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의 CEO 세종] R&D만이 살 길이다
고려를 대신해 조선이 창업되게 된 배경에는 피폐한 국가 경제가 큰 몫을 차지했다. 고려는 토지 정책에 실패해 국민경제가 피폐해졌고, 농업 생산성이 극도로 악화되었다. 고려의 국가 경영층들은 나라가 이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효과적인 개혁을 이루어내지 못했다. 이것이 고려가 망한 이유의 하나였다.
따라서 조선으로써는 창업 후 생산성 극대화 방안이 절대적으로 요구되었다. - 사실 예나 지금이나 이러한 실질적인 성과를 국민들은 기대하고 있지 않은가! - 그리하여 태조는 먹고 입고 사는 소위 생활에의 문제와, 교육문제가 신생 조선이 해결해야 할 가장 근본적이고, 근원적인 문제라고 생각하고 여기에 관심을 기울였다. 태조 이성계가 “농상(農桑)은 왕정(王政)의 본(本)이며, 학교는 개화의 원(原)이다.(태조 4년 10월 을미)”라고 한 것은 먹고 사는 문제의 중요성을 인식해 한 말이다. 그는 실로 새 정부가 최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실천은 세종시대에 이르러서야 구체화 된다. 그리하여 세종은 경제 발전과 국민 교육을 가장 중요한 국가적 미션으로 이해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국가적 핵심역량(core competence)을 모으기 시작한다. 경제 부분에서 R&D의 도입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나타나게 된다.
[거대한 변화의 시기에 R&D 기회를 잡다]
세종이 CEO로 취임한 15세기는 유럽에서 이른바 중세가 끝나가는 시기였다. 또 근대 과학은 이제 막 싹트려고 준비하는 시기였다. 한편, 그 찬란했던 이슬람 문명은 거의 힘을 잃어 가고 있었다. 이 시기 이슬람의 영향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여말 선초인 13~14세기에 이르면 한반도에 이슬람 문화가 본격적으로 유입되기 시작한다. 이 시기에는 원나라 조정의 행정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중앙아시아계 무슬림인 투르크계 위구르족에 의해 유입됐는데, 이들은 당시 ‘회회인(回回人)’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래서 이들의 종교인 이슬람교를 회교(回敎)라 불렸던 것이다. 이 시기에 이들은 고려 도읍지인 개성을 중심으로 신앙공동체를 형성하며 이슬람 문화를 이식했다고 전해진다. 이들의 문화를 받아들인 좋은 예가 조선 세종 때 편찬된 역서(曆書, 천체를 관측하여 해와 달의 운행과 절기를 적은 책)인 『칠정산내외편』이다. 당시 중국에서는 이라비아 역법인 회회력법(回回曆法)이 사용되고 있었는데, 세종은 이를 참고로 역서를 만들게 했던 것이다.『칠정산내외편』은 이후 효종 때 서양식 역법인 시헌력법(時憲曆法)이 도입될 때까지 약 200년간 일식과 원식 등 천문관측에 이용됐다. 이 외에도 궁중의 공식행사에 무슬림 대표나 종교지도자들이 초청돼 코란을 낭송하기도 했을 만큼 이슬람교의 영향은 커졌다. 하지만 15세기 이후가 되면 이슬람의 영향력은 급격히 쇠퇴한다. 조선왕조는 건국이념인 유교사상을 부흥시키기 위해 타문화를 배척했기 때문이다. 이후 이슬람 문화는 점차 사라져 20세기 초, 문화가 개방될 때까지 자취를 감춘다.
더구나 국제 정치를 살펴보면 중국에선 1368년에 명나라가 세워졌고, 일본은 여전히 전국시대의 소용돌이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그리고 송(宋)ㆍ원(元)대의 과학 기술은 명(明)대에 이르러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고, 제자리에 멈추어 서 있었다.
이 시기 조선은 매우 신속하게 안정을 이루면서, 관심을 밖으로 돌릴 수 있었다. 이것은 세종에게 실로 절호의 기회였다. 어느 시대나 한 국가도 기회를 잡느냐, 못 잡느냐에 따라 국운이 크게 달라진다. 또 기회를 잡는 타이밍도 매우 중요하다. CEO가 되기 전부터 멀리 밖으로 눈을 돌렸던 세종은 이 무렵 새로운 세상을 감지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거대한 과학기술의 기회 앞에 우뚝 선다.
이 거대한 변화의 시기에 과학 기술을 도입하면 그야말로 초대형 기회가 창출된다는 것을 그는 직감적으로 알아 차렸다. 더구나 이러한 과학기술은 유교적 경영 이념을 실천하기에 그야말로 딱 맞아 떨어지는 것이었다.
[세종, 현실을 직시하다]
하지만 현실은 매우 절망적이었다. 낮은 생산성과 낙후된 농업 기술 및 시설 부족은 여전히 백성들의 먹거리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었다. 세종은 하늘과 백성을 우러러 가슴을 쳤다. 더구나 전염병이 돌고 먹을 게 없어 백성들의 삶은 처참했다. “금년 봄에 역질이 크게 유행하여 주린 사람이 병에 걸리면 곧 죽었고, 나무껍질을 벗기거나 뿌리를 캐어 먹고 처자를 보전하지 못해 아이를 길에 내다 버렸다.” (『세종실록』19년 2월 9일)고 하는 실로 절박한 상황이 벌어졌던 것이다. 이러한 참담한 현실을 극복하고자, 세종은 마침내 생산성을 극대화 시킬 수 있는 방안을 다각도로 검토하게 된다. 그는 어떤 일이 있어도 식량 문제와 국민보건 문제는 반드시 해결하고 말겠다고 결심하게 된다.
이같은 문제의 해결은 농업을 기반으로 하는 신생조선으로써는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불교라는 종교를 대신해 국가 경영 이념으로 유교를 받아들인 이상, 백성들의 삶의 조건을 개선하는 것은 국가 CEO의 당연한 의무였다. 그런 차원에서 농업 생산성의 증대는 매우 중요한 국가적 과제였다.
한층 높아진 국가 CEO의 의무감은 세종으로 하여금 중국을 통해 흘러들어오는 첨단 과학기술에 주목하게 했다. 바로 그러한 기술은 조선의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는데 구원투수가 될 수 있을 거라고 그는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세종은 정초와 변효문에게 지시해 하삼도 지방에서 사용되는 선진적인 농업기술을 잘 익혀『농사직설(農事直說)』이라는 농작물 재배 지침서를 출간하게 한다. 『농사직설(農事直說)』은 농사 이외에 다른 ‘설(說)’은 섞지 아니하고, 백성들이 쉽게 알아 볼 수 있도록 쓴 책이라는 뜻이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농사는 천하의 대본(大本)이다“는 말은 이 책의 서문에 나오는 말이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이 책의 영향력은 가히 메가톤급이었다. 이 책에 소개된 신식 농법과 농업 정책은 생산성 향상에 충분한 솔루션이 되어 주었다. 그 예를 한 번 살펴보자.
[경험으로부터 얻어라. 새로운 것은 거기서 나온다]
세종시대 농업의 가장 중요한 변화는 땅을 한 두 해 놀린 다음 농사를 짓던 방식에서 매년 농사를 짓는 방식으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휴한법(休閑法)’에서 ‘연작상경법(連作常耕法)’으로 바뀐 것은 이것을 뜻한다.) 그때는 왜 땅을 놀렸었냐고 반문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농사를 그렇게 짓게 된 까닭은 바로 ‘지력(地力)’ 때문이었다. 땅은 거름을 하지 않는 한 계속해서 농사를 지으면 생산량이 줄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세종 이전에는 땅을 한 두 해씩 묵혀 지력(地力)을 회복한 다음에야 다시 경작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 연구 결과 거름을 주면 땅을 놀리지 않고도 해마다 농사를 지을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것을 ‘시비법(施肥法)’이라고 한다. 이러한 시비법의 시행으로 농지 활용을 극대화 시킬 수 있어 생산량이 크게 증가되었다.
이러한 효과가 밝혀지자, 세종은 이를 바로 현장에 적용하도록 지시했다. 더구나 작물과 작물 사이에 다른 작물을 심는 방법(이것을 ‘간종법(間種法)’이라 한다.)과 더불어 논에 물을 끌어 들여서 벼를 심는 오늘날과 똑같은 농사법(‘한전(旱田)’에서 ‘수전(水田)’으로 농법이 바뀐 것을 뜻한다. )도 이때 도입되었다. 지금은 너무 당연한 얘기지만, 세종 때 까지는 이런 농업을 몰랐던 것이다.
새로운 기술을 적용해 보니, 그야말로 생산량이 엄청나게 늘었다. 그리하여 고려 초에 1결(結)의 경작지에서 평균 6~11석이 생산되던 것이 1430년에 하삼도(下三道)지역에서는 20~30석, 50~60석이 생산될 정도로 생산성이 높아졌다. 약 300~600%의 생산성이 늘어났으니, 가히 생산성 혁명이라고 부를 만 했다. 또 고려 초에는 씨 뿌린 것의 약 3배 정도 밖에 거두지 못했지만, 세종시대에 이르러서는 씨 뿌린 것의 40배를 거두어 들였다고 한다. 실로 놀라운 발전이 아닐 수 없었다.
이렇게 투입량(in-put) 대비 산출량(out-put)이 극대화됨으로써 잉여생산물이 생겨났고, 이것은 생활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이제 서서히 ‘식생활’ 문제가 안정화 되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집약농법은 실제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노동력을 제공하기 위해 의학이 발전되게 되었다. 더구나 이러한 국민 의료 보건은 세종의 ‘위민(爲民) 경영’과 맥을 같이 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13세기까지의 인구증가율(0.1%)을 훌쩍 뛰어 넘어 15세기 들어서는 4배나 증가하게 되었다. 이것은 실로 의학적 발전이 없으면 요원한 일이었다.
1230년대에 간행된 『향약구급방(鄕藥救急方)』과 세종 15년(1433년) 편찬된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은 소아(小兒)의 사망률을 현저히 저하시켜 풍부한 노동력 공급의 기반이 되었다. 이와 더불어 전문가들의 연구에 의하면 고려시대까지도 한 부부가 높은 소아사망률 때문에 아이 셋 이상을 기르지 못했으나, 세종이 아이를 낳는 임산부들을 위한 보급판 의학서인 『태산요록(胎産要錄)』을 간행ㆍ보급하자 농가의 아이수가 늘어 농촌 인구가 증가 추세를 보였다고 한다. 『태산요록(胎産要錄)』은 조선 최대의 의사 노중례가 편찬한 의학서적으로, 태교법 및 영아의 보호와 양육에 관한 책이다. 요즘말로 하면 ‘산모와 태아가 알아야 할 임신과 출산을 위한 핵심 체크 리스트’정도라고 보면 된다.
이것은 바로 세종이 민간에 흩어진 경험의 산물인 지식을 이용해 ‘지식경영’을 성공시킨 대표적인 사례로 손꼽힌다. 그리하여 그는 생산성과 삶의 질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세종이 경제 CEO로 인식되겠금 하는데 크게 기여하고도 남았다.
ⓒ전경일, <창조의 CEO 세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