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경영/나에게 묻는다 | Posted by 전경일소장 전경일 2009.02.02 16:54

[나에게 묻는다] 그 여름의 못나니 꽃

이태 전이었던가? 여름휴가를 이용해 시골에 갔다 왔다. 새해가 시작되고 나서 정신없이 지내다 가까스로 낸 휴가였다. 특별히 갈 데도 마땅치 않았고, 바캉스하면 으레 떠오르는 바가지 요금에, 12시간 이상 차를 몰아야 하는 고충까지 생각하니 바닷가는 아예 겁부터 났다. 게다가 눈을 밖으로 돌려 해외여행이라도 갈라치면 몇 백 만원 깨지는 것은 한순간이고 빠듯한 살림에 애들을 둘씩이나 매달고 떠나는 그런 해외여행은 쉬운 게 아니었다. 마흔까지 살면서도 해외여행 하나 제대로 가지 못하는 남편으로서 가족에게 미안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애들에게는 거창한 계획이 있는 양 시골 풍경을 그려대기 시작했다. 개울물이 흐르고, 물고기가 노닐며, 반두로 물고기를 잡아 천렵을 하고, 들판에 뛰어 다니는 메뚜기를 잡고, 밤이면 여치나 귀뚜라미를 쫓아 후레쉬 불빛을 비추고, 모깃불을 피워놓고 옥수수 먹고, 별을 보며 옛날이야기를 듣는다.

애들은 그 말 한마디에 군침이 넘어갔다. 아니, 내 얘기에 완전히 뿅, 갔다. 그 다음부턴 술술 풀려갔다. 아내는 내 계획이 뻔한 걸 알면서도 애들 성화에 못 이겨 짐을 꾸렸다. 물론 애들은 시골을 디즈니랜드 정도로 알고 떠났을 것이다. 아무튼 그래서 우리는 먼 친척이 사는 시골 마을로 휴가를 떠났다.

하지만 현실은 늘 상상의 세계와는 다르지 않는가! 시골에 오니 벌써부터 화장실 냄새부터 역겨웠다. 애들은 변소에 들어가려고 하질 않았다. 며칠을 참더니 나중엔 어쩔 수 없이 밍기적 거리며 들어가기까지 했다. 자기들의 습관과 다른 것이다.

어렸을 때 넘치던 개울물은 말라 버렸고, 멀리 강까지 나가보았지만 물고기는 눈씻고도 찾아볼 수 없었다. 메뚜기는 정말이지 어쩌다가 눈에 띄일 정도였고, 밤이면 모기떼들이 덤벼들어 평상에서의 옛날이야기는 하룻밤 만에 물 건너가고 말았다.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곳은 무더운 찜통방일 뿐이었다.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이 난처한 상황을 만회해야만 했다. 다행히 낚시 도구를 가져와 낯에는 근처 저수지에 가서 보낼 수 있었다. 무척 무더웠지만, 이튼날 새벽, 손바닥 만한 잉어를 두 마리 건져 올리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대충 휴가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애들은 첫날부터 모기에 물려 긁적거리고 있었다. 요즘 애들은 왜 이렇게 면역성도 없는지... 타박을 해봐야 아무 소용없었다. 그때 애들을 데리고 귀뚜라미나 여치같이 으악스럽게 울어대는 밤 곤충을 잡으러 앞마당엘 나갔다.

이파리를 젖히고 몇 마리를 잡는 동안 내 전등불에 닭 벼슬같이 생긴 맨드라미 꽃이 잡혔다. 이 식물은 내가 어렸을 때 본 거하고 생긴 게 똑같았다. 못생긴 거 하며, 쓸데없이 벼슬만 세우는 거 하며, 향기도 없고, 어디서나 그냥 말없이 잘 자라는 거 하며... 마치 평범한 직장인인 나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 맨드라미가 왜 맨드라민 줄 아니?”

애들 사촌 언니가 묻는 소리가 들렸다.

“옛날에 힘세고 옳은 말하는 한 장군이 있었데. 그런데 그 장군은 간신에게 모함을 받아 죽게 되었데. 쓰러지는 마지막까지 장군은 왕을 지켜주었대. 그 뒤 장군이 죽은 무덤에서 꽃이 피어났데. 그게 바로 맨드라미래.”

그 얘기를 들으며 나는 학교 다닐 무렵을 떠올렸다.

은정씨 얘기는 지금도 귓전에 들려오는 듯 했다.

“철수씨, 맨드라미가 무슨 뜻인 줄 알아요?”

“......”

“맨드라미는 말라도 모습이 변하지 않아서 '시들지 않는 사랑'이라는 뜻이 있대요.”

대학 시절 학교 회원 앞에 피어있는 맨드라미를 보며 나의 첫사랑이 들려주던 이야기였다. 그녀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가슴이 뭉클했다.

“요즘엔 이걸 복용하고 있거든.”

기술영업 담당 황 차장이 비닐봉지에 든 걸 가위로 자르며 말했다.

“요즘 과로 했는지 코피가 쏟아지더군. 맨드라미 끊인 물이 지혈에 좋다며, 마누라가 달여 주더군.”

나는 그때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가물가물한 기억들.... 그리고 지금의 나.

여름휴가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자, 우리 집 좁은 거실엔 맨드라미 화분이 하나 놓였다. 아내는 뭐 그리 멋없는 꽃을 집안에 들여 놓느냐고 투정부렸지만, 나는 왠지 그 꽃만 보면 어떤 이유에서건 나와 인연이 깊다는 생각이이 들었다. 휴가가 끝나고 회사에 가게 된 날, 나는 인터넷을 샅샅이 뒤져 보았다.

<맨드라미>

-여름철에 쉽게 볼 수 있는 꽃으로, 빨간색과 노란색이 가장 흔하다

-닭의 볏과 비슷한 꽃부리의 모양 때문에 계두화(鷄頭花) 또는 계관화(鷄冠花), 콕스콤(Cock's comb)이라는 여러 가지 이름을 가져다.

-가을이 되어 밤 기온이 떨어지면 꽃 색이 더욱 찬란해진다.

-맨드라미 꽃은 한 줄기에 여러 개의 잔 꽃이 줄을 서서 핀다. 한 송이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은 많은 꽃들이 모여서 핀 것이다.

-꽃피는 기간은 길고 꽃모양이 흐트러지지 않으며, 햇빛이 잘 들고 약간 건조한 곳에 씨를 뿌리면 잘 자란다.

-1년 이내에 발아·생장·개화·결실을 하고 난 뒤 죽는 식물이다. 일년초·일년생식물·한해살이풀이라고도 한다.

-주로 사막·길가·경지(耕地) 등 척박한 자연조건에서 잘 자란다. 생활형으로 진보된 단계의 종이 많다.

나 같이 못생긴 그저 평범하기 짝이 없는 꽃이었다. 사람들에게 전혀 애지중지 보살핌을 받지 않으면서도 때가 되면 그 때를 먼저 알고 어김없이 아무데서나 잘 자라주는 꽃. 그러다 한 두해 살이로 죽고 마는 꽃. 제 모습은 없어보여도 하나하나가 서로 잘 어울려 꽃 모양을 이루는 꽃. 그럼에도 불구하고 찬바람 불어 힘들어질 때면 가장 든든하게 옆의 동료를 부여잡고 땅을 움켜쥐면서 자기의 충성스런 마음을 드러내는 꽃...그런 생각이 들자, 맨드라미라미 꽃야말로 나 같이 평범한 사람의 꽃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맨드라미를 사람에 비유하면 틀림없이 나 같은 사람일 거야, 너무나 평범해서 주목도 모끄는...’

그날 이후로 나는 내 책상에 맨드라미 꽃 화분을 하나 두었다. 시골서 가져온 것이었다. 그리고 나의 분신과 같은 꽃을 가까이서 보면서 나는 나 같이 못난 그 꽃에서 인생의 참다운 의미를 찾았다. 그래서 그런가? 마흔 넘어 다시 찾아 온 위기 앞에서도 나는 그 꽃 먼저 챙겼다. 앞으로 살아 있는 동안, 대부분의 사람들은 저런 부질없어 보이는 꽃으로 살아가야 하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냥 행복하고, 자신에 넘치는 것은 왜일까? 내게 매달린 아이들의 자는 모습을 내가 들여다보았기 때문일까?

전경일, <나에게 묻는다>(청림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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