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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明)으로 봐서 이제 누르하치는 완전히 고삐 풀린 소의 모습이었다. 한족이 역사적으로 항시 우려한 게 바로 이런 상황이었다. 변방에서 일어나는 이민족의 도전을 막고자 한족은 오래전부터 ‘위(衛)’라는 군사단위를 설치한다. 나아가 지방의 부족장을 통해 이민족의 각 부족들을 통제하는 간접 지배 방식을 취했다. 당연히 이 부족장들은 고분고분하게 말 잘 듣는 사람들로 채워졌으며, 지위를 세습시킴으로써 한족은 그들로부터 지속적인 충성을 이끌어 내고자 했다. 중국은 이 같은 소고삐 정책을 통해 변방을 중국의 행정체계에 편입시키려 했고, 이민족에 의한 이민족의 지배라는 이이제이 방식으로 친중 사대정권을 수립했던 것이다. 이는 현재에 와서도 그대로 계승되고 있는 한족의 대(對)변방 정책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몽고족에게 적용되던 ‘위(衛)’는 1403년 들어 여진족에게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이때 최초의 여진족 위소(衛所)인 건주위가 요동의 동북지방 부족들 사이에 설치되었다.

이 같은 당근과 채찍을 이용한 분할 통치로 여진 사회는 오랫동안 교묘하게 유린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반명(反明)의 기치 하에 누르하치는 여진 제 부족을 통일하고 일어나 지배자인 명조(明朝)와 한 판 승부를 걸었던 것이다. 그럼으로써 오랜 시간 이어온 예속과 굴종의 역사를 끊어버렸음은 당연하다. 위소(衛所)를 통한 분할 통치 방식은 매우 성공적이어서 이 제도는 한번 시작되자마자 급속히 퍼져 나갔다. 이 같은 지배 방식에 대해 한족은 스스로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이것은 기미(羈縻)하고 통어(統禦)하는데 최선의 계책이다. 부족들이 분열되면 그들은 약화되어 지배하기 쉽고, 부족군들이 서로 떨어져 있게 하면 그들은 서로 소원해져서 복속하기 쉽다. 우리는 이들 각자를 제각기 영웅처럼 느끼게 하고 자기네끼리 싸우게 한다. 만이(蠻夷)들이 내부 상쟁에 빠지는 것이 중국으로서는 기회가 된다는 공식이요, 이론이다.”

중국의 다른 민족에 대한 이 같은 일관된 분열정책은 누르하치 등장 이전까지 그대로 이어졌다. 그렇다면, 여기서 얘기하는 한족의 전형적이고 핵심적인 지배 방식인 ‘기미(羈縻)’란 무엇인가? 기미(羈縻)란 소를 고삐에 묶어 두는 것을 말한다. 오랜 기간 중국은 기미 정책을 통해 타민족에 대한 통제를 가한 바, 그 목적은 다음과 같다. (1) 소를 고삐에 묶어두어 소가 고삐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도록 한다. (2) 고삐에 묶인 소는 던져주는 먹이에 길들여진다.(공물, 사대, 관직 부여 등의 방식) (3) 소를 보고 나타난 범은 소를 노리지 결코 소 주인을 노리지 않는다. 따라서 한족은 언제나 직접적인 해를 피한다. (4) 분쟁 발생시 최소한 소의 위치가 경계지점이 되도록 한다. (5) 나아가 향후 소의 위치에 대해 기득권을 주장할 근거를 마련한다.

중국은 여진사회를 통제함으로써 여진 자체를 무력화시킴은 물론 조선의 여진 사회에 대한 영향력을 동시에 약화시키고자 했다. 실제 명은 여진족에 사신을 보내 선물을 가지고 번속적(藩屬的)지위(중국의 울타리를 이루는 속국으로서의 지위)를 수락케 하는 협상을 하여 조선의 세력으로부터 빠져나오게 하려 했다. 이 모든 전략은 동북면에서 한족이 전략적 우위를 잡기 위한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현재 중국이 조선족에 대해 취하는 격리정책도 바로 이 같은 분열과 기미정책을 교묘하게 혼합해 계승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누르하치 등장 시기에도 명은 여진 제 민족의 통일을 방지하기 위해 모든 방법을 동원했다. 여진 사회에서 누르하치의 출현은 바로 오랜 시간 그들을 묶어 온 고삐를 끊어버린 일대 사건이었고, 이 같은 역사적 부름을 받은 누르하치는 마침내 그 뜻을 이루어 냈다. 청조(淸朝)의 설립은 바로 그런 노력의 산물이었던 것이다.
ⓒ전경일, <글로벌 CEO 누르하치>

누르하치 성공 배경에는 항시 요동이 자리 잡고 있다. 요동은 여진족에게는 남만주(南滿洲) 지역에 해당된다. 요동에 대한 지배는 풍부한 곡창 지대에 대한 경략권을 확보한다는 차원에서 안정적인 식량 공급원을 마련하는 것을 의미한다. 요동은 여진족과 명의 접경지대로 중국의 선진 문물을 배워 이를 자기 것으로 만드는데 최고의 전략거점이었다.

나아가 요동은 해상 교통의 요충지이기도 했다. 뱃길로는 가장 짧은 거리로 중국에 가 닿을 수 있었다. 만리장성이 끝나는 바닷가와 맞닿은 철의 요새가 바로 산해관이었고, 그 관문을 통과하면 눈앞에 북경이 닿을 것 같았다.

누르하치가 요동을 눈여겨 본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적과 대립하는 접점 가까이 군사들을 배치할 수 있는 이 같은 교두보는 더할 나위 없이 유리한 조건이었다. 이를 이 야생의 정복자는 결코 간과하지 않았다. 이때 누르하치가 취한 요동 확보라는 전략은 오늘날 기업 활동과 비유될 수 있다. 경쟁사 가까이 포지셔닝해 항시 긴장을 늦추지 않고 노림수를 펴는 전략이나, 경쟁 제품을 출시해 경쟁사의 손발을 시장에서 묶어 놓는 전략과 매우 흡사하다. 누르하치는 요동을 놓치지 않았다. 요동 정벌은 바로 북경으로 나아가는 관문 앞에 진지를 구축했다는 점에서 의미 깊다. 적 가까이 세력을 붙여놓은 까닭에 이제 적들은 스스로의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이 같은 심리적 효과를 누르하치는 요동 장악을 통해 더욱 구체화시켰다.
ⓒ전경일, <글로벌 CEO 누르하치>

역사경영/글로벌 CEO 누르하치 | Posted by 전경일 2010/07/27 20:36

적에게서 배워라

그렇다면 청이 건국되는 1600년대에는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났었는가? 유럽에서는 신대륙이 발견되었고, 세계사적 흐름은 전지구적 현상이었다. 청조는 근대 중국을 잇는 가장 가까운 왕조로 출범해, 몽골의 원(元)을 빼고는 중국 역사상 가장 많은 민족과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해 현대 중국에 넘겨준 왕조이다. 그 무렵에 중국에서는 소수 민족인 여진족이 오랜 기간 한족을 지배하고 유지하는 경이적인 일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여진족의 성공 이유에 대해 에드윈 O. 라이샤워와 존 K.페어뱅크 교수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1) 강력한 지도자의 출현 (2) 유리한 시기의 도래 (3) 제부족의 통일 (4) 공통되는 민족명의 부여 (5) 공략에 대한 동기부여 (6) 자손까지 이어진 대업 완수와 후손에 의한 중국의 지배의 실현 등.

이 같은 분석은 여진족의 성공적인 중국 인수 합병과 지배에 대한 적절한 해석으로 보인다. 또한 여진족도 몽고족처럼 중국의 지배력이 미치지 못하는 변방 지역에서 군사적 역량을 준비했다는 점이 또 하나의 성공 요인으로 인식된다. 이는 마치 기업 경영에서 성공적인 중견 기업들이 흔히 5대 대기업들이 크게 들여 다 보지 않는 1천 억대 시장규모에서 눈에 띄지 않게 서서히 역량을 축적해 나가는 과정과 같아 보인다. 보이지 않는 곳이야말로 적과 내가 서로 다른 목적으로 안심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보호처이자, 동시에 칼날을 벼리는 곳이 아닌가.

이 같은 성공 방정식을 여진족은 현실 투쟁에서 배워 그들 경영에 그대로 적용했다. 여진족의 벤치마킹은 싸움의 전략뿐만 아니라, 다방면에 걸쳐 이루어졌다. 그들은 심지어 자신의 극복 대상인 명으로부터 정치 체제를 배워서 이를 그대로 원용하기도 했다. 여진족은 선진 문물에 대한 벤치마킹을 통해 자기 지배 방식을 더욱 세련되게 구사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명의 문화와 제도를 계승해 그들이 꿈꾸었던 대(對)중국 M&A를 달성한 다음에는 오히려 피지배 민족에게 자연스럽게 섞여 들어갔다. 여진족으로써는 노쇠해 가는 적을 이민족다운 방식으로 치유한 셈이었고, 중국으로서는 숙주로써 건강한 생명체가 필요했던 셈이다. 이것이 중국이 유지되어 온 방식이었다.
ⓒ전경일, <글로벌 CEO 누르하치>

나의 이번 답사 여행은 마침내 거병 66년만에 중국 대륙을 집어 삼킨 청태조 누르하치와 홍타이지 가계로 이어지고 있었다.

명나라 두송이 군사의 태반을 잃은 혼하는 유유히 흐르고, 허투알라로 들어 서는 길, 비가 뿌린다.

누르하치의 조상을 모신 청영능에 들어 서는 길은 한적하고, 길은 열려 있다. 건물마다 제기가 차려져 있고, 무덤엔 영혼이 부활하라는 비나리가 담긴 나무가 자라고 있다. 불현듯, 여진족의 야생성은 아직 살아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대한민국 중소기업 CEO들을 모시고 나 (전경일 인문경영연구소장)와 함께 떠나는 답사 여행의 제목 <광개토태왕 & 누르하치 고구려 탐방길>을 이끌면서 참 많이도 느끼고, 감회에 젖었다.

1300년 전부터 400년 전을 거쳐 현재로 이어지는 긴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숨통을 닫았다 다시 열기를 반복했다.

혁도아랍 들어서는 길, 노성이라 불린 이곳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성쪽을 내다보니 팔기가 번뜩인다. 중국을 집어 삼키게 한 저 깃발 아니던가! 혁도아랍성에 이르러 나는 드디어 창업기의 누르하치를 만날 생각이었다. 그리높지 않은 곳에 성곽을 쌓고 창업 초기 세력을 모아나갔던 그!

건물 내부는 만주족 답게 소박하기 그지 없다. 청의 흥기가 이런 검약함에서 나왔고, 그 강희-옹정-건륭으로 이어지는 탁월함의 정치가 바로 여기에 뿌리를 두고 있으리라! 청 관련 책자들을 서가에서 만나고, 사진을 한장 찍었다. 

칸이 마신 우물을 들여다 보고, 조선의 인조를 무릎꾾게 한 저 홍타이지의 영정을 바라보고, 탑극세의 집을 둘러 보았다. 모두가 소박하였다.

이 원정의 끝을 나는 이제 곧 심양에서 맞이하게 되리라. 호텔에 돌아와서는 <대륙을 질주하는 광개토태왕(누르하치)의 야생경영> 강의를 하고, 4박 5일의 대 장정이자, 버스 안에서도 계속된 강의를 마쳤다. 광개토태왕-누르하치-현재의 중국시장 공략 전력을 묶은 장장 30시간의 연속 강좌였다.


마침내 나는 이 세 개의 무덤을 보기 위해 여기에 왔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청영릉의 누르하치 조상의 묘-누르하치의 묘-홍타이지의 묘... 이 속에 만주 정신이 있고, 만주족의 길들여지지 않는 야생성이 있다.

우리는 어떤 야생성으로 이 험난한 시대를 뛰어 넘어야 하는가? 우리는 어떻게 나라를 강고히 세우고, 기업을 글로벌 컴퍼니로 우둑 세울 것인가? 그 해답은 내가 서울로 돌아가면 삶의 면면을 실천하는 것으로 드러나야 하리라. 

ⓒ전경일, 인문경영연구소

  

역사적으로 철제 등자(鐙子)의 등장은 이들 유목민들의 손을 자유롭게 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등자는 말을 탈 때 디디는 제구를 말한다. 적어도 3, 4세기까지 유목 기병들은 아시리아의 발판과 스키타이 인디안의 발(足)거리 쇠사슬처럼 철제 등자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이제 말을 타면 두 발을 지탱할 수 있었고, 이는 두 손의 자유를 가져왔다. 가히 획기적인 발명품이 인류 역사에 등장한 것이다.

두 손의 자유는 말 위에서 활을 쏠 수 있는 기술을 급격히 강화시켰다. 이제 승마인들은 활을 당기면서 안장 발거리를 딛고 안전하게 서 있을 수 있었다. 등자는 말 엉덩이 너머로 쏘는 파르티아식(式) 활쏘기를 가능하게 했다. 우리나라 고구려 고분 벽화에 등장하는 활쏘기는 바로 이 같은 장면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기병은 화약이 등장하기 전까지 적어도 천 년간 군사력의 우위를 가능케 했던 주요 수단이었다. 떠돌아다니는 유목민으로 시작해서 중국을 손에 넣었던 민족들의 특징은 바로 이 위대한 속도의 병기를 쥐고 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기병부대에 맞서 중국의 농민보병은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말을 탄 보병 수준에 불과했다. 이는 당시로써는 대단한 기술적 우위였으며, 철기병의 조직화를 가능하게 한 것이다. 누르하치가 중국을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은 더 신속히, 전술적으로 말을 운용했기 때문이다.

속도 경영과 강력한 전력 우위

초원에서의 말은 군사력을 대표한다. 알다시피 먹고 달리는 유목 생활은 하루도 빠짐없이 속도와의 전쟁이다. 이미 947년에 건국된 요나라 때부터 말은 제국의 역전제(驛傳制)를 유지하는데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그 시기에 이미 하루에 700리, 즉 약 230마일의 빠른 속도로 편지를 전달하였다고 하니 그 속도가 가히 짐작이 간다. 이는 역전제도(驛傳制度)상 최고의 기록이다. 마치 오늘날 어디로든 자유스럽게 흐르는 정보의 네트웍인 인터넷을 연상케 한다.

나아가 말을 이용한 군사 작전은 빠른 이동과 빠른 수비의 공수 전환을 쉽게 했고, 치고 빠지는 히트 앤 런(hit and run)식 군사 작전을 가능하게 했다. 더 멀리 갈 수 있다는 것은 세상에 대한 행동반경이 그 만큼 더 넓어진 것을 의미한다. 누르하치가 각 성을 도모하고 신속히 철수 내지 이동했던 것은 고립되는 상황을 피하려는 전술에서였지만 말을 다룬 오랜 경험에서 속도가 주무기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말을 통해 계속 움직였고, 기동력을 통해 적을 제압했던 것이다.

나아가 말의 기동력에 행동의 민첩성을 더 부여하고자 여진족 무사들은 가볍게 몸을 치장 했다. 그들의 갑옷은 무사의 몸놀림을 편하게 하기 위해 부드럽고 가벼운 재질로 만들어 진 것이었다. 조선을 찾은 명나라 사신 퉁훼(董越)가『조선부(朝鮮賦)』에서 조선종이가 누에고치같이 탄력 있고 질기다고 평한 것은 팔기군의 갑옷에 견직과 면직이 사용되었다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당시 여진 사람들은 조선종이로 갑옷을 만들면 화살이 잘 뚫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조선종이를 찾았던 것이다.

야생의 피를 끌어들여 성장한 중국

중국은 이민족과 잦은 인터페이스 덕분에 끊임없이 변화 발전할 수 있었다. 중국 역사는 다름 아닌 변증법적 통일 과정을 그대로 보여준다. 한족 자체의 구조가 더 이상 성장 엔진이 되지 못할 때에는 이민족이 중국 경영에 본격적으로 참여했다. 이는 마치 늙은 포도나무에 찔레 순을 접붙이기 하는 것과 비슷했다. 그럼으로써 중국은 젊은 야생의 피를 받아 오랜 시간 그 수명을 연장해 올 수 있었다. 이는 찔레나무로 비유되는 측에게도 마찬가지였다. 풍요로움에 닿는 순간 그들은 야생성보다는 보다 안락한 삶을 선택했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자신의 야생성을 더는 지킬 필요가 없어졌다.

“변경지역 유목민 지도자가 세력을 얻는 비결은 항상 중국식 행정기구의 양식을 습득하는 그의 능력에 달려 있었으니,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상인, 농민, 그리고 부족의 전사들을 통제하는데 기초를 둔 혼성정권(混成正權)을 세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 인민들은 본의거나 본의가 아니거나 불가피하게 변경지방에서 그러한 이적지배자(夷狄支配者)가 일어나는데 역할을 담당했다.”

요컨대, 중국 내 한족의 내적 조건이 변경 세력으로 하여금 중국 진출을 가져오게 한 동인이었다는 얘기다. 이 불안한 한족과 (한족의 입장에서 봤을 때) 이민족간의 협동에서 이민족의 통치자들은 패권을 잡는 자로서 특별한 기능을 수행했고, 그렇게 함으로써 수적으로 보다 우세한 한족들을 지배할 수 있었다. 그들은 변경 지방으로부터 멀리 밀고 들어가 중국에 왕조를 세우기도 했다. 결국 중국사는 중국을 지배한 이민족 전사(戰士)들의 역사이기도 하다. 여진의 누르하치도 분명 이 야심찬 무리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는 것은 의심할 나위없다.
ⓒ전경일, <글로벌 CEO 누르하치>

예로부터 농경민과 유목민이 만나는 접점은 조용할 리 없었다. 거기엔 교역이 있었고, 끊임없는 욕망이 들끓었다. 주로 이 지역의 자연 현상은 최소한의 강우량과 관련지어 생각할 수 있다. 물 부족은 주기적으로 흉년을 가져왔다. 농경민과 유목민의 교역은 쉽게 정치적인 관계를 가져왔다. 힘의 균형이 깨지고 만일 중국의 힘이 약화되면 이는 곧 중국과 민족의 대결구도로 바뀌었다.

예컨대, “거란족이 세운 요는 지리적으로 그리고 행정적으로 북경과 만리장성 바로 북장 현 열하지방에 중심지를 잡았다. 이 지역은 살 수 없을 만큼 춥고(열하에서는 1년중 100일만이 서리가 없는 날이다.) 강우량도 겨우 10내지 15인지 밖에 안된다.” 열악한 자연 환경에서 정복자는 나왔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기업도 열악한 조건에서 창업돼 회사를 반열에 올려놓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이는 없는 자원 대신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인간의 의지와 노력으로 얻어낸 것이라 할 수 있겠다. 국내 기업으로 대표적인 예가 포스코이다. 철강을 뽑아내는 원광석의 대부분을 수입해 가공 처리하는 것을 업으로 하는 포스코는 세계적인 제절 회사로 자리 잡았다. 없는 요소 보다, 그것을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으로 태생적 한계를 극복했던 것이다.

중국의 일부 또는 전체를 지배한 민족들의 특징은 하나같이 초원에서 왔다는 점이 특징이다. 중원의 주인이 교체되는 배경은 초원과 농경의 접점에서 끊임없이 일어났으며, 때로는 극한의 자연 조건이 왕조 교체를 가져오게 만들었다. 사실상 중국 역사의 상당부분은 한족이 아닌, 다른 민족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자연은 그리 순종적인 대상이 아니다. 이들 초원의 부족들은 평소에는 그들 지역에서 살다가 가뭄이나 식량 부족이 생기면 중국 본토로 자연스럽게 진출해 나갔다. 치열한 생존 싸움이 이 접점에서 벌어졌던 것이다.

초원은 마치 그들 유목민을 물처럼 가득 가두어 놓고 있다가 일시에 중국 본토로 풀어 놓는 보(洑)와 같았다. 만리장성 밖의 중앙아시아를 보러 라도 크기는 중국 본토보다 2배나 되었지만, 인구는 거의 25분의 1이나 30분의 1 밖에 되지 않았다.

유목민의 생활은 알다시피 말과 연관지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말은 기동력의 상징이며, 동시에 말을 탄 궁사들로 이루어진 군사적 우월성은 한족에게 늘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 그것은 농경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에서는 결코 따라 잡을 수 없는 강력한 기동력의 원천이었고, 속도를 통한 경쟁력이었다. 중국을 지배한 온갖 민족들의 경쟁력은 근세 이전까지 말(馬)에서 나왔다.

목축 경제는 곡물보다도 동물과 함께한다. 그러다보니 이동성이 생긴다. 유목민들은 양가죽으로는 의복을 만들어 입고, 양모로는 천막을 만들어 하늘을 가린다. 초원에서의 양은 부의 척도이다. 이들은 주식인 양고기와 치이즈 버터도 모두 동물로부터 얻었다. 자립적인 생활을 하다 보니 목축 경제는 생필품을 얻기 위해 정착지역과는 최소한의 교역만을 필요로 했다. 육식을 보충할 곡물의 확보는 이 같은 교역을 통해 얻어졌다.

하지만 자원이 부족해지면 이들 유목민들은 태도를 바꾸어 버렸다. 그들은 가뭄, 기근 등의 자연 현상에 따라 주기적으로 군사적 행동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유목민들은 농토를 떠나면 생산수단을 잃어버리는 농경민들과 전혀 달랐다. 초원의 목자(牧者)들과 수렵자들은 중앙지도력만 있으면 언제든지 세력을 모을 수 있었다. 그들은 약탈을 통해서라도 생존 문제를 해결할 수만 있다면 즉각 동원될 수 있었던 것이다. 나아가 그들은 맡은 바 임무에서도 멀티형 인간들이었다. 그게 초원에서의 생존 방식이었다.

“초원의 목자(牧者)-전사(戰士)-수렵자(狩獵者)는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어야 하며, 단 한가지 직업에만 자신을 국한시킬 수 없었다. 부녀자들은 야영지의 사역군들이며 관리자들이자 그들 자신들도 전쟁과 정치를 제외하고는 유목 생활의 모든 문제를 다룰 능력자들이었다.“

이 같은 기록은 유목민의 삶이 얼마나 치열한 생존을 위한 삶이었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그들은 말안장만 타면 어디로든 갈 수 있었다. 안장 위에서 태어나, 안장 위에서 죽었다. 안장 위에서 세상을 보고, 세상과 교류했으며, 더 큰 세상을 이해하고, 그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기도 했다. 그들은 결코 무릎을 꿇지 않았다. 그들은 오히려 내다보았고, 내려 보았다. 달리는 것은 생존을 위해 필수 사항이었다.
ⓒ전경일, <글로벌 CEO 누르하치>


언어학상으로 볼 때 여진족은 퉁구스계에 속한다. 이들은 주로 동북방 삼림지대에서 수렵이나 어로, 농경 생활을 하였다. 그러다가 송화강 상류 지역에서부터 점차 세력을 넓혀나갔다. 이 지역은 한때 우리 역사의 주역 중 하나인 발해가 번성한 곳이었다. 여진이 역사의 무대로 등장한 것은 1114년 여진이 세운 금나라가 한족의 요나라를 밀어낸 때부터이다. 중국 역사의 상당부분이 타민족의 역사라는 걸 보여주는 것은 중국을 다스린 주인이 언제든 변해 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다. 아래 표는 한족과 타민족 왕조 교체시기를 잘 보여준다.



13세기로부터 19세기에 걸친 시기에 중국은 공교롭게도 원(1271~1368), 명(1368~1644), 청(1644~1912)으로 이어지는 왕조 교체기가 있었다. 원은 몽고족이, 명은 한족이, 청은 다시 여진족에 의해 세워졌다. 통사적(通史的)으로 볼 때 명(明)은 각기 다른 민족 간에 낀 샌드위치와 같은 한족 정권이었다. 그리고 다시 청(淸) 이후에 근대 중국이 들어서자 한족은 다시 역사의 무대로 등장하게 된다. 현재 중국은 명분상 다민족 통합 국가를 지향하지만, 여전히 한족이 주류를 이루는 국가 사회인 것만은 분명하다. 하지만 한족의 이 같은 집권기는 채 90년도 되지 않은 짧은 역사에 불과한 것이다.

알다시피 원과 청은 비한족(非漢族) 정복왕조로 숫적으로 훨씬 우세한 중국(한족이 말하는 ‘중화’)를 지배했다. 이들 북방의 세력들은 남방계 중국인들과 달리 훤칠한 골격을 갖추고 있었다. 이들은 한족의 중국이 허약한 틈을 타 중국을 정복했으며, 나아가 중국인의 도움을 받아 중국을 통일하고, 오랫동안 중국의 주인으로서 대륙을 지배했다. 뿐만 아니라 현지화 전략에 성공해 오랜 기간 지배를 했다.

이들 정복민족들은 중국인으로 도움으로, 중국의 제도를 그대로 사용하면서, 중국인을 지배했다. 중국이 한족만의 나라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은 역사적으로도 이들 민족의 지배가 한족의 지배를 또 다른 민족의 지배로 전환시키는 선순환적 구조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들은 중국 역사에서 매우 정규적으로, 일정 시점마다 등장해 참여한 세력이었던 셈이다. 이들 민족은 중국이 썩지 않게 만드는 야생의 힘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의 왕성한 기력은 한족의 중화가 힘을 잃어갈 때 오히려 새로운 생명의 접(椄) 붙이기와 같은 작용을 해냈다. 오늘날 우리가 동북아 역사에서 알아야 할 것은 한족에 의한 지배가 매우 일시적인 현상일 수 있으며, 중국이란 나라는 비중국계 민족에 의해 끊임없이 재배의 대상이 되어 왔다는 점이다. 때로 이것은 해양 세력인 일본에 의한 무력침공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중국을 일부 혹은 전부 지배한 민족과 그들이 사용한 언어는 중원의 주인이 따로 없었음을 보여준다. 흉노(터키어), 월씨(인도-유럽어), 선비(몽골어), 척발(몽골어), 돌궐(터어키어), 위그르(터키어), 거란(몽골어), 여진(퉁구스어), 탕구트(티베트어), 몽골(몽골어) 등 중국을 지배한 민족은 수없이 많다. 우리 민족이 동북아의 주인으로서 한족의 중국과 끊임없이 무력으로 교류하였음은 지극히 당연하다. 누르하치가 등장한 16, 17세기에도 동북면에서는 이 같은 형세가 쉼 없이 벌어지고 있었다. 중원에 다시 한 번 패권 이동의 용틀임이 일고 있었던 것이다.
ⓒ전경일, <글로벌 CEO 누르하치>

누르하치가 등장하는 무렵은 원ㆍ명과 명ㆍ청의 남북 교체 중간에 위치해 있었다. 북으로는 몽골과 여진이 병존하면서 몽골의 쇠퇴와 여진의 흥기가 서서히 진행되고 있었다. 대륙의 패권을 겨눌 힘의 중심이 여진으로 넘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전 세계의 주인을 자처했던 몽골에는 당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을까?

그 무렵 몽골은 중국에 대한 지배권을 상실한 채 약탈과 조공, 와시무역(瓦市貿易: 시장ㆍ장터에서의 거래를 통한 교역) 등으로 경제를 유지하기에 급급했다. 더구나 변화하는 대명 관계 속에서 몽골은 정치적으로도 체제 통합을 이뤄 내지 못하고 분열상을 보였다.

반면에 여진은 명과 조공ㆍ위소(衛所) 관계를 형성한 이래 와시 무역의 확대, 요동 한인 지배들을 통해 대외경제를 확대시키며 정치 조직의 통합을 이루어 내고 있었다. 물론 이것은 훗날 ‘대청체제(大淸體制)’를 형성하면서 중국 정복을 시도하게 된 배경이 된다.

원대(元代) 몽골의 지배 하에 있던 여진이 명초 대명 관계의 형성과 함께 몽골의 지배에서 벗어난 이후 명대 대부분의 시기에 몽골과 여진은 서로 분리되어 있었다. 그러나 명 말기에 이르러 몽골과 여진의 분리, 병존 관계에는 서서히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1619년 후금(後金)의 요동 공격과 함께 여진과 몽골 사이에는 대립과 연맹 등 직접적인 관계가 형성되었고, 1636년에 이르러서는 여진이 최종적으로 몽골을 병합하기에 이른다. 북아시아에서 몽골과 여진의 동, 서간 교체가 이루어진 것이다. 여진과 몽골의 역전이 급속하게 이루어졌던 1619~36년 사이에는 몽골의 쇠퇴와 여진의 흥기가 교차했다. 이 시기에 여진은 몽골의 대외경제를 병합하고 이를 이용해 정치 체제를 강화하였다. 반면에 몽골은 독자적인 대외 관계를 상실하고 정치적으로는 여진 한(han)의 지배에 예속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이후 여진과 몽골의 역사 전개에서 결정적인 작용을 한 것으로 평가 된다.

한편, 명은 요동 지역을 몽골과 여진을 분리 통제하기 위해 박아 놓은 쐐기와 같은 역할을 하는 곳으로 인식했다. 말하자면 버퍼 역할을 수행하는 ‘경계 지대’라고나 할까. 그런 이유로 요동 지역은 몽골과 여진이 동서쪽에서 공동으로 대명 경제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여진족은 요동으로 진출하여 이 쐐기를 뽑아버렸고 이로 인해 명, 몽골, 만주의 관계는 재편될 수밖에 없었다.

이 시기의 요동지역은 위소제(偉所制), 군둔(軍屯) 등의 제도가 실시되는 일종의 군정(軍政)지역이었다. 요동을 누가 차지하느냐에 따라 동북아의 패자(覇者)가 누가 될지 자명했다. 이 같은 때에 내부적 결속을 강화한 누르하치는 먼저 요동으로 진출하여 명이 박아 놓은 쐐기를 뽑아버린다. 그럼으로써 요동을 둘러싼 명, 몽골, 여진의 삼각관계는 급속히 재편되었다.

그렇다면 당시 여진족에게 중국은 무엇이었는가? 야만적인 영토를 누비는 야생마처럼 길들여지지 않은 그들에게 중국은 과연 무엇이었으며, 그들은 왜 중국을 인수 합병해야만 했을까?
ⓒ전경일, <글로벌 CEO 누르하치>

1583년 한 젊은이가 명나라 군사들에게 쫓기는 몸으로 백두산에 숨어든다. 얼마 후 그는 의협심이 가득 찬 여진 소년 7명과 의형제를 맺고 13명의 기갑병으로 처음으로 군사를 일으킨다. 비록 그에게는 아버지가 남긴 13벌의 갑옷 밖에 없었지만, 이는 13명의 창업 동지의 몸을 감싸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거병을 했어도 다른 동지들은 쉽게 모이지 않았다. 게다가 일족들도 외면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적극적으로 방해하는 자 마저 나타났다. 얼마 지나자 그 밑에는 30여명의 동지들과 수하의 100여명의 부하가 생겨난다.

사나이는 이제 최소한의 자원을 가지고 뜻을 펴고자 일어선다. 때마침 조선에 일어난 임진왜란은 동북아의 세력판도를 급변시켰고, 그는 이 틈을 타 사분오열되어 있던 자기 부족을 통합시켜 나간다. 그 후 사나이는 민주족 특유의 발 빠른 기마전술과 대륙의 웅혼한 기상을 품은 채, 신출귀몰하는 전술을 이용해 100만 명나라 대병을 대파한다. 이어 그의 아들은 창업을 더욱 공고히 하고, 마침내 손자 대에 이르러서는 만리장성을 뛰어넘어 중원에 청(靑)의 깃발을 힘차게 내리꽂는다. 그는 누구인가? 바로 청(淸)태조 누르하치다.

누르하치는 1559년 건주여진이라 불리는 여진의 한 부장(部將) 집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교챵가(覺昌安)라 하였고, 건주 우위(建州 右衛)의 추장 왕고(王杲)의 부하 무장(武將)이었으며, 아버지는 다끄시(塔克世), 어머니는 왕고의 딸로 이름은 에메치(厄墨氣)였다.

누르하치라는 이름은 여진어로는 ‘멧돼지 가죽’이라는 뜻이 있다. 멧돼지의 가죽은 질기다. 또 그것만큼 뜨거움과 차가움을 잘 이겨내는 물건도 없다. 누르하치란 이름은 천만가지의 어려움과 고통을 이겨내고 자기 부족을 이끌어 나가라는 염원에서 그의 조부가 지어 준 이름이다. 그래서 그런지 그는 짐승들이 활동하는 어두운 밤에 태어났다. 운명적으로 야생의 기질을 갖고 태어난 것이다.

누르하치의 아명은 ‘한자(罕子)’다. ‘귀하다’는 뜻이다. 그의 이름이 이렇게 지어진 것은 누르하치가 태어날 때 불이 났는데, 불 속에서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이 점이 나중에 뭔가 큰일을 할 사람이기 때문에 타죽지 않게 된 거라는 강한 믿음을 주었다. 불사신을 만들어 낸 믿음이었다. 우연히도 그의 이름이 뜻하는 ‘한(罕)’은 왕을 뜻하는 ‘칸’ (汗- 임금의 호령(號令)과 뜻이 같다. 결국 그는 이름처럼 칸이 되었다.

누르하치는 매우 총명했다.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깨우쳤다. 열 살이 되었을 때에는 이미 말을 타고 활을 쏠 줄 알았으며 검술과 봉술에도 능하였다. 귀신같은 활솜씨 때문에 신전수(神箭手)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그의 조부는 금나라를 건국하여 천하를 호령한 아구타(阿骨打)식 자식 교육법을 따랐다. 아구타는 자식을 가르치기 위해 사슴이나 돼지의 관절로 만들어진 인형인 ‘가추하’로 단련시켰다. 그 같은 것을 생각해 누르하치의 조부는 손자를 강하게 키우고자 했다. 아구타나 칭기스칸과 같은 인물로 단련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누르하치는 어렸을 때부터 자신이 본받아야 할 벤치마킹 대상이 있었고, 그들을 내면에 투영해 보면서 성장했다고 할 수 있다. 그만큼 생각이 커질 수 있는 조건이 형성된 것이다. 이 점이 그가 한 족속의 인재로 커서 중원의 주인공으로 발전해 나가는 과정을 짐작하게 만든다.

누르하치의 어린 시절은 참담했다. 그는 명나라 장군 이성량 집안의 노비였다. 어깨 너머로 한문을 배워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와『수호전(水滸傳)』을 즐겨 읽었다. 그가『삼국지연의』를 처음으로 듣게 된 것은 무순성의 장사 부호 동양성(冬養性)으로 부터였다. 동양성은 당시 제2의 제갈량이라 불렸던 사람으로 여진지리에 매우 밝았다. 이 무렵 누르하치는 ‘삼고초려’라는 고사도 처음으로 듣게 된다. 천하를 얻고자 하는 그에게 인재를 얻음에 있어 이 같은 교훈은 아마 머릿속 깊이 아로새겨졌을 것이다. 훗날 중국과 맞서 싸울 때 보여준 그의 지략은 천성적인 면도 있었지만, 이 두 소설에서 받은 영감이 컸으리라고 본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누르하치 자신은 지혜와 용기를 두루 갖춘 인물이었지만, 그에게는 총명하고 용감한 아들들과 조카가 있었다. 한 부족장의 지위는 결국 집안 내부의 튼튼한 뒷받침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누르하치가 거병 후 힘을 축적하고, 수많은 전투에서 승리한 데에는 수족과 같은 피붙이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희생이 뒤따랐다.

알다시피 광활한 중국 대륙은 한시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 천하를 재패하고자 수많은 영웅호걸이 북방에서 일어나 대의(大義)의 깃발을 내걸었으나 대부분 실패했다. 우리 겨레의 광개토대왕, 거란족의 야율아보기, 여진족의 아구타, 몽고족의 칭기스칸 정도만이 이름을 날렸을 뿐이다. 누르하치는 이러한 영웅들의 성공과 실패의 발자취를 가슴에 담고 일어나 중국을 지배한 민족의 영웅이 되었다. 사실 여진족은 서주(西周)시대부터 수(隋), 당(唐)을 거쳐 송(宋), 요(遼), 금(金), 원(元)에 이르기까지 흥망성쇠를 거듭했다. 민족으로써 고난과 즐거움을 반복한 역사였다. 여진족에게 고통과 쇠퇴의 시기는 대부분이 내부에 분열이 있어 서로를 죽이고 다툴 때였다. 누르하치 등장시기에도 여진은 건주부(建州部), 해서부(海西部), 동해부(東海部), 장백부(長白部) 등 네 지역으로 갈라져 있었다. 건주부는 혼하(渾河), 소자하(蘇子河), 동가강(佟佳江) 일대에 살고 있었고, 해서부는 송화강의 서쪽, 요하의 동쪽에 살고 있었고, 동해부는 영고탑(寧古塔)의 동쪽에 살고 있었으며, 장백부(長白部)는 백두산에 살고 있었다. 누르하치가 속한 건주삼위만 해도 혼하부(渾河部), 완안부(完顔部), 동고부(董鄂部), 저천부(哲陳部), 소극소호하부(蘇克蘇護河部)의 다섯 부로 나뉘어져 있었다. 여진족은 광할한 여진의 초원 지대에 펼쳐져 살고 있었으나, 그 무렵까지 통합되지 못했다. 통합되지 못했으므로, 힘을 한 방향으로 끌고 나갈 수 없었다. 방향 없는 힘은 동족간 상잔으로 이어졌다. 여기엔 한족(漢族)의 교묘한 이간책이 크게 한 몫 했다.


<여진족의 분포>

그러던 차에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에 동북아시아에 거대한 변화의 소용돌이가 치기 시작했다. 임진왜란이라는 동북아의 큰 혼란을 틈타 고구려의 옛 터전인 여진 허투알라에서 건주여진의 후예로, 누르하치가 나타났던 것이다. 누르하치는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면서 스스로 군사력을 키워 독자적인 국가의 성립을 선언하게 된다. 이를 위한 과정으로 그는 엄밀한 군사적 제도를 마련했다. 엄격한 군기를 앞세워 소수민족인 여진족을 통합하고, 마침내 그 여세로 중원으로 나아갔다.

25세에 독립하여, 68세로 숨을 거둘 때까지 약 40년에 걸친 누르하치의 생애는 실로 눈부신 것이었다. 정복을 위한 전쟁으로 날이 새고, 해가 저물었다. 그의 정복전은 언제나 CEO가 앞장서는 친정(親征)이었다. 스스로 앞서서 나아감으로써 백성들이 따르게 했다. 여기에 바로 창업 CEO다운 그의 면모가 드러난다. 누르하치, 그는 분명, 시대를 앞섰던 사람이며, 동시에 21세기형 경영을 실천한 미래의 개척자였다.

<아이신길로 누르하치(愛新覺羅 奴兒哈赤) 연표>

1559 가정(嘉靖) 38년: 누르하치 탄생

1577 만력(萬曆) 5년: 춘씨 가문에 데릴사위로 들어감

1583 만력 11년: 조부 교창가와 아버지 타쿠시가 구레성에서 전사, 누르하치 거병

1586 만력 14년: 원수 니칸 와이란 토멸

1587 만력 14년: 흥경(興京)에 구 노성(舊 老城) 축성

1593 만력 21년: 9국의 연합군 격파

1595 만력 23년: 명에 의해 용호장군(龍虎將軍)으로 봉해짐

1596 만력 24년: 조선 사진 신충일(申忠一)이 구로성 방문

1599 만력 27년: 에르데니와 가가이에게 명해 만주문자를 만들게 함(누르하치가 고안했다고도 함)

1603 만력 31년: 흥경 노성(老城)에 천도(허투알라성)

1613 만력 41년: 오랍부 정복

1615 만력 43년: 팔기(八旗)제도 완성

1616 천명(天命) 원년: 한(han: 王)에 오름

1618 천명 3년: 명에 7대한(七大恨) 천명. 무순성(撫順城) 공략

1619 천명 4년: 사르후 전투. 엽혁부를 멸함. 후금국 천명황제 인(印)을 사용

1621 천명 6년: 심양성(瀋陽城), 요양성(遼陽城) 공략

1625 천명 10년: 심양으로 천도(성경(盛京)이라 개칭)

1626 천명 11년: 영원성(寧遠城) 공격중 홍이포 파편을 맞고 부상당함. 심양성 외 23킬로미터

떨어진 애계보에서 사망

9월 1일: 태종(太宗) 홍타이지 즉위

ⓒ전경일, <글로벌 CEO 누르하치>

겨레의 숨결이 스며있는 광활한 만주는 생생한 역사의 현장이다. 불과 1천 여 년 전에는 ‘천하 경영’을 앞세운 광대한 제국, 고구려가 역사의 중심으로 우뚝 솟았고, 그 후로는 불운한 조국, 발해가 이 땅에서 명멸해 갔다.

빈 땅엔 풀씨가 날아들 듯, 그 후로 이 땅은 영원히 잊혀지는 듯 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오랜 시간 중국의 압제를 받아 온 여진족이 초원의 잡초처럼 무성하게 일어났다. 금(金)에 이어 두 번째로 세운 나라가 청(淸)이다. 여진족의 청은 서쪽으로는 부패할 대로 부패한 명(明)과 맞닿아 있었고, 동남쪽으로는 임진왜란으로 피폐된 조선 사이에 가로놓여 있었다. 청을 세운 이들 여진족은 강대국 틈바구니 숨어 보이지 않게 힘을 축적해 나갔다.

기나긴 굴욕의 세월 끝에 그들은 드디어 창업에 성공하게 된다. 초원의 바람만큼이나 거센 야생성과 쉼 없이 뻗어 나가는 정복을 통한 글로벌 정신으로 그들은 마침내 중국 대륙의 지배자로 군림하게 된다. 자신의 몸집보다 20여 배 내나 더 큰 강대국인 중국의 인수 합병전(M&A)에 성공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들 앞에는 강력한 카리스마와 리더십의 화신인 누르하치가 있었다.

그렇다면 이 같은 엄청난 일을 해낸 누르하치라는 사람은 대체 어떤 사람이었을까? 주지하다시피 단지 13명의 기병으로 일어나 중원의 지배자가 된 이 여진족의 작은 부족장은 결코 시대를 타고난 영웅이 아니었다. 오히려 대단히 감성적이고 여린 마음을 가진 보통 인간이었다. 하지만 그는 지나간 과거의 역사에서 교훈과 경험을 뽑아내 현실에 적용할 줄 알았던 탁월한 경영자였다. 그 점에서 난세를 이용할 줄 아는 전략가요, 정치가이며, 뛰어난 사업가였다. 냉혹한 현실 정치의 장에서 수많은 난국을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굴복하지 않고 항상 새로운 힘을 얻었다. 거침없는 야망, 웅대한 포부, 풍부한 지략과 미래에 대한 투철한 믿음은 그를 도운 많은 장수들과 묵묵히 따라준 군사들의 힘을 얻어 결국 중원을 평정하게 한다. 요즘 기업 용어로 얘기하자면 적대적 M&A를 통해 한족(漢族)의 명나라 경영층을 완전히 갈아 치워 버리게 되는 것이다.

미약한 세력과 척박한 지리 조건에도 불구하고 때를 기다리고(天時), 사람을 다스릴(人和) 줄 알았던 누르하치는 슬기로운 경영자였다. 그로인해 몇 안되는 민족의 중국 대역사가 완수되었던 것이다. 이 무렵, 누르하치가 대륙 정벌을 위해 활용한 다양한 전략 및 전술은 오늘날 역사 현장과 경영 일선에서 충분히 벤치마킹 대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돌이켜보면, 중원의 주인이 계속 바뀌어 온 중국 역사를 되짚어 보건대, 여진족의 청은 분명 가장 가까운 중국의 민족 통치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같은 차원에서 중국 대륙은 그 자체로 하나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주인을 계속 바뀌어 온 것이며, 그런 까닭에 단기필마로 창업해 웅장한 뜻을 이뤄낸 누르하치는 오늘날의 역사와 경영의 교훈으로써 유효한 것이다.

그 오랑캐식 경영의 진수, 누르하치에게서 글로벌 시대 무한경쟁에 살아 남기 위한 야생의 경영을 배워 봄은 어떤가?  만주족의 흥기는 강자의 틈바구니에서 창업-수성-도약에 성공하기까지의 국가경영의 진수를 접할 수 있을 것이다. 
ⓒ전경일, <글로벌 CEO 누르하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