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의 CEO 세종] 문화는 나라의 경쟁력이다. 절대로 밀려서는 안된다
세종은 국가 경영을 예술의 수준으로 격상시킨 CEO였다. 이것은 그가 문화 인프라에 그토록 엄청난 업적을 남겼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얘기이다. 그가 신생 조선의 CEO로 재임한 시기는 600여 년 전의 일이지만, 그는 지금 시대 최고경영자들에게도 똑같이 요구되는 경영상의 필수 요건을 갖추고 있었고, 그것을 경영 현장에서 실현해 냈다. 세종의 경영은 실로 ‘시대를 초월한 것’이었다. 그는 뛰어 넘을 수 있었고, 또 그 때문에 역사에 항구적으로 아로새겨졌다.
초월 경영을 이루어 내다
그의 이러한 ‘초월 경영’은 오늘날 국가나 기업의 경영자들에게도 반드시 요구되어 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느 누구나 한 두 가지 분야에서 성과를 내기는 쉬워도, 전체적인 시스템ㆍ인프라를 갖추는 일을 해 내는 것은 지극히 어렵기 때문이다. 더구나 CEO가 떠난 다음에도 그가 만든 정신ㆍ문화적 O/S가 지속적으로 작동될 수 있도록 해 놓았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세종은 이를 해 냈다. 그러면서도 세종은 국가 CEO로서 경영상 제기되는 가장 보편적인 의무에 대해서도 결코 소홀하지 않았다. 예나 지금이나 CEO에게 요구되는 것은 어찌 보면 매우 단순한 것이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다.
“무엇보다도 CEO는 성공적으로 사업을 일구어 낼 수 있어야 한다. 그는 내부적으로 활달하고 긍정적인 문화를 창조하고, 또 구성원들을 만족시키고, 그들이 진정으로 개인 가치를 표현할 수 있도록 동기 부여를 해 주어야 한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비전이다.”
이와 같은 얘기는 말하기는 쉽다. 하지만 실제 실행을 통해 이를 얻어내려면 평생을 다 바쳐도 이루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세종도 신생 조선의 CEO가 되어 취임하자마자 이런 요구에 곧 바로 직면하게 된다.
문화의 통합자, 세종
한 국가의 CEO로서 세종의 필생의 대업은「훈민정음」을 비롯해 영구한 시스템의 일부로 남게 되는 ‘정신’과 ‘문화’를 일구워 낸 것이다. 고려와 조선이라는 신구의, 토착과 외래라는 내ㆍ외부의 문화를 수용ㆍ조정하면서 이를 적당한 비율로 배합해 그는 마침내 거기에 생명을 불어 넣었다. 따라서 외래 문물의 무분별한 수입이 아닌, 조선의 실정에 맞는 것만을 제대로 골라 필터링(filtering)해서 그는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그의 이러한 노력은 조선을 독창적이며, 독보적인 문화 강국으로 거듭나겠금 만드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사실, 그의 이러한 일련의 작업은 결코 ‘저항’없이는 이루어 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또 가끔 외래 문화와의 ‘문명의 충돌’ 현상을 빗기도 했다. 이렇듯 상호 이질적인 것을 융합하는 데에는 당연히 마찰도 뒤따랐고, 마찰을 조정하는 것 자체가 세종에게는 엄청난 도전이기도 했다.
그러나 세종은 이런 상황에 접해 그 자신 조선의 CEO로서 유감없이 자신의 능력과 개성을 드러내 주었다. 자기 눈높이의 범주 안에 문화를 묶으려는 그의 시도는 매우 보편적이었고, 향상된 것이어서 당대뿐만 아니라, 후세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그는 실로 ‘문화’가 무엇인지, 또 문화를 변화시키는 것이 무엇인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실로 문화 지향형, 문화 통합형 경영자였다. 사실 세종시대의 안정은 바로 이러한 문화적 자부심과 강한 흡인력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것이 마찰이 있어도 신생 조선을 분열과 파국으로 치닫지 못하도록 정신적으로 강하게 제어했던 것이다. 그 사령탑에 세종이 있었음은 두 말할 나위 없다.
문화는 생명의 코드(life code)
세종은 신생 조선의 CEO로서 재임 시절 유구한 역사 속에 남을 문화적 인프라를 구축하는데 가장 열심이었다. 대표적인 예로「훈민정음」은 우리 민족 문화의 신기원을 이룩한 그의 가장 ‘근원적’ 업적이었다. - 이 ‘근원적’이라는 말에 주목하기 바란다! - 사실, 세계 역사상 어느 CEO의 어떤 업적도 이를 뛰어넘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이것은 우리의 얼과 문화 그리고 커뮤니케이션과 민족 정체성 등 그 모든 것을 묶는 가장 ‘근원적인 기본 코드(basic code)’이자, 우리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역동성의 근간이기 때문이다.
더불어 향악의 창작, 새로운 악보 및 악기의 제정, 보평업ㆍ정대업 등의 작곡 등을 통해 ‘삶의 질’을 향상시키려 한 것은 그가 얼마나 한국적인 가치를 구현하는데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지 명백히 보여주고 있다. 세종으로부터 시작된 이러한 전통이 없었더라면, 오늘날 우리는 ‘우리 것’이라할 만한 것에 매우 빈한함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또한 그것은 우리의 ‘자긍심’에 커다란 손상을 가져왔을 수도 있다.
실로 세종의 문화적 업적은 우리가 세계로 뻗어나갈 수 있는 전기를 마련하는데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그가 후세에 남긴 - 지금도 강력하게 작동되고 있는 - ‘생명의 문화 코드’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문화를 역사와 전통이라는 서고에 저장해 두는 것이라, 우리의 생활 속에서 그대로 반영해 누리고 있는 것이다.
우리 소리를 찾아서
세종은 조선의 CEO이기 이전에 개인적으로도 매우 탁월한 음악인이었다. 그는 자신의 경영 기간 동안 음악에서 좀 더 민족주의적이고 한국적인 정서를 찾고자 부단히 애를 썼다. 그리하여 그는 1424년 이후부터 음악에 집중적으로 에너지를 쏟기 시작해 고려 시대 음악을 모방해 쓰던 전임 CEO들의 관례를 깨고 이를 완전히 혁신해 냈다.
이 무렵 그는 아악이 수정되어야 할 오류가 많다고 생각해 본격적으로 중국 송대의 음악과 이론을 벤치마킹하기 시작한다. 그와 박연과의 만남은 바로 이러한 조선 음악 혁신의 과정에서 운명적으로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이때 세종에게 음악에 관한 자문역을 맡았던 박연은 중국과 한국 음악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고, 또 수 백여 가지의 악기를 개발해 낸다.
그리하여 악공(樂工)들은 여러 종류의 대나무 관악기를 만들고, 더불어 모든 악기 중 가장 장엄한 편종(編鐘)과 편경(編磬)을 만들어 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악기 제작에 있어 최정점에 달한 것이다. 또 악기 제작을 위해 악기도감(樂器都監)이라는 특수 기관이 세워지고, 악기를 조율하기 위한 조율관이 만들어 졌다. 가히 음악 육성에 관한 기반 프로젝트가 완성되어 갔던 것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율관(律官)의 제정이었다. 그리하여 1430년까지 일단의 음악이 국가 의례의 목적으로 편찬되고 수정된다. 이 모든 음악은 1430년 말에 『아악보』라는 책에 기록되었으며, 그리하여 이러한 음악사적 업적은 오늘날까지 남아 있게 된다.
ⓒ전경일, <창조의 CEO 세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