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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경영/광개토태왕 대륙을 경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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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세계에 어느 우월적 존재도 인정하지 않는다 내 세계에 어느 우월적 존재도 인정하지 않는다 고구려는 4세기 말 요하유역을 완전장악하면서 제국의 위용을 드높이게 된다. 요하 일대는 고구려가 제국으로 웅비해 나갈 수 있는 기틀을 확고히 놓아주는 전략거점이 된다. 요하를 넘으면 서북쪽으로는 멀리 대흥안령산맥 남쪽의 시라무렌강 유역에 진출해 거란족을 정복할 수 있었다. 태왕은 이 강을 건너 거란을 정벌하고 마침내 동몽고 초원 진출의 교두보를 놓은 것이다. 또 서남쪽으로는 후연을 공략하여 대릉하 유역으로 진출한다. 또 동북으로는 조공을 중단한 동부여를 친정하여 복속시킨다. 능비를 보면, “부산(富山), 부산(負山)을 넘어 염수에 이르러 패려(稗麗) 일부를 정벌하고 우마군양(牛馬群羊)을 헤아릴 수 없이 획득했으며, 돌아오는 길에 요동지역을 순시(巡狩)했다.”..
세계질서를 위한 확장정책과 주인다운 태도 세계질서를 위한 확장정책과 주인다운 태도 고구려는 창업 이래 영토 확장을 최우선의 과제로 삼았다. 압록강·두만강 및 대동강 유역을 연이어 확보하면서 요하선을 지향한 제군사 행동을 집요하게 추진한 끝에 고구려는 마침내 4세기 말 요하(遼河) 유역을 완전히 장악하게 된다. 이제 한족과의 경계를 요하를 기점으로 잡은 것이다. 이는 마치 기업 경영에서 자사보다 우위에 있는 경쟁사의 바로 코 밑에까지 영향력을 확대해 나간 것을 뜻한다. 나아가 경쟁의 패러다임을 대등한 관계로 새롭게 포지셔닝 시켜 놓은 것을 뜻한다. 고구려가 요동지방을 전략거점화한 것은 동북아에서 하나의 제국으로 웅비할 수 있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동북아에서 수없이 명멸하는 제국가의 하나로 남느냐, 제국의 주인이 되느냐를 결판 짓는 중대한 터닝..
세계질서를 위한 확장정책과 주인다운 태도 세계질서를 위한 확장정책과 주인다운 태도 고구려는 창업 이래 영토 확장을 최우선의 과제로 삼았다. 압록강·두만강 및 대동강 유역을 연이어 확보하면서 요하선을 지향한 제군사 행동을 집요하게 추진한 끝에 고구려는 마침내 4세기 말 요하(遼河) 유역을 완전히 장악하게 된다. 이제 한족과의 경계를 요하를 기점으로 잡은 것이다. 이는 마치 기업 경영에서 자사보다 우위에 있는 경쟁사의 바로 코 밑에까지 영향력을 확대해 나간 것을 뜻한다. 나아가 경쟁의 패러다임을 대등한 관계로 새롭게 포지셔닝 시켜 놓은 것을 뜻한다. 고구려가 요동지방을 전략거점화한 것은 동북아에서 하나의 제국으로 웅비할 수 있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동북아에서 수없이 명멸하는 제국가의 하나로 남느냐, 제국의 주인이 되느냐를 결판 짓는 중대한 터닝..
요동확보는 제국발전의 핵심요소 요동확보는 제국발전의 핵심요소 고구려가 제국으로써 비약적인 발전을 하는 결정적 계기는 태왕이 요동을 확보하면서부터이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동북아의 패권을 거머쥐게 된다. 요동은 풍요로운 곡창지대이면서 동시에 철의 산지이다. 개평(蓋平)·해성(海城)의 철광(鐵鑛)과 은광(銀鑛) 및 염산(鹽産), 그리고 요양 부근의 철광은 군사력 유지에 필요한 경제적 기반을 제공해 준다. 따라서 요동을 장악하면, 동시에 이 두 자원을 모두 확보하게 되고 그만큼 전략적으로 우위를 지닌다. 전략적 요충지인 요동을 장악하기 위해 태왕은 원년(391년) 7월에 대(對)거란 군사행동을 개시한다. 이는 요동쟁탈전에 있어 거란과 모용씨가 연계해서 공격해 올 수 있는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하고, 거란에 대한 고구려의 우월적 지위를 확보하..
웅장한 천하경영의 실천 웅장한 천하경영의 실천 고구려의 영토 확장은 시조 동명성왕 이래 끊임없는 투쟁의 대상이었다. 고구려는 영토 확장과 더불어 시작되었고, 그것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것이 경영 목표에서 제외된 적이 한번도 없다. 특히 여전히 창업 단계에 있던 제왕들에게는 이 점이 지속적으로 계승되어야할 과제였다. 만리장성을 중심으로 동쪽의 요서 땅은 건국 무렵부터 전쟁터가 되었고, 전쟁이 끝나면 중립 지대가 되곤 했다. 지금으로 얘기하자면, 비무장지대와 같은 완충지대적 성격이었다. 고구려는 6대 태조대왕 재위 연간(165년), 근 200년 동안 살수 이북에서 동북 옥저와 흥안령 일대의 선비족(鮮卑族)이며 또 요서 일대에까지 고조선의 영토를 거의 회복했다. 이런 창업 군주들의 ‘개토(開土)’경영은 면면히 이어졌다. 최고조에 이른..
배움은 국가 경쟁력의 초석 고구려 후기의 사정을 전하는 『주서(周書)』나 『북사(北史)』고구려 전에는 ”(고구려의) 서적은 오경(五經), 삼사(三史), 삼국지, 진양추(晋陽秋) 등이 있고, 병기는 갑옷과 활, 화살, 창, 방패 등이 대략 중국과 같다.“고 적혀있다. 『구당서(舊唐書)』나『신당서(新唐書)』에서도 ”고구려 사람들은 모두 배우기를 좋아해서 아무리 궁벽한 마을의 없이 사는 집이라도 역시 모두 부지런히 배운다. 길가에는 모두 엄옥을 지어 이것을 당(堂)이라고 하고 자제들 중에 아직 장가들지 않은 자가 있으면 여기 모여서 경서도 외우고 활쏘기도 연습한다. 이때 익히는 책은 오경, 한서, 후한서, 옥편 등이며 득히 문신(紋身)을 중히 여긴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광개토경영의 핵심은 벡터와 점선면 전략 광개토경영의 핵심은 벡터와 점선면 전략 새해 벽초부터 중국이 그간 추진해 온 동북공정의 완결판으로 고구려사는 물론 발해사까지 중국사로 둔갑시켜 버리고 있어 한중간 갈등이 재점화될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때에 우리 역사상 가장 큰 영토와 강력한 국력을 자랑하던 광개토태왕 시기의 국가 경영이 큰 주목을 받고 있다. 태왕은 어떻게 그 엄청난 영토를 확장해 나갈 수 있었을까? 태왕 전략의 핵심은 무엇이었을까? 이 점을 알기 위해서는 우선 태왕이 태어나 활동하던 시기에 대해 알아 볼 필요가 있다. 광개토태왕은 서기 374년 출생하여 392년 5월 고구려의 제19대 국왕으로 즉위한다. 즉위 시 그의 나이는 불과 18세로 소년왕이었다. 왕제(王弟) 시절에는 군중(軍中)의 한 장수에 불과했으나, 태왕이 왕이 된 배경은..
[광개토태왕]문화적 개방성과 다양성의 앙상블 문화적 개방성과 다양성의 앙상블 지정학적으로 볼 때 고구려는 다양한 자연환경이 만나는 매우 독특한 지역에 위치해 있었다. 따라서 문화도 이국적 요소가 산재해 있었다. 연해주와 흑룡강 일대의 수렵삼림문화, 대홍안령 산맥에서 몽골로 이어지는 초원유목문화, 화북의 농경문화, 중국 양자강 유역의 남방문화, 그리고 한반도 문화 등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졌다. 영토 확장에 따라 수많은 종족들이 다양한 문화를 보존한 채 고구려제국의 백성이 되었으며, 고구려는 이들을 수용해 독특하고 수준 높은 문화를 완성시킨다. 이종의 문화를 융합해 새로운 문화를 창조해 낸 것이다. 이는 점차 고구려 독창적인 문화로 발전해 나간다. 고구려 문화가 지닌 자유는 독특한 지리적, 문화적 특성과 유목민족의 문화가 함께 어우러진 것이었다. 이 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