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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경영/조선의 왕들

[숙종] 정치는 변덕스럽게 하고, 경제는 실제를 구하라

by 전경일 2011. 11. 30.

무릇 정치, 경제 두 마리 토끼를 다 잡는다면 이보다 더 나라를 잘 다스리는 게 어디 있겠는가 마는 잣은 정치적 변동에도 그나마 경제의 뿌리는 내리기 시작했으니 숙종 연간이 그러할 것이다. 14세의 나이에 국가를 물려받아 46년간 조선의 19대 국왕으로서 치세를 다한 숙종을 만나본다.

-왕께서는 어린 나이에 국왕이 되셨는데요, 송시열이라든가 원로들의 득세가 대단해 ‘군약신강’의 구도 하에서 어떻게 정국을 움켜쥐실 수 있었는지요?

“음. 정말 대단했지. 내가 배운 게 뭐던가? 사내정치의 묘수 아니던가? 나는 정치란 끝없이 줄세우기를 하며 왕권을 강화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네. 권신들에게 휘둘리지 않는 법을 일찍 체득했다고나 할까.”

-일테면 사내정치를 정치에 활용했다? 그런 말씀이신지요?“

“그런 셈이지. 나는 왕이 되기 전에도 내 뜻을 분명히 하였네만, 왕이 왕으로서 대접을 못받는다면 어찌 군왕이라 할 수 있겠는가? 다들 권력을 누리다보면 교만해져서 왕 위에 서려 하지만, 결국 왕조체제라는 게 무엇인가? 신하들에게 휘둘리는 왕일지라도 결국 왕의 지지를 얻지 못하면 한낱 권력에서 멀어지는 무리에 불과한 것 아닌가? 해서 환국(換局, 정권교체)을 통해 줄세우기를 하는 것으로 국정에 나 뜻을 관철시켰지.”

-임금의 재위시 크게 세 번의 환국이 있었지요? ‘허견 역모 사건’이 비화되어 일어난 경신환국, 장희빈 소생의 윤(훗날 경종)을 원자로 봉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기사환국, 장희빈이 후궁 최씨를 독살하려 했다는 설이 빌미가 되었던 갑술환국, 이렇게 세 번의 정치적 국면에서 진행된 환국의 의미를 되짚어 보는 것도 적잖은 의미가 있을 것 같은데요.

“나는 왕이네. 왕은 누구든 왕권을 강화하려고고 할 걸세. 내가 14세의 나이에 국정을 주물럭 했던 송시열을 위리안치시키고, 6년 되던 해(1680년 경신년)에 왕권을 우습게 보던 허적이 왕실 천막을 무단 사용하는 것을 빌미로 ‘허견 역모 사건’을 통해 남인에서 서인으로 정권교체를 이루게 한 것은 어느 한쪽으로 권력이 쏠리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네. 기사년 환국도 마찬가지였지. 궁녀(장희빈)라도 원자를 낳아 손을 잇는다면 응당 대접함이 마땅치 않은가. 서인이 집권하는 동안 그 방자함이 극에 달했는데, 이 환국을 계기로 송시열을 완전히 제거해 버릴 수 있었지. 그 자야 늘 명분만 주장하던 늙은이 아니던가. 갑술년 환국은 또 어떻고? 희빈과 남인은 너무 권력을 탐하려 하였네. 이번엔 그들이 제거 대상이었지. 정권교체를 통해 왕권을 강화하는 게 나의 일관된 정책이었네.”

-하지만 세 번에 걸친 환국으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가고, 오히려 줄세우기는 더욱 극성을 부린 것 아닌가요?

“나보러 변덕스럽다고 말하는 이도 있는 모양이네만, 환국은 내가 취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정치적 묘수풀이였네. ‘정치력’이라고 부르면 안되겠나?”

-정치력이요? 왕의 정치력은 그 부분보다는 훗날 높게 평가하듯, 이미 중국에서 청나라가 대치세를 이끌어 가는 동안 그간 뿌리 깊게 내렸던 ‘반청 사상’을 완화시킨 면이 아닐까 하는데요.

“사실 그건 내가 주도한 게 아니라 더 이상 대세를 거역할 수 없었기 때문이지. 청을 아무리 송시열 일파처럼 오랑캐로 본다손 치더라도 정치라는 게 명분만으론 할 수 없지 않은가? 현실에 뿌리박은 바가 있어야 흩어지지 않는 것 아닌가. 당시 청은 거대한 선진문물의 용광로였네. 오랑캐로 무시했지만, 중국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서양의 과학 기술과 문물, 양명학, 고증학 같은 것들은 세계관에 큰 변화를 가져왔지. 송시열 따위의 구태의연한 생각 따위로 어찌 그 물결을 막을 수 있겠나. 눈 밝은 이들에 의해 그 ‘가치’기 픽업되어 실학이 싹 틔우는 계기가 됐으니 후세들에게는 다행스러운 일이었겠지.”

-해서 당시 숭명배청에 입각한 의리론이 퇴조하고 조선의 역사를 강조하는 삼한정통론이라든가, 조선이 세상의 중심이라는 소중화(小中華)의식이 확산된 거군요.

“그렇다네. 청(淸)이 더는 오랑캐가 아니었던 거였지. 어찌 그와 같은 대치세가 청에 있을거라고 상상이나 했겠는가? 크게 한방 맞은 꼴이었다고나 할까.

-임금 재위시에는 간도, 울릉도 문제 등도 일단락되었지요?

“그렇다네. 나라의 강계를 바로 잡은 것인데, 끝내 후손들에게 아쉬운 점은 간도문제네. 흐릿하게 협상한 것도 그렇고, 훗날 일본에 의해 국권이 빼앗기며 간도 영토를 잃은 것도 그렇고. 그나저나 독도는 여전히 일본의 억지주장에 분쟁 지역화되는 면이 있어 안타깝기만 하다네.

-당시 경제는 어땠나요?

“상평통보가 처음엔 외면 받았네만, 차차 화폐로써 자리도 잡게 됐고, 서울은 시전과 난전이 서로 치고 박고는 했지만, 물산이 풍성하게 돌았지. 한강변은 그야말로 흥정과 거래로 불야성일 이뤘네. 백성들의 생활형편도 나아지고. 돌이켜보면 그게 가장 좋았네. 결국 환국이니 뭐니 해도 백성들에게 그런 건 다 소용없고, 먹고 사는 게 편안하면 가장 정치를 잘하는 것 아닌가. 그게 임금이 해야 할 일일 테고...”

숙종 연간은 초대형 정권교체가 세 번에 걸쳐 있었지만, 국토를 바로잡고, 경제는 풍성하게 돌아갔다. 이 둘이면 정치는 그 목적의 9할 정도는 한 것 아니겠는가?

전경일. <창조의 CEO, 세종>의 저자. 인문경영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