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의 CEO 세종] 한글을 다시 본다(1)
10 회에 걸친 이 연재의 시작을 위해 우선 세가지 핵심이 되는 역사적 기록으로부터 출발해 보자.
우선, 세종 자신이 직접 쓴 「훈민정음」서문을 풀어 보는 것으로부터 이 이야기를 시작해 봄은 어떨까.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글’이라는 뜻의 「훈민정음」서문에서 세종은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누구나 학교 다닐때 접해 봤을 이 서문에 추호도 믿어 의심치 않는 세종의「훈민정음」창제의 배경, 취지, 의미가 고스란히 녹아 있다.
“우리나라 말이 중국과 달라 한자와 서로 통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백성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마침내 그 뜻을 펴지 못하는 이가 많다. 내가 이를 딱하게 여겨 새로 스물 여덟 글자를 만드니 사람마다 쉽게 익혀 나날이 쓰기에 편하도록 하고자 할 뿐이다.”
이것이 「훈민정음」서문이다.
다음은「훈민정음」창제 반대파의 극렬 멤버였던 최만리의 한글 창제 반대 상소문 내용이다. 잘 음미해 보시라.
“우리나라에서는 조종(祖宗) 이래로 지성으로 중국을 섬기어 한결같이 중화 제도를 따랐는데...언문을 지음은 이를 보고 듣는 이들이 이상하게 여길 것입니다...만약 이것이 중국으로 흘러가서 이를 탄하는 자가 있게 된다면, 어찌 사대 모화의 도리에 부끄러움이 없겠습니까...예로부터 구주(九州)안에...방언을 따라 따로 문자를 만드는 일이 없고, 오직 몽골ㆍ서하ㆍ여진ㆍ일본ㆍ서번(티벳)과 같은 무리가 각각 제 글자가 있으나, 이는 오랑캐의 일이라 말할 것이 없습니다...중화가 오랑캐의 영향을 입어 변했다는 얘기는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이제 따로 언문을 만듦은 중국을 버리고 스스로 오랑캐와 같아지려는 것이니, 이는 말똥구리의 환(丸, 즉, ‘똥’)을 취하는 것이라, 어찌 문명의 큰 해가 아니겠습니까?...하물며 이두(吏讀)의 행함이 수천 년 동안...아무 장애가 없었는데 무슨 까닭으로...따로 비루하고 무익한 글자를 만듭니까?”
이런 골수 사대주의자인 최만리에 대응하는 세종의 방식은 남다르다. 세종은 오히려 국가 정책적 대결로 이 문제를 몰고 가지 않았다. 대신, 그 특유의 풍부한 학문적 지식(요즘말로 ‘지식경영’의 원류라 할 수 있을 것이다.)을 통해 실력으로 맞대응한다.
“그대들은 언문이 소리로써 글자를 합하는 것이 모두 옛 것에 어그러진다 하였는데, 설총의 이두도 또한 음을 달리한 것이 아닌가? 또한 이두(吏讀) 제작의 본뜻이 백성을 편하게 함에 있지 않은가? 만일 그것이 백성을 편하게 하는 것에 있다면, 이제 언문도 또한 백성을 편하게 하는 것에 있지 않은가? 그대들이 설총은 옳다하고, 그대들의 임금은 그르다 함은 무슨 까닭인가? 또 그대가 운서를 아는가? 사성(四聲)과 칠음(七音)을 알며, 자모(字母)가 몇인지 아는가? 만일에 내가 운서를 바로 잡지 않는다면 누가 이를 바로 잡겠는가?”
그렇다면「훈민정음」창제와 관련되어 그 당시에 이 나라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
(다음회에 이어서...)
ⓒ전경일, <창조의 CEO 세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