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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의 CEO 세종] CEO는 반드시 알아야 한다

전경일 2009. 2. 3. 17:56
 

세종은 16세부터 이수(李隨)에게 배우기 시작해 남다른 호학열로 많은 지식을 축적했다. 이수는 생원시험 1등 출신의 학자로 세종이 CEO가 되기 전 성균관은 그를 세종의 스승으로 천거한 바 있다. 세종의 유명한 ‘수불석권(手不釋卷)’의 모습은 다음 기록에 잘 나타나 있다.


“임금이 즉위하기 이전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일찍이 작은 병이 있었는데도 책 읽기를 그치지 않으니, 태종은 환관을 시켜 책들을 다 가져오게 하였다. 오직 구양수(歐陽修)와 소식(蘇軾)의 글만이 옆에 있었는데 그것도 다 보았다. 취임하여서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으니, 비록 식사 중에도 반드시 좌우에 책을 펼쳐 놓았고, 혹은 밤중이 되어도 힘써 보아 싫어함이 없었다. 일찍이 근신(近臣)에 이르기를 ‘내가 궁중에 있으면서 손을 거두고 한가히 앉아있을 때가 없었다.’고 하였다. 또 근신에 말하기를 ‘내가 서적들을 본 후에는 잊어버림이 없었다.’고 하였다. 그 총명함과 호학함은 천성으로 그러했던 것이다.”(『세종실록』 5년 12월 경오)


세종의 이러한 학구열은 조선의 CEO로 취임함과 동시에 보다 구체화되어, 곧 경연체제(經筵體制)의 확대로 나타났다. 왕실 교육 기관으로는 세자를 위한 서연이 있었고, 세자가 왕위에 오르면 경연이 시작되는데, 이 경연청에는 정승급에서 충원되는 영사(정1품)에서 서사(정7품)까지 약 20여명의 우수한 관리가 배치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세종은 이 무렵 대략 20여명의 전문가들로부터 특별지도를 받으며, 경영수업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경연 확대에 이어 세종 2년에는 집현전을 설치해 운영하기에 이른다.


[책 속에서 경영 아이디어를 얻다]


세종은 언제나 책 속에서 국가 경영의 바른 방법을 찾고자 했다. 그는 국가 경영이 원숙미를 더 해가고 있던, 취임 20년 되던 해에 다음과 같이 회고한 바 있다.


“내가 지금도 독서를 그만두지 않는 것은 다만 글을 보는 사이에 생각이 떠올라서 정사(政事)에 시행하게 되는 것이 많기 때문이다.”(『세종실록』20년 3월 계유)


책 속에서 경영의 지혜를 얻고자 하는 모범적인 CEO로서 세종의 면모가 엿보인다. 세종은 배움에 있어 결코 부족함이 없었다. 또 그의 독서(讀書)는 결코 소일거리용도 아니었다. 그것은 국가 경영에 대한 지식과 정보를 얻고자 부단히 노력하는 치열한 경영자의 모습, 그 자체였다.

그 자신 지방의 수령들을 임명하면서, 자신이 전국 곳곳에 가서 백성들을 다 만나 볼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을 통해 백성에게 다가가려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세종은 책을 통해 중국도 저 먼 이슬람의 세계도 다녀왔던 것이다.


그때까지 세상에 나와 있던 거의 모든 책을 섭렵했던 세종은 실로 책 속에서 경영의 왕도(王道)를 찾았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그는 정보 관리의 CEO라는 영예도 함께 얻게 되었다.

실제 형인 양녕을 제치고 CEO가 된 배경에도 그의 이러한 부단한 노력과 천부적 자질이 결정적으로 반영되었다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전임 CEO였던 태종은 세종을 차기 CEO로 임명하면서,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예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천성이 총민하고 학문을 게을리 하지 않아 비록 춥고 더운 날씨라도 밤을 새워 글을 읽고...정치에 대한...소견이 의외로 뛰어나 크게 될 수 있는 자격이”있다.


이 점이 태종이 세종을 수성 CEO로서 지명하게 된 이유이다. 오죽 공부벌레였으면 조선의 창업자이며 할아버지인 태조가 “과거를 보는 선비는 이와 같이 공부해야겠지만 어찌 임금이 그토록 신고(辛苦)하느냐?”고 걱정했을 정도이었겠는가!


[멘토(mentor)로서의 세종]


세종은 CEO로서 자신의 의무를 다하고자 했다. ‘의무를 다한다’는 것은 CEO로서 제대로 지시를 내리는 것을 의미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자신이 알아야 했다. 경영자가 모르면서 내리는 지시만큼 위험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세종은 그 사실을 역사 속에서 충분히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최고경영자이면서, 한편으로 ‘멘토(mentor)’가 되기로 했다.

‘멘토’란 보통 일반인들 보다 해당 분야에서 - 세종에게 있어서는 국가 경영에 필요한 거의 모든 영역에서 - 높은 차원에 이르른 사람을 말한다. 멘토는 또한 당연히 인재를 키우고, 가르치며, 리드해 나가는데 특별히 관심과 애정을 갖고 있는 사람을 말한다. 세종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사실 그의 삶 전체에 그대로 드러난다.


[‘멘토’란 보호와 장려의 의무를 다하는 자]


그가 ‘멘토’라는 애기는 그가 팀원들이 프로젝트를 잘 수행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도전을 불어넣어 주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과 지속적으로 상호작용 하면서 업무에 대한 지시와 지원, 그리고 보호와 장려의 의무를 다 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신하들을 얼마나 믿고 있는지, 백성들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가 추구하는 미래가 과연 어떠한 것인지, 매우 폭넓고 구체적으로 알게 해주었다. 뿐만 아니라, 팀원들의 실패뿐만 아니라, 성공에 대해서도 스스로 준비하는 자기 자세를 보여주었다. 그리하여 세종은 설령 프로젝트가 실패했을 때라도 그 누구를 원망하거나 하지 않았다. 이러한 그의 경영자적 모습은 실제 몇 가지 일화에 그대로 나타난다.


[프로젝트가 실패해도 사람은 챙겨라]


R&D 분야의 실무 감독을 책임지고 있던 장영실은 개발과정에서 몇 번의 실패를 거듭했다. 개발은 지진부진했고, 어떤 것은 사소한 부주의로 실수가 발생했다. 그러나 세종은 그를 개발 프로젝트에서 빼버리거나, 아예 프로젝트 자체를 폐쇄해 버리는 등의 경솔한 조처를 취하지 않았다. 오히려 세종은 후속적이고, 성공적으로 일련의 작품들이 발명되도록 끈기 있게 기다리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심지어 프로젝트 중에 있는 팀원들이나, 프로젝트에 성공한 팀원들을 찾아가 술과 고기로 회식의 자리를 베풀어 주기도 했다. 이것은 세종의 인간미 넘치는 리더십과 연결돼 그를 더욱 떠받들고, 따르겠금 했다.


아악 정리의 과정에서 박연의 경우도 그랬다. 박연은 우리 고유의 음악을 만드는데, 지나치게 친중국적인 성향을 뗬다. 세종은 그의 그런 점이 불편했다. 그러나 그는 박연과 음악관에 대한 이견 - 세종 자신도 음악가이며, 작곡가였다는 사실을 상기하기 바란다. 이것은 세종이 국가 CEO이기 전에 예술가로서 두 사람의 음악적 소신과 자존심 대결이기도 했다. - 에도 불구하고 그의 성과를 후원해 주었다. 만일 다른 시대에 CEO와 의견 충돌을 일으켜 CEO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신하가 있었더라면 그는 바로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세종이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자신의 능력 때문이었다. 이런 상황은 오히려 세종을 뛰어난 ‘인간’으로 만들어 주었고, 신하들로 하여금 그와 함께 하도록 만들었다.


산 지식의 증인: 그는 정말 알고 있었다

CEO로서 세종의 가장 모범이 되는 것 중에 하나는 ‘산지식’이었다. 그는 조선 안팍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정말 알고 싶어 했고, 알았다. 그것은 어찌 보면 ‘지식’의 문제라기보다는 리더로서 ‘자세’의 문제이기도 했다.

그가 국가를 경영하면서 익히 알고 있었던 것은, ‘자신이 알아야만 배울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어디에서든지 배우고자 했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배움은 단순히 벤치마킹의 수준이 아니라, 이미 신중하고 치밀한 연구를 전제로 한 검토의 과정이기도 했다. 배움에 대한 그의 태도는 실제 프로젝트 세부사항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리하여 그는 프로젝트 매니저(PM)으로 프로젝트에 직접 참여해 활발하게 자기 의견을 개진했다.


[내가 이끌어 낸 것은 그들의 에너지 원(源)]


세종의 이러한 직접적인 조언과 지시는 팀원들 사이에 새로운 에너지 원(源)을 이끌어냈다. 또한 그 자신의 깊이 있는 지식은 사업 추진에 커다란 힘이 되었다. 전문가라기보다는 ‘대가’라 할 수 있는 그의 지적에 많은 사람들은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예를 들어, ‘경연’은 당시 최고의 학문연구기관으로 발전했는데, 이것은 CEO 자신이 탁월한 학자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바로 ‘경연’은 CEO 자신이 이끈 스터디 그룹(study group)이었던 셈이다. 스스로 자신에 대해 너무나도 잘 알고, 세상의 모든 지식에 대해 민감했던 CEO 앞에서 실력이 부족한 신하들은 정말로 난감했을 것이다.


[내가 수학 정석(定石) 정도는 이미 오래 전에 마스터 했다]


세종 12년 10월 23일의 기록에는 이런 글이 실려 있다.


“임금이 ‘계몽산(啓蒙算)’을 배우는데, 부제학 정인지가 들어와서 모시고 질문을 기다리고 있으니, 임금이 말하기를,‘산수(算數)를 배우는 것이 임금에게는 필요가 없을 듯하나, 이것도 성인이 제정한 것이므로 나는 이것을 알고자 한다.’하였다.”


세종은 당시 수학에도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공부했다. 그가 추구하는 지식 강국에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 바로 생산성 강화를 위한 과학과 IT기술이었고, 여기에는 반드시 수학적 계산이 필요했다. 따라서 개발품들이 정확히 계산되고 맞아 떨어지는 것인지 알기 위해서 수학은 필수적으로 필요했다. 여기에 나오는‘계몽산’이란 중국의 대표적인 수학 고전인 『산학계몽(算學啓蒙)』이란 책을 가리킨다. 따라서 세종이 산학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장영실을 비롯해 수석 엔지니어들이 개발한 개발품의 정밀도를 따져 보는데에는 수학만큼 정확한 것이 없었다. 더구나 천문 지리에는 그 나름대로 원리가 있어 이를 과학적으로 증명해 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과제이기도 했다.


『산학계몽』은 당시 중국의 대표적 수학 고전으로 수학의 모든 것을 망라한 교과서와 같은 것이었다. 즉 지금으로 얘기하면, 수학ㆍ물리학ㆍ천문학적 지식이 합쳐진 산학의 정석이었다. 이 책은 쉬운 문제부터 고급 수학까지 다루고 있었고 특히 중국에서 발달한 방정식 - ‘천원술(天元術)’이라 불림 - 도 들어 있었다.

세종은 이처럼 스스로 수학에 관심이 있었고, 그런 까닭에 CEO로 재임 중 수학을 열심히 공부하라는 지시를 여러 번 내리기도 했다. 이는 그가 역법 - 즉, 한국식 달력 - 개량에 수학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했기 때문이었고, 그런 이유로 중국에 수학자를 파견해 공부시키려 했던 것이다. 


ⓒ전경일, <창조의 CEO 세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