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경영/서울편지공화국

지봉(芝峯) 이수광(李睟光, 1553~1628)

전경일 2026. 10. 25. 08:12

지봉(芝峯) 이수광(李睟光)은 의심할 나위 없이 서양을 조선에 최초로 구체적 물증으로 소개한 사람이다. 특히 중국 내에서 한자・유교 문화권 신자들을 위해 편찬된 천주교 교리서인 󰡔천주실의(天主實義)󰡕를 조선에 소개하여 서양의 학술 및 종교에 관한 관심을 촉발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로 말미암아 갇혀 있던 조선 지식인의 대외관념은 청과 서양 문명에 의해 큰 변화를 겪게 되고, 서구 학술・연구에 관심 갖게 만든다. 이 같은 변화는 다분히 이수광의 영향이 크다. 이 점에서 이수광은 실학의 선구자라 부를 위치에 있다.

이수광의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윤경(潤卿), 호는 지봉(芝峰)이다. 아버지는 병조판서를 지낸 이희검(李希儉)이고 어머니는 문화 류씨(柳氏)다. 1582년 진사시에 합격했고, 1585년에는 문과에 급제했다. 그해 승문원 부정자(副正字)가 되었고 지방과 중앙 여러 관직을 거쳐 1628년 66세에는 이조판서까지 이르렀으나 그해 졸(卒)하였다.

당시 인조반정을 통해 왕권을 획득한 인조 초기의 훈신들은 관념적 의리론에 얽매여 현실에 입각한 정치를 펴지 못했다. 반정 후 채 1년도 안 돼 1인 훈신이었던 이괄(李适)이 난을 일으켰고, 밖으로는 후금(後金)의 동태가 심상치가 않았다. 치평(治平)의 세상이 전개될 것으로 기대했으나 그런 기미는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이때 이수광은 현실에 맞고 실질에 힘쓰는 정치를 펴야 한다는 상소를 임금에게 올리게 된다.

 

… 국사(國事)가 날로 위축되고 조정의 기강이 날로 문란해지는 것은 다른 까닭이 아니라 모두가 실질에 힘쓰지 않는 병통 때문입니다. … 지금으로부터는 위에서부터 정성을 다하실 것이며 신하들에게도 실질에 힘쓰도록 책임지어, 실신(實心)으로써 실정(實政)을 행할 것이며, 실공(實功)으로써 실효(實效)를 일으키도록 하소서. 생각마다 모두 착실하고 일마다 모두 실질 있게 하소서. 이로써 정무를 추진하면 추진 안 될 것이 없으며 이로써 정치를 펴면 이룩하지 못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지봉집󰡕 22「조진무실차자」)

 

성리학적 이념과 명분에 집착해 실질을 도외시한 현실정치를 그는 크게 우려하고 질타했다. 이렇듯 현실 개혁을 주청하였음에도 이수광은 개혁 방안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돌린 것 같지는 않다. 그 이유를 들자면, 대동법이 이미 1608년에 경기도에서 시행되었는데, (이 법은 조선 후기의 최대 개혁이었기 때문에 개혁을 지향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이수광은 여기에까지는 미치지 못했다. 오히려 그보다도 대동법을 본격적으로 추진한 사람은 17세기 중엽의 김육(金堉, 1580~1658)이었다.

하지만 이수광의 경력에서 훗날 그의 이름을 남게 한 일대 사건이 있었으니, 그것은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세 차례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것이다. 1차는 1590년에 성절사(聖節使) 서장관(書狀官)으로, 2차는 1597년에 진위사(陳慰使)로, 3차는 1611년에 주청부사(奏請副使)로 북경에 다녀왔다. 그는 연경에서 많은 문물과 세계 각처의 인사들을 대면했다. 조선 관리의 눈이 크게 확장되는 순간이었다.

2차 사행 때는 베트남[安南] 사신과, 3차 때에는 오키나와[琉球] 및 태국[逼羅] 사신과도 만나 필담을 나누며 세계를 실감했다. 그는 이렇듯 북경에 머무는 동안 동남아 사신들과도 교유하면서 동남아 각국의 역사와 문화를 더욱 깊이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북경에서 활동하던 서양 선교사들을 만나 서양 문화를 접한다. 1600년에 마테오 리치가 지은 「산해여지전도(山海輿地全圖)」를 보게 된 것은 유럽 여러 나라의 사정을 알게 된 획기적인 사건이자 기회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경험이 그로 하여금 󰡔지봉유설(芝蜂類說)󰡕을 저술하게 만들고, 여기서 마테오 리치가 지은 󰡔천주실의(天主實義)󰡕의 간단한 내용을 소개함으로써 이수광은 본의 아니게 조선에 천주교를 최초로 전파한 인물이 된다. 또 같은 책에서 그는 포르투갈・네덜란드・영국・이탈리아 등을 포함한 세계 50여 개국의 지리・기후・물산・풍속・역사 등도 소개한다. 넓은 세계에 대한 경험은 조선의 전통적 사상인 화이관(華夷觀)을 의심하게 했고, 심지어 배제하게 했다. 그런 가운데 객관적으로 세계를 소개하는 것은 물론 불교와 이슬람교에 대해서도 호의적으로 알게 하였다. 이 같은 객관성에 기초한 세계 인식이 그를 실학의 선구로 자리매김시킨다.

이수광은 당시 접촉한 문물에 근거해 17세기 초 서학의 지식을 가장 일찍 폭넓게 제시한다. 󰡔지봉유설󰡕이 가치 있는 것은 16세기 후기로부터 17세기 초 연간에 실질을 떠나 공허한 논의나 일삼던 당시 조선 사대부들의 지적 풍토에 실질을 추구한 주장을 제기했기 때문이다.

󰡔지봉유설󰡕을 편찬한 이유를 이수광은 “전승하는 기록이 많이 없어지고 문헌으로서 징험徵驗)할 만한 것이 드물어” ‘우리 동방’의 실정을 안타깝게 여기는 처지에서 “육경(六經) 이하 근세의 잡기류 등 여러 가지에 이르기까지” 두루 섭렵하며, 천문(天文) 이하 금충(禽虫)에 이르기까지 무릇 3,435항목의 사실들을 객관적으로 분류・설명해 놓는다고 풀이하고 있다. 모든 것을 아울러 보겠다는 지적 의욕이 엿보인다.

이 대저(大著)는 천문・지리・자연계 현상・세계의 낯선 나라들과 인간 사회의 갖가지 사실에 대한 객관적 이해를 널리 공유하고자 집대성한 것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본격적인 백과사전이다. 새로운 지각과 인식으로 세계를 보려는 그의 개방적 학문 자세가 투영되었음을 물론이다. 󰡔천주실의(天主實義)󰡕는 이 책 제2권「제국부」에 실려 있다. 그 내용을 살펴보자.

 

구라파국은 또한 대서국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마두(利瑪竇, Matteo Ricci, 1552~1616)라는 사람이 있어서 8년 동안 바다에 떠 8만 리의 풍랑을 넘어 동월(東粤・광둥성)에 와서 십여 년을 살았다. 󰡔천주실의󰡕 두 권의 저술이 있는데, 첫머리에는 천주가 처음으로 천지를 창조하였고 (피조물을) 편안히 기르는 도를 주재한다는 것을 논하였다. 다음으로 사람의 영혼은 불멸이며 금수와 크게 다르다는 것을 논하였으며, 다음에는 육도윤회설(六道輪廻說)의 잘못과 천당・지옥・선악의 응보를 분석하였다. 말미에는 인성(人性)은 본래 선(善)하다는 것과 천주를 받들어 존경해야 하는 의미를 논하고 있다.

 

여기서 이수광이 말하는 󰡔천주실의󰡕는 이탈리아의 신부(神父) 마테오 리치가 동료들과 더불어 천주의 존재, 인간 영혼의 불멸 등에 관하여 중국인과 문답한 것을 정리한 천주교 교리 입문서다. 원래의 책명은 󰡔천학실의(天學實義)󰡕였고, 1595년 강서성(江西省)에서 처음 출간되었다.

이 책은 한자・유교 문화권을 대상으로 널리 퍼져 천주교 전파・보급에 지대한 역할을 다했다. 이수광은 천주교인은 아니었지만, 조선에 천주교를 처음 소개한 사람이 되었다. 그러고 보면 그의 8대손 이윤하(李潤夏)가 천주교 신봉 운동을 일으키다가 세 자녀와 함께 순교한 것은 우연만으로 보기는 힘들다.

 

이수광은 󰡔지봉유설󰡕에서 다시 고금의 통치 행태의 차이점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고인은 관용으로써 통치했으나 금인(今人)은 사나움으로써 통치한다. 고인은 백성 보기를 자식과 같이했으나 금인은 백성 보기를 원수와 같이한다. 아아, 사나운 정치로써 원수인 백성을 통치하니, 백성이 어떻게 견디겠는가. (󰡔지봉집󰡕 31 「잉설여편」)

 

여기서 말하는, ‘백성 보기를 자식같이 한다’는 말은 󰡔춘추좌전(春秋左傳)󰡕에 나오는 말로 이수광은 당시의 세태를 신랄하게 지적하고 있다.

그가 살던 16세기 후기에서 17세기 초 당시 조선의 성리학은 당쟁이 치열해지면서 주자만이 유일한 기준이 되던 때였다. 이런 시기에 그가 편찬한 󰡔지봉유설󰡕은 커다란 의미를 지닌다.

 

 

이수광과 󰡔지봉유설(芝峰類說)󰡕

학계에서는 흔히 실학적 학풍의 선구로 이수광의 󰡔지봉유설󰡕을 든다. 그것은 󰡔지봉유설󰡕이 일반 문집과 달리 시(詩)・서(書)・경학만 다루지 않고, 천문・지리・지방 제도・군사・관직・인물・복식・음식 및 기술 등 백과전서적 서술을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각 항목을 서술하는 데 있어 우리나라의 사정을 빼놓지 않고 소개하고 있다. 특히 그의 저서에서는 베트남, 오키나와 및 타이 등 아시아 각국을 소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서양 제국의 사정과 당시 중국에 도입된 서양 문물에 대해서도 광범하게 다루고 있다. 이 같은 학풍은 기존의 주자학적 사장학(詞章學)이나 경학(經學)에서는 볼 수 없다. 이처럼 󰡔지봉유설󰡕은 백성들의 일상생활과 매우 밀접한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지식으로, 비유하자면 오늘날 지적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수광은 거질(巨帙)의 백화전서를 저술한 학자라는 이면에 실은 자신은 ‘성시(城市) 속의 은자’를 자처했다. 당시 서울을 중심으로 ‘침류대학사(枕流臺學士)’라는 일군의 학자들이 있었는데, 이수광 또한 이들과 교유했다. 침류대는 창덕궁 서쪽 정업원(淨業院) 부근의 계곡에 있던 석대(石臺)를 말하는 것으로, 이 침류대의 주인은 유희경(劉希慶)이었다. 유희경은 남언경(南彦經)의 제자로 그는 서얼 출신으로 과거 길이 막혔는데, 임진왜란 때 의병을 모아 관군을 도운 공으로 벼슬을 받는다.

그러나 광해군의 폐모 사건을 계기로 절친했던 이이첨(李爾瞻)과 절교하고 침류대 부근에 숨어 살았다. 여기에 당시의 사대부로부터 천인에 이르기까지 많은 시인 문객들이 모여들어 이들을 침류대학사라고 부른다. 침류대학사들은 하나의 학파나 특정인의 문도는 아니지만, 서울과 개성의 학자들이 많이 모였다.

일화를 소개하자면, 유희경은 길에서 이이첨을 만나면 이(李)가 노하여 그를 꾸짖었으나, 그는 대답하기를, “소인(小人)은 어머니가 계시고 봉양하는 일에 다급하여 공의 문전에 갈 겨를이 없었소이다” 하였다 한다. 시류에 얽매이지 않는 처신으로 혼란스러운 당쟁 시기에 92세까지 천수를 누렸다.

 

이처럼 침류대학사들은 ‘성시 속의 산림(山林)’을 자처하면서 도시적 분위기의 학술 풍토를 일구어 나갔던 사람들이다. 이들의 학문적 성격은 매우 개방적이어서 성리설에서 역법・천문・지리 및 상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가졌으며, 시문을 주고받던 사람들의 신분도 제한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뒤에 우리가 살펴볼 조선 화가・예인(藝人)들의 ‘예술에 노는[유예・遊藝]’ 커뮤니티인 천수경(千壽慶)이 주도한 송석원시사(松石園詩社)를 떠올리게 한다. 무려 1백 50년이 뒤의 일이지만, 침류대학사와 그 취지가 닿아있다.

 

이런 취향 때문인지 이수광은 학문적으로 어느 문하에도 들지 않았다. 그래서 당시 침류대학사 인물들과의 교유를 통해 자신만의 학문적 특색을 만들어 갔을 것이다. 이수광이 침류대에서 교류하였던 주요 인사는 서경덕의 문인으로 외교 문서를 잘 지었고 도가 풍이 짙었던 차천로(車天格), 상수(象數)와 역학(易學)에 통달했던 신흠(申欽), 명물도수학(名物度數學)에 밝고 언제나 실용의 학문을 부르짖었던 임숙영(任叔英) 등이었다. 󰡔어우야담(於于野談)󰡕을 지은 유몽인(柳夢寅), 󰡔동국지리지(東國地理誌)󰡕를 지은 한백겸(韓百謙)과도 학문적 교류를 하였다. 특히 신흠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그는

 

“...학문은 실제로 적용하는 것이 귀한 것이지, 전곡(錢穀)과 갑병(甲兵)이 어찌 선비의 일이 아니겠는가? 세상에 장구(章句)나 따지는 자들은 어지러이 성명(性命)을 인용하나, 막상 정사를 맡기면 망연하여 어떻게 할 줄을 모른다….”라고 하여 당시의 교조적인 주자학에 대해 비판을 가하였다.

 

이 외에도 양명학에 관심 많던 심희수(沈喜壽)와 당대의 명유(名儒) 정경세(鄭經世)와는 성리설에 대하여 자주 토론을 하였다. 또 유생들뿐 아니라 유정(惟政) 등 승려들과도 시문을 교류하였다. 이처럼 이수광은 정파와 학파에 구애되지 않고 교유했으며, 지역적으로는 주로 서울 및 근교에서 활동하였다. 또 도가 및 불교, 양명학 등 이단에 대하여 개방적인 모습을 보이고 상수・역학 등 잡학에도 밝은 인사들이었다. 침류대학사가 학파는 아니었지만, 이수광은 이런 개방적인 분위기에 많이 젖었을 것으로 본다.

 

내가 어린 총각 때 선생 및 선배들로부터 학문하는 방법은 오직 지행(知行) 두 글자에 있다고 하는 것을 들었다. …나는 말한다. 배우는 자는 아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고 참으로 아는 것이 어려우며, 행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고 실제로 하는 것이 어렵다. 어떤 이는 알면서도 능히 행하지 못하니 참으로 알지 못하는 데서 연유하는 것이다.

 

이 인용은 이수광의 학문에 임하는 자세, 즉 입지(立志)에 대해 말하는 것으로 그의 사고의 바탕이 어디에 있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수광은 학문의 두 축을 ‘아는 것[知]’과 ‘실천하는 것[行]’에 두었다. 참된 앎은 공리공담이 아니라 실천 속에 있다. 실천으로 확인된 지식만을 중히 여긴다는 점에서 실학적 단초를 엿볼 수 있다. 또 지행일치(知行一致)를 강조하고 왕양명을 인용하는 점에서도 양명학에 관심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이수광은 다방면에 관심을 보였고, 이런 관심은 서구 문물에 관한 관심을 가져오며 그를 실학의 선구자로 평가하게 만든 요인이 된다.

 

이수광이 활동하였던 시대는 실학이 서서히 기지개 켜던 시기였다. 그는 󰡔지봉유설󰡕을 통해 실용・실리주의와 실증・민본정신을 역설했다. 고증적이고 실용적인 그의 학문 태도는 후에 유형원・이익・안정복 등에 전해지고, 그의 저술 체제, 내용 및 그것의 집대성은 후대의 실학자 이익의 󰡔성호사설(星湖僿說)󰡕, 유희(柳僖)의 󰡔물명고(物名考)󰡕, 이규경(李圭景)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등에 커다란 영향을 준다. 백과전서적 ⟨서울 편지공화국⟩ 네트워크의 전통은 일테면 이수광으로부터 만들어진 셈이라 할 수 있겠다.

ⓒ전경일/인문경영연구소/강의문의: humanity@kindssoft.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