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明)으로 봐서 이제 누르하치는 완전히 고삐 풀린 소의 모습이었다. 한족이 역사적으로 항시 우려한 게 바로 이런 상황이었다. 변방에서 일어나는 이민족의 도전을 막고자 한족은 오래전부터 ‘위(衛)’라는 군사단위를 설치한다. 나아가 지방의 부족장을 통해 이민족의 각 부족들을 통제하는 간접 지배 방식을 취했다. 당연히 이 부족장들은 고분고분하게 말 잘 듣는 사람들로 채워졌으며, 지위를 세습시킴으로써 한족은 그들로부터 지속적인 충성을 이끌어 내고자 했다. 중국은 이 같은 소고삐 정책을 통해 변방을 중국의 행정체계에 편입시키려 했고, 이민족에 의한 이민족의 지배라는 이이제이 방식으로 친중 사대정권을 수립했던 것이다. 이는 현재에 와서도 그대로 계승되고 있는 한족의 대(對)변방 정책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몽고족에게 적용되던 ‘위(衛)’는 1403년 들어 여진족에게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이때 최초의 여진족 위소(衛所)인 건주위가 요동의 동북지방 부족들 사이에 설치되었다.
이 같은 당근과 채찍을 이용한 분할 통치로 여진 사회는 오랫동안 교묘하게 유린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반명(反明)의 기치 하에 누르하치는 여진 제 부족을 통일하고 일어나 지배자인 명조(明朝)와 한 판 승부를 걸었던 것이다. 그럼으로써 오랜 시간 이어온 예속과 굴종의 역사를 끊어버렸음은 당연하다. 위소(衛所)를 통한 분할 통치 방식은 매우 성공적이어서 이 제도는 한번 시작되자마자 급속히 퍼져 나갔다. 이 같은 지배 방식에 대해 한족은 스스로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이것은 기미(羈縻)하고 통어(統禦)하는데 최선의 계책이다. 부족들이 분열되면 그들은 약화되어 지배하기 쉽고, 부족군들이 서로 떨어져 있게 하면 그들은 서로 소원해져서 복속하기 쉽다. 우리는 이들 각자를 제각기 영웅처럼 느끼게 하고 자기네끼리 싸우게 한다. 만이(蠻夷)들이 내부 상쟁에 빠지는 것이 중국으로서는 기회가 된다는 공식이요, 이론이다.”
중국의 다른 민족에 대한 이 같은 일관된 분열정책은 누르하치 등장 이전까지 그대로 이어졌다. 그렇다면, 여기서 얘기하는 한족의 전형적이고 핵심적인 지배 방식인 ‘기미(羈縻)’란 무엇인가? 기미(羈縻)란 소를 고삐에 묶어 두는 것을 말한다. 오랜 기간 중국은 기미 정책을 통해 타민족에 대한 통제를 가한 바, 그 목적은 다음과 같다. (1) 소를 고삐에 묶어두어 소가 고삐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도록 한다. (2) 고삐에 묶인 소는 던져주는 먹이에 길들여진다.(공물, 사대, 관직 부여 등의 방식) (3) 소를 보고 나타난 범은 소를 노리지 결코 소 주인을 노리지 않는다. 따라서 한족은 언제나 직접적인 해를 피한다. (4) 분쟁 발생시 최소한 소의 위치가 경계지점이 되도록 한다. (5) 나아가 향후 소의 위치에 대해 기득권을 주장할 근거를 마련한다.
중국은 여진사회를 통제함으로써 여진 자체를 무력화시킴은 물론 조선의 여진 사회에 대한 영향력을 동시에 약화시키고자 했다. 실제 명은 여진족에 사신을 보내 선물을 가지고 번속적(藩屬的)지위(중국의 울타리를 이루는 속국으로서의 지위)를 수락케 하는 협상을 하여 조선의 세력으로부터 빠져나오게 하려 했다. 이 모든 전략은 동북면에서 한족이 전략적 우위를 잡기 위한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현재 중국이 조선족에 대해 취하는 격리정책도 바로 이 같은 분열과 기미정책을 교묘하게 혼합해 계승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누르하치 등장 시기에도 명은 여진 제 민족의 통일을 방지하기 위해 모든 방법을 동원했다. 여진 사회에서 누르하치의 출현은 바로 오랜 시간 그들을 묶어 온 고삐를 끊어버린 일대 사건이었고, 이 같은 역사적 부름을 받은 누르하치는 마침내 그 뜻을 이루어 냈다. 청조(淸朝)의 설립은 바로 그런 노력의 산물이었던 것이다.
ⓒ전경일, <글로벌 CEO 누르하치>
'역사경영/글로벌 CEO 누르하치'에 해당되는 글 12건
- 2010/07/27 소에 고삐를 묶다 vs. 소, 고삐에서 풀리다
- 2010/07/27 제물에서 주역으로: 경쟁 우위를 확보하다
- 2010/07/27 적에게서 배워라
- 2010/07/19 강자는 변방에서 출현한다
- 2010/07/04 죽을지언정 굴신하진 않는다
- 2010/06/22 누르하치를 만나러 가는 길
- 2010/05/15 두 손이 자유로우면 천하를 지배 한다
- 2010/05/15 불모의 자연조건이 야생성을 강화시킨다
- 2010/05/06 여진족(女眞族), 그들은 누구인가?
- 2010/05/06 그때, 동아시아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었나?
누르하치 성공 배경에는 항시 요동이 자리 잡고 있다. 요동은 여진족에게는 남만주(南滿洲) 지역에 해당된다. 요동에 대한 지배는 풍부한 곡창 지대에 대한 경략권을 확보한다는 차원에서 안정적인 식량 공급원을 마련하는 것을 의미한다. 요동은 여진족과 명의 접경지대로 중국의 선진 문물을 배워 이를 자기 것으로 만드는데 최고의 전략거점이었다.
나아가 요동은 해상 교통의 요충지이기도 했다. 뱃길로는 가장 짧은 거리로 중국에 가 닿을 수 있었다. 만리장성이 끝나는 바닷가와 맞닿은 철의 요새가 바로 산해관이었고, 그 관문을 통과하면 눈앞에 북경이 닿을 것 같았다.
누르하치가 요동을 눈여겨 본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적과 대립하는 접점 가까이 군사들을 배치할 수 있는 이 같은 교두보는 더할 나위 없이 유리한 조건이었다. 이를 이 야생의 정복자는 결코 간과하지 않았다. 이때 누르하치가 취한 요동 확보라는 전략은 오늘날 기업 활동과 비유될 수 있다. 경쟁사 가까이 포지셔닝해 항시 긴장을 늦추지 않고 노림수를 펴는 전략이나, 경쟁 제품을 출시해 경쟁사의 손발을 시장에서 묶어 놓는 전략과 매우 흡사하다. 누르하치는 요동을 놓치지 않았다. 요동 정벌은 바로 북경으로 나아가는 관문 앞에 진지를 구축했다는 점에서 의미 깊다. 적 가까이 세력을 붙여놓은 까닭에 이제 적들은 스스로의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이 같은 심리적 효과를 누르하치는 요동 장악을 통해 더욱 구체화시켰다.
ⓒ전경일, <글로벌 CEO 누르하치>
그렇다면 청이 건국되는 1600년대에는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났었는가? 유럽에서는 신대륙이 발견되었고, 세계사적 흐름은 전지구적 현상이었다. 청조는 근대 중국을 잇는 가장 가까운 왕조로 출범해, 몽골의 원(元)을 빼고는 중국 역사상 가장 많은 민족과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해 현대 중국에 넘겨준 왕조이다. 그 무렵에 중국에서는 소수 민족인 여진족이 오랜 기간 한족을 지배하고 유지하는 경이적인 일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여진족의 성공 이유에 대해 에드윈 O. 라이샤워와 존 K.페어뱅크 교수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1) 강력한 지도자의 출현 (2) 유리한 시기의 도래 (3) 제부족의 통일 (4) 공통되는 민족명의 부여 (5) 공략에 대한 동기부여 (6) 자손까지 이어진 대업 완수와 후손에 의한 중국의 지배의 실현 등.
이 같은 분석은 여진족의 성공적인 중국 인수 합병과 지배에 대한 적절한 해석으로 보인다. 또한 여진족도 몽고족처럼 중국의 지배력이 미치지 못하는 변방 지역에서 군사적 역량을 준비했다는 점이 또 하나의 성공 요인으로 인식된다. 이는 마치 기업 경영에서 성공적인 중견 기업들이 흔히 5대 대기업들이 크게 들여 다 보지 않는 1천 억대 시장규모에서 눈에 띄지 않게 서서히 역량을 축적해 나가는 과정과 같아 보인다. 보이지 않는 곳이야말로 적과 내가 서로 다른 목적으로 안심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보호처이자, 동시에 칼날을 벼리는 곳이 아닌가.
이 같은 성공 방정식을 여진족은 현실 투쟁에서 배워 그들 경영에 그대로 적용했다. 여진족의 벤치마킹은 싸움의 전략뿐만 아니라, 다방면에 걸쳐 이루어졌다. 그들은 심지어 자신의 극복 대상인 명으로부터 정치 체제를 배워서 이를 그대로 원용하기도 했다. 여진족은 선진 문물에 대한 벤치마킹을 통해 자기 지배 방식을 더욱 세련되게 구사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명의 문화와 제도를 계승해 그들이 꿈꾸었던 대(對)중국 M&A를 달성한 다음에는 오히려 피지배 민족에게 자연스럽게 섞여 들어갔다. 여진족으로써는 노쇠해 가는 적을 이민족다운 방식으로 치유한 셈이었고, 중국으로서는 숙주로써 건강한 생명체가 필요했던 셈이다. 이것이 중국이 유지되어 온 방식이었다.
ⓒ전경일, <글로벌 CEO 누르하치>
중국의 오랜 전략 중 하나는 주변 세력들이 강한 힘으로 결집되는 것을 막는 것이었다. 오랜 기간 한족은 타민족의 단결을 막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해 왔다. 한족은 그 자체로 중국을 형성할 수 없는 것이었기에 오히려 변방에서 새로 생겨나는 힘과 그것을 막고자 하는 한족 내부의 힘이 변증법적으로 상호작용하며 중국 지배 권력을 형성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한족의 중국을 중국 전체로 이해하는 것은 중국을 형성하는 다양한 힘을 무시하는 태도다.
외부의 힘에 대한 가장 적절한 대응법으로 한족이 취한 정책이 바로 ‘분할 통치(divide and rule)’였다. 그러나 이 같은 한족의 정책은 내부에로 눈을 돌리는 순간 걷잡을 수 없이 들불처럼 피어올랐다. 변방에 소홀한 틈을 타 그동안 감추어왔던 세력들은 그 모습을 보다 확실하게 드러냈다. 마치 대나무가 그 싹을 땅밖으로 드러내기 전에 이미 땅속에서 무수한 뿌리의 군락을 형성하다가 일시에 땅을 뚫고 나와 하늘을 뒤덮는 것처럼 이민족들은 갑작스럽게 중원에 출현했다. 그 첫번째 전략은 기존의 분할통치의 룰을 깨는 것이었다.
변방은 선택할 수 있는 곳이었다. 따라서 중국의 문물제도에 대한 선별적 흡수는 중국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어 자체의 역량을 모을 수 있는 기회로 작용했다. 전적으로 중국화되지 않고, 전적으로 굴복하지도 않았다. 이런 외적 조건은 자기를 잃지 않는데 도움이 되었다. 자신을 잃을 때 세상 전부를 잃는 것이라면, 여진족은 끊임없는 저항의지로 마침내 중국을 얻고, 지배할 수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족의 이 같은 분할 통치가 항상 성공적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금에 의한 요의 붕괴는 송(宋)의 무분별한 이이제이 정책에 힘입은 바 크다. 요를 내치고자 여진과 동맹한 송은 결국 이민족에 대해 써먹던 핵심 전략인 이이제이가 송 자신을 함정에 빠트리며 남송(南宋)으로 줄어드는 결과를 초래했다. 요를 제압한 금은 요처럼 북방 변경에 국한되지 않고 오히려 중국과 그 사람들을 지배했던 것이다.
장성을 통해 이적을 막으려는 오랜 중국 한인들의 시도는 성공하지 못한다. 국경은 변방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에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民意를 알고, 정치를 균형으로 바라본 강희제의 통찰이 훗날 청의 흥기 밑바탕이 되었던 것이다.
ⓒ전경일, <글로벌 CEO 누르하치>
누르하치는 후금이 생기기 전 요(遼)에 맞서 금을 일으킨 아골타와 많은 점에서 공통점이 발견된다. 우선 이들은 모두 강력한 리더십으로 흩어져 있던 제 부족을 통합했다. 이들은 길들여지지 않았다.
먹고 살기 위해 남여진 지역으로 이동하려했으나, 그들의 진로는 한족에 의해 저지되었다. 불만은 여진사회 내부의 경쟁 원리를 통해 통합으로 이어졌고, 길들여지지 않는 오랑캐식 사고는 결국 중국에 무작정 목줄만 잡히고 있지 않았다.
요 최후의 황제가 1112년 사냥차 북부 여진의 송화강 유역을 방문했을 때 황제는 여진족 추장에게 춤을 추어 보이라고 명령했다. 아골타는 춤추라는 명령을 거부했다. 아골타는 뼈에 사무친 치욕을 갚아줄 날을 기다렸다. 1115년 그는 스스로 황제임을 선포하고 요를 공격, 마침내 요를 멸망시키고 금왕조(1122~1234)를 세웠다.
굴신하지 않는 역사가 있었길레 그들은 훗날, 중원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그들 몸엔 수렵을 통한 야생의 피가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우리 역사의 일부인 북방의 역사를 통해 배우는 가장 핵심적인 가치는 바로 이처럼 길들여지지 않는 정신이다. 이는 기업 활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강자의 영역에서 항시 방심하지 않고, 때를 기다리고 준비하는 기업에겐 고지 탈환의 기회가 온다. 그러나 자기의 독자적인 사업 영역을 포기하는 기업에게는 독자적 영역의 개척이란 요원하기만 하다. 화합하되 자신의 본질을 잊지 않는 기업만이 세상을 움켜쥘 수 있다.
나는 아골타를 생각하면, 뼈마디를 갈아도 굴신하지 않던 그들의 야생적 기질에 경외감이 느껴진다. 무릇 사내는 저러해야 하는 것이다. 천하를 도모코자 한다면.
명나라 두송이 군사의 태반을 잃은 혼하는 유유히 흐르고, 허투알라로 들어 서는 길, 비가 뿌린다.
누르하치의 조상을 모신 청영능에 들어 서는 길은 한적하고, 길은 열려 있다. 건물마다 제기가 차려져 있고, 무덤엔 영혼이 부활하라는 비나리가 담긴 나무가 자라고 있다. 불현듯, 여진족의 야생성은 아직 살아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대한민국 중소기업 CEO들을 모시고 나 (전경일 인문경영연구소장)와 함께 떠나는 답사 여행의 제목 <광개토태왕 & 누르하치 고구려 탐방길>을 이끌면서 참 많이도 느끼고, 감회에 젖었다.
1300년 전부터 400년 전을 거쳐 현재로 이어지는 긴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숨통을 닫았다 다시 열기를 반복했다.
혁도아랍 들어서는 길, 노성이라 불린 이곳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성쪽을 내다보니 팔기가 번뜩인다. 중국을 집어 삼키게 한 저 깃발 아니던가! 혁도아랍성에 이르러 나는 드디어 창업기의 누르하치를 만날 생각이었다. 그리높지 않은 곳에 성곽을 쌓고 창업 초기 세력을 모아나갔던 그!
건물 내부는 만주족 답게 소박하기 그지 없다. 청의 흥기가 이런 검약함에서 나왔고, 그 강희-옹정-건륭으로 이어지는 탁월함의 정치가 바로 여기에 뿌리를 두고 있으리라! 청 관련 책자들을 서가에서 만나고, 사진을 한장 찍었다.
칸이 마신 우물을 들여다 보고, 조선의 인조를 무릎꾾게 한 저 홍타이지의 영정을 바라보고, 탑극세의 집을 둘러 보았다. 모두가 소박하였다.
이 원정의 끝을 나는 이제 곧 심양에서 맞이하게 되리라. 호텔에 돌아와서는 <대륙을 질주하는 광개토태왕(누르하치)의 야생경영> 강의를 하고, 4박 5일의 대 장정이자, 버스 안에서도 계속된 강의를 마쳤다. 광개토태왕-누르하치-현재의 중국시장 공략 전력을 묶은 장장 30시간의 연속 강좌였다.
마침내 나는 이 세 개의 무덤을 보기 위해 여기에 왔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청영릉의 누르하치 조상의 묘-누르하치의 묘-홍타이지의 묘... 이 속에 만주 정신이 있고, 만주족의 길들여지지 않는 야생성이 있다.
우리는 어떤 야생성으로 이 험난한 시대를 뛰어 넘어야 하는가? 우리는 어떻게 나라를 강고히 세우고, 기업을 글로벌 컴퍼니로 우둑 세울 것인가? 그 해답은 내가 서울로 돌아가면 삶의 면면을 실천하는 것으로 드러나야 하리라.
역사적으로 철제 등자(鐙子)의 등장은 이들 유목민들의 손을 자유롭게 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등자는 말을 탈 때 디디는 제구를 말한다. 적어도 3, 4세기까지 유목 기병들은 아시리아의 발판과 스키타이 인디안의 발(足)거리 쇠사슬처럼 철제 등자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이제 말을 타면 두 발을 지탱할 수 있었고, 이는 두 손의 자유를 가져왔다. 가히 획기적인 발명품이 인류 역사에 등장한 것이다.
두 손의 자유는 말 위에서 활을 쏠 수 있는 기술을 급격히 강화시켰다. 이제 승마인들은 활을 당기면서 안장 발거리를 딛고 안전하게 서 있을 수 있었다. 등자는 말 엉덩이 너머로 쏘는 파르티아식(式) 활쏘기를 가능하게 했다. 우리나라 고구려 고분 벽화에 등장하는 활쏘기는 바로 이 같은 장면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기병은 화약이 등장하기 전까지 적어도 천 년간 군사력의 우위를 가능케 했던 주요 수단이었다. 떠돌아다니는 유목민으로 시작해서 중국을 손에 넣었던 민족들의 특징은 바로 이 위대한 속도의 병기를 쥐고 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기병부대에 맞서 중국의 농민보병은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말을 탄 보병 수준에 불과했다. 이는 당시로써는 대단한 기술적 우위였으며, 철기병의 조직화를 가능하게 한 것이다. 누르하치가 중국을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은 더 신속히, 전술적으로 말을 운용했기 때문이다.
속도 경영과 강력한 전력 우위
초원에서의 말은 군사력을 대표한다. 알다시피 먹고 달리는 유목 생활은 하루도 빠짐없이 속도와의 전쟁이다. 이미 947년에 건국된 요나라 때부터 말은 제국의 역전제(驛傳制)를 유지하는데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그 시기에 이미 하루에 700리, 즉 약 230마일의 빠른 속도로 편지를 전달하였다고 하니 그 속도가 가히 짐작이 간다. 이는 역전제도(驛傳制度)상 최고의 기록이다. 마치 오늘날 어디로든 자유스럽게 흐르는 정보의 네트웍인 인터넷을 연상케 한다.
나아가 말을 이용한 군사 작전은 빠른 이동과 빠른 수비의 공수 전환을 쉽게 했고, 치고 빠지는 히트 앤 런(hit and run)식 군사 작전을 가능하게 했다. 더 멀리 갈 수 있다는 것은 세상에 대한 행동반경이 그 만큼 더 넓어진 것을 의미한다. 누르하치가 각 성을 도모하고 신속히 철수 내지 이동했던 것은 고립되는 상황을 피하려는 전술에서였지만 말을 다룬 오랜 경험에서 속도가 주무기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말을 통해 계속 움직였고, 기동력을 통해 적을 제압했던 것이다.
나아가 말의 기동력에 행동의 민첩성을 더 부여하고자 여진족 무사들은 가볍게 몸을 치장 했다. 그들의 갑옷은 무사의 몸놀림을 편하게 하기 위해 부드럽고 가벼운 재질로 만들어 진 것이었다. 조선을 찾은 명나라 사신 퉁훼(董越)가『조선부(朝鮮賦)』에서 조선종이가 누에고치같이 탄력 있고 질기다고 평한 것은 팔기군의 갑옷에 견직과 면직이 사용되었다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당시 여진 사람들은 조선종이로 갑옷을 만들면 화살이 잘 뚫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조선종이를 찾았던 것이다.
야생의 피를 끌어들여 성장한 중국
중국은 이민족과 잦은 인터페이스 덕분에 끊임없이 변화 발전할 수 있었다. 중국 역사는 다름 아닌 변증법적 통일 과정을 그대로 보여준다. 한족 자체의 구조가 더 이상 성장 엔진이 되지 못할 때에는 이민족이 중국 경영에 본격적으로 참여했다. 이는 마치 늙은 포도나무에 찔레 순을 접붙이기 하는 것과 비슷했다. 그럼으로써 중국은 젊은 야생의 피를 받아 오랜 시간 그 수명을 연장해 올 수 있었다. 이는 찔레나무로 비유되는 측에게도 마찬가지였다. 풍요로움에 닿는 순간 그들은 야생성보다는 보다 안락한 삶을 선택했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자신의 야생성을 더는 지킬 필요가 없어졌다.
“변경지역 유목민 지도자가 세력을 얻는 비결은 항상 중국식 행정기구의 양식을 습득하는 그의 능력에 달려 있었으니,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상인, 농민, 그리고 부족의 전사들을 통제하는데 기초를 둔 혼성정권(混成正權)을 세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 인민들은 본의거나 본의가 아니거나 불가피하게 변경지방에서 그러한 이적지배자(夷狄支配者)가 일어나는데 역할을 담당했다.”
요컨대, 중국 내 한족의 내적 조건이 변경 세력으로 하여금 중국 진출을 가져오게 한 동인이었다는 얘기다. 이 불안한 한족과 (한족의 입장에서 봤을 때) 이민족간의 협동에서 이민족의 통치자들은 패권을 잡는 자로서 특별한 기능을 수행했고, 그렇게 함으로써 수적으로 보다 우세한 한족들을 지배할 수 있었다. 그들은 변경 지방으로부터 멀리 밀고 들어가 중국에 왕조를 세우기도 했다. 결국 중국사는 중국을 지배한 이민족 전사(戰士)들의 역사이기도 하다. 여진의 누르하치도 분명 이 야심찬 무리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는 것은 의심할 나위없다.
ⓒ전경일, <글로벌 CEO 누르하치>
예로부터 농경민과 유목민이 만나는 접점은 조용할 리 없었다. 거기엔 교역이 있었고, 끊임없는 욕망이 들끓었다. 주로 이 지역의 자연 현상은 최소한의 강우량과 관련지어 생각할 수 있다. 물 부족은 주기적으로 흉년을 가져왔다. 농경민과 유목민의 교역은 쉽게 정치적인 관계를 가져왔다. 힘의 균형이 깨지고 만일 중국의 힘이 약화되면 이는 곧 중국과 민족의 대결구도로 바뀌었다.
예컨대, “거란족이 세운 요는 지리적으로 그리고 행정적으로 북경과 만리장성 바로 북장 현 열하지방에 중심지를 잡았다. 이 지역은 살 수 없을 만큼 춥고(열하에서는 1년중 100일만이 서리가 없는 날이다.) 강우량도 겨우 10내지 15인지 밖에 안된다.” 열악한 자연 환경에서 정복자는 나왔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기업도 열악한 조건에서 창업돼 회사를 반열에 올려놓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이는 없는 자원 대신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인간의 의지와 노력으로 얻어낸 것이라 할 수 있겠다. 국내 기업으로 대표적인 예가 포스코이다. 철강을 뽑아내는 원광석의 대부분을 수입해 가공 처리하는 것을 업으로 하는 포스코는 세계적인 제절 회사로 자리 잡았다. 없는 요소 보다, 그것을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으로 태생적 한계를 극복했던 것이다.
중국의 일부 또는 전체를 지배한 민족들의 특징은 하나같이 초원에서 왔다는 점이 특징이다. 중원의 주인이 교체되는 배경은 초원과 농경의 접점에서 끊임없이 일어났으며, 때로는 극한의 자연 조건이 왕조 교체를 가져오게 만들었다. 사실상 중국 역사의 상당부분은 한족이 아닌, 다른 민족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자연은 그리 순종적인 대상이 아니다. 이들 초원의 부족들은 평소에는 그들 지역에서 살다가 가뭄이나 식량 부족이 생기면 중국 본토로 자연스럽게 진출해 나갔다. 치열한 생존 싸움이 이 접점에서 벌어졌던 것이다.
초원은 마치 그들 유목민을 물처럼 가득 가두어 놓고 있다가 일시에 중국 본토로 풀어 놓는 보(洑)와 같았다. 만리장성 밖의 중앙아시아를 보러 라도 크기는 중국 본토보다 2배나 되었지만, 인구는 거의 25분의 1이나 30분의 1 밖에 되지 않았다.
유목민의 생활은 알다시피 말과 연관지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말은 기동력의 상징이며, 동시에 말을 탄 궁사들로 이루어진 군사적 우월성은 한족에게 늘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 그것은 농경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에서는 결코 따라 잡을 수 없는 강력한 기동력의 원천이었고, 속도를 통한 경쟁력이었다. 중국을 지배한 온갖 민족들의 경쟁력은 근세 이전까지 말(馬)에서 나왔다.
목축 경제는 곡물보다도 동물과 함께한다. 그러다보니 이동성이 생긴다. 유목민들은 양가죽으로는 의복을 만들어 입고, 양모로는 천막을 만들어 하늘을 가린다. 초원에서의 양은 부의 척도이다. 이들은 주식인 양고기와 치이즈 버터도 모두 동물로부터 얻었다. 자립적인 생활을 하다 보니 목축 경제는 생필품을 얻기 위해 정착지역과는 최소한의 교역만을 필요로 했다. 육식을 보충할 곡물의 확보는 이 같은 교역을 통해 얻어졌다.
하지만 자원이 부족해지면 이들 유목민들은 태도를 바꾸어 버렸다. 그들은 가뭄, 기근 등의 자연 현상에 따라 주기적으로 군사적 행동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유목민들은 농토를 떠나면 생산수단을 잃어버리는 농경민들과 전혀 달랐다. 초원의 목자(牧者)들과 수렵자들은 중앙지도력만 있으면 언제든지 세력을 모을 수 있었다. 그들은 약탈을 통해서라도 생존 문제를 해결할 수만 있다면 즉각 동원될 수 있었던 것이다. 나아가 그들은 맡은 바 임무에서도 멀티형 인간들이었다. 그게 초원에서의 생존 방식이었다.
“초원의 목자(牧者)-전사(戰士)-수렵자(狩獵者)는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어야 하며, 단 한가지 직업에만 자신을 국한시킬 수 없었다. 부녀자들은 야영지의 사역군들이며 관리자들이자 그들 자신들도 전쟁과 정치를 제외하고는 유목 생활의 모든 문제를 다룰 능력자들이었다.“
이 같은 기록은 유목민의 삶이 얼마나 치열한 생존을 위한 삶이었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그들은 말안장만 타면 어디로든 갈 수 있었다. 안장 위에서 태어나, 안장 위에서 죽었다. 안장 위에서 세상을 보고, 세상과 교류했으며, 더 큰 세상을 이해하고, 그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기도 했다. 그들은 결코 무릎을 꿇지 않았다. 그들은 오히려 내다보았고, 내려 보았다. 달리는 것은 생존을 위해 필수 사항이었다.
ⓒ전경일, <글로벌 CEO 누르하치>
언어학상으로 볼 때 여진족은 퉁구스계에 속한다. 이들은 주로 동북방 삼림지대에서 수렵이나 어로, 농경 생활을 하였다. 그러다가 송화강 상류 지역에서부터 점차 세력을 넓혀나갔다. 이 지역은 한때 우리 역사의 주역 중 하나인 발해가 번성한 곳이었다. 여진이 역사의 무대로 등장한 것은 1114년 여진이 세운 금나라가 한족의 요나라를 밀어낸 때부터이다. 중국 역사의 상당부분이 타민족의 역사라는 걸 보여주는 것은 중국을 다스린 주인이 언제든 변해 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다. 아래 표는 한족과 타민족 왕조 교체시기를 잘 보여준다.
13세기로부터 19세기에 걸친 시기에 중국은 공교롭게도 원(1271~1368), 명(1368~1644), 청(1644~1912)으로 이어지는 왕조 교체기가 있었다. 원은 몽고족이, 명은 한족이, 청은 다시 여진족에 의해 세워졌다. 통사적(通史的)으로 볼 때 명(明)은 각기 다른 민족 간에 낀 샌드위치와 같은 한족 정권이었다. 그리고 다시 청(淸) 이후에 근대 중국이 들어서자 한족은 다시 역사의 무대로 등장하게 된다. 현재 중국은 명분상 다민족 통합 국가를 지향하지만, 여전히 한족이 주류를 이루는 국가 사회인 것만은 분명하다. 하지만 한족의 이 같은 집권기는 채 90년도 되지 않은 짧은 역사에 불과한 것이다.
알다시피 원과 청은 비한족(非漢族) 정복왕조로 숫적으로 훨씬 우세한 중국(한족이 말하는 ‘중화’)를 지배했다. 이들 북방의 세력들은 남방계 중국인들과 달리 훤칠한 골격을 갖추고 있었다. 이들은 한족의 중국이 허약한 틈을 타 중국을 정복했으며, 나아가 중국인의 도움을 받아 중국을 통일하고, 오랫동안 중국의 주인으로서 대륙을 지배했다. 뿐만 아니라 현지화 전략에 성공해 오랜 기간 지배를 했다.
이들 정복민족들은 중국인으로 도움으로, 중국의 제도를 그대로 사용하면서, 중국인을 지배했다. 중국이 한족만의 나라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은 역사적으로도 이들 민족의 지배가 한족의 지배를 또 다른 민족의 지배로 전환시키는 선순환적 구조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들은 중국 역사에서 매우 정규적으로, 일정 시점마다 등장해 참여한 세력이었던 셈이다. 이들 민족은 중국이 썩지 않게 만드는 야생의 힘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의 왕성한 기력은 한족의 중화가 힘을 잃어갈 때 오히려 새로운 생명의 접(椄) 붙이기와 같은 작용을 해냈다. 오늘날 우리가 동북아 역사에서 알아야 할 것은 한족에 의한 지배가 매우 일시적인 현상일 수 있으며, 중국이란 나라는 비중국계 민족에 의해 끊임없이 재배의 대상이 되어 왔다는 점이다. 때로 이것은 해양 세력인 일본에 의한 무력침공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중국을 일부 혹은 전부 지배한 민족과 그들이 사용한 언어는 중원의 주인이 따로 없었음을 보여준다. 흉노(터키어), 월씨(인도-유럽어), 선비(몽골어), 척발(몽골어), 돌궐(터어키어), 위그르(터키어), 거란(몽골어), 여진(퉁구스어), 탕구트(티베트어), 몽골(몽골어) 등 중국을 지배한 민족은 수없이 많다. 우리 민족이 동북아의 주인으로서 한족의 중국과 끊임없이 무력으로 교류하였음은 지극히 당연하다. 누르하치가 등장한 16, 17세기에도 동북면에서는 이 같은 형세가 쉼 없이 벌어지고 있었다. 중원에 다시 한 번 패권 이동의 용틀임이 일고 있었던 것이다.
ⓒ전경일, <글로벌 CEO 누르하치>
누르하치가 등장하는 무렵은 원ㆍ명과 명ㆍ청의 남북 교체 중간에 위치해 있었다. 북으로는 몽골과 여진이 병존하면서 몽골의 쇠퇴와 여진의 흥기가 서서히 진행되고 있었다. 대륙의 패권을 겨눌 힘의 중심이 여진으로 넘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전 세계의 주인을 자처했던 몽골에는 당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을까?
그 무렵 몽골은 중국에 대한 지배권을 상실한 채 약탈과 조공, 와시무역(瓦市貿易: 시장ㆍ장터에서의 거래를 통한 교역) 등으로 경제를 유지하기에 급급했다. 더구나 변화하는 대명 관계 속에서 몽골은 정치적으로도 체제 통합을 이뤄 내지 못하고 분열상을 보였다.
반면에 여진은 명과 조공ㆍ위소(衛所) 관계를 형성한 이래 와시 무역의 확대, 요동 한인 지배들을 통해 대외경제를 확대시키며 정치 조직의 통합을 이루어 내고 있었다. 물론 이것은 훗날 ‘대청체제(大淸體制)’를 형성하면서 중국 정복을 시도하게 된 배경이 된다.
원대(元代) 몽골의 지배 하에 있던 여진이 명초 대명 관계의 형성과 함께 몽골의 지배에서 벗어난 이후 명대 대부분의 시기에 몽골과 여진은 서로 분리되어 있었다. 그러나 명 말기에 이르러 몽골과 여진의 분리, 병존 관계에는 서서히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1619년 후금(後金)의 요동 공격과 함께 여진과 몽골 사이에는 대립과 연맹 등 직접적인 관계가 형성되었고, 1636년에 이르러서는 여진이 최종적으로 몽골을 병합하기에 이른다. 북아시아에서 몽골과 여진의 동, 서간 교체가 이루어진 것이다. 여진과 몽골의 역전이 급속하게 이루어졌던 1619~36년 사이에는 몽골의 쇠퇴와 여진의 흥기가 교차했다. 이 시기에 여진은 몽골의 대외경제를 병합하고 이를 이용해 정치 체제를 강화하였다. 반면에 몽골은 독자적인 대외 관계를 상실하고 정치적으로는 여진 한(han)의 지배에 예속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이후 여진과 몽골의 역사 전개에서 결정적인 작용을 한 것으로 평가 된다.
한편, 명은 요동 지역을 몽골과 여진을 분리 통제하기 위해 박아 놓은 쐐기와 같은 역할을 하는 곳으로 인식했다. 말하자면 버퍼 역할을 수행하는 ‘경계 지대’라고나 할까. 그런 이유로 요동 지역은 몽골과 여진이 동서쪽에서 공동으로 대명 경제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여진족은 요동으로 진출하여 이 쐐기를 뽑아버렸고 이로 인해 명, 몽골, 만주의 관계는 재편될 수밖에 없었다.
이 시기의 요동지역은 위소제(偉所制), 군둔(軍屯) 등의 제도가 실시되는 일종의 군정(軍政)지역이었다. 요동을 누가 차지하느냐에 따라 동북아의 패자(覇者)가 누가 될지 자명했다. 이 같은 때에 내부적 결속을 강화한 누르하치는 먼저 요동으로 진출하여 명이 박아 놓은 쐐기를 뽑아버린다. 그럼으로써 요동을 둘러싼 명, 몽골, 여진의 삼각관계는 급속히 재편되었다.
그렇다면 당시 여진족에게 중국은 무엇이었는가? 야만적인 영토를 누비는 야생마처럼 길들여지지 않은 그들에게 중국은 과연 무엇이었으며, 그들은 왜 중국을 인수 합병해야만 했을까?
ⓒ전경일, <글로벌 CEO 누르하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