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의 CEO 세종] 활인 경영: 인정(仁政)의 본말(本末)을 다하라
우리는 의료제도 시행 상 여러 가지 이견이 발생해 한동안 온 나라가 시끌시끌했었던 적이 있다. 의학 분업 찬반 논란ㆍ파업ㆍ진료거부 등으로 가장 고통을 받은 사람은 의료행위에 직ㆍ간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던 사람들이 아니라, 환자와 그 가족들이었다. 세종시대와 견주어 본다면, 이는 납득이 가지 않는 일이었다. 이러한 비상식적인 일은 세종시대는 물론이고, 조선의 역사를 통 털어서도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 그 엄청난 임진왜란 기간 동안에도 의원들은 피난을 다니며 환자들을 돌봤고, 스스로 병원을 지켰다.
바로 그와 같은 의료 행위뿐만 아니라, 의원들의 도덕적 의무감은 세종의 ‘백성사랑’에 크게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리하여 ‘긍휼히 여기는 마음’은 우리나라 의학계의 하나의 전통이 되었다. 그리하여 세종은 일반 백성들이 골고루 의료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제도 자체를 개혁해 나갔고, 이를 실천에 옮겼다.
만인에게 의료혜택을!
세종은 우선 중앙 의료기관인 전의감(典醫監), 왕실의 의료를 맡은 내의원(內醫院), 일반 백성들을 위한 의료시설인 혜민서(惠民署), 가난한 사람들과 무의탁 병자 및 전염병 환자를 돌보는 동서활인원(東西活人院) 등 네 개의 의료시설들을 두고 이를 풀(full) 가동해 환자들을 돕고자 했다. 이러한 세종의 의료 혜택은 감옥에 수감된 죄수들에게까지 돌아갔다.
세종은 혜민서와 침술기관인 제생원(濟生院), 동서활인원에서 일하는 의료진들로 하여금 교대로 내진해 죄수들이 더 나은 의료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조치까지 했다. 한편, 그는 죄수들이 병으로 죽어가는 것을 보고, 형리들로 하여금 병자들을 더 잘 돌보도록 감독할 것을 지시했다.
이러한 세종의 백성사랑은 세종 15년(1433년)에 완성된『향약집성방』서문에 잘 나타난다. 전 85권의 방대한 의학서인『향약집성방』은 그 당시 비싼 중국산 수입 의약품을 쓰던 풍토를 개선해 국산 약재를 개발해 쓰게 함으로써 수입대체 효과를 가져왔고, 또 즉각적인 의약품 보급이 가능하게 했다. 이 책의 서문에서 권채(權採)는 세종의 이러한 의료정책을 “인정(仁政)의 본말(本末)과 크고 작은 것을 남김없이 다한 것”이라고 할 정도로 세종의 의학적 관심은 각별했다. 책의 서문에서 세종은 “무명지(無名指)를 펴려고 천리를 찾아 가는 게 인지상정인데, 하물며 나라 안에서 외국으로 나가지 않고 병을 고칠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느냐.”며 백성들이 약을 구하기 쉽고 병을 치료하기 쉽도록 하려고 무한히 애를 썼던 노력이 드러난다. 그리고 그는 이것을 국가 CEO의 도리, 즉 ‘인도(仁道)’라 고 하였다.
의사 고시와 인턴제를 실시하다
구휼 행위와 함께 세종은 의학전문 연구 기관인 의학습독청을 설치하였고, 의학 분야에서 재능 있고 박식한 인재들을 선발하기 위해 국가고시를 시행했다. 지금으로 얘기하자면, 이는 의사 임용고시에 해당된다. 그 시험에 응시하기 전에, 미래의 의사들은 이론과 실기ㆍ임상 실습을 위해 의학전문 교육 기관인 의생방의 인턴 생활을 거쳐야 했다. 또한 진료와 제약을 함께 함으로써 생기는 전문성의 결여를 방지하기 위해 분업화를 꾀했다. 이와 더불어 문과 출신자 중에 우수한 사람들에게는 의학업무를 전담하게 하는 유의(儒醫) - 의술업에 종사하지 않고, 의학의 연구와 교수에만 종사한 양반 계급을 말한다. - 제도도 도입했다. 이 유의제도로 인해 유능한 의원들이 많이 배출되게 되었다. 또 각자 적성에 맞게 의학 계통의 인재들을 키우고, 그들을 적재적소에 배치시켰다.
더구나 이때는 여성의사, 즉 의녀(醫女)제도가 있었는데, 이는 전임 CEO인 태종 때부터 추진한 제도였다. 남녀가 유별해 부인과 계통의 질병을 앓고 있는 여성 환자들을 위해 여의사 제도를 만들었던 것이다. 이들의 주요한 임무는 궁녀들에게 침을 놓아 주거나, 비빈들의 해산시에 조산원 노릇을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제도는 내외법에 따라 궁중에서 비빈을 비롯한 궁녀들이 남자의원의 진맥을 거부하여 죽는 경우가 많아지게 되자 생겨난 것이다. 이는 실로 여권 신장에 크게 기여하였다.
우리 몸에 맞는 의학서적을 출판하라
세종은 의료제도 개혁 이외에 의학 분야의 독자성을 마련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사상의학적 체계는 농법의 발달과 관련이 있다. 바로 이 점에서 힌트를 얻어 세종은 신체와 땅은 하나(身土不二)이며,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우리 약초가 잘 듣는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하여 이와 같은 신념하에 한국산 약초의 사용을 적극 장려했던 것이다.
또한 의학 분야의 연구를 강화하기 위해 의학자들을 중국에 파견해 약용식물에 대한 참고도서를 수집하고 연구하게 했다. 세종이 이렇게 막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고 의학전문인을 해외에 출장ㆍ파견ㆍ유학까지 보낸 것은 실로 장기적인 의학적 성과를 목표로 한 것이었다.
세종은 이미 이때 의료개혁 프로젝트를 생각하고, 그것의 일환으로 그들을 해외에 출장 보냈던 것이다. 그리하여 세종이 목표로 한 계획은 차질 없이 진행돼 그들은 훗날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이라는 실로 탁월한 의학전문 서적을 세상에 내놓게 된다.
약재 채취 실명제를 실시하라
세종시대 의약 업적 가운데 가장 크게 꼽을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국산약재, 곧 ‘향약’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이다. 그리하여 세종은 국산약의 채취에 직접 도움을 줄 수 있는『향약채취월령』을 편찬하게 한다. 이는 국산 약재 수 백 종을 연구해 약명을 기입하고 약의 성질과 효능, 약재의 채취에 가장 적합한 시기, 약재 말리는 법 등등을 낱낱이 밝힌 것이다. 또 자료의 정확성을 기하기 위해 중국에 의관을 파견해 이의 내용을 확인하도록 지시했다.
『향약집성방』 편찬시 세종은 “모든 국산 약재는 반드시 때맞춰 채취하고, 말리기도 법대로 하며, 상납할 때는 아무 고을 아무개가 아무 달에 채취한 무슨 약임을 함께 기입하여 알리게 하라.”고 지시했다. 약재 채취 실명제가 도입된 것이다. 이는 인쇄 교정 분야에서 세종이 생산 공정에 참여한 기술자들에게 결과물에 서명케 함으로써 자기 책임제를 도입한 것과 맥을 같이한다. 이와 더불어, 세종은 중국에 사신을 보낼 때에는 의관을 함께 파견해 각각의 내용을 확인하도록 지시 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국산 약재와 중국 약재의 동일성 여부, 효능의 차이 등이 보다 분명해 졌다. 이는 실로 과학적 데이터 수집 및 관리 검증 방법을 통해 세종이 의학 발전에 지대하게 기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향약집성방』은 그런 노력의 결과물이었다.
이것은 뒤에 동아시아 의약학에 있어 가장 야심찬 대역작 의약 백과사전인『의방유취』의 편찬으로 이어지게 된다.
법의학의 전통을 세워라
세종은 의학 발전뿐만 아니라, 법의학 분야에서도 탁월한 업적을 남겼다. 그는 형사 사건을 공정하고 편견 없이 조사하도록 판관들에게 주의시켰다. 예를 들어, 세종은 살인 사건의 경우 죽음의 원인을 조사할 때, 여섯 번까지 반복하여 시체가 발견된 장소에서 검시를 시행할 것을 제안했다. 검시 절차를 위한 지침은『신주 무원록(新注 無寃錄)』에 그대로 인쇄되어 행형 관리들에게 배포되었다. 세종이 의학이 의술과 박애임을 스스로 보여 주었다는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그는 실로 인간의 생명에 대한 존중심과 백성에 대한 진실한 사랑을 가졌던 국가 CEO였다.
그렇다면 왜 이토록 세종은 의학 분야에 노력을 기울였을까?
그것은 앞서 누누이 얘기한 것처럼, 그의 국가 경영 목표가 진정한 의미의 ‘위민(爲民) 경영’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시종 변치 않는 그의 경영 원칙이다. 따라서 의학과 의술행위를 통한 ‘활인(活人)’은 실제 한 사람의 백성을 살려 내기 위해서도 절대적으로 필요했지만, ‘신생 조선’을 제대로 살려내고 키워 나가기 위해서도 절실히 필요했다.
이는 곧, ‘생생지락(生生之樂)’의 경지를 열어나가는 ‘활력(活力)’을 의미했으며, 동시에 살아있는 정부, 살아있는 조선을 만들고자 하는 세종의 강한 의지에서 나온 것이었다. 세종은 바로 그 같은 문제 속에서 답을 찾았다. 그리고 그러한 답은 사람들의 아픈 곳을 어루만지고 ‘긍휼히여기는’ 마음에서 나왔다. 이는 분명, 세종 자신이 조선의 국가 CEO이기 이전에, 한 개인으로써도 얼마나 인간미 넘치는 인물이었는지를 보여주는 예가 아닐 수 없다. 사실, 이러한 그의 인간미가 전임 CEO들이 저지른 그 모든 아픔을 치유하고, 백성들의 마음을 녹여 내면서, 신생 조선을 강한 결속과 화합의 장으로 만들게 한다. 그는 그 자신의 고백대로 국가 CEO로서 정말이지 “인정(仁政)의 본말(本末)을 남김없이 다했다.”
[ 세종으로부터 배우는 경영 정신]
* 자신의 삶과 타인의 삶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라. 당신의 이러한 ‘마음’은 하나의 전통이 되어 세상을 불 밝히는데 조금이나마 보탬이 될 것이다.
* ‘인(仁)’과 ‘덕(德)’보다 강한 경영은 없다. 소외된 곳의 사람들을 돌보는 마음은 진정 당신의 경영을 강하게 만드는데 가장 큰 힘이 되어 줄 것이다. 그것은 사람들에 입에서 ‘칭송’어린 꽃으로 피어난다.
* 장기적인 성과를 목표로 지원하라. 그러다 보면, 반드시 높은 성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이런 것이 당신이 삶과 사업에 임하는 자세이어야 한다.
* 경영 원칙에는 시종 변치 않는 원칙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진정한 의미의 목표다. 실로 누군가를 제대로 위한다는 것은 가장 올바른 ‘위민(爲民) 경영’의 자세인 것이다.
* 사람과 조직 모두를 활력에 넘치도록 하라. 그것이 사람과 조직 모두를 살려내는 것이다. ‘활인(活人)’은 살아있는 조직을 만들기 위해 CEO의 강한 의지에서 나와야 한다.
* 처음과 끝을 다해 인정을 베푸는 경영을 하라. 비록 그것이 금방 남의 이목에 들지 않는다고 해도, 그것을 행하는 당신의 마음은 이미 그 대답을 들었다. 당신의 경영은 이러면 된다.
ⓒ전경일, <창조의 CEO 세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