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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의 CEO 세종] 이권(利權)은 오너에게 집중된다?

전경일 2009. 2. 3. 17:45
 

상업을 포함하여 경제 전반에 대한 운용과 관장은 최종적으로 국가와 CEO에게 속하는 권리였다. 조선 정부는 전체 상업을 독점 관리하였고, 이들 상업과 상인의 활동은 국가가 장악하여 통제했다. 이것을 ‘이권재상(利權在上)’이라고 한다. 이는 모든 이권은 상(上), 즉 국가와 오너에게 귀속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군주제 하에 당대 상업론의 핵심이었다.


따라서 현실 세계에서 경제상의 이권을 둘러싸고 전개되던 신분 질서는 아래로 내려가 ‘상(上)’이 사(士)와 농(農)을, ‘하(下)’가 공(工)과 상(商)의 위치를 점하며 이를 지배하는 구조였다. 그리고 그 맨 위에는 임금, 즉 국가 CEO가 있었다. 조선은 한마디로 한 가계(家系)가 소유하고(family owned) 경영권을 행사하되, 관료들과의 경쟁과 협력 그리고 균형도 같이 취하는 매우 활발한 유기적 경제 조직체였다. 그리고 이것은 CEO의 역량과 매우 밀접하게 관련 있었다.


이와 같은 제도적 배경에 따라 상업에서도 양반 지주층의 이권이 우선시 되었다. 지주층들은 상(商)은 상(常)의 영역이라 치부했지만 상업 활동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잉여물을 처분하거나, 자본 증식을 위해 다양한 유통 경로를 통해 상업 활동을 벌였다. 그리고 그런 과정에서 그들은 재산 관리인 또는 대리인들을 활용했다. 즉, 상업은 가장 말단으로 둔 신분 체제였지만, 전제 경영을 움직이는 원동력이었고, 누구도 거기서 한 치도 벗어 날 수 없었던 것이다. 사실, ‘경제’에서 누가 벗어날 수 있겠는가!


하지만 당시의 경제 및 경영관인 이러한 ‘이권재상론’이 오너 혼자 독식하는 구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유교적 이념에 근거해 국가 오너의 이권 장악은 자연자원을 개발해 만인을 이롭게 하기 위한 것으로 설명되었고, 이것이 CEO의 임무로 여겨지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즉, ‘이권재상론’은 경제를 최종적으로 국가 CEO가 장악해 국민 전체의 안정을 도모하여야 한다는 논리를 배경으로 한 것이었다. 그런 의도에서 상거래의 편의성을 도모하고 민의 빈부(貧富)를 균등히 하려는 목적으로 화폐 유통은 절실하게 필요했다.


[대(對) 중국 국제 무역수지를 개선하라]


이러한 정책과 더불어 세종은 교환경제를 정비했다. 우선 세종 정부는 전임 CEO인 태종 때의 국내 상업의 근간이었던 시전(市廛)을 그 외형과 운영 측면에서 더욱 정비했다. 공물(貢勿)과 진상물(進上物)ㆍ방물(方物) 들이 시전에서 일상적으로 무납(貿納)되었다. 시전과 도성(都城)상업이 성장하는 한편 지방 상업 또한 육로를 통한 상업과 해로를 통한 상업 활동을 통해 확대되었다. 세종 정부는 이들의 상업 활동을 보호하고 통제하기 위해 비즈니스 여행객을 접대하는 교통 숙박시설인 ‘원(院)’의 정비에 나섰고, 선상 활동에 대한 보호와 지원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세종시대의 행상 정책 하에서 육상과 선상의 활동은 전국 방방곡곡에 이르고 있었고, 이를 토대로 백성들의 일상 수요의 안정적인 공급과 지주자본의 회전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대외 무역 중 명나라와의 공무역은 진헌물(進獻物)에 상응하는 사여물(賜與物)을 수령하고, 또 과중한 부담이 되고 있던 금은(金銀)을 세공(歲貢) 품목에서 소ㆍ말ㆍ베로 대체시키는 성과를 얻어냈다. 이는 무역의 실리를 추구하기 위한 정책적 결과였다.


이 때 조선이 중국에서 들여온 것은 서적ㆍ약재ㆍ악기ㆍ화약 등 조선에 필요한 물품들이었고, 명이 조선에 요구한 것은 말ㆍ소ㆍ화자ㆍ처녀ㆍ송골매ㆍ사냥개 등이었다. 조선은 이를 통해 단순히 중국의 문물을 수입하는 것에 그친 것이 아니라, 화약ㆍ조선기술ㆍ산법 등의 기술을 익히려고 하였다. 또한 젊은 자제들을 명에 유학 보내기도 하였다.


[고려는 IMF로 망했다?]


이 시기 금은 국제통화이자 고려 말 국부유출과 국제 수지 적자의 주요 원인이었다. - 고려의 재정 부실 원인은 바로 대외무역에서 금은의 대외유출과 주요 수출품 조달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 그런데 특이한 것은 세종시대에 들어, 명이 3년에 1번 조공을 받치라고 한 것을 조선은 오히려 1년에 3번 조공을 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이러한 조선의 정책은 세종시대에 들어 대명관계가 안정되면서 본격화 되었고, 이 과정에서 진헌품에 상응하는 사여물을 수령함으로써 조선은 국제 수지에서 균형을 유지할 수 있었다. 즉, 조선이 일년에 3번 조공을 하겠다고 한 것은 사대외교의 명분도 취하며, 동시에 무역 실리를 꾀하기 위한 무역 전략 일환이었다.


이 시기 진헌품, 즉 명에 진상하는 물품은 공짜로 바친 것이 아니라, 국가간 교역의 형태로 이루어 졌다. 즉, 조공(朝貢) 무역이었던 셈이다. 이는 양국간 공식적인 무역 방식으로써 이에 따르지 않는 사(私)무역에 대해서는 엄격한 통제를 가했다. 조선은 이러한 무역을 통해 국내에 필요한 물품을 조달하였고, 더불어 중국을 통해 들어오는 서방 이슬람의 문물도 수입할 수 있었다. 따라서 조공 무역은 조선의 국제 시장에 대한 안테나 역할을 톡톡히 수행했다.


[대일 무역 장정을 맺다]


한편 대마도 정벌 이후 안정된 대일 관계는 무역 확대로 이어져, 대마도와 대일 무역의 기본 장정이라 할 수 있는 계해약조(癸亥約條)를 체결(세종 25년)하였고, 3포도 개항하였다. 동(銅)ㆍ단목(丹木)ㆍ소목(蘇木) 등 국내 수요에 기반한 대일 사무역은 3포와 남해안을 거점으로 계속 이루어 졌다. 특히, 일본으로부터의 동(銅)의 수입은 화폐를 만들기 위해 꼭 필요했다.


세종은 즉위 초부터 화폐의 보급과 유통에 관심을 가져 세종7년에 ‘조선통보’를 발행해 본격적으로 보급ㆍ유통시켰다. 동전 사용 방침이 확정된 후에는 동전을 사용하지 않는 자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여 유통에 심혈을 기울였고, 특히 정기적으로 정부미를 방출해 동전 유통에 대한 시장의 공신력과 가치 유지를 도모했다. 그러나 정부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동전 사용은 시장과 백성들로부터 불신을 받았고, 일본에서 수입되고 있던 주전용 동(銅)이 제대로 조달되지 않자, 주전이 잘 이루어지지 않아 동전 유통량 부족으로 결국 실패로 돌아간다. 그리하여 세종 14년(1432) 6월에는 각사 소속 공노비의 신공(身貢, 즉 임금)을 돈으로 주자는 방안도 논의 되게 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세종은 국가 경제의 현안 문제를 알고, 균형 있는 정책 실시로 경제 개발을 주도했던 것이다.


[세종으로부터 배우는 경영 정신]


* ‘선부후교(先富後敎)’의 원리는 사실 어느 시대나 통용된다. 즉,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누구도 제대로 경영했다고 볼 수 없다. CEO가 당면한 가장 중요한 문제는 바로 이것이다.


* 이슈(issue)가 무엇인지 알아라. 만일 CEO가 이를 깨닫지 못한다면, 성장의 기회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은 물론이려거니와, 구조적 문제의 해결에 나설 수 없다. 이것이 CEO의 ‘현실감’ 있는 경영이다.


* 하나의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다른 많은 기회에 관심을 기울일 수 있는 여유를 가져온다. 그리하여 잉여의 시간ㆍ노동ㆍ자본과 같은 자원을 만드는 것은 성공에의 절대적 요소이다.


* 가장 핵심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CEO가 맥을 제대로 짚는 것이다. 그 맥을 제대로 짚고 가라. 그 맥을 놓친다면, ‘문제’는 건강한 조직의 혈류를 타고 마구 흘러 들어가 병들게 할 것이다.


* 만일 당신이 특정 기업의 오너라면, 당신은 ‘이권재상(利權在上)’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 사실 이것은 누구나 다 그러고 싶은 희망사항이기도 하다. 그러나 만약 만인을 이롭게 하지 못한다면, 당신은 어떠한 ‘이권’도 저항 없이 얻어 내기 어려울 것이다.

* ‘조공 무역’도 의미 있는 경우가 많다. 많은 경우 사업이란, 누군가의 니즈(needs)를 채워주기 위해 자신을 낮추는 행위이다. 문제는 실리와 안정 그리고 균형에 있다. 이것을 얻어 내는 게 지혜로운 경영이다.


* 시장으로부터 공신력과 가치를 얻고, 이를 유지하라. 당신의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시장으로부터 외면을 받는다면, 당신이 추진한 일은 결국 실패로 돌아갈 것이다. 세종시대의 화폐정책이나, IMF로부터의 교훈 등이 바로 이것이다.


ⓒ전경일, <창조의 CEO 세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