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쓰는 글'에 해당되는 글 7건
- 2010/10/25 이순신 장군을 뵙고 오다
- 2009/08/05 북경-내몽골을 다녀오다
- 2009/06/26 <해녀처러 경영하라>를 곧 출간하고자 합니다.
- 2009/04/13 차기작에 구상을 위한 현장 답사차 경주에 들르다
- 2009/02/02 문익점, 지속혁신의 조건
- 2009/02/02 아버지, 당신을 영원히 사랑합니다
- 2009/02/02 오늘 하루, 그대와 함께 해서 좋다
직장인들이 휴가를 떠나듯, 지인의 도움으로 여름 휴가차 집필여행을 다녀왔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 사물들, 사람들, 풍물들, 자연들, 그 속에서 면면히 이어지는 이야기들을 받아내려는 정신의 충전 과정이기도 했습니다. 사진과 곁들여 느낌을 적어볼까 합니다.
예전의 사막의 대상들도 이렇게 이동했겠죠. 낙타, '사막의 배'라 불리운 저 짐승들의 수고가 모래밭에 길을 냈습니다. 우리 인생길은 누구와 함께 하는 것인가요.
너무나 매혹적인 사막 풍경... 모든 것들은 움직인다. 사막은 움직임으로써 존재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름다운 사막여행>에서도 제가 쓴 말인데, 사막은 정막속에서도 움직입니다.
바로, 이 사람! 결국, 저는 이 사람을 쓰기 위해 다음번엔 외몽골로 갈까 합니다. 너무나 야만적이고, 매혹적인 사람입니다. 작가로써 한번 도전해 볼까 하는데, 늘 밥먹는 일이 걱정이군요.
(칼국수 먹으러 갈 시간이라, 오늘은 이쯤에서 간략히 끝내야겠네요.)
ⓒ전경일, 인문경영연구소
요즘 제가 신간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해녀들에 대한 책인데요, 우리나라 제주 해녀를 공부해 보니, 참 놀라운 사실을 많이 발견했습니다. 어찌 이리 경영의 산현장을 목도하는 느낌이던지... 올 여름내 출간코자 하는데, 시간이 허락할지 모르겠습니다. 아래 들머리 글을 조금 옮겨다 놓아 봅니다. 책의 전체 얼개를 엿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저희 인문경영연구소는 앞으로도 우리 것에서 힘찬 역동성을 찾아가고자 합니다.
<해녀처러 경영하라> 들머리글
보이는 것 천지의 경영 세계에, 보이지 않는 물 속 세계로, 파도에 흔들려도 뽑히지 않는 해초처럼 삶의 뿌리를 단단하게 내리는 사람들이 있다. 어떤 풍파에도 떠밀리지 않고, 삶의 주역이자, 경영의 주도자가 되는 사람들. 불확실성과 모든 위험을 견뎌내며, 물질하는 삶에서 희망을 건저 올리는 사람들. 그들의 이름은 바로 제주해녀다.
바닷 속 깊이 무자맥질해서 해산물을 캐내는 해녀야말로 삶의 주역이자, 생활전사이다. 목숨을 걸고 하는 물질. 그러기에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경영환경에 맞닥뜨린 경영자들의 모습과 꼭 닮아 있다. 해녀들의 삶은 놀라움 그 자체다. 물에서의 삶보다 더 쉽게 흔들리는 뭍의 삶을 사는 우리에게 새로운 인식을 심어주는 각성제가 된다. 치열한 경영현장에 선 경영자의 모습 그 자체이다.
뼈 시린 겨울 바다물속. 어둠과 불투명성의 비즈니스 영토에서 이들은 생존을 위해 순간순간 즉각적인 판단을 내려야 하고, 성과를 만들어 내야 한다. 모든 결과는 철저히 실행의 산물이다. 요행 없는 분투가 삶의 가장 든든한 밑천임을 웅변적으로 입증해 주는 것이다.
삶이 고단할수록 해녀는 함께 하는 사람들과 희노애락을 나눈다. 공동의 목적 앞에 개인의 이익을 뒤로 하지만, 개인적 역량을 최대한 드러내는 일에서는 누구보다도 강인한 정신력을 발휘한다. 프로로 거듭나기 위해 어렸을 때부터 치열한 훈련을 쌓으며, 개인의 경쟁력을 갈고 닦는다. 이런 해녀들은 프로 경영자의 조건을 알고, 어떤 악천후가 몰아치는 경영환경에서도 철저하게 자기 노력과 실력으로 평가받고, 도약하려는 경영자의 표상이 되고 있다.
경제가 어렵다고 타박하는 대신, 솔선수범해서 찬 물에 뛰어든다. 어려운 환경은 스스로 자력, 자강의 노력을 기울일 최적의 외적 조건임을 알고, 스스로 분발해서 경제적 독립을 이룬다. 새로운 시장을 찾아 불확실성이 내포된 바다라는 신천지로 떠난다. 그들은 뭍의 사람들이 안으로 파고들 때, 국내 연안의 바다뿐만 아니라, 멀리 일본, 중국, 러시아까지 원정 물질을 나가는 글로벌 리더십을 발휘했다. 그런 노고를 통해 집안을 일으켜 세우고, 학교를 세우고, 자신의 꿈을 이뤘다. 동북아시아를 해녀 벨트로 묶고, 네트워크화 시킨 참다운 바다의 경영자들이라 할 수 있다.
바다에서의 물질은 목숨을 내놓는 경영행위이다. 한 번의 실수는 목숨과 직결되고 삶이 죽음으로 전환되기도 한다. 이런 열악한 환경에서도 1인 기업을 이뤄내고, 바다의 개척자이자, 벤처 모험가로 거듭난다.
바다 위의 거친 삶터, 물질 하나로 삶을 부여잡고, 자식 농사를 지으며, 독립적인 벤처기업 경영자로 살아가는 해녀들. 그들은 오늘도 물질을 하며 벅찬 삶을 퍼올린다. 천길 물속을 숨 가쁘게 들락이며 삶을 일궈내고, 바다 속을 손금 보듯 꿰뚫어 본다. 세상에 어느 경영자가 자신의 사업 환경을 이렇듯 손금 보듯 할까? 그러면서도 해외로 원정물질을 떠나며 부단히 ‘사업 있는 곳에 물질 있다.’는 신념을 드러낸다. 이런 한국해녀의 강인함과 질김을 통해 우리는 우리 안에 내재한 개척정신과 리더십의 원형을 찾는다.
이같이 억척스럽게 삶을 일구어내는 해녀들의 21세기적 경영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것은 인내와 노력과 비전이다. 삶의 근거이자, 억척스러움이다.
이 책은 대한민국 경영자를 위해 거친 물살을 헤치고, 삶을 개척하는 해녀들의 강인함, 근면함, 혁신 마인드, 도전의식을 통해 우리 내부의 힘이 어떻게 경영전반에 확산되고, 안착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나아가 해녀들의 불가사의한 저력의 근원을 통해 오늘의 경영현장을 뜨겁게 달구고자 한다.
해녀의 삶은 가히 초인적이다. 가장 조직적이다. 비전을 내재하고 있다. 가장 헌신적이며, 어느 분야의 사람들보다 헌신 몰입도가 높다. 삶의 엄숙함을 절실히 체득케 한다.
해서 우리는 뭍의 경영현장에 바다의 경영자들을 불러내 오랜 분투와 꾸준한 자기계발과 혁신에의 노력과, 강력한 리더십을 배우고자 한다. 바다의 투사이자, 경영자로서 그들을 21세형 경영자로 자리매김 시키고자 한다.
해녀! 21세기 어두운 경제여건과 불확실성의 미래라는 암흑의 바다에서 사업의 금맥을 캐내는 이들에게 이 책을 바친다. 해녀의 삶과 그들의 불굴의 리더십은 우리 내면에 용솟음친다.
- 신간예정 <해녀 리더십>의 들머리 글 중에서
어떠세요? 좋을 것 같습니까? 그럼, 책이 나오면 그때 또 찾아 뵙겠습니다.
인문경영연구소 전경일 소장 드림.
이번 작품은 영화화를 목표로 하고 있는데, 연속적으로 몇 편을 구상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역사경영서로 문익점, 통섭학, 자녀교육, 에세이가 이번 4월말~ 5월에 걸쳐 연속 4권이 나옵니다. 하반기 작업도 진행 중이고, 반드시 인경영이 일가를 이루는 노작을 선보이기 위해 계속 정진하겠습니다. 지켜봐 주십시요.
<문익점, 지속혁신의 조건>(가제)으로 창조적 혁신과 산업 패러다임 전환기의 생존전략을 다룬 책을 준비중입니다. 그 얼개를 소개합니다. 글의 대강을 살펴볼 수 있을 것입니다.
토요타에서 문익점을 만나다
지난 5월 30일, 나는 비즈니스부문에서 실시한 창의적 혁신 마인드 제고를 위한 TPS 견학 차 일본 나고야시에 위치한 토요타산업기술기념관 앞에 섰다. 개인적으로 7년간 별러온 참관 방문의 기회를 얻은 셈이다. 이를 일본어로 ‘솟타구’ 기회라고 하던가! 언필칭 절호의 찬스라는 의미렸다!
내가 이 기념관을 방문하고자 했던 것은 그간 말로만 듣던 토요타 혁신 마인드를 살펴보고, 매출 23조엔, 영업이익 2.3조(‘07년 회계기준)의 눈부신 성장을 꾀해 내고 있는 그들의 숨은 성장 비결이 무엇일까, 지난 7년간 내가 천착해온 토요타 경영 혁신의 진짜 알맹이는 무엇일까, 하는 궁금점을 파헤쳐봄으로써 그 본령에 깊숙히 들어가기 위해서였다. 토요타의 경쟁력을 내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지는 그간 연구해온 ’문익점 프로젝트‘의 끝을 볼 수도 없거니와, 100년 기업의 혁신을 내재화시켜 내지 못하는 답답함이 항시 나를 짓누를 것 같았음은 당연하다. 그만큼 나의 의식은 문익점과 토요타에 닿아 있었다.
문익점과 토요타. 이 둘은 무슨 상관이 있길레 나는 어둑시니에 붙들린듯 이 둘을 한 덩어리로 대하며 탐침하려 든 것일까? 자세한 내용은 조만간 출간될 책에서 상세히 다루기로 하고, 일단은 그 뒷배경부터 간략히 살펴보기로 하자.
한 알의 목화씨가 불러온 경영 혁신
‘700년 전 전래된 문익점의 목화씨는 어떻게 토요타자동차가 되었는가?’ 7년간 나의 의식을 붙들어 맨 화두는 이것이었다. 이 화두를 풀어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진정한 도전, 혁신의 도전’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또한 어떤 ‘도전’이어야 하는가? 바로 여기에 혁신의 출발선이 놓여 있다.
세상에는 영원히 지지 않는 도전이 있다. 처음엔 작은 시도였으나, 추구하는 바의 원대함으로 인해 훗날 큰 족적을 이뤄내는 일들이 있다. 700여 년 전, 문익점이 들여온 목화씨가 바로 그렇다. 려말 원-명 교체와 고려-조선이 바뀌는 극도의 혼란기에 문익점은 이른바 <공민왕폐위사건>으로 극도의 경색국면에 접어든 원과의 현안문제를 풀기 위해 사행길에 오른다. 이때가 1363년(공민왕 12)의 일이었다. 서장관으로 간 그는 반(反)공민왕 일파에 귀부하라는 원 황제의 명을 거역했다는 죄로 42일 동안 구류에 처해진 뒤, 그해 11월 지금의 베트남인 교지국(交趾國,)으로 귀양을 가게 된다. 그가 풀려난 건 1366년 9월, 결코 짧지 않은 유배생활이었다.
그런데 문익점은 귀양살이에서 풀려 원도로 귀환하는 도중 밭 가운데 핀 목화꽃을 보게 되면서 인생일대의 대전기를 마련하게 된다. 귀양에서 풀려 돌아 온 그를 원제는 예부시랑(禮部侍郞)어사대부(御使大夫)로 봉하였으나, 사임을 청하고 귀국길에 오른다. 이때가 1367년(공민왕 16) 2월로 고려를 떠난 지 근 5년 만의 일이었다. 문익점이 귀국하자 공민왕은 중현대부예문관제학겸지제교(中顯大夫禮文館提學兼知製敎)의 벼슬을 제수하였으나, 곧바로 고사하고 고향으로 내려간다. 달리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문익점은 장인 정천익과 그 일족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마침내 그 자신도 예기치 못한 놀라운 결과를 빗어내게 되는 게 그게 바로 목면혁명이었다. 하나의 작은 의지가 마침내 의료(衣料) 혁명을 가져온 것이다. 이로서 우리는 마치 근대서구에서의 산업혁명처럼 의료(衣料)혁명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목화씨 한 알이 세상을 완전히 바꾸다
온갖 노력 끝에 목화는 10년 내 한반도 전역으로 보급되어 나가기 시작하고, 1392년 조선왕조가 들어서자 목면은 본격적인 재배에 들어간다. 심지어는 세종시기 4군6진의 개척에 따라 북진화 정책에 힘입어 북방지역의 경제 활동과 국토 확장에 크게 이바지 한다. 그리하여 의생활을 비롯, 다양한 분야에서 신성장 엔진 역할을 톡톡히 다한다.
이때부터 우리 민족을 백의민족이라 부르게 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문익점은 목화 재배뿐만 아니라, 호승 홍원에게 직조법을 배워 기구를 만들고, 방직 기술을 개량해 낸다. 또한 일가의 헌신적 노력으로 문익점의 손자인 문래(文萊)는 소사차(繅絲車) 즉, 물레를 개발해 내고 문래(文萊)의 동생인 문영(文英)은 조직(繰織) 기술을 개발해 낸다. 문영이 무명이 되는 것은 민간의 입에 오르게 되면서부터다. 그야말로 혁신의 파노라마가 벌어졌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때 문익점의 혁신 마인드는 어디서 나왔을까? 문익점의 목화 발견의 의의중 하나는 그가 무한한 잠재가치를 찾기 위해 누구보다도 열린 눈과 상상력을 가지고 세상과 사물을 바라보았다는 것이다. 그 이전에도 많은 사람들이 목화를 목견했을 터인데, 오로지 그에 의해 그 가치가 픽업된 것은 이 점을 잘 드러내 준다. 이는 평소 주변 사물이나 일에 대해 고정 관념을 버리고 열린 눈과 귀로 새로운 가치를 보고자 하는 혁신마인드와 상상력이 결합해 만들어 낸 합작품이었던 셈이다. <창조적 파괴(Creative Destruction)>의 저자인 리차드 포스터와 사라 카플란은 혁신성공 이유로 ‘확산적 사고(Divergent Thinking)’를 주창하고 있는데 문익점 프로젝트가 이와 같다 하겠다. 주변의 사소한 일에도 우주적 해답을 얻고자 한다면, 사과가 떨어지는 광경을 보며 우주적 상상을 할 것은 자명하지 않은가!
목화는 현해탄을 넘어서 렉서스가 되더라
문익점의 목화와 관련 기술은 임진왜란 전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서민 생활에 결정적으로 이바지 하게 된다. 하지만, 그것은 조선에서 쓰인 것과 사뭇 달리 의료(衣料) 이외에 다른 용도, 즉 임란 시기 화승총의 원료나 선박의 돛 등으로 쓰이며 오히려 조선 침략의 도구로 사용된다. 그러다 개항을 전후로 해서는 일본 방직기술이 급속도로 발전하며 조선 면업을 초토화시켜 버린다. 이때부터 조선은 목면의 원료 공급기지와 소비지로 전락되고, 2차 세계대전 동안에는 병참기지화되는 길을 걷게 되는 것이다.
이런 일련의 과정에서 등장하는 회사가 토요타자동차의 전신인 토요타자동직기주식회사이다. 이 회사의 창업자인 도요타 사치키는 실로 탁월한 엔지니어였다. 그는 평생 직기개발에 힘써 인력 직기를 동력 직기로, 동력 직기를 다시 자동직기로 발전시켰고, 또 평면 직기를 환상(環狀) 직기로 개발해 내며 자동직기의 혁신에 평생을 몰두한다. 이렇게 혁신적인 발전 기회를 갖게 된 도요타는 자동직기의 개발 특허권을 영국방직회사인 플랫-브러더스사에 팔아 100만엔을 마련한다. 이 돈이 훗날 도요타 사치키의 아들 기이치로가 토요타자동차를 설립하는 종잣돈(seed money)이 되는 것이다. 이 돈은 문익점이 최초로 들여 온 목화씨처럼 미래 토요타의 패러다임을 바꿀 수 있는 천금과 같은 재원이었던 셈이다.
이 시기로부터 도요타는 토요타자동차를 출범시켜, 창업자의 정신을 이어받은 혁신을 강화해 나간다. 이른바 토요타생산방식(TPSㆍToyota Production System)으로 알려진 100년간의 생산성 향상을 위한 혁신적 노력이 토요타이즘(Toyota-ism)으로 자리 잡게 되는 것이다.
이 역사적 변천사의 궤를 꿰며 ‘혁신’, ‘지속성장의 조건’, ‘패러다임 전환’ 등의 경영용어를 떠올리게 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일본은 조선의 목면과 기술을 받아들여 지속 혁신시킨 반면, 우리는 안타깝게도 초기의 발전을 근대에까지 이어나가지 못한 채 가내수공업에 머물러, 끝내 일본면방직업의 식민지가 되고 만다. 우리로부터 도입하고 발전시킨 일본의 면업은 그후 우리를 뛰어넘는 성과를 내며, 자동차 산업으로 먼저 환골탈태해 나가게 되는 것이다.
내가 지금 서 있는 토요타산업기술기념관은 바로 그런 그들의 역사를 말해주기라도 하듯, 방적기 등 일본 기계공업의 역사는 물론 도요타 자동차의 발전 과정도 한눈에 띄인다. 물론,유리창속의 화승총도 보인다. 우리나라의 많은 경영자, 관리자들이 이 기념관을 찾지만, 그들 중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엄연하기만 한 역사의 흐름을 꿰며 알고자 할 것이며, 기업차원을 뛰어넘어 국가차원의 패러다임 전환에 대해 생각할까?
오늘날 한국 경영자들은 생산성 향상차원의 벤치마킹을 뛰어넘어, 목화씨 한 알을 앞에 두고 깊은 명상의 시간을 가져야 할런지 모른다. 이것이 토요타 100년의 역사가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이자, 우리가 문익점을 현재화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개인이나 기업, 나아가 국가도 혁신의 노력 없이는 일획을 긋는 발전을 기대하기란 어렵다. 문익점 시대의 탁월한 성취는 결코 역사의 일부로 국한되어서는 안된다. 그것은 21세기 우리의 생존과 직결되어 있다. 문익점 시대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혁신과 도전이 멈출 수 없는 가장 분명한 이유이다. ⓒ전경일
아버지의 시신을 땅에 묻을 때, 나는 이제는 고인이 된 아버지와의 추억을 떠올렸다. 아버지에 대한 나의 기억은 언제나 새롭다. 막내인 나는 형제들 중 어느 누구보다도 사랑을 듬뿍 받은 자식이었다. 어렸을 때의 어떤 기억은 시간이 갈수록 또렷해지곤 한다. 무서운 꿈을 꾸고 났을 때, 나는 아버지 품속으로 파고들었고, 당신은 잠결에서도 나를 어르며 받아 주셨다. 아버지의 무릎에 앉아 응석을 부리며 밥을 먹던 일, 아버지의 팔베개를 벤 채 아스라이 잠속으로 빠져들던 일, 아버지의 등에 업혀 군청 뒤 군인 극장에 갔다 오던 일... 그 모든 기억이 그 순간 내게서 되살아났다. 아버지는 그렇게 큰 사랑을 베풀고 내 곁을 떠나가셨다.
아버지의 생체 시계가 멈춘 날, 나는 사람에 대한 사랑과 극진한 마음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다. 불교에서 말하는 연기사상(緣起思想)처럼 아버지가 있음에 내가 생겨났지만, 그 분이 떠난 다음에도 나는 여전히 살고 있다. 나는 당신이 늘 내 곁에 있다는 것을 안다.
운명이란 개별적인가? 나를 만든 둥지는 세월이 훑고 지나간 뒤, 낡고 헐거워져 바람에 날아갔지만, 나는 그 둥지에서 부화해 날개 돋은 채 세상을 향해 날아갔다. 나를 낳아 기른 둥지를 돌아볼 새도 없이 바쁜 세상 속으로 날아가 버린 것이다.
아버지가 운명하시기 전, 형제들은 병실에서 순환식으로 수발을 거들고 있었다. 내 차례가 와서 아버지와 단 둘이 남게 된 날, 나는 용기 내어 아버지께 말했다.
“아버지, 저를 낳아 주시고, 특별히 귀여워 해 주시고, 잘 키워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아버지, 사랑해요.”
내 목소리는 떨렸고, 그때 나는 의도적으로라도 아버지의 손을 꼬옥 잡고 있었다.
아버지는 눈을 감으셨다. 나는 가만히 아버지의 손을 내려 보았다. 아버지 손등에 난 동상 흔적이 보였다. 나는 그 상흔에 익숙하다.
그 상처는 오래 전, 시골에서 농사지을 때 한겨울에 나무를 하러 가셨다가 걸린 상처였다. 약이 시원치 않던 시절, 광목에 밥풀을 먹여가며 동여 메시던 아버지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아버지의 모습은 내게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시골서 농사를 지을 때 맨발로 논밭에 들어서시던 모습은 지금도 한 장의 사진으로 남아 있다. 아버지의 갈라진 발 뒤쿰치는 병상에 오래 계시는 동안 한결 부드러워졌지만, 예전처럼 대지에서 생산을 주관하던 농부의 그것은 아니었다. 아버지는 70년대에 서울에 올라 오셔서 대학 부지에 채소를 재배하긴 했지만, 결국엔 농토다운 땅을 어루만지지 못하신 채 돌아가셨다. 그것마저도 심장병이 도져 마루와 방 사이를 힘겹게 걷기 전의 일이었다.
나는 속으로 눈물을 눌러 참으며 아버지의 여윈 손을 잡았다.
“알았으면 됐다. 너로 인해 행복했다. 열심히 살거라. 건강을 잃으면 소용없다. 욕심 부리지 말거라. 인생은 한 장의 드라마다. 네가 있어 내가 남한테 부끄럽지 않았다. 서울에 와서 내가 아들 잘 키웠단 얘길 들었다. 네가 이 정도 됐으면 됐지...”
기껏해야 대기업 부장인 내게 아버지는 대단한 자부심을 느끼시는 것 같았다. 그것은 아버지가 보시기에 험한 세상에 그나마 안정적인 삶을 영위하는 자식의 모습이 안도되어서 하시는 말씀이라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나는 아버지와 병실에서 나눈 대화를 잊지 않으려고 머릿속에 메모했다. 단 둘이 나누는 당신과의 마지막 대화가 될 수 있다는 두려움이 앞섰다. 당신은 생의 마지막 입원 시에 나와 단둘이서 병실에 남아 부자지간의 정과 사랑과 애뜻함을 함께 나누고 계신 중이었다.
가장 진실한 말일수록 어떤 땐 입을 막아 버린다. 때로 우리는 체면 때문에 말을 입 밖에 떼기 어려운 순간이 있다. 하지만 나는 아버지가 가장 힘든 순간, 그동안 꺼내기 힘든 말들을 쏟아냈다. 내가 아버지를 “사랑한다”는 고백이었다. 돌이켜 보면, 어려운 말이 아니어야 했을 그 말이 왜 평소에 그리 쉽게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었을까...
아버지와 마주한 그 날 밤은 2006년 11월 9일이었다. 곧 몇 분 지나면, 아버지의 82세 생신이었다. 나는 밤 12시가 넘었을 때, 아버지 손을 잡고 “아버지 생신축하 드립니다”고 인사드렸다. 아버지는 생이 다해가는 시점에서 맞이하는 당신의 생일에 별 다른 감회를 갖고 있지 않으셨다. 그 만큼 육신을 덮친 고통이 전신을 압도해 오고 있는 중이었다. 발병이래, 심장병의 특징상 편히 누워 수면을 취하기란 쉽지 않다. 새벽까지 앉은 채로 침대의 난간을 쥐고 숨 가쁘게 앉은 잠을 주무시기도 했다. 그 같은 기억이 날 때면, 나는 그만 가슴이 미어진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과거를 회상 할 때, 나는 아버지와 좋은 기억만 있었던 것도 아니라는 것 알게 되었다. 대학입시를 앞두고 문학청년으로 살겠다며 소설책을 집어든 나를 꾸짖으실 때, 나는 아버지가 왜 역정만 내시는지 알 수 없었다. 내가 질풍노도의 젊음과 맞설 때, 그 분이 무엇 때문에 그리도 걱정하고 낙담해 하시는지를, 나는 훗날 자식을 키우면서야 알게 되었다. 사랑은 고통을 감내해 내는 것이다. 사랑은 한없이 아래로 내려가는 것이다.
아버지가 끝내 위독하다는 전화를 받은 건 내가 월요일 아침 내가 출근했을 때였다. 택시를 탓으나 공교롭게도 병원 위치를 잘 모르는 기사가 20여분을 엉뚱한 사잇길을 내달리며 시간을 허비했다. (택시 기사분들은 손님 중엔 정말 화급을 다투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 필요가 있다. 그러니 평소에 길을 잘 익혀두시길 바란다.)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단말마의 숨을 크게 두 번 쉬고는 운명하셨다는 얘기를 전해들은 것은 내가 병실에 급하게 뛰어 들었을 때였다. 잠을 주무시듯 누워계신 아버지의 육신은 아직 체온이 따뜻하게 남아 있었다. 나는 그렇게 아버지의 운명을 보지 못한 채, 당신과 작별해야만 했다. 그 전 날이 내가 아버지와 보낸 마지막 날이었던 것이다.
사랑은 클수록 알지 못한다던가? 나는 아버지의 사랑을 조금도 갚아 드리지 못하고, 침묵 속에서 보내드려야 했다. 죽음 앞에서 우리는 잠시 회한에 빠지고, 경건해 지지만, 다시 세상 밖으로 돌아 나오면 삶의 진실성을 찾거나 인생의 진정한 가치를 찾는 일에 소홀해지기 마련이다. 죽음 같은 삶을 살면서도 불나방 같이 산다. 때론 그런 것이 인생을 열심히 사는 것인 양 착각하기도 한다.
죽음은 없다. 우리가 고인의 삶을 통해 인생의 면면을 알고 보다 정신적으로 단련되고, 참다워 진다면, 삶은 필시 죽음을 대신하게 될 것이다. 일상을 살며 우리는 이를 얼마나 잘 알고 있을까?
나는 못 다한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끊임없이 되새기며 생의 마지막까지 충실하고자 한다. 진정한 삶의 의미란, 죽음을 사는 것이다. 고인과의 추억을 상기할 때 떠오르는 깊고 고요한 샘물 같은 슬픔이나, 삶이 보여주는 명징성을 마음에 지닌 채 남은 사람들은 나머지 생을 살아내는 것이다. 그것이 열심히 사는 우리 일상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자명하다.
아버지하고의 작별은 먼 훗날 천국에서 다시 말날 거라는 당신의 묘비 시구에 새겨져 있다. 이제는 미망인이 된 나의 노모와 당신의 자식들이 마음에 새긴 것이다. 우리는 세월 앞에서 작별했으나 언제고 다시 만날 것을 믿는다.
천국에로의 초대
- 아버지께 바치는 시, 三男 경일
나 천국으로 갈 때
다 놓고 가리라
손에 쥔 거
마음속에 담은 거
다 내려놓고 가리라
아름다운 세상,
빈손조차 훌훌 턴 채
천국으로 가리라
나 천국으로 갈 때
민들레 홀씨처럼 가볍게
하늘로 날아오르리라
천국에서 나 초대할 때
아름다운 기억일랑
다 챙겨서 떠나가리라
슬프고 아픈 감정 따윈 다 던져 버리고
소중하고 따뜻했던 기억들만 고이 들고서
홀연히 오르리라
가슴 설레며 세상 끝에서
세상 한가운데를 향해
마지막으로 인사하면서 떠나가리라
조금은 서글퍼도
조금은 아쉬워도
얼굴 가득 미소 머금고
손 흔들며 가리라
잘 있으라고
사는 게 즐거웠다고
아름다웠노라고
사랑의 추억 챙겨서 떠난다고
그렇게 인사하리라
나 세상 떠나는 날
그대에게 작별의 입맞춤 하리라
아이들과 여자들과 힘든 노인들
볼과 입술과 두툼한 손 등 위에
입 맞추리라
사랑하는 사람들과
내가 사용했던 소지품 따윌 남기며
내 작은 생애를 안타까워하면서
나 작별 하리라
굿바이-
그대 잘 있으라
살아서 못 다한 것
살아서 못 마친 것
살아서 못 이룬 것
끝내 아쉬워 않고
마음 훌훌 털고
이제는 천국에서 살고파
떠나간다고 나 말하리라
내가 사는 곳, 이곳 천국에서
사랑하는 이들과 다시
만날 거라고 손 흔들며
굿-바이
나 돌아 올 때면 눈물 왈칵,
쏟을지 모르겠다며
그대들 잘 있으라고
작별인사 하리라
내 생의 마지막 날,
세상의 첫날을 위해
사랑의 인사 남기며.
작디작은 생활은 모여 일상이 되고
내가 지은 생각은 온전히 나를 이룹니다.
하루를 출근해 낯익은 타인들과 시간을 보내며
우리는 점차 친숙해 집니다.
어느덧 나도 모르게 서로를 알게 되고,
때가 묻게 되는 것이죠.
9 to 6
출근해 인사를 하고, 회의를 하고, 밥을 같이 먹고,
업체를 만나고, 매출 때문에 쪼이고...
그러다보면 어느덧 하루는 마감시간으로 달려갑니다.
이제 집으로 갈 시간이 찾아오는 것이죠.
여느 날처럼 바쁜 아침에
가족과 인사조차 못하고 집을 나왔거나,
눈 부비고 일어난 아이들을 끌어 안아 주지도 못한 채,
아파트 바닥에 구두굽을 부딪치며 급히 뛰어 내려오거나,
비누냄새 풍기며 버스나 지하철에 올라탑니다.
하루는 이렇게 질주하며 시작되는 것이죠.
회사에 오면, 어제와 같은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다들 어제와 같을 것이라 믿기에
늘 헌 눈으로 동료들을 쳐다봅니다.
그러나 아십니까?
우리 일상은 하루가 일년 같기도 하고,
일년이 하루 같기도 하다는 것을요.
밤새 엄청난 변화를 우리는 겪고 있다는 것을요.
그저 그렇겠거니 하고 생각하는 것들은
간 밤을 거치며 불현듯 현실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하루 하루가 남다른 것이지요.
회사에서 매일 매일 만나는 동료들 중엔
말 못할 답답한 사연도,
가슴 아픈 일도, 즐겁고 보람된 일도 다 있을 것입니다.
때로는 좋은 일도, 싫은 일도 없이
별 일 없는 게 축복이기도 하지요.
그런 동료를 우리는 주의깊게 바라보지는 않습니다.
바쁘다는 이유죠.
우리의 일상처럼 하룻밤만에
우리 몸도 변화를 겪어
우리는 하루가 다르게 나이가 들고, 노화되어 갑니다.
우리 몸을 이루는 세포들은 매일밤 수억개씩 죽고
다시 태어나기도 합니다.
다만, 우린 그걸 직감하지 못할 뿐이죠.
용변을 보고나서 회사 화장실 거울에 비춘 얼굴은
푸석푸석해 보입니다.
간밤에 소주를 마셨거나, 늦게까지 야근을 했거나,
직장생활과 함께 나이 들어가서 그렇거나,
일상이 나를 조금식 바꾸어 놓는 것이죠.
때로 문득, 멈춰 서서 나를 보게 되는 때,
우리는 의도적으로라도 옆의 둉료들을 지켜 보게됩니다.
저친군 어떨까?
익숙한 타인에 그제서야 관심이 생겨나게 됩니다.
어느덧 낯설기만 하던 사람은 밥을 같이 먹고,
일을 같이 하는 것 때문만이 아닌,
인간에 대한 관심으로 다가서게 됩니다.
팀(Team)이라는 이름으로, 직장이란 조직에서
우리는 나 같은 남들을 만나며
우연히도 성숙해 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죠
우리는 모두의 친구이자, 동료들입니다.
낯설게 만났던 우리들이 서로 친숙해지며
서로가 지켜야할 예의와 인간에 대한 존중을
배우기도 합니다.
그러며 우리는 정신적으로 계속 성장해 갑니다.
하루 중 가장 밝고 화려한 낯의 9시간을
더불어 함께 보내는 주변 사람들을
나를 대하듯 따뜻한 눈길로 바라 봐 주세요.
내가 보내는 인생이 지금
그들과 함께 하고 있습니다.
나를 구성하고, 나를 성장케 하는 동료들이 있어
여간 즐겁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같은 팀 사람들입니다.
일년의 시계는 계절을 어김없이 바꾸어 내며
어느덧 절반을 넘어서려 합니다.
혹한의 겨울은 폭염의 여름으로 대치됩니다.
우리 일이 절반을 마무리 하고,
우리 삶이 일년의 절반을 완성해 갑니다.
그 일과 인생의 시간에
나의 동료들이 내 주변에 동그라니 모여 있습니다.
가까운 벗들에게,
일년의 나머지 절반을 선물해 주세요.
오늘 하루, 그대와 더불어
삶을 훌륭히 살아낼 수 있어 즐겁다고요.
고맙다고, 사랑한다고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