태왕이 승하하고 나서도 2, 3백년이나 지속된다. 돌궐은 고구려의 원병과 보호 밑에서 한족(漢族)의 지속적인 침략에도 불구하고 나라를 보존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고구려가 돌궐을 기미(羈縻)함으로써 한족 세력의 동진을 저지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었다. ‘기미(羈縻)’란 특정세력을 특정 지역 내 묶어 둠으로써 주적과의 갈등을 완화시키고자 하는 정책 일환이다.

힘과 평화의 두 축을 끌고 나가는 태왕의 전략은 고구려의 장기적인 목표와 일치한다. 이 같은 점은 오늘날 기업 경영에 있어 최고경영자의 전략적 의사결정이 기업의 사업 방향은 물론, 경쟁 환경에 대해서도 지대한 영향을 주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내부의 경영철학이 대륙으로 뻗어나가며 보다 확대ㆍ심화되는 과정을 겪는 것이다. 태왕의 경영은 이처럼 차원을 달리한 경쟁의 방식을 동북아 제국에 제시했던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1600년 전의 역사지만, 태왕의 국가경영과 고구려인들이 지녔던 천하관은 여전히 의미심장하다. 이는 오늘날 무한 확장의 글로벌 시대에 대한 분명한 지표가 되어 줄 수 있을 것이다. ⓒ전경일, <광개토태왕, 대륙을 경영하다>


고구려는 우리민족이 세운 대표적 국가로 만주일대와 한반도 중부 이북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 및 광범위한 해양영토를 보유한 대제국이었다. 기원전 37년에 남만주에서 건국되었다고 하지만, 그보다 더 오래 전에 세워졌을 것으로 보인다. 기록에 의하면, 그들은 북부여를 계승했는데, 북부여는 현재 북만주인 대홍안령 일대에서 남만주 일대에 걸친 반농ㆍ반유목의 나라였다.

고구려는 건국하자마자 주변에 있었던 소국들을 신속하게 병합해 나간다. 확장의 시점을 실기하지 않고, 국운융성의 기회로 발전시킨 것이다. 그리하여 창업 이래 700여년 이상을 존속하면서 독특한 지정학적 환경 속에서 주변종족들을 아우른 세계국가를 일구어냈다. 이 같은 팽창은 고구려인의 진취적 기상이 반영된 것으로, 막강한 군사력의 기초가 된다. 이런 연유로 고구려는 강력한 군사력을 밑바탕으로 정복국가를 자임 하며 그 활동 반경을 대륙과 해양에서 넓혀 나간다. 다른 한편, 영토의 확대와 더불어 경제여건이 향상되자 고구려인만의 독특하고 성숙된 문화를 꽃피우게 된다.

고구려는 창업 이래 자신들의 역사적 사명으로 고토회복을 삼는다. 지난 과거의 역사를 잊지 않았던 것이다. 고구려 팽창의 주요 배경은 경제적 목적 이외에 이처럼 고조선을 계승하고 고토를 회복하려는 국가적 목표 때문이었다.

태왕 개인도 숭조(崇祖) 신념이 뚜렷했다. 이는 창업 정신을 계승한 것이다. 시조 동명성왕을 받들고 시조의 정치관을 내세워 천하에 선포한다. 시조의 묘당을 참배하면서 평소에는 유화의 소상(塑像)항상 대동하고 다녔다. 그런 까닭에 온 나라, 성읍마다 이 소상이 없는 곳이 없었다. 훗날 당(唐)이 고구려를 칠 때 그 성읍의 소상이 3일 동안이나 피눈물을 흘리고, 울음소리를 냈다고 전한다. 이에 성민들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싸워서, 당군(唐軍)이 그 성읍들을 점령하지 못했다고 당나라 전사(戰史)는 남기고 있다. 고조선의 계승자이자, 숭조 정신을 지닌 것은 고구려인들의 애국애족의 정신을 키우고 온 국민을 하나로 묶는데 크게 기여한다.

『삼국사기』에는 고구려가 처음으로 인접한 비류국을 병합하고 그곳의 이름을 다물도(多勿都)라 정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여기서 말하는 ‘다물(多勿)’이란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는 것을 말한다. 고조선 영토, 즉 고토에 대한 회복의지가 얼마나 강했으면, 첫 번째로 병합한 나라를 다물도라 명명했을까 싶다. 고토회복이 표현된 다물(多勿)사상은 고구려의 정신적 뿌리이자, 창업 이래 한결같은 경영지표였다. 고구려는 한족(漢族) 및 북방유목종족들과 끊임없이 전쟁을 벌이면서 한편으로 영토를 확대하고 다른 한편으로 수성을 위해 외적의 침입을 방어했다. 이 같은 지속투쟁의 역사가 고구려의 역사였다.

그런 고구려는 마침내 5세기에 들어 태왕이 등장하면서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된다. 고구려인의 소망이 태왕 태에 이르러 마침내 뜻을 이루는 것이다. 이때 우리 역사상 최대의 영토를 마련하게 된다. 중국 북부는 물론 몽고의 동부와 연해주까지 세력이 미침으로써 일단의 성공을 보인다. 명실상부한 대제국의 기틀을 쌓게 되는 것이다. 이는 영토 확장만을 위한 전쟁이 아니었다. 그것을 넘어서 고조선이 추구했던 천하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었다.

확장은 상승 작용을 일으켜 동서남북의 전방위 공략 정책을 취하여 마침내 북만주 일대와 연해주지역, 요동반도, 그리고 남으로는 한강 이남까지 확대해 나간다. 또한 해양활동을 활발히 추진해 동해 및 황해중부 이북의 해상권을 장악하고, 일본열도에까지 세력이 뻗친다. 동북아의 강건한 패자로 부상하는 것이다.

ⓒ전경일, <광개토태왕, 대륙을 경영하다>


태왕의 기록 중 의미심장한 것이 있다.
그것은 태왕은 살아서 자신의 능을 지킬 수묘연호(守墓煙戶)에 대해서 명령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를 ‘존시유교(存時遺敎)’라 한다. 즉, 태왕은 자신이 죽은 다음에 능을 지킬 수묘연호(守墓煙戶)를 언급하고 있는데, 이들이 내원(來源)하게 된 배경, 능을 지킬 인가(人家)의 수, 태왕 자신이 제정한 조상 묘에 비를 세우는 것, 그리고 연호 등을 제정한 것이다. 이는 능비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나는 구민이 더욱 약(弱)질까 염려하니 만약 내가 죽은 후 (나의) 묘를 안전하게 지키려면 단지 내가 몸소 돌아다니며 약탈(전리품 노획을 뜻함.)하여 온 바의 신래한예(新來韓穢)를 뽑아서 (그들로) 하여금 (수묘와) 청소에 대비토록 하라.

이 같은 살아서의 명령으로 특기할 점은 수묘제를 정함에 있어 ‘구민(舊民)’ 대신 ‘신래한예(新來韓穢)’를 쓰라고 지시한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신래한예(新來韓穢)’란 태왕 자신이 정복하여 이끌어온 한(韓)족과 예(穢)족을 말한다. 왕의 수묘를 할 때 이전에는 본래의 고구려인인 ‘구민(舊民)’이 맡아서 했는데, 이들이 첨차 쇠잔하여질 것이 염려되어 피정복민으로 수묘를 하라고 한 것이다. 비문 영락 8년조에 ‘남녀 300인을 노략하여 얻었다.’는 대목으로 볼 때 이들은 가족단위로 정복된 지역에서 차출된 사람들일 것으로 여겨진다. 이 한(韓)과 예(穢)는 백제와의 전쟁에서 노획한 사람들일 가능성이 높다. 이와 함께 태왕은 구민 약화에 대한 우려와 신민에 대한 전폭적인 의지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또한 부족자(富足者)들이 수묘인을 매매하는 것을 금하고, 강력한 벌칙 법제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수묘인은 지금 이후 다시 서로 전매할 수 없으며 비록 부유한 자(富足之子)가 있더라도 또한 함부로 살 수 없다. 그(들이) 명을 어김이 있으면 (수묘인을)판자는 형을 주고 산 자는 법령에 따라 수묘시키도록 하라.

태왕의 이 같은 명령에도 불구하고 장수왕은 부왕의 명령을 따르면서 한편으로 새로 이끌어 온 백성, 즉 ‘신민(新民)’만으로 수묘를 하게 할 때 오히려 법도를 잘 모를 것을 염려해 구민과 신민의 비를 1:1로 배치한다. 존시유교를 지키면서 탄력성 있게 이를 적용했던 것이다.

이 같은 수묘인 제는 이전의 전통을 바꾼 매우 특별하고 중대한 개혁이었다. 이 시기 태왕의 독자적이며 특별한 시호로 과거의 장지명(葬地名)식에도 일대 변화가 생긴 것으로 보인다. 특히 시호상의 태왕의 업적을 드러내고 태왕을 찬양한 것은 왕권이 그만큼 강화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입비제(立碑制)와 수묘인연호제(守墓人烟戶制)는 능비가 고구려에서는 발달하지 못한 묘비로써 최초의 예라는 것과, 입석(立石) 전통을 이은 것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또한 비의 모양과 크기, 글과 글씨 등등 여러 면에서 고구려 문화의 독보적인 수준을 가늠케 한다.

그런데 이 같은 수묘연에는 국연(國煙)이 있고 간연(看煙)이 있었다. 양쪽을 비교해 보면, 국연은 간연에 비해 신분이 높았다. 이들은 제사를 담당하며 간연을 통솔했다. 반면, 간연은 능을 지키며 청소하고 보수하는 등 허드렛일을 맡았다. 비문에는 국연과 간연이 정확히 1:10으로 편제되어 있다. 원래 고구려인으로서는 국연이 10가(家), 간연이 100가(家)이며, 신민은 국연이 20가, 간연이 200가이다. 1:10, 1:2의 비율인 셈이다. 이 같은 국연과 간연의 비율은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구성비를 잘 보여주고 있다. 고구려가 활발한 외정활동을 통해 피지배층을 대거 확보했다는 것을 짐작케 한다.

중국의 경우에도 지배층과 피지배층이 대체로 1:10인 경우를 이상적인 것으로 보았다. 동북아 최강국인 고구려에서도 같은 비율이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고구려인들은 숫자상으로 자신보다 대략 10배나 큰 이족(異族)을 지배했다. 이는 고구려 사회가 대대적으로 확장해 나가며 자연스럽게 나타난 제국적 위용이라고 볼 수 있다.

또 구민과 신민의 비율인 1:2도 당시의 현실을 반영한 비례치로 볼 수 있다. 북위(北魏)의 역사를 적은 『위서』고구려 전에는 장수왕 때 고구려에 온 북위의 사신이 고구려의 사정을 알아보았다는 내용이 전해지고 있다. 거기에 고구려 백성의 홋수가 기존 주민의 2배로 나타난다. 이를 근거로 유추해 볼 때, 고구려는 최소한 두 배 이상이나 되는 이족을 지배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사실이 구민과 신민의 수묘연 구성에 반영된 것이다.

고구려인들은 사후 세계도 현생의 연장이라고 보았다. 태왕이 수묘제를 강조하는 것은 고구려인의 사후관(死後觀)을 반영하는 셈이다. 이런 연유로 수묘인도 백성의 구성비를 참작해 정했던 것이다. 비문에 의하면, 태왕은 살아있을 때 ‘만년 후’까지도 자신의 무덤을 수묘할 자들을 자신이 정복하여 데려온 한족과 예족민으로 하라고 명하였다고 한다. 외정의 성과가 능비를 지키는 사람들의 내역 및 구성비에 그대로 나타난 것이다.
ⓒ전경일, <광개토태왕, 대륙을 경영하다>


고구려는 광개토태왕 재임기(391~412)에 이르러 재도약의 전기를 마련한다. 이 시기는 우리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중차대한 역사적 전환점이 된다. 즉, 고조선 이후 오랫동안 염원해 온 고토회복의 기회를 결정적으로 다시 마련하게 되는 것이다.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라는 왕호 그대로 태왕은 ‘토경(土境)’을 널리 열고 국세를 내외에 떨친다. 이는 빛나는 외정(外征)의 결과였다.

하지만 태왕의 경영 성적이 단순히 외정(外征)의 결과만은 아니었다. 즉, 태왕시기 ‘광개토경(廣開土境)’의 본질은 외적 팽창과 더불어 중앙집권을 통해 왕권을 강화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한다. 내정 혁신을 통해 내외 문제를 해결하고, 이를 한 차원 높여 국가 경쟁력으로 업 그래이드 한 것이다.

능비는 시조의 탄생과 남하 입국의 신성한 과정에서부터 시작해 태왕 시기에 이르러 ‘서령기업(庶寧其業)하고 부국민은(國富民殷) 오곡풍숙(五穀豊熟)’하게 되었음을 찬양하고 있다. 이 점은 태왕의 경영 결과 태평성대를 이뤘다는 얘기다. 이 같은 표현은 왕권 강화에 따라 이룩된 태왕의 업적을 잘 드러내 주고 있다. 나아가 고구려 사회가 내실 있는 경제적 풍요를 이뤘음을 뜻한다. 이 같이 빛나는 외정과 내정 혁신은 상호 상승작용을 일으키며 강력한 시너지를 낸다. 이런 다이내믹한 환경이 고구려가 당대 최고의 제국으로 발전해 나가는 원동력이었다.


능비에서 말하는 이런 풍요로운 상태는

태왕이 등극한 시기는 오늘날 분단으로 인해 국운 융성이 가로막혀 있는 한반도가 처해 있는 여건보다 훨씬 더 어려운 시기였다. 선대왕인 소수림왕과 고국양왕이 국가체제를 크게 개혁하기는 했지만, 민심은 여전히 분열되어 있었다. 또한 중국의 5호 16국 시대라는 말이 웅변하듯 국내외 정세는 매우 혼란스러웠다. 이 같은 상황에서 태왕은 18세 소년 왕으로 등극하게 된다. 나아가 그는 재위 20여년 만에 광대한 대제국을 이룩해 낸다. 그는 어떻게 이 같은 엄청난 위업을 이뤄낼 수 있었을까?

태왕의 왕위 계승은 역사적 필연성을 갖춘 드라마틱한 과정이었다. 부친인 고국양왕은 원래 소수림왕에 이어 왕위를 계승하기 전에는 그저 왕제(王弟)로서 군중(軍中)의 한 장수에 불과했다. 그런 이유로 고국양왕의 태자인 담덕(談德)도 왕위에 오른다는 보장은 없었다. 그는 부친과 함께 진중(陣中)에서 연군(燕軍)을 격멸할 작전 계힉을 세우고 있는 젊은 왕제에 불과했다. 하지만 담덕은 단순히 무장(武將)으로 자기 역할을 규정짓지 않았다. 때를 기다리면서 미래의 목표를 설정하고,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앞으로의 행동 계획을 수립하고 있었다. 태왕의 이 같은 군중 경험은 훗날 3군을 통솔하여 친정(親征)하는 배경이 된다. 그런 태자 담덕이 왕위에 오르게 된 것은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고구려가 처한 역사적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

즉, 이 시기 동북아는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대격변기에 놓여 있었다. 흉노(匈奴), 갈(羯), 선비(鮮卑), 저(氐), 강(羌) 등 북방의 오호(五胡) 이족(異族)들이 대거 중국에 진출해 각기 국가를 세우고 난립한다. 이 시기를 5호 16국 시대라고 하는데, 중원(中原)에서는 부견(符堅)이 막강한 병사를 모아 중원의 열국을 거의 통일하고 동침(東侵) 계획을 세워 명장 모용수(慕容壽)와 더불어 암중모색하고 있었다. 이처럼 고구려가 처한 국내외 정세는 바야흐로 폭풍전야에 놓여 있었다. 이런 시기에 부견은 천하를 도모할 야욕을 가지고 고구려의 소수림왕에게 문벌책(文伐策)의 일환으로 불도(佛道)를 보내 이를 권장한다. 부견이 어떤 이유로 불교를 전해 주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불교의 내세관이 고구려인들의 강한 정신적 기상을 염세적으로 만들었을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이 무렵, 고구려는 불교의 영향을 받아 중신들 사이에 화(和)·전(戰) 양론으로 국론이 분열된다. 조정에서는 불도의 영향을 받아 살생을 증오하고 전쟁을 기피하는 화평론(和平論)이 일어났고, 한편으로는 지경(地境)을 침략하는 백제와 중원의 열국을 무력으로 제패해야 한다는 전쟁론(戰爭論)으로 팽팽히 갈려 있었다. 때마침 이런 일련의 대외 관계에서 연나라에 납치되었던 주국모(住國母)가 돌아오자 조정에서는 화전(和戰)을 주장하는 자들이 생겨났다. 이 같은 형세에 담덕은 부친의 뜻에 따라 국위를 손상하는 굴욕적 화평을 반대하고 군국책(軍國策)을 내세우는 주전론(主戰論)에 속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때마침 변경을 침략하는 백제와 중원의 열국을 무력으로 분쇄해야 한다는 전쟁론이 강력 대두됨에 따라 주전론(主戰論)을 주도했던 담덕은 왕위에 오르게 된다. 여기에는 정치적 역학 관계나 고구려가 처한 지정학적 위치가 크게 작용했으리라고 보인다. 더구나 중국이 혼란에 빠지자, 고구려는 이 기회를 이용해 적극적으로 팽창 정책을 꾀할 기회를 잡게 되는 것이다. 태왕의 대외 정복은 바로 이 같은 동북아의 국제 정세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즉, 그 시대 고구려는 태왕을 필요로 했고, 태왕은 운명적으로 그런 역사적 요구에 부응한 것이다. 고구려의 주전론 선택은 결과적으로 성공적인 판단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리하여 결과적으로 고구려는 끝없는 중흥의 길로 뻗어나가며 태왕의 천하경영이 그 웅혼한 모습을 드러내게 되는 것이다.

태왕은 즉위와 함께 혼란이 거듭된 국내외 정세를 일사불란하게 수습하고 민심을 하나로 모으는데 진력한다. 분열된 국론을 통일하고 강력한 국방정책을 실시한다. 힘에 의한 평화 사수를 천명한 것이다. 나아가 왕위에 오르기 전의 군사 경험을 살려 왕위에 오른 후 직접 삼군(三軍)을 통솔함으로써 열국을 평정한다. 그리하여 4세기에서 6세기 전반에 이르는 시기에 고구려는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는데, 이 시기는 광개토태왕으로부터 시작되어 장수왕, 문자명왕으로 이어지는 국운융성의 시기가 펼쳐지며 고구려를 당대 제일의 제국적 국가로 만들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태왕의 국가경영실적이 반영돼 이후 2백년의 번영을 가져오는 민족중흥의 토대가 마련된 것이다. 그 결과 5세기 동아시아 질서는 고구려 중심으로 재편되게 된다.

당시 태왕이 취한 군국책은 군사에 필요한 정책을 수행하는 하나의 행정 기구적 성격을 지녔다. 강력한 힘에 의한 팽창책으로 고구려는 명실상부하게 강국으로 자리를 잡게 되고 열국으로부터 조공(朝貢)을 받는 관계를 맺게 되는 셈이다. 군사력을 우위로 새로운 국제질서를 형성해 낸 것이다. 이는 고구려인의 기상을 한껏 드높이기에 충분했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고구려 유적과 유물들은 그러한 자신감을 여실히 드러내 주고 있다.

고구려 웅비의 계기는 주체적 문화를 바탕으로 힘을 기른 다음 변화하는 국제정세를 꿰뚫어 보고 거기에 탁월하게 대응한 국가 CEO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시대의 요청에 부응해 태왕은 즉위와 동시에 강력한 카리스마로 사방 경략을 꾀하고, 대제국의 면모를 과시한다. 역사가 태왕을 세계제국의 경영에로 초대한 것이다. 이처럼 태왕은 위기 속에서 성장해, 위기를 기회로 전환시키고, 이를 특출한 리더십과 안목, 실행력으로 돌파해 가면서 민족사의 한 획을 긋게 된다. 이런 태왕의 업적은 태왕이 세상을 떠난 뒤 2년 후인 414년 그의 아들 장수왕에 의해 세워진 웅장한 광개토태왕릉비로 더욱 부각되게 된다.

태왕의 고구려는 우리 역사에 쉽게 찾아 볼 수 없는 적극 공략을 통한 승리의 역사를 펼쳐 보이고 있다. 이는 후세의 찌들어간 역사와는 전혀 다른, 우리 민족 고유의 박동이 느껴지는 산 역사이자, 대륙의 역사이다. 이 점은 오늘날 우리가 고구려사를 과거의 역사가 아닌, 우리 핏줄에 면면히 흐르고 있는 현재의 역사로 부활해 내는 작업의 전범(典範)이 된다. 역사를 통한 경영학의 한 단면이 태왕의 제국 경영에 무한한 자부심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광개토태왕의 왕도(王道)수업>

태왕은 천하경영의 구상을 어떤 경로를 통해 하게 되었을까? 그의 왕도교육에는 어떠한 특별한 점이 있을까? 이 같은 점을 살펴보는 것은 오늘날 글로벌 경영을 지향하는 우리에게 역사상의 산 교훈이 될 수 있다. 여기서는 태왕의 왕도교육의 핵심을 살펴보기로 한다. 태왕은 선택받은 왕도의 수업을 어려서부터 받지는 못하고, 일반 장상(將相)의 자제와 더불어 경당에서 교육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이유는 부왕인 고국양왕(故國壤王)이 제17대 소수림왕(小獸林王)의 아우로서 군중(軍中)의 장군이었기 때문이다. 고구려의 국법에는 왕족이라 해도 군권을 위임 받으면 무인으로서 문벌이 결정된다. 따라서 이련(伊連, 고국양왕)은 왕이 아닌 장상(將相)의 문벌로서 행세를 해야 했고, 따라서 자녀 교육도 이에 따라야 했다. 그런 이유로 태왕도 왕도교육이 아닌, 장상이나 서민들이 받는 경당의 교육을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고구려본기』에 따르면, 소수림왕은 재위 연간에 태자를 책봉하지 못하고 붕어했다고 되어있다. 부친이 왕이 된 후, 담덕(談德)도 따라서 원자가 되었고 태자로 책봉된다. 그러나 이 시절에 이미 태자 담덕은 성년이 되어 남쪽의 백제와 북의 연(燕)을 응징하는 군대를 지휘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담덕은 태자의 교육이 아닌, 소수림왕이 재건한 태학(太學)에서 교육을 받았을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태왕의 교육에는 군중(軍中) 교육이 우선시 되었을 것이다. 태왕은 원래 무장(武將)이어서 군사에 관해서는 선지선장(善之善將)의 재질을 갖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의 특질로 “체격이 웅위하고 뜻이 높았다.”고 하는 것은 이 같은 점을 짐작케 한다. 군중 교육은 무인뿐만 아니라, 천문․지리․문예․의술(醫術) 등의 태학은 물론이요, 세객(說客) 등이 많은 까닭에 실험을 통한 실증교육이 중점요소였다. 담덕은 어려서부터 경당, 그리고 군중의 군사(軍師)들로부터 홍범의 구경(九逕)을 비롯해 이론적인 학문을 체득하게 된다. 태왕은 이 같은 이론을 바탕으로 출전(出戰)시 친정(親征)하여 진두지휘 했던 것이다. 나아가 성지(城地)를 축성(築城)하거나 농경(農耕)에 있어서도 몸소 지도하고 권장하였다. 이는 군무(軍務)의 일환으로 몸소 익힌 것으로 보인다. 이런 실증적 교육은 고구려를 천하에서 제일 막강한 나라로 발전시킨 원동력이 되었다. 또한 훗날 그가 정복을 통한 현장경영과 학업이 맞닿는 진선미(眞善美) 경영을 실현하는 계기가 되고 있다. 더불어 군사와 경제, 정복과 문화융성의 통일성이 구현되는 리더십의 일면을 예측케 한다.
ⓒ전경일, <광개토태왕, 대륙을 경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