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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경영/글로벌 CEO 누르하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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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을 실현하는 주요한 수단, 경제 뜻을 실현하는 주요한 수단, 경제 예나 지금이나 전쟁은 돈으로 하는 것이다. 누르하치는 여진 사회의 힘의 통합이 경제력에 달려있다는 것을 일찌감치 깨달았다. 그의 대 중국 교역은 바로 이 같은 물적 토대를 마련하기 위한 일환이었다. 누르하치가 경제적 기반을 갖게 된 배경에는 젊었을 때의 경험이 크게 도움 됐다. 그는 젊어서 춘씨 가문의 데릴 사위였는데, 젊은 누르하치에게 춘씨 가문은 사업적 마인드를 가져다주었다. 누르하치가 거병 후 확보한 재원은 그 같은 경험에 바탕을 둔 무역업이었다. 또한 그의 교묘한 대명외교 역시 사업적으로 단련되었기에 얻을 수 있는 성과라고 할 수 있겠다. 춘씨 집안은 일찍부터 한족과 접촉하고 있었던 만큼 명 왕조에게도 우호적으로 보이는 가문이었다. 또 이 가문은 상업적 수단으로 ..
변방에선 반드시 무슨 일이든 일어난다 변방에선 반드시 무슨 일이든 일어난다 여진 세력이 흥기한 것은 엄청난 악조건에서였고, 그것도 한족의 턱 밑인 동북면 변경에서였다. 여진족은 태생부터가 야생성과 관련이 깊다. 여진족의 이러한 야생성은 새로운 국가를 잉태하는 강력한 국가력(國家力)의 하나로 인식된다. 그것은 말(馬)을 통한 기동력과 사냥을 통한 잠재적 군사 훈련을 통해 강화된다. 여진족과 마찬가지로 중국을 둘러싼 이민족의 흥기는 바로 이 같은 악조건을 역으로 도약의 발판으로 삼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더군다나 자원이 없는 까닭에 대 중국 무역 이권을 장악하기 위한 여진사회 내부의 투쟁은 오히려 내부 경쟁력을 검증하고, 강화하는 요인이 된다. 한족이 여진족을 통제하기 위해 축조한 요새들은 여진족에게 새로운 축성 기술을 제공함으로써 여진 ..
[ 누르하치]한족(漢族)의 허구적인 적자 확대론 에 맞서다 한족(漢族)의 허구적인 적자 확대론 누르하치 시기에도 대(對)중국 무역은 활발해 약 200명에서 600명에 이르는 여진족 사신들이 북경을 방문했다. 방문할 때마다 이들은 그들의 지도자만큼이나 영리한 방법으로 명 조정에서 일어나는 정보를 파악하고, 수집했다. 누르하치의 전략상 가장 뛰어난 것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는 이 첩보전은 이미 이 시기부터 시작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를 우려해 명은 남여진의 북쪽 경계인 무순에다가 마시(馬市)를 세워 여진사신들이 만리장성내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했다. 또 망루를 세워 각기 5명의 군사로 수비케 하여 여진 부족원들의 이동을 철저히 감시, 경계하였다. 나아가 회유책도 동원했다. 이는 한족이 오랜 역사 동안 변방의 민족에게 써오던 지극히 일반적인 수법이었다. 예를 들어..
소에 고삐를 묶다 vs. 소, 고삐에서 풀리다 명(明)으로 봐서 이제 누르하치는 완전히 고삐 풀린 소의 모습이었다. 한족이 역사적으로 항시 우려한 게 바로 이런 상황이었다. 변방에서 일어나는 이민족의 도전을 막고자 한족은 오래전부터 ‘위(衛)’라는 군사단위를 설치한다. 나아가 지방의 부족장을 통해 이민족의 각 부족들을 통제하는 간접 지배 방식을 취했다. 당연히 이 부족장들은 고분고분하게 말 잘 듣는 사람들로 채워졌으며, 지위를 세습시킴으로써 한족은 그들로부터 지속적인 충성을 이끌어 내고자 했다. 중국은 이 같은 소고삐 정책을 통해 변방을 중국의 행정체계에 편입시키려 했고, 이민족에 의한 이민족의 지배라는 이이제이 방식으로 친중 사대정권을 수립했던 것이다. 이는 현재에 와서도 그대로 계승되고 있는 한족의 대(對)변방 정책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몽고..
제물에서 주역으로: 경쟁 우위를 확보하다 누르하치 성공 배경에는 항시 요동이 자리 잡고 있다. 요동은 여진족에게는 남만주(南滿洲) 지역에 해당된다. 요동에 대한 지배는 풍부한 곡창 지대에 대한 경략권을 확보한다는 차원에서 안정적인 식량 공급원을 마련하는 것을 의미한다. 요동은 여진족과 명의 접경지대로 중국의 선진 문물을 배워 이를 자기 것으로 만드는데 최고의 전략거점이었다. 나아가 요동은 해상 교통의 요충지이기도 했다. 뱃길로는 가장 짧은 거리로 중국에 가 닿을 수 있었다. 만리장성이 끝나는 바닷가와 맞닿은 철의 요새가 바로 산해관이었고, 그 관문을 통과하면 눈앞에 북경이 닿을 것 같았다. 누르하치가 요동을 눈여겨 본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적과 대립하는 접점 가까이 군사들을 배치할 수 있는 이 같은 교두보는 더할 나위 없이 유리한 조건이었..
적에게서 배워라 그렇다면 청이 건국되는 1600년대에는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났었는가? 유럽에서는 신대륙이 발견되었고, 세계사적 흐름은 전지구적 현상이었다. 청조는 근대 중국을 잇는 가장 가까운 왕조로 출범해, 몽골의 원(元)을 빼고는 중국 역사상 가장 많은 민족과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해 현대 중국에 넘겨준 왕조이다. 그 무렵에 중국에서는 소수 민족인 여진족이 오랜 기간 한족을 지배하고 유지하는 경이적인 일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여진족의 성공 이유에 대해 에드윈 O. 라이샤워와 존 K.페어뱅크 교수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1) 강력한 지도자의 출현 (2) 유리한 시기의 도래 (3) 제부족의 통일 (4) 공통되는 민족명의 부여 (5) 공략에 대한 동기부여 (6) 자손까지 이어진 대업 완수와 후손에 의한 중국..
강자는 변방에서 출현한다 중국의 오랜 전략 중 하나는 주변 세력들이 강한 힘으로 결집되는 것을 막는 것이었다. 오랜 기간 한족은 타민족의 단결을 막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해 왔다. 한족은 그 자체로 중국을 형성할 수 없는 것이었기에 오히려 변방에서 새로 생겨나는 힘과 그것을 막고자 하는 한족 내부의 힘이 변증법적으로 상호작용하며 중국 지배 권력을 형성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한족의 중국을 중국 전체로 이해하는 것은 중국을 형성하는 다양한 힘을 무시하는 태도다. 외부의 힘에 대한 가장 적절한 대응법으로 한족이 취한 정책이 바로 ‘분할 통치(divide and rule)’였다. 그러나 이 같은 한족의 정책은 내부에로 눈을 돌리는 순간 걷잡을 수 없이 들불처럼 피어올랐다. 변방에 소홀한 틈을 타 그동안 감추어왔던 세력들은 그 모습..
죽을지언정 굴신하진 않는다 누르하치는 후금이 생기기 전 요(遼)에 맞서 금을 일으킨 아골타와 많은 점에서 공통점이 발견된다. 우선 이들은 모두 강력한 리더십으로 흩어져 있던 제 부족을 통합했다. 이들은 길들여지지 않았다. 먹고 살기 위해 남여진 지역으로 이동하려했으나, 그들의 진로는 한족에 의해 저지되었다. 불만은 여진사회 내부의 경쟁 원리를 통해 통합으로 이어졌고, 길들여지지 않는 오랑캐식 사고는 결국 중국에 무작정 목줄만 잡히고 있지 않았다. 요 최후의 황제가 1112년 사냥차 북부 여진의 송화강 유역을 방문했을 때 황제는 여진족 추장에게 춤을 추어 보이라고 명령했다. 아골타는 춤추라는 명령을 거부했다. 아골타는 뼈에 사무친 치욕을 갚아줄 날을 기다렸다. 1115년 그는 스스로 황제임을 선포하고 요를 공격, 마침내 요를 멸망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