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의 CEO 세종] 현장과 밀착하라
세종은 취임 초부터 백성을 가까이 하는 소위 ‘근민지관(近民之官)’을 면담하기 시작했다. 세종 7년 12월부터는 2품 이하의 모든 수령까지 면담 했는데, 그 이유는 바로 수령들에게 세종 자신을 대신하여 백성을 사랑으로 대하는 최고경영자의 마음을 일깨워주기 위해서였다. 세종은 지방 경영의 실질적 대행자인 수령으로 하여금 상ㆍ하의 영향으로부터 독립하여 소신행정을 펼칠 수 있도록 그 권한을 보장해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이를 감독하면서 보완하고자 했다.
[목표관리에 근거한 위임경영]
세종의 이 같은 위임은 철저하게 목표 관리를 전제로 한 것이었다. 세종은 이 같은 제도의 활용으로 지방 수령에게 부여한 책임 경영이 효과적으로 수행되리라 기대했다. 국왕-감사-수령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관치행정 계통과 경재소-유향소-면이임(里任)으로 이어지는 자치행정계통, 그리고 경저리(京邸吏)-영리(營吏)-읍리(邑吏)로 이어지는 이족(吏族)계통을 병립시켜 견제와 균형을 통한 지방운영 방식을 전략적으로 채택한 것은 이런 배경에서다.
이것은 오늘날 국가나 기업의 CEO가 조직 내외에 행정적인 공식루트와 비공식적인 라인을 통해 현장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교차 점검한 것과 비슷하다. 따라서 상호 견제와 균형의 원리는 CEO 자신이 항시적으로 현장성을 확보함으로써 경영의 효율성을 얻으려는 전략에서 나왔다. CEO가 현장에 없는 한, - 즉, 현장과 밀착하지 않는 한 - 결코 알 수 없는 일은 언제고 벌어 질 수 있었다.
[정책 성공 여부는 현장 실무자에 달려 있다]
세종의 제도 운영은 주로 의정부와 육조ㆍ승정원ㆍ대간과 경연ㆍ집현전ㆍ지방수령에 관한 것이었다. 세종이 본격적으로 지도력을 발휘한 것은 대개 세종 10년경부터 보는데, 이 때 승정원은 왕명의 출납뿐만 아니라, 인사권까지도 관여하였다. 세종은 친히 지방의 수령들을 면담하고 인물 됨됨이를 살핀다거나 선정을 당부하는 등 대소 각급의 인재등용에 세심한 관심을 보였다. 이는 그가 조선을 인재 강국으로 만들어 신지식의 유교 사회로 이끄는데 얼마나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지 잘 보여주고 있는 예이다.
그리하여 세종은 업무의 전문성이 장기 근무를 통한 노하우 체득과 관련되어 있음을 인지하고, 중요한 지위에 있는 대신들을 그 직책에 장기 근무토록 하여 업무의 효율성과 안정성을 꾀했다. 또한 백성을 위한 경영의 성공적인 실현 여부는 밑으로 내려가면서 문제라는 - 예나 지금이나 아랫물의 가장 큰 특징은 윗물을 희석시켜 버린다는 것이다. - 인식하에 올바른 지방 관리를 뽑고자 부단히 애를 썼다. 세종 취임 년 정월의 경연에서 변계량ㆍ정초(鄭招) 등이 국가 경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수령의 인선에 있다고 한 말은 조금도 틀린 얘기가 아니었다.
“각 도 감사의 수령에 대한 포폄(褒貶, 칭찬하고 벌함)이 맞지 않으니, 대개 편하고 속하게 일을 처리하는 것을 유능한 것으로 평가하여 드디어 실질적인 혜택이 백성에 미치지 못하게 합니다. 원컨대, 이제부터 수령으로 새로 제수되는 자는 전하께서 반드시 친히 인견(引見)하시어 현부(賢否)를 살피신 연후에 부임하게 하면 수령은 올바른 사람을 얻게 되고 백성은 실제의 혜택을 받게 될 것입니다.”(『세종실록』원년 1월 30일)
변계량ㆍ정초 등 고위급 인사들이 국가 경영의 성공 여부는 수령의 인사에 있다고 파악하고 이를 건의한 것이다. 이는 실제 문제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그들 스스로도 제대로 알고 이를 개선하고자 했던 것이다.
[현장 리더십의 백미]
리더의 길은 항시 도전과 뜻밖의 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리더는 혼자서 도전을 맞지 않는다. 그는 모든 도전에 대응한 팀이나 조직을 만들고, 이를 통해 해결하는 방식을 취한다. 세종은 무엇보다도 조직에 대해 생각했고, 조직의 효율성과 적합성을 시뮬레이션 하는데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 그가 시도한 국가 조직뿐만 아니라, 행정 체제의 정비는 바로 이것을 입증한다. 그것은 항시 현장을 경영하는 데에서 나타났다.
현장과 밀착한 그의 경영전략과 리더십은 실제 팀원들의 눈에 띄는 방식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다양한 방식을 통해서도 드러났다. 또 그 보다 더 중요하게는 ‘시스템’을 통해서 보다 확고하게 나타났다. 세종은 항상 현장을 소홀히 여기지 않았다. 현장을 찾아 후원하는 그의 ‘현장 리더십’은 국가 최고경영자로써 세종 경영 방식의 백미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다.
실제, 수많은 업적들이 백성과 가까이 하는 가운데 쏟아졌고, 그것은 국책 과제를 수행하며 보여준 리더십 결과이기도 했다. 세종의 이러한 경영 방식은 언제나 세종 자신의 개인적인 수양 정도를 반영한 것이다. 열린 자세와 토론 문화는 그의 성품과 어울려 당연한 귀결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시대를 초월해 국가를 경영한 세종의 가장 중요한 현실 대처 방안이었고, 해법이기도 했다.
[CEO는 걸림돌을 제거해 주는 사람]
무엇보다도 세종의 뛰어난 면모는 그가 국가 CEO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는 팀원들이 자신의 잠재력을 발휘하는데 걸림돌이 되는 모든 장애를 제거하는데 앞장섰다. 그것은 현장을 누비며 얻었던 자료들에 대한 교정 작업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예컨대, 서울 근무자들과 지방 근무자들 간의 -‘경관(京官)’과 ‘외관(外官)’으로 불렸다. - 승진 기간이 같지 않음을 문제시하여 이를 형평성에 맞게 법제화 해 나간 것(『세종실록』 24년 7월)은 현장을 통하지 않으면 결코 CEO에게까지 쉽게 올라가기 어려운 사안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불합리와 불공평성이 CEO에게 까지 올라온다면, 이것은 이미 수많은 불만과 좌절을 겪은 다음이라는 것을 의미했다. 세종은 현장 속에서 스스로 교정할 수 있는 무엇인가를 찾아냈고, 이를 개선하고자 했다.
[문제를 공유할 때, 해결책이 모색 된다]
세종의 이러한 현장을 통한 리더십 발휘는 실제 세종 자신이 단순히 프로젝트 관리자가 되어 주도권을 행사했다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는 자신의 참여를 전체의 참여로 승화시킬 수 있는 문제 공유형ㆍ해결 모색형 리더였고, 자신의 의지와 능력을 바탕으로 이러한 프로젝트에 긍정적인 영향을 불어 넣을 수 있던 CEO였다.
그는 처음부터 모든 일에 다 전문가는 아니었던 사람들을 끌어 모아 이들을 전문가 집단으로 만들어 냈다. 팀원들 스스로 자신이 변하는 것을 보게 하는 것이야말로 그가 보여준 경영 능력의 진수였고, 그가 오늘날 세계 역사상 최고의 CEO로 평가되는 이유 중에 하나다.
사실, CEO 세종에 대한 평가는 그를 따랐던 수많은 인재들에 대한 평가만으로도 충분하다. 언제나 훌륭한 리더십은 추종자들 속에서 드러나기 마련이다. 세종은 자신을 따른 사람들에게 진정 즐겁고, 보람차며, 생에 의미 있는 일이 되도록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그들에게 그것은 자신을 협력자로 인식시키기에 충분했다.
ⓒ전경일, <창조의 CEO 세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