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담을 하다 보면 모든 실패를 ‘마지막’과 동의어로 몰고 가는 사람이 있다. 이 얘긴 달리 표현하면 그 사람은 앞으로 더 많은 실패를 할 수도, 실패를 종식시킬 수도 있다는 얘기와 같다. 어쨌든 ‘마지막’을 향해 치닫고 있으니까, 종국은 보이는 것 아닌가?
하지만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언젠가는 변하게 되어 있다. 당신이 주체적으로 상황을 타개해 나가려 노력하지 않아도 말이다. 그러나 그럴 때의 변화란 변화에 휩쓸리는 피동적 존재가 되는 것 밖에 없다. 시간도 문제다. 죽은 다음에 변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죽은 다음엔 이미 모든 게 변하게 되어 있는데. 성공이나 실패의 시차는 그래서 중요하다.
실패의 두 가지 종류를 아는가?
모든 실패의 가장 위험한 단계는 그것이 회복 시차와 맞물려 있다는 것이다. 휴스턴 대학의 잭 맷슨은 이를 가리켜 “느리고 우둔한 실패”와 “총명하고 빠른 실패”로 구분하고 있다. “느리고 우둔한 실패”의 위험성에 대해 그는 “그 과정이 너무 긴 시간을 요하기 때문에 당사자가 기진맥진해서 자포자기 상태가 되는 것”에 위험 요소가 있다고 말한다. 반면, “총명하고 빠른 실패”는 한꺼번에 실천에 옮기고 다음에 실천할 일을 준비하는 것”이다. 그는 가능한 한 짧은 시간 내 성패가 판가름 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것이 실패든 성공이든 말이다.
이와 관련되어 내가 아는 어느 중소기업 사장의 경우가 여기에 해당된다. 김 인출 사장은 소규모 회사를 경영하며 매월 지출되는 경상경비 조차도 감당하기 어려운 형편이었다. 그때 인수하고자 하는 기업이 나타났다. 그러나 그는 적당한 선에서 합의를 보기 보다는 무리한 배팅을 시작했다. 더 먹고 싶었다는 것이다.
시간이 흐르자, 상대사는 그 회사의 속사정을 훤히 꿰뚫어 보게 되었다. 마침내 터무니없는 욕심 때문에 얼마 후 그는 회사를 매각할 기회마저 놓쳐 버리고, 정리해야만 했다. '떨이'도 못한 채 야채와 생선을 다 썩혀 버렸던 것이다.
그런 그가 한 말이 인상적이다. "그렇게 넘기려면 그냥 접어 버리지, 뭐." 지금 그는 파산한 배에서 짐짝 하나도 건지지 못한 채, 다시 월급쟁이로 돌아가, 조금씩 '판 돈'을 다시 모으고 있다.
실패에서 배운 자를 믿어라
나는 김 사장이 재기에 성공하리라 믿는다. 그는 실패에서 제대로 배웠다. 결과적으로 ‘우둔한 실패’를 했지만, 그는 ‘영리해 졌다.’ 내가 그의 재기를 장담할 수 있는 것도 바로 그 이유 때문이다.
영리하게 실패하기 위해서는 그 모든 것을 잃는 가운데에서도 최소한 시간만은 잡아야 한다. 최소한 자기가 상황을 알고 판단할 시간 감각만 있다면 바로 그런 상태는 당신이 마음의 평정을 유지한 채 상황을 보고 있다는 얘기고, 그만큼 훈련되어 있다는 얘기다.
실패를 ‘우둔하게’만드는 데는 손 쓸 시간조차 없는 상황이 더 큰 실패에 크게 한몫하기 때문이다. 시간의 틈바구니에 끼어 있으면 어떤 판단도 흐려지지 않을 수 없다. 초읽기에 밀리면서도 마음의 중심을 잡고 대국을 바로 볼 수 있는 기사(棋士)라면 쉽게 패배하지도 않을 테니까. 그는 ‘선수(先手)’를 놓치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강우동 사장의 경우도 나는 반드시 인생 역전 케이스에 포함될 것으로 믿는다. 강 사장은 퇴직 후 옷가게를 경영했다. 그러나 채 1년이 못가 거래처의 농간과 브랜드 선정의 실수로 그는 막대한 손실을 입고, 가게 문을 닫아야 했다.
성공한 사람의 철칙에서 배워라
그러나 그에게 남은 재산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해외 브랜드를 관리하는 업체 직원을 통해 국내 진출 희망 업체 리스트를 구한 것이었다.
최근에 이 메일로 업체 아시아 담당 이사와 연락을 취했는데, 지역 매니저 역할을 1년만 맡아 할 수 있겠느냐는 거였다. 강 사장의 말에 의하면 1년이면 ‘빠꿈이’가 된다고 한다.
그는 난파한 배에서 아무 것도 건지지 못한 게 아니라, 오히려 큼지막한 자기 커리어를 쌓았다. 또한 ‘실패’를 했어도, 바로 주어진 여건에서 주워 모을 수 있는 가용 자원을 재빠르게 재조합해서 ‘총명한 실패’로 전환시켰다.
영리하게 실패하는 자들에게 기회는 다시 온다. 이건 성공한 사람들이 보여주는 철칙 중에 하나다.
ⓒ전경일 인문경영연구소장
'직장경영/성공학 책은 모두 버려라'에 해당되는 글 6건
- 2010/08/27 영리하게 실패하라
- 2010/08/27 자신을 좀 더 투명하게 보아라
- 2010/01/25 반응을 달리하라
- 2010/01/25 인생은 흩어진 퍼즐 같은 것
- 2010/01/19 쓰러졌다 다시 일어나라
- 2010/01/19 삶을 터득하는 법
어렸을 때 마을에 엿장수가 나타나면 병을 들고 간 적 있다. 어느 날 나는 기름병을 들고 갔었다. 그 때 엿장수는 내게 단호하게 “기름병은 안돼!”라고 말했다. 기름병은 왜 안 되는 거지?
그 이유를 나는 한참 뒤에야 알았다. 불투명하기 때문이다. 기름 찌꺼기를 분리해 내는 데 별도의 비용과 손질이 필요하고, 그 기름때가 다른 병에도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었다. 그 후 나는 기름병을 들고 엿장수한테 가지 않았다. 그 수염이 덥수룩한 아저씨는 ‘엿장수 마음대로’ “기름병은 안돼!”라고 말하며 거절할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부시 맨은 앞을 보는 병을 원한다
그때 내가 들고 간 기름병은 설사 아프리카 초원에 떨어져 있다 하더라도 어느 부시 맨도 집어 들지 않았을 것이다. 그 걸로는 앞을 볼 수도 없었을 테니까.
이런 나의 경험은 사소한 것이지만, 나이 들어 내 자신을 바로 보는데 도움이 됐다. 직장을 잡으려고 이력서를 넣으면, 언제나 내가 인식하는 ‘나’와 달리 나의 가치는 형편없이 추락해 있었다.
심지어 나이 들어 좀더 많은 경력을 쌓은 다음에 만나게 되는 헤드헌터들은 “하신 일이 너무 많군요. 그게 흠이 예요.”라며 퇴짜를 놓았다. ‘한 일이 많다?’ 그것도 흠이 될 수 있는가?
그렇다. 세상엔 주어진 영역에서 벗어나는 걸 극히 꺼리는 사람들이 있다. 그 밖의 세계를 경험해 본 사람을 경원시하는 경향도 있다. 그것이 하나의 편견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다. 나는 견디다 못해 취직의 벽을 뛰어넘기 위해 아예 창업을 했다.
그때 남들이 나를 바라봐 준 건 매우 ‘투명한’ 처사였다. 그들이 옳다. 가장 일반적 기준에서는 말이다. 그들에게 그런 객관적 시각이 없었다면, 나는 나를 투명하게 보는데 더 많은 시간을 허비해야 했을 것이다.
인간이 가장 편견에 사로잡혀서 보는 건 단연 ‘자기 자신’이다. 그만큼 자신을 제대로 볼 줄 아는 사람은 드물다.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내겐 불투명성의 질병이 있다
나이가 들어 기업에 투자를 하면서도 나의 불투명성 질병은 다시 도졌다. 내가 가졌던 치명적인 질병은 게리 벨스키가 말한 <투자할 때 저지르기 쉬운 7가지 실수>에 잘 나타나 있다.
그가 말하는 ‘너무나 인간적인’ 두 가지 성향의 실수는 다음과 같다.
첫째, ‘본전 생각.’ 이는 뭔가에 돈을 치렀을 경우 결과야 어찌되었건 그것을 허비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두 번째는 ‘손실기피증.’ 이는 사람들이 손실에 부여하는 중요성이 이득의 경우보다 대략 두 배 정도는 크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사람들은 100달러를 벌었을 때 기뻐하는 것보다도 100달러를 잃었을 때 두 배나 더 불행하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상상 속에 있는 건 미래만이 아닌 경우가 많다
내가 세상을 살며 얻어낸 것 보다, 나의 상상 속에 있는 ‘과거’가 나의 인생의 시간을 허비하게 만든 경우도 있다. 앞서 사례의 문제들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그것은 자신을 투명하게 보지 못한데 기인한다. 실패를 지나치게 과장하거나, 성공을 지나치게 치장하는 행위 모두, 극단적인 판단 착오에서 벌어지는 현상이다.
게리 벨스키가 말하는 투자할 때 저지르기 쉬운 실수는 본질적으로 자신을 투명하게 보지 못하는데 있다. 불투명성의 색안으로 명암 테스트를 한 것과 다를 바 없다.
투명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것은 단기적으로 불리해 보일 수 있다. 자신을 드러내는 걸 달가워할 사람도 없다. 그러나 당신은 지신의 자원을 점검하기 위해서도 가장 투명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봐야 한다. 투명하게 본다는 얘기는 자신만의 눈이 아닌, 남들의 눈으로도 볼 수 있는 걸 말한다. 남들의 눈보다 스스로 갖고 있는 제3의 눈이 필요하다. 그럴 때 자신에게 보탬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사람들은 보통 이득이 된다고 믿는 거래와 자기 자신에게 실제로 유리한 거래를 혼동한다. 내가 나를 바라보는 가치는 결코 ‘객관적’일 수 없다. 과거의 성공과 실패에 대한 분석의 시각도 마찬가지다.
당신이 들고 간 기름병이 퇴짜를 맞지 않도록 하고 싶거나, 당신의 이력서가 ‘왜 이렇게 한 게 많아요?’라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서는 99%의 투명성을 찾고자 하는 자기 시각 언제나 중요하다.
ⓒ전경일 인문경영연구소장
당신이 ‘독창적이고 고유하다’는 얘기는 성공이든, 실패든 ‘결과 자체’에 있지 않다. 여기에 바로 성공의 주요한 단서가 있다.
그건 결과에 대응하는 ‘반응’에 있다. 좌절을 실패와 좌절로만 받아들이면, 결코 성공의 국면 전환을 가져오지 못한다. 달리 생각하라. 같은 상황에 접해서도 반응을 달리하라. 그것이 당신의 고유성을 확보하는 방법이다.
다른 반응이 다른 결과를 도출해 낸다
미국의 전설적인 복싱트레이너인 커스 다마토는 언젠가 이렇게 말했다. “영웅도 비겁자와 똑같이 두려움을 느낀다. 단지 공포에 대한 반응이 다를 뿐이다.”
정말 그렇지 않은가? 처참한 실패 앞에서 보통 사람들은 패닉 상태에 빠진다. 로버트 J. 크리겔과 루이스 패틀러는 “가끔 가다간 돼지에게서 배운다. 그들은 죽음 앞에서도 결코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낮은 인식능력 때문이겠지만, 그것마저 달리 해석해 긍정적인 측면만 받아들이면 된다. 자기 훈련이 되어 있는 사람들은 짧은 시간에도 성찰을 한다. 방법을 찾는다. 그것은 다수의 패닉 상태에 빠진 군중과 달리 ‘생존의 가능성’을 열어준다.”고 말하고 있다. 로빈훗은 교수대에 수없이 붙잡혔으나 그 상황을 모험으로 생각하고 순간적으로 사는 법을 찾아냈다.
여기서 우리는 성공하기 위한 매우 귀중한 교훈을 발견할 수 있다. 그건 ‘반응을 달리 하지 않는 한,’ 예상되는 결과는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이 말은 가장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마음을 산란시키지 말라는 뜻도 된다. 사실 배는 파도에 침몰하기 전에 이미 공포에 질린 사람들이 우왕좌왕하며 배의 중심을 잃게 하는 까닭에 침몰하는 게 상당수에 이른다.
세 가지 종류의 죽음
<타이타닉>이라는 영화에 나타나는 집단 패닉 상태를 분석하면서 나는 놀라운 사실 하나를 발견했다. 영화감독이나 제작자들이 의도했든 아니든, 그 배에 탑승한 사람들의 죽음에 가장 직접적인 사인(死因)은 ‘익사’가 아니라는 점이다. 거기엔 세 가지 종류의 죽음이 등장한다.
1. 피할 수 없는 운명적 죽음 앞에서 모든 저항 의지를 버리고 죽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들. (바이올린을 켜는 사람, 물이 차오르는 침대에 누워 죽음을 맞이하는 노부부와 동화책을 읽어 주는 엄마와 아이들, 술잔을 들고 밀어 닥치는 물을 바라보는 귀족 등등)
2. 배의 동요와 함께 좌우상하로 움직이거나, 흘러내리며 배나 배의 시설물 또는 바닷물 자체에 부딪쳐 이미 사망하게 된 사람들. (‘익사’ 전 이렇게 사망한 사람이 대부분이며, 이들은 물에 빠졌을 때 이미 죽어 있는 상태가 대부분이었다.)
3. 결국 침몰 후 ‘익사’ ‘동사(凍死)’ ‘탈진자들.’ (이 경우는 1과 2의 합보다 많지 않다.)
<타이타닉>을 애기하는 건 다름 아닌 ‘반응’의 차이가 가져오는 삶과 죽음의 양태를 얘기하기 위해서이다. 죽은 불사조는 결코 자신이 죽었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부활할 수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당신은 죽지 않았다.
당신은 죽지 않았다
당신은 실패와 좌절을 통해 잃은 것이 아니라, 인생의 또 다른 관문 하나를 통과했으며, 인생 역정을 배웠다. 과거라는 어두운 통로의 외곬으로 향하지 말고 이제는 모든 가능성의 문을 열어 두고 그리 갈 수 있어야 한다. 어느 문으로 새가 날아들어 올지 아직은 알 수 없다.
세상살이를 하며 원하는 것 모두를 손에 넣을 수는 없지만, 당신은 최소한 반응을 달리할 수 있다. 다른 시도를 통해 가능성의 문을 열어둘 수 있다. 그 문은 성공을 향한 비밀 통로로 이어진다.
지금 이 순간, 만일 당신이 탄 배(그것이 개인 사업이든, 가계든, 거대 기업이든)가 침몰하고 있다면, 당신은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를 전광석화처럼 염두에 두라. 피터 드러크는 이런 경우를 위해 해 둔 말이 있다.
“배가 침몰하고 있는 경우에는 회의를 소집하지 않는다. 명령을 내린다. 누군가, ‘당황할 것 없어요, 이렇게 합시다!’ 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당신이 그러면 된다. 그렇지 않은가!
성공은 좌절에서 나온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성공을 이룬 자들은 실패를 경험한 사람들이다. 패자 부활전에 흥미를 더 하는 것은 그들은 다른 무기와 검법과 훈련된 정신 상태로 ‘다시’ 임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장 큰 성공은 가장 큰 좌절에서 나왔다.
여기 실패했던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그들만이 누가 성공할 수 있는지 알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빌 게이츠는 왜 실패한 사람을 채용하는가? 그는 성공이 실패에서 온다는 너무나도 단순한 진리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 자신 수없는 실패를 겪어 본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실패는 성공의 토대>를 쓴 퍼트리샤 셀러스는 빌 게이츠를 인터뷰 하면서 왜 실패 한 적이 있는 사람들을 채용하기를 좋아하냐고 물은 적이 있다. 그 때 게이츠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것은 그들이 모험을 한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이 사업의 실패에 어떻게 대응하는가를 보면 그들이 변화에 어떻게 대처할지 알 수 있습니다.” 게이츠의 말이다.
‘어떻게’가 ‘누구’를 결정하는 게 인생이다
인생에서 실패했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어떻게,’ 그리고 ‘누가’ 승자가 될 수 있을지 말해 준다. 극단적인 상황에서도 의연한 태도를 가져라. 그럴 때 국면 전환의 기회를 잡게 된다.
<타이타닉>의 아름다운 두 주인공은 극한의 상황에서 매우 침착하게 대처했다. 영화를 보았을 당신은 이를 이미 알고 있다. 그들은 똑같은 상황에서 남들과 달리 ‘반응’하고, ‘행동’했다. 그것은 생존의 문제를 넘어 한 여인의 삶의 방식을 바꾸어 버리기도 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무엇인가 바꾸는데 실패하는 것은 실패 그 자체에 있는 게 아니라, 그것에 대한 반응에 있다. 과거로 되돌아가려는 관성은 그것이 충족되지 않는 한, 점 덤 더 힘이 불어 날 것이다.
영화 <박하사탕>에서처럼 ‘나 돌아갈래!’라고 외치게 된다. 문제는 어디로 돌아가느냐는 것이다. ⓒ전경일
얼 그롤먼Earl A. Grollman은 「슬픔」이라는 글에서 “폭풍처럼 들이닥친 죽음 앞에서 당신의 삶은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당신은 폐허위의 대지 위에 외로이 서 있습니다.”라고 노래하고 있다.
퍼즐은 쪼개진 조각들
당신의 삶도 그랬을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부정적이기만 할까? 결코 그렇지 않다. 가장 크게 아파하고, 가장 슬퍼한 자만이 하늘을 울릴 수 있다.
당신의 좌절은 하나의 거대한 실험에 불과하다. 당신은 당당히 실패했다. 누구도 당신을 비난하지 않는다. 실패한 당신은 오히려 삶에서 가장 큰 것을 배웠다.
코카콜라 CEO였던 로베르토 고이주에타 말처럼 “움직이는 사람만이 넘어질 수 있는 것이다.” 움직이다 넘어진 것을 비웃는 자가 있다면, 그야말로 어리석은 자다. 넘어졌어도 다시 툭툭 털고 일어나면 된다. 당신은 바로 그런 사람 아닌가?
엎어지지 않고 자전거 타는 법을 배운 사람이 있을까? 우리는 인생이란 매우 불안정한 두 바퀴를 움직이고 있다.
“내가 굴리는 건 자전거 바퀴가 아니라, 인생의 주요 축(軸)이다.”
당신은 프로 경륜가가 하는 이런 말을 들을 만 하다. 적어도 이 대목에서는 말이다.
재기 명수들의 특징은 털고 일어나는 것
상황에 대한 인식은 삶의 방식을 결정한다. 실패와 좌절 앞에서도 보통 사람들은 흔히 자신감을 잃는데 비해 재기의 명수들은 자신감을 잃지 않는다. 재기하는 사람들은 ‘나의 문제는 일시적인 것이다’라고 믿는다. 이 말은 정말 맞다.
하지만 반면 비관주의자들은 자기 실패를 영구적인 것으로 본다. “당신에겐 영구적인 실패란 없다”라고 펜실베이니아대학교 심리학 교수인 마틴 셀 리그먼은 말하고 있다.
영원한 실패란 없다! 왜 그런가? 당신은 본질적으로 영원한 존재가 아니며, 당신 이상 더 오래 남을 성공도 실패도 없기 때문이다. 당신은 당신 스스로 인생이라는 백지에 온몸을 다해 무엇인가를 써내러 가고 있는 펜이다. 당신은 그런 존재다.
성공한 자들이 하는 가장 일반적이고 흔한 말 중에 “실패는 성공의 토대”라거나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은 그저 말을 하려고 하는 얘기가 아니다. 진정 그렇다.
이 사실을 절대적으로 믿어라. 당신은 진리에 대한 믿음의 절대 반지를 끼고 있어야 한다. 누구에게나 실패는 개인적이고 모욕적이며 이미지를 손상시킬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그리 나쁘지 않다. ‘나쁜 것’이 아니라, ‘시행착오’일 뿐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당신은 무엇을 얻어 낼 수 있을까? 그것은 바로 성공의 열쇠는 실패해도 좌절하지 않는 것. 오뚜기처럼 일어나 다시 뒤는 것. 불사조처럼 죽음 한가운데에서도 다시 날개를 펴고 날아오르는 것. 바로 그것이다.
시간을 갖고 조각들을 모아라
당신이 크게 실망한 일이 있다면, 아직 당신에게는 조각난 자신을 끌어 모을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때도 멈추어 서서 망연자실해 하지 마라.
걸어라. 포레스트 검프처럼 뛰어라. 마음속의 앙금이 후련하게 가시기 시작할 것이다. 이제 앞으로 남은 당신의 시간은 다시 걸어가는 길에 뿌려져야 한다.
매순간, 매시간, 날마다, 당신의 길을 걸어가라. 당신의 ‘죽음’은 그렇기 때문에 삶만큼이나 ‘고유해야’ 한다.
누군가는 비웃을지 모르지만, 확언컨대 당신의 실패는 매우 독창적이었다. 그것이 일반적이었다고 믿는가? 천만에다. 너무나 특이하고, 특수한 환경에서 스스로 보기에 불가해 보이는 요소를 갖고 실패하지 않았었는가?
그러니 이제 그런 생각만큼이나, 당신의 ‘가능성’에 대해서도 ‘특별하게’ 취급할 필요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당신이 들고 있는 것은 희망의 불빛뿐이다.
“나를 죽이지 못하는 것, 그것은 끝내 나를 강하게 만들리라.” 니체가 한 말이다. 당신도 마찬가지다.
ⓒ전경일
소설가 황석영이 쓴 단편 소설에「몰 개울의 새」라는 작품이 있다. 베트남 전에 참전하는 주인공을 위해 백화라는 술집 여자가 고별 선물을 주는데, 주인공이 남지나해 근방에 이르러 보자기를 풀어헤치자 그 속에서 오뚜기가 나온다는 얘기다. 전쟁터로 가는 남자에게 쓰러져도 오뚜기처럼 다시 일어나라는 이 선물만큼 소중한 것이 있을까? 이것이야말로 백화가 주인공을 생각해 주는 가장 뜻 깊은 선물이라고 생각한다.
당신은 오뚜기다
그런데 오뚜기는 무엇일까? 국어사전엔 “아무렇게나 굴러도 오뚝 일어나는[바로 서게 되어 있는] 어린아이들의 장난감. 부도옹(不倒翁).”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부도옹’이라? ‘넘어지지 않는 늙은이’이라는 뜻?
그렇다면 오뚜기의 특징은 무엇일까? 그건 넘어지지 않는 게 아니라,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는’데 있다. 이 말은 7전 8기가 되기 위해서는 ‘넘어져야’ 하는 게 전제 조건이 된다. 넘어진 자만이 땅을 짚고 다시 일어선다. 그래서 오뚜기는 부활과 인생 역전의 화신으로 비친다.
이건 마치 죽음 속에서 다시 부활하는 불사조와 같다. 스스로 자신을 바로 세우거나, 자신의 죽음으로부터 다시 생명을 이끌어내는 존재. 바로 그런 존재가 ‘오뚜기’이자 ‘불사조’인 것이다.
복립 의지로 삶을 일으켜 세워라
이 두 가지 상징적인 사물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스스로 일어나려는 의지, ‘복립(復立)의 의지’다. 여기서 외부 조건은 하나의 ‘영향’에 불과하다. 그 영향은 자신이 어떻게 대처해 가느냐에 따라 극복의 대상이 되기도, 그로 말미암아 좌절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인생 대역전을 꿈꾸는 당신은 그런 의미에서 이 들 둘과 많이 닮았다. 가만히 보라. 당신이 바로 이런 존재가 아닌지, 아니면 그리 되고 싶어 하는 존재가 아닌지. 그 속에 인생의 신비가 숨어 있다. 당신은 어디서 왔는가? 그걸 먼저 물어 보아야 한다.
“우리는 불사조가 자기를 태운 재속에서 재생한다는 것, 결코 어디선가 날아 온 새가 아니라는 것, 다른 새에게 빌린 날개로 날아오르지 않는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신의 나라는 너희 속에 있다.’ 신의 나라는 산이 아무리 높아도 거기에서 내려오지 않으며, 바다가 아무리 넓다고 해도 그곳을 건너오는 것이 아니다.”
바로 자신에게 있다. 스스로 자신의 날개로, 쓰러진 자신의 몸으로 일어나야 한다. 그래야 당신은 훨훨 날 수 있다.
이제 당신은 쓰러져도 다시 일어나는 오뚜기가 되거나, 죽어도 다시 부활하는 불사조가 되어야 한다. 믿어라. 당신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다시 일어날 수 있다. 당신은 재기의 귀재가 될 수 있다. 그것이 당신의 운명 아닌가! ⓒ전경일, 인문경영연구소장
인생에서 보고 듣는 가장 일반적인 얘기가 있다면 무엇일까? 단언컨대, ‘성공’이 그 중 하나일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진부한 말.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공’ 이야기는 그 자체로 계속 회자된다. 왜 그럴까?
바로 여기에 성공의 비결, 즉 성공 희소성 법칙이 있다. 누구나 시도하지만 쉽게 얻지 못하는 것. 그렇기 때문에 도전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 그것이 성공일 게다.
하지만 하나의 성공을 이루기 위해 우리 삶의 주요 페이지들은 ‘실패’라는 인식표에 방점이 찍힐 수밖에 없다. 삶의 과정이 늘 감정 자원, 인식 자원과의 싸움이기 때문이다.
‘성공’은 ‘실패보다 하나 더 많은 상태’를 의미한다. 다시 말해 ‘실패+α=성공’이라는 등식이 성립된다. 만일 그 ‘α’가 긍정적 인자를 가지고 있는 것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다.
성공의 내용이나 품질이 어떤 것이든 그것을 얻기 위해 우리가 거쳐야 할 관문은 그리 만만치 않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나 다 성공하는 것은 아닐게다. ‘부자가 천국으로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만큼이나 어렵다’는 말은 흔히 부자의 도덕성을 두고 하는 말이지만, 수많은 실패를 딛고 성공하는 것도 결코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 그건 삶 자체가 늘 회소 자원과의 투쟁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누구나 성공의 가능성을 찾는다. 그걸 삶의 가능성으로 환치하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과정이 인생에 녹아 있다는 것이다. 삶을 너머서는 어떠한 성취나 좌절도 있을 수 없다. 삶을 이루는 주제들이 이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삶에 이토록 무지할까? 욕망이란 전차를 타고 끝없이 가다가 결국 탈선해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식이다. 대부분 우리 주위에서 볼 수 있는 사람들처럼 말이다.
자, 이제부터는 성공 방식을 좀 더 다른 각도에서 찾아보도록 하는 건 어떨까. 특별히 성공을 위한 핵심 체크라기보다는 다원적 의미에서 성공을 이해하려는 바로 그런 노력이 말이다.
현대인에게 소유를 능가하는 욕망은 없다. 대부분 성공이 물적 지배를 전제로 하는 것도 이 때문. 인생에서 모든 행동은 결국 생을 재촉하는 것임에도 우리는 그런 사실조차 망각하고 산다. 그러기에 성공에 대한 재정립이 필요할 것이라 생각한다.
인식을 전환시키기 위해 한번 기존의 생각을 바꾸어 보라. 성공도 생각 나름이다. 당신이 가진 문제가 지금 갑자기 해결됐다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당장이라도 날아갈 것 같이 환호를 지를 수 있다! 성공은 하나의 마음 상태이기도 하며, 여기엔 긍정적 생각이 절대적 영향을 미친다. 생각이 세상을 바꾼다. 물론 자신도 바꾼다. 이 말은 절대 진리에 가깝다.
그렇다면 이제 본격적으로 물적 성공에 대해 얘기해 볼까?
여기에도 나름 원칙이 있다. 지금부터 당신은 이런 얘기에 주목하기 바란다. 왜냐하면 이런 말들은 당신에게 힘이 될 수 있을 테니까.
가장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희망의 샘은 소리 없이 흐른다. 그러니 귀를 열고 들어라. 그것이 인생에서 우리가 배우는 것이다. 어떤 전지전능한 비극의 신(神)도 모든 희망의 샘을 다 틀어막지는 못한다! 결국 세상의 어떤 샘은 넘치게 되어 있다.
인생을 ‘실패에서 배운다’고 하는 것은 실패가 가진 깊은 뜻 때문이다. 실패의 원인이 되었던 것에 밑줄을 긋고, 이를 잘 복기해 보면 성공의 답이 보인다.
하지만 이것만큼 어려운 것도 없다. 당장 실패의 구렁텅이에 빠져 있는 사람들에게는 ‘복기’할 시간도, 여유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명심하라. 여러 개의 조급함으로는 단 한 개의 방책도 만들지 못한다! 이건 마치 수십 개의 동메달을 가져도 금메달 하나만 못한 것과 같다. 인생에서 고요함은 잠깐의 휴식일 뿐이고, 폭풍은 당신의 인생을 구성하는 주요 요소다. 하지만 결과는 어떻든 마찬가지다.
삶은 무엇일까? 인생엔 누구에게나 똑같은 조건이 있다. 그것은 바로 누구나 삶의 어느 한 축은 뜯어내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몸을 따뜻하게 덥여주던 구들장도 식고나면 떠나듯, 그런 게 인생이다. 어떤 땐 부정하고 싶기도 하고, 어떤 땐 괜한 용기도 인다. 또, 어떤 땐 자신이 잘못 살아온 게 아닌가 하기도 한다. 나만 바보처럼 살아온 게 아니었나 이렇게 말이다.
그러나 이 모든 걸 너무 묵직하게 받아들일 필요까지는 없을듯 하다. 우리는 지구를 들고 있는 신화 속의 괴물이 아니다. 그건 당신의 임무가 아니다. 지구를 구할 수 있는 건 독수리 오형제 같은 친구들이지 당신에게 주어진 일이 아니다. 당신은 지구를 잘 가꾸면 된다. 주변을 아끼며 말이다.
세상에 웬만한 건 자전의 힘으로 다시 굴러간다. 그런 까닭에 세상은 제행무상의 원리를 많이 닮았다. 만일 당신이 실패한 적이 있다면, 모든 실패를 그냥 다 폐기해 버리지 마라. 그러면 당신의 삶은 물에 닳은 비누처럼 곧 없어진다. 폐기할 땐 당신의 경험과 기억과 좌절의 아픔에 남아 있는 ‘실패’라는 캔에 ‘RECYCLE’ 기호를 붙여 쓰레기 통으로 집어 던져라. 언제든 당신이 다시 꺼내 들 수 있게 말이다. 실패의 리싸이클은 어느 단계에 이르면 성공으로 이어진다.
우리가 실패로부터 배우고자 하는 것은 ‘실패 방식’을 ‘성공 방식’으로 전환하기 위해서다. 아직 실패를 한 적이 없는 인생은 너무 밋밋할 수 있다. 그런 사람들은 삶의 다이내믹한 측면과 거리가 멀다.
우리는 삶에 대해 진정으로 알아야 한다. 삶의 어떤 것은 버렸다가도 다시 주어야 한다는 것, 긴 호흡으로 뛴다면, 삶은 나를 목적지까지 인도해 준다는 것을.
덧붙여 새로움에 익숙해지는 방법을 터득하면 된다. 자신의 기대와 마음을 추스르며 말이다. 이제 당신이 흔히 볼 수 있는 자기 모습에서 출발해 보자. 여기에 거울이 필요한가? ⓒ전경일, 인문경영연구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