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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경영/조선의 왕들

[영조] 탕평, 그리고 부자의 정을 의리로 지키게 하라

by 전경일 2011. 12. 28.

재위기간 52년. 조선 21대 국왕 영조만큼 오랜 기간 집권한 왕도 아마 없을 것이다. 대궐우물에서 물 긷는 무수리의 아들로 태어나 28세 때 세자로 책봉되기 전까지 10년이 넘게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 산 영조는 누구보다도 백성들의 삶을 알았다. 평소 몸에 밴 서민적 의식으로 검소하게 생활했고, 백성과 가까이 해 백성의 어려움을 풀고자 했다. 그러나 그에게도 어두운 그림자가 있었으니... 영조를 만나보자.

-왕을 얘기할 대 우선 ‘경종 독살설’의 의혹을 먼저 꺼내게 되어 부담스러운데요. 그 속사정을 말씀해 주시죠?

“허어. 또 그 얘기인가? 후세도 알다시피 1724년 8월 20일 내가 이복 형님께 보낸 게장과 생감이 원인이 되어 왕인 경종께서 5일 만에 돌아가셨다는 건데, 내 어찌 그럴 수 있었겠는가?”

-그로 인해 ‘이인좌의 난’이 나는 등 집권 초기 엄청난 시련에 시달리셨는데요. 집권기 안정을 위해 조치들은 어떤 것이었나요?

“당시는 당쟁으로 인한 피해가 막심하였네. 사대부들이야 당쟁을 통해 권력을 거머쥘 수 있다손 치더라도 백성들은 무엇인가? 민생은 간데없고, 백성들의 삶은 도탄에 빠지지 않겠나. 해서 탕평책을 꺼내 들었네. ‘이인좌의 난’은 후세가 말한 ‘경종 독살설’로 인해 발생한 것이었고, 내 앞에서 이를 문제 삼아 소론의 대신이 처형당한 바도 있으나, 결국 나는 현실을 바로 인식하고자 하였네. 반란을 일으킨 세력은 소론과 남인이었지만, 그 원인은 노론에서 제공한 것 아닌가? 내가 노론의 힘을 엎고 등극하였지만, 탕평정치는 국정이 과거로 돌아가는 것을 막는 유일한 장치라 생각되었네.

-그 점이 탕평책을 실시하게 된 배경이군요. 왕의 집권을 도운 노론의 반발도 만만치 않았을 텐데 어떻게 정치적 해법을 찾았죠?

“정치란 게 뭔가 타협과 절충의 묘를 살리는 것 아닌가? 이 같은 정치 미학을 위해서는 제도를 만들고 정착시키는 게 중요하다고 보았네. 해서 붕당의 근본인 서원의 사사로운 건립을 금지시키고, 정쟁의 원천이 된 삼사의 대간을 선발하는 이조전랑의 ‘통청권’을 폐지하는 한편, 인사권을 쥐고 있던 전랑의 임명조차 추천이 아닌 순번제로 바꾸어 버린 거지.

-일단은 인사권을 통해 형평성과 균형성을 유지하려 한 거군요?

“그럼 셈이지. 제도는 늘 중요하니까. 거기서 더 나아가 같은 당파 간에 결혼을 금지시키고, 과거 시험에 탕평과를 실시하기도 하였네. 전자는 권력 혼맥으로 이어지는 것을 막고자 한 것이었고, 후자는 보다 균형 있는 관료를 끌어 모으고자 한 정책으로 보면 되네.

-탕평책의 구체적인 실천 방안은 어떤 것이었나요?

“쌍거호대(雙擧互對)라 하여 특정 정파 사람을 등용하면 다른 정파 사람도 등용토록 한 것과 양치양해(兩置兩解)라 하여 치죄 시에도 공평성을 맞춘 것이지. 이리 되니 갈등은 원천 봉쇄될 여지가 있었지.

-기가 막힌 해법인데요, 허나 탕평이 노론, 소론간 양당구조처럼 해당 정당의 기득권만을 위한 것 아니었나요? 그렇다면 두 당이 과점하게 되는 것인데요?

“어사 박문수가 이를 문제 삼아 비판하기도 하였네만, 제약은 있어도 순기능이 더 컸다고 보네. 물론 이런 한계로 인해 세간에서 나의 탕평을 ‘완론탕평(緩論蕩平)’이라 칭하기도 했지. 느슨한 공평주의라는 뜻이겠네.

-주제를 좀 바꾸어 왕께서 국정을 다스리는데 ‘서민출신’이라는 점이 도움은 되었는지요?

“도움이 되었다기 보다 백성에게 공감하고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조건이 되었다고 보네. 내가 무명옷에 초식을 즐긴 것도 그렇고, 균역제 도입시에는 직접 홍화문에 나가 백성들의 뜻을 듣곤 했던 것은 서민출신이었기에 가능한 것이었지.

-말씀이 나왔으니 말인데요, 군역제는 큰 모범이 된 사례 아닌가요?

“그렇다네. 나는 당초 균역법을 통해 양반들에게도 군포를 부담케 함으로써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주려 하였지. 양반들이 반대하였지만, 나도 군주가 되지 않았더라면 당연히 군포를 냈을 거라고 분명한 톤으로 말했네. 이를 통해 권한만 누리지 책임을 안지려는 양반행태를 바로 잡고 싶기도 했고.

-일종에 노블리스 오블리제인데요, 그럼에도 양반층 반발로 우회하는 정책을 펴셨지요?

“양반에게 군포를 부고하지는 못했네만, 토지 1결(3,000평)에 2두씩 세금을 내게 하는 결작(結作)을 부과했고, 모자란 것은 왕실과 국가 기관 등에서 징수하도록 했네. 백성 시름이 조금은 덜어졌었지.

-이제 왕께서 가장 불편하실 주제를 꺼내고자 하는데요. 사도세자 건을 꺼내도 될까요?

“음-. 훗날 정조가 되지. 내 아들 사도세자의 아들이자 내 손주 말이네. 산(祘, 훗날 정조)을 세손으로 삼으며 내가 당부한 말이 있네. ‘부자간의 정은 정으로 남기고, 의리는 의리로 지켜야 한다.’ 그게 정치이네. 행간의 의미를 알겠나? 내 애긴 이게 다 이네.

무수리의 아들로 태어나 무시를 받으며 자랐지만 자신의 출신을 오히려 백성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바른 정치로 자리매김시킨 임금 영조는 사도세자의 죽음이란 초유의 일을 겪었지만, 정치가로써 뚜렷한 족적을 남긴 것 아닐까. 그러기에 경영의 또 하나의 전범(典範)이 되는 것 아닌지.

전경일. <창조의 CEO, 세종>의 저자. 인문경영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