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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경영/조선관리 먹거리 혁명 리더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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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산을 일으킨 지식 집적의 힘 확산을 일으킨 지식 집적의 힘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반, 구황작물로써 고구마가 조선에 자리 잡아가는 과정은 고구마 관련 지식이 종합되고 정리되어 가는 과정과 일치한다. 처음엔 고구마가 도입되면서 같이 들어온 일본식 재배법이 쓰이다가 점차 조선의 토질과 기후 특성에 맞는 재배법으로 발전되어 갔다. 여기에 중국에서 활용되던 고구마 재배 지식이 들어오고, 조선만의 토착적인 고구마 재배법이 더해짐으로써 우리만의 독특한 지식이 만들어 졌다. 즉 우리 지식을 만들기 전에 일본과 중국의 지식을 최대한 벤치마킹한 뒤 이를 기반으로 ‘우리 것 화(化)’ 해 나갔다. 고구마에 관한 한, 한국형 ‘밑바탕 지식’을 정립한 것이다. 이런 일련의 과정은 오늘날 우리 산업을 이해하는 하나의 시금석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
재혁신의 주창자들 재혁신의 주창자들 18세기 후반 이후 고구마 재배가 어느 정도 활기를 띠었는지 살펴보는 것은 먹거리 혁명의 성과를 평가하는데 중요할 것으로 본다. 조선후기 구황작물인 고구마는 조선 전래 직후부터 조정과 민간으로부터 뜨거운 관심을 모았지만, 무슨 연유에서인지 19세기말까지 남해안 일부 지역에서만 재배되고 있었다. 재배가 불가능 한 것도 아니고 보급이 안 된 것도 아니었는데 무엇이 문제였을까? 정부에서는 사정이 이러하자 적극적인 관심을 기울여 고구마 보급에 나선다. 18세기 후반 정조 연간에는 고구마 재배를 확대하여 구황효과를 높여야 한다는 주장이 수차례 제기되기도 했다. 그렇다면 미진한 보급 확대의 원인과 이를 타개하고자 한 내부혁신, 재혁신은 어떻게 나타났을까? 당시의 사정을 잘 알 수 있는 자료가 있다..
초발확산가들의 무한 지식경영 초발확산가들의 무한 지식경영 주지했다시피 고구마의 최초 전래자는 조엄이다. 하지만 이를 전국적으로 확산시킨 인물은 강필리와 이광려, 김장순 같은 이들이다. 특히 강필리는 1764년 8월 동래부사로 부임해 온 뒤 조엄이 6월에 2차로 전달한 종자를 받아 보관하는 한편, 조엄의 요청에 따라 일부를 제주도로 보냈다. 이때 종자와 함께 조엄이 보낸 재배법 자료는 구황 작물 보급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이 점에서 강필리가 편찬한 ⟪강씨감저보⟫는 1764년 조엄이 대마도와 일본에서 수집한 자료를 보완해 편찬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기록을 남기지는 않았지만, 부산진 첨사 이응혁이 절영도에서 시험 재배한 경험도 반영되었을 여지가 있다. 강필리의 역할이 없었더라면, 조선에서 처음으로 재배하는 고구마 종자는 각 지방으로..
혁신을 외면한 사람들 혁신을 외면한 사람들 조엄이 1763년 10월 중순 경 대마도 사스우라에서 고구마 종자를 얻어 부산진 첨사 이응혁에게 급히 보낸 것은 앞서 설명한 바와 같다. 종자를 받은 그는 이듬 해 봄에 처음으로 파종했지만, 파종과 관련해 특별한 재배 관련 자료를 남긴 것은 아니다. 반면에, 후일 부임하는 강필리는 이전 첨사가 진행한 프로젝트를 맡아 끝까지 수행하며 구체적인 임상 자료를 남긴다. 이 점은 두 사람이 크게 대조되는 부분이다. 여기서 우리는 혁신가와 그렇지 못한 자의 뚜렷한 차이점을 보게 된다. 1763년 이응혁은 이미 통신사 일원으로 발탁된 바 있다. 1차 정사 지명자인 서명응이 그를 사행단의 군관으로 선정한 것이다. 그러나 이응혁은 사행단에 드는 것을 거부했다. 이응혁이 사행단 참가를 거부한 이유는 ..
초발확산을 부르는 힘 초발확산을 부르는 힘 과거에는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일이 갑자기 수면 위로 급부상하는 경우가 있다. 심연의 어떤 지점에서 변화가 일고 있다가 이를 발화시키는 어떤 사회적 요인에 의해 갑자기 대유행이 되곤 한다. 사람들의 인식이 확 변하는 순간과 새로운 상품이 지닌 강한 선도성이 고객 니즈와 맞아 떨어지며 히트상품이 되는 것이다. 예컨대, 일본에서 포도주는 인기 없던 술인데 갑자기 누군가 포도주에 함유된 ‘포리페놀’이 좋다고 하자, 폭발적으로 인기를 끈 적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마찬가지로 ‘누보와인’(Nouveau・햇포도로 담근 포도주)이 한때 대인기를 끈 적이 있다. 숙성 안 된 햇포도주로 사람들이 몰린 데에는 맛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기존의 인식을 바꾸는 어떤 숨은 계기가 있었을 것이다. 마케팅은..
확산 모델과 지식 누적 시스템 확산 모델과 지식 누적 시스템 조엄의 고구마 프로젝트에는 최초에 조엄이 등장하고, 곧 바로 투톱 시스템이 적용된다. 고구마가 조선 남부지방에서 널리 퍼지기 시작한 것은 1764년 8월 동래부사로 강필리가 부임하면서였다. 전래자 조엄이 초발혁신가라면 실질 초발확산가는 강필리가 자임했다. 강필리는 1764년 8월 20일 동래부사로 취임해 2년 후인 1766년 11월 이임했다. 조엄이 일본으로 떠난 1763년 10월 6일에서 귀국한 1764년 6월 22일 사이 동래부사는 송문재였다. 그러나 그가 신병으로 인해 사임하고 나자, 8월 20일 강필리가 부임한 것이다. 조엄과 부임시기가 맞지 않아, 프로젝트의 성공은 운에 맡겨질지 모를 일이었다. 다행스럽게 조엄이 귀국길에 가지고 온 종자는 다시 신임부사 강필리에게 ..
‘표적집단 면접법’과 자원 투여 전략 ‘표적집단 면접법’과 자원 투여 전략 조엄이 고구마 종자를 제주도로 보낼 생각을 했던 것은 1719년부터 1763년 사이 제주도에 유독 기근이 많이 들었다는 점이 크게 반영된다. 또한 사행중 대마도 이즈하라(嚴原)에서 제주도 표류민을 만난 일도 작용했다. 조엄 통신사 일행은 1764년 6월 귀로에 대마도에서 제주도 표류민들이 귀국선편을 기다리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이들을 불러 격려한 일이 있다. 이때 재배법을 기록하고 있던 조엄은 표류민 일행을 만나 위로하며 제주도의 토양이나 기후에 대해 자세히 물어보는 확인 작업을 했다. 땅과 작물간의 상관성에 주목해 간접적이나마 현장체험을 한 것이다. 이들과의 대화를 통해 고구마가 충분히 아침・저녁을 대신할 수 있는 미곡 대체재라는 점, 우리도 널리 재배했으면 좋겠다..
‘먹거리’ 혁명의 시작 ‘먹거리’ 혁명의 시작 고구마가 조선에 보다 일찍 소개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누구도 명약관화하게 일반 백성들의 식생활에 깊은 관심과 안목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일 고구마가 좀 더 일찍 보급되었더라면 적어도 50여년간 조선의 식량, 구휼 문제는 크게 달라졌을 수 있고 수많은 인명을 기아로부터 건질 수 있었을 것이다. 결국 조엄 이전 통신사에 속한 모든 관료들은 목민관으로서의 사명감이 부족했다고 할 수 있겠다. 혹은 국가적 외교 현안에만 빠져 다양한 기회를 접할 기회를 스스로 차단해 버린 결과로 볼 수도 있다. 그런 와중에 유독 조엄만이 대마도에서 고구마를 발견하게 된 까닭은 무엇일까? 여기에는 아마도 1731년(영조 7) 사은부사로 청나라에 다녀 온 아버지 조상경(趙尙綱)의 영향이 크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