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의 CEO 세종] 나는 조선의 CEO다(1)
세종이 신생 조선의 CEO로 취임하게 된 15세기는 그야말로 대변혁의 시기였다. 세계사적 격랑 속에서 스스로 바로 서지 않으면 영구히 자주성을 상실할 수도 있는 위험이 내포되어 있는 시기이기도 했다. 조선은 고려를 대신해 새롭게 일신해 창업했으나, 결코 강대국은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여전히 중국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구려가 망한 후, 우리 민족은 대륙을 잃은 아픔을 지속적으로 감내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나마 잠깐, 절호의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조선의 창업자인 태조의 위화도 회군으로 물거품이 되고 만다. 역사적 관점에서 보자면, 조선은 대륙 도모를 포기한 대신 창업된 국가였다. 조선은 너무나 큰 대가를 치루고 창업된 나라였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여전히 북쪽으로는 강한 중국이 있었고, 남쪽으로는 집요하게 덤벼드는 일본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세종에게 자주 경영은 조선의 생존 및 번영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기치였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 드러나서는 안되었다. 왜냐하면 자칫 잘못하다간 중국으로부터 견제의 대상이 되어 사사건건 발목이 잡혀 버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국가 경영에 있어 균형과 조화의 지혜는 세종이 국내외로 슬기롭게 현실을 대처해 나가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었다. 그것은 실로 고도의 게임 감각과 플레이를 요하는 경영 전략이었다.
세종은 이렇듯 자주경영 원칙에 입각해 민족적 자아와 자존을 지키려는 경영의 최전선에 선 CEO였다. 그가 맡은 이 일은 누구도 대신 해 줄 수 없었다. 국가 CEO로서 자신에 대한 자각은 세종의 경영을 일관되게 관통하고 있는 것 중의 하나였다.
우리는 우리로 서라
세종이 CEO 로 취임한 신생 조선은 정말 ‘할 일이 많았다.’ 그러기에 변화의 ‘젊은 피’를 갖고 태어난 신임 CEO는 의욕에 불탔다. 그러나 조선이 처한 현실은 중국으로부터는 간섭을, 일본과 여진족으로부터는 심각한 생존에의 위협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생존을 위해 자주 국방은 세종에게 그 어떤 것보다도 중요한 당면 과제였다.
그러나 고려 때 도입한 화기기술은 그야말로 꺼진 폭약과 같았다. 그리하여 세종은 최해산(고려 말 화약을 개발한 최무선의 아들. 그는 부친의 화약제조 기술을 전수 받아 이를 발전시켰다.) 개인에게 의존하던 화약과 화기기술을 국가적 자원을 투입해 더욱 파워풀한 화력으로 탈바꿈 하고자 시도한다.
물론 이러한 화력 증강은 서둘러 진행되어야 했다. 그리하여 세종은 궁중에 있던 사복시(司僕寺) 근처에 화약제조소인 사표국을 설치해 비밀리에 화약을 제조하도록 지시한다. 고려 말 최무선에 의해 개발이 시작된 우리나라의 화약 무기는 그동안 중국의 화약무기를 모방하여 사용하였으나, 세종에 이르러 비로소 독창적인 화약 무기로 발전하게 된다. 당시 중국과의 사신 왕래를 통한 무역에서 조선이 중국에서 들여온 것 중에는 서적ㆍ약재ㆍ악기와 더불어 화약이 주요 물품이었던 것을 상기하기를 바란다. 조선은 이러한 무역을 통해 단순히 중국의 문물을 수입하는 것에 그친 것이 아니라, 화약ㆍ조선기술ㆍ산법 등의 기술을 익히려 했고, 이를 위해 중국에 유학생을 보내기도 했다. 지금으로 얘기하자면 이공계 두뇌들을 보내 핵심 방위산업 기술을 배워 오게 했던 것이다.
세종 15년 쯤 부터는 이런 기술 발전이 비약적으로 이루어진다. 수요는 반드시 공급을 가져온다. 그 당시 무기 분야에서의 기술 혁신은 바로 서북 변경 개척과 여진족 정벌을 위해 화약과 화기의 수요가 급증하면서 그 수요를 채우게 된다.
초강력 울트라 신병기를 개발하라
세종은 화기 개발 프로젝트에 자신의 왕자들을 투입해 대포 제작의 일을 맡아 감독하게 한다. 또, 엔지니어들에게는 다른 일은 전혀 시키지 않고 오로지 R&D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경제적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그는 또한 성공적인 프로젝트 수행을 위해 조직을 개편해 대포 주조의 총책임자를 새로 발령하고, 군기감(軍器監)에 지시해 화포주조소를 별도로 지방 요충지에 있는 행궁(行宮) 근처에 짓게 한다.
세종이 이렇게 한 것은 화포 및 화약 개발 제조가 워낙에 중대한 특급 프로젝트였기 때문에 자신이 수시로 들러 프로젝트를 직접 관리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의 지휘 아래 화포의 성능 향상을 위해 R&D 활동을 적극 강화하도록 했으며, 자신이 참석한 가운데 여러 번 공개적으로 화포 발사 시험을 하게 했다.
이러한 연구 결과, 화기 기술은 집대성 되었고, 조선의 독특한 화포기술과 제도가 완성되는 쾌거를 이루게 된다. 그 당시에 새로 개발된 백환화포ㆍ세총통(細銃筒)ㆍ일발다전포ㆍ신기전(神機箭) 등은 이런 성과가 반영된 것이다. 이것은 실로 자주 국방에 있어 대단한 성과를 의미했다. 특히 한꺼번에 많은 화살을 동시다발로 날려 보낼 수 있는 일발다전포는 지금의 기관단총처럼 적에게 충분히 두려움을 줄 만큼 위력적인 무기였고, 신기전(神機箭)은 요즘으로 얘기하자면 로케트포와 같은 것이었다. 이미 그 당시에 우리는 로케트포의 원리를 무기 제작에 활용했던 것이다.
한ㆍ중ㆍ일 3국은 산업 스파이 전쟁 중
이와 함께 세종은 청동제 화포를 개선해 중국의 철제 화포의 수준을 따라 잡기 위해 다각도로 노력한다. 이것은 기술적인 분야뿐만 아니라, 정책적 지원으로 이어졌다. 그리하여 세종은 조직 개편을 통해 정책적 지원을 아끼지 않는 한편, 중국의 철제 화포 개발 기술을 입수하기 위해 다각도로 노력을 했다. 그 당시에도 선진 기술을 빼내려는 시도는 한ㆍ중ㆍ일 3국간에 물밑에서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어서, 조선은 일본의 산업 스파이를 의식해 화약 제조 공장을 해안 인근에 세우는 것을 극히 꺼려했다. 더구나 외국인 중에 귀화해 조선에 사는 자나, 왕래하는 자가 바다 연변에 가득 했고, 간사하고 교활한 무리가 산업 스파이에게 누설하거나, 기술자가 포로가 되어 산업기밀이 외국에 전해 질 우려도 있어 매우 비밀스럽게 취급되어야 했다. 왜구나 왜상 중에는 산업 스파이가 있어 동북아를 무대로 그들의 공식ㆍ비공식 루트를 타고 진행되는 암약 활동이 빈번했던 것이다!
매뉴얼로 남겨라
이와 더불어 세종은 총통군(銃筒軍)을 따로 편성해 화포로 무장케 한다. 이 군대는 5인을 1조로 하여 4인은 총을 쏘기만 하고 나머지 1인은 화약을 장전하기만 하게 한 것이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영화에서 보듯 사격 조와 장전조가 앞뒤로 서서 작전을 수행하는 바로 그런 식이었다. 또한 세종 30년 9월에는 화포(火砲) 및 화약사용법에 관한 매뉴얼인『총통등록(銃筒謄錄)』을 반포해 각 지방에서 총통을 만드는데 참조하게 했다.
ⓒ전경일, <창조의 CEO 세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