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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의 CEO 세종] 숨막히는 4군 6진 작전: 고구려 영토를 회복하라!(2)

전경일 2009. 2. 3. 16:09
어디 그뿐이랴!

내친 김에 세종은 북방 영토 개척을 위해 김종서에게 다음과 같이 지시한다.


“동북경(東北境)은 공험진으로 경계를 삼았다는 말이 전하여 온 지 오래이다. 그러나 정확하게 어느 곳에 있는지 알지 못한다. 우리나라 땅에서 상고하여 보면, 장백산 북쪽에 있다고 하나 또한 허실을 알지 못한다. 『고려사』에 이르기를, ‘윤관이 공험진에 비를 세워 경계를 삼았다.’고 하였는데, 지금 듣건대 선춘령에 윤관이 세운 비가 있다고 하니, 선춘령 어디에 있는가? 그리고 비문은 사람을 시켜 찾아 볼 수 있는가? 그 비가 지금은 어떠한가? 만일 길이 험조하여 사람을 시키기가 쉽지 않다면, 폐단없이 탐지할 방법을 경이 숙고하여 아뢰라. 또 듣건대, 강 밖에 고성이 많이 있다는데 어찌 비갈(碑碣)이 없겠는가? 만일 비문이 있다면 또한 사람을 시켜 등서할 수 있을런지 여부를 아울러 아뢰라. 또 윤관이 여진을 쫓고 9성을 설치했다는데, 그 성이 지금의 어느 성이고 공험진의 어느쪽에 있으며 서로 거리는 얼마나 되는지 듣고 본 것을 아울러 써서 아뢰라.”(세종21년 8월 6일)


이때 세종은 궁극적으로 만주 땅에 강한 관심을 보였던 것이다. 이를 위해 세종은 김종서를 함경도 관찰사로 임명하는 동시에 별도로 하경복, 심도원을 도체찰사, 부사로 임명해 북경 국토 개척의 대업을 부여했다. 그리하여 김종서가 형조판서로 승진해 중앙정치에 복귀할 때까지 만7년 동안 국토 확장에 지대한 공을 세웠던 것이다.


이 무렵 김종서가 사진(四鎭) 개척을 계획할 때 조정에서는 이를 두고 말들이 많았다. 반대파들은 김종서가 자기 한계를 모르고 일을 벌리고 있으니, 그를 잡아 처형하여도 죄가 남음이 있다고 극언까지 하였다.

그러나 세종은 역시 달랐다.


“내가 있다고 하더라도 종서(宗瑞)가 없었더라면 이 일을 처리할 수 없었을 것이며, 종서가 있다고 하더라도 내가 없었다고 하면 이 일을 주관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이런 세종의 지원에 힘입어 김종서는 북방 영토 개척 작전 수행시 현지 실정에 맞게 능수능란하게 전략 운용을 해 나가며 당초 계획의 일부를 변경시켜 소신껏 군영을 북으로 더 밀고 올가가기도 하였다. 『세종실록 지리지』종성도호부는 이를 잘 기록하고 있는데, 세종이란 탁월한 CEO를 만나 김종서는 마침내 세종 31년 6진의 완성을 보게 했던 것이다. CEO의 강한 신뢰와 지원에 힘입어 핵심 팀원들이 매우 긍정적인 결과를 도출해 낸 것과 같았다.


그 이후 우리나라 영토는 두만강과 압록강을 접경으로 하고 있음에 지금도 백두의 머리에서부터 흐르는 저 푸른 압록이나, 집안(集安)의 호태왕릉비(고구려 광개토대왕비)는 말없이 후대의 CEO들에게 묻고 있으니, 그대들은 과연 무엇을 했는가?


게다가 이즈음에 들어 중국이 먼 훗날 통일된 한반도의 웅비를 우려해 고구려사를 자신의 역사로 둔갑시키고자 하는 흑심을 드러내고 있으니 이 또한 두 눈을 부릅 뜨고 반드시 경계해야할 일이다.


만일 우리의 자부심 넘치는 역사를 잃는다면, 어느 후세가 지금 사는 우리가 이 시대를 제대로 경영했다고 인정하려 하겠는가?


“나는 나라의 땅을 줄일 수 없다!”


세종이 말이 귀전에서 지워지지 않는 까닭이 바로 이 때문이다.

ⓒ전경일, <창조의 CEO 세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