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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가 불을 사용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불은 생활의 필수도구가 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불은 신성한 힘으로 모든 것을 정화하고 새롭게 시작한다는 의미로 확장되며 종교적 의미로까지 승화되었다. 인류 문명을 지배한 불은 모든 문명을 파괴하기도 하고, 불 탄 곳에서 다시 새로운 문명이 일어나는 등 순환원리를 잘 보여주고 있다. 각종 제전이나 올림픽 같은 체육문화 행사에도 불은 빠지지 않는다. 불이 채화되는 장면을 바라 볼 때 자연스럽게 모든 의식에는 불이 함께 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된다.

불을 담아내고 심지어는 섬기는 이유는 무엇일까? 하늘과의 소통과정이자, 성공과 성취를 위한 인간의 바램이 함께 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조상들은 질화로의 불은 절대 꺼뜨려서는 안되는 ‘소등 불가침’의 원칙을 세워놓고 있었다. 평소에는 말할 것도 없고, 이사를 갈 때에조차 애지중지 따로 운반하기도 했다. 불이 집안의 복록을 가져다준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현대에 들어서는 제철ㆍ제련업 같은 산업현장에서 용광로의 불이 꺼지지 않게 하려는 것은 효율성면도 있지만 사업이 처한 현 상태와 연결시켜 ‘꺼지지 않는’ 용광로 같은 사업의 지속성을 바라는 의미도 크다. 이와 다른 종류의 불이지만, 바다를 비추는 등대 또한 꺼져서는 안되는 불이다. 해양은 육지에서 쏘아대는 불빛에 의지해 항해하는 선박을 인도한다. 불은 이처럼 실용적인 면과 더불어 상징적 의미를 함께 지니고 있다.

얼마 전, 어느 회사 사옥 앞에 “노사가 다 함께 화합의 불씨를 키웁시다.”라는 플랑카드가 걸려 있는 것을 보고는 불현 듯, 이 회사에는 어떤 불씨가 필요한 것일까? 혹은 어떤 불씨가 모자라서 함께 나누고, 키우려 하는 것일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노사간의 마음에 화합의 불씨를 키우자는 얘기는 오늘날 우리 기업이 처해있는 소통 난망의 현실과 상호 이해의 어려움이 그대로 표출되어 있다. 이를 확장하면 대기업 중소기업간 상생협력, 동반성장의 정신과도 일맥상통한다. 상대를 이해하며 협력 정신을 높이자는 얘기일 것이다.

외부의 불씨가 지닌 의미가 이렇다면, 조직 내 불씨는 무엇일까? 조직이 성장하고, 사업이 불처럼 번져 나가는 불씨? 아니면, 정반대로 불신과 대립의 불씨? 어느 불씨를 키울 것인가에 따라 조직의 사활은 물론 그것이 미치는 파급력은 대단히 클 것으로 보인다. 어느 조직이나 내부 메커니즘을 잘 살펴보면 불씨를 지닌 직원들이 있다. 왜곡되고 비뚤어진 불씨를 지닌 직원들이 있는가하면, 열정과 혁신의 ‘초발(初發) 불씨’를 지닌 직원들도 있다. 아직 검증되지 않는 고체연료를 한 짐 지고 다니는 ‘불점화된’ 직원들도 있다. 불신의 불씨는 조직 전체에 불행이 되고, 열정의 불씨는 조직 활성화의 원동력이 된다. 그 열정적인 불씨를 키워 조직의 혁신과 활성화의 연료로 쓴다면 기업이 욱일승천해 나가는 최상의 조건을 내면화해 낼 수 있을 것이다. 만일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문화가 팽배한 조직이라면 부정적인 불씨를 누르고, 긍정의 불씨를 살릴 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 할 것이다. 이런 불신의 에너지를 대긍정의 에너지로 순치시킬 방법이 있다면 무엇일까? 리더십의 핵심은 바로 이것이다.

오늘날 기업들은 직원들 마음 속 보이지 않는 불씨를 조직의 연료로 쓰고자 부단히 애를 쓰고 있다. 직원들 마음에 어떻게 하면 기업 성공을 위한 불씨가 활활 타오르게 할 것인지가 변함없는 화두다. 기업들이 경영학에서 얘기하듯 ‘피플 이슈’에 큰 관심을 가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기업이 ‘일하기 좋은 기업’이란 키워드로 조직 활성화를 꾀하려는 시도도 긍정의 불씨를 나누기 위한 활동으로 볼 수 있다. 직원들 마음에 강한 긍정의 에너지가 넘치게 하려면 개인의 비전과 조직의 비전을 일치시키려는 소통 구조가 필요하다. 노사든, 대기업-중소기업간 협력정신이든, 서로 견실하게 맞닿아 있지 않으면 긍정의 불은 점화되기 어렵다.

조직 내부에도 보다 끈끈한 관계성이 요구된다. 어려운 때일수록 조직은 질화로처럼 훈훈한 정을 피우며, 지속적으로 직원들의 마음과 하나가 되는 작업을 수행해야 한다. 기업 생태계에서 상호 유기적인 관계성을 맺는 일들이 성과의 기초를 이룬다. 직원들에게 따뜻하고 깊은 관심을 보여주는 건 조직을 밝히고, 비전을 이뤄내는 ‘불씨 경영’라고 할 수 있다.

사업에서도 제대로 된 불씨를 지피는 작업은 조직 성패의 기준이 된다. 불과 2명의 젊은이로 시작한 구글이나, 페이스북 같은 회사들이 창업 후 채 10년도 안된 기간에 세계적인 초우량 기업으로 성장해 간 것은 아직 잠자고 있는 거대 시장에 불을 지폈기 때문이다. 이들은 기존 사업에 안주하던 기업들과 차별성을 이끌어 내며 글로벌 리더로 자리 잡기 위해 구성원을 모두 타오르게 했다. 그런 의미에서 자발적 리더십을 발휘토록 한 그들의 조직 문화는 충분히 벤치마킹할만 하다. 기업의 성장과 함께 조직원들의 내면에 이는 열정을 조직 전체의 열정으로 승화시켰다. 필요하다면 과감하게 외부의 우수 인력이나 자원이란 불씨를 가져다 조직의 용광로에 점화시켰다. 과감한 아웃소싱으로 우수 자원을 획득해 남다른 성장 동력을 만든 것이다.

성공하는 조직은 작은 불씨 하나로 광야를 불태운다. 사업이 일어나는 방식이 이와 같고, 사세가 확장되는 과정이 이렇다. 보잘 것 없는 회사가 우뚝 서는 이유도 이것이다. 조직이 강력한 에너지로 타오르게 하려면 리더들은 자신부터 태울 줄 알아야 한다. 기존의 나를 버리고 보다 포옹적이며 자기희생적인 모습을 가질 때 리더십은 발휘된다. 불을 다스리는 것은 리더의 능력이다. 역화(逆火)를 순화(順火)로 만들어 내는 것은 분명 리더십의 핵심일 터다.

ⓒ카인즈교육그룹, 인문경영연구소, 전경일 소장 <한국조페공사> 사보글



칼럼|사보기고 | Posted by 전경일 2011/05/16 14:37

멋진 인생 항해를 계속하려면

인생은 항해와 같다. 이런 비유는 낯설지 않다. 포구를 떠난 배는 항해에 나서고, 때론 풍랑을 만나 거친 파도와 싸운다. 바다에 평온이 찾아오면 한가로이 햇볕을 쪼이며 차를 마신다. 그 눈빛은 멀리 수평선에 맞닿아있다. 선원들의 이 같은 일상은 아마도 인생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삶의 면면은 각 단계마다 거쳐야 할 과정으로 가득 차 있다. 어느 단계도 건너 뛸 수 없다. 아무리 잔잔한 바다라도 폭풍으로 일렁이기도 하고 언제 그랬냐 싶게 잔잔해 지곤 한다. 스무 살 무렵, 처녀항해에 나설 땐 사회라는 거대한 바다 앞에서 누구나 마음 부푼다. 이땐 ‘도전’이란 키워드가 가장 적합하다. 안전해 보이던 항해가 풍랑을 만나면서 우리는 아이를 낳고, 부모가 되고, 생활이란 강적을 만나며 서른과 마흔 무렵을 쏜살 같이 지나간다. 그 시기를 지나면 자연스럽게 안정을 추구하고, 평온하고 쾌적한 상태가 계속 되길 바란다. 장년과 노년기에 여기에 해당될 것이다. 하지만, 안정은 준비 없이는 얻어지는 게 아닐 것이다.

누구든 인생의 최종적인 목표는 ‘평온’과 ‘안정’같은 키워드일 것이다. 젊어서 더 큰 파도를 겪어 본 사람일수록 안정에 대한 갈구가 큰 것도 이 때문이다. 인생의 중후반기에 이르러 삶의 궤적을 돌아보면 삶에 대해 의문에 사로잡히곤 한다. 무엇이 나를 여기까지 끌고 왔을까? 평온하고 쾌적한 상태, 보다 일상적인 삶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방법은? 많은 경우, 이런 고민은 풍랑이 몰아칠 때 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한가로이 갑판에서 차를 마시는 여유로운 시간을 가지려면 풍랑을 벅차게 이겨낸 기억을 갖고 있어야 한다. 삶을 살아낸 힘이 여기에 있다.

인생을 요즘 기업 용어로 ‘지속가능’하게 하려면 몇 가지 원칙이 있다. 첫째는 좌초하지 말아야 한다. 처녀항해에 나선 때로부터 마지막 격랑을 이겨낸 그 순간까지 배의 키를 놓지 말아야 한다. 파도가 몰아 칠 때 배의 이물을 파도 정면에 부딪쳐야 배는 난파의 가능성이 줄어든다. 도전을 회피하지 말란 얘기다. 두 번째로는, 지속성을 위한 여유자원을 확보해 두어야 한다. 생에 하고 픈 일, 그러면서도 지속적으로 경제활동이 될 수 있는 일에 끊임없이 관심을 가져야 한다. 나이 들어서는 유행을 타는 일보다 보다 보수적이며, 변화계수가 낮은 일이 유리하다. 트랜드에만 급급하다보면 젊은 층들과 경쟁에서 불리할 수밖에 없다. 나이듬이 경쟁력이 될 수 있는 일은 얼마든지 있다. 노년을 대상으로 하는 노년산업이나, 오랜 직장 생활을 통해 터득한 경쟁력을 나의 다음 단계에 맞게 미세 조정해 시도하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마지막으론, 실행력이다. 과거 자기계발을 위한 지침들은 주로 사람의 ‘생각’에 초점을 맞춰왔다. 요즘 연구는 실행이 생각을 바꾼다는 것으로 대체되고 있다. 움직임의 실체가 있을 때라야 내가 원하는 평온 상태가 유지된다. ‘동적인 안정’은 인생을 지속가능하게 이끌어 나갈 유일하고 최종적인 방법이다. 결국엔 움직임의 실체가 인생을 완성해 내는 것일 테니까.

누구나 여분의 자원과 시간을 만들길 원하고 느긋하게 갑판위에서 차를 마시는 멋진 풍경을 떠올리고 싶을 것이다. 삶의 지속성은 부단한 활동의 결과여야 한다. 그럴 때 시간 자원이든, 경제 자원이든 마련된다. 내가 그런 삶을 살고자 한다면,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에 의문 부호를 지금 당장 달아 보라. 자칫하다간 좌초 위험에 빠지거나, 항해를 중단하고 피난처를 찾을 수 있다. 나를 풍요롭게 하는 것들은 회피하고 싶은 일에 있다. 급한 삶, 가파른 삶이 아닌, 천천히 가는 삶은 조금은 부족해도 얻어질 수 있지만, 남다른 실행력이 뒤따르면 조금은 넉넉하게 맞이할 수 있다. 이점은 시간이 지나도 바뀌지 않는다. #

전경일. 인문경영연구소장.《마흔으로 산다는 것》저자.

대기업 ‘금형’진출은 상생 역주행

2011년 03월 08일 14시 23분
전경일 인문경영연구소장
■ 문학도인 전 소장은 서른 무렵엔 미국으로 건너가 텔레비전과 라디오 경영학 분야를 공부했다. 삼성전자 미디어 부문에서 근무했으며, IMF 시기에는 회사를 나와 경영자의 길을 걷기도 했다. 베스트셀러 <구씨이야기 허씨이야기: 누구나 알지만 잘은 모르는 LGㆍGS 그룹 반세기 동업의 진짜 비밀!>을 집필했다.


자본주의가 큰 전환점에 놓여 있다. 20여 년 전 동구의 개혁 개방이 실패한 이념과 사회 체제 대신 보다 검증된 사회·경제 시스템을 받아들이도록 요구했을 때 자본주의는 승리의 깃발을 치켜들었다.

100여 년 만에 사상 면에서 인류사적 대전환이 이루어진 것이다. 하지만 경쟁자가 없는 승자 독식의 유일무이한 세계관은 전 세계를 지배하는 자기모순에 빠져들며 성공한 가치를 지속시킬 수 있을지 많은 점에서 의문을 낳고 있다.

세계화와 무한경쟁 논리가 전 세계를 광풍처럼 휩쓸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의 압도적이고 일방적인 승리가 있는 후 20년이 채 지나기 전인 2008년, 세계 경제는 초유의 일을 맞이한다.

세계 금융 위기 시 주가 폭락으로 400조 원의 시가총액이 날아갔고, 환율 폭등으로 600억 달러(한화 60조 원)가 사라졌다. 2008년 한 해에만 전 세계 부가 40조 달러나 증발했다. 이 돈은 100만 달러씩 쓰기 시작해 2,728년을 써야 하는 엄청난 돈이다.

쉼표 없는 삶을 가속해야만 하는 상황에서 과거를 돌아 볼 틈도 없이 우리는 또 달려 나가지만 위험의 징후는 곳곳에 있다. 중동의 불안정으로 유가 폭등이 상호 연쇄작용을 일으키며 인계철선이 늘어선 부비트랩 지대를 기업들은 돌파해야만 한다. 검증된 세계 경제 시스템은 지속성은 고사하고, 언제 닥칠지 모르는 잠재 위험에 기업을 송두리째 노출시키고 있다.

세계 금융 위기든, 중동 사태든, 위기가 인간 탐욕에 의해 촉발된다는 점은 많은 인류학자, 경제학자들의 관심을 인류의 경험에 눈 돌리도록 만든다. 인류 사상 최초로 가장 큰 제국을 건설한 몽골의 멸망은 약탈식 경제가 주 요인을 이룬다.

러시아의 차르 체제나 근세 유럽사, 지금 북아프리카 및 중동 사태도 마찬가지다. 지속성엔 절대조건이 필요한데, 공존적 사고와 이를 밑받침하는 사회·경제구조의 형평성, 균형감이다.

세계화를 필두로 자본주의가 거침없이 그 영역을 확대하고 있는 시점에 자본주의의 최대 수혜자인 빌 게이츠나, 워렌 버핏이 창조적 자본주의를 주창하는 것이나, 구글 임원인 와엘 그호님이 이집트 혁명 도화선 역할을 한 것은 내부에 이는 성찰적 목소리라는 점에서 귀 기울일 만하다.

한국 경제가 과도하게 대기업 중심적 경제 구조라는 비판을 받는 이유는 중소·중견기업이 고용의 80퍼센트를 차지하면서도 상대적 불이익을 받기 때문만은 아니다. 근본적으로는 공존적 기업 생태계와 거리가 멀다는 판단 때문이다.

대·중·소기업간 기술 혁신을 위한 상호 협력이 필요하지만, 국내 톱을 다투는 두 전자회사가 금형회사를 세우려고 하는 이유는 독단과 독식적 사고에서 연유한다. 중소기업 기술로는 경쟁력을 확보할 수 없다는 판단 때문이라면, 해법은 달라야 한다.

소재, 부품 등 모든 것을 대기업 혼자 해결할 수 없다. 그럴 땐 결국 산업 자체의 경쟁력 약화를 가져올 게 뻔하다.

대기업 자체로도 지속가능한 경영의 조건을 잃게 할 수 있다. 최근 의견 분분한 이익공유제 또한 정파적 사고로 몰아갈 게 못된다. 이익의 배분 과정에서 소외를 없앨 때 기업이나 사회의 지속성은 높아진다. 국가나 기업은 검증된 사회의 지속가능한 경영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면밀히 살펴보아야 한다.

왜 빌 게이츠나 워렌 버핏이 지속을 위한 대안으로 창조적 자본주의를 얘기하는지, 와엘 그호님 같은 사람이 시민혁명에 참여하는지를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둘 다 지속을 위한 가능성을 믿기 때문이다.

출처: ⓒ 이코노믹 리뷰(er.asiae.co.kr)
칼럼|사보기고 | Posted by 전경일 2010/12/20 19:19

살아 있는 것들은 깨어나라

얼마 전 각종 언론에 '700년 만에 꽃을 피운 고려시대 연꽃 씨앗' 이야기가 회자 되었다. 경남 함안군 성산산성에서 발견된 목간(木簡) 속에 씨앗 10개가 들어 있었는데, 그 중 3개가 꽃을 피운 것. 해당 지역의 지명을 따 '아라홍련(阿羅紅蓮)'이라고 이름 붙인 이 연꽃은 은은하고 부드러운 멋이 영락없이 고려시대 탱화 속 꽃 자체이다.

함안박물관과 농업기술센터에 의하면, 씨앗 담그기를 한 지 5일 만에 싹을 틔우기 시작했고 첫 번 째 잎이 나온 다음 여러 개의 잎이 뻗어 나오며 정상적인 성장을 보여 왔다. 이후 첫 꽃대가 출현하며 꽃봉오리가 터진 것으로 알려진다.

700년 전 고려시대 씨앗은 어떻게 오랜 시간 땅 속에서 움을 틔우지 않고 있었을까? 여기에는 생명이 지닌 놀라운 힘이 숨어있다. 씨앗은 종자 스스로 발아 여건을 갖췄다고 해도 주변 여건이 발아에 부적당하면 종자 상태로 남아 있게 된다. 이 경우를 가리켜 '휴면(休眠)' 상태라고 부른다. 만일 종자 자체에 문제가 있다면, 이때는 진정한 의미의 휴면이란 뜻에서 '진정휴면(眞正休眠)'이라고 한다.

고려시대 연꽃 씨앗은 700년을 내리 휴면 상태에 있었던 것이다. 추측컨대, 씨앗은 어떤 이유로 발아에 적당한 환경을 만나지 못해 깨어나기를 포기하고 깊은 잠에 빠져있던 것일 게다. 그러다가 환경이 우호적으로 바뀌자 마침내 휴지(休止) 상태를 깨고 오늘 우리 눈앞에 꽃망울 터뜨린 것이다.

생각해 보면 발아에 적당한 환경이 언제 찾아올지 기약할 수 없었지만, 고려시대 연꽃 씨앗은 오랜 기다림 끝에 빛을 보게 된 것이다. 씨앗이 지닌 놀라운 내력(耐力)이다. 종자가 어린 싹으로 자라나려는 강한 의지와 능력을 가리켜 종자세(種子勢)라고 하는데, 이 고려 연꽃 씨앗은 생존하려는 의지가 무엇보다 강했을 게 분명하다.

만약 씨앗이 깨어나야 할 때 임에도 불구하고 '숲속의 백설공주'처럼 계속 잠에만 빠져 있다면, 이때는 왕자의 입맞춤이 필요하다. 이런 걸 휴먼타파라고 하는데, 인간의 인위적 노력이 씨앗을 흔들어 깨우는 것을 말한다. 연구팀의 노력은 씨앗에겐 말 그대로 '왕자의 입맞춤'이었을 것이다.

씨앗을 발아케 하기 위해서는 때로 인위적인 방법이 동원되곤 한다. 씨앗 표피에 상처를 주거나, 황산 또는 에탄올 처리를 하거나, 종자를 찌르는 등 자극을 주게 되면, 씨앗 스스로 지닌 발아억제물질(發芽抑制物質)이 제거되며 발아하기도 한다. 때가 아니면 움을 틔우지 않으려는 종자 본연의 의지라고나 할까.

고려연꽃을 보면서 불현듯 자연의 놀라운 힘을 우리 인간 삶에 비춰 보게 된다. 아! 하는 탄성과 함께 불가(佛家)에서 얘기하는 깨달음의 순간이 다가오는 것 같기도 하다. 자연의 이 신비스럽고 억척스러운 현상을 통해 몇 가지 배우게 되는 게 있다.

우선은 '때를 기다리는 인고의 자세'이다. 세상만사는 다 때가 있다. 지금이 '그때'가 아니어도 언젠가는 하늘거리는 미풍에 연꽃잎을 물고 서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갖는 것은 어떤 절망적인 환경에서도 삶을 지탱시키는 힘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다. 연꽃의 그리움을 알고 있는 씨앗만이 생존에의 가능성에 더 가까이 다가간다. 이는 썩고 마는 뭇 씨앗들과는 전혀 다른 운명이다. 우리네 삶도 이렇지 않을까? 지금의 고통을 견디고 부활할 날을 위해 부지런히 격정의 몸부림과 인고를 감내해 내는 것, 그런 게 인생살이가 아닐까 한다.

다른 하나로는, 세상만사가 뜻대로 되지 않을 때에는 휴면 상태에 놓여 있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는 것일 게다. 세상을 살며 어찌 모든 일이 다 내 뜻과 같이 되겠는가? 스스로 생명을 내던져 버리는 '진정휴면' 상태가 아니라 각성된 자아를 갖는 일은 그래서 중요하다.

이런 생각도 가능하겠다. 때를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껍질을 깨고 나오지 못했을 때에는 주변의 도움이 필요하다. 씨앗에 주는 자극이 이것이다. 자극은 어제까지만 해도 자각하지 못했던 자아를 알게 한다. 씨앗 스스로 자신의 존재를 알고 떨쳐 일어나게 하는 것이다. "나는 연꽃 씨앗이다! 그게 바로 나다!" 이와 같은 각성 말이다.

우리는 흔히 자신의 잠재성을 모를 때 외부로부터의 자극을 통해 인생이 바뀌는 경우가 있다. 이런 걸 보다 과학적으로 수행하는 걸 코칭, 멘토링이라 부른다. 위대한 삶을 산 사람들의 전기를 읽으며 그와 같이 되고자 하는 각성도 이와 같다. 훌륭한 스승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아 인생의 전기를 마련하는 것도 이와 같다. 내가 누군지 자기 존재를 새롭게 인식하고 본래의 자기를 찾게 되는 것도 이런 것이다.

자연 현상에는 인생의 비밀을 푸는 엄청난 열쇠가 들어 있다. 그것은 깨달음을 가져오고, 철학을 가져오며, 문학과 예술을 열어 나가는 힘이 된다. 하나의 연꽃잎을 통해 고려시대 사람들은 물론 그들의 순수한 멋과 불상이 지닌 미소를 만나는 느낌이다.

지금 우리는 어떤 씨앗으로 세상을 맞이하고 있는가? 깨어나라, 모든 산 것들은 죽음과도 같은 깊은 잠을 떨치고, 껍질을 깨는 고통을 받아 들여라. 삶에로의 전진을 위해 새로운 각성을 하라. 태양은 눈부시고, 별들은 빛나며, 여기 내가 이렇게 살아 움직이고 있다.  

ⓒ전경일. 인문경영연구소장.《초영역 인재》저자.


 


칼럼|사보기고 | Posted by 전경일 2010/07/20 17:38

전쟁영화에서 내 자신 톱아보기

올 여름을 뜨겁게 달군 전쟁영화들이 극장가를 휩쓸고 있다. 전쟁의 참상, 이데올로기 및 계급 갈등, 그 속에서 피어나는 전우애, 인간애... '전쟁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더 나아가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본질적인 물음을 던진 영화들이 한국전쟁 60주년과 맞물려 대세를 이뤘다. 이미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학살 현장인 노근리 사건을 다룬 <작은 연못>이 상영됐고, 학도병 권상우가 나오는 <포화속으로>가 이 여름 개봉되어 관심을 끌었다. 헐리우드에서도 '잊혀진 전쟁'으로 불리어져 온 한국전쟁에 관한 다큐멘터리와 영화가 제작되고 있다. 미 해병대가 한국전에 참전하여 1950년 11월 26일부터 12월 13일까지 격전을 치룬 장진호 전투는 <혹한의 17일>이란 제목으로 2012년 개봉을 목표로 한창 촬영 중이다.

한국전쟁은 1953년 7월 종전 아닌, 휴전으로 일단락되며 민족 비극이 현재진행형으로 계속되고 있는 유래 없는 비극의 원천소스이다. 차로 한 시간 가량 달리면 DMZ가 휴전선을 감싸고 동서로 이어져 있고, 그 위 아래로 남북의 온갖 사상적ㆍ정치경제적 갈등과 대립이 계속되고 있다. 극장가에서는 영화를 선보였지만, 영화보다 더 현실적인 리얼리티가 바로 우리 눈앞에 펼쳐져 있다. 그래서 전쟁영화를 보는 올 여름은 더욱 무덥고 암울하기만 하다.

별로 유쾌할 수 없는 주제긴 하지만, 이왕이면 생사와 인간의 영혼, 사랑과 도덕성에 대해 묵직한 주제로 흐르는 <전쟁과 평화>같은 대작이 선보였으면 하는 바램이다. 한국 전쟁을 이렇게 치열하고 비극적으로 겪었으면서도 그간 대작 영화 한편 보기 어려웠던 것은 우리의 상상력이 현실을 따라가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헐리우드에서 만든다는 영화 <혹한의 17일>에 관한 기록을 살펴보며, 여러 생각을 하게 된다. 이 영화는 한국 전쟁 당시 장진호 전투에 참가한 미 해병대의 이야기가 메인 플롯을 이룬다. 하지만 그 배경이나 소재가 우리와 결코 무관할 수 없기에 더욱 관심을 갖게 된다. <플랫툰> 같은 영화가 나올지, <라이언 일병 구하기> 식이 될지 자못 궁금하다.

그런데 나의 관심을 더 끄는 것은 전쟁터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말과, 생과 사를 넘나들며 죽음의 공간을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이느냐 하는 데 있다. 극한의 상황에서 보여주는 인간의 몸짓은 인간의 본질뿐만 아니라, 세계관이 그대로 투영될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미 해병대가 치룬 장진호 전투는 그런 의미에서 충분한 메시지를 전달해 주고 있다고 본다. 전쟁 자체를 미화하거나, 영웅성을 강조하려는 것이 아닌, 다른 면에서 장진호 전투는 적지 않은 교훈이 될 듯싶다.

장진호전투는 미군이 한국전쟁 중 인천상륙작전에 이어 원산에 상륙해 동부전선에서 중공군 남하를 막기 위한 전략이었다. 당초 미 해병 1사단은 맥아더의 크리스마스 공세 작전에 따라 50년 11월 28일 함남 소재 장진호 서쪽으로 공격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장진호 일대 산 속에 매복되어 있던 중공군 7개 사단(12만 명 규모)이 영하 29℃까지 내려가는 강추위 속에서 총공격함으로써 2주간의 사투는 격발된다.

중공군의 목표는 완전 포위권내에 있는 미 해병 1사단을 섬멸하고, 함흥지역으로 진출해 미 제10군단을 섬멸, 38선 이남지역까지 진출함으로서 전쟁을 조기에 끝내고자 한 것이었다. 그런 이유로 흥남 포위망을 직접 공격하게 된다. 이 시기 미군은 2주간, 격전의 전투를 치루며 시간을 번다. 한국군과 유엔군, 피란민 등 20만 명을 남쪽으로 철수시키는데 절대적 시간이었다. 이 전투에서 미군은 결국 완전 패퇴하게 되는데 이때 퇴각 명령을 내리며 스미스 소장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후퇴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다른 방향으로 공격하는 것이다."

전투에서는 패배했지만, 전략적인 목적을 이루었기에 퇴각조차, '후방으로의 공격'으로 해석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두려움의 확산을 막고, 성공의 비전을 스스로 가지게 함으로써 상황을 유리하게 개척하려는 의지가 표명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세기의 전투에서 나올 법한 명언과 달리 막대한 병사를 잃으며 중부전선을 장악한 중공군은 어떤 말을 했을지 궁금하기만 하다.

이런 예는 또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영국 크레이턴 메이브램 장군과 그가 인솔하던 부대는 모두 적군에 포위되고 만다. 이때 장군은 낙심하지 않고 오히려 용기백배해 이렇게 말한다.

"여러분은 전쟁이 시작된 이해 처음으로 우리는 지금 사방을 공격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았습니다."

사방에 포외를 당한 절망의 상태지만, 오히려 장병들에게 용기를 불어 넣어주고, 이를 통해 성공적인 작전을 펼쳐 결국 승리를 하기 위한 것으로 풀이된다. 어떤 경우든 태초 이래 하늘은 지금껏 열려 있고, 희망은 늘 있다는 믿음... 자신의 삶에 다가온 고통과 절망을 승리로 전환시킨 사람들의 이야기라서 더욱 관심을 끈다.

우리는 인생을 살며 수많은 역경에 접하게 된다. 역경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그 인물은 물론, 상황조차 달라질 것은 자명하다. 흔히 이야기하는 리더십이란, 평온 속의 달콤한 꿈같은 것이 아니라, 역경을 딛고 일어서는 불굴의 자세일 것이다. 누구나 포기하고 싶을 때 일어나 다시 도전하는 자세, 그 같은 행동으로 주변을 일으켜 세우는 힘! 그런 게 진정한 리더십의 전형일 것이다. 지금 우리는 어떤 리더십이 총체적으로 요구되는 시대를 살고 있을까? 그것은 각자가 지닌 생각과 행동만이 뚜렷한 해답이 될 거라는 걸, 내 자신을 톱아보며 새삼 깨닫게 된다.

<행복한 동행> 전경일. 인문경영연구소장.《초영역 인재》저자.


칼럼|사보기고 | Posted by 전경일 2010/07/20 17:35

한줄기 빛 이론

사람은 누구나 고통을 겪게 되어 있다. 본질적으로 생명이 유한하고, 생로병사의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는 존재로 태어났기에 피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한 존재가 지닌 고통의 분량은 종교가 많이 덜어주고, 완화시키며, 치유케 하는 힘이 있다. 그러기에 종교는 오랜 시간 인간과 함께 해온 것일 게다.

자연적 고통이야 피할 수 없더라도, 사회적 고통은 치유 가능하다. 요는 그럴 수 있는 사회 시스템을 그 사회가 만들어낼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시스템의 우위, 가용한 자원, 그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들의 관심과 열의 정도가 큰 몫을 한다. 어느 위대한 시대도 그 당대의 모순을 해결하고자 하는 노력에서 출발했으며, 그것을 고치지 못해 무너졌다는 것을 역사는 웅변적으로 드러내 준다. 로마의 모순은 자체의 비대함으로 초기의 활력을 잃고, 관료화되어 가며, 용병을 끌어다 국방을 지키게 한데 있다. 이 점을 시오노 나나미는 자신의 걸작 <로마인 이야기>를 통해 잘 표현해 내고 있다.

사회적 문제의 해결만큼이나 중요한 것도 자신의 몫이다. 개인적 문제 해결 능력이 없다면, 사회적 해결을 바라는 것은 준비 없는 기대감만 불러일으킬 수 있고, 자칫 주객전도된 상황을 만든다. 스스로의 의지가 현실의 고통도, 현실의 짐도 덜게 한다는 것.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자신이 주인일 수밖에 없다. 이런 인내의 과정이 한 인간을 더욱 단련시키고, 그로 하여금 인생의 진면목을 알게 한다.

나이가 들며 삶 앞에서 원숙해 지는 것은 바로 인생이란 경험을 해 왔기 때문이다. 인생(人生)의 '인(人)'자는 둘이 기대는 면이 있다. 사람 서로 간에 기댄다는 의미도 있겠고, 때로는 내가 세상에, 때로는 세상이 나에 기댄다는 뜻도 되겠다. 서로 기대가며 살아온 삶의 깊이를 우리는 연륜이라 하고, 그 연륜이 묻어나는 게 '견딤'일 것이다. 모든 위대한 삶이 다 그러하다.

진화론으로 유명한 찰스다윈의 예를 한번 들어보자. 과학 저널리스트 칼 짐머에 의하면, 다윈은 비글호를 타고 5년간이나 힘든 항해를 한 후, 영국으로 돌아와 다시 8년간 논문을 쓰며 정신없이 보냈다고 한다. 배를 타고 항해를 하고 난 뒤부터 건강이 나빠지기 시작해 정기적으로 발작 구토 증세까지 보이기까지 했다고 한다. 너무 혹사를 한 끝에 30대 중반이 된 다윈은 휴식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가 아끼던 딸 앤이 10살이 되던 해인 1851년에 독감으로 숨졌다. 연구에 몰입하던 다윈은 죄 없는 아이가 고통에 몸부림치는 것을 보면서 천사에 대한 믿음을 저버렸다고 한다. 앤이 죽은 후 다윈은 신앙심이 무너져 내렸지만, 당시 사회 분위기상 이 사실을 자신의 처자에게 말할 수는 없었다. 대신 다윈은 무엇을 했을까? 그는 고도의 집중력으로 세상사를 잊고, 심지어는 죽은 딸아이를 잊기 위한 듯, 필사적으로 따개비 연구에 몰입했다. 따개비 연구는 고통을 잊는 한 방편이 되었으며, 동시에 그로하여금 고통 끝에 잉태해 내는 새로운 '사고' '발견' '통찰'의 세계로 이끌었다. 만일 다윈이 죽은 딸 아이 생각에만 빠져 지냈다면 우울증까지 겹쳐 건강은 더욱 악화됐을 것이다. 고통속에서 오히려 진화론의 굵직한 뼈대를 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고통을 감내하고 이겨낸 자가 이룩한 빛나는 위업이었다.

우리는 고통 속에서 수많은 좌절감을 맛보지만, 희미한 등불 하나만으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삶을 전진시켜 나간다. 다윈이 겪은 일화는 우리에게 고통을 잊는 법이 아닌, 고통을 이기는 법을 가르쳐 주고, 고통 속에서 더욱 내재적 가치에 몰입하는 한 인간의 면모를 엿보게 한다. 그것이 위대성이라고나 할까?

다음의 예 또한 삶에 대한 의지와 자신의 구체적 노력이 문제해결력을 높이는 것이라는 점을 잘 알게 한다.

심리학자인 칼 오이크에 의하면, 스위스 알프스에서 한 기동연습이 실시되었는데, 헝가리인 중위가 정찰대를 내보내기로 결정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정찰대가 출동하자마자 눈보라가 날리기 시작했다. 그는 부하를 죽음으로 내쫒은 것이 아닌가 하고 후회하였다. 지도를 건네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흘이 지나 정찰대 모두는 무사히 귀대했다. 어떻게 했길래 그들은 되돌아오는 길을 발견할 수 있었을까. 한 정찰대원이 이렇게 말했다.

"길을 잃은 우리는 망연자실하여, 이제 우리 모두는 여기서 끝장이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그때 한 대원이 포켓에서 지도를 끄집어냈죠. 그 덕분에 우리 모두는 야영을 하면서 날씨가 풀리기를 기다렸습니다. 이윽고 눈보라가 사라지자 그 지도를 보고, 원대 복귀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중위가 펼쳐 본 그 지도는 알프스 지도가 아니라 피레네 산맥의 지도였다. 삶을 개선하는 방법은 사회적 문제 해결력이 높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으나, 그렇지 않더라도 스스로 해결하려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 노력하면 세상 어딘가에서 한줄기 빛이 올 거라는 믿음 - 그것이 나와 세상을 바꾼다.

<행복한 동행>
전경일. 인문경영연구소장.《초영역 인재》저자.

칼럼|사보기고 | Posted by 전경일 2010/07/20 17:32

브라질 땅콩과 한국 땅콩

대충 보면 크기가 일정한 것 같아 보이지만 땅콩은 생김새도 크기도 제각각이다. 이 땅콩들을 아무렇게나 캔에 담아 운반하다보면 이른바 '대류(對流)현상'이라는 것이 발생한다. 고객이 슈퍼마켓이나 마트에서 캔의 뚜껑을 열면 언제나 큰 땅콩들이 위로 올라와 있는 걸 보게 되는 데 바로 이런 현상을 가리킨다. 캔이 공장을 떠나 자동차에 실려 슈퍼마켓에 도착하는 과정에서 이리저리 흔들리면서 큰 땅콩들은 계속 위로 올라오고 작은 것들은 밑으로 가라앉게 되기 때문. 장사를 하는 사람들은 미관상 좋아할 수밖에 없는 현상인데, 이것을 물리학자들은 '브라질 땅콩 효과(Brazil Nut Effect)'라고 부른다. 자연에서, 일상생활에서 흔히 벌어질 수 있는 현상에 특별한 '효과'를 붙인 것은 그 현상이 지닌 보편성과 중층적 의미구조 때문일 것이다.

이런 땅콩을 경영학자들은 신(新)자유주의 경제에 빗대, 캔 속 땅콩처럼 소수의 부자들은 더 위로 올라오고, 많은 중산층들은 더 밑으로 내려가는 현상으로 설명하기도 하고, 경영학자들은 가게까지 운반 도중 트럭에서 요동치는 과정을 경쟁 환경으로 보고, 경쟁을 통해 초우량 기업이 탄생하고 나머지 기업은 가라앉거나, 사라져버리는 것으로 빗대곤 한다.

위와 아래라는 이분법적인 구도는 캔 속 땅콩 세계에 엄연히 적용돼 크고 작은 것의 각자 위치를 정해 준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생겨난다. 캔의 가운데에 위치한 땅콩들은 어떤 크기일까 하는 점이다. 당연히 크고 작은 것 틈에서 버티고 있는 중간 크기들일 것이다. 그것이 캔의 밀도에 균형추 역할을 할 터다. 중간 크기의 땅콩이 튼실하면 위, 아래가 분리되어 있으면서도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줄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땅콩이 아닌, 틈새에 끼인 호두알 신세가 되어 버릴지 모른다.

그런데 밀폐된 환경을 한번 바꿔보자. 만약 이 땅콩들을 체에 쏟아 붓고 까분다고 생각해 보자. 체를 칠수록 캔 속에서처럼 위, 아래의 고저는 사라지고, 앞뒤, 혹은 좌우의 평면이 되어 버리며 땅콩은 자연스럽게 그룹핑이 된다. 즉, 크기별로 각자 자기 자리를 찾아가는 것이다. 물론, 잘 까부르기만 하면, 크기별로 땅콩을 선별해 낼 수 있다. 이 또한 땅콩장수에게는 환영할만한 일일 것이다. 상품의 일관성을 유지하며, 가치를 높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이렇게 되면 '브라질 땅콩 효과(Brazil Nut Effect)'는 다른 경지를 보여준다. 즉, 환경 영향으로 소득 수준이나, 경쟁 환경을 설명하는 것이 아닌, 보다 다원화된 세계를 보여줄 수 있다.

흔히 문화적 다양성을 얘기할 때 우리는 그 전제조건으로 유연성을 말하곤 하는데, 그것은 그 사회가 가진 풍부한 수용성을 뜻한다. 나와 다른 남, 우리 문화와 다른 타방의 문화, 특정 종교나 이데올로기가 아닌, 어떤 것도 논의되고 받아들여지는 다원적 가치 같은 게 바로 그것일 터다. 개방성이라는 게 이것을 뜻한다.

한번 예를 들어보자. 얼마 전 있은 동계 올림픽에서 우리 선수들이 보여준 활약상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각 종목에 나선 선수들의 열정적인 경기를 보며 생각하게 된 것이 있다. 바로 이전 세대와 달리 전혀 그늘지고, 주름 잡혀 있지 않다는 것. 경기에 임하는 진지한 자세는 이전 세대와 비교해도 전혀 뒤질 것 없지만, 새로운 승부 근성이 DNA에 새겨져 있으면서도 '개인주의와 도전의식 누구보다 강하다'는 것을 단박에 알 수 있었다. 과거처럼 '고생'한 흔적 보다는 '도전'한 흔적이 더 돋보였기 때문에 즐기며 플레이하는 경기가 뭔지를 잘 보여준 것 아닐까? 그래서 온 국민들이 다 함께 즐겁고, 행복한 시간을 갖게 된 것은 아닌지...

모태범 선수가 스피드스케이팅 남자 500m에서 금메달이 확정되자 태극기를 몸에 두른 채 두 손을 하늘로 콕콕 찌르며 덩실덩실 춤을 춘 것이나, 김연아 선수의 당당하고 대담한 플레이며, 결과를 '쿨(cool)'하게 받아들이는 각 선수들의 모습은 과거처럼 '쪼아서' 만들던 선배 세대의 선수들과는 판이하다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다. 도대체 우리가 기억하듯 태극기가 올라갈 때 보여주어야 할 비장함이랄까 하는 건 도무지 찾아볼 수 없다.

이들을 가리켜 영어 'Green'과 'Global'에서 따온 G세대라는 명칭을 쓴다는데 여기에는 88올림픽 이후 태어난 세대들의 건강하고 적극적이며 미래지향적이고 세계화된 이미지가 가득 들어 차 있다. 다시 말해 위, 아래가 아닌, 평면으로 전체 세계를 조망하는 의식이 내장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번 동계 올림픽을 통해 우리가 알게 된 또 하나의 '진실'은 이런 무한한 확장성을 가진 면(面) 개념이 아닐까 한다. 그것은 캔 속 땅콩처럼 좁아터진 곳에서 서로 치고 받으며 줄 세우기를 해야 하는 '브라질 땅콩'이 처한 폐쇄적 세계가 아닌, 세계를 무대로 뛰며 각자의 노력대로 모양과 크기를 다시 정렬하고 세우는 '한국 땅콩'의 새로운 패러다임 아닐까 싶다. 그것을 하나의 '효과'로 발전시키려면, 글쎄 나처럼 나이든 세대들은 문화적으로 보다 유연해지고, 개방성과 수용성을 높일 필요가 있지 않을까. 끝으로 팁 하나! 그런 가치가 괜히 튀는 게 아닌, 깊이 있는 문화 강국 대한민국의 저력이라는 것을 한국 땅콩들은 사회 곳곳에서 이젠 보여줄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브라질 땅콩 신세보다는 한국 땅콩의 통통 튀는 모습이 더 탱탱하고, 박력 넘친다고.

<행복한 동행>
전경일. 인문경영연구소장.《초영역 인재》저자.


칼럼|사보기고 | Posted by 전경일 2010/07/20 17:30

작은 아이디어를 소중히 하면

겨우내 내린 눈이 샘이 되어 내를 이루고, 내가 다시 강이 되어 바다의 일부가 되는 것은 우리가 지닌 작은 아이디어의 힘이 얼마나 큰지를 새삼 짐작케 한다. 아무리 장대한 기업도 그 기업이 지닌 경쟁력을 살펴보면 몇몇 핵심 되는 작은 아이디어와 그것을 밑받침하는 기술, 실행력을 지니고 있고, 그것이 기업의 원천 경쟁력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한국 기업사를 살펴보면 쌀장수를 한 가게 중 2개 회사가 60년 내 그룹이 되었고, 치약장수를 하던 회사가 그룹이 되었다. 일제가 남기고 간 적산(敵産)을 인수해 사세를 키운 끝에 50년 만에 우리나라 최대의 보험회사를 그룹사로 편입시키기도 했다. 모두들 작은 것에서 출발해 대기업 군으로 발전한 경우다.

기업이든 개인의 발전사는 이처럼 작은 아이디어에서 출발해 거대한 경영의 바다에 이르는 과정과 같다. 오늘날처럼 인터넷의 등장과 함께 창업이 보다 수월해지고, 확산 속도가 광범위하게 빨라지며, 많은 인터넷 기반 기업들이 작은 아이디어를 경쟁력의 원천으로 삼는 것을 보면 ‘작은 생각은 결코 작지 않다.’는 교훈을 떠올리게 된다. 네이버는 ‘원하는 지식을 찾아주겠다.’는 작은 아이디어로 인터넷 기업의 판도의 바꾸었고, 구글은 ‘뭐든 다 찾아 주겠다.’는 생각으로 가장 영향력 큰 인터넷 기업이 되었다. 국내 시장만 하더라도 인터넷 관련 기업으로 분류되는 기업들의 시가총액은 10조 이상을 이루고 있다. 작은 아이디어의 힘이 결코 작지 않은 이유다.

기업들이 아이디어를 공모하고, 이를 발굴해 내고자 하나 의도처럼 잘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여기에 직원들의 창의적인 사고를 이끌어 내는 조직 운영상의 원리가 숨겨져 있다.《공짜 아이디어(Ideas are Free)》의 공동 저자인 슈레더 와 로빈슨 교수는 직원들이 지닌 아이디어를 키우는 조직적 노력이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 잘 지적해 주고 있다.

“대부분의 경영진들은 대개 까다로운 경영이론에서 (경쟁력을) 찾으려고 고심하거나, MBA 수업에서 들은 최신 경향을 따르는 식으로 구하려고 한다. 하지만 그보다는 자기 직원들에게 귀 기울일 줄 알아야 한다. 큰 계획 구상에만 몰두하는 경영진은 오히려 직원들의 창의력을 활용하지 못해 사업을 키울 기회조차 잃게 된다.”

“경영진들은 항상 양복을 입고 코너쪽 사무실을 차지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일은 아이디어를 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산업 전선에 서 있는 직원들의 말을 듣지 않는다. 사업에 대한 큰 구상을 내놓는 것이 경영진의 몫일 순 있지만, 그 구상이 현장에서 실제로 작동되게 하는 것은 바로 직원들이 내놓는 작은 아이디어들이다.”

하나의 아이디어는 다른 파생 아이디어를 불러오고 그 아이디어는 서로 연계돼 현재의 문제를 푸는 열쇠로 작용할 수도 있다. 작은 아이디어를 꺼지지 않는 불씨처럼 잘 거두기만 하면, 그것은 천하를 불사를 거대한 사업으로 발전할 수 있다. 디테일의 힘은 바로 여기에 있다. 크고 작은 아이디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전체를 움직이게 하는 작은 아이디어(혹은 기술력)가 눈에 보이지 않는 힘으로 작용할 때 기업에는 누구도 모방하기 어려운 경쟁력이 생겨난다.

수많은 자동차 회사들이 자사 차의 슬로건으로 다양한 술어들을 수식어로 붙이지만, 가장 간결하게 ‘럭셔리 카‘로 포지셔닝 하고 있는 메르세데스 벤츠는 3만여 개에 달하는 부품에서 남다른 경쟁력을 지니고 있다. 벤츠 자동차의 경쟁력은 차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작은 부품들의 결합에 있다. 이런 작은 경쟁력은 눈에 잘 보이지도 않고, 세부적인 요소들을 개선하는데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다보니 경쟁사들이 쉽게 따라올 수도 없다. 큰 아이디어는 쉽게 따라 할 수 있지만, 작은 아이디어는 찾아내기도 어렵고, 모방하기도 훨씬 더 어렵기 때문이다.

현장에서 취득한 아이디어의 놀라운 힘은 제품과 상품에 그대로 반영된다. 아무리 엉뚱해 보이는 아이디어라고 할지라도 세상에 나쁜 아이디어란 존재하지 않는다. 어느 면에서는 그 ‘나쁜’ 아이디어가 위력을 발휘하게 되는 순간을 맞이하곤 한다.

주변의 사람들이 가진 아이디어는 쉽게 간과되거나, 무시되어서는 안된다. 그들이 지닌 창조적 사고는 지금은 형편없고 보잘 것 없어 보일지라도 그들이 ‘생각하는 사람’으로 자기 일에 임하고 있다는 것을 잘 드러내준다. 그들의 생각에 찬물을 끼얹으면 조직에는 서서히 암흑의 중세가 찾아온다.

사람은 어떤 경우든 다른 사람을 향상시킬 의무가 있고, 다른 사람을 향상시킴으로서 스스로 향상되는 전기를 마련해야 한다. 상호 향상을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내 주변 사람들의 열정을 북돋워 주는 것이다. 작은 생각을 무시하면, 큰 생각을 얻기 곤란해 진다. 우리는 주변 사람들의 작은 아이디어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 세상사의 모든 것이 실은 그것을 대하는 사람의 마음 자세에 달려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마다 모든 성취에는 자신만의 깊은 샘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행복한 동행> 전경일. 인문경영연구소장.《초영역 인재》저자.


칼럼|사보기고 | Posted by 전경일 2010/06/03 13:12

동아 비지니스 리뷰 6월



<출처 : 동아 비지니스 리뷰 6월호>


<출처 : DGB Economic Review 20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