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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방향에 대해 고민할 때 저는 이순신 장군의 산소를 찾습니다. 홀로 찾기도 하고, 가족들을 데리고 가기도 합니다. 어느 때에는 해가 들어차는 동안 그곳에서 놀기도 합니다. 책을 쓸 때에는 더 자주 갔었습니다.

장군은 누구인가? 장군을 생각할 때마다 두가지 생각이 떠오르곤 합니다. 모든 승패의 주역은 결국엔 그 사람의 수양과 수신의 됨됨이며, 이를 요즘말로 표현하자면, 리더십 문제라는 것을. 결국엔 리더 자신의 문제이지, 환경이나 조건의 문제는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두번째로는, 역사란 무엇인가? 하는 점입니다. 미일 강대국에 크나큰 영향을 받는 우리 한반도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강대국의 대(對)한반도 정책이 크게 우려되곤 합니다. 저는 늘 그런 걱정이 앞섭니다. 이런 무거운 마음은 양식 있는 글쟁이의 몫이라고만 볼 수는 없겠지요. 늘 나라 생각을 하게 됩니다. 

 


소주라도 한 잔 올려 놓고 절을 합니다. 저는 이순신을 닮고 싶습니다. 그와 같은 삶, 그의 삶의 철학. 제가 제일 좋아하는 장군의 삶의 철학은 제 자신의 철학이 되었습니다.


"대장부 태어나 쓰임을 받으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칠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밭을 갈아도 족하니라. 
권세에 아부해 한때의 영화를 누리려는 것은 나의 가장 부끄러워 하는 바다."

저는 장군과 달리 쓰임을 받지 못하면 글을 쓰며 평생 살겠지요.


저희 집 아이들입니다. 이 아이들은 아비의 이런 모습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요? 인생을 살며 이 아비처럼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장군을 새기게 될까요? 


장군의 묘를 어루만지며, 때로는 끌어안고 이 생각 저 생각 하곤 합니다. 나는 장군의 삶을 체화하고 싶습니다.
전경일 <이순신 경제전쟁에 승리하라>





 

“농촌 생활은 좀 어떠냐?”

“시골이라서 바뀔 것도 없지, 뭐. 후후...”

오랫동안 못 만난 대학친구를 동창 어머님 팔순 잔치에서 만났다. 근처 다방으로 몰려간 친구들은 서로의 근황을 묻느라 얘기에 여념 없었고, 나는 말없이 기대앉은 시골친구를 바라봤다. 그에 대한 나의 기억은 강렬하다. 작은 키에 다부진 팔뚝을 걷어 부치고 늘 저돌적인 모습으로 세상을 응시하는 이미지로 내게 남아 있다.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바라봤다. 대학을 떠난 지 이 십여 년만의 일이었고, 삶과의 싸움에 화염처럼 그을린 얼굴들이 거기에 놓여 있었다. 이마엔 영락없이 시간이 든 회초리 흔적이 선명하다. 삶이 남긴 상채기가 어딘들 가겠는가...

오랜 시간이 흐른 뒤의 만남이 가져오는 짧은 순간의 어색함이란... 겸연쩍어 비싯 웃음이 났다.

궁색한 시골 살림살이는 외모에 그대로 배어나왔지만, 그는 전혀 초라해 보이지 않았다. 너무나 당당했다. 겉으로만 그런지 궁금증이 일어 짐짓 그의 속이 얼마나 깊은지 꾹, 찔러 보았다.

“너는 아직도 꿈속에 살고 있는 건 아니냐? 꿈 밖에선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아냐?”

“꿈이라... 그러냐? 나는 다만 내 자신을 잃지 않고 살 뿐이다...”

시골에서 이장을 하며 살고 있다는 친구. 우리의 생활은 너무나 달랐고, 사는 방식도 멀찍이 떨어져 있었지만, 왠지 그의 삶이 한 수 위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 그런 생각이 들었을까...

그에게선 나와 달리 내가 잊어버린 꿈 하나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런 아마도 - 삶에 대한 뜨거움 같은 것일 게다. 우리는 몇 마디 화두를 던지다가, 늦은 시간 그는 시골로 내려가는 막차 시간에 맞춰 일어났다.

“언제든 사는 게 답답하거든 머리 한번 식히러 내려와라.”

나는 그러 마, 하고는 그를 보냈다. 그에게서 나는 무엇을 찾으려 했던 걸일까?

그는 세상의 기준으로는 뒤쳐져 있었고, 내가 회사에서 겪는 치열한 경쟁 따윈 알 턱도 없었다. 느려터진 시계를 꿰차고 있는 촌부의 이미지랄까... 반면, 나의 처지는 다르다. 세상의 속도계에 맞춰 째깍째깍 움직여야하고, 바삐 뛰어야 먹고 산다. 아이들을 학원에 보내야 하며, 등짝이 시리기만 할 노후를 준비해야 한다.

이유란, 핑계라고 할지라도 유리하게 하고 싶을 땐 수도 없이 떠오르는 법이다. 그와 마주한 자리에서 내가 그랬다. 그런데도 그가 훨씬 더 커 보였다. 여전히 처음 그대로 있는 친구, 초심을 간직한 친구, 누가 그를 미련한 곰탱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가지치기가 이루어진 가로수를 올려 보았다. 상금머리를 한 나무들은 겨울 동안엔 솟대처럼 서서 온 몸으로 바람을 맞아야만 한다. 내 삶이 저렇듯 을시년스러울 것 아닌가. 거두어 들였으나, 장례 쌀을 빌어다 먹은 듯한 찝찝함... 늘 돌려막기식 삶이 가져오는 다급함...

그간 나는 무엇을 해 왔는가, 무엇을 놓아 버렸는가, 무엇에 매달려 왔는가, 우리는 어떻게 다시 만나야 하는가? 나는 그가 보내 온 문자를 열어본다.

“꼭 오렴. 가끔은 천천히 가는 것도 중요하지. 경쟁 없는 곳도 살만하다...”

전경일 <아버지의 마음을 아는 사람은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중에서


40대의 숲은 다르다

40대는 거추장스러운 나이다. 이전 세대에 대한 부채감에서 결코 자유스럽지 못하다. 그만큼 한 세대를 만들기 위해 전세대가 기울인 노력은 지난하다. 웬만한 사람이라면, 소 팔고 논 팔아 학비를 대야 했던 농투사니 부모님을 기억할 것이다. 경우는 달라도 바로 그런 부모님을 둔 세대다. 산업 시대서 정보 시대로 넘어온 만큼 누릴 수 있는 사회적 풍요도 이전 세대나 이후 세대와 많이 다르다.

겪어온 역사적 환경도 남다르다. 이전 세대가 극단의 이념 대결 양상을 띤 반면, 40대는 참여적 입장을 띠면서도, 객관적 시각을 지니려고 부단히 노력한 세대다. 앞의 세대로부터는 철모르는 진보주의자로, 다음 세대로부터는 아직도 이념에 찌든 보수주의자로 인식되기에 십상이다.

40대는 불완전 시대를 사는 세대

더불어 정치적으로는 자주적이고 독립적인 역사를 만들고자 직, 간접적으로 노력한 세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결실은 여전히 미완인 채로 후대에 되물림 해줘야 하는 세대이기도 하다. 저 유명한 5.18이나, 직선제 쟁취, 6월 항쟁, 이어 전지구적 차원에서 진행된 동서간 이념 붕괴는 40대가 몸소 겪어온 역사적 흔적이다. 이전 세대로부터 얻었으나, 그것은 불완전하기만 했고, 다음 세대에 넘겨주려하나, 여전히 완성되지 못한 역사를 사는 세대. 그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40대다.

이런 세대가 지금 오십대, 나아가 60, 70대 노년기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거침없이 몰아치는 세월에 힌머리는 늘어가고 어느덧 나이는 중년의 백미인 오십줄을 향해 치닫는다. 부질없는게 나이다. 나이가 들어찰수록 40대는 유독 자기 삶을 만들고자 안간힘을 쓴다. 그런 모습이 안쓰럽기도 하다.

내 주변을 살펴보면, 새벽반 어학원에 등록하기도 하고, 헬스클럽에서 조깅을 하며 땀을 흘리는 동료들의 모습도 쉽게 보인다. 아니면 거래처 임직원을 데리고 야간업소 투어에 나서야 하는 중간 관리자로써 살고 있거나, 아니면 임원이 되어 몇 년 더 직장에 다닐 수 있을지, 곧 물러나야 할지 막막해 하는 처지에 놓여 있기도 하다.

그러다 보니 본인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내면으로 향한 도전은 세상을 향한 도전 만큼이나 40대가 맞닥뜨려야만 하는 현실이다. 좀 더 마음을 추스르고 살아가려면 말이다. 이것이 우리가 직면한 조건이다.

40대가 이루는 숲

물론 가끔은 대접받지 못하는 세대라는 생각에 분통을 터뜨리기도 한다. 그러다보니 한편으론 이전 세대들처럼 대접 받으며 사는 환경을 그리워하게 되기도 한다. 이전 세대와 같아지고 싶지는 않지만, 그들이 누렸던 지위를 누리고 싶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우리의 바램을 받아 줄 세대는 대한민국 어디에고 없다. 40대는 40대만의 군락을 이루는 숲과 같다. 저들끼리 몸을 부비며, 그 나름의 숲을 이루면서 산 하나는 거뜬히 지켜내야 하는 그런 세대 말이다.

당신도 40대로써 나와 같은 생각을 하게 될런지 모른다.

만일 당신이 다음 세대들로부터 대접을 받고자 한다면, 그런 생각은 하루 빨리 버려라. 쉽게 말해, 꿈 깨라. 더 이상 전(前)세대를 존경하는 의식(儀式)을 젊음이들은 베풀지 않을 것이다. 이제는 우리만의 세대를 구가하며, 나름의 문화와 추억과, 경험을 쌓으며 살아가야 한다.

다음 세대는 그 다음 세대를 리드하며 살아야 한다. 그들의 몫 중에 우리 지분은 없다. 만일 당신이 자신이 이전 세대에 한 것에 대한 보상 심리 때문에 다음 세대에 기대고자 한다면 그것만큼 우스꽝스러운 일은 없을 것이다. 우리 다음 세대는 그런 당신의 바램을 유산으로 물려 받지 않았다. 그들은 별개다.

40대는 별개

지금 당신이 가지고 있는 생각은 한국 역사상 천 여 년을 이어온 생각이다. 그러나 지금의 패러다임은 완전히 다르다. 다른 종에게 같은 생각을 불어 넣으려 하는 건, 넌센스다. 그렇지 않은가? 그렇다면 양 세대의 조화는 어디서 올까? 인정하는 것이다. 같을 수 없다는 것을, 오히려 같아져서는 안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지향해야할 참다운 참여 정신이다. 상대에 대해, 다음 세대에 대해, 무한히 배려하며, 자기 세대의 삶을 멋지게 살아가는 것, 그것이 우리가 지향해야할 삶이다.

정신적으로나, 경제적으로 그들에게 뭔가를 바라고, 기대고, 그것으로 그들을 불편하게 하지 말고, 우리는 우리만의 산에 머물며 그 산을 아름답게 수 놓아야 한다. 그들이 별개듯, 우리도 별개다. 우린, 우리가 다르다는 것 하나만으로, 우리 시대를 구가한 세대들 아닌가? 이것이 40대인 당신이 치러 내야할 세대의 숙제다. 다음 세대가 조금이라도 나아지려면. 그러려면 우리는 뭔가 다른 삶의 가치를 행동에 옮겨 보아야 한다.
전경일. <마흔으로 산다는 것>

 


 

남왜공정 | Posted by 전경일 2012/01/18 18:18

[남왜공정] 왜(倭)의 재침은 없는가?

머리말_왜(倭)의 재침은 없는가? 

미쓰비시의 탄광이 있었던 규슈 나가사키 인근 하시마(端島).  이곳에서 식민지 시기 100여명의 한국인 징용자들이
혹사당해 사망했다.(출처: 서울경제 DB) 나의 부친이 징용을 간 사세오마지 대지자 탄광을 나는 아직도 가보지 못했다. 19 세 나이의 아버지의 청춘을 이곳에 가면 만날 수 있을까?


열아 홉 살 나이에 징용에 끌려가 일본 사세호현 사세오마찌 대지자 탄광에서 해방을 맞이했다. 학교를 다니던 어린 나이, 함춘 나루터에 낚시 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면 노무동원 담당자 가와무라를 만난 것이 화근이었다. 그가 “너 몇 살이야?”고 묻고는 횡 하니 자전거를 타고 사라져 버려 여간 꺼림직스럽지 않았는데, 3일 후 불쑥 징용장이 나왔다.

징용에 끌려가던 날 면사무소 앞마당에 모인 이들은 가족들과 뒤엉키며 울음바다를 이루었다. 아버지는 노무담당자의 점검을 받고 신사참배와 황국신민선서 제창을 강요받은 다음 노무담당자와 일본인 순사의 인솔 하에 콩나물시루 같은 트럭에 올라탔다. 아버지는 살아 생전 기억을 더듬어 그때의 정황을 기록해 두셨는데 일기에서 이렇게 묘사했다.

“가족과 헤어질 때 가족들의 울음과 아무개야 아무개야 하는 억머구리 끓듯 하는 울부짖음을 뒤로하며 차는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트럭에 탄 그들 중 훌쩍훌쩍 흐느끼는 소리가 곳곳에서 일고 있었다. 고향을 등 뒤로하고 춘천에 도착하여 기차 편으로 서울에 도착하니 일본인 현지 노무감독이 인원을 점검해 우리 일행을 인수했다. 먼동이 틀 무렵 부산에 도착하여 오후 4시경까지 감금상태로 엄중 감시 하에 갇혀 있다가 5시경 관부연락선에 타니 각처에서 동원된 사람들이 수 천 명을 헤아릴 정도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그들 모두 어디로 끌려가는지 제각기 인솔자가 있었으며 부두 곳곳에는 일본 현병이 서슬 싯퍼렇케 눈을 번쩍이고 있었다. 배는 잠수함공격이나 수중지뢰를 피하기 위해 갈지(之)자로 운항했으며 무한정 넓은 바다를 향해 앞으로 계속 나아갔다. 새벽 3시에 일본 하카타(博多)항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기차를 타고 후쿠오카(福岡)라는 도시에 도착하여 기차를 바꿔 타고 오전 10시경 목적지인 사세호현 사세오마찌 대지자 탄광촌에 도착하였다. 이곳은 읍내에서 약 10리 정도 떨어진 해변가 탄광 촌락으로 다음날부터 우리들은 3일간 훈련을 받고 바다 속 30리 막장에 들어가 보니 이곳이 바로 강제노동 노역소로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저녁 식사를 하는데 발랑 벌어진 접시에다 바다풀을 섞은 밥이나 다시마국 등을 주는데 그 양이 너무나도 적었다. 밤일을 하고 한숨 자고는 오후 바닷가 방초 둑에 앉아 저 멀리 끝도 보이지 않는 수평선을 바라보며 저 건너 바다 끝에는 우리 조선 땅 일 터인데 하는 생각을 하면서 언제 전쟁이 끝나야 저 바다를 건너 그리운 부모형제 집으로 갈지 한없이 수평선을 바라보며 마음을 달래보기 여러 번이었다.”

우리 가족 중 징용을 끌려갔다가 구사일생으로 돌아오신 분은 부친만이 아니었다. 아버지보다 앞서 조부께서는 첫 징용 대상자로 남양군도에 끌려갔다가 운 좋게 살아 오셨다. 생전에 아버지는 그 남양군도가 지금의 사이판이라고 말씀 하시곤 했는데, 나는 휴가 차 가족들을 데리고 괌에 놀러갔을 때 홀로 먼 바다를 바라보며 언젠가는 조부가 징용을 갔던 그 섬을 꼭 방문해 보리라고 작심하곤 했다.

가족사를 듣고 자란 나는 어렸을 때에는 부친의 그런 이야기가 그저 먼 나라의 이야기로만 들렸다. 그러다 학교를 다니며 한국사의 본령을 알게 되고, 일본의 침략사와 한국 근현대사의 어두움이 역사의 저 장막 뒤에서만 전개된 과거사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현재 벌어지는 숨 가쁜 역사가 거기 있었다. 밥을 먹어 먹이는 식구가 생겨나고, 삶의 바쁨이 내 등 뒤를 밀게 하면서 나는 그 생각을 까마득하게 잊어버렸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일기가 생각난 것은 아마 내가 한․일관계사에 관심을 갖고 연구해 오던 3, 4년경 지났을 무렵이었다. 아버지 삶에 깊게 드리워진 그 ‘잃어버린 청춘’에 크게 공감한 것은 부자지간의 정 때문은 아니었다.

아버지가 격은 악성 종근(種根)과 같은 역사의 뿌리가 지금 일본의 극우주의와 맞닿아 있다는 것을 발견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우리 역사의 모든 면에 지워지지 않는 흔적으로, 뇌리에 박힌 고난사로 남아 있는 고통의 진앙지가 어딘지 나는 분명하게 알게 되었다. 나는 그 뿌리의 근원을 찾아 더욱 세게 붙들고 끝까지 들어가 보았다. 그러자 오늘날 일본의 침략성이 일제의 군국주의에 기초하고, 한․일합방과 임진왜란, 그리고 근 1620년간 이어진 900여회에 달하는 한반도 침구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순서만 시간순으로 바꿔 돌리면 역사이자 일본의 한반도 침략사가 되었다. 나는 그 뿌리에 침략의 원흉이자, 악의 근원인 ‘왜구’가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오랜 시간 한․일관계사를 관통하는 ‘왜구 침구’의 약탈·살인·피로(被虜)의 연결고리가 끝내 일제 치하 우리 가족사에까지 이어져 조부와 부친의 강제징용으로까지 나타났던 것이다. 내가 한국사의 깊은 굴곡을 헤쳐 나가며, 역사는 되풀이 될 수 있다는 절박함을 가지게 된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보면 아버지가 징용을 끌려간 후쿠오까 일대도 오랜 시간 왜구의 활동 거점인 일본의 서남해 지역이었다. 또한 한․일 관계사의 창구 역할과 한반도 침략의 최선전으로 일본 지휘본부가 있던 다자이후(太宰府) 인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왜구와 일본 침구를 통해 한․일관계사이자, 일본의 채침을 우려하는 나의 연구는 이로써 보다 체감 있게 다가왔다. 민족의 성원으로 일본의 독도 침구, 역사교과서 왜곡 사건 등 우리 민족의 생존을 위해 긴요하고 절박한 역사 연구와 일본의 재침에 대비한 예비서(豫備書)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이 때문이다.

이 한 권의 책을 묶어 내는데, 근 7년간 자료를 찾아 뛰어 다녔고, 역사를 통찰하며 스스로를 반성하는 시간을 가져야만 했다. 과거사가 과거의 사건만이 아닌, 현재와 미래사의 골간을 이룬다는 점에서 뼈저린 각성은 글을 쓰는 동안 한시도 멈추지 않고 내게 엄습했다. 마치 일제치하 운명적으로 강제징용에 끌려갔다 오신 나의 조부와 부친의 근영(謹影)이 이 책을 쓰는 동안 한시도 내 곁을 떠난 적 없었듯이 말이다. 돌이켜 보면, 그 분들은 민초로서 망국(亡國)의 설움을 알고 징용되는 굴곡된 역사의 삶을 대가없이 살다 가셨다. 나는 혈육의 고통을 민족사의 한 줄기에서 읽게 된다.

이 책은 우리 민족의 생존을 끊임없이 위협해 온 ‘왜구’의 존재를 앎으로써 우리 민족의 존립 근거를 보다 튼튼히 하고, 적을 앎으로써 나를 알고자 하는 목적에서 쓰여 졌다. 역사를 아는 민족만이 생존과 웅비의 조건을 마련할 수 있다. 역사를 모르고서 한낱 작은 이해에 급급하다면 생존을 위한 조건은 물론 그 기반조차 임진왜란 때나 구한말처럼 송두리째 날아갈 수 있다.

일본의 재침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는 이때 이 책이 한반도를 살아가는 우리 민족 성원에게 민족의 존립과 영속성의 전제조건을 새롭게 톱아 보는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자아를 아는 통찰력은 한․일관계의 새로운 지평을 열고 우리의 생존을 더욱 강화시켜 줄 것으로 믿는다. 오랜 역사적 경험으로 일본의 숫한 침구를 받아왔지만 끝내 버티고 이겨온 승리의 역사를 통해 더 큰 차원의 힘을 얻어야 한다. 이것이 보다 깊이 있는 역사 성찰의 자세일 것이다.

왜구에 대한 연구가 미미한 가운데서도 왜구의 실체를 파악하고 이를 민족사의 교훈으로 삼고자 노력해 온 학자 제위께 감사의 뜻을 전한다. 그 분들이 앞서 밝힌 등촉(燈燭)은 이 책의 집필에 크나큰 영감을 주었고, 곳곳에 훌륭한 주석으로 인용되었음을 밝혀 둔다. 이 책 ⟪남왜공정: 일본 신(新)왜구의 한반도 재침 음모⟫는 현시대 한중일 각국이 공통적으로 경험한 바이자, 지금도 겪고 있는 첨예한 문제를 구체적 사료에 근거해 풀어내고 있다. 나아가 동아시아사 및 세계사에 적지 않은 영향과 방향타가 되어 줄 것으로 믿는다. 또한 우리의 현대사는 물론 동아시아 미래사의 방향 설정에도 도움을 줄 안다. 물론 대왜(對倭)대응 면에서 발화력이 높을 것으로 판단한다. 이 책을 통해 이 민족이 냉철한 이성과 각성을 높이고 실천적 노력을 견실하게 이루어내길 바란다.

끝으로 이 책을 ‘왜구’에 의해 찢기고 갈린 우리 국토와 한국사, 여전히 분단 상황을 살아가는 우리 민족에게 헌정(獻呈)하고자 한다. 응당 우리 ‘국토의 막내’ 독도에게 보내는 영토 수호의 굳건한 메시지라는 점도 아울러 밝히고 싶다. 고백하건대, 오늘 나의 이 같은 헌정은 이 민족에 대한 ‘징비(懲毖)’의 차원이 크다.


2011년 12월

전경일


우리가 아는 것의 대부분은 자연에 있다. 최후의 결정적이고, 통찰력이 번뜩이는 영감을 얻기 위해서는 자연을 찾아야 한다. 창조적 마인드를 얻기 위해서도 때로는 밀폐된 사무실을 벗어나야 한다. 사물에 대한 낯설음, 달리보기는 여기서부터 출발한다. 경영의 본질을 알게 하기 위해서도 자연으로 나가야 한다. 텃밭에 무성생식하며 뻗어 나가는 잡초의 근종을 관찰하거나, 거미가 허공에 실을 늘어뜨리며 팽팽하게 방사형의 네트워크를 짜는 광경을 관찰해야만 한다. 아프리카 흰개미들이 어떻게 완벽한 통풍과 에어컨디셔닝의 기능이 구비된 건축물을 만드는지를 눈여겨보아야 한다. 칠게들은 어떻게 포식자가 나타나면 순간적으로 교신을 하며 재빠르게 몸을 감추는지를 알아야 하고, 말(馬)은 어떻게 피로를 줄이는 젖산 분해효소를 생산해 냄으로써 아무리 뛰어도 숨이 가프지 않은지를 알아야 한다. 이런 연구들은 향후 21세기 새로운 산업으로 각광받을 분야들이다.

1372년 우리나라에서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금속활자를 이용해《직지심경(直指心經)》이 간행된 이후, 서양에서는 1450년 쿠텐베르그가 금속활자를 개발한 이후 찾아온 1차 지식 빅뱅이 찾아왔다. 이후, 다시 한참 시간이 지나 20세기 말 들어서 인터넷의 확산으로 2차 빅뱅이 찾아온 뒤로 우리는 지식에 대해 가장 큰 차별적 관점을 가지게 되었다. 본격적으로 지식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이 터져 나오면서 그간 갈라섰던 학문 영역들이 서로 만나는 통섭의 차원을 열어 가고 있다. 이는 인류사의 제3차 지식 빅뱅으로 다가온다. 이제 모든 산업은 과거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지식세상을 열어젖힐 게 분명하다. 줄기세포라든가, 거미줄에서 뽑아내는 강철보다 몇 십 배나 강한 섬유라든가 하는 것들은 이미 우리를 둘러싸며 새로운 창조혁명 시대의 발견을 예고하고 있다.

상상력이 과학과 만나면 새로운 산업을 탄생시키고, 문사철과 만나면 또 다른 멋진 이야기가 나온다. 세종시대는 어떻게 해서 천문학은 물론 활자, 인쇄, 도량형, 화약, 농업, 의약, 음악 분야 등 과학기술의 모든 분야가 폭발적인 시너지를 내며 대융성 할 수 있었는지 알아야 한다. 다산(茶山)은 어떻게 십여 명의 제자들과 함께 전학문적 연구의 궤를 꿴 500여권의 방대한 저술을 남길 수 있었을까? 홍대용은 어떻게 지구가 자전하여 낮과 밤이 바뀐다는 지전설을 통찰하게 되었을까? 최한기는 어떻게 천문, 지리, 농학, 의학, 수학 등 학문 전반에 걸쳐 약 1000 여 권의 저서를 남기게 되었으며, 음파, 망원경, 온도계, 습도계를 설명하고 빛의 굴절 원리를 알게 되었을까? 이런 모든 것은 ‘간학(間學)’을 통해 설명되어 질 수 있을 것이다.

서양에서 다 빈치는 어떻게 해서 미술뿐만 아니라, 해부학, 물리학, 건축학, 수학, 지질학, 식물학, 심지어는 도시계획, 디자인, 요리에 이르기까지 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모든 재능을 지닌 천재가 되었으며, 한 사람이 이룬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폭넓은 분야에서 뛰어난 성과를 발현해 낼 수 있었을까? 이 모든 것의 해답이 바로 상상의 힘에 있다. 상상은 위대하다. 그것은 우리가 창조하는 인간임을 뚜렷이 드러내는 증거이다. 상상은 어느 하나의 전공을 뛰어 넘어 타학문에 대한 애정에서 싹튼다. 홀연히 사무실을 벗어나 대자연에서 자기 존재를 알고자 할 때 영감처럼 떠오른다. 이제 인류 역사상 최대의 지식 빅뱅을 맞아 나홀로 가는 학문은 고전이 되어 버렸다. 대신, 모든 것을 엮는 초영역 학문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그러기에 가장 창조적인 상상력으로 미래를 준비하는 통섭형 사고는 경영자들에게 가장 절실한 대목이다. 우리는 늘 과정과 현재에 머물러 미래에 대해 자유로운 상상을 할 겨를이 없었다. 시간에 쫓기며 살지만 얻은 것은 응용 수준에 불과하다. 이제 하던 일을 놓고 자연을 찾을 때, 마침내 영혼이 샘물처럼 들어차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대자연의 감미로운 바람에서 자연풍이 항시 일정하게 불며 악기를 연주하는 건축구조물을 생각하게 될 것이고, 푸른 이파리를 보면서 늘 광합성이 일어나는 건축물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떨어진 비둘기의 깃털을 살펴봄으로써 그 아름답고 다양한 패턴이 빛을 반사함으로써 색깔을 만들어 내는 것이라는 발견을 신개념의 컬러 의료(衣料) 개발에 활용하게 될 것이다. 또한 바람에 날린 민들레 홀씨가 바위틈에 와 안착하는 것을 보면서 우주적 질서와 생명을 지탱시키는 지식의 안착을 목도하게 되기도 할 것이다.

비록 척박한 환경에서 경영을 얘기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손 치더라도 우리는 대자연에서 심신의 위안을 얻는 것은 물론, 차별화된 생각을 얻는다. 자연은 이처럼 경영자들에게 무한한 상상력을 제공해 주는 우주로 다가온다. 우주적 상상력을 통해 우리는 이전에는 감히 넘볼 수 없었던 경계를 허문 사고를 하게 되고, 이를 사무실에 들고 돌아가 실험해 볼 수 있다. 자연을 헤아리는 것은 보다 인간적인 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본질이 자연의 일부로 속해 있는 것을 알고 우리는 거기서 무한한 상상력과 영감을 얻는다. 숲과 계곡의 기능을 통해 친환경적인 상품의 미래를 상상해 볼 수도 있다. 교감이 필요한 시대, 자연을 찾는 경영자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스승을 찾고 싶거든 멘토를 찾고, 스승의 스승을 찾고 싶거든 고전의 위대한 철인들을 찾고, 그 스승의 스승을 찾고 싶거든 자연을 찾아라.”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 윌리엄 워즈워드가 말한 바처럼 “우리 영혼은 불멸의 바다 풍경을 품고 있다.”

저 창조의 바다에서 우리는 새로움을 잉태하기 위해 자아에 대한 궁극적인 물음을 던져야 한다.#

전경일, <초영역인재>의 저자.



만약 인식의 문이 제거된다면,
모든 것들은 무한하게 있는 그대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윌리엄 브레이크, <천국과 지옥의 결혼(Marriage of Heaven and Hel)l>)

세계적인 혁신가 스티브 잡스의 죽음 앞에 전세계 사람들은 그에 대한 추모를 ‘I sad...'라는 말로 함축적으로 드러냈다. 잡스가 타개한지 3개월여. 잡스가 남긴 것이 무엇인지 전 세계 거의 모든 언론과 기업들은 열광적으로 특집을 내보내며 잡스를 다뤘다. 그런데 정작 수많은 잡스 관련 평들이 쏟아져 나왔지만, 잡스의 혁신이 어디에 있는지 그 본령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잡스를 그토록 혁신의 대명사로 만들어 놓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얼마 전 뉴욕의 한 지인에게 잡스 타계 이후 애플 매장에서의 변화에 대해 전해 들을 수 있었다. 그런데 놀라운 점은 매장을 찾는 사람들의 ‘인식’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아이폰 시리즈를 구입하는 많은 고객들의 입에서 “나는 잡스의 ‘유품’을 산다”는 말이 나온다는 것이다. 이는 잡스가 왜 초발 혁신가였는지를 잘 보여준다. 세상에 어떤 비즈니스가 상품이 없어서 셔터문을 내리며 고객을 밤새도록 기다리게 하는가? 전통적인 마케팅 이론에 의하면, 이는 고객 불만의 대표적인 예에 해당될 것이다. 그러나 이제 고객들은 잡스와 애플이 대량생산해 낸 모바일 기기를 손에 넣으며 상품을 ‘유품’의 수준으로까지 격상시키고 있다. 그저 모바일 기기일 뿐인 상품이 유품이 되고, 유물이 되며, 아트(art)가 되는 이런 상황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여기에 바로 잡스 혁신의 숨은 힘이 있다.

잡스는 살아서 16세기 영국의 시인인 윌리엄 브레이크(William Blake)에 푹 매료되어 있었다. 가히 잡스의 영적 멘토라 해도 과언이 아닐 브레이크의 힘은 무엇이었길레 이 세기의 혁신가의 영혼을 송두리째 빨아들을 수 있었던 것일까? 이 두 사람은 어떤 접점에서 서로 만나는 것일까?

브레이크는 신비주의(Mysticism)시인이다. 그는 우리 육체의 다섯 가지 감각기관의 작용을 완전히 정지시킴으로써 감각으로는 도저히 체험할 수 없는 신령한 영혼세계의 문을 열어젖히는 시작(詩作) 활동을 했다. 그에 의하면, 하늘을 나는 종달새는 새가 아니라, 신이 보낸 전령이며, 자신은 자기가 시를 쓰는 것이 아니라, 신의 음성을 듣고 대필할 분이라는 입장을 취했다. 브레이크에게 있어서 이 신비적인 감응은 그의 시 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 그에게 있어 예술은 혼신의 열정을 바쳐 추구하는 절대대상이며, 이성적 사고능력이 아닌 직관적인 통합 비전으로 작용한다. 그것을 통해 신(God)이든, 위대한 영혼(Great Soul)으로 불리는 이름이든, 무한(the Infinite)과 만나게 된다. 따라서 창조적 상상력을 말살해 버리는 이성(理性)을 사악함 혹은 죄악이라고 하면서, 그는 이성과 결별하고 자신이 이뤄야 할 문학적 과업이 창조에 있다고 주장한다. 브레이크에게 있어 자기 작품의 진짜 저자는 천국에 있으며, 자기는 그 영적 계시에 대한 비서 역할밖에 하지 않는다. 그는 예술 창작 활동에 있어서도 초능력 현상으로 영계(靈界)의 직접적인 도움을 얻었고, 그 방법 역시 ‘브레이큰 웨이(Blaken way)’라는 특이한 방법을 사용했다. 이처럼 그의 마음속에 형성된 추상적인 영상은 타고난 비상한 상상력을 통하여 그의 시야에서 구체적인 형상으로 시각화되어 나타난다. 잡스는 바로 브레이크와 자신을 통일시 하며 여기에 빠져든 것이다.

잡스는 감히 누구도 생각해 내지 못했을 때, 애플의 매켄토시 컴퓨터에 처음으로 아이콘을 입혀 딱딱한 정보기술에 생명을 불어넣었고, 쫓겨난 애플에서 새로운 비전을 지닌 채, 죽음으로부터 다시 올라왔었다. 훗날 픽사(Pixar)를 인수하고 <벅스 라이프>를 만들게 된 것도 그가 보았던 어떤 비전이 눈앞에 어른거렸을 것이다. 현재의 혁신을 이루기 위해 미래로 가서 현실의 ‘있어야 할 바로 그 모습’을 그리며 새로운 혁신 기기들을 만들어 낸 것이다. 물론 잡스는 거기다가 새로운 비전(미래를 끌어 오는 것)을 송두리 채 들이 부었다. 거기다가 사업적 통찰력으로 시장 추이를 날카롭게 응시하다가 자본, 기술, 마케팅, 디자인, 음악 유통 판도 등 필요한 각각의 퍼즐을 정확하게 꿰맞춘 다음 시장에 뛰어들었다. 그가 전혀 다른 분야와 시대에 살다간 170여전의 시인에 빠져드는 이유는 이런 놀라운 상상력의 세계를 시인이 열어젖혔기 때문이다. 스티브 잡스는 죽기 전 윌리엄 브레이크의 콜렉션을 팔았는데, 그때 나는 그가 인생을 정리하고 있다는 것을 이미 알았다. 아마 미래의 역사가들은 스티브 잡스가 픽사와 아이폰의 영감을 얻은 이유를 밝혀내기 위해 브레이크를 탐색해야 할지 모른다.

오늘날 우리 기업이나 개개인에게 필요한 것은 강한 근육질의 몸매(공장)가 아니다. 상상력이다. 그 상상력이 세상을 통찰한다. 미래의 모습을 강한 압축적 이미지로 드러내는 시인에게서 찾고자 한다면, 아마 기업은 새로운 차원의 변신을 꾀할 수 있을 것이다. 잡스는 브레이크와 닿아 있지만, 우리 경영자들이나 직장인들이 시집을 들고 있는 모습은 좀처럼 볼 수 없다. 출근길, 휴대폰 속의 어플리케이션 속이나 푹 빠져드는 그들에게서 원천적 영감이 떠오르길 바랄 순 없다. 한국 시인들의 한 달 평균 수입이 25만원 남짓 된다는 말을 듣고, 상상력의 도래를 인식하지 못하는 우리의 수준으로는 잡스가 이뤄낸 것과 같은 차원 다른 세계를 만들어 내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업 혁신의 수준은 그 사회의 문화적 수준과 비례한다. 오늘 우리 수준을 업 그래이드 하기 위해 우리는 낮선 시인들의 세계로 초대받는 ‘초발 혁신의 세계’로 뛰어 들어봄은 어떤가?#
전경일, <초영역인재>의 저자.

격랑은 애써 외면한다고 피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모진 세파는 바로 부딪쳐야 살 방도를 찾게 된다. 헌종 연간(1834~1849년)은 조선이 후기로 치달을수록 내․외부적인 도전에 강하게 부딪치는 시기였다. 헌종은 효명세자(익종)과 신정왕후 조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출생해 8세의 어린 나이에 국왕의 자리에 올랐다. 소년왕의 경우 으레 등장하는 외척의 발호와 부정부패는 헌종 대에도 마찬가지였다. 헌종을 만나본다.

-왕께서는 어린 나이에 즉위해 역시 대비로부터 수렴청정을 받게 되었지요? 그 만큼 왕권이 휘둘렸다는 얘기가 되는데, 어떠셨는지요?

“내 어린 나이에 국왕에 올라 순조의 비인 순원왕후 김씨의 청정을 받게 되었지. 11세가 되었을 때에는 김조근의 딸을 왕비로 받아들이며 안동 김씨의 세도 시대가 열렸고.”

-그러다 왕께서 친정을 시작하자, 이번에는 생모 신정황후(조대비)의 외가가 국정을 쥐락펴락했었지요?

“그렇다네. 외조부 조만영이 어영대장과 훈련대장 등 군권을 장악하면서 외조부의 동생 조인영과 조카 조병헌, 아들 조병구 등을 요직에 앉혀 국정을 장악했지.”

-사정을 따져보면, 안동 김씨에게서 풍양 조씨에게로 권력이 넘어온 거네요. 특별히 달라진 게 있었나요?

“달라지긴... 양 씨 모두 자신의 가문의 탐욕에만 눈이 멀었지. 민생이든 사회 문제에는 조금도 관심을 갖지 않았네.”

-국왕으로서 무력함을 느끼셨겠군요. 현실을 타개하고자 노력한 부분은 무엇이었나요?

“나는, 글쎄 힘을 펼 수 없었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젊음을 아리따운 궁녀들을 통해 발산하는 것 말고는...”

-이양선이 출몰하고, 나라의 국태가 위태로운데 그에 대한 경각심이 생기지는 않았고요?

“삼정이 문란했고, 영국과 프랑스의 이양선이 출몰해 민심이 극도로 흩어지고 있었지. 게다가 18세기에 들어온 천주교가 평민층에 퍼지며 조정을 위협했고.”

-양이(洋夷)들을 상대하기 위한 대책도 전무하다시피 한 것 같던데요?

“전무했지. 기껏 중국 북경에 가서 서양에 대해 귀동냥하는 게 다였고, 대책이라는 게 고작 유생들의 입에서 나오는 척화뿐이었지. 유림들은 ‘성인의 도는 천하에 대적할 자가 없으니, 인의로써 방패와 창을 삼고 충신으로써 갑옷과 투구를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게 다였지. 그걸로 어찌 흉악무도한 양이들을 막을 수 있었겠나?

-유생들의 말에 대해 조정의 반응도 별반 다를 바 없었던 것으로 아는데요. 일테면, 유림에서 얘기하는 척사에 대해서도 ‘만약 사악한 무리들이 들으면 족히 마음을 바꾸고 자취를 감출 것이다’라는 식으로 반응한 게 조정의 의견 아니었나요?

“부끄럽네만, 그게 당시 조선의 세계 인식 수준이었네.”

-그 결과 천주교에 대한 박해를 더욱 강화한 것이고요. 1839년에 일어난 ‘기해박해’, 1846년에 일어난 ‘병오박해’가 다 그런 것이지요. 게다가 이런 천주교 박해는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간 세력 다툼의 명분으로 쓰여 풍양 조씨는 안동 김씨를 공격하기 위한 수단으로 천주교를 더욱 탄압하게 된 것이고요.

“그렇다네. 내 재위 기간이 되면 천주교는 이제 평민들에게 급속도로 종교로 수용되어 1865년에는 2만 3,000여명을 처형하기도 했지.”

-그야말로 대탄압이자, 학살이었는데요. 천주교가 그렇게도 두려웠나요?

“조정이 새로운 가치를 제시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신주를 불태우고, 기존 질서를 부정하는 것은 국가 존립의 문제였네. 백성들에게 천주교의 사랑과 박애 논리는 가렴주구가 판치는 세상에 단비와 같았을 것이지만, 조선 사회의 모순을 더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결과를 가져왔지. 게다가 황사영의 백서 사건 때 이들은 양이(洋夷)를 불러들이려는 시도까지도 했고.”

-그건 종교 탄압이 가져온 자구책 아니었나요? 오히려 천주교를 용인하였더라면 종교보다는 문물 쪽으로 서구와 접할 기회가 더 많았을지 모르지요. 그런 차원에서 실학은 왜 잦아들었는지 의아한데요.

노론 벽파가 집권한 이후에는, 남인이나 북학파 계열의 실학자들은 조정에서 쫒겨났고, 또 죽음을 맞이했지. 실학조차 현실 참여적이라기보다는 그저 고증학이나 금석문 같은 학풍으로 바뀌었고. 조정 내에 체제 개혁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네. 청나라로부터 <해국도지>와 <영환지략>같은 책자가 소개되어 왔어도 이를 현실 정치에 적용할만한 사람이 없었네. 작은 기득권에 매몰돼 나와 다른 의견을 지닌 자들을 제거한 결과는 참담하였네.

18세기 들어 서구 열강의 동진(東進)으로 세계사적 변화가 목전에 당도했지만, 내부 정치와 당파로 얼룩진 조선은 급기야 영국이 아편전쟁을 통해 중국을 송두리째 집어 삼키는 상황조차 외면하게 된다. 내부 혁신의 노력도 없었거니와 혁신 주체 세력들이 다 정치적으로 제거된 마당에 헌종 재임기는 구한말의 위태로운 정국을 예견해 주고 있었다. 오늘날 기업에서 주어진 기득권보다 더 큰 도전 자세로 변화를 맞이해야 하는 것도 이 같은 역사가 주는 교훈 아닐까?

전경일. <이순신, 경제전쟁에 승리하라>의 저자. 인문경영연구소장.

 


8세의 어린 나이에 아비의 죽음을 보아야만 했던 아들. 그 아들은 아비를 죽인 할아비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으며, “왕위에 오른 뒤에도 장헌세자(사도세자)의 죽음과 관련된 일에는 절대 관여하지 말라”는 엄명을 받는다. 어려서부터 정치의 비정함을 몸소 깨달았던 아들, 아비의 묘소인 영우원을 참배할 때마다 옷소매를 적실만큼 울어댔던 아들, 아비의 죽음과 같아서는 안되는 것을 알면서도 끝내 ‘독살설’의 주인공이 되고만 아들. 조선의 제22대 국왕, 개혁군주 정조를 만나본다.

-왕을 이야기할 때 ‘삼불필지설(三不必知設)’을 먼저 꺼낼 수밖에 없는데요. 세손 무렵일 때 정국은 어땠나요?

“왕이 되기 전, 나는 한낱 바람 앞의 촛불에 불과했소. 아비를 죽인 노론계의 홍인한이 ”동궁은 노론이나 소론을 알 필요가 없고, 이조판서나 병조판서를 알 필요도 없다. 더욱이 조정의 일까지도 알 필요가 없다”며 나의 지위를 부정했을 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못들은 척 하고 학문에만 전념하는 것이었소. 잠재적 정적인 나를 제거하려 한 것이지.”

-견디기 어려운 시절이었겠는데요?

“견디기 어려웠소. 허나 당시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지. 할아버지 영조가 그나마 아들을 죽인 죄책감에서에서였는지 ‘삼불필지설’을 놓고 벌인 다툼에서 나의 손을 들어준 것만으로도 큰 다행이었소.”

-대리청정을 한지 두 달 만에 영조가 승하하고 왕이 되셨는데요, 맨 처음 하고자 한 것은 무엇이었나요?

“바로 잡는 것이었소. 이 나라 조선이 바로 서기 위해서는 우선 내 아비를 죽음으로 몰아간 탕평당 인물들을 제거하는 것이었소. 개인적 보복이 아니라, 나라를 바로 세우고자 한 것이지. 홍인한, 홍봉한, 정후겸 등과 숙의 문씨, 문성국, 정순왕후 김씨 일가에 철퇴를 내린 것은 정치 행위였소.”

-그 결과 집권초기 안정되었나요?

“위험은 늘 있었지. 탕평탕 핵심인물인 홍계희의 손자 홍상범이 자객을 보내 대급수로 나를 살해코자 했으니. 게다가 역모도 있었고. 홍신해, 홍이해, 은전군 등 23명을 사형시켜야만 했소. 허나 나를 세손시절부터 후원해 주었던 홍국영을 내 친 것은 내가 무엇보다 중심을 잃지 않았다는 증거요.”

-왕께서는 학문을 좋아하고 규장각을 만드는 등 문치로 인해 세종대왕과 비유되곤 하는데요. 국왕에게 학문이란 무엇입니까?

“국정은 모름지기 어떤 정책이든 학문적 뒷받침을 전제로 해야 하는 것이요. 일의 전후 과정을 염두에 두고, 그것이 미칠 영향도 고려해야 하는 것이지. 게다가 국왕은 만백성의 스승이기도 하니, 몸소 수신의 철학을 체화시켜야 하기도 하고. 내 국정운영 방식은 학문에 있소. 그건 후세가 더 잘 알 것으로 보오.”

-왕 하면 응당 실학과 연계되는데요.

“그건 당시 국내 및 세계사의 변화와 관련 있소. 정묘,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를 다들 우숩게 보았지만, 청의 발전상은 이제 ‘조선이 청으로부터 배울 것은 배우자’는 생각이 자연 들게 했소. 노론계 자손들도 그랬고, 이익 같은 성호학파나 홍대용 같은 실학파도 그러했지. 사회적 분위기는 ‘보수’가 여전했지만, 무너지는 둑을 어떻게 막을 수 있겠소. 오랑캐라도 배울 건 배워야지. 내가 <기기도설(奇器圖說>을 정약용에게 주며 기중기 제조법을 설계토록 한 것도 다 서양 학문 영향 아니었소.

-그 혜택을 누린 사람들이 있지요?

“서얼 출신이었던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 서이수 등을 말함이오? 능력 있는 자들을 신분에 구애없이 규장각에 등용하고, 향임에 임명하고, 장용영에도 배치한 것은 그들로서는 광해군 시기 서얼의 벽을 타파해보고자 ‘칠서의 변’을 일으킨지 170년 만의 일이니, 시대의 요구였다고 해야겠지. 이 모두 시대 흐름과 탕평의 일환이었지.

-그리하여 왕 재위 12년에는 채제공이 우의정에 발탁됨으로서 영의정은 노론의 김치인이, 좌의정은 소론의 이성원이 맡아 하게 되어 3당 연합 체제를 구축하게 된 것이군요.

“당목이 있는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지, 아암...”

-이제 마지막으로 화성 신도시 건설과 왕의 급작스런 죽음을 얘기해야 할 때인데요.

“음-. 말년에 물러나면 나는 수원에 가서 아버지 무덤 곁에서 살고 싶었소. 그게 효를 못한 채 아버지를 보내야만 했던 내 심정이었고. 수원에 화성신도시가 생긴 것은 그런 저런 의미가 크지. 헌데 나의 죽음은 말야... 그게 오회연교(五晦筵敎: 정조가 사도세자 죽음에 대한 영조의 당부가 바뀔 수 있음을 시사한 하교)가 있고나서 채 한 달도 안되어서 인데, 내 몸에 종기가 온 몸으로 급속히 퍼지더군. 노론 벽파가 건의해 수은을 치료제로 썼다는데, 정신이 혼미한 가운데, 내 앞에 있던 유일한 사람은 나의 정치적 라이벌이던 정순왕후 혼자였던 그 기억 밖에는 없소.”

개혁군주로 세종에 이어 가장 훌륭한 왕으로 평가받았던 정조는 끝내 이렇게 해서 생을 마감한다. 넘었으되 넘지 못한 선이 엄연히 그의 생에 가로놓여 있었다. 그러니 어찌 큰 나무는 모조리 베어지고, 잡목만이 산에는 가득하다며 우리 역사의 민낯을 가리킨 말이 헛되다고 하겠는가.
전경일. <창조의 CEO, 세종>의 저자. 인문경영연구소장.



 


재위기간 52년. 조선 21대 국왕 영조만큼 오랜 기간 집권한 왕도 아마 없을 것이다. 대궐우물에서 물 긷는 무수리의 아들로 태어나 28세 때 세자로 책봉되기 전까지 10년이 넘게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 산 영조는 누구보다도 백성들의 삶을 알았다. 평소 몸에 밴 서민적 의식으로 검소하게 생활했고, 백성과 가까이 해 백성의 어려움을 풀고자 했다. 그러나 그에게도 어두운 그림자가 있었으니... 영조를 만나보자.

-왕을 얘기할 대 우선 ‘경종 독살설’의 의혹을 먼저 꺼내게 되어 부담스러운데요. 그 속사정을 말씀해 주시죠?

“허어. 또 그 얘기인가? 후세도 알다시피 1724년 8월 20일 내가 이복 형님께 보낸 게장과 생감이 원인이 되어 왕인 경종께서 5일 만에 돌아가셨다는 건데, 내 어찌 그럴 수 있었겠는가?”

-그로 인해 ‘이인좌의 난’이 나는 등 집권 초기 엄청난 시련에 시달리셨는데요. 집권기 안정을 위해 조치들은 어떤 것이었나요?

“당시는 당쟁으로 인한 피해가 막심하였네. 사대부들이야 당쟁을 통해 권력을 거머쥘 수 있다손 치더라도 백성들은 무엇인가? 민생은 간데없고, 백성들의 삶은 도탄에 빠지지 않겠나. 해서 탕평책을 꺼내 들었네. ‘이인좌의 난’은 후세가 말한 ‘경종 독살설’로 인해 발생한 것이었고, 내 앞에서 이를 문제 삼아 소론의 대신이 처형당한 바도 있으나, 결국 나는 현실을 바로 인식하고자 하였네. 반란을 일으킨 세력은 소론과 남인이었지만, 그 원인은 노론에서 제공한 것 아닌가? 내가 노론의 힘을 엎고 등극하였지만, 탕평정치는 국정이 과거로 돌아가는 것을 막는 유일한 장치라 생각되었네.

-그 점이 탕평책을 실시하게 된 배경이군요. 왕의 집권을 도운 노론의 반발도 만만치 않았을 텐데 어떻게 정치적 해법을 찾았죠?

“정치란 게 뭔가 타협과 절충의 묘를 살리는 것 아닌가? 이 같은 정치 미학을 위해서는 제도를 만들고 정착시키는 게 중요하다고 보았네. 해서 붕당의 근본인 서원의 사사로운 건립을 금지시키고, 정쟁의 원천이 된 삼사의 대간을 선발하는 이조전랑의 ‘통청권’을 폐지하는 한편, 인사권을 쥐고 있던 전랑의 임명조차 추천이 아닌 순번제로 바꾸어 버린 거지.

-일단은 인사권을 통해 형평성과 균형성을 유지하려 한 거군요?

“그럼 셈이지. 제도는 늘 중요하니까. 거기서 더 나아가 같은 당파 간에 결혼을 금지시키고, 과거 시험에 탕평과를 실시하기도 하였네. 전자는 권력 혼맥으로 이어지는 것을 막고자 한 것이었고, 후자는 보다 균형 있는 관료를 끌어 모으고자 한 정책으로 보면 되네.

-탕평책의 구체적인 실천 방안은 어떤 것이었나요?

“쌍거호대(雙擧互對)라 하여 특정 정파 사람을 등용하면 다른 정파 사람도 등용토록 한 것과 양치양해(兩置兩解)라 하여 치죄 시에도 공평성을 맞춘 것이지. 이리 되니 갈등은 원천 봉쇄될 여지가 있었지.

-기가 막힌 해법인데요, 허나 탕평이 노론, 소론간 양당구조처럼 해당 정당의 기득권만을 위한 것 아니었나요? 그렇다면 두 당이 과점하게 되는 것인데요?

“어사 박문수가 이를 문제 삼아 비판하기도 하였네만, 제약은 있어도 순기능이 더 컸다고 보네. 물론 이런 한계로 인해 세간에서 나의 탕평을 ‘완론탕평(緩論蕩平)’이라 칭하기도 했지. 느슨한 공평주의라는 뜻이겠네.

-주제를 좀 바꾸어 왕께서 국정을 다스리는데 ‘서민출신’이라는 점이 도움은 되었는지요?

“도움이 되었다기 보다 백성에게 공감하고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조건이 되었다고 보네. 내가 무명옷에 초식을 즐긴 것도 그렇고, 균역제 도입시에는 직접 홍화문에 나가 백성들의 뜻을 듣곤 했던 것은 서민출신이었기에 가능한 것이었지.

-말씀이 나왔으니 말인데요, 군역제는 큰 모범이 된 사례 아닌가요?

“그렇다네. 나는 당초 균역법을 통해 양반들에게도 군포를 부담케 함으로써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주려 하였지. 양반들이 반대하였지만, 나도 군주가 되지 않았더라면 당연히 군포를 냈을 거라고 분명한 톤으로 말했네. 이를 통해 권한만 누리지 책임을 안지려는 양반행태를 바로 잡고 싶기도 했고.

-일종에 노블리스 오블리제인데요, 그럼에도 양반층 반발로 우회하는 정책을 펴셨지요?

“양반에게 군포를 부고하지는 못했네만, 토지 1결(3,000평)에 2두씩 세금을 내게 하는 결작(結作)을 부과했고, 모자란 것은 왕실과 국가 기관 등에서 징수하도록 했네. 백성 시름이 조금은 덜어졌었지.

-이제 왕께서 가장 불편하실 주제를 꺼내고자 하는데요. 사도세자 건을 꺼내도 될까요?

“음-. 훗날 정조가 되지. 내 아들 사도세자의 아들이자 내 손주 말이네. 산(祘, 훗날 정조)을 세손으로 삼으며 내가 당부한 말이 있네. ‘부자간의 정은 정으로 남기고, 의리는 의리로 지켜야 한다.’ 그게 정치이네. 행간의 의미를 알겠나? 내 애긴 이게 다 이네.

무수리의 아들로 태어나 무시를 받으며 자랐지만 자신의 출신을 오히려 백성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바른 정치로 자리매김시킨 임금 영조는 사도세자의 죽음이란 초유의 일을 겪었지만, 정치가로써 뚜렷한 족적을 남긴 것 아닐까. 그러기에 경영의 또 하나의 전범(典範)이 되는 것 아닌지.

전경일. <창조의 CEO, 세종>의 저자. 인문경영연구소장.



- 독도, 역사왜곡, 정신대 등 한반도 재침략 '공정' 해석
- 남왜공정/전경일 지음/다빈치북스/1만6500원

   
일본은 우리에게 저지른 역사적 과오에 대해 이제껏 솔직한 사죄를 하지 않고 있다. 멀리 임진왜란은 물론이고 국권강탈에 이어 일제강점기 갖은 만행에 대해서도 피해 당사자가 아직 눈을 부릅뜨고 있지만 외면하고 있다. 일본측의 사죄 등을 요구하는 일본대사관 앞 정신대대책 집회가 1992년 1월 이후 수요일마다 열려 엊그제로 1000회를 맞았지만 요지부동이다.

일본이 이렇게 뻔뻔하고 가증스러운 행태를 자행하는 까닭을 역사적 맥락을 쫓아 찾아나선 것이 남왜공정(南倭工程)이다. 이순신장군 광개토대왕 등의 탁월한 지도력을 재해석한 서적을 다수 써낸 저자가 7년간 한일 관계 사료를 뒤져 일본 저류에 흐르는 침략근성인 '왜구(倭寇)'를 말한다. 일본이 동북공정(東北工程)을 추진하는 중국과 마찬가지로 한반도 공략을 은밀하게 지금도 추진하고 있으며 이를 '남왜공정'이라 이름 붙였다.


언제든 때만 되면 한반도를 어떻게 해볼 요량인 일본이기에 과거 그들의 잘못을 시인하거나 진정어린 사죄가 나올리 만무하다. 책은 이를 역사적 사실을 들어 조목조목 설명한다. 그리고 1910년 한일합방이란 국치를 되풀이 하는 어리석음을 겪지 않게 우리 내부 문제를 응시한다.

   
지난 8월 공공연하게 "독도를 가겠다"며 3명의 일본 의원들이 무단으로 우리 땅을 밟은 것은 1876년 운양호사건에 비견되는 일이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사진은 지난 8월 무단 입국한 일본 의원들 모습. 국제신문DB
남왜공정으로 단정짓는 이유는 두 가지다. 주기침략설과 재침설이다. 역사적으로 일본이 주기적으로 우리땅을 침범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란 거다. 일본은 백제말 백제부흥군과 함께 백촌강(錦江)전투(663년)에서 나당연합군에 패해 1차 철수했으며 히데요시가 일본 통일 후 한반도에 출병해 조선인 저항과 명군 출격으로 퇴각해 2차 철수했다. 대동아전쟁 패퇴로 물러나는 것이 3차 철수다. 이는 우리 쪽 사료 기술이 아니라 패전 후 일본으로 돌아간 조선총독부 고급관료 모리타 요시오의 실토다. 그러면서 그는 "앞으로 동아(東亞)를 어떻게 그려나갈 것인지 생각해야 한다"고 말한다.당시 총독 아베 노부유키는 한술 더 뜬다. "다시 100년내 도래하겠다"는 망언도 서슴지 않았다.

책은 2045년이란 시점에 주목한다. 왜구는 1876년 운양호사건을 빌미로 이땅에 발을 붙이기 시작해 34년 만인 1910년 마침내 조선을 삼킨다. 지난 8월 일본 의원 3명이 "독도를 가겠다"고 대놓고 한국에 무단 입국하는 방자함을 저지른 것은 운양호사건을 연상시킨다는 게 지은이의 생각이다. 재침의 흉계를 서서히 드러내는 시발점으로 본다. 2045년는 지금으로부터 34년 후다. 또 이 연도는 아베의 망언과도 잇닿아 있는 100년이 되는 시점이다.

일본 쪽 움직임 못지 않게 우리 쪽의 분위기도 심상찮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조선의 친일 관료 및 지식층들의 모임인 일진회가 왜구에 호응해 민족정기를 흐려놓았듯이 사정이 그때와 유사하다는 거다. 가왜(假倭·가짜 왜구)와 부왜(附倭·친일세력)들이 온갖 감언이설로 준동하고 있다. 한일합방 100년인 2010년 일왕생일기념행사에 정치인과 기업인들이 일본대사관에 줄을 섰다고 개탄한다. 일왕생일기념일 겸 승전기념행사가 열리던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홍구공원에서 몸을 던진 윤봉길 의사가 지하에서 어떻게 생각하겠느냐는 거다.

책은 독도, 역사왜곡, 정신대 등을 개별 '문제'로 보지 말고 '공정'으로 볼 때 제대로 일본이 보인다고 말한다. 아울러 우리 내부의 가왜 부왜도 직시할 때 올바른 역사 해법이 나올 수 있다고 강조한다.

[출처: 국제신문 남차우 기자, 2011.12.16]



새로 쓴 일본의 한반도 침략사

“일본은 대륙진출이라는 광포한 욕망으로 1천620년간 한반도를 자그마치 900여 차례나 침략했다. 이는 인류 역사상 유례없이 긴 전쟁으로 지금도 진행형이다.”

인문경영연구소장인 저자가 일본의 한반도 침략사를 새롭게 정립하며, 일본 왜구의 탄생부터 성장까지 그 이면에 담긴 내막을 파헤쳤다.
저자는 왜구의 한반도 침략사를 ‘남왜공정’으로 정의하고,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온 침략행위 간 시차를 통해 일본의 한반도 침략은 주기성과 불변성의 성격을 띠고 있다고 설명한다. 특히 강화도 조약부터 한일합방까지 34년의 시차가 있다는 점을 근거로 2045년 일본의 한반도 재침이 예상된다는 주장을 펴면서, 이를 막기 위한 주요 원칙과 대응방안을 모색한다.
김도훈 기자 hoon@idaegu.com

전경일 지음/다빈치북스/408쪽/1만6천500원.
[출처: 대구일보, 2011.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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