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경영/나에게 묻는다 | Posted by 전경일소장 전경일 2009. 2. 2. 16:59

[나에게 묻는다] 중국집 아강춘

지금은 없어진 중국집이 내 추억엔 하나 있다.

아니, 가본 지 오래되어 정확히는 모르지만, 지금은 없어졌을 것이다. 벌써 삼십 년도 넘은 얘기니까.

내 고향에는 중국집이 하나 있었다. 알고 보면, 서너 개 더 있었겠지만, 그 중에서도 <아강춘>이라는 중국집이 제일 컸고, 기억에 남는다. 고향에서 군청 다음으로 가는 가장 큰 기관인 농협 바로 옆에 있었으니까. 어린 내게 이 이상한 이름의 중국집은 우선 뜨물통과 미끌미끌한 돼지기름을 연상시킨다. 그 다음으론, 짜장면이다. 생각만 해도 목에 감기던 그 구수하고 들척지근한 맛.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하던 날, 아버지가 데려가서 짜장면 곱빼기를 사주시던 바로 그곳이다. 곱빼기라. 이 얼마나 흐뭇하고 푸짐한 얘기이냐? 지금 생각해도 호사스럽기 그지없다.

우리 집이 <아강춘>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아버지 때문이었다. 아버지가 새마을 운동 지도자로 농협에 종종 들락거리셨고, 그 덕에 그 집에서 회식을 하시게 된 모양이다. 집에 돼지를 놓았던 아버지 눈에는 쌀겨보다도 푸짐한 뭔가가 중국집 뜨물통에 보였을 것이다. 철버덕 거리는 뜨물통. 뜨물이 누군가에게 흘러가는 것을 보고는 아버지는 머리를 쓰셨으리라. 내게 다오. 내가 이렇게 농협 사람들과 자주 오지 않나? 이런 식으로 말이다.

어느 날인가 부터 고등학생이던 큰 형은 저녁이면 어김없이 아강춘의 뜨물을 지게에 지고 집으로 날라 왔다. 나는 형이 무거운 뜨물통을 진채 훠청거리던 모습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가다가 힘이 다하면 징검다리를 건너듯 쉬기도 했다.

뜨물이라고는 했지만, 거기에는 문어 뼈며 먹다 남은 음식 찌꺼기가 그득했다. 아강춘 뜨물로 집에서 키우던 돼지는 살이 붙고, 숫자도 불어나 축사도 두어 칸 더 늘어났다. 아침이면 뜨물통은 돼지기름이 뻐덕뻐덕하게 엉켜있었고, 형은 저녁이 되어 아강춘 문이 닫힐 때쯤이면, 지게를 지고 시내로 나아갔다.

형이 동네 깡패들과 한판 붙은 것도 아강춘에서 뜨물통을 지고 오다 벌어진 일이었으며, 어떤 때에는 옷에서 뜨물내가 질펀덩하게 묻어나 투덜거리기조차 했다.

그런 아강춘을 나는 멀리서 동경하며 바라보았고, 국민학교 졸업식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졸업식 날엔 짜장면을 먹지 않는가? 더구나 내가 그토록 기다려왔던 아강춘에서 말이다. 마침내 국민학교를 쫑치던 날, 나는 내 소원을 이뤘다. 짜장면 곱빼기를 입에 피칠하듯 떡칠을 해가며 후루룩 삼켰고, 나는 의기양양하게 둥근 배를 끌어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트림 속에서 들척지근하게 익은 양파와 밀가루 내가 풍겨 나왔다. 지금도 내 기억에 그날 형들이나 누나가 함께 갔었던 영상은 남아있지 않다.

그날 밤에도 형님은 아강춘에서 뜨물을 져 날랐고, 나는 그런 뜨물을 보며 언젠가는 그 중국집을 다시 찾아가리라 다짐했다. 물론 형에 대해 일말의 미안한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건 당연한 게 아닌가? 나는 막내였으니 말이다. 이게 나의 특권이었다.

그 후, 삼십년의 세월이 흘렀다.

얼마 전, 회사 근처에 있는 중국집을 갔다가 우연히도 그 <아강춘>을 떠올리고, 형님을 생각하게 되었다. 왜 그랬을까? 분위기 때문이었을까? 그렇게 생각해 보니 나는 여태껏 형님한데 짜장면 한 그릇도 사드리지 못한 게 생각났다. 수 없이 밥을 먹고, 식당에도 갔었지만, 정작 다 커서 밥벌이 하는 나이를 넘겼어도 왜 짜장면 한 그릇 대접하지 못했을까? 형님한테 미안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 다음에 만나면 짜장면 하나 시켜 드리지. 요즘엔 그때 짜장면보다 맛있는 게 훨씬 더 많지 않은가? 그러며 주방에 대고 소리칠 생각이었다.

“여기 짜장면 곱빼기 두 개!”

그날, 직원들은 영문을 몰랐지만, 입에 칩갑칠을 하듯 형님과 짜장면 먹는 장면을 생각하며 나는 끼룩끼룩 웃고 있었다. 갑자기 목이 메어 짜장면이 넘어가지 않았다.

형님-.


전경일, <나에게 묻는다>(청림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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