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찾는 것은 삶을 찾는 것처럼 어렵다. 산에서 우리는 무엇을 찾아야 할까?

산에서는 무시로 육신의 마지막 집터를 보게 된다. 때로는 무심히 또 때로는 눈길을 꽂아 묘비명이라도 훑어본다. 어떤 무덤은 정갈하게 정성껏 가꿔져 있고, 어떤 무덤은 칡덩굴과 아카시아 나무가 점령해 똬리를 틀고 있다. 죽은 다음에야 무덤이 한없이 초라한들 무슨 상관있으랴만 그래도 후손의 손길을 받지 못하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짠했다. 잘 가꾼 무덤의 주인은 살아서 어떤 생을 꾸렸을까?

생의 끝은 저렇게 남는구나. 우리 삶의 마지막은 결국 흙으로 돌아가는구나. 내가 딛고 있는 이 흙은 멀고 먼 과거의 누군가가 육신을 사른 흔적이구나.

산 무덤을 바라볼 때면 문득 삶과 죽음이 그다지 소원치 않으며 죽음 앞에서도 그리 섭섭지 않을 것이라는 요사스런 자신감이 따라붙는다. 산은 온몸으로 수많은 화두를 던져주며 뒤통수에 매달린 아둔함을 자꾸만 후려친다.


“산이 그대더러 언제 배우라 했나. 그대가 보고 느끼는 게 산을 이루는 법인데...”

오대산 초입부터 인생의 허무함을 뇌까리는 나를 겨냥해 산꾼 친구는 아까부터 퉁을 준다. 그가 나를 알듯, 나는 그를 안다. IMF 시기에 빚쟁이를 피해 양복차림으로 서울 인근의 산으로 1년 넘게 출근한 그였다. 97년 겨울과 98년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이듬해... 그 봄부터 그는 압구정역 근처에서 꼬치를 팔며 재기의 불씨를 키웠다. 불과 1년 남짓만 해도 그는 중견기업을 목표로 회사를 운영하고 있었다.

그는 바닥까지 내려갔다가 10년 만에 재기에 성공했다.

“외환위기 때는 정말로 죽음과 딱 입을 맞춘 것과 다를 바 없었지. 입속으로 사약이 마구 밀려들었으니까. 회생할 방법은 없고... 사무실에 들어서면 마치 공동묘지에 서 있는 것 같더라고. 비어 있는 직원들 책상이 죄다 무덤처럼 보이더라니까.”

그는 사업이 안정된 지금도 간혹 그때의 ‘무덤’이 떠오른다고 했다.

“산을 다니며 세상을 많이 원망하고 운이 없는 걸 탓하기도 했지. 그러던 어느 날 아무리 불평하고 누굴 탓할지라도 변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걸 깨달았지. 늘 부정적으로 가라앉아 있다가는 이 산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겠다는 생각에 퍼뜩 정신이 든 거야. 그때 나는 산에 나를 생매장하고 떠났어. 누굴 탓하는 것은 그게 아무리 옳아도 변명에 불과해. 내가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을 포기하고 남의 손에 맡겨버리는 꼴이니까.”

이후 10년간 그는 그때의 깨달음과 친구가 되었다. 더불어 산 무덤은 나와 그 사이에 하나의 화두가 되어 있다. 내게는 인생의 덧없음과 처연함을 일깨워주는 징표로, 그에게는 산 아래 놓인 삶과 죽음의 건널목으로 말이다.

“시체 연습이라는 거 있지? 죽어서 관에 들어간다고 생각하고 실제로 그런 연습을 해보는 거야. 그러면 잠시나마 인생을 차분하게 정리하게 돼. 내가 살면서 놓고 온 것은 무엇인가? 꼭 해야 했는데 하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한번 해본 사람은 많이 달라진다고 하더군. 나는 아마도 그 관에 몇 번은 들어갔다 나온 셈일 거야. 스스로를 생매장까지 했으니...”

그의 시체 연습은 살아서 시체가 되지 않기 위해 인생의 길을 수없이 다듬고 고친 산행의 일부일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산을 오르는 것은 마음 어딘가에 놓여 있을 수미산 중턱을 오르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결국 몸도 혼도 북망산에 자리잡는 게 아니겠는가?

“겨자씨 속에 수미산(須彌山)이 들어가고 털구멍 하나에 사대해수(四大海水)가 들어간다네.”

산꾼 친구는 ≪유마경≫의 한 대목을 읊어주었다. 그는 마치 고사처럼 스스로 이발(李勃)이 되어 지상(智常) 스님을 찾아가 법문을 구하는 행자 같았다. 이쯤이면 10년 성사에 출세간(出世間)을 엿봐도 무방하리라.

수미산이 겨자씨 속에 들어간다고? 그가 지난 세월에 새긴 번민과 고통, 성취와 야망은 모두 하나의 깨달음을 얻기 위한 산행이 아니었을까? 결국 죽음과 공포, 두려움을 딛고 삶을 일으켜 세우는 경영을 스스로 부여한 것이 아니었을까? 이런 방식으로 산꾼 친구는 경영의 산을 올랐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수미란 가장 높다는 뜻이니 불교에서 말하듯 세상의 중심에 우뚝 솟아 있는 것은 결국 ‘깨달음의 산을 내면에 얼마나 높이 올리는가’ 하는 것이리라.

“내가 수미에 오른다고? 천만에. 나는 다만 북망산에 가서 시간이 없어서 하고 싶은 일을 다 하지 못했다고 핑계대지 않을 거야. 돈 버는 데 정신 팔려 나와 주위를 돌아보는 데 소홀했다고 말하지 않을 거야.”

그는 일요일에도 사무실의 문을 열면 돈을 벌 수 있지만 굳이 셔터를 내리고 산에 오른다고 한다. 그를 보면서 나는 자신에 질문을 던졌다. 나는 어떤 화두를 끌어안고 산을 오르는 것일까?

전경일. <CEO 산에서 경영을 배우다>(김영사)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