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의 CEO 세종] 스스로 준비하지 않는 한, 내 것이 되지 않는다
세종은 효과적인 아이디어에 관심을 가지고 끊임없이 아웃소싱 했다. 그것은 중국을 통해 들어오는 이슬람 세계의 문명에 대한 것만이 아니었다. ‘고려’도 세종으로서는 가장 가까운 과거에서 찾아 낼 수 있는 금쪽같은 아웃소싱의 대상이었다.
고려 때 세계 최초로 개발된 금속 활자는 조선에게 커다란 유산이 아닐 수 없었다. 실제로 활자는 전임 CEO 인 태종 때부터 개발 프로젝트로 잡혀 있었다. 그 당시 태종은 지배층들의 강력한 반대 - 예나 지금이나 지배층들은 남들이 지식으로 무장하게 될까봐 전전긍긍한다. 그들에겐 언제나 민중의 ‘지식’이 가장 강력한 위협 요소로 인식되는 것이다. - 를 물리치고 계미(癸未) 청동 활자를 주조하고자 했다. 태종도 13세기 고려에서 발명되어 겨우 명맥이 이어지고 있던 청동 활자 인쇄술을 국가적 프로젝트로 삼아 기술혁신을 해내려고 노력했다.
[‘지력(知力)’이 ‘실행’을 만나면, 새로운 전통이 만들어 진다]
그런 전통은 이어져 세종은 고려시대 금속활자를 개량하기 위해 1420년과 1442년에 각각 ‘경자자(庚子字)’와 ‘갑인자(甲寅字)’로 불리는 새로운 동활자(銅活字)를 개발해 내게 했다. 이 프로젝트에는 이천ㆍ 김빈 등 핵심 엔지니어들이 참여했는데, 갑인자(甲寅字)는 조선시대를 통하여 가장 사랑을 받은 활자가 되었으며 누구나 좋아하여 19세기까지 일곱 번이나 더 주조되었다.
또 인쇄하는 방법도 개선해 인쇄 능률을 향상시켰다. 그리하여 세종 3년에는 경자자를 완성하고 인쇄법을 개량하니 일일 인쇄부수가 이전의 20배나 되었다. 이는 실로 엄청난 생산성 향상이었다.
이렇듯 세종은 우리의 과거나 외국으로부터 신생 조선에 필요한 것을 찾아내 이를 적용하고자 하는데 각별했다. 이는 국가 CEO의 자리가 단순한 관리자 위치가 아닌, ‘깨닫는’ 관리자여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실제 이런 성과들은 세종의 몸에 밴 탐구정신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그는 항시 사건과 사물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졌으며, 그것의 본질을 정확하게 깨달을 만큼 지력(知力)과 경험이 충분한 국가 CEO 였다. 이렇게 깨닫고 나서 세종이 한 일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실행에 옮기는 것’이었다. 진정한 벤치마킹은 남의 것을 가져다 충분히 소화해 내 완전히 독창적인 자기 것을 재창조하는 것이라는 것을 그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아웃소싱 활동과 관련되어『연려실기술』은 다음과 같이 흥미로운 기록을 전하고 있다.
“세종 3년, 윤사웅, 부평부사 최천구, 동래 관노 장영실을 내감(內監)으로 불러서 선기옥형(璇璣玉衡, 천체의 운행과 그 위치를 측정하여 천문시계의 구실을 하였던 ‘혼천의’를 말한다.) 제도를 논란 강구하니 임금의 뜻에 합하지 않음이 없었다. 임금이 크게 기뻐하여 이르기를, ‘장영실은 비록 지위가 천하나 재주가 민첩한 것은 따를 자가 없다. 너희들이 중국에 들어가서 각종 천문 기기의 모양을 모두 눈에 익혀 와서 빨리 모방하여 만들어라.’ 하고, 또 이르기를, ‘이들을 중국에 보낼 때에는 예부에 공문을 보내서 역산학과 각종 천문 서책들을 무역하고 보루각, 흠경각의 혼천의(渾天儀) 도식(圖式)을 견양(見樣)하여 가져오게 하라.’하고 은냥(銀兩)과 물산(物産)을 많이 주었다.”
세종은 실로 모방을 창조를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채택한 CEO였다. 그는 남의 것에 대한 일방적 복사(copy)가 아닌 우리 것을 만들어 낼 줄 아는 진정한 의미의 ‘창조자’였다. 사실 쇳물을 부어 활자를 만들어 내는 작업 광경을 바라보면서 세종이 연상한 것이 무엇이었겠는가? 그것은 남의 것을 들여와 녹여서 우리 것을 만들어 내겠다는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아니었을까? 그런 의미에서 세종은 진정 준비된 CEO로 15세기 세계적인 변혁의 시대를 주도해 나갔던 것이다.
[꾸준한 R&D로 경쟁력을 확보하라]
‘경자자(庚仔字)’ 개발은 그야말로 대성공이었다. 새로운 활자를 써서 인쇄된 책은 목판본이나 다름없이 깨끗했고, 인쇄 능률도 획기적으로 향상됐다. 이 일을 위해 세종은 수시로 현장을 방문해 장인(匠人)들을 격려했고, 회식 자리를 열어 그들을 위로하는 등 온갖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주자소의 직원들이 생계를 걱정하지 않도록 충분히 보상했고, 또 특별 보너스를 지급하기도 했다. 지금으로 얘기하자면, 프로젝트의 성과에 따른 인센티브를 부여한 것이다. 세종은 이처럼 인쇄 분야에 이례적인 국가 자원을 투입했다.
그렇다면 세종이 이토록 인쇄 분야에 국가 기술력을 모은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바로 다름 아닌 유교적 두뇌강국을 만들려는 그의 야심찬 목표 때문이었다. 그가 꿈꾸던 유교 사회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백성들에 대한 교육이 필요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많은 서적이 필요했다. 따라서 활자와 인쇄술은 당연히 기반 기술로 요구되었다.
그리하여 세종은 새로운 활자로 인쇄를 계속 하기 위해 주자소 - 국립 인쇄소라고 할 수 있다. - 를 경복궁 안으로 옮기고 출판물도 경전 위주에서 역사책으로 바꿔 가면서 인쇄 하게 했다.
[우리 손으로 금속 활자 기술을 개발해 내다]
이것은 실로 대단한 국책 과제였다. 중국에서조차도 기술적으로 해내지 못한 금속활자 인쇄기술을 우리 손으로 직접 개발해 냈던 것이다! 이어 갑인자까지 개발되었으니, 이는 실로 인쇄 기술의 쾌거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는 산업 표준화의 의미에서 정밀한 청동 활자의 규격화를 의미했고, 생산성 측면에서 보자면, 규격화되어 있는 기계식 매스프로덕션의 초기 모습이기도 했다.
그런데, 활자를 주조하는 과정에서 우연찮게 몇 가지 파생 기술을 얻게 되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합금술이었다. 연구에 의하면, 세종이 갑인자를 주조하는데 사용한 놋쇠는 그 강도가 미군 해군의 대포에 사용되는 금속의 강도에 필적한다고 한다. 그것은 84%의 구리, 3~7%의 아연, 5%의 납, 0.1%의 무쇠로 이루어져 있어 활자를 주조하는데 최상의 합금이었던 것이다.
ⓒ전경일, <창조의 CEO 세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