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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시적 대비책으로 전략적 유연성을 발휘하라

 

1592년 4월 13일 오후 부산 앞바다에 나타난 적은 이튿날인 14일 부산진을 점령하고, 15일 동래부를 함락시킨다. 5월 3일에는 서울을, 28일에는 임진강을 건너 6월 15일에는 평양을 점령한다. 부산을 치기 시작해 개전 20일 만에 서울이 무참히 무너지고, 2개월 만에 개성, 평양까지 빼앗기는 등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전개된 것이다. 일일 평균 26km의 놀라운 속도로 적이 북상한 셈이니 특별한 저항 없이 통과한 것이나 다를 바 없다. 임란 초 우리는 어떻게 해서 이렇다 할 방어 없이 밀리게 된 것일까? 임란 전 전쟁 발발을 두고 조정 내부에서는 이견과 혼란은 있었으나, 나름 전쟁에 대한 대비책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1589년 1월 조정에서는 불차탁용으로 이순신을 비롯해 무신들을 천거하기도 했으니 난의 낌새를 못 챘을 리 없다. 문제는 다른데 있다. 국방 시스템이 큰 몫을 차지한다. 임란에 임한 당시 우리 수군의 편성과 조직적 역량은 어떠했을까? 혹시 방어 시스템상의 문제점은 없었을까?

 

임란 당시 전라좌수군은 전라좌수사-우후-사도첨사-만호의 지휘체계로 편성되어 있었다. 이순신이 맡은 전라좌수영의 관할지역은 해남반도 남단을 경계로 그 동쪽 지역의 전라도 해안이었다.

 

임란 당시 조선의 수군 조직을 살펴보면, 해안지역은 수사의 관할권 하에 들어가 있었고, 육지의 수령인 도호부사, 군수, 현감 등도 수사가 관할하게 되어 있다. 육지의 행정구역과 수군의 행정구역은 서로 분리되어 있었지만 전투가 발발하면 상호 유기적인 협조 하에 작전을 수행하도록 되어 있었다. 각 관의 부사, 군수, 현감과 각 진포의 첨사, 만호 등은 평상시에는 백성을 다스리다가도 유사시에 전라좌수사의 명령이 떨어지면 각 관, 진포의 선소(船所)에 보유한 전선과 필요 인원을 이끌고 나가 관할 해역을 방위했다. 이들은 전라좌수영에 집결해 좌수사의 지시를 받게 된다. 임란 초 전라좌도는 5관(본영, 순천, 광양, 낙안, 보성, 흥양)과 5포(방답, 여도, 사도, 발포, 녹도)로 구성되어 있었다. 보유한 배도 판옥선, 하우선, 귀선(거북선)이 각각 18척, 18척, 2척과 12척, 12척, 1척으로 전체 30척, 30척, 3척 등 총 63척이었다. 

 

장점이 단점이 되는 군사동원 체계

임란 전 지방군의 편성 방법은 전국 행정 단위인 읍(邑)을 동시에 군사단위인 진(鎭)으로 편성한 진관 체계였다. 따라서 수령으로 하여금 군사지휘관 역할도 맡게 했다. 이런 진관 체계에는 장점도 있다. 적이 쳐들어오면 우선 수군이 막고, 수군이 뚫리면 1차 방어선으로 진관이 격퇴하고, 진관이 무너지면 다음 진관이 적을 방어하는데 시간을 벌며 인근 진관과 중앙으로부터 후원군이 도착해 방어케 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1차적으로는 해당 지역에 외적이 쳐들어오면 자체적으로 방위하는 자전자수(自戰自守)의 방비책이었다. 연안에 빈번히 출현하던 왜구를 해당 지역이 자체적으로 책임지고 격퇴하도록 되어 있는 자기 책임제였다.

 

임란 시 조선수군의 방위체계는 자체 관할구역을 방어하는 자전자수(自戰自守)의 방비책이었다. 이순신의 경상도 출전이 지연된 것은 매뉴얼에 발목 잡힌 군사운영체제가 크게 한 몫 했다. 오늘날 기업이 위기에 직면해 어떤 유연성을 발휘해야 하는지 임란 시 조선수군의 방위체계는 잘 보여준다.

 

이런 장점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인 문제점이 있었다. 진관 체계다보니 자기 책임 관할구역을 벗어나서는 작전을 수행할 수 없었다. 구역을 벗어나 작전을 수행하려면 조정의 공식적인 명령이 있어야 했다. 그러다 보니 소규모 왜구 침략을 막는 데에는 효과적이었지만, 대규모 전쟁 사태에는 맞지 않았다. 전쟁 초기 이순신이 경상도로 병력을 이동시키지 못한 것은 이 같은 진관 체계가 크게 한 몫 한다. 일테면 매뉴얼에 발목 잡혀 초기 왜구 격퇴 시기를 놓쳐 버린 셈이다.

 

오늘날 기업 경영의 필수요소는 급변하는 경영환경에 신속히 적응하는 유연성이다. 과거처럼 정해진 공식으로 대응할 만큼 문제가 단순하지도 않다. 또 위기가 예고하고 찾아오는 것도 아니다. 기존의 장점은 환경이 변화함에 따라 단점이 되기도 하고, 그 반대의 경우도 된다. 요는 이를 실행하는 현장 지휘자의 자세와 판단력이다. 갑작스런 환경 변화에 대처하려면 조직에는 유연성이 보장되어야 한다. 경영에서 권한위임이라든가, 소통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순신이 모든 함대를 이끌고 첫 출전하게 된 것은 조정의 출전명령서가 도착한 1592년 4월 27일 이후 3일이 지난 30일 새벽이었다. 이때 새벽 출정을 한 것은 하루 시간을 온전히 쓸 수 있어 시간 사용의 효율성이 증대됐기 때문이다. 장군은 이때서야 판옥선 24척, 협선 15척에 전선으로 위장한 포작선(어선) 46척을 이끌고 저 어둠의 바다로 나간다.

 

매뉴얼에 발목 잡힌 군사운용 체계

임란 전 장군은 ‘방왜육전론(防倭陸戰論)’과 진관 체계라는 방위 시스템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소규모 왜선 침입과 약탈에 대한 방어차원의 대응만 고려했을 것이다. 하지만 대규모 전쟁이 발발하자 적의 대대적 공격에 모든 전선을 집중 운용하는 전략적 유연성과 민첩성을 보인다. 장군의 동적 전환 능력이 여기에 있다. 애플의 아이폰 경우처럼 느닷없이 뛰어드는 해외 강자의 공략 앞에 국내 휴대폰 업체들이 민첩한 전환능력을 드러내는 것도 이와 같다. 국내 시장만 고수하던 기업들이 해외시장의 진입기회가 생길 때 기존 핵심경쟁력을 기반으로 급속한 시장 전환력을 발휘해야 하는 것도 이와 맥락이 같다. 결국엔 운영상의 유연성이 문제인 것이다.

 

진관체계 하에서 해상에 근무하는 수군들은 1차 방어를 한다. 만약 해상 방어가 무너져 적이 상륙하게 되면 그때에는 육군이 적을 맞아 싸운다. 단계적 대응 전략인 이런 진관 체계는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매너리즘의 폐해를 고스란히 내재하고 있었다. 수군의 육군화가 진행된 것이다. 그러자 심지어 중종 무렵에는 “왜는 수전이 장기이고 조선은 기병이 장기이니 수군제를 버리고 육군을 강화해야 한다”는 논리가 제기된다. 이른바 ‘방왜육전론이 이것이다. 그러다 삼포왜변 직후, 조정에서는 약화되고 분산된 수군 역량을 보완하고자 자전자수의 방어체계에서 인근 2개 포소가 연합하여 방어하는 체제로 전환한다. 즉 ‘비어방략(備禦方略)’ 체계로 전환한 것이다. 이때부터 연합방위체제는 전라도로 확대. 실시되는데, 이렇게 변화된 방위 체계를 ‘제승방략 분군법’이라고 부른다. 제승방략은 평상시에는 자신의 방어지에 있다가 전투가 벌어지면 배정된 방어지로 집결하고, 전투가 벌어지면 정규병은 물론 비군사층까지 동원할 수 있어 군사 운용 면에서는 장점이 있었다. 즉 전쟁이 터지면 후방군이 일선으로 투입되어 혼성부대를 이루어 싸우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여기에도 문제점은 있었다. 전시에 제승방략이 발동되면 순변사(巡邊使) 또는 도순변사(都巡邊使)는 지방에 파견되어 지방군대를 모아서 지휘하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중앙에서 장수가 내려 올 때까지는 지휘관이 없는 부대였다는 점이다. 중앙의 지휘관은 내려오며 화약병기 등을 가져 오는 등 화력 보강 면에서는 장점이 있었으나, 문제는 내려오는데 시간이 걸렸고, 지형과 군사훈련 정도 등 현지사정에 밝을 수 없었다. 따라서 병력의 장단점을 즉각적으로 파악할 수는 없었다. 또한 제1방어선에 전력을 집중해 1선이 허물어지면 2선인 후방이 거칠 것 없이 무너질 수 있다는 맹점이 있었다. 임란이 발발하고 나서 처음부터 절망적인 상황이 전개된 것은 1선이 무너지면 받쳐 줄 2선이 허약했기 때문이다. 일테면 ‘백업 체계’가 미약했던 것이다. 제승방략 체계에서 연합부대의 구성은 한반도의 북방지역에서는 자체 도(道)만으로도 가능했지만, 남방지역에서는 중앙에서 파견된 지휘관의 지휘를 받아야만 했다. 경상, 전라 일대가 왜적에 취약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 때문이다. 물론, 이는 제승방략 체계 자체의 문제점이라기보다 근본적으로 우리의 군비(軍備)가 허약했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점을 예견하고 진관체제로 복귀할 것을 주장한 사람은 유성룡이었다. 그러나 제승방략이 이미 시행된 지 오래여서 바꾸기 어렵다는 이유로 임란 당시까지는 제승방략과 진관 체계가 혼용되어 쓰였다. 이는 현실에 부합하지 않은 위기관리 대처 방법이자, 국방 시스템상의 문제였다.

 

기업은 매출이든, 기존 사업의 수성과 신규시장 진출이든 백업 체제를 갖춘 경영을 해야만 한다. 허리가 든든하지 못하면 한번 무너진 시장 내 지위는 좀처럼 회복하기 어렵다. 변화하는 환경에 대응력을 높이기 위해 시나리오 경영을 염두에 두는 것도 이 때문이다. 경영의 안정성을 높이려면 대안 경영을 해야만 한다. 대안이 없을 때에는 끝도 한도 없이 나락으로 추락하게 되어 있다.

 

문제점도 있었지만, 제승방략 체계는 뒤집어 보면 지휘체계에서는 장점이 있기도 하다. 수사가 연해안 관하의 수군을 직접 관장하게 됨으로써 종래 이원적 지휘체계에서 단일지휘체계로 바뀐 점이다. 이순신이 전라좌수영 소속 5관을 직접 관할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배경에서이다. 수사의 지휘 아래 종래의 소형 병선은 대형 전선인 판옥선으로 전환되어 조선수군은 왜 수군보다 전선(戰船) 면에서 경쟁력을 가질 수 있었다. 제도적 결함은 있었지만, 최소한의 제도적 밑받침을 십분 살려 지휘자가 뚫고 나갔다는 점에서 이순신의 유연한 대응력은 임란 전체를 승리로 이끈 배경이 된다.   ⓒ인문경영연구소, 전경일 소장

 

 

인생의 방향에 대해 고민할 때 저는 이순신 장군의 산소를 찾습니다. 홀로 찾기도 하고, 가족들을 데리고 가기도 합니다. 어느 때에는 해가 들어차는 동안 그곳에서 놀기도 합니다. 책을 쓸 때에는 더 자주 갔었습니다.

장군은 누구인가? 장군을 생각할 때마다 두가지 생각이 떠오르곤 합니다. 모든 승패의 주역은 결국엔 그 사람의 수양과 수신의 됨됨이며, 이를 요즘말로 표현하자면, 리더십 문제라는 것을. 결국엔 리더 자신의 문제이지, 환경이나 조건의 문제는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두번째로는, 역사란 무엇인가? 하는 점입니다. 미일 강대국에 크나큰 영향을 받는 우리 한반도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강대국의 대(對)한반도 정책이 크게 우려되곤 합니다. 저는 늘 그런 걱정이 앞섭니다. 이런 무거운 마음은 양식 있는 글쟁이의 몫이라고만 볼 수는 없겠지요. 늘 나라 생각을 하게 됩니다. 

 


소주라도 한 잔 올려 놓고 절을 합니다. 저는 이순신을 닮고 싶습니다. 그와 같은 삶, 그의 삶의 철학. 제가 제일 좋아하는 장군의 삶의 철학은 제 자신의 철학이 되었습니다.


"대장부 태어나 쓰임을 받으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칠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밭을 갈아도 족하니라. 
권세에 아부해 한때의 영화를 누리려는 것은 나의 가장 부끄러워 하는 바다."

저는 장군과 달리 쓰임을 받지 못하면 글을 쓰며 평생 살겠지요.


저희 집 아이들입니다. 이 아이들은 아비의 이런 모습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요? 인생을 살며 이 아비처럼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장군을 새기게 될까요? 


장군의 묘를 어루만지며, 때로는 끌어안고 이 생각 저 생각 하곤 합니다. 나는 장군의 삶을 체화하고 싶습니다.
전경일 <이순신 경제전쟁에 승리하라>





 

상시적 대비책으로 전략적 유연성을 발휘하라

1592년 4월 13일 오후 부산 앞바다에 나타난 적은 이튿날인 14일 부산진을 점령하고, 15일 동래부를 함락시킨다. 5월 3일에는 서울을, 28일에는 임진강을 건너 6월 15일에는 평양을 점령한다. 부산을 치기 시작해 개전 20일 만에 서울이 무참히 무너지고, 2개월 만에 개성, 평양까지 빼앗기는 등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전개된 것이다. 일일 평균 26km의 놀라운 속도로 적이 북상한 셈이니 특별한 저항 없이 통과한 것이나 다를 바 없다. 임란 초 우리는 어떻게 해서 이렇다 할 방어 없이 밀리게 된 것일까? 임란 전 전쟁 발발을 두고 조정 내부에서는 이견과 혼란은 있었으나, 나름 전쟁에 대한 대비책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1589년 1월 조정에서는 불차탁용으로 이순신을 비롯해 무신들을 천거하기도 했으니 난의 낌새를 못 챘을 리 없다. 문제는 다른데 있다. 국방 시스템이 큰 몫을 차지한다. 임란에 임한 당시 우리 수군의 편성과 조직적 역량은 어떠했을까? 혹시 방어 시스템상의 문제점은 없었을까?


임란 당시 전라좌수군은 전라좌수사-우후-사도첨사-만호의 지휘체계로 편성되어 있었다. 이순신이 맡은 전라좌수영의 관할지역은 해남반도 남단을 경계로 그 동쪽 지역의 전라도 해안이었다.

임란 당시 조선의 수군 조직을 살펴보면, 해안지역은 수사의 관할권 하에 들어가 있었고, 육지의 수령인 도호부사, 군수, 현감 등도 수사가 관할하게 되어 있다. 육지의 행정구역과 수군의 행정구역은 서로 분리되어 있었지만 전투가 발발하면 상호 유기적인 협조 하에 작전을 수행하도록 되어 있었다. 각 관의 부사, 군수, 현감과 각 진포의 첨사, 만호 등은 평상시에는 백성을 다스리다가도 유사시에 전라좌수사의 명령이 떨어지면 각 관, 진포의 선소(船所)에 보유한 전선과 필요 인원을 이끌고 나가 관할 해역을 방위했다. 이들은 전라좌수영에 집결해 좌수사의 지시를 받게 된다. 임란 초 전라좌도는 5관(본영, 순천, 광양, 낙안, 보성, 흥양)과 5포(방답, 여도, 사도, 발포, 녹도)로 구성되어 있었다. 보유한 배도 판옥선, 하우선, 귀선(거북선)이 각각 18척, 18척, 2척과 12척, 12척, 1척으로 전체 30척, 30척, 3척 등 총 63척이었다.


장점이 단점이 되는 군사동원 체계

임란 전 지방군의 편성 방법은 전국 행정 단위인 읍(邑)을 동시에 군사단위인 진(鎭)으로 편성한 진관 체계였다. 따라서 수령으로 하여금 군사지휘관 역할도 맡게 했다. 이런 진관 체계에는 장점도 있다. 적이 쳐들어오면 우선 수군이 막고, 수군이 뚫리면 1차 방어선으로 진관이 격퇴하고, 진관이 무너지면 다음 진관이 적을 방어하는데 시간을 벌며 인근 진관과 중앙으로부터 후원군이 도착해 방어케 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1차적으로는 해당 지역에 외적이 쳐들어오면 자체적으로 방위하는 자전자수(自戰自守)의 방비책이었다. 연안에 빈번히 출현하던 왜구를 해당 지역이 자체적으로 책임지고 격퇴하도록 되어 있는 자기 책임제였다.

이런 장점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인 문제점이 있었다. 진관 체계다보니 자기 책임 관할구역을 벗어나서는 작전을 수행할 수 없었다. 구역을 벗어나 작전을 수행하려면 조정의 공식적인 명령이 있어야 했다. 그러다 보니 소규모 왜구 침략을 막는 데에는 효과적이었지만, 대규모 전쟁 사태에는 맞지 않았다. 전쟁 초기 이순신이 경상도로 병력을 이동시키지 못한 것은 이 같은 진관 체계가 크게 한 몫 한다. 일테면 매뉴얼에 발목 잡혀 초기 왜구 격퇴 시기를 놓쳐 버린 셈이다.

오늘날 기업 경영의 필수요소는 급변하는 경영환경에 신속히 적응하는 유연성이다. 과거처럼 정해진 공식으로 대응할 만큼 문제가 단순하지도 않다. 또 위기가 예고하고 찾아오는 것도 아니다. 기존의 장점은 환경이 변화함에 따라 단점이 되기도 하고, 그 반대의 경우도 된다. 요는 이를 실행하는 현장 지휘자의 자세와 판단력이다. 갑작스런 환경 변화에 대처하려면 조직에는 유연성이 보장되어야 한다. 경영에서 권한위임이라든가, 소통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순신이 모든 함대를 이끌고 첫 출전하게 된 것은 조정의 출전명령서가 도착한 1592년 4월 27일 이후 3일이 지난 30일 새벽이었다. 이때 새벽 출정을 한 것은 하루 시간을 온전히 쓸 수 있어 시간 사용의 효율성이 증대됐기 때문이다. 장군은 이때서야 판옥선 24척, 협선 15척에 전선으로 위장한 포작선(어선) 46척을 이끌고 저 어둠의 바다로 나간다.
ⓒ카인즈교육그룹, 인문경영연구소, 전경일 소장



위기의 현실화

1592년 4월 13일 왜군 158,700명이 부산포에 상륙하는 것을 시발로 임진왜란은 발발한다. 마침내 우려했던 전란이 터진 것이다. 이순신은 바로 보름 전인 3월 27일에야 대포 쏘는 시험을 했고, 하루 전에는 지자포와 현자포 발사 훈련을 했다. 그야말로 폭풍이 몰아치기 직전 간신히 대책을 마련한 것이다. 전쟁 개시 바로 전까지 부족하나마 준비역량을 강화했다는 점에서 우리로서는 불행 중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이때는 이순신이 전라좌수사에 부임한지 1년이 되는 때였다. 그렇다면 이 1년은 장군이 전란을 준비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을까? 이 짧은 기간 동안 장군은 어떻게 해전에 대비해 우리 수군의 준비상태를 파악하고 역량을 최대한 끌어올릴 수 있었을까?

이순신의 관직 경험을 보면, 발포만호 시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육전에서 경험을 쌓았다. 그런데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알다시피 발포는 전라좌수영에 속하는 군진이다. 평소 이순신의 준비자세로 보건대, 발포만호로 있던 수군지휘관 경험은 수군의 중요성과 함께 수군 작전에 대한 이해도를 대폭 높인 계기가 된다.

‘준비’란 일이 터지기 전의 예비 상태다. 평상시 준비역량이 곧 기업의 관리능력이 된다. 초유의 글로벌 경제위기가 닥치며 불확실성에 대한 준비태세는 경영자들에게 무엇보다 중요하게 요구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준비하는 기업만이 위기를 극복하고, 더 큰 기회를 맞이할 수 있다. 준비역량이 경영능력의 하나로 평가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수·절·단(守·折·斷)’의 3단계 전략

전라좌수사에 부임한 이순신은 즉각 수군을 재정비하여 전란 대비에 만전을 기한다. 이런 준비역량은 임란 초 옥포, 당포, 한산도 대첩을 승리로 이끌며 남해와 서해에서 제해권을 잡는 결과를 가져온다. 호남의 곡창지대를 지키고, 왜의 수륙병진작전을 좌절시키고, 보급로를 끊어버림으로써 왜의 기세를 잘라버리는 ‘수·절·단(守·折·斷)’의 3단계 전략은 이런 준비역량에서 나온다. 적에겐 빠른 진군이 개전 초 경쟁력이었지만, 머잖아 전선(戰線)이 길어지자 보급이 원활해지지 않게 되며 최대의 약점으로 바뀌는 상황이 벌어진다.

다행스러운 점은 전쟁 발발과 함께 각 성이 처참하게 떨어져 나갔으나 적이 속전속결로 진격함으로써 작전 수행상 필요 거점만 점령했기 때문에 주요간선도로에 접한 큰 마을들은 큰 피해를 받았으나 그 외의 소읍들은 다행히 큰 피해를 피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기록에 의하면, 전국 328개소의 읍 중에 44.8퍼센트에 달하는 147개 읍이 피해를 면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 중 상당수가 호남과 호서 지역이었다. 이들 지역을 발판으로 정부는 비축곡과 전세미를 공급받을 수 있어 초기 패전을 극복하고 장기전이 가능해 질 수 있었다. 비록 정유재란 시에는 호남조차 왜적의 침입을 받았으나, 정유재란은 단기전이었다. 그 때문에 왜군에 의한 점령기간이 그리 길지는 않았다. 준비된 역량과 적의 약점으로 인해 위기국면에 우리는 생존의 버팀목을 만들어 내며 가슴을 쓸어내릴 수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 기업들은 크든 작든 위기에 맞서 그간 마련한 준비역량으로 손실을 최소화하고, 남들이 혼란스러워 할 때 오히려 기회를 잡는 동적전환능력을 보여야 한다. 위기와 기회가 병존하는 것은 이런 상황의 가변성 때문이다. 장군은 임란 발발 전 최소 자원을 마련함으로써 국난 극복의 전기를 마련했다. 이 점에서 유비무환의 자세로 대응하는 장군의 탁월성의 경영 일면을 엿볼 수 있다.

ⓒ카인즈교육그룹, 인문경영연구소, 전경일 소장



고향으로 내려온 이순신은 45세 되던 해 1월 다시 나라의 부름을 받는다. 조정에서 임진왜란의 낌새를 알아차리고 준비하려는 것과 북방을 안정시키려는 목적으로 ‘불차탁용(不次擢用)’을 한 것이다. 불차탁용이란, 쓸 만한 무신을 특별히 관직의 서열을 밟지 않고 천거해 채용하는 것을 말한다. 당시 이순신은 북방지역의 전공으로 서열 2위에 올라 있었다. 하지만 그는 천거되지 않았다. 대신 전라감사 이광의 군관으로 임명된 후 조방장을 겸임하게 된다. 이후 잠시 선전관으로 재직하다가 유성룡의 추천으로 정읍현감에 임명된다. 정읍현감은 이순신이 쌓아가는 경험 중 대단히 중요한 몫을 차지한다.

그 무렵 정읍 현감 직을 수행하며 장군이 터득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첫째, 이순신은 치민(治民)의 명성을 얻게 된다. 백성을 다스리는데 그 대상인 백성으로부터 인정을 받은 것이다. 이 경험은 훗날 임진왜란이 터지며 왜적과 맞서 싸우는 전시 상황에서 중요한 현장 경험치로 작용한다. 이듬 해 이순신은 북방 방어를 위해 고사리, 만포진 첨사에 거듭 임명된다. 그러나 승진이 너무 빠르다는 대간들의 반대로 정읍현감 자리에 그대로 유임된다. 이 일은 오히려 훗날 왜를 막는 방어 전지(戰地)로써 전라도에 대한 보다 풍부한 경험을 쌓는 계기가 된다. 개인의 입신기회는 줄었으나, 나라의 운명으로써는 극히 다행스러운 결과였다.  

1591년(선조 24년) 2월 들어 이순신은 진도군수에 임명되었다가 특진되어 전라좌수사로 발탁된다. 무려 여섯 품계를 뛰어넘은 파격적인 승진이었다. 요즘 기업의 직급과 비교해 보면 부장급에서 전무급으로 일약 발탁 승진된 셈이다. 이런 파격적인 승진에 대해 반대가 극심했으나 조정에서는 당시 전라좌수사로 있던 이유의(李由義)가 무능하다는 점을 알고 있어서 새로운 인재 수혈이 시급한 때였다. 종6품 현감에서 정3품 수사로 파격적인 승진을 하게 되는 것은 서애 유성룡의 추천에 의한 것이지만, 당시 조정도 왜의 침입이 임박해 있다는 점을 인식한 까닭에 대비책을 세우고자 한 것이 크게 작용했다. 당시 조정은 비록 통신사로 일본에 파견되었던 황윤길과 김성일 간의 보고가 당리당략에 진실이 가려지며 만전의 대책을 기할 수 없었지만, 나름 변방 사정에 밝은 인물을 배치하고, 영·호남 요충지의 방어시설을 보수하기 시작했다. 또한 경험 있는 유능한 장수를 찾았다. 이 같은 풍전등화의 위기 상황이 작은 출발과 강직함으로 조직생활에서 크게 시련을 겪었던 이순신을 전격 역사의 무대에 불러낸 것이다. 사간원의 반대를 뒤로하고 이순신이 전라좌수사에 임명된 것은 이 같은 현실이 작용하는 것이다.

그런데 원래 이 자리는 원균이 임명받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원균은 수령으로 있을 때 근무성적이 하(下)여서 반년도 못돼 수사가 되는 것을 사간원에서 극력 반대해 이순신에게 차례가 돌아온 것이다. 이때의 인사로 원균은 전라좌수사직 대신 부령부사(富寧府使, 종3품)직으로 승진발령 받아 간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만약 이때 원균이 전라좌수사에 부임하게 되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임진왜란의 전개 방식은 사뭇 달랐을 것이다.

이순신에게 첫 수사 자리를 내준 원균은 자신의 정치적 배경인 서인의 윤근수, 윤두수의 힘을 얻어 임란이 일어나기 불과 2개월 전 전격 경상우수사가 된다. 이순신보다 수사 부임이 1년이나 늦었던 원균이 수사직을 수행하는데 자격의 적격성 여부는 차치하고라도 뒤늦은 발령으로 그가 현지적응 및 전쟁 준비기간에 있어 이순신보다 불리했을 것은 자명하다. 이때는 임란 발발 1년 2개월 전의 일이었다. 이로써 조선은 가까스로 1년여의 전쟁 준비기간을 갖게 된다.


[조직 내 위기관리 역량과 커뮤니케이션 문제]

조선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2년 전인 1590년(선조23년) 3월 일본에 통신사를 파견한다. 이 때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이미 전쟁 준비를 위해 작전군을 편성하고 후방보급망을 구성한 때였다. 조선은 통신사로 정사 첨지 황윤길(黃允吉), 부사 사성 김성일(金誠一), 서장관 전적 허성(許筬)과 수행원 200여명을 파견했는데, 왜의 사신 히라요시(平義智)가 이들을 대동하여 대마도를 거쳐 오사카(大阪)로 가서 일본 관백 토요토미 히데요시를 만난다. 당시 히데요시는 ‘정명향도(征明嚮導)’를 명하였는데 대마도의 소오 요시토토(宗義調)의 아들 요시토모((宗義智)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이것을 ‘가도입명(假道入明)’으로 바꾸어 선조에게 간절히 청한다는 내용으로 바꾸어 버린다. 통신사는 이듬해 3월에 귀국해 왜의 정세에 대해 자세히 보고했는데, 이 때 서인에 속한 황윤길은 “필히 병화가 있을 것이니 내침에 대비하여야 한다”고 보고하였고, 동인인 김성일은 “그러한 정상은 발견하지 못하였는데 윤길이 장황하게 아뢰어 인심이 동요되게 하니 사의에 매우 어긋난다”며 상반된 보고를 했다. 선조가 “수길이 어떻게 생겼던가?”하고 물으니 황윤길은 “눈빛이 반짝반짝하여 담과 지략이 있는 사람인 듯하였다”고 하였고, 김성일은 “그의 눈은 쥐와 같았는데 두려워할 위인이 못 된다”고 답하였다. 누구의 말을 믿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이에 선조는 주청사 한응인(韓應寅)을 명나라에 파견해 통신사의 보고를 바로 상주하였고, 한편 김성일의 말을 지지하여 앞서 내렸던 방위 명령마저 철회하고, 히데요시의 서계가 단순히 위협을 가하는 것이라 해석하여 예(禮)로서 설유, 위무하는 방책을 취하기로 하는 등 정세 판단력의 한계를 보인다.

이 때 유성룡은 김성일을 만나, “그대가 말한 것이 황윤길과 다르니, 만일 왜군이 실지로 온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하고 물으니, 김성일이 “나도 어떻게 왜군이 끝끝내 오지 않는다고 말할 수야 있겠는가. 다만 황윤길의 말이 너무 지나쳐 꼭 왜놈들이 우리 사신들의 뒤를 바로 쫓아오는 것 같아 인심이 흉흉하기 때문에 이와 같이 말했을 뿐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유성룡은 공석인 전라수사로 이순신을 추천하고, 경상우병사로 이일(李鎰)을, 의주목사로 형조정랑 권율을 발탁하여 전쟁에 대비케 한다. 막상 전쟁이 터지자, 김성일은 전일의 복명에 대한 책임으로 파직되었으나, 유성룡 등의 변호로 늙고 병든 조대근을 대신해 경상도우병사로 부임한다. 전쟁 발발 시 현장 지휘관이 교체된 것이다. 그는 이때에도 다시 한 번 조정에 잘못된 보고서를 올려 논란을 가중시키는데, ‘적선은 400여 척에 불과하고 군사 수십 명을 태웠으니 모두 1만 명을 넘지 못한다’는 부정확한 보고가 바로 그것이었다. 반면, 황윤길은 대조적으로 임란이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관직을 받지 못했고, 이후 병조판서에 이르렀다는 기록이 있으나 시호도 없고, 사망 일시조차 알 수 없다. 국란에 임해서도 자기 사람 챙기기에 여념이 없었던 당시 당쟁의 폐해가 얼마나 컸는지 잘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우리 조직에도 이와 같이 왜곡된 인사관리 체계와 커뮤니케이션 문제가 있는지 살펴보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일 것이다. 
ⓒ카인즈교육그룹, 인문경영연구소, 전경일 소장 <이순신, 경제전쟁에 승리하라> 저자

 


제가 이번에 신간을 냈습니다. 한번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이순신, 경제전쟁에 승리하라

2012년은 임진왜란 7주갑이자, 420주년이 되는 해!
경제전쟁의 승리자로 돌아온 이순신!
21세기 경제위기시대, 우리는 왜 이순신을 찾는가?

치열함과 탁월성의 경영, 경영학의 교범으로 이순신을 만나다.
필사즉생의 ‘이순신 정신’으로경제위기시대 글로벌 도전을
넘어 설 해법을 찾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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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에 알고 있는 ‘이순신 지식’은 거부한다!
통찰과 통섭의 시각으로 바라본 이순신 경제전쟁과 임진왜란의 전모를 밝히다!


거북선 R&D 센터 ‘골든 트라이 앵글’의 비밀!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의 승리의 중심에 거북선이 있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거북선이 이순신 R&D 센터의 ‘골든 트라이 앵글’에서 강력한 백업 시스템을 유지하는 가운데 제작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없다. 이순신 장군의 지휘 하에, 세 척의 거북선은 여수 일대 각기 다른 선소에서 제작되었다. 그 장소는 전라좌수영 본영 앞 선소, 돌산 방답진 선소, 쌍봉 선소 세 곳이다. 이순신 장군이 이렇게 각기 다른 선소에서 거북선을 제작케 한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에는 몇가지 숨은 비밀이 있다. 이순신 장군이 3곳에 거북선 제작 센터를 둔 것은 목재 등 자원 채취의 용이성, 동시다발적 제작의 필요성, 진수 후 작전 투입의 적지성(適地性), 건조 지역의 제 조건, 프로젝트 관리상의 백업 시스템 차원 등의 이유가 반영된 것이다. 요즘 말로 ‘제작 포트폴리오’를 분산해 위험요소를 줄이고, 효과성을 극대화한 것이다.

거북선 R&D 센터의 ‘골든 트라이 앵글’인 각 선소들의 위치를 살펴보면 본영 선소는 남해를 통한 경상도 해역 출격 거점으로, 방답진은 고흥반도와 순천만 일대를 포함한 전라 인근 해역 출격 거점으로, 쌍봉 선소는 만의 가장 안쪽에 위치하며 두 선소를 지원하는 백업어(back upper)로써 크게 기능했다. 한편, 전라좌수군의 본영인 진남관 위치상, 본영은 시제품 개발 센터로 ‘테스트 베드’ 역할을 수행하면서 실질적으로 해상전투용 거북선 건조를 총괄한 곳이었고, 방답진은 해상 최전방에 위치해 있고, 쌍봉 선소는 안쪽 깊숙히 위치시켜, 제1 R&D 센터와 제2 R&D 센터로 구성되었다. 물론 이때 쌍봉 선소의 경우에는 ‘숨겨 둔’ 제2 R&D 센터의 역할을 수행했을 것으로 보인다. 각 선소간 거리는 쌍봉-본영(7km), 본영-방답진(15km), 방답진-본영(17km)으로 이순신 R&D 센터는 바다를 향해 뻗어나가는 ‘진격형 골든 트라이 앵글’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순신 지식 경영의 결정판, ‘무(無)시차 경영’
이순신 장군은 조총이란 신예 무기로 무장한 왜적을 어떻게 무찔렀을까?  여기에는 가장 효율적인 함포 사격 방식이 도입된다. 장군은 함포 사격 시 화포와 회전이 빠른 판옥선 간의 ‘시너지 효과’를 극대화시켜 마치 바다 위에 떠있는 리볼버 소총처럼 배 자체를 360〬 회전시켜 가며 화포 사격을 가했다. 앞면의 포가 발사 중일 때 다른 면의 포들은 장약을 채워 넣는 방식으로 시차 없이 100% 효율성을 올리는 ‘함포 발사 프로세스’를 만들어 낸 것이다. 이 점 자체로는 적의 3단계 발사 전법인 제사전술과 성격이 같다. 하지만 왜군의 제사 전술이 흔들리는 바다·전함·사수·조총이라는 4가지 불확실한 요소가 작용하고 있는 것과 달리, 판옥선의 경우에는 움직이는 해상에서 배와 화포가 일치 되어 불확실 요소가 2개로 줄어들며 상대적으로 정확도를 높일 수 있었다.
발사거리에도 정확하게 수학적 원리가 작용했다. 피타고라스 법칙이 이용되었다. 장군은 적과 아군의 거리는 조총의 유효 사거리보다 크고, 화포 사정거리보다는 작은 지점에서 적함을 맞이해 전투를 치뤘다. 화포 사정 거리 내 적을 둠으로써 명중도를 높이고, 회전식 사격이라는 ‘무(無)시차 경영’으로 함포 사격을 가함으로써 적에게 치명타를 안겼다. 이런 방식으로 아군의 손실은 최소화시키고 적은 궤멸 상태로 몰아넣었다. 장군의 전투 수행 방식은 어떤 전투 프로세스보다 치밀하고 정밀했다. 이런 화포를 탑재한 ‘이순신 귀선’은 화포시대의 전술을 훨씬 앞당긴 것이었다.
거북선 R&D 센터의 ‘골든 트라이앵글’과 360°회전의 화포사격 ‘무시차 경영’은 이순신 장군의 지식경영의 일면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글로벌 경쟁 환경에서는 예전처럼 ‘매뉴얼 중심의 마인드’로는 경영의 본령을 치고 들어갈 수 없다. 21세기 ‘이순신 정신’으로 변화에 적응하고 위기에 대응하며 상대적 경쟁우위를 점하겠다는 창조적 발상만이 혁신의 본질이다. 글로벌 경쟁에서 이길 힘이 우리 내부에 있다는 점을 장군의 경영은 그대로 드러내 주고 있다.


이순신의 <277> 전사들, 임란 승리를 견인하다
BC 480년 크세르크세스 왕이 이끄는 페르시아 100만 대군이 그리스를 침공했을 때 , 스파르타의 왕 레오니다스가 300명의 용사를 이끌고 테르모필레 협곡을 지킴으로써 나라를 구해내는 영웅담을 그린 영화 <300>이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임진왜란 당시 전라좌수영에 소속되어 전쟁이 끝날 때까지 장군과 함께 한 ‘277명의 막하의 장수’들도 이와 같다.
이순신을 따른 막하의 장수들을 보면, 대략 277명의 이름이 올라있다. 대체로 임진년과 전쟁이 소강상태를 보인 이후 다시 재발하는 정유년에 이순신 군영에 뛰어든 핵심인물들이다. 이들은 장군과 함께 전쟁이 끝날 때까지 생사를 함께 했다. 이 277명의 핵심인물들과 더불어 장군은 7년 전쟁을 한 몸으로 치루어 냈다. 이들은 하나같이 이순신의 인품과 리더십에 흠모돼 구국의 일념으로 합류했다. 장군은 그들을 거두었고, 심지어는 발탁하여, 전투 역량을 배가하고 작전을 숙의했다. 임란 승리에 없어서는 안될 이순신의 분신과 같은 ‘핵심 인재’들이었던 것이다.


이순신을 죽음으로 몰고 간 ‘사내정치’의 폐해를 파헤친다!
여기 위대한 영웅이 있다. 그의 이름은 ‘이순신’. 누구나 영웅은 모든 사람의 위에 존재하며 만인의 축복 속에 자리매김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순신은 달랐다. 일반 백성들에겐 조선을 구한 구국의 영웅이지만 정적들에게는 제거 대상 1호에 불과했다. 이란 음모엔 역설적으로 장군의 원칙주의와 성과가 큰 영향을 미친다. 이는 임란 시기 조선 조정 내부가 ‘사내정치’로 극도로 혼란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1592년 임진왜란 발발 후 정유재란이 재발하기까지 4년여 동안, 명과 왜 사이에는 더럽고 추악한 강화 교섭이 진행되었다. 그로인해 전쟁은 소강상태로 빠져든다. 이때부터 이순신 장군에게는 죽음의 올가미가 드리워지기 시작한다. 선조 이하 대부분 조정 신료들은 전승과 백성 위무로 추앙의 대상이 된 이순신을 시기하여 제거하기 위해 거대한 음모를 꾸민다. 장군을 깍아내리기 위해 ‘원균 명장론’이 급부상한 것은 이 때문이다. 결국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기 직전, 장군은 압송돼 모진 고문을 받고 사형의 위기에 놓인다.
잡히지 않는 ‘내부의 적’에 맞선 장군의 처연함. 그 끝은 저 노량해전에서장군의 죽음으로 마무리 되는 수순만 남겨 놓고 있었다. 장군과 장군이 짊어진 조선의 운명은 백척간두 위의 처절한 깃발과 같았다.


‘이순신 죽이기’ 프로젝트, ‘왜간첩사건’의 다른 해석!
이순신 제거의 명분이 된 가토오의 도해(渡海) 정보. 이와 관련되어 다른 해석이 있다. 즉, 왜장 고니시와 가토오의 이간책이 조선 조정의 보다 주도적인 작전이었다는 것이다. 조선 조정은 정유재란의 움직임을 간파하고 두 가지 전략을 구사하게 되는데, 하나는 왜장 고니시와 가토오를 이간질시켜 고니시로 하여금 가토오를 제거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조정의 이런 계책은 오히려 일본의 반간책에 걸려들게 된다. 이 작전은 권율이 제안하고 유성룡과 비변사가 지지한 것으로 알려진다.
그 다음으로는 가토오가 바다를 건너올 때 바다에서 적을 맞아 싸워야 한다는 ‘해로차단책’이었다. 이는 임금인 선조가 지시하고 윤두수가 지지했지만, 적이 이미 바다를 건너온 상황이었으므로 성공 가능성은 물 건너간 상태였다. 미묘한 차이는 있을 수 있으나, 결국 이순신이 희생양이 됨으로써 왜는 당초 노렸던 ‘왜간첩사건’의 목적을 달성한다.


이순신 역경의 삶, ‘더블 딥(W)’을 헤쳐나오다!
‘더블 딥’에 빠지면 헤어나오기가 거의 불가능하다고들 한다. 세계 경제는 지금 ‘더블 딥’에 빠질 위험에 처해있다. 한번 깊숙이 가라 앉은 것도 모자라 두번이나 가라 앉을 수 있다는 뜻이다. 사람의 인생에 있어서도 ‘더블 딥’ 상황은 언제든 찾아올 수 있다. 이순신 장군은 자신에 닥친 고난의 길을 피해갈 수 없었다.
이순신은 32세에 무과에 급제한 이후, 함경도 동구비보의 종9품 권관(權官)으로부터 관직생활을 시작하여, 훈련원 종8품 봉사(奉事), 충청병사의 군관을 거쳐 36세에는 종4품인 발포 수군만호가 된다. 우여곡절 끝에 파직되어 훈련원 종8품 봉사직으로 강등된 이후 함경남도 병마절도사의 군관, 건원보 권관, 훈련원의 정7품 참군(參軍), 사복시의 종6품 주부(主簿) 등의 부위, 교위를 거쳐 42세에는 당시 장군 품계인 종4품 함경도 조산보 만호로 승진한다. 그러나 불운하게도 이순신은 연속 파직되고, 그후 45세 때에는 하급장교직인 전라감사의 군관으로 강등 보직되어 선전관, 종6품인 정읍현감을 거쳐 47세 때 종4품의 진도군수, 종3품의 사리포 수군첨사로 승진한다. 그 다음 곧바로 정3품의 전라좌수사로 승진한다. 임진왜란 발발 이후, 정2품의 삼도수군통제사직으로 승진한 장군은 3차 파직의 아픔을 겪지만 4개월 뒤 복직하여 전사할 때까지 품계와 관직을 유지한다. 현재로 보자면 임원이 되기 전 고참 부장급에서 두번 낙마하고, 대기업 CEO를 앞에두고 한 번을 낙마한 꼴이다. 이순신의 경력을 살펴보면 ‘W’자처럼 두번의 끝없는 추락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순신 장군의 굴곡진 인생사는 오늘날 경영자들에게 부침 많은 삶에서도 주저없이 일어설 것을 주문하고 있다.


이순신은 레오나르도 다빈치도 울고 갈 좌우뇌 통섭형 인재!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순신 장군을 잘 안다고 생각한다. 23전 23승의 승리를 이뤄 낸 완벽한 전략·전술의 귀재로써 말이다. 하지만 이는 오산이다. 다음을 살펴보자. 이순신 서정시의 백미(白眉)로 일컬어지는 ⟨한산도야음⟩은 팽팽한 긴장상태를 서슬 푸른 칼이 튕겨내는 달빛과 비유해 시적으로 풀어내고 있다. 특히 2행의 ‘안진(雁陳)’은 좌수영 위로 날아가는 기러기 떼를 군대의 진영[軍陣]으로 비유해 극한의 일체감을 문학적으로 표현해 내고 있다. 날아가는 기러기떼조차 장군에게는 군진으로 읽혔다. 시를 지을 당시 장군은 한산도의 푸른 앞바다를 더럽히는 적들을 어떻게 이겨내야 할지 깊은 전략에 고심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밖에 장군이 지은 여러 시편들은 40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의 마음을 먹먹하게 만들며 당시의 참람한 심정을 투영하게 만든다. 이순신은 타고난 감성인이었다.
감성적이면서도 장군은 과학적 원리를 동원해 각종 총통 및 거북선을 발명하고, 조총의 성능을 규명하였다. 철저하게 전쟁 승리에 대한 전략, 전술을 연구한 군사 과학자였다. 특히 거북선은 오랜 시간 누적된 조선 선박의   지식의 집합체이자, 지식통섭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일설에 의하면, 장군은 거북선 건조 시 자라와 거북을 방안에 두고 3개월 동안 관찰한 것으로 알려진다. 장군은 바닷물이 들고 나는 것을 정확히 관찰해 배의 구조를 설계하도록 했고, 전투 시 전략적 타이밍을 정확하게 계산해 적을 궤멸 상태로 몰아넣었다.
대단히 감성적이며, 한편으로는 이성적인 이 만능인은 비슷한 시기를 살았던 서양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도 울고 갈 통섭형 인재였던 것이다. 그가 살아 있었다면 세종대왕 시기 이후 ‘조선의 르네상스’를 재현해낼 수 있었지 않았을까?


한국의 경영 현실, 무자원 경영! 과연 이순신은?
예나 지금이나 전쟁은 자원으로 하는 것이다. 자원을 확보는 생존의 전제조건이다. 빈 손이다시피한 장군에게 자원문제는 장군을 괴롭힌 가장 심각한 현실적 조건이었다. ⟪난중일기⟫에는 ‘수국(水國)’이란 말이 나온다. 이는 전쟁을 치르기 위한 경제공동체를 장군이 직접 만들어 부족한 자원에 대응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장군은 호남에서 농사를 지어 군량을 확보하는 것이 전쟁 수행과 민생안정의 최우선 과제라고 파악했다. 군사와 민생을 크게 염려하여 여러 섬에 있는 목마장과 미개간지를 활용하여 피난민과 노잔병을 중심으로 둔전책을 조직했다. 전시 군량확보와 피난민을 구휼하려는 ‘두마리 토끼를 잡기 위한’ 정책의 일환이었다. 이를테면 경제공동체 건설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이를 전시경제의 한 방편으로 삼은 셈이다. 수군의 자원 확보와 백성들의 생활 안정이라는 이중 효과를 염두에 둔 창조적 발상이다.
정유재란이 터지고 칠천량해전으로 조선수군이 궤멸되고 난 뒤 장군이 다시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이순신이 손에 쥔 것은 불과 12척의 전선과 120명의 군사가 전부였다. 더구나 살아남은 군사들은 칠천량 해전에서 패한 탓에 심한 심리적 공포에 사로잡혀 있었다. 장군은 오합지졸로 막강 수군을 재건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최소한의 자원으로 강적을 맞아 싸우기 위한 환경요인 분석은 이후 해전에서 연전연승으로 나타난다.


이순신 장군의 ‘울돌목 경영’을 통해 21세기 불리한 경영환경을 뛰어넘어라
불리한 자연조건은 적에게나 아군에게나 작은 군비로 적을 맞서기에 오히려 적임지가 될 수 있다. 장군이 12척의 함대를 수습하여 회령포, 이진, 어란포 등지를 살펴본 것은 일대회전을 위한 전략적 요충지를 찾기 위해서였다. 그것은 죽음을 ‘삶의 가능성’으로 환원해 내는 작업이었다. 장군은 여수에서는 남해의 노량수로를 기가 막히게 활용하였고, 한산도에서는 견내량을 중요 방어기지로 결정했다. 이미 적선이 서쪽으로 많이 이동해 있었기 때문에 장군은 서해로 가는 길목인 명량해협을 최종 방어선으로 설정했다. 전함은 진도 북동쪽 고금면에 위치한 작은 항구 벽파진으로 항진했다. 불리함을 이용해 이기는 전략을 짜는 ‘울돌목 경영’은 이순신 경영의 백미를 이룬다.


글로벌 시장을 헤쳐나가는 이순신 정신!
한번도 해전 경험을 쌓지 못한 상태에서 임진왜란을 맞이한 이순신 장군은 어떻게 23전 23승의 완전무결한 대승을 이뤄낼 수 있었을까?
장군의 일생은 순탄치 않았다. 당파적 술수에 가려 원칙은 산산히 깨어지고, 완벽한 준비도 없이 전쟁을 맞이했다. 불확실성이 고조된 전쟁국면에서 군졸로 실각되는 아픔도 맛보았다. 그런데도 장군은 포기하지 않았다. 이후 원균이 이끈 조선수군이 칠천량 해전에서 궤멸되고 재임용되기까지 온갖 음모와 술수에 공이 가려졌다. 조선수군을 다시 맡았을 때는 함대재건이라는 불가능해 보이는 임무가 기다리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장군을 기다린 것은 죽음으로 최후를 맞이해야 끝나는 임진왜란의 종결판이었다. 어느 것 하나 위기가 아닌 것이 없었다. 우호적 경영 환경이란 존재하지도 기대할 수도 없었다. 그런데도 장군은 떨쳐 일어나 승리를 쟁취하였다. ‘이순신적’ 힘과 의지는 위기상황에서 가장 극적으로, 강렬하게 승리의 메시지를 던져 주고 있다.
장군이 이렇게 엄청난 위기 속에서 승리를 이뤄낸 비밀은 무엇일까? 아군뿐만 아니라 적군에게까지 칭송을 받는 완전무결한 승리의 원동력은 무엇일까?
세계 군사학계의 연구 대상이 되고 있는 생생한 승리의 여정을 통해 승리의 비밀과 벤치마크 해야 할 점들을 살펴보면, 불리한 경영환경에 대처하는 대원칙이 돋보인다. ‘이순신 정신’은 단순한 개별 전투의 승리가 아닌, 전쟁의 양상을 송두리째 바꾸어 버리는 궁극적인 승리를 쟁취해 내는 비결이 무엇인지를 상세히 보여준다. 2008년, 2011년 세계 경제 위기와 함께 경제전쟁에서 방향타를 잃은 이들이게 이순신은 하나의 이정표가 된다. 위기 속에서 ‘희망’을 불러내는 ‘이순신 정신’은 경영 현장에 생생한 교훈으로 지금 다가오고 있다. 


책 속으로
1960년대 국민소득 79달러라는 최빈국에서 90년대 완제품 시장으로 진출한 쾌거는 이미 과거의 성과에 불과하다. 그간 우리의 수종 산업이었던 반도체, 정보통신, 가전, 자동차, 조선 등 주력산업이 크게 힘을 잃어 가고 있다. 세계 12위의 경제 강국이라지만 내수 부문은 보잘 것 없다. 글로벌 경쟁이 격화되지만, 우리 경제의 미래에 대한 불안감은 좀처럼 가시지 않는다. 어떻게 하다가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을까? 이 같은 총체적 위기상황을 타개할 묘안은 무엇인가? 이순신이 해답이다.
-(1장)

1592년 4월 13일 158,7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적이 부산포에 상륙하는 것을 시발로 전란은 발발한다. 마침내 우려했던 임진왜란이 터진 것이다. 이순신은 바로 보름 전인 3월 27일에야 대포 쏘는 시험을 했고, 하루 전에는 지자포와 현자포를 쏘는 훈련을 했다. 그야말로 폭풍이 몰아치기 직전 간신히 대책을 마련한 셈이다. 전쟁 개시 바로 전까지 부족하나마 준비했다는 점에서 우리로서는 불행 중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이순신이 전라좌수사에 부임한지 1년 만에 임진왜란이 일어나는데 전란을 준비하기에 그 1년은 충분한 시간이었을까? 이 짧은 기간 동안 장군은 어떻게 해전에 대비해 우리 수군을 파악하고 역량을 최대한 끌어올릴 수 있었을까?
이순신의 관직 경험을 보면, 발포 만호 시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육전 경험을 쌓았는데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중요사항이 있다. 알다시피 발포는 전라좌수영에 속하는 군진이다. 평소 이순신의 준비자세로 보건대, 발포만호로 있던 수군지휘관의 경험은 수군의 중요성과 함께 수군 작전에 대한 이해도를 대폭 높인 계기가 되었다.
‘준비’란 일이 닥치기 전의 예비 상태다. 평상시 준비 역량이 곧 기업의 관리능력이다. 초유의 글로벌 경제위기가 닥치며, 불확실성의 경제에 대한 준비태세는 경영자들에게 무엇보다 중요하게 요구되고 있다. 준비하는 기업만이 위기를 피하고, 더 큰 기회를 맞이할 수 있다. 준비역량이 경영능력의 하나로 평가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2장)

학익진은 학(鶴)이 날개(翼)를 펼친 듯한 형태를 취한 진법(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일렬 횡대의 일자진(一字陣) 형태를 취하고 있다가 적이 공격해오면 중앙의 부대는 뒤로 차츰 물러나고, 좌우의 부대는 앞으로 달려 나가 반원 형태로 적을 포위하며 공격하는 전투전개방식이다. 이 진법은 육상 전투에서 기동력이 뛰어난 기병(騎兵)들이 수행하기에 좋을 뿐 아니라, 해상 전투에서도 기동력이 뛰어난 전선(戰船)들이 효과적으로 적을 공략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이순신은 육전 전투법을 해상에 변용, 적용해 한산대첩(閑山大捷) 등에서 왜군을 대파한다. 여기엔 기동성이 뛰어난 함대 운용과 조총보다 사거리가 긴 화포 공격이 창의적 전법과 복합시너지를 내며 효과를 극대화시킨 면이 주효했다. 여러 요소를 통섭해 전술지식을 현장에 접목시킨 장군의 창조적 혁신과 운용의 묘미가 읽혀진다. 기업은 장군이 펼쳤던 학익진 전법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학의 날개를 활짝 펴고 글로벌 시장을 품을 대담한 구상은 무엇일지 생각해 보게 된다. –(3장)

영화 <300>에 나오는 것처럼 이순신과 함께 한 277명의 핵심 전사들은 이순신과 함께 했다. 이들의 이름을 지우고서 임란 승리를 평가할 수는 없다. 누가 이토록 목숨을 걸고 적에게 맞서 싸울 수 있었을까? 그들은 무엇 때문에 소중한 목숨을 아낌없이 내놓았을까? 이순신 때문이다. 마음으로부터 부하와 백성의 충성을 이끌어 낸 이순신과 더불어 일심동체의 협력체계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이는 신뢰라는 자산이 없으면 결코 얻어질 수 없는 것이었다. –(4장)

빈손으로 전쟁을 치러야 하는 장군에게 자원이 넘쳤던 경우란 없다. 장군은 늘 가진 자원이 너무나 제한적이었기 때문에 상상을 뛰어 넘는 발상으로 창조적 혁신을 이끈다. 불리한 군비(軍備)를 뛰어 넘어 적의 경쟁우위를 무력화시킬 전략병기를 만들려는 역발상에서 나온 것이 기존의 거북선을 재창조 해 낸 ‘이순신 혁신 거북선’이다. 거북선은 적에게 간담이 서늘한 공포의 대상이었다. ‘이순신 거북선’은 여러 면에서 달랐다. 철저하게 전투 활용을 목적으로 했다. –(5장)

외부의 적과 맞서는 건 주적이 명확하다. 그러나 내부의 적에 맞서는 데엔 그보다 더 큰 고충이 뒤따른다. 더구나 상대가 왕과 그를 둘러싼 측근 세력들일 경우에는 더 그렇다. 일생 동안 장군을 괴롭힌 내부의 적은 임금인 선조의 변덕스러움과 불신 그리고 질투와 시기심이었다. 이순신이 패하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장군을 따르는 전라도 민심과 군사들의 추앙은 살아 있으되 죽은 자로서 장군이 공을 세우기를 바라는 식이었다. 이순신의 처연함이 여기에 있다. 나는 장군의 이런 면을 생각하면 너무나 가슴 아프다. 작은 것에 연연한 세태 때문일까. 공을 세우되 살아 있으면 안 되는 영웅의 운명은 장군의 심중을 짓눌렀다. 공을 세우면 세울수록 장군은 원균과 조정 내 그의 후견인들로부터 끊임없는 방해와 모함에 시달렸다. –(6장)

장군은 울돌목의 가파른 물살을 역이용해 명량해전을 승리로 이끈다. 이는 마치 오늘날 시장 변동요인, 경쟁사의 실책, 빠른 기술 변화 등 가변적 요소가 복합적으로 어우러진 복잡계 경영환경을 보는 듯하다. 글로벌 경제위기가 닥칠수록 경영자들은 불리한 경영조건을 투지와 역발상의 사고로 뛰어넘을 것을 요구받고 있다. 불리함을 이용해 새로운 생존 판도를 짤 때 위기와 맞서 이길 수 있는 전략이 나온다는 것을 21세기 ‘울돌목 경영’은 경영자들에게 웅변적으로 드러내 주고 있다. –(7장)


출판사 리뷰
시대를 초월한 경영의 힘!
힘에 부친 글로벌 도전 앞에서 새로운 활로를 찾고자
고군분투하는 이들에게 던지는 ‘이순신 메시지’의 정수!

어느 개인이나 기업이든 세상을 깜짝 놀래킬만한 기적을 이루고 싶어 한다. 그런데 다들 성공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위기가 찾아옴에도 생사를 건 전투에 임하듯 떨쳐 일어서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사이 경쟁자들은 발빠르게 위기를 넘어 새로운 시장을 창출하고 입지를 든든히 구축한다.

우리 역사를 보면 무수히 많은 왕과 장군들이 생멸해 왔지만, 위기를 뛰어넘어 진정한 승리를 얻은 ‘경영자’는 많지 않다. 이순신 장군은 치열하고 어려운 환경에서 필승의 전략을 짜고 완벽한 승리를 이끈 성공 사례로 가장 두드러진다.

이순신 장군은 서른 두살에 무과에 급제하며 처음으로 무인의 길로 들어섰다. 그에게는 숫한 난관과 시련이 닥쳤지만, 이 놀라운 원칙주의자이자 완벽주의자는 시련 앞에 굴하지 않았다. 묵묵히 준비역량을 기르고 창조적 혁신 활동에 몰두했다. 남들이 혼란스러워할 때 오히려 기회를 잡아 조선, 나아가 세계 해전의 역사를 온 몸으로 썼다. 온 나라가 ‘불안정한 성공의 덫’에 걸려 한치 앞도 내다보지 않고 내부 문제에만 골머리를 썩고 있을 때, 훗날 승리의 훌륭한 밑천이 될 분야에 미리 뛰어들어 고군분투한다. 그의 혁신 활동은 단순히 전투 승리에 그치지 않고 전쟁 전체 판도를 뒤바꾸는 파급력을 지닌 전략으로 역사 전개 방식을 틀어 버리는 괘거를 가져왔다. 여기에 세상의 변화를 읽는 눈과 통찰력, 유연성이 위기를 기회로 전환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것이 장군으로 하여금 전투, 나아가 전쟁을 승리로 이끌게 한 배경이다. 장군의 평생에 걸친 ‘이순신 정신’의 발로는 역발상 전략과 함께 창조, 신뢰, 협동의 정신으로 나타난다. 창조는 믿을 수 없는 승리의 원동력이 되었고, 신뢰와 협동 정신은 ‘결전 의지’로 집약된다. ‘결전 의지’의 정신과 함께 이순신 장군의 정신적 뿌리는 ‘필사즉생 필생즉사’의 정신이다.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고, 죽고자 하면 살 것이다’ 라는 각오 하에 모든 전투를 수행했다. 조선 수군 승리의 토대는 이것이다.

이 책은 이순신 장군이 부하들과 백성들의 도움을 받아 정적들의 음모와 술수를 넘어 승리가 불가능한 상황임에서도 어떻게 떨쳐 일어나 완전한 승리를 이루었는지를 극명하게 드러내주고 있다. 나아가 유려한 필체로 이순신 장군의 인간적인 면모와 공인으로서의 삶의 면면을 살피며 장군을 21세기 경영리더로 새롭게 되살리고 있다. 이순신의 경영학적 삶에서 21세기 경영 리더상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순신 정신을 21세기 경제·경영학적 의미로 해석한 이 책은 장군의 승리의 비밀이 무엇인지, 그 마지막 승리의 여정까지 따라가게 한다. 나아가 21세기 대한민국 기업의 향방에 웅혼한 가늠자가 되어 준다. ‘이순신 정신’은 그 확장판인 글로벌 경제전쟁의 판도를 바꾸고 궁극적으로 승리에 이르게 하는 웅변이 되고 있다. 21세기 초우량 기업의 조건은 ‘이순신 정신’으로부터 시작된다.#

이순신의 첫 출발은 화려하지 않았다. 무과 병과에 합격한 후 첫 관직은 마땅히 정9품인 효력부위(效力副尉)여야만 했다. 그러나 종9품인 권관에 임명되고 만다. 자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조선시대 서반의 품계는 18품 30계로 되어 있다. 7, 8, 9품은 부위, 5, 6품은 교위, 3, 4품은 장군, 1, 2품은 대부로 되어 있다. (35~37쪽 〈조선시대 서반의 품계와 대한민국 현재 직급체계 비교〉 참조) 관직 초기부터 불이익이 함께 했지만, 장군은 이를 원망하거나 불만삼지 않았다. 오히려 피나는 자기 노력의 기회로 삼았다. 어떤 상황에서도 실력주의는 현실을 헤쳐 나가는 열쇠가 된다.

장군에 대한 일화가 있다. 첫 관직인 권관 때의 일이다. 당시 감사로 있던 이준백이 자기 관할 하에 있는 여러 진을 순행하면서 변방 장수들에게 활쏘기를 시킨 적이 있다. 이때 이순신만이 유일하게 감사의 우대를 받을 정도로 무예에 능통했다. 평소 끊임없는 자기개발이 관직 초기부터 장재(將材)로서 ‘가능성’을 드러낸 것이다. 일테면 요즘 인사용어로 ‘잠재적 핵심인재’였다. 경영자가 되고자 하는 자의 준비역량을 엿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순신은 동구비보에서 근무를 마치고 훈련원 봉사(종8품)로 승진된다. 이때가 35살이었다. 그런데 훈련원 봉사 재직 시 조직생활에 큰 위기가 닥친다. 상관인 병조정랑(정5품) 서익이 행한 정실 인사에 반대했다가 그와 관계가 악화된 것이다. 출세를 위해 상관의 부정에 눈 감고 대충 타협했더라면 보다 평탄한 길을 걸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순신은 원칙을 지켰다. 서익과의 악연은 그 뒤로도 계속 된다.

이순신은 그 후 충청병사의 군관이 되었다가 36세에는 전남 고흥반도 끝 발포(鉢浦)의 수군만호가 된다. 이때 수군 장교로 바다와 첫 인연을 맺게 된다. 훗날 남해 바다에서 왜적을 완전 격멸하는 운명적인 수군 생활이 시작되는 것이다. 발포만호는 전라좌수사의 지휘를 받는 수군의 단위부대였다. 이때의 작은 경험은 후에 장군이 나라를 구하는데 크게 쓰인다. 만호 시절 이순신은 바다를 알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했다. 자신이 모르거나 확인해야 할 일이 있으면 부하들에게 꼼꼼히 캐묻고, 수군 전술의 강약점을 몸소 체득했다.

이후에도 상급자와의 갈등은 계속 이어졌다. 감사 손식이 벌을 주기 위해 진도(陳圖)를 그리게 하는 시험을 치르게 했고, 전라좌수사로 부임한 이용은 주변의 질시를 믿고 호시탐탐 벌 줄 구실만 찾았다. 그러다가 군기경차관으로 발포에 내려온 서익이 다시 보복성 보고서를 올리면서 결국 파직되고 만다. 5년 2개월의 군 생활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묻고 싶은 게 있다. 이순신을 파직한 서익이 훗날 임진왜란 때 장군의 활약상을 보았다면 그는 자신의 경거망동과 비윤리적 행동을 참회하였을까? 그런 서익은 이순신의 활약상을 보지 못한 채 임란이 일어나기 5년 전 사망하고 만다.

장군의 삶에서 우리가 되짚어보게 되는 게 있다. 어느 조직이든 원칙주의자의 삶은 고달프기만 하다는 것이다. 특히 비윤리적이고, 정당하지 못한 사리사욕을 좆는 조직일수록 정의로운 사람은 눈엣가시로 인식되기 마련이다. 당시 조정의 풍조가 이러했다. 이런 부패구조가 임란을 불러들이는 주요 내부원인이 된다. 이순신이 상사와 갈등을 겪게 된 것은 그의 강직한 성품 탓이 크다. 원칙주의적인 면모는 개인적 어려움 앞에서도 꺾이지 않았고, 현실과 타협하지 않는 자세로 줄곧 나타났다. 장군은 불의와 타협하지 않았고, 그런 강직함은 적과 맞서 싸우는 데서도 수군의 기강이 되었다. 어느 때보다 윤리경영이 강조되고 있는 이즈음의 글로벌 경영환경에서 친기업적 정서의 핵심은 윤리의식에서 나온다. 원칙을 져버릴 때, 기업은 걷잡을 수 없이 고객 불만과 여론의 뭇매를 맞게끔 되어 있다.

1989년 3월 24일 미국 알래스카 주 부근 프린스 월리엄 해협에서 유조선 엑손(Exxon) 발데스호가 암초에 전복되는 미국 역사상 최악의 해양 사고가 발생했다. 좌초된 선박에서는 3,700여 톤의 원유가 쏟아져 나와 알래스카 해안 인근수역 72km가 기름으로 뒤덮였다. 6개월 사이에 4,800km의 천연 생태계가 파괴됐다. 사고 당시 배를 조정한 사람은 무면허 3등 항해사인 그레고리 쿠진스(Gregory Cousins)였다. 사고 직후 선장 조셉 하젤우드(Joseph Hazelwood)의 행방은 묘연하기만 했다. 해안경비조사단은 선장과 3등 항해사의 혈액을 채취해 음주 측정을 했는데, 사고 후 9시간이 지났어도 선장의 혈액 내에서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높은 알코올 농도가 측정되었다. 사건 발생 후 엑손은 언론에 사건 설명을 회피했다. 그러다 전국 방송이 시작되고 나서야 대변인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24시간이 지나도록 엑손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일주일이 지나서도 마찬가지였다. 회장인 로렌스 럴(Lawrence Rawl)은 사건 발생 후 언론에 대해 매우 강한 불신감을 드러내 인터뷰를 요청하는 언론사에 짜증을 내기도 했다. 사고에 대한 파장이 확대되어 미 정부가 ‘대형 참사’로 규정하자 그제서야 로렌스 럴 회장은 생방송 TV 인터뷰에 출연했지만, 대책을 묻는 질문에 답변 대신, 비난의 화살을 언론 쪽으로 돌렸다. 엑손이 저지른 사고와 불성실한 대처의 결과는 비극적이었다. 기름 유출에 따른 비용으로 약 70억 달러가 부과되었다. 무책임한 기업 활동에 대해 부과된 벌금액 중 사상 최고액이었다. 또 유막(油膜) 제거 등 청소비조로 21억 달러를 지불해야만 했고, 법원의 판결에 따라 11억 달러의 피해보상금도 추가로 지불해야만 했다. 또한 선주는 1억 달러의 벌금을 물게 되었고, 항해사도 형사 처벌을 받아야만 했다. 이후 선장은 90일의 징역형을 선고 받았지만, 이에 대해 형량이 너무 가볍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실추된 기업 이미지는 이 보다 훨씬 심각한 것이었다. 엑손은 세계 1위의 석유회사에서 3위로 추락하였을 뿐만 아니라, 엑손 발데스는 ‘오만한 기업’의 동의어로 회자됐다. 이 사건은 1년 넘도록 언론에 오르내렸고, 사람들은 쉽게 잊으려 하지 않았다. 비윤리적 경영 행태와 오만한 태도에 대해 전 미국인의 심판이 뒤따랐던 것이다. 이후 기업들에게 윤리경영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원칙으로 부각되었다. 윤리경영의 중요성을 되짚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장군의 초기 고충은 썩어 빠진 조정 현실이 반영된 것이었다. 또한 올곧은 삶의 철학이 투영된 것이었다. 파직된 지 4개월 후 이순신은 서울 훈련원 봉사로 복직된다. 비록 하관말직이었지만, 장군은 본분을 다했다. 쓰러져도 다시 일어나는 오뚝이처럼 장군을 일으켜 세운 것은 굳은 의지였다. 39살이 된 1583년 10월 장군은 3개월간의 함경도 병사 군관 생활을 마치고 함경북도 두만강변 건원보로 전임돼 여진족 추장을 사로잡는 공을 세운다. 이는 이순신이 처음으로 지상전투에서 승리한 작전이었다. 그러나 직속상관이었던 북병사 김우서가 이순신 단독 작전을 시기하는 바람에 다시 불이익을 받게 된다. 초기 관직 생활은 이처럼 주변의 질시와 속 좁은 처사에 적잖은 시련과 마음고생을 겪은 시기였다.

이후 훈련원 벼슬이 만기 되어 참군(정7품)으로 승진했다가, 사복시 주부를 거쳐, 조산보 병마만호에 임명된다. 그러나 이때에도 병마절도사 이일이 여진족 침입을 패전으로 규정하면서 이순신은 투옥된다. 이순신이 병력 증강을 요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는 가운데 소수의 병력으로 여진족 침입을 격퇴하고 군민 60여 명을 생환시킨 전투였지만, 장계는 패전으로 올라갔다. 다행히 전투성과가 인정돼 조정으로부터 패전이 아니라는 판정이 내려지며 이순신은 처형의 위기에서 간신히 모면된다. 그런데 여기에 아이러니한 대목이 있다. 패전이 아니라면 혹독한 인사 상 불이익이 없어야 할 텐데 이 사건을 계기로 이순신은 백의종군하게 된다는 점이다. 생애 첫 백의종군이었다. 이순신을 파면시킨 이일은 당시 조선 장수의 상징적인 위상을 지닌 인물이었다. 하지만 이름값과 달리 그는 임란이 일어나자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선봉군 2만 명을 상주에서 막지 못한 채 무참히 패배하고 만다.

조산보 전투 이후 이순신은 벼슬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온다. 정치가 판치는 군내부에 환멸을 느꼈을 법하다. 보통 사람 같으면 작은 직위라도 유지하려 했을 테지만, 이순신은 자신의 신념에 충실했고 이를 평생 실천하고자 했다. 이순신은 나라를 지키는 일에 마음을 다하였으나, 비울 때에는 찬 서리처럼 엄격하게 비워냈다. 비웠기에 다시 일어설 수 있었고, 역사의 부름을 받았다. 이순신을 이렇게 결단케 한 것은 나라와 백성을 구하려는 일관된 의지와 헌신의 정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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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휴가를 이용해 남해 한려 수도 일대를 돌아보았다. 집필과 관련된 여행이었지만, 나름 휴가를 자청한 여정이기도 했다. 남해 일대에 들어서는 순간, 이순신 장군과 관련된 유적지가 이토록 많을 수 있나 하는 생각이 자연스레 들 정도로 ‘이순신’은 가까이 있었다. 400여 년 전의 조선의 삼도수군통제자였던 이순신을 만나며 남다른 생각을 하게 됐다. 23전 23승의 무결점 완벽 승리야 익히 아는 바이지만, 승리의 원천을 만들어 낸 ‘이순신적’ 힘은 어디서 온 것일지 궁금했다. 돌아와 자료도 찾고, 쓰던 글편들을 다시 훑으며 이순신적 힘은 인문과 타학문 분야가 결합된 ‘통섭형 발상’에 있음을 알게 됐다.

예를 들어 보자. 우리가 익히 아는 거북선은 조선수군의 주력 함선인 판옥선과 함께 핵심 전선인데 배의 건조 방법이 특이하다. 거북선은 간소화 선형 방식의 설계를 따름으로써 건조시간, 비용, 노력 등 여러 면에서 경쟁우위를 가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 간소화 선형이란 요즘 경영용어로 핵심에 집중한 단순화(simplicity)를 말한다. 또 전투 시 우리 지형에 맞는 구조를 적용해 적을 제압할 수 있었다. 남해안의 낮은 연안 수심을 고려해 회전력과 기동성을 높인 것은 이처럼 배의 평평한 구조가 큰 영향을 미친다. 또한 선체가 커서 화포나 총통 등 육중한 무기를 싣고 다니는 데에도 크게 유리했다. 이는 이순신 장군이 ‘조선학’ ‘지리학’ ‘해양학’을 두루 고려한 것을 뜻한다.

거북선은 오랜 시간 집적된 선박 지식의 모든 특장점도 반영하고 있다. 적을 무력화하기 위해 창선을 꽂고, 화약무기, 철갑판, 선수방패 등을 탑재함으로써 압도적 경쟁우위를 살린 혁신 전함이었다. 일설에 의하면, 이순신 장군은 거북선 건조 시 자라와 거북을 방안에 두고 3개월 동안 관찰한 것으로 알려진다. 그러고 보니 자라나 거북의 배 밑 구조와 판옥선 및 거북선의 배 밑 구조는 모두 평평하다는 공통점이 있다. 장군은 바닷물이 들고 나는 것을 정확히 관찰해 배의 구조를 설계하도록 했고, 또 전투 시 전략적 타이밍을 정확하게 계산해 적을 궤멸로 몰아넣었다. 이는 장군이 ‘생물학’과 ‘조류학’적 지식을 거북선 창제시 고려했음을 알게 한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임진왜란은 지식과 과학의 전쟁이었는데, 거북선의 경우에는 오랜 시간 누적된 조선 선박 지식의 집합체이자, 지식통섭의 결과라 할 수 있다.

거북선선을 만든 각 선소의 위치도 절묘하다. 임진왜란 당시 장군의 지휘 하에 건조된 세 척의 거북선은 여수 일대 각기 다른 선소에서 제작되었다. 전라좌수영 본영 앞의 선소, 돌산 방답진의 선소, 쌍봉 선소가 그 셋이다. 이순신 장군이 이렇게 각기 다른 선소에서 거북선을 제작케 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이는 목재 등 자원 채취의 용이성, 동시다발적 제작의 필요성, 진수 후 작전 투입의 적지성(適地性), 건조 지역의 제 조건, 프로젝트 관리상의 백업 시스템 차원 등 여러 이유가 반영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일종에 제작 포트폴리오를 분산해 위험요인을 줄이고, 효과성을 높인 것이다.

거북선 R&D 센터의 '골든 트라이 앵글'로 볼 수 있는 각 선소들의 위치는 본영 선소는 남해를 통한 경상도 해역 출격 거점으로, 방답진은 고흥반도와 순천만 일대를 포함한 전라 인근 해역 출격 거점으로, 쌍봉 선소는 만의 가장 안쪽에 위치하며 두 선소를 지원하는 백업어(back upper)로써 크게 기능했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전라좌수군의 본영인 진남관 위치상, 본영은 시제품 개발 센터로 테스트 베드 역할을 수행하면서도 실질적으로 해상전투용 거북선 건조를 총괄하고, 방답진은 가장 해상 최전방에 위치시키고, 쌍봉은 안쪽 깊이 위치시켜, 제1R&D 센터와 제2R&D 센터로 구성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물론 이때에는 쌍봉 선소의 경우 ‘숨겨 둔’ 제2의 센터 역할을 수행했을 것으로 보인다. 각 선소간 거리는 쌍봉-본영(7km), 본영-방답진(15km), 방답진-본영(17km)으로 이순신 R&D센터는 바다를 향해 뻗어나가는 '진격형 골든 트라이 앵글'의 젼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 점을 분석해 보면, 장군이 ‘지형학’, ‘설비입지학’, ‘시설 운영학’ 등을 두루 고려해 거북선 제조의 역할을 맡은 선소를 만들었을 것으로 보인다. 예로부터 여수 선소마을은 고려 때부터 배를 만든 곳인데 자연 지세를 이용하여 이곳 쌍봉 선소 굴강(屈江)에서 거북선을 만들고 대피시켰다고 한다. 굴강은 천연 해안 요새에 구축한 인공호로 썰물 때는 물이 빠졌다가 밀물 때는 물이 찬다. 아마 장군이 만든 거북선은 물이 차오를 때를 기다렸다가 진수식을 거행하며 적을 무찌르기 위해 굴강을 박차고 저 먼 바다로 나갔을 것이다.

장군이 행한 여러 전략, 창제 작업을 돌아보며, 임진왜란 승리는 거져 얻어진 게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막하 병졸들과 필사즉생의 각오로 전투에 임한 것은 물론, 승리의 조건을 만들기 위해 부단한 통섭적 노력을 기울인 결과였음이 분명하다. 400년 전 왜적을 맞아 싸운 해전 승리의 밑받침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미국발 경제 위기가 2008년에 이어 2011년에 들어 다시 불거지며, 세계 경제가 한없이 휘청거리고 있다. 우리 기업들도 이에 영향을 받고, 개개인의 삶도 마찬가지로 그 영향권 내에 있다. 이럴수록 이순신 장군의 지혜처럼 다양한 지식을 통섭해 내는 능력을 발휘하면 어떤가? 평소 접하지 않던 분야의 책도 손에 쥐면 다른 분야의 지식에서 전혀 다른 획기적 생각을 얻을 계기를 맞이하게 된다. 가을은 책 읽는 계절이다. 이번 가을엔 굳이 베스트셀러가 아니라 남다른 책을 손에 쥐어 보자.
전경일. 인문경영연구소장.《이순신, 경제전쟁에 승리하라》저자.


나는 장군을 만난다. 그 첫 걸음을 장군의 생애를 돌아보는 일로 시작한다. 이순신의 생애를 돌아보는 작업은 자칫 흐트러지기 쉬운 경영자의 옷깃을 여미게 한다. 마음마저 숙연해지고 담대해 진다. 장군은 어떤 성장과정을 겪었을까? 성장기, 남다른 우여곡절은 없었을까? 장군의 삶의 장대한 완결판을 보기 위해 나는 그 조촐한 첫출발로 돌아가고자 한다. 처음과 끝이 일관된 리더십은 출발점에서부터 대한민국 경영자들과 함께 한다.

이순신은 1545년 3월 8일 서울 마르내골(건천동)에서 태어났다. 자는 여해(汝諧), 이름은 순(舜). 중국 고대 성군인 순임금을 벤치마크 한다는 뜻에서 순신(舜臣)이라 지었다. 장군은 여덟 살 되던 때 충남 아산의 어머니 친정 동리로 이사해 글방을 다닌다. 집안의 경제적 어려움이 이사를 가게 된 배경이다.

장군은 어렸을 때부터 무(武)의 기상이 넘쳤다. 결혼한 후에도 글공부와 활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아산 현충사에 가면 지금도 장군이 활쏘기를 하던 활터가 남아서 관람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여름엔 풍성하기만 한 진녹의 풍경이, 가을엔 노란 은행나무 잎이 장관이다. 장군은 어려서부터 문보다는 무를 선호했다. 본격적으로 무예를 배우기 시작한 것은 22세, 장군의 멘토인 장인 방진(方震)으로부터 활쏘기를 배우기 시작하면서부터이다. 방진은 보성군수를 지낸 인물이다. 문에서 무로 방향을 튼 것도 무장(武將)의 그릇을 알아 본 장인의 권유에 의해서였다. 10년 후인 32살에 이순신은 식년무과에 급제한다. 전체 29명 중에서 12등이었다. 급제와 함께 12월 함경도 삼수(三水, 혜산)동구비보의 권관(權官, 종9품)에 임명됨으로써 첫 관직에 진출한다. 늦깎이 관직 생활을 경영의 불모지대인 국토의 최북단에서 시작한 것이다. 군인으로서 이순신의 삶은 32세에 군문에 들어선 후 그가 저 노량에서 54세의 나이로 질 때까지 22년간 이어진다.

이순신의 경력을 살펴보면 특이한 점이 있다. 전반 15년간은 육군에서 보냈고, 후반 7년은 수군에서 복무한 점이다. 특히 후반 7년은 고스란히 임란왜란 기간과 겹쳐진다. 육전과 해전의 통합된 경험과 노련한 전략은 바로 이런 경력에서 나온다. 또한 뭍과 물의 백성의 삶을 살펴보고, 목민관의 기질을 발휘하게 되는 것도 이런 현장 경험이 주효하게 작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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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소개]
오는 7월 출간 예정으로 있는 이순신 장군에 대한 신작의 서문을 옮겨봅니다.

경제위기시대, 글로벌 도전을 넘어설 해법을
이순신에게서 찾다 


격랑의 바다가 운다. 명량의 울돌목에서, 노량의 쪽빛 바다에서 생과 사를 가르며 밤새도록 울어댄다. 가슴을 치며 울고, 지칠 줄 모르는 울음 때문에 운다. 이순신 장군의 발자취를 따라 나서며 현충사에서 만난 장검의 검명(劍名)에 새겨진 피울음 때문에 울고, 남해 바다의 눈 시린 푸르름 앞에서 운다. 떨리는 가슴으로 한없이 울어댄다. 풍전등화와 같은 경영현실과 앞뒤로 꽉 막힌 한국경제의 갑갑함 때문에 운다. 울다가 떨쳐 일어선다. 이대로는 주저앉을 수 없기에, 피울음을 토하며 파도처럼 다시 일어선다. 울음은 뒤로 물러서는 퇴행적인 사고가 아니다. 앞으로 나가고자 하는 분발심이다. 그 때문에 다시 일어나 승리의 깃발을 곧추 세운다.

내가 그토록 만나고자 했던 400여 년 전의 이순신은 현재진행형이다. 저 노량에서 장렬히 최후를 마친 이순신을 만난다. 죽어서 다시 살아 난 이순신을 만나 초불확실성의 경영환경을 뚫고 나갈 묘수를 배운다. 어떻게 해야 지금의 어려운 상황을 극복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적은 자원과 작은 생각을 떨치고 초우량기업의 조건을 굳건히 만들어 낼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세계를 제패하고, 미래에도 흔들림 없는 경영의 주춧돌을 든든히 놓을까? 불확실성의 시대, 글로벌 차원의 비전을 이뤄내고, 초우량 기업으로 우뚝 설 차별화된 우리만의 묘안은 무엇인가?

세계 경제위기와 복잡계 경영환경에 맞서 대한민국 경영자는 급류가 소용돌이치는 울돌목 앞에 가 서야 한다. 새로운 경영전략으로 승리의 판을 다시 짜야 한다. 개인적으로도 장군이 지닌 결단과 통찰력, 창의와 솔선수범, 인내심과 희생의 덕목을 배우고 피나게 갈고 닦아야 한다. 장군의 청렴성을 통해 기업 윤리경영의 올바른 지평을 펼쳐나가야 한다. 배우고 깨달을수록 장군의 리더십을 내면화시키는 작업은 대한민국 경영자들의 피톨이 튀게 한다. 죽어야 다시 살아날 수 있기에 피나는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경제 난국을 헤쳐 나가는 유일무이한 방법이다.

장군의 삶은 21세기 경영자들에게 무엇을 말해 주는가? 어떤 울림으로 다가오는가? 장군의 생애와 고뇌를 차근히 밟아 나가다보면, 어느덧 숙연해지고 본받고 싶은 면이 한 둘이 아니다. 자칫 작은 이해와 성과에 들뜨기 쉬운 가벼움을 물리치고 웅혼한 경영의 역사를 써나가는 뚜렷한 징표로 성큼 다가온다. 장군의 삶을 되짚으며 더 커져가는 경영자로서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장군은 대한민국 경영자들에게 경영의 밑바탕을 튼튼히 하고, 강력한 경쟁우위로 경제전쟁에 나설 것을 주문하고 있다. 우리 내면에 장군과 같은 의지와 결단과 전무후무한 전략을 세울 것을 주문한다. 백척간두를 헤쳐 나갈 결단이 함께 해야 함을 각성케 한다. 이순신은 지금 우리 곁에 살아 있다.

장군의 일생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삼도수군통제사에서 실각되고, 당파적 인사이동에 물러나고, 전면적 전쟁국면의 파국으로 불확실성이 고조되고, 원균이 이끈 조선수군이 칠천량에서 궤멸되고 나서 재임용되기까지 온갖 음모와 술수에 공이 가려졌다. 조선수군을 다시 맡았을 때에는 함대재건이라는 불가능해 보이는 임무가 기다리고 있었다. 장군은 빈손으로 조선 함대를 인수해 준비시키고 다시 바다로 나갔다. 마지막으로 장군을 기다린 것은 저 노량의 짙푸른 바다였다. 비장한 죽음으로 최후를 맞이해야 끝나는 임진왜란의 장엄한 종결판이 장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느 것 하나 위기가 아닌 것이 없었다. 우호적 경영환경이란 존재하지도 기대할 수도 없었다. 그런데도 장군은 떨쳐 일어나 끝내 승리를 이뤄냈다.

장군은 위기관리능력 면에서도 가장 극적으로, 강렬하게 한 인간의 극대치를 보여주었다. ‘이순신적’ 힘과 의지는 난국에 임해 떨쳐 일어났고, 그로 인해 경제위기에 맞서 대한민국 경영자들을 격려하고 일으켜 세우는 긍지이자 자산이 된다. 21세기 경제위기시대에 ‘이순신적’ 결단의 의지는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려는 경영자들에게 가장 큰 힘이 된다. 장군은 23전 23승의 완벽한 승리주의를 무결점으로 이뤄내며 새로운 경영의 이정표이자, 도약대를 제시한다. 그런 면에서 학계 일각에서 부르듯 ‘이순신주의’를 살펴보는 것은 매우 긴요한 일이다.

임진왜란 7년, 그 치열한 역사의 현장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에도 계속되고 있다. 다만 지금은 한반도를 둘러싼 강대국들의 이해에 따라 이합집산이 보다 정교하고 치밀하게 전개될 뿐이다. 경영환경도 이와 같다. 갑작스런 강자의 출현과 시장의 격변은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도전은 또다시 경제전쟁에서 불붙고 있다.

이런 이유로 이순신은 난마의 현실을 풀어갈 해법이자, 나침반이 된다. 장군을 알아 가다 보면, ‘이순신 정신’이란 말이 떠오르는 건 필연적이다. 격랑의 바다에서, 요동치는 시장을 뚫고 나갈 지략과 비전을 읽을 때 우리는 새로운 각성을 얻게 된다.
어려운 현실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용기백배해 필승의 전략을 짜고 초유의 완벽한 승리를 이끈 장군의 삶은 오늘날 경영현장에 선 이들에게 가장 큰 가르침과 응원이 되고 있다. 생존하고자 한다면, 필사즉생 필생즉사의 이순신 정신으로 경제전쟁에 맞서 승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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