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중, 과거의 패러다임을 일대 혁신해 내다
중국 역사상 춘추전국시대만큼 수많은 일화와 교훈을 던져준 시기도 없다. ‘와신상담’, ‘오월동주‘ 와 같이 지금도 우리가 쓰고 있는 사자성어의 상당 부분이 이 시기에 벌어진 사건, 일화에 근거한다. 또 오늘날에도 회자되는 ’합종연횡‘, ’오월동주‘와 같은 다양한 전략, 전술의 의미를 지닌 성어도 이 시기에 쏟아져 나왔다. 이 같은 역사적 배경을 알면 한 시대를 이해하는 것은 물론이고 오늘을 준비하는 우리로서 더 큰 지혜를 얻을 수 있다. 자, 그럼 지금으로부터 약 2800~22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중국 전추전국 시대의 진수를 만나보자.
중국 역사에서 춘추전국시대란 기원전 770년 주나라가 융족에게 밀려 동쪽 낙양 (낙읍) 으로 옮겨온 시대로부터 진(秦 )나라가 전국을 통일한 기원전 221년까지 대략 550년의 기간을 말한다.
중국 역사는 상(商) 나라에서 시작 되어 주(周) 나라와 춘추전국시대를 거치면서 거대 제국으로 발전했다. 이 시기에 공자가 꿈속에서라도 만나기를 희망한 주공(周公) 의 ‘주례(周禮) ’가 만들어졌고, 또 와해되기도 했다. 하지만 주례 질서의 와해는 춘추전국이라는 흥미롭고도 치열한 열국의 각축과 흥망성쇠의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바로 이 시기에 중국 하면 떠오르는 여러 정치, 사상의 원형들이 형성되었다. 춘추시기의 역사를 해설한 『좌전(左傳 )』은 중국과 우리나라의 역대 사대부들의 정치학 교재가 되었으며, 『사기(史記) 』와 『전국책(戰國策)』 같은 역사책은 국가 경영의 정치적, 군사적, 외교적 책략과 더불어 그 시대를 살아간 수많은 사람들의 삶과 운명, 성공과 좌절의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다.
또 패업과 생존, 그리고 통일을 위한 정치투쟁 시기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질서를 찾기 위한 지난한 탐색기이기도 했다. 이러한 노력은 사상 분야에서 백가쟁명(百家爭鳴) 시대를 연출했다. 흔히 제자백가(諸子百家)라고 불리는 지식인[士] 들은 자신들이 그리는 이상 세계를 설파하고 현실에 적용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노력했다. 특히 유가, 법가, 노장 등은 오늘날 중국의 일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천하의 패권을 잡고자 분투하는 영웅호걸들의 이야기와 수많은 격변적 사건들은 당 시대를 전쟁과 사상이라는 두 축으로 울리면서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렸다. 그 속에서 수많은 이야기가 탄생했다.
이제, 이같은 이해를 갖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열었던 관중의 예를 살펴보자.
기원전 7세기에 활약한 관중은 제(齊) 나라의 명재상이다. 그는 주군인 환공(桓公) 을 보좌하면서 춘추의 질서를 설계한 인물이다. 우리로 얘기하자면 태조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창업한 삼봉 정도전과도 같다고나 할까.
관중은 그가 살았던 당대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다. 어떤 사람들은 입이 마르도록 그를 칭찬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그를 폄하한다. 그러나 관중을 평하는 사람들조차 모두가 인정하는 것이 있다. 바로 그야말로 중국 역사상 새로운 패러다임을 열어젖힌 인물이라는 것이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관중이 만든 패러다임을 배척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인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좋든 싫든 분명한 것은 관중이 과거의 패러다임을 바꾸었다는 것이다. 관중이 시도한 것 중엔 성공한 것도 실패한 것도 있지만, 둘 모두 가히 혁명적이다.
중국 역사상 관중은 새로운 질서, 새로운 패러다임의 건설자라 칭할만하다. 훗날 관중의 이름을 빌린 방대한 문집 『관자』가 나온 것도 관중의 행동 자체가 그만큼 영향력이 컸기 때문이다. 사농공상의 분업, 시장의 활성화, 국제무역, 농지개간, 세제개혁, 중앙과 지방 행정체제 확립, 삼군제도의 정비, 법령의 집행의 방식 확립, 존왕양이와 회맹질서의 수립 등 오늘날까지도 유효한 이 모든 것이 관중의 머리에서 나왔다.
관중은 인간적으로도 굉장히 매력적인 인물이다. 뻔뻔한가 하면 염치 있고, 몰아치는가 하면 또 부드러운 마음도 있다. 이처럼 관중만큼 새로운 시대를 매혹적으로 이끈 이도 없다. 춘추시대에 군주를 대신하여 전권을 잡는다는 것은 극도로 위험한 일이라서 이런 사람치고 제명에 죽은 사람이 없다. 그러나 관중은 처음부터 끝까지 고자세를 유지했고, 게다가 천수까지 누렸다.
관중의 이런 점 때문에 훗날에도 그는 2인자들의 꿈이었다. 그러니 제갈량도 자기 자신을 관중에 비유했는지 모른다. 그렇다면 관중의 어떤 점이 이런 평가를 가져오게 한 것일까?
순자는 공자의 말을 빌려 관중이 천자를 보필할 교양인이 아니라 예를 모르는, 즉 교양이 없는 ‘야인’이라고 평했다. 말하자면 관중은 소인이 아니라 야인인 셈. 이 말은 잘 새겨들을 필요가 있다. 고대에서 야인이라는 말의 의미는 도성 밖의 사람, 곧 귀족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런데 도성에 기반을 두지 않은 인간이 패업의 드라마를 연출한 것이다. 해서 더 드라마틱하다.
공자나 맹자조차도 관중의 영향을 받았다. 공자가 말한 “의식이 풍족해야 예를 안다”는 말은 “먹을 것이 있어야 예의염치를 안다”는 관중의 말을 그대로 따다 옮긴 것이다. 또 맹자가 “관문에서 검사만 하고 세금을 거두지 않고, 시장에서는 단속만 하고 세를 걷지 않으며, 농부에게 조법(助法)을 적용하고 기타 잡세를 거두지 않으면 경제는 잘될 것이다”라고 한 것도 관중을 따라한 것이고, 또 성세에는 “산림과 천택(川澤)에 백성이 접근하는 것을 막지 않는다”라고 주장한 것도 관중의 말을 옮긴 것이다.
이것 말고도 더 있다. 맹자가 물가정책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풍년에는 개도 사람이 먹는 것을 먹고, 흉년에는 사람이 (못 먹어서) 죽어나간다”고 했는데, 이는 관중의 말 그대로이다. 이처럼 관중의 정책은 유가의 기본적인 경제관으로 작용하고 있다.
맹자는 제나라의 땅을 딛고 있었는데, 그 제나라의 경제사상이 거의 모두 관중에게서 나왔다. 이 점에서 관중은 중국 최초로 경제학을 정립한 사람이다. 아마도 세계 최초로 재정학의 핵심을 이해한 사람이 아닐까 한다. 이렇듯 경제 문제에 관한 한 공자나 맹자, 순자 모두 관중을 따르고 있다.
이런 관중은 특징은 뭘까? 그는 야인의 관점에서 세상을 본다. 그는 백성들이 원하는 것을 가져다주는 것이 정치의 본질이라고 생각했다. 예나 지금이나 정치의 핵심은 경제다. 처음부터 끝까지 관중의 사상은 철저하게 경제학의 입장에 서 있다. 그것도 오늘날의 협소한 경제학이 아니라 방대한 스케일의 정치경제학. 이처럼 관중의 사상은 유학의 사상보다 훨씬 잘 민생과 결부된 밑바닥을 잘 이해했다.
관중의 밑바닥 삶을 알 수 있는 일화가 있다.
『사기』 「관안열전」에 나오는 관중의 청년시절 회고담이다. 그의 청년시절에 등장하는 이가 지음(知音)인 포숙이다. 다음은 그 일화다.
“일찍이 가난하던 시절, 나는 포숙과 함께 장사 [賈] 를 했다. 이익을 나눌 때 내가 더 가졌는데 포숙은 나를 욕심쟁이라고 하지 않았다. 내가 가난함을 알았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 관중은 가난했다. 그는 가난 타개법으로 상업을 선택했다. 하지만 결과가 좋았던 것은 아니다. 장사에 큰 재미를 보지 못하고, 모사에도 실패하고, 출사에서조차 실패했다. 더 큰일은 전투에도 실패했다. 하지만 이런 실패 경험이 관중으로 하여금 백성들의 어려움을 알게 했다. 그는 밑바닥을 아는 정치인으로 거듭났다.
관중이 보기에 백성들이 못사는 것은 개인 잘못이 아니다. 또한 실력 있는 사람이라도 등용되지 못하는 것은 당사자의 책임으로 볼 수 없다. 또 전투에서 도망가는 것에도 전투 외적인 이유가 있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이처럼 관중의 사상은 밑바닥 경험을 통해 서서히 무르익었다.
그렇다면 민생론은 어떠했을까? 한마디로 말하자면, ‘보통 사람들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 생산물을 늘려라’가 관중의 생각이었다. 그는 성장을 주장한다. 이 점에서 관중은 밑바닥에서 출발해 성장과 분배의 정책적 모멘텀을 만든 진정한 경제학자인 셈이다.
관중의 정책은 이렇듯 춘추시대 첫 번째 관료제 혁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가 세운 정책들은 실로 다양하고, 그의 말과 행동엔 개성이 넘쳐난다.
그러나 관중을 생각할 때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 있다. 그의 잘나가던 말년만을 생각해선 안 된다는 점이다. 오직 실력 하나만 믿고 세상을 떠돌던 청년기와, 권력투쟁의 와중에서 현실정치의 살벌함을 피부로 실감하던 그의 장년기를 알 필요가 있다. 그의 사상은 이때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시련을 딛고 당대 최고의 인물로 중국사의 기반을 닦은 인물이라는 점에서 관중의 이력은 변혁기를 사는 리더들에게 시사하는 바 크다. 어떤가? 현재의 고난이 달리 보이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