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경영/르네상스 경영학

역경 속에 조직을 지탱하는 놀라운 비전의 힘

전경일 2025. 5. 30. 11:32

 

어둑한 새벽, 허름한 옷차림으로 거리를 활보하며 분주히 폐지를 줍는 젊은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나는 지금 폐지를 줍는 것이 아니라, 숲을 만들어가는 중이다!’ 그녀의 그런 당찬 꿈은 척박한 환경도 초월하며 그녀의 열정에 불을 지폈다.

 

일명 폐지 여왕이라고 불리는 중국 주룽제지(玖龍造紙) 장인(張茵) 회장의 이야기다. 1995년 장인 회장이 설립한 주룽제지는 버려진 폐지를 모아 재가공하여 각종 포장지를 만드는 중국 최대의 제지회사로, 2011년 전문지 <펄프&페이퍼인터내셔널>이 발표한 세계 100대 제지업체 중 31위를 차지했다.

 

2010<포브스>의 발표에 따르면 10억 달러 이상의 자산가는 전 세계에 1,210명으로, 이중 여성 부호 대부분은 아버지의 유산이나 남편의 재산 덕에 부자로 이름을 올렸다. 자수성가한 여성은 13명에 불과했는데 그중에서 장인 회장은 다섯 손가락 안에 꼽혔다. 2010년의 자산이 330억 위안으로, 중국 전체 부자 순위에서도 3위에 올랐다. 허름한 옷차림으로 폐지를 줍던 여인이 세계 최고 부호의 대열에 오른 것이다.

 

폐지 더미에서 숲을 보다

1957년 중국 헤이룽장성에서 태어난 장인 회장은 가난한 집안의 8남매 중 장녀였다. 유난히 생활력이 강했던 그녀는 1980년 중국 선전의 제지회사에서 경리로 일하며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5년 뒤, 28세의 나이에 장인은 그동안 악착같이 모은 돈 3만 위안을 들고 혈혈단신 홍콩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폐지 회수 및 무역업을 시작했다.

 

그때 남들은 폐지 더미를 쓰레기로 생각했지만, 나에겐 나무가 빽빽이 들어찬 숲으로 보였다.”

 

그녀가 홍콩에서 처음 한 일은 넝마주이들이 주워온 폐지를 수집해서 중국으로 넘기는 일이었다. 당시만 해도 중국에서는 고급 종이의 원료가 귀했기 때문에 사업은 빠르게 성장했다. 장인의 폐지는 유독 인기가 좋았는데 그 이유는 무엇보다 제품이 정직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폐지업계에는 종이에 물을 뿌려 중량을 훨씬 더 나가게 하는 암묵적인 관행이 있었는데 장인은 그런 편법을 거부했다. 수분을 머금은 폐지는 질이 떨어질 뿐 아니라, 자신의 양심까지 속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문제는 동종업계의 사람들이었다. 인맥과 연줄을 중시하는 중국인들의 꽌시(關係) 문화는 조직의 존폐를 좌우할 정도로 영향력이 컸다. 장인은 동종업계 사람들에게 수차례 위협과 협박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인이 독보적으로 앞서나갈 수 있었던 것은 역시 꽌시 덕분이었다. 장인의 꽌시는 다름 아닌 넝마주이들과 맺은 가족과 같은 꽌시였다. 넝마주이들 사이에서 장인은 큰 누님으로 통했다. 그녀는 새벽부터 같이 폐지를 주우며 추운 날에는 따뜻한 커피를 타주고, 갈 곳 없는 사람에겐 자신의 숙소를 내주는 등 큰누나 역할을 자처했다. 중국 동북 상인들은 매우 정이 깊은 것으로 유명한데, 헤이룽장성 출신인 장인 역시 동북 상인답게 그들과 끈끈한 정을 나누었다. 게다가 용량이 적게 나가더라도 젖지 않은 폐지를 갖고 오면 다른 곳보다 후하게 종이 값을 쳐주었기에, 그녀는 업계 내에서 단번에 독보적인 폐지 수집상으로 대두되었다.

 

홍콩에서 벌인 폐지 사업이 안정을 찾을 무렵 장인은 더 큰 무대로 눈을 돌려 미국으로 진출했다. 당시 미국은 제지기술이 매우 우수했고 종이 사용량도 세계에서 제일 많았다. 1990년 미국에 아메리카 청남(America Chung Nam)’이라는 회사를 설립한 그녀는 중고 밴을 타고 미국 전역을 돌아다니며 악착같이 폐지를 모으기 시작했다. 그리고 10년에 걸쳐 미국 전역에 7개의 폐지 수집, 포장, 운송회사를 추가로 설립했다. 1995년에는 중국으로 다시 돌아와 훗날 중국 최대의 제지업체가 되는 주룽제지를 세웠다.

 

뚜렷한 비전으로 밸류체인을 꿰뚫어보다

장인의 파란만장한 도전이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은 밸류 체인(value chain)을 꿰뚫어본 그녀의 비전 덕분이었다. 장인이 사업을 시작할 당시는 소비력의 차이 때문에 중국에서 미국으로 수출되는 제품은 많았지만 반대로 미국에서 중국으로 수입되는 제품은 거의 없었다. 그녀는 물건을 가득 실은 컨테이너선들이 미국에 물건을 내려놓은 뒤 텅텅 빈 채 중국으로 돌아가는 모습에 주목했다. 그리고 중국으로 돌아가는 빈 배에 폐지를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미국에서 넘쳐나는 폐지를 싼값에 사들여 저렴한 가격으로 중국에 운송, 이를 다시 중국의 저가 노동력을 활용하여 재가공한 다음 세계 각국으로 수출한 것이다.

 

미국산림제지협회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의 폐지 수출 주요 대상국은 중국으로, 여기에는 장인 회장이 세운 미국 법인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당시 아메리카 청남이 폐지 수출 기업 1위를 기록했기 때문이다. 그녀의 통찰력이 그녀 개인으로 하여금 비전을 향해 나아가게 도와줬을 뿐 아니라 두 나라의 수출입 지도까지도 뒤흔든 것이다. 우리는 흔히 성공의 결과를 보지만, 그 과정은 작고 비루해 보이는 일을 현장에서 실천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앞날을 내다보고 부지런히 준비하면 못할 일이 없다

리카싱(李嘉誠)은 전 세계 수많은 국가에서 토지, 호텔, 통신, 에너지, 기초건설, 항구, 바이오기술 등 다양한 사업체를 보유한 화교 기업가이다. 리카싱의 청쿵(長江) 그룹은 1950년 설립된 이래 단 한 번도 적자를 기록한 적이 없다. 그리고 리카싱 본인의 개인 자산도 전년도에 비해 항상 성장해 왔다.

 

1957년경, 한 플라스틱 공장의 사장이었던 리카싱은 더 이상 장난감이나 생활용품을 생산하지 않기로 했다. 그 대신 홈 인테리어용 플라스틱 꽃을 생산하기로 한다. 당시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12년이 지나 전쟁으로 침체되었던 세계 각국의 경기가 회복되던 시기였다. 사람들의 생활수준이 향상되면서 실내 인테리어에 대한 수요가 증가했다. 리카싱은 이런 상황에서 분명 플라스틱 꽃이 주목받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의 생각은 적중했다. 플라스틱 꽃은 출시되자마자 고객들이 앞 다투어 살 만큼 인기상품이 되었다.

 

리카싱은 이렇듯 사업적 기회를 판단하고 이를 포착하는 능력이 탁월했다. 그는 그의 능력을 부러워하는 이들에게 항상 배움의 끈을 놓지 말라며 다음과 같이 충고했다.

 

항상 배우는 자세로 새로운 정보를 얻는 것이 중요해요. 저는 아무리 바쁘고 고단해도 잠들기 전에는 반드시 경제 전문 잡지를 읽습니다. 그 과정에서 지식과 정보를 많이 얻어요. 저의 판단력은 바로 거기서 나오는 것입니다.”

 

리카싱은 또 착실히 비전을 좇는 근면을 성공의 비결로 꼽았다.

 

부지런해야 성공합니다. 누구나 본인이 쏟은 노력만큼 성과를 얻을 수 있어요. 또 성과에 따라서 보수도 결정되는 법이고요. 행운은 아주 작은 부분일 뿐입니다.”

 

리카싱의 얼마나 부지런하고 또 배움에 대한 열정이 큰지 보여주는 일화가 많다.

 

그는 열네 살 때, 집안 형편 때문에 학업을 중단하고 혼자서 가족을 부양해야 했다. 이런 불운 속에서도 리카싱은 절대 학업의 끈을 놓지 않았다. 당시 어려웠던 시절에 대해서 그는 사람들은 저에게 독학을 했다고 표현합니다. 하지만 가진 것이 없었던 저는 남의 것을 빼앗다시피 치열하게 배웠습니다.”라고 회상했다.

 

리카싱은 독학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엄격한 기준을 정했다. 소설이나 가십거리용 글은 절대 읽지 않았다. 그는 어슴푸레한 등불 아래서 교재를 읽으면서 핵심내용을 추려냈다. 그리고 핵심내용을 가지고 선생님과 학생이 서로 대화하듯 자신에게 묻고 스스로 대답했다. 학력도 인맥도 돈도 없던 그로서는 공부만이 가난에서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출구였다. 그에게는 비전이 있었기에 어려운 현실을 초월하여 학습에 매진할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리카싱에게도 기회가 찾아왔다. 당시 그가 근무하던 공장의 서기 역할을 하던 문서담당자가 병가를 냈다. 그러자 문서를 작성해 줄 사람이 필요했던 사장은 글을 잘 쓰는 사람이 있는지 직원들에게 물었다. 그러자 직원들은 늘 책에서 손을 놓지 않고 글을 썼던 열일곱 살의 잡역부 리카싱을 가리켰고, 리카싱은 사장의 지시에 따라 편지 몇 통을 썼다. 리카싱이 쓴 서신을 받은 사장의 친구는 매우 마음에 들어 하면서 사장에게 말했다.

 

자네, 이 친구를 언제 데려왔나? 원래 있던 친구보다 훨씬 잘하는군.”

 

이 사건을 계기로 사장은 리카싱을 새삼 높이 평가하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에 리카싱은 잡역부에서 창고관리인으로 승진하였다. 리카싱은 당시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지식은 운명을 바꿉니다. 그때 제가 글을 몰랐다면 그런 절호의 기회를 포착할 수 있었을까요? 또 승진은 감히 꿈도 못 꿨겠죠. 창고를 관리하면서는 화물의 출납을 이해하게 되었고 화물을 관리하는 법도 배웠습니다.”

 

그는 도매상의 영업직으로 자리를 옮긴 이후로도 남들의 배로 열심히 일하면서 탁월한 판매실적을 남겼고, 스무 살에는 그 가게의 사장이 되었다. 사장이 되고 나서 생활 형편도 풍족해졌다. 하지만 그는 거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때까지 리카싱은 중학교 수준의 영어밖에 하지 못했지만 <모던 플라스틱(Modern Plastics)>이라는 영문 잡지를 구독했다. 모르는 단어가 나올 때마다 부지런히 사전을 찾아가면서 전 세계 플라스틱 시장의 추이를 파악하기 위해 노력했다.

 

지식이 늘면서 지혜도 늘어갔다. 아는 것이 많아지면서 거만해지려 하는 마음을 추스르고 오만하면 반드시 패한다.’는 교훈을 늘 상기하고 겸손해지려고 애썼다. 늘 배우는 자세로 준비하는 데서 성공은 시작되었다. 오늘날 청쿵(長江) 그룹은 허드렛일을 하는 가운데 가치를 찾고 이를 키운 리카싱의 준비 경영이 이뤄낸 쾌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