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의 CEO 세종] 결단의 중심에 서다
CEO로서 세종의 취임은 매우 매력적인 환경과의 조우였다. 그것은 보다 야심 차고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은 활력 넘치는 ‘즐거움(生生之樂)’으로의 초대와 같았다. 어느 CEO에게나 그렇듯 할 일이 없어 손을 놓고 있는 것은, 일이 넘쳐나는 것과는 비교 되지 않을 정도로 고통스러운 일이다. 창업 후 채 30년도 안된 신생 조선은 이제 막 새로운 사상과 문화 그리고 실질적인 국가 경영 시스템을 만들어 나가는 시기였다. 이 시기, CEO인 세종에게 가장 절실히 요구된 것은 다름아닌 변혁의 시대를 살아가는 과감한 결단력과 추진력이었다.
[할일 많은 CEO, 결단으로 우뚝 서다]
세종은 의사결정, 그 자체 보다는 그것이 이루어진 배경과 그것이 의도하는 바에 더 주목했다. 즉, 그는 화살을 날려 보내기 전에 화살이 가 닿아야 하는 목표에 더 주목했다. 또한 그 화살이 가 닿는 곳이 한 치의 어긋남도 없도록 정확하게 상황 판단을 해야 했다. 따라서 올바른 의사 결정은 반드시 이같은 판단에 근거해 내려졌다.
세종의 결단 원칙은 간단ㆍ명료했으며, 확고했다. - 이 말은 결코 ‘부동(不動)’했다는 말이 아니다! - 그는 리더로서 확고한 신념과 올바른 자세, 그리고 포용력을 가진 CEO였다. 또한 스스로 공부를 즐기는 호학열(好學熱)의 CEO였지만, 그의 학문은 단순히 지식을 모으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지식은 CEO로서 현실 인식과 정책 결정, 그리고 국가 경영상 각부문에서 요구되는 정책 사안들에 대한 대응 방식을 찾으려는 목적에서 마련되고, 활용되었다.
이러한 노력의 결실이 바로 그의 경영 철학의 핵심을 이루는 내용들이었다. 이러한 결단의 중심에 선 그의 모습은 세종 재임 기간 중 그가 관계한 국가적 프로젝트 어디에든 그대로 드러난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훈민정음」을 개발할 당시의 일이다.
[리스크를 짊어진 한글 프로젝트]
오늘날 우리는 ‘문자’를 매우 보편적이고, 일반적이며, 흔한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어디서나 ‘글자’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고, 구사할 줄 알며, 남들이 표현해 놓은 바, 그 뜻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때, ‘문자’는 권력과 힘, 지식과 특권의 상징이었다. 뭇 백성들과 달리 ‘문자’를 쥐고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그가 바로 지배계급임을 확연하게 드러낼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것은 부(富)의 상징이기도 했다. 조선 초도 그와 전혀 다를 바가 없던 시기였다.
이런 때에 세종은 독자적인 한국형 ‘문자’를 만들겠다고 나선 것이다. 더구나 이두처럼 한자를 그냥 빌어다 쓰는 그런 것이 아니라, 그와 전혀 다른 방식의 O/S를 만들겠다고 선언하고 나온 것이다. 그것은 그 당시 한자(漢字)를 권력의 보증수표로 생각하던 국내 지식인층 - 그들 대부분이 기득권층이었다! - 으로부터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더구나 세종은 자신이 적장자가 아닌 가운데 CEO로 임명된 것에 늘 신경이 쓰이던 터라, 만일 새로운 O/S 개발 프로젝트 건을 가지고 중국이 국내 ‘한글반대파’와 함께 강한 압박과 제제를 가해 온다면 심각한 문제를 야기할 수도 있었다. 심지어 그런 사태가 벌어지면, 그것은 신생 조선자체를 뒤흔들어 버릴 수 도 있었다. 그만큼 한글 개발은 민감한 사안이었고, 매우 위험스러운 프로젝트였다.
이런 가운데 우리만의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O/S를 만든다고 하는 것은 CEO의 과감한 결단력과 더불어 일이 틀어지지 않도록 하는 치밀함이 없이는 결코 가능한 게 아니었다. 그러나 세종은 강한 추진력과 결단력으로「훈민정음」프로젝트를 끝까지 완수했다. 중간에 최만리 등 ‘한글반대파’들이 프로젝트의 성격과 목적을 제대로 이해하려 들지 않으며 반발하는 사태도 벌어졌으나, 세종은 그 고비 또한 잘 넘겼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러한 ‘한글반대파’들의 논리를 오히려 역으로 활용하기조차 했다.
[반대파도 활용하라]
전임 CEO로부터의 가르침은 결코 헛된 게 아니었다. 세종은 오히려 대명사대(對明事大)의 방식을 취하되, 실리를 얻는 쪽으로 그들을 끌여 들였다. 그의 경영은 분명 현실 인식의 한도 내에서였다. 따라서 대명사대는 그것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귤이 탱자가 될지, 탱자가 귤로 뒤바뀌게 될지, 그 결과가 매우 판이하게 달라지는 것이었다. 세종은 철저하게 반대세력도 잘 활용했다. 오히려 「훈민정음」 창제 당시, 만일 최만리 등의 반대가 없이 ‘전원 찬성’의 목소리로 진행되기만 했다면, 그것은 나중에라도 조선의 지나친 독자성을 견제하는 중국의 간섭을 불러 들였을지 모른다.
따라서 오히려 국내의 작은 소란을 이용해 앞으로 있을지 모르는 큰 환란(患亂)을 미리 막은 셈이기도 했다. 이처럼 세종의 국가 경영 방식을 보면 보이지 않는 곳에 지략이 복선으로 깔려 있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그러한 ‘복선’은 반드시 최고경영자가 경영 목표를 반드시 달성하기 위한 전략 수립에서 나왔다.
ⓒ전경일, <창조의 CEO 세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