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의 CEO 세종] 역사속의 CEO육성론(2)
이는 바로 조선이 대륙을 얻지 못한 까닭에 있다. 조선 창업이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타난 것은 위화도 회군이었고, 조선은 그 결과였음에 자명하다. 그러다 보니, 대륙의 새로운 주인으로 급부상한 명은 조선에 대해 집요한 압박을 가하는 정책을 펴게 된다. 바로 이 점이 신생 조선의 두 임금인 태종-세종에게는 실로 엄청난 부담이 아닐 수 없었다.
명분은 언제든 힘의 균형이 유지되지 않는한, 트집을 잡기 위해서라도 만들어 질 수 있는 법. 이 두 임금은 명이 적장자가 아닌 것을 빌미로 유교적 명분론하에 압박을 가해 올 것을 사전에 피하고자 실로 크나큰 대가를 지불하게 된다.
대표적 예로 명이 적장자 세습을 벗어난 차기 CEO 선임 인사조치에 트집을 잡을것을 우려해 태종은 명의 조선 출신 환관인 황엄에게 법화사의 동조아미타삼존상과 개성 광리사의 천수관음주상 그리고 천년 동안 중국과 인도 등지에서 실로 어렵게 구한 부처님 사리 800알을 넘겨주는 것이다. 이 문제를 이슈 삼지 말라는 조건이었을 것이다.
바로 이런 뇌물수수행위가 적장자가 아닌 상태에서 CEO가 된 세종을 보호하려는 조치였다는 것은 전임 CEO인 태종의 차기 CEO에 대한 기대감을 여실히 보여준다 하겠다. 다시말해 차기 CEO가 취임초부터 외풍에 흔들리지 않도록 사전에 ‘약(?)’을 쓴 것이었다.
물론, 이는 조선이 유교 국가로 출발한 이상 고려의 냄새를 지우려는 정책적 판단이기도 했지만, 어찌되었건 적장자가 아닌 CEO를 내세울 때의 괴로움을 세종은 이 과정에서 느꼈음에 분명하다. 그래서 한편으론 4군 6진과 고려 9성에 눈을 돌려 동북아의 주인으로 재기하려는 기회를 엿봤던 것이며, 후계 문제에서는 적장자인 문종을 차기 CEO로 내세웠던 것이다. 적장자 논의는 유교적 질서를 준수하려는 차원에서 중요한 것이기는 했지만, 바로 이점에서 세종은 차기 CEO육성과 지명에 패착을 하게 되는 것이다.
[세종의 패착: 후계구도는 명분에 이끌려서는 안된다]
사실, 세종은 건강상의 이유를 들어 세종 19년경부터 차기 CEO 예정자인 왕세자로 하여금 경영 일반에 관해 직접 결재하게 했다. 또 자신이 전임 CEO가 살아 있을 때 취임했던 전례에 따라 세종 21년에는 세자에게 CEO자리를 물려주려고 했다. 또 세종 24년에는 국정을 대행케 했고, 27년에는 세자로 하여금 대리 근무케 하려 했다.
문종은 그 자신처럼 ‘택현론’ 대상자임에 분명했다. 그러나 그때 세종은 가장 기본적인 조건을 간과했다. 바로 차기 CEO감의 건강 문제였다. 문종은 매우 똑똑한 차기 CEO감이었다. 스스로 측우기 개발 사업에 아이디어를 낸 인물이 아닌가 말이다! 그러나 결정적인 결함이 있었으니, 그건 그가 너무나 병약해 한 나라를 제대로 맡아 이끌어 나갈 수 없었다는 점이다. 지나치게 약골이라 쉴새없이 병치례를 해서 오히려 세종이 왕세자를 대신해 정무를 봐줘야할 형편이었다.
이는 정말이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게다가 세자빈도 이미 사망한 상태여서 심리적으로 크게 불안정 했다. 한마디로 개인적으로 심약하고, 가정도 부실한 가운데 자기의 역량을 국가 경영에 쏟아 붓기를 기대하기란 무리수일 수 밖에 없었다. 아쉽게도 ‘택현’만으론 안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세종은 문종을 선택했고, 이는 결국 세종 사후 2년만에 문종이 죽으며 계유정란의 피바람을 불러 일으키는 단초가 된다. 형 문종의 후계자인 아들 단종을 내치고 숙부 세조가 정권을 찬탈하는 것으로 이 사건이 끝났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니다. 세종의 이런 판단 미스가 가져온 결과는 돌이킬 수 없는 것이었다.
그가 심혈을 기울여 육성했던 집현전 인재는 정치적 입장에 따라 사육신, 생육신으로 묻히며, 조선의 인재풀(pool)을 송두리채 날려 버리는 계기가 되며, ‘다른 배’를 타서 살아 남게 된 신숙주는‘살아 남은 자의 슬픔’으로 우리 역사에 남아 ‘실리주의= 명분없는 태도’로 몰고가려는 경직된 사고에 힘을 실어 주게 되었으니 이것 또한 세종의 판단 착오가 가져온 결과였다.
뿐만이랴. 세종은 자신이 가까스로 세워놓은 ‘무혈경영’의 전통을 스스로 깨뜨리게 만드는 원인 제공자가 되며, 한편으로, 가장 중요하게, 찬란했던 르네상스가 막을 내리고 조선을 그저 변방의 한 나라에 불과한 나라로 위축되게 만드는 단초를 제공하니 이것도 세종의 과실이라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가 태종처럼 실력 우선의 후계자 원칙을 지키지 않은 대가치고는 너무나 큰 손실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 까닭에 단종애사는 가장 비극적인 사건의 하나로 남아서 약육강식의 경영을 정서적 부분으로 해석하려는 순수한 발상을 지지한 셈이 되었으며, 그런 까닭에 스스로 『용비어천가』무망장에서 왕이라도 경영을 잘못했을 시에는 팽 당한다는 후대 CEO 에게 내린 경영지침조차 스스로 무색하게 만들어 버렸던 것이다.
세종은 이처럼 창업 다음엔 수성이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속 창업 만이 있을 뿐이라는 경영의 대원칙을 간과했던 것이다. 결국 그는 왕세자 문종에게 수많은 국책 프로젝트에 참여케 하는 등 착실하게 경영 수업을 쌓게는 하였으나, 너무나도 기본적인 건강상의 문제를 체크하지 못했고, 적장자 우선주의에 함몰돼 후계자를 다방면에 걸쳐 테스트를 통해 선임했던 전임 CEO와 달리 실책을 범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는 국가든 기업이든 경영권 이양이라함은 철저하게 경쟁의 원칙을 지켜야 번영할 수 있다는 점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으니, 이는 오늘날에도 국가최고경영자를 뽑을 때에나, 기업 CEO를 선임할 때에 각별히 유념해야 할 사항일 것이다. 더구나 혈연으로 묶인 가족 기업일 경우에는 창업자들이 2세들에게 경영권을 넘겨 줄 때에 반드시 이 점을 짚어 보아야 할 것이다.
이점을 세종의 ‘흠’으로 보기엔 그야말로 티끌에 불과하고, 위대한 CEO인 세종에게 불경한 처사이기는 하지만, 지금 이런 계를 고하는 것은 후세 CEO들을 경계하려는 목적에서이니, 그의 실수를 한치도 용납하지 않고 싶지 않은 건 후세 경영자의 지나친 욕심에서 일까?
(다음회에 이어서...)
ⓒ전경일, <창조의 CEO 세종>, <한국능률협회, 『CHIEF EXECUTIVE』2003.8월호 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