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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암(久庵) 한백겸(韓百謙, 1552~1615)

전경일 2026. 10. 14. 20:13

시대적 환경은 한 사람의 인생 항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한백겸이 살았던 16세기 후반과 17세기 초는 한마디로 난리와 기근의 연속이었다. 1592년에 발발한 임진왜란과 뒤이어 일어난 정유재란으로 조선의 전 국토는 유린당하였다. 또 1594년부터 전 세계를 재앙으로 휩쓴 기상 이변으로 거리는 먹을 것을 찾아 헤매는 유랑민으로 넘쳐났다. 내정은 안정되지 못하고 붕당(朋黨)을 넘어 파당(派黨)의 정치적 조짐까지 보이고, 국가 재정은 바닥났다. 세상이 어지럽다 보니 국가 재정의 근간인 토지제도도 극히 문란해졌다.

이런 시기에 성리학 위주의 사고에서 벗어나 새로운 학풍을 시도함으로써 실학적 사유의 길을 개척한 이가 있다. 그 선구자 중 한 바로 사람이 구암(久庵) 한백겸(韓百謙, 1552~1615)이다.

 

한백겸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명길(鳴吉), 호는 구암(久庵)이다. 아버지는 판관(判官) 한효윤(韓孝胤), 어머니는 신씨(申氏)다. 민순(閔純)의 문하에서 수학했고, 1579년에는 생원시에 합격했지만, 1589년에는 모반에 실패한 정여립의 시신을 염습했다는 이유로 장형(杖刑)에 처해져 귀양을 떠났다. 하지만 임진왜란 때 적군에게 아부하며 반란을 선동한 자들을 적소에서 참살한 공로로 석방되어 내자시(內資寺) 직장(直長)으로 기용되었고, 그 뒤 1607년에는 호조참의에 이르렀다. 이것이 짧막한 한백겸의 이력이다.

 

이렇게 본다면 한백겸의 생애는 전쟁・파당・기근의 소용돌이를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다. 또한, 시대 분위기에 영향받고, 시대 문제의 맨 앞에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그와 같은 시기를 함께 한 선각으로는 지봉(芝峯) 이수광(李睟光, 1553~1628)과 미수(眉叟) 허목(許穆, 1595~1682) 등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소용돌이 치는 시대에 이 선각적 지식인은 무엇을 해야 했을까?

 

그가 관심 갖은 것은 한마디로 실학적 사고였다. 한백겸을 이수광, 김육과 더불어 초기 실학자 또는 실학의 선구자라고 평가하는 것은 시대를 앞서간 그의 실천적 지식인 상 때문이다.

그 예로써 그는 임진왜란 극복 과정에서 공물 대신 미곡을 거두어들이는 변통책에 참여하였고, 광해군 즉위 후에는 다시 공납제의 변통책을 구체화해 건의한다.

 

국가의 존망이 실로 여기에 달려 있으니 지금 변통하지 않는다면 토붕와해(土崩瓦解)하고 말 것입니다.

 

이런 주장은 실로 국가 문제에 대한 절실한 진단에서 나온 해법이었다. 이에 영의정 이원익(李元翼) 등은 적극 주선하여 드디어 공물 대신 쌀을 거둬들이는 대동법(大同法) 시행에 들어간다. 국가로서도 존망이 걸린 현실 앞에서 조종 법제에 변통을 가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한백겸은 또 왕정을 실현하려면 궁극적으로는 정전제(井田制)를 시행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그는 은나라 정전 제도를 확인한 후 다음과 같은 견해를 피력한다.

 

정전 제도는 선현들이 상세히 말해둔 바 있다. 그런데 그들의 학설은 모두 맹자의 설을 중심으로 생각해낸 것이므로 특히 주나라 제도에는 자세하지만, 그 이전 하나라・은나라 제도에 관해서는 고증한 것이 없다. 주자가 (은나라의) 조법(助法)을 논한 것도 역시 추측과 상상에서 나왔으며 상호 참고 고증한 설이 없으므로 그것이 과연 제작 당시의 본래 의도와 합치하는지는 알 수 없다. …간혹 (정전 제도의) 구・혁(溝洫)을 다시 설치하는 일에는 비용을 많이 들게 된다는 주자의 말을 가지고서 맹자의 설을 의심하는 자가 있지만, 그것은 아마도 그렇지 않을 것이다. …주자는 일찍이 말하기를, “혁명하여 왕조가 바뀌는 때에는 크게는 월력(月曆)과 숫자로부터 작게는 문자와 수레 제도[車軌]에 이르기까지 모두를 고쳐 만듦으로써 한 왕조의 이목을 새롭게 한다”고 하였다. 하물며 백성의 항산(恒産)을 제도화하는 정전제는 왕정을 시행할 큰일인데, 어찌 적은 비용이 든다고 해서 이전의 폐습을 이어받아 고착되기만 하고 더불어 모두를 변통하지 않는단 말인가. 이로 미루어 보건대, 주자의 설은 문인과의 문답에서 나온 일시적인 것이지 그의 평생의 정론은 아닐 것이다. (󰡔구암유고󰡕 「기전유설」)

 

그의 주장인즉, 주자가 은나라의 제도인 조법을 논한 것은 객관적 실증이 없는 가운데 추측과 상상에서 내놓은 설에 불과하니 그것은 은나라 때 조법의 본래의 의도와 맞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중국 정전제(井田制)의 토지구획과 다른 방식의 정전제가 평양 지방에서 시행되었음을 고증하여 밝힘으로써 후대 실학자들의 정전제에로의 전제 개혁의 주장에 크게 힘을 북돋워 주었다.

이처럼 한백겸은 왕정의 기초가 되는 정전제를 시행하기 위해서는 비용이 들더라도 ‘구・혁’, 즉 가로・세로의 수로(水路)를 만들지 않을 수 없는데, 그 비용 때문에 평상시에는 정전제를 시행할 수 없다고 주자가 말한 것은 본의가 아닐 것이라고 지적한다. 왕정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끝내 정전제를 실현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처럼 한백겸은 주자의 조법에 관한 논의가 고증이 없음을 지적하여 토지제도에 대한 고증적 확인을 한다. 이처럼 한백겸의 엄격한 고증적 기준은 맹자조차도 비켜 가지 못했다.

한백겸에 의하면, 맹자도 주대(周代)의 정자(井字) 토지제도만 알았다는 것이다. 또 삼한(三韓)의 위치와 연혁에 대해서는 󰡔동사찬요후서(東史纂要後叙)󰡕에서 최치원과 권근의 설을 고증적으로 비판하였다. 그의 엄격한 고증 잣대에 국내외 지식인들이 다 걸린 셈이다.

무엇보다도 한백겸의 커다란 업적은 󰡔동국지리지(東國地理志)󰡕를 지어 우리의 역사와 지리에 관한 객관적 인식을 새롭게 한 점이다. 이 노작은 조선 자체의 역사지리에 관한 관심이 결집하여 나타난 최초의 저서로 우리나라 강역・공간의 역사적 변천에 관한 최초의 체계적 저술이다. 이 점에서 한백겸의 학풍은 실증적이고 비판적인 학문 방법으로 실학파의 초기의 면모를 보여준다.

그렇다면 다른 실학자들은 한백겸을 어떻게 인지했을까?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 1622~1673)은 한백겸의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에 대해 적극 긍정하였고, 박세당・이익・이가환・박지원 등은 「기전유제설(箕田遺制說)」을 받아들였다. 이런 점에서 한백겸은 여러 후대 실학자들에게 학문적 영향을 끼쳤음을 알 수 있다.

택당(澤堂) 이식(李植, 1584~1647)은 한백겸의 학문을 두고 다음과 같이 논한 적 있다.

 

어떤 이는 그의 논저(論著)가 선현(先賢)의 정론과 많이 다르다고 의심하는데, 그것은 문제 될 것이 없다. 이론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 까닭은, 그것이 의리(義理)의 본원을 떠나 스스로 별다른 유파를 세워 잘못된 데로 흐를까 봐 염려되기 때문이다. 지금 이 구암의 문집을 볼 때 이기(理氣)・성정(性情) 등에 관한 학설은 종지(宗旨)를 밝혀 드러내고 여러 가지 학설들을 절충하였으니, 배우는 자가 이를 해득한다면 당연히 계발되는 이로움이 있을 것이다. 오직 상수(象數)의 변화와 제도의 의당함으로 말하자면, 그 연구가 극히 깊어서 이전의 학설에 얽매이지 않은 것이 있다. 이 같은 견해의 차이로 말한다면 비록 정(程)・주(朱)의 적전(滴傳)이라 할지라도 역시 상호 간에 이동(異同)이 있기 마련이다. 뒷사람이 다시 한마디 말을 제시한다고 해서 용납하지 않아서는 안 될 것이다. (󰡔구암유고󰡕「서」)

 

여기서 이식이 말하는 선현은 주자를 가리킨다. 오로지 주자적 세계관만을 교조적으로 받들던 시대에 한백겸은 주자와 같지 않은 ‘이기・성정’ 학설을 내놓았다는 이유로 조선의 고루한 주자 성리학자들로부터 의심받아 자칫하면 용납되기 어려웠다. 이런 극도의 교조적 풍토는 다른 한편, 어둠이 짙어지며 빛이 나타나는 시기가 되었음을 상징하기도 한다. 말하자면 한백겸 같은 이의 출현은 엷은 실학의 서광이 구체제의 도전 속에서 서서히 비춰오고 있다는 걸 의미한다.

한백겸은 결코 이전 학설에 얽매이지 않았다. 오히려 독자적이며 주체적 학풍을 견지함으로써 새로운 시대를 예비했고, 선각한 인물로 남았다.

한백겸의 뚜렷한 발자취 중 하나는 중국의 사서(史書)에 서술된 우리나라 지리에 관한 기록을 종합하고 이를 고증해 󰡔동국지리지󰡕를 편찬한 것이다. 이는 이전에는 없던 역사지리학을 개척한 것으로서 이런 구체적 연구 결과가 실학의 선구자로서 지위를 부여받게 만든다.

󰡔동국지리지󰡕에 대해 잠시 짚고 넘어가자. 이전의 역사서가 역사를 통해 정치・윤리적 교훈을 얻어 내는 이른바 춘추필법의 관점에서 서술됐다면, 한백겸의 󰡔동국지리지󰡕는 주관적 가치 판단이 개입되지 않은 실증적 태도와 객관성을 중시하는 고증적 태도로 역사를 보고 있다. 오죽했으면, 한백겸이 자[尺]를 가지고 실측한 태도가 훗날 실학자들에게 하나의 모범적인 학문적 태도로 받아들여질 정도였겠는가.

그렇다면 󰡔동국지리지󰡕는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동국지리지󰡕는 고대로부터 고려까지 우리나라 강역이 어떻게 바뀌어왔고, 어느 지역이 우리나라 영토에 포함되었는가, 고대 국가의 종족은 어떻게 변화하였는가, 각 지역은 어떤 변화를 겪어 왔는가 등등 국가의 강역 변동 및 강역 내 각 지역의 변천에 관심 두고 서술된 책이다. 이런 역사 지리적 관심은 역사를 통해 현재의 국세와 비교해 보려는 목적을 포함하고 있다. 한백겸이 살았던 당시 만주 지역에서 새롭게 흥기하는 후금이 위협으로 다가오고 있던 점도 북방 지역 역사나 지리에 관한 관심을 가져오게 한 계기가 되었을 것으로 본다.

 

한백겸이 󰡔동국지리지󰡕를 서술하게 된 배경을 살펴보면 이렇다. 한백겸은 역학(易學)에 해박하여 선조 때 󰡔주역(周易)󰡕에 관해 여러 주석을 모아 편찬한 󰡔주역전의(周易傳義)󰡕의 편찬 일에 교정 본 적이 있다. 이런 꼼꼼한 비교・검토 경험은 그가 고증학적 방법으로 조선의 역사와 지리를 연구하게 된 배경이 된다. 󰡔동국지리지󰡕와 󰡔기전설(箕田說)󰡕 등은 이렇게 해서 나온다.

한백겸의 역사・지리학에 관한 관심과 학문적 태도는 후대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리하여 후대 실학자들의 역사 서술에 하나의 모범이 되는데, 오운(吳澐)이 쓴 󰡔동사찬요(東史纂要)󰡕 「지리지」・유형원의 󰡔동국여지지(東國輿地誌)󰡕・신경준의 󰡔강계지(疆界志)󰡕와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의 「여지고(輿地考)」・안정복의 󰡔동사강목(東史岡目)󰡕・정약용의 󰡔강역고(疆域考)󰡕 등에 직간접으로 영향을 주고 있다. 특히 󰡔동국지리지󰡕에서는 삼한(三韓)의 역사적 위치를 힘들여 고증하였는데, 신경준의 두 책과 한치윤(韓致奫)의 󰡔해동역사(海東繹史)󰡕 「지리고(地理考)」 등에서도 이를 계승되고 있다.

 

이런 한백겸은 정경세(鄭經世)・정구(鄭逑)・김우옹(金宇顒)・홍가신(洪可臣)・이수광(李睟光)・오운(吳澐) 등 당색을 초월하여 당대 명유(名儒)들과 교유하였고, 그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하나의 뿌리가 이어져 줄기를 이루듯 구암이라는 선각의 나무에서 실학이 꽃을 피워가는 일테면 ⟨서울 편지공화국⟩의 원천이 그로부터 시발했다고 할 것이다.

 

 

동국지리지(東國地理誌)

동국지리지는 크게 삼국시대 이전, 삼국시대, 고려 시대, 이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삼국시대 이전은 중국의 사료를 직접 인용하여 정리했고, ‘우안(愚按)’이라고 하여 사론(史論) 형식을 통해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였다. 또 강역과 강역 내 군현・지명 등을 고증을 통해 밝히고 있다.

 

삼국시대 부분은 고구려—백제—신라 순으로 정리하여 기존의 사서가 신라—고구려—백제 순으로 서술한 것에 현격한 수정을 가했다. 이 순서는 고조선 유역을 차지한 나라가 고구려였고, 또한 초기 강역이 가장 넓은 국가가 고구려인 점이 반영된 것이다. 여기서도 한백겸이 역사 지리적인 관점에서 사론을 펼치고 있다. 나아가 그는 우리 민족이 힘을 잃게 된 원인이 고구려의 영토 상실에 있음을 주장하고 있다. 그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뒤 수도를 국토의 중앙으로 옮기지 않았기 때문에 국토의 절반에 해당하는 서북 지역을 이웃의 적에게 헌신짝처럼 내주게 되었고, 이로 인해 계속 외적의 침입을 받게 되었다고 보고 있다. 이는 조선 말기 민족주의 사학의 역사관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으로 실학-개화파의 연결의 단초를 역사지리학 면에서 찾아볼 수 있다. 또한, 한백겸은 우리 역사의 강역을 남과 북으로 나누어 살피고 있다. 또 고대 종족에 대해서도 비상한 관심을 보인다.

 

고려 시대에 관한 서술 체제는 삼국 이전과 마찬가지로 강역・군현・지명 등을 고증하고, 다른 한편 중국, 삼국 간의 전투 지역, 군사적 요충지였던 강・산・고개・진(鎭)・책(柵)・성(城) 등을 열거하여 현재의 위치를 비정하고 있다.

󰡔동국지리지󰡕는 구성이나 편제보다는 한백겸의 새로운 안목과 학적 태도가 더 중요하다. 그는 기존 학설이나 사론을 그대로 따르지 않고 비판적이고 객관적인 태도로 자신의 견해를 정리해 나갔다.

 

그가 사론을 펼치는 데 사용한 고증 방법은 크게 여섯 가지로 분류된다. 첫 번째는, 기존의 방식대로 여러 기록을 비교하여 고증하는 방법. 두 번째는, 지역의 형세로 위치를 고증하는 방법. 세 번째는, 지리적 형세에다 다른 증거를 보완하여 고증하는 방법. 네 번째는, 유사한 발음을 이용하여 고증하는 방법. 다섯째는, 그 지역의 생산물로 위치를 비정하는 방법 등 기타 수단으로 고증하는 방법. 여섯째는, 위의 여러 가지 방법을 집약하여 위치를 고증하는 방법 등이다. 한백겸은 이와 같은 방법을 사용하여 실증적이고 비판적인 고증을 거쳤다. 하지만 자기가 내린 결론을 강하게 주장하지는 않는다. 또 뚜렷한 증거가 없어 추측할 때는 ‘미지숙시(未知孰是)’라 하여 단정을 짓지 않고 있다. 또 종래의 설에 의문이 있을 시에는 ‘경상지(更詳之)’라 하여 결론을 유보하기도 한다. 그는 이처럼 역사연구에서 객관적인 태도를 보여주었으며 그의 실증적인 방법은 실학적 태도와 전적으로 맞물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