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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랑은 애써 외면한다고 피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모진 세파는 바로 부딪쳐야 살 방도를 찾게 된다. 헌종 연간(1834~1849년)은 조선이 후기로 치달을수록 내․외부적인 도전에 강하게 부딪치는 시기였다. 헌종은 효명세자(익종)과 신정왕후 조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출생해 8세의 어린 나이에 국왕의 자리에 올랐다. 소년왕의 경우 으레 등장하는 외척의 발호와 부정부패는 헌종 대에도 마찬가지였다. 헌종을 만나본다.

-왕께서는 어린 나이에 즉위해 역시 대비로부터 수렴청정을 받게 되었지요? 그 만큼 왕권이 휘둘렸다는 얘기가 되는데, 어떠셨는지요?

“내 어린 나이에 국왕에 올라 순조의 비인 순원왕후 김씨의 청정을 받게 되었지. 11세가 되었을 때에는 김조근의 딸을 왕비로 받아들이며 안동 김씨의 세도 시대가 열렸고.”

-그러다 왕께서 친정을 시작하자, 이번에는 생모 신정황후(조대비)의 외가가 국정을 쥐락펴락했었지요?

“그렇다네. 외조부 조만영이 어영대장과 훈련대장 등 군권을 장악하면서 외조부의 동생 조인영과 조카 조병헌, 아들 조병구 등을 요직에 앉혀 국정을 장악했지.”

-사정을 따져보면, 안동 김씨에게서 풍양 조씨에게로 권력이 넘어온 거네요. 특별히 달라진 게 있었나요?

“달라지긴... 양 씨 모두 자신의 가문의 탐욕에만 눈이 멀었지. 민생이든 사회 문제에는 조금도 관심을 갖지 않았네.”

-국왕으로서 무력함을 느끼셨겠군요. 현실을 타개하고자 노력한 부분은 무엇이었나요?

“나는, 글쎄 힘을 펼 수 없었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젊음을 아리따운 궁녀들을 통해 발산하는 것 말고는...”

-이양선이 출몰하고, 나라의 국태가 위태로운데 그에 대한 경각심이 생기지는 않았고요?

“삼정이 문란했고, 영국과 프랑스의 이양선이 출몰해 민심이 극도로 흩어지고 있었지. 게다가 18세기에 들어온 천주교가 평민층에 퍼지며 조정을 위협했고.”

-양이(洋夷)들을 상대하기 위한 대책도 전무하다시피 한 것 같던데요?

“전무했지. 기껏 중국 북경에 가서 서양에 대해 귀동냥하는 게 다였고, 대책이라는 게 고작 유생들의 입에서 나오는 척화뿐이었지. 유림들은 ‘성인의 도는 천하에 대적할 자가 없으니, 인의로써 방패와 창을 삼고 충신으로써 갑옷과 투구를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게 다였지. 그걸로 어찌 흉악무도한 양이들을 막을 수 있었겠나?

-유생들의 말에 대해 조정의 반응도 별반 다를 바 없었던 것으로 아는데요. 일테면, 유림에서 얘기하는 척사에 대해서도 ‘만약 사악한 무리들이 들으면 족히 마음을 바꾸고 자취를 감출 것이다’라는 식으로 반응한 게 조정의 의견 아니었나요?

“부끄럽네만, 그게 당시 조선의 세계 인식 수준이었네.”

-그 결과 천주교에 대한 박해를 더욱 강화한 것이고요. 1839년에 일어난 ‘기해박해’, 1846년에 일어난 ‘병오박해’가 다 그런 것이지요. 게다가 이런 천주교 박해는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간 세력 다툼의 명분으로 쓰여 풍양 조씨는 안동 김씨를 공격하기 위한 수단으로 천주교를 더욱 탄압하게 된 것이고요.

“그렇다네. 내 재위 기간이 되면 천주교는 이제 평민들에게 급속도로 종교로 수용되어 1865년에는 2만 3,000여명을 처형하기도 했지.”

-그야말로 대탄압이자, 학살이었는데요. 천주교가 그렇게도 두려웠나요?

“조정이 새로운 가치를 제시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신주를 불태우고, 기존 질서를 부정하는 것은 국가 존립의 문제였네. 백성들에게 천주교의 사랑과 박애 논리는 가렴주구가 판치는 세상에 단비와 같았을 것이지만, 조선 사회의 모순을 더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결과를 가져왔지. 게다가 황사영의 백서 사건 때 이들은 양이(洋夷)를 불러들이려는 시도까지도 했고.”

-그건 종교 탄압이 가져온 자구책 아니었나요? 오히려 천주교를 용인하였더라면 종교보다는 문물 쪽으로 서구와 접할 기회가 더 많았을지 모르지요. 그런 차원에서 실학은 왜 잦아들었는지 의아한데요.

노론 벽파가 집권한 이후에는, 남인이나 북학파 계열의 실학자들은 조정에서 쫒겨났고, 또 죽음을 맞이했지. 실학조차 현실 참여적이라기보다는 그저 고증학이나 금석문 같은 학풍으로 바뀌었고. 조정 내에 체제 개혁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네. 청나라로부터 <해국도지>와 <영환지략>같은 책자가 소개되어 왔어도 이를 현실 정치에 적용할만한 사람이 없었네. 작은 기득권에 매몰돼 나와 다른 의견을 지닌 자들을 제거한 결과는 참담하였네.

18세기 들어 서구 열강의 동진(東進)으로 세계사적 변화가 목전에 당도했지만, 내부 정치와 당파로 얼룩진 조선은 급기야 영국이 아편전쟁을 통해 중국을 송두리째 집어 삼키는 상황조차 외면하게 된다. 내부 혁신의 노력도 없었거니와 혁신 주체 세력들이 다 정치적으로 제거된 마당에 헌종 재임기는 구한말의 위태로운 정국을 예견해 주고 있었다. 오늘날 기업에서 주어진 기득권보다 더 큰 도전 자세로 변화를 맞이해야 하는 것도 이 같은 역사가 주는 교훈 아닐까?

전경일. <이순신, 경제전쟁에 승리하라>의 저자. 인문경영연구소장.

 


8세의 어린 나이에 아비의 죽음을 보아야만 했던 아들. 그 아들은 아비를 죽인 할아비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으며, “왕위에 오른 뒤에도 장헌세자(사도세자)의 죽음과 관련된 일에는 절대 관여하지 말라”는 엄명을 받는다. 어려서부터 정치의 비정함을 몸소 깨달았던 아들, 아비의 묘소인 영우원을 참배할 때마다 옷소매를 적실만큼 울어댔던 아들, 아비의 죽음과 같아서는 안되는 것을 알면서도 끝내 ‘독살설’의 주인공이 되고만 아들. 조선의 제22대 국왕, 개혁군주 정조를 만나본다.

-왕을 이야기할 때 ‘삼불필지설(三不必知設)’을 먼저 꺼낼 수밖에 없는데요. 세손 무렵일 때 정국은 어땠나요?

“왕이 되기 전, 나는 한낱 바람 앞의 촛불에 불과했소. 아비를 죽인 노론계의 홍인한이 ”동궁은 노론이나 소론을 알 필요가 없고, 이조판서나 병조판서를 알 필요도 없다. 더욱이 조정의 일까지도 알 필요가 없다”며 나의 지위를 부정했을 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못들은 척 하고 학문에만 전념하는 것이었소. 잠재적 정적인 나를 제거하려 한 것이지.”

-견디기 어려운 시절이었겠는데요?

“견디기 어려웠소. 허나 당시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지. 할아버지 영조가 그나마 아들을 죽인 죄책감에서에서였는지 ‘삼불필지설’을 놓고 벌인 다툼에서 나의 손을 들어준 것만으로도 큰 다행이었소.”

-대리청정을 한지 두 달 만에 영조가 승하하고 왕이 되셨는데요, 맨 처음 하고자 한 것은 무엇이었나요?

“바로 잡는 것이었소. 이 나라 조선이 바로 서기 위해서는 우선 내 아비를 죽음으로 몰아간 탕평당 인물들을 제거하는 것이었소. 개인적 보복이 아니라, 나라를 바로 세우고자 한 것이지. 홍인한, 홍봉한, 정후겸 등과 숙의 문씨, 문성국, 정순왕후 김씨 일가에 철퇴를 내린 것은 정치 행위였소.”

-그 결과 집권초기 안정되었나요?

“위험은 늘 있었지. 탕평탕 핵심인물인 홍계희의 손자 홍상범이 자객을 보내 대급수로 나를 살해코자 했으니. 게다가 역모도 있었고. 홍신해, 홍이해, 은전군 등 23명을 사형시켜야만 했소. 허나 나를 세손시절부터 후원해 주었던 홍국영을 내 친 것은 내가 무엇보다 중심을 잃지 않았다는 증거요.”

-왕께서는 학문을 좋아하고 규장각을 만드는 등 문치로 인해 세종대왕과 비유되곤 하는데요. 국왕에게 학문이란 무엇입니까?

“국정은 모름지기 어떤 정책이든 학문적 뒷받침을 전제로 해야 하는 것이요. 일의 전후 과정을 염두에 두고, 그것이 미칠 영향도 고려해야 하는 것이지. 게다가 국왕은 만백성의 스승이기도 하니, 몸소 수신의 철학을 체화시켜야 하기도 하고. 내 국정운영 방식은 학문에 있소. 그건 후세가 더 잘 알 것으로 보오.”

-왕 하면 응당 실학과 연계되는데요.

“그건 당시 국내 및 세계사의 변화와 관련 있소. 정묘,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를 다들 우숩게 보았지만, 청의 발전상은 이제 ‘조선이 청으로부터 배울 것은 배우자’는 생각이 자연 들게 했소. 노론계 자손들도 그랬고, 이익 같은 성호학파나 홍대용 같은 실학파도 그러했지. 사회적 분위기는 ‘보수’가 여전했지만, 무너지는 둑을 어떻게 막을 수 있겠소. 오랑캐라도 배울 건 배워야지. 내가 <기기도설(奇器圖說>을 정약용에게 주며 기중기 제조법을 설계토록 한 것도 다 서양 학문 영향 아니었소.

-그 혜택을 누린 사람들이 있지요?

“서얼 출신이었던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 서이수 등을 말함이오? 능력 있는 자들을 신분에 구애없이 규장각에 등용하고, 향임에 임명하고, 장용영에도 배치한 것은 그들로서는 광해군 시기 서얼의 벽을 타파해보고자 ‘칠서의 변’을 일으킨지 170년 만의 일이니, 시대의 요구였다고 해야겠지. 이 모두 시대 흐름과 탕평의 일환이었지.

-그리하여 왕 재위 12년에는 채제공이 우의정에 발탁됨으로서 영의정은 노론의 김치인이, 좌의정은 소론의 이성원이 맡아 하게 되어 3당 연합 체제를 구축하게 된 것이군요.

“당목이 있는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지, 아암...”

-이제 마지막으로 화성 신도시 건설과 왕의 급작스런 죽음을 얘기해야 할 때인데요.

“음-. 말년에 물러나면 나는 수원에 가서 아버지 무덤 곁에서 살고 싶었소. 그게 효를 못한 채 아버지를 보내야만 했던 내 심정이었고. 수원에 화성신도시가 생긴 것은 그런 저런 의미가 크지. 헌데 나의 죽음은 말야... 그게 오회연교(五晦筵敎: 정조가 사도세자 죽음에 대한 영조의 당부가 바뀔 수 있음을 시사한 하교)가 있고나서 채 한 달도 안되어서 인데, 내 몸에 종기가 온 몸으로 급속히 퍼지더군. 노론 벽파가 건의해 수은을 치료제로 썼다는데, 정신이 혼미한 가운데, 내 앞에 있던 유일한 사람은 나의 정치적 라이벌이던 정순왕후 혼자였던 그 기억 밖에는 없소.”

개혁군주로 세종에 이어 가장 훌륭한 왕으로 평가받았던 정조는 끝내 이렇게 해서 생을 마감한다. 넘었으되 넘지 못한 선이 엄연히 그의 생에 가로놓여 있었다. 그러니 어찌 큰 나무는 모조리 베어지고, 잡목만이 산에는 가득하다며 우리 역사의 민낯을 가리킨 말이 헛되다고 하겠는가.
전경일. <창조의 CEO, 세종>의 저자. 인문경영연구소장.



 


재위기간 52년. 조선 21대 국왕 영조만큼 오랜 기간 집권한 왕도 아마 없을 것이다. 대궐우물에서 물 긷는 무수리의 아들로 태어나 28세 때 세자로 책봉되기 전까지 10년이 넘게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 산 영조는 누구보다도 백성들의 삶을 알았다. 평소 몸에 밴 서민적 의식으로 검소하게 생활했고, 백성과 가까이 해 백성의 어려움을 풀고자 했다. 그러나 그에게도 어두운 그림자가 있었으니... 영조를 만나보자.

-왕을 얘기할 대 우선 ‘경종 독살설’의 의혹을 먼저 꺼내게 되어 부담스러운데요. 그 속사정을 말씀해 주시죠?

“허어. 또 그 얘기인가? 후세도 알다시피 1724년 8월 20일 내가 이복 형님께 보낸 게장과 생감이 원인이 되어 왕인 경종께서 5일 만에 돌아가셨다는 건데, 내 어찌 그럴 수 있었겠는가?”

-그로 인해 ‘이인좌의 난’이 나는 등 집권 초기 엄청난 시련에 시달리셨는데요. 집권기 안정을 위해 조치들은 어떤 것이었나요?

“당시는 당쟁으로 인한 피해가 막심하였네. 사대부들이야 당쟁을 통해 권력을 거머쥘 수 있다손 치더라도 백성들은 무엇인가? 민생은 간데없고, 백성들의 삶은 도탄에 빠지지 않겠나. 해서 탕평책을 꺼내 들었네. ‘이인좌의 난’은 후세가 말한 ‘경종 독살설’로 인해 발생한 것이었고, 내 앞에서 이를 문제 삼아 소론의 대신이 처형당한 바도 있으나, 결국 나는 현실을 바로 인식하고자 하였네. 반란을 일으킨 세력은 소론과 남인이었지만, 그 원인은 노론에서 제공한 것 아닌가? 내가 노론의 힘을 엎고 등극하였지만, 탕평정치는 국정이 과거로 돌아가는 것을 막는 유일한 장치라 생각되었네.

-그 점이 탕평책을 실시하게 된 배경이군요. 왕의 집권을 도운 노론의 반발도 만만치 않았을 텐데 어떻게 정치적 해법을 찾았죠?

“정치란 게 뭔가 타협과 절충의 묘를 살리는 것 아닌가? 이 같은 정치 미학을 위해서는 제도를 만들고 정착시키는 게 중요하다고 보았네. 해서 붕당의 근본인 서원의 사사로운 건립을 금지시키고, 정쟁의 원천이 된 삼사의 대간을 선발하는 이조전랑의 ‘통청권’을 폐지하는 한편, 인사권을 쥐고 있던 전랑의 임명조차 추천이 아닌 순번제로 바꾸어 버린 거지.

-일단은 인사권을 통해 형평성과 균형성을 유지하려 한 거군요?

“그럼 셈이지. 제도는 늘 중요하니까. 거기서 더 나아가 같은 당파 간에 결혼을 금지시키고, 과거 시험에 탕평과를 실시하기도 하였네. 전자는 권력 혼맥으로 이어지는 것을 막고자 한 것이었고, 후자는 보다 균형 있는 관료를 끌어 모으고자 한 정책으로 보면 되네.

-탕평책의 구체적인 실천 방안은 어떤 것이었나요?

“쌍거호대(雙擧互對)라 하여 특정 정파 사람을 등용하면 다른 정파 사람도 등용토록 한 것과 양치양해(兩置兩解)라 하여 치죄 시에도 공평성을 맞춘 것이지. 이리 되니 갈등은 원천 봉쇄될 여지가 있었지.

-기가 막힌 해법인데요, 허나 탕평이 노론, 소론간 양당구조처럼 해당 정당의 기득권만을 위한 것 아니었나요? 그렇다면 두 당이 과점하게 되는 것인데요?

“어사 박문수가 이를 문제 삼아 비판하기도 하였네만, 제약은 있어도 순기능이 더 컸다고 보네. 물론 이런 한계로 인해 세간에서 나의 탕평을 ‘완론탕평(緩論蕩平)’이라 칭하기도 했지. 느슨한 공평주의라는 뜻이겠네.

-주제를 좀 바꾸어 왕께서 국정을 다스리는데 ‘서민출신’이라는 점이 도움은 되었는지요?

“도움이 되었다기 보다 백성에게 공감하고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조건이 되었다고 보네. 내가 무명옷에 초식을 즐긴 것도 그렇고, 균역제 도입시에는 직접 홍화문에 나가 백성들의 뜻을 듣곤 했던 것은 서민출신이었기에 가능한 것이었지.

-말씀이 나왔으니 말인데요, 군역제는 큰 모범이 된 사례 아닌가요?

“그렇다네. 나는 당초 균역법을 통해 양반들에게도 군포를 부담케 함으로써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주려 하였지. 양반들이 반대하였지만, 나도 군주가 되지 않았더라면 당연히 군포를 냈을 거라고 분명한 톤으로 말했네. 이를 통해 권한만 누리지 책임을 안지려는 양반행태를 바로 잡고 싶기도 했고.

-일종에 노블리스 오블리제인데요, 그럼에도 양반층 반발로 우회하는 정책을 펴셨지요?

“양반에게 군포를 부고하지는 못했네만, 토지 1결(3,000평)에 2두씩 세금을 내게 하는 결작(結作)을 부과했고, 모자란 것은 왕실과 국가 기관 등에서 징수하도록 했네. 백성 시름이 조금은 덜어졌었지.

-이제 왕께서 가장 불편하실 주제를 꺼내고자 하는데요. 사도세자 건을 꺼내도 될까요?

“음-. 훗날 정조가 되지. 내 아들 사도세자의 아들이자 내 손주 말이네. 산(祘, 훗날 정조)을 세손으로 삼으며 내가 당부한 말이 있네. ‘부자간의 정은 정으로 남기고, 의리는 의리로 지켜야 한다.’ 그게 정치이네. 행간의 의미를 알겠나? 내 애긴 이게 다 이네.

무수리의 아들로 태어나 무시를 받으며 자랐지만 자신의 출신을 오히려 백성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바른 정치로 자리매김시킨 임금 영조는 사도세자의 죽음이란 초유의 일을 겪었지만, 정치가로써 뚜렷한 족적을 남긴 것 아닐까. 그러기에 경영의 또 하나의 전범(典範)이 되는 것 아닌지.

전경일. <창조의 CEO, 세종>의 저자. 인문경영연구소장.


재위기간 4년. 아버지 숙종으로부터 생모인 장희빈에 대한 사랑이 식자, “누구의 자식인데 그렇지 않겠는가?”라며 멸시까지 받았던 조선의 제 20대 임금, 경종. 그는 당쟁의 결과로 왕위에 오르고 당쟁의 결과로 독살되었다는 의문을 남긴 채 짧은 한 인생을 마감했다. 재위 동안 노론과 소론의 당쟁의 절정기를 보낸 국왕을 만나본다.

-왕께서는 부왕(숙종)이 정말 힘들게 얻은 아들이지요?

“그렇다네. 부왕께서 즉위한지 14년 만에 본 아들이니 오죽 애지중지 했겠나. 태어나 3개월 만에 원자로 책봉되고, 3세가 되자 왕세자로 책봉될 만큼 관심을 많이 받았었지.”

-그런데 부왕이 아버지로서 차마 입에 담기 어려운 말을 하며 아들을 부정한 것은 무엇 때문이었나요?

“어머니(장희빈)에 대한 애정이 식자, 그 아들마저 싫어진 거지. 아버지가 워낙 변덕이 심하지 않았던가.”

-우여곡절 끝에 왕위에 오른 임금께서는 생애 무엇이 가장 어렵던가요?

“음-. 권력의 속성이랄까, 군주로서 처신의 문제라고나 할까? 나는 말일세. 원한을 원한으로 갚고자 하지 않았네. 세상을 살며 원한대로 산다면 살아남을 자가 과연 몇 명이나 되겠는가? 내 생모가 중전의 자리에서 물러난 것이나, 숙빈 최씨에 의해 사약을 받게 된 것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네. 그렇다고 어찌 이복 동생인 연잉군(숙빈 최씨 소생, 훗날 영조)을 죽일 수 있었겠나? 노론들이 온갖 말 못할 전횡을 일삼으며 나를 압박하였지만, 나는 오히려 형제를 감싸주었지.”

-당시 정국은 노론이 장악하고 있었는데요. 상황이 어땠나요?

“노론? 송시열의 추종자들이지. 그들은 문자에 얽매어 정치가 민생을 돌보는 것이라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았네. 부왕이 노론, 소론간 싸움에서 노론의 손을 들어준 뒤로 소론은 대거 실각했었지. 그들은 내가 그들이 사사토록 한 장희빈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왕으로 인정하려 들지도 않았네. 권력에서 밀려날까 봐 불안했던 게지. 그때 ‘윤지술 사건’이 일어난 거네.”

-그 사건에 대해 좀 더 자세히 듣고 싶은데요?

“1720년이었네. 노론의 윤지술이 ‘숙종의 행장에서 신사처분과 병신처분이 애매하게 표시되어 있다’며 상소를 올렸지. 즉 생모 장희빈을 내쫓아 사사시키고, 소론을 내쫓은 것이 정당하다며 나보러 인정하라고 한 것이지. 나는 윤지술에게 어떤 죄도 물을 수 없었네. 노론 세상 아니던가. 오히려 ‘희빈 강씨를 추승하자’는 소론계 유생 조승우를 사사시키는 것으로 끝맺었지.”

-생모의 죽음에 대해 오히려 노론 입장을 두둔한 거군요?

“음, 그랬네. 그러자, 이들은 연잉군을 왕세자로 책봉해 달라는 요구를 해서 나에게 왕세제 책봉에 대한 수락까지 받아내고, 왕실 최고 어른인 대비 인원왕후로부터 수결까지 받아낸 거네. 한술 더 떠 왕세제가 대리청정 할 수 있도록 해달라며 나를 끝까지 밀어 붙였지. 어디 그뿐인가? 조정의 정책을 결정할 때, 세제가 참석하여 가부를 결정하자고 요구하고 나섰기도 했지. 너무 갔던 거네. 더는 참을 수 없었지.”

-그것이 노론에서 소론으로 권력 지형도가 바뀌게 된 이유군요?

“그렇다네. 김일경 등 소론의 급진파들이 상소를 올리자, 나는 때가 왔음을 알았네. 때마침 남인계 서출 출신인 목호룡이 노론 명문가 자제들이 주도하는 국왕 시해 역모사건을 고변하자, 노론께 주동자들을 잡아 역적으로 몰아 사사 시켰네. 노론으로서는 쑥대밭이 된 거지. 듣자니 이야기에 의하면 이들이 나를 삼급수로 죽이려 했다니, 자객을 보내거나, 독약을 타 먹이거나, 유언을 위조하는 방식으로 제거하려 했다는 것이네. 이들의 이런 역모로 인해 훗날 내가 죽고 나서 독살설이 불거지게 된 거네.”

-그럼 왕께서는 정말 독살되신 건가요?

“내 시신을 보니 어떻든가? 그 애긴 이쯤 해두겠네.”

-다시 연잉군으로 돌아가면요, 왕좌를 넘보는데 제거하고 싶지는 않으셨나요?

“내 앞서 말하지 않았던가. 형제간에 피를 보는 일을 내 어찌 하겠는가? 게다가 내 슬하에 아들이 없으니, 선의왕후의 뜻대로 소현세자의 후손인 밀풍군의 아들 관석을 입양해 왕위를 넘겨주는 것이나, 연잉군에게 돌아가는 것이나 뭐 그리 다르겠는가? 생각해 보면, 연잉군(후에 영조)를 내세운 건 결과적으로 잘 된 일이었지. 영조 재임 기 국정을 보면 잘 알 수 있지 않겠나.”

-최씨로 말미암아 생모가 돌아가셨는데, 복수대신 용서를 하는 건 한 인간으로서 정말 어려운 일이었을 텐데요?

“그랬지... 그래서 결자해지 되었으면 됐지 않나. 누가 빚은 업이든...”

조선의 20대 국왕 경종, 그는 복수의 칼날 대신 화해와 용서의 방법을 선택함으로써 영정조기 치세를 열어 가는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임금 아닐까? 해서 경영자들은 현실에서 겪게 되는 갈등을 대화해로 감싸 안을 도량을 갖춰야 할지니, 그게 경영자다운 태도일테니...

전경일. <창조의 CEO, 세종>의 저자. 인문경영연구소장.



무릇 정치, 경제 두 마리 토끼를 다 잡는다면 이보다 더 나라를 잘 다스리는 게 어디 있겠는가 마는 잣은 정치적 변동에도 그나마 경제의 뿌리는 내리기 시작했으니 숙종 연간이 그러할 것이다. 14세의 나이에 국가를 물려받아 46년간 조선의 19대 국왕으로서 치세를 다한 숙종을 만나본다.

-왕께서는 어린 나이에 국왕이 되셨는데요, 송시열이라든가 원로들의 득세가 대단해 ‘군약신강’의 구도 하에서 어떻게 정국을 움켜쥐실 수 있었는지요?

“음. 정말 대단했지. 내가 배운 게 뭐던가? 사내정치의 묘수 아니던가? 나는 정치란 끝없이 줄세우기를 하며 왕권을 강화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네. 권신들에게 휘둘리지 않는 법을 일찍 체득했다고나 할까.”

-일테면 사내정치를 정치에 활용했다? 그런 말씀이신지요?“

“그런 셈이지. 나는 왕이 되기 전에도 내 뜻을 분명히 하였네만, 왕이 왕으로서 대접을 못받는다면 어찌 군왕이라 할 수 있겠는가? 다들 권력을 누리다보면 교만해져서 왕 위에 서려 하지만, 결국 왕조체제라는 게 무엇인가? 신하들에게 휘둘리는 왕일지라도 결국 왕의 지지를 얻지 못하면 한낱 권력에서 멀어지는 무리에 불과한 것 아닌가? 해서 환국(換局, 정권교체)을 통해 줄세우기를 하는 것으로 국정에 나 뜻을 관철시켰지.”

-임금의 재위시 크게 세 번의 환국이 있었지요? ‘허견 역모 사건’이 비화되어 일어난 경신환국, 장희빈 소생의 윤(훗날 경종)을 원자로 봉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기사환국, 장희빈이 후궁 최씨를 독살하려 했다는 설이 빌미가 되었던 갑술환국, 이렇게 세 번의 정치적 국면에서 진행된 환국의 의미를 되짚어 보는 것도 적잖은 의미가 있을 것 같은데요.

“나는 왕이네. 왕은 누구든 왕권을 강화하려고고 할 걸세. 내가 14세의 나이에 국정을 주물럭 했던 송시열을 위리안치시키고, 6년 되던 해(1680년 경신년)에 왕권을 우습게 보던 허적이 왕실 천막을 무단 사용하는 것을 빌미로 ‘허견 역모 사건’을 통해 남인에서 서인으로 정권교체를 이루게 한 것은 어느 한쪽으로 권력이 쏠리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네. 기사년 환국도 마찬가지였지. 궁녀(장희빈)라도 원자를 낳아 손을 잇는다면 응당 대접함이 마땅치 않은가. 서인이 집권하는 동안 그 방자함이 극에 달했는데, 이 환국을 계기로 송시열을 완전히 제거해 버릴 수 있었지. 그 자야 늘 명분만 주장하던 늙은이 아니던가. 갑술년 환국은 또 어떻고? 희빈과 남인은 너무 권력을 탐하려 하였네. 이번엔 그들이 제거 대상이었지. 정권교체를 통해 왕권을 강화하는 게 나의 일관된 정책이었네.”

-하지만 세 번에 걸친 환국으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가고, 오히려 줄세우기는 더욱 극성을 부린 것 아닌가요?

“나보러 변덕스럽다고 말하는 이도 있는 모양이네만, 환국은 내가 취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정치적 묘수풀이였네. ‘정치력’이라고 부르면 안되겠나?”

-정치력이요? 왕의 정치력은 그 부분보다는 훗날 높게 평가하듯, 이미 중국에서 청나라가 대치세를 이끌어 가는 동안 그간 뿌리 깊게 내렸던 ‘반청 사상’을 완화시킨 면이 아닐까 하는데요.

“사실 그건 내가 주도한 게 아니라 더 이상 대세를 거역할 수 없었기 때문이지. 청을 아무리 송시열 일파처럼 오랑캐로 본다손 치더라도 정치라는 게 명분만으론 할 수 없지 않은가? 현실에 뿌리박은 바가 있어야 흩어지지 않는 것 아닌가. 당시 청은 거대한 선진문물의 용광로였네. 오랑캐로 무시했지만, 중국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서양의 과학 기술과 문물, 양명학, 고증학 같은 것들은 세계관에 큰 변화를 가져왔지. 송시열 따위의 구태의연한 생각 따위로 어찌 그 물결을 막을 수 있겠나. 눈 밝은 이들에 의해 그 ‘가치’기 픽업되어 실학이 싹 틔우는 계기가 됐으니 후세들에게는 다행스러운 일이었겠지.”

-해서 당시 숭명배청에 입각한 의리론이 퇴조하고 조선의 역사를 강조하는 삼한정통론이라든가, 조선이 세상의 중심이라는 소중화(小中華)의식이 확산된 거군요.

“그렇다네. 청(淸)이 더는 오랑캐가 아니었던 거였지. 어찌 그와 같은 대치세가 청에 있을거라고 상상이나 했겠는가? 크게 한방 맞은 꼴이었다고나 할까.

-임금 재위시에는 간도, 울릉도 문제 등도 일단락되었지요?

“그렇다네. 나라의 강계를 바로 잡은 것인데, 끝내 후손들에게 아쉬운 점은 간도문제네. 흐릿하게 협상한 것도 그렇고, 훗날 일본에 의해 국권이 빼앗기며 간도 영토를 잃은 것도 그렇고. 그나저나 독도는 여전히 일본의 억지주장에 분쟁 지역화되는 면이 있어 안타깝기만 하다네.

-당시 경제는 어땠나요?

“상평통보가 처음엔 외면 받았네만, 차차 화폐로써 자리도 잡게 됐고, 서울은 시전과 난전이 서로 치고 박고는 했지만, 물산이 풍성하게 돌았지. 한강변은 그야말로 흥정과 거래로 불야성일 이뤘네. 백성들의 생활형편도 나아지고. 돌이켜보면 그게 가장 좋았네. 결국 환국이니 뭐니 해도 백성들에게 그런 건 다 소용없고, 먹고 사는 게 편안하면 가장 정치를 잘하는 것 아닌가. 그게 임금이 해야 할 일일 테고...”

숙종 연간은 초대형 정권교체가 세 번에 걸쳐 있었지만, 국토를 바로잡고, 경제는 풍성하게 돌아갔다. 이 둘이면 정치는 그 목적의 9할 정도는 한 것 아니겠는가?

전경일. <창조의 CEO, 세종>의 저자. 인문경영연구소장.




19세의 현종은 북벌을 강행하려 했던 아버지 효종의 급작스런 사망으로 왕위에 오른다. 독살설이 끊이지 않는 미스터리로 남아 있는 효종의 죽음은 그 죽음의 미스터리 한가운데 있던 송시열과 산당의 존재가 있는 한, 현종 자신에도 닥칠 불행한 운명의 전주곡과도 같은 것이었다. 즉위기간 내내 왕실의 의례를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예송논쟁(禮訟論爭)으로 조정은 날을 밝히고 있었고, 거기에 정치의 본질인 민생이 자리 잡을 곳은 없었다. 조선의 18대 국왕 현종을 만나본다.

-왕께서는 재위 15년 동안 ‘상복을 어떻게 입을 것인가’ 하는 문제로 날을 세우다 시피하셨는데요. 정치의 근본이 그보다는 민생에 있는 것은 아닌지요?

“어디 이르다 뿐인가. 허나 예송논쟁은 불가피한 것이었네. 인조반정 이후 호란과 북벌이란 키워드가 부왕의 급사로 일단락되자 현실에서 실천할 수 없는 주장을 하던 무리들은 관념적 세계에라도 뛰어들어 한껏 목청을 올려야 그나마 숨통이 터지는 맛을 보았을 것일세. 얼마간 상복을 입을 것인가 하는 문제는 단순히 의례 차원이라기보다 송시열·송준길과 허목·윤휴 등의 정치적 다툼으로 보는 게 맞지.”

-북벌은 논의만 분분한 채 끝나고 실질을 구하지 못했는데, 정벌 논쟁을 하다가 효종 사후 한 달이 못돼 전부 예법논쟁으로 국가적 관심사가 다 바뀌었다? 이거 좀 이상하지 않나요?

“그렇다네. 조선이 기울어가는 구체적인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 거지. 송자(宋子)라 자타칭 하던 송시열은 그야말로 물 만난 고기 격이었지. 북벌을 무력화했고, 부왕의 죽음에도 깊숙이 간여했을 것으로 보인 그가 이제 북벌이란 명분의 키워드와 예법이란 관념을 두 축으로 권력을 누리며 왕을 능멸하려 하였으니 말이네.”

-북벌을 가로 막았지만, 북벌을 통해 권력을 획득하고 북벌을 여전히 권력 기반으로 삼았다는 겁니까? 북벌 실천은 아예 염두에도 두지 않는 자가 말입니까?

“그의 정치력이 그 정도였네. 교묘히 꾸미는 말로 현실을 농락했지. 심지어는 나를 왕으로보려고도 하지 않았네. 그의 방약무인한 태도가 중국에까지 소문이 나서 조사단이 파견될올 정도였으니. 표리부동한 학자의 표본이라 할 수 있지.”

-그런 그가 정국을 좌지우지 할 수 있었던 것은 결국 왕권 약화가 가져온 결과였나요?

“그렇지. 왕의 권력이 신하들의 반정에 의해 이루어진 과거 경험은 신권 중심으로 정국이 흘러갈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지.”

-예송논쟁에 대해 좀 말씀을 듣고 싶은데요.

“내 즉위년에 부왕의 붕어를 두고 자의대비께서 상복을 입는 게 3년이 옳으냐 1년이 옳으냐 하는 논쟁이 있었지(기해논쟁). 부왕 효종께서 차남이었으니 1년 상복으로 해야 한다는 송시열의 주장은 부왕의 정통성을 흔드는 것이었네만, 나는 이를 바로 잡을 수 없었지. 내가 그와 맞서게 되는 것은 15년 후 인선왕후께서 승하하자, 다시 자의대비께서 며느리 상에 어떤 상복을 입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생겼을 때였지. 송시열류의 서인들은 처음에는 1년을 말하다가 나중에는 기해년 때 주장과 앞뒤가 맞지 않자 9개월로 바꿨지. 나는 이때를 기다려왔네.”

-그럼 왕께서는 오랜 기간 동안 송시열과 맞서기 위해 준비하고 계셨던 거군요?

“그런 셈이지. 그때는 나도 정치적 경륜이 한 단계 성큼 올랐을 때이고 해서, 서인의 주장을 공격하는 남인의 상소가 올라오자 기해 예송 당시의 모든 상소와 의례를 검토해 서인들을 몰아 붙였지. ‘너희들이 송시열의 말은 중하고 임금의 말은 가볍다는 것이냐?”고 추궁하고, 서인의 영수 김수항을 귀향 보내는 한편, 남인 중심으로 정권 교체를 시작했지. 인종 반정 이후 50년 서인 집권이 끝나려는 찰라였네. 그런데 말야. 1674년 8월 나는 갑자기 운명을 달리하게 되며 이 싸움을 마무리 짓지 못하게 되었지.”

-그 죽음엔 역시 서인들의 음모가 있었던 건가요? 효종의 독살설처럼 말입니다. 결국 왕께서 풀지 못한 숙제는 다음왕인 14세 어린 아들 순(숙종)에게로 넘어가는 거군요?

“그런 셈이지. 그런데 순이 어린 나이에 예상 외로 잘하더군.”

-그런데 말입니다. 예송 논쟁 그 너머에 있을 정치의 본질인 민생문제는 임금이나 신하 사이에서 증발해 버린 것 같던데요. 일테면 인사이더들끼리의 리그전만 치루신 것 같고요.

“그렇기도 하지. 헌데 당시엔 그럴 수밖에 없었네. 호란을 겪으며 무기력해진 심적 보상을 명분에서나마 찾으려는 경향이 팽배했기 때문이네. 장자 중심이라든가, 장례, 예법, 족보 따위에 목을 매듯 하는 경향은 다 그런 것의 반영이었지.”

-그 결과 조선은 반성의 기회를 놓친 채 쇠락의 길로 접어들게 된 것이구요.

“음...”

현종 시기, 조선은 양대 호란을 겪으면서도 안으로 철저한 반성 없이 명분론만 내세운 서인과 왕권에 무기력했던 왕 자신에 의해 무효경쟁의 당쟁 시기로 접어든다. 훗날 이런 반성은 실학으로 나타난다. 실제는 없고, 말만 풍성한 조직에는 언제나 안으로 곪는 퇴행적 태도가 만연한다. 송시열과 서인들이 보여준 모습은 실천력 없는 권력 쟁투를 위한 사내정치의 극단을 보여준다. 그러 인해 가장 큰 폐해를 보는 사람은 당대를 살아가는 백성들이다. 민생이란 키워드가 설 곳이 없기 때문이다. 조직 내 의미 없는 논란이 어떤 폐해를 가져오는지 현종 무렵 예송 논쟁은 충분한 반면교사가 되지 않을까?

전경일. <창조의 CEO, 세종>, <이순신, 경제전쟁에 승리하라>의 저자. 인문경영연구소장.


형 소현세자와 동생 봉림대군은 달랐다. 달랐기에 다른 길을 가고자 했던 것인지, 형을 밀어내고 왕으로 추대되었기에 형과 다른 길을 걸어야 했던 것인지 의문은 남는다. 그의 아버지 인조의 바람대로 심양에 머물 때 형과 달리 소무(蘇武)처럼 행동한 그였기에 명분만 내세웠던 인조의 눈에 들었는지 모르겠다. 조선의 17대 국왕 효종의 미완의 북벌을 만나본다.

-형님과 여러 면에서 달랐다는 점이 왕의 차이 일 텐데요. 소현세자가 친청(親淸) 정책을 통해 실제에 기반한 정치를 펼치려 했다면 왕께서는 부친인 인조와 같은 정치적 입장을 보이시는데요? 우선 정치적 배경부터 살펴보시죠?

“심양에 있을 때 나와 형은 완전히 다른 입장이었지. 형님은 나날이 강성해 가는 청을 보며 여기서 배울 게 많다, 우리 조선도 청을 통해 새로운 문물을 접하고 현실을 인식해야 한다, 이렇게 생각했지. 허나 내 생각을 달랐네. 나는 청이 끝내 명나라를 먹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네. 천하의 중국 아니던가? 청이 아무리 욱일승천의 기세로 일어난다고 해도 명은 역시 대국 아닌가 말일세. 삼전도에서 부왕께서 당한 치욕을 민족적 수치로 알고 나는 절치부심했네. 형님은 뜻을 좋았지만, 초심을 잃었어.”

-그게 소현세자가 죽어야 할 이유였나요?

“현실 정치라는 걸 알아야지. 혼자 개혁할 수 있는가? 형님은 사면초가였네. 반면 나는 부왕과 서인들이 밀고 있었네. 왜 개혁을 보다 본질적인 데 쏟아 부으면 안되나?”

-본질이요? 왕의 북벌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나는 청의 빈틈을 타 북벌을 이룸으로써 치욕을 갚고자 했네. 내가 1649년 왕위에 오르자마자 반청주의자였던 김집을 이조판서로 임명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어.”

-그로 인해 그의 제자였던 송시열, 송준길이 대거 조정에 들어오게 된 것이군요?

“그렇지. 새롭게 효종 정부를 구성한 것이지. 그들이 조정에 들어오자마자 친청파인 김자점을 몰아내게 했지. 그런데 세상은 아이러니한 게 김자점이 인조반정의 공신으로 30년 권력을 움켜쥐었으니 부왕과는 인연이 깊다 하겠고, 또 친청파였으니 형님인 소현세자와도 가까워야 하는데, 오히려 후궁 조소용과 밀착해 형님을 죽음으로 몰고 간 주역 중 하나였으니 권력이란 게 얼마나 시류 따라 흐르는 것인가? 정치적 계산만 있지, 지조나 의리 같은 게 있기나 한가 말인가?

-하하. 그런 말씀은 송시열에게도 해당되는 것 아닌가요?

“그건 좀 복잡하네. 조소용의 맏아들인 숭선군을 추대한 김자점 역모 사건이 해결되고 나서 김집-송시열 대(對) 김육 등으로 대표되는 양당 구조로 정치 지형도가 변했네. 산당(山黨)과 한당(漢黨)이 그것이지. 그런데 말일세, 산당은 이이의 학통을 이어받았지만 실질 정치에서는 개혁과 민생 따위엔 큰 관심이 없었지. 오히려 한당이 정국을 보다 진보적으로 이끌어 갔지. 송시열이 나의 북벌론에 동참하는 듯한 제스츄어를 보인 것은 속으로는 불가능함을 알았으면서도 주자학적 원칙주의를 맹신했기에 취해진 행동이었을 게야. 명분만 내세우며 자신의 기득권이나 지키려 했던 거지. 반면, 한당은 민생 안정을 위해 대동법이라든가, 뭔가 실질적인 도움을 줬지. 그런데도 나는 송시열에게 끌렸으니.

-송시열이 북벌을 지지했다면 실행해서 성공할 수는 있었을까요?

“나도 그런 장담하지 못하네. 내가 북벌을 위해 구상한 시나리오 중 10만 정예 기병론이 있네. 아직 청이 중원을 완전 지배한 게 아니기 때문에 조선에서 밀고 올라가면 한족들이 호응해서 청을 궁지로 몰아넣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 더구나 제주도에 하멜이 표류해 그를 통해 신식 조총을 제작케 하였으니 군비(軍備)에서도 앞섰다고 할 수 있지. 그런데 말이네. 우리가 갖춘 경쟁력이 청을 치는 데 쓰인 게 아니라 외려 청을 도와 러시아의 남하를 막는 나선정벌에 쓰였으니 이 또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네.”

-결국 북벌의 기회는 안 온 거군요?

“그런 셈이네. 생각해 보면 그건 현실 자체이기도 했고, 때를 마냥 기다리기만 한 나의 실행력 부족이 가져온 결과기기도 했을 거네.”

-그래서 왕이 된 이유도 그렇고, 형과 차별화를 이뤄야 하는 부담감도 있고 해서 조바심이 났었겠군요.

“내가 1658년(효종 9년) 북벌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판단하에 강행하고자 한 건 그때문이네.”

-그때 왕의 북벌 파트너였던 송시열은 어떤 입장을 보이던가요?

“겉으론 동의하지만 속으론 밍기적거렸지. 어떻게하면 북벌을 유야무야시킬까 그 생각만 하고.”

-그래서 왕께서는 더 채근했고, 최종적으로 이듬해 송시열과 단독 대담을 하게 된 것이군요? 결국 두 사람의 의견은 좁혀지지 않았고, 그 후 두 달이 못가 왕께선 독살된 것처럼 갑자기 죽었으니까요.

“그렇지! 그건 그들의 짓이었을 게야. 말만 앞서다 끝내 행동에서는 표리부동했던. 그건 내 자신도 마찬가지일거구...

형인 소현세자를 대신해 왕위에 오르며 북벌을 이뤄내려던 효종, 그러나 그는 명분론자들에게 정치적으로 이용만 당하고 끝내 죽임을 당하고 만다. 오늘날 조직에서 말뿐이지 실행력 없는 논의는 끝내 조직을 침몰시킨다는 것을 효종의 북벌 사례에서 알 수 있지 않을까?
전경일. <창조의 CEO, 세종> <이순신, 경제전쟁에 승리하라> 저자. 인문경영연구소장.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인조 정부는 눈가리개가 씌워져 있는 양, 무모하게 명분론에만 집착했다. 이전 정권인 광해군 정부의 모든 것을 지워버리듯 대외정책에서 무리수를 두기 시작한다. 내부에서는 논공행상의 불협화음이 나타나 이괄의 난을 불어온다. 새로 집권한 세력에겐 자신들의 부귀영화를 누리려는 생각 외에 백성들은 안중에도 없었다. 해서 백성들은 반정공신을 향해 “너희들과 (광해군 정부) 사람들이 다를 게 뭐냐?”고 반정공신들을 풍자하는 상시가(傷時歌)가 회자될 정도였다. 선조 이후 조선을 분열과 전화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인조를 만나본다.

-왕께서는 광해군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았는데, 국정 운영이 너무 형평성에서 멀어진 감이 있고, 권력의 독점 현상으로 결국 이괄이 난을 일으켰었는데요.

“왜? 내가 아무 노력도 안했다는 건가? 광해군 시기 이원익을 다시 영의정에 등용하기도 하지 않았는가?”

-그렇죠. 하지만 서인 내부의 인사정책인 이조참판 이하 자리에만 남인 등용이 가능하다는 원칙은 특정 정파만 권력을 독점하려는 것 아니었나요? 집권 세력 내부에서도 논공행상에 불만이 많아 결국 이괄의 난을 자초한 것이구요.

“허 참. 이괄의 난이 삼일천하에 불과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반정이 아닌 역성혁명이 성공할 뻔한 일 아니었나.”

-이괄의 반란군이 도성을 점령했을 때 왕께서는 한양을 버리고 공주로 피신하였지요? 수도를 버린 건 선조에 이어 두 번째 일이고 이로써 백성들의 민심은 완전히 이반되었는데요.

“그건 측근들이 나를 잘 보필하지 못해 일어난 일이니 내가 무슨 잘못인가?”

-왕께서는 일말의 반성의 기색도 없군요. 문제는 이괄의 난으로 후금 침략의 명분을 준 것인데요.

“그래서 내가 결국 삼전도에서 그 굴욕적인 치욕을 치르게 된 것 아닌가? 오랑캐에 대한 원한이 골수에 사무치네.”

-그러시다면 명분론보다는 소현세자가 보여줬듯 실리외교를 했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뭐라? 그러면 광해를 치고 들어선 나와 인조정부 전체를 부정하란 말인가? 그렇다면 내가 설 곳이 어딘가? 임진왜란 이후 우리에게는 명분이 중요할 수밖에 없었네. 국가적 기량이 약할 때에는 안정적 국정 운영을 위해서 오랑캐에 대한 적개심을 버릴 수 없는 거네. 숭명배금하지 않으면 인조정부가 어디 가서 설 수 있단 말인가?”

-그 결과가 소현세자의 죽음으로 이어진 것일 텐데요. 소현세자는 심양에 볼모로 끌려가 발전하는 청을 보며 실리를 추구하였는데요. 그것이 그리 못마땅하였습니까?

“나는 소현이 청에 끌려갈 때, 당부해 둔 말이 있네. 너는 한나라 소무(蘇武)처럼 행동해야 한다고. 소무는 한 무제 때 흉노에 잡혀가서도 19년 동안 흉노의 온갖 회유에도 굴하지 않은 인물이었네. 그런데 어찌 소현세자의 그 따위 행태를 용인할 수 있었겠나.”

-국익을 위한 것이라면 정권의 정체성와 다르면 내치는 것이 정치는 아닐 텐데요. 때마침 청나라가 조선왕을 교체하고 왕을 심양으로 들어오게 한다는 소문이 떠돌며 아들을 더욱 정적으로 보게 되지 않았나요?

“무슨 소리... 세자가 취한 영리 활동이나, 청에서 세자를 바라보는 태도가 못마땅하기는 했지만, 내가 죽일 까닭이야 있었겠나.”

-그럼, 소현세자가 귀국하자마자 두 달만에 독살당한 것은 무슨 까닭은 무엇입니까? 게다가 세자빈 강씨도 유배지에서 의문사를 당하게 되었고요.

“여보게. 정치란 어느 집단이 국가를 운영하는 것이네. 내가 서인들의 도움으로 집권을 하게 된 이상 그들의 뜻을 따르지 않을 수 없는 거네. 나의 지지 기반이라곤 백성도 아니고, 남인이나 다른 정파도 아닌, 오로지 서인 밖에 없었네. 내가 누굴 잡아야 하겠는가? 세자는 개인이 아닌 이상 정치적 대상이 될 수밖에는 없는 거네. 그게 정치의 본질 아닌가?”

-물론 그럴 수 있겠죠. 하지만, 임금은 국정의 중심에 백성을 놓지 않았기에 백성들은 양대 호란을 겪으면서 더욱 조정을 불신하게 되었고, 소현세자의 역할이 더 부각된 것 아닌가요?

“백성이 임금 위에 있다고 자네는 지금 말하는 겐가?”

-그럼 백성이 하늘이라는 유자(儒者)의 가르침을 부정하는 것입니까?

"그런 아니네만... 나는 백성을 다스리지 백성을 떠받드는 게 아니네. 임금도 지키지 못한 백성들이...”

조선을 전화로 몰아넣고도 스스로 만든 울타리에서 벗어나지 못한 인조. 그는 아들과 손자까지 죽였지만, 그에겐 죽어서 인조(仁祖)라는 시호가 내려진다. 제 아무리 서인 천하였다 해도 어찌 백성들의 바람과 달리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었겠는가? 해서 이후 급격히 쇠퇴해 가는 조선과 오로지 명분만 취하다 망국의 길로 접게 들게 한 CEO가 인조 아니었을까? 지금의 정치가 후세에 미치는 영향을 돌보지 못한 인조였기에 어찌 통탄해 마지않을 쏜가!
전경일. <창조의 CEO, 세종>의 저자. 인문경영연구소장.



서자로서 임금이 된 아비 선조는 자신의 서자에게 가혹하기만 했다. 임진왜란이란 초유의 전란 중에 조정을 둘로 나누는 분조를 이끌면서 실질적인 국왕으로서 전란을 관리해 냈지만, 왕이 될 기회마저 박탈당할 뻔한 광해군. 선조와 더불어 역대 조선 국왕 중에 가장 긴 기간 동안 궁궐 밖에서 보냈고, 몸소 전란의 현장을 뛰었으나 그에게는 운명적으로 명분에 가로 막힌 조선이라는 현실의 벽이 가로 막고 있었다. 조선의 15대 국왕, 광해군을 만나본다.

- “하늘이 한 세대의 인재를 내는 것은 그들로서 한 세대의 임무를 완성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요즘 사대부들은 논의가 갈라져서 명목을 나누고 배척하는 데 거리낌 없으니 이제는 피차를 막론하고 어진 인재만을 거두어 시대의 어려움을 헤쳐 나가야 하리라.” 임금께서는 기억나시나요? 임금께서 즉위년에 내린 비망기인데요. 내용으로만 보면, 탕평이 이루어지고, 뭔가 새로운 시대가 열릴 것 같습니다. 기대도 많이 했구요.

“그러신가? 나라의 기반이 인재들인데, 전란을 겪어 본 내가 나라를 튼튼히 하는 데 어찌 바른 인재를 쓰려 하지 않았겠나? 남인과 대북계 인물들을 중용한 것은 그 때문이지. 이원익, 이덕형, 정인홍, 이이첨 등이 그렇게 광해군 정부에 뛰어 들었지.”

-그런데 당을 넘어 참여한 ‘연립정권’이 붕괴하게 된 것은 무엇 때문이죠? 놀랍게도 소북파, 남인, 서인은 물론 임금께서 의지한 대신들까지 대거 역모사건에 연루되었었는데요.

“당시 내가 믿을 수 있는 것은 대북파의 이이첨 밖에는 없었네. ‘칠서의 변’을 통해 인목대비 아버지인 김제남과 영창대군을 제거한 것은 불가피한 일이었네.”

-그로 인해 효냐, 충이냐를 두고 훗날 인조반정의 또 하나의 불씨를 남겨 두신 건 아닌가요?

“그럴 수 있지. 허나 그땐 생황이 그랬었네. 정치란 상황이 지배하는 장 아니던가?”

-왕께서는 전란이 국가경영에 큰 경험이 되었다는 걸 알게 하는데요?

“그렇다네. 내가 대동법을 통해 국세를 단일화하고 간소화한 것은 백성들의 삶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함이었네. 여러 명목으로 갈취하는 탐관오리들의 횡행이 얼마나 백성들의 삶을 피폐케 했는가? 이를 두고 말들이 많았지. ‘대동법 때문에 나라가 망하게 되었다’느니 하며 오죽 말이 많았던가.”

-그만큼 효과도 컸다는 분석이실 텐데요, 요즘 말로 조세 정상화, 조세 정의를 실현한 것으로 보면 되겠습니까?

“그리 알아주면, 될지 않을까 싶네. 대동법은 실제 조선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매개가 되었지. 특히 경제 시스템의 변화를 가져와 상업, 수공업, 유통경제를 발달시켰고, 그게 조선 말까지 경제 근간이 되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게야.”

-자 그럼, 후세가 얘기할 때 가장 비중 있게 두는 임금의 실리 외교에 대해 얘기해 볼까요? 명으로부터 임진왜란시 구원받은 조선이 명의 파병 요청에 소극적이다가 그나마 파병한 강홍립 군대가 후금군한테 투항한 이른바 ‘강홍립 투항사건’의 전말에 대해서 말씀 좀 듣고 싶은데요.

“명이 조선이 어려울 때 파병한 것은 의로운 일이었네. 나도 이를 고맙게 생각하고. 헌데, 국제 정치라는 것을 좀 살펴 볼 필요가 있네. 명이 파병한 1순위는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였네. 조선이 무너지면 왜가 어디로 칼끝을 겨누겠나? 전란이 남의 나라 땅에서 벌어지고 불똥이 튀지 않게 하는 게 현치(賢治) 아니던가. 명은 그 면에선 매우 현명했네. 허나 이제 조선으로서는 망해가는 명을 위해 후금과 맞설 이유가 뭐가 있는가? 전란을 조선 땅으로 불러들일 이유가 있겠는가? 정치적 결단은 명분이 아닌, 실리에 기초해야 하네. 어디 분으로따지면이야 내가 임란이 끝난 10년 후에 원수 같던 왜와 기유조약을 맺어 국교를 재개할 이유가 있었겠는가? 강홍립 투항사건은 대의도 지키며 형세의 향배에 따라 국익을 먼저 지키고자 한 전략적 판단에서 나온 조처였네.”

-하지만 그게 훗날 인조반정의 가장 큰 명분이 되는 것 아닌가요?

“그래서 능양군(인조)이 들어서고 나서 반청 정책을 취해 우리가 얻은 게 뭔가? 가까스로 전란의 상처를 치유해 가는 시점, 정묘, 병자 양대 호란을 겪으며 백성들만 죽어나지 않았던가? 능양군도 결국 삼전도에서 치욕을 치르게 되고. 정치란 실리를 명분으로 감싸 안는 것이네. 역사적 판단이 잘못되면, 그 후과가 너무 크다는 점을 잘 알아야 해.”

-국제정세에도 뛰어나셨지만, 그런데 왜 내부적으로는 반란의 낌새를 눈치 채고 대비치 못하셨던 거죠? 명분론자들의 반격이 있을 것이라 예상치 못했었나요? 게다가 능양군은 동생 능창군이 1615년 반란 사건에 연루돼 죽자 이를 갈고 있었는데요.

“국가는 국왕이 경영을 잘 못해서 무너지는 게 아니네. 전란의 후과가 너무 컸지. 파병을 했어도 명은 무너졌지만, 그로 인한 조선의 민생 경제 피폐는 나 광해의 몰락을 가져온 거네. 게다가 내가 균형감각을 잃은 것도 주효했고.”

-그것이 반정의 싹이 트고, 성공한 이유군요?

“그렇다네. 내 반정을 못 막았으나, 반정 세력도 전 정권이 한 일을 전무 무시하며 국정을 운영하는 통에 국란을 자초했으니 눈못뜬 청맹과니가 이를 두고 말함이지. 내 이를 한탄하는 것이네.”

국왕으로서 몸소 임란을 이끌고, 대동법과 실리외교를 통해 조선을 구한 광해군. 그러나 그는 내부의 모순을 헤아리고 관리하는 역량 부족으로 정묘와 병자년의 호란을 불러들이는 구원(久遠)의 단초를 제공했으니, 경영이란 어느 한 면만 볼 게 아니라 두루 살펴 보야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한다. 해서 경영을 ‘계속되는 고민(going concern)’이라고 하는지 모른다.

전경일. <창조의 CEO, 세종>의 저자. 인문경영연구소장.


우리 역사상 가장 폭정을 일삼았다고 평가되는 연산군. 그러나 그가 폭군의 DNA를 갖고 태어났길레 한 세상을 그토록 무도하게 살았을까? 그보다는 맺힌 한을 풀어내는 방법을 스스로 몰랐기 때문 아닐까? 국왕조차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일이 있다는 것을, 한이 되는 일도 스스로 삭힐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을 그는 왜 몰랐을까? 정신적 콤플렉스가 있었기 때문일까? 국가를 다스리는 국왕이란 존재보다는, 가장 굵고 짧게 철저히 개인적 삶을 살다간 조선 제 열 번째 국왕 연산군을 만나보자.

-조선국왕들을 색깔에 비유한다면, 왕께서는 어떤 색과 닮았다고 보십니까?

“그야, 이르다 뿐인가? 붉은 핏빛이겠지. 이 대답을 원하고자 묻는 것 아니던가?

-넘겨짚지 마시고요. 스스로 어떻게 생각하나 궁금해서 묻는 말입니다.

“국왕을 모든 면에서 자아성찰과 수신이 완벽한 사람으로 봐서는 안되네. 국왕이야말로 그 큰 칼을 휘둘러 차고 있는듯하나 한없이 약한 사람이지. 권력의 끈이 떨어지면 어찌 존대해 보인다고 할 수 있겠는가. 내가 영락없는 그 꼴이지.

-음... 그러게요. 살아오신 삶을 보면 왜 그러셨을까 싶은 게 한 두 가지가 아니더군요. 한번 인터뷰를 해 볼까요?

“그러게나. 나를 불러내 또 후세간에 교훈이라도 주려고 이러는가?

-네, 그럼. 어머니, 어머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가슴 아픈 일이네. 나는 이 대목에 이르면...(목이 막혀) 할 말을 잃네. 자네는 그것을 아는가? 내가 부왕이 살아계실 때 대궐 밖에 나갔다가 어미 사슴과 새끼 사슴이 서로 어르는 것을 보고는 부왕께 그 장면이 가장 인상적이었다고 말했던 것. 그게 모자지정이네.

-그 정을 모를 사람 어디 있나요? 하지만 한을 풀어내는 방식을 문제 삼는 거죠.

“왠가? 너무 잔혹했다고 하는 말인가? 정치란 두 가지 방식 중 택일을 하는 게 아닌가 하네. 한을 풀거나, 끓어 내거나. 나는 푸는 방식을 택했지. 어머니 폐비 윤씨가 피 토하며 돌아가셨다는 얘기를 듣는 순간, 나는 피가 거꾸로 솟는듯했네. 국왕이 뭐란 말인가. 제 어미 원혼 하나 달래줄 수 없다면 용좌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나는 그 대목은 추호도 후회 않네.

-여전히 정치인 국왕과 자연인 이융(漋)을 구분하지 못하시는군요. 원한을 따지자면 하루에 살인을 세 번이나 해야 한다는 것 모르시나요?

“그러니 어쩌겠는가? 이미 나는 반정으로 몰락했고, 나의 시대도 끝났으며, 초막에서 햇빛 하나 우러러 보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해야 했으니 그 죄과를 다 치룬 셈 아닌가.

-역사에 대한 몰인식이 그런 게 아닌가 말이죠. 국왕이라 함은 군신 너머에 백성들이 엄연히 있는 법인데 백성을 도외시했던 게 아닌가 말이죠.

“일테면 그럴 수도 있네. 그러나 어쩌란 말인가. 이미 국정은 부왕께서 탄탄대로로 만들어 놓았고, 나는 할 일이 없었으며, 뭘 한들 빛이 날 수 없었는데. 치국은 그 숙제가 주어진 국왕에게나 보람된 일이네. 그렇다고 내가 처음부터 잘못했다고 질책하려 드는 건 아니잖는가?

-왕께서는 즉위 초에는 어사를 파견하여 백성들의 고초를 살피고, 나라의 기강을 바로 잡으려 했었습니다. 게다가 사가독서를 실시하여 성군이 될 조짐도 보였습니다. 그런데 너무 쉽게 무너져 내렸습니다. 왕권을 세우는 일에 너무 강박 관념을 가지신 것 같구요.

“유생이라는 게 무엇인가? 제사와 장례 의식이란 무엇인가? 조선은 너무 거추장스러운 게 많았네. 명분을 말에 섞으나 기실 속셈은 자기들의 권력을 늘리기 위한 언사 아니던가. 그들이 정말 풍흉이 임금 때문이라 생각해서 왕을 압박한 것이던가? 자연현상을 빌미로 말을 보태려는 것에 불과한 수작 아닌가? 그들이 정말 말처럼 충성을 하던가? 해서 내가 사모 앞뒤에 ‘충성’이라는 구호를 붙이고 다니게 한 것이네.

-그렇게 불신하는 유신들을 통해 국가를 유지하고 정치의 뜻을 밝혀야 하는 것 아닌가요? 모두 내치면 누가 왕의 주위에 남나요?

“왕의 방점은 옮겨 다니는 것이네. 한곳에 머물면 안되지. 김종직의 ‘조의제문’이 문제된 것은 저들의 권력 다툼에 나의 방점이 옮겨 다닌 것에 불과하네.

-그러면 갑자사화는요?

“음...정치적 해석은 앞서와 같네만, 나는 여기서 피를 보는 법을 너무 깊숙이 알았지. 어머니 폐비 윤씨 사사 사건은 충격 자체였네. 임사홍이 들고 오지 않았어도 저들은 주고받으며 말을 세우기를 주저치 않았을 것이네. 그 일로 그 오랜 훈구 대신이었던 한명회와 정창손이 내 손에 죽어 나갔으니 <사육신전>을 써서 내 손에 죽은 남효온은 외려 내 손을 빌어 원수를 갚은 것이 되었네.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인가?

-그래서 불똥이 튀고 튀어 결국 중종반정으로 이어진 것이구요?

“나를 정상인이 아니었다 말하지 말게. 내가 풀피리 불며 ‘인생이 초로와 같아 만날 때가 많지 않을 것’이라고 탄식한 이유를 그때 누가 알았겠나. 나는 끝날 때를 알고 있었어. 그건 나뿐만 아니라 어느 권력자건 그런 거네. 잔치는 끝날 때가 있는 법 아니던가? 흥청들을 데리고 놀아도 한 세상, 속흥들을 품어도 한 세상, 나보러 흥청망청 하였다 하네만, 나는 반정이 있던 날 오히려 담담하게 받아들였네. 다 짧은 세상 아니던가?

개인적 아픔을 삭힘으로써 승화되기보다는 한풀이로 세상을 살아가 혼주가 되어 생을 마감한 연산군. 그는 희대의 광대인가, 폭군인가, 아니면 인생을 달관한 처사인가... 그와의 인터뷰 끝에 그가 한 말이 귓전을 울렸다. “잔치는 끝날 때가 있는 법 아니던가.”

ⓒ카인즈교육그룹, 인문경영연구소, 전경일 소장  <창조의 CEO, 세종>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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