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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의 CEO 세종] 감동 경영은 자기 결단에서 나온다

전경일 2009. 2. 3. 17:15

세종의 전체적인 경영 목표는 언제나 과감하고 명확했다. 또한 조직 구성원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했다. 조직 내 커뮤니케이션은 언제나 멈추지 않고, 흘렀다. 그리하여 그는 독단과 전횡의 유혹에 빠질 수 있는 국가 CEO라는 위치에 있으면서도 항시 균형감을 잃지 않았다.


정책 수립에 있어서도 그는 자기 확신이 섯다 싶으면 언제나 결단을 강화해 나갔다. 그러나 만일 이에 조금이라도 확신이 들지 않을 경우에는 신하들과 토론을 통해 합리적인 결론에 도달하고자 했다. 이러한 합의적 체제는 새로운 국가 경영의 모습이었고, 나아가 활발하고 매우 합리적이며, 선진적인 회의와 토론 문화를 정착시켰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경연(經筵)(주1)과 집현전의 운영이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정책수립과 경영 회의록이 오늘날 남아 있는『세종실록』이다.


[소신 있는 곳에, 반드시 저항 있다]


굳굳하고, 소신 있게 밀고 나간다는 것은 언제나 반드시‘저항’과 만나게 되어 있다. 따라서 ‘저항’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리더의 자기 결단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결단 없이는 어떠한 경영도 해 나갈 수 없다. 그리고 CEO는 실행으로 이를 ‘현시화(顯示化)’시킬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주변의 불만도 잠재울 수가 있다.


세종은 유교적 인본주의에 무엇보다도 철저한 CEO였다. 그는 민본사상을 실천하기 위해 체옥(滯獄, 옥에 가두는 것)을 방지하고, 고문제도를 개선하며, 죄수의 환경을 개선시키는 등, 여러 가지 인권보호를 위한 필요한 조처를 취했다. 옥사(獄舍)를 수리하는 것을 두고 주변에서 ‘형옥 정치의 확대’라는 루머를 흘리기도 했지만 그는 이에 휘둘리지 않고, 자기중심을 바로 잡고 정책을 펼쳐 나갔다.


[감동 경영은 자기 결단에서 나온다]


CEO가 자신을 결단의 중심으로 보지 않으면 어려움에서 쉽게 물러 설 수 있다. 이 점에서 세종은 여느 CEO 들과 확연히 구별되었다. 이러한 세종의 결단의 원칙은 그의 국가 경영관에 그대로 드러났다. 그는 국가 경영에 대해 무한책임감(無限責任感)을 갖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그 시대 방식대로 농번기에 가뭄이나, 장마가 나거나, 백성들이 굶주리면 이를 항시 자신의 부덕의 소치로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경영의 책임감을 통감하고, 반성하는 마음가짐을 항시 가졌다. 바로 이러한 점이 세종이 이전 고려나 조선의 전임 CEO들과 달리 백성들로부터 ‘감동’을 불러일으킨 요인이었다. 그야말로 ‘감동 경영’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결단의 생명력은 지속성에 있다]


결단은 끈질긴 추구의 자세가 없으면 한낱 잠시의 분기탱천이나 망령된 생각에 불과하다. 지속적이고 꾸준한 자기 실천만이 결단의 의미를 퇴색시키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스스로 자기 혁신과 변화를 주도하는 리더들이 항시 견지해야 할 요건이다. 세종시대의 공법(貢法, 현재의‘토지 세법(稅法)`)논의와 결정 과정은 세종의 결단의 원칙을 볼 수 있는 가장 대표적인 사례다.


공법의 집행과 관련되어 세종은 여러 ‘불가(不可)’와 ‘반대’의 여론에도 불구하고, 끝내 이를 관철시켰다. 그가 공법을 관철시키기 까지 활용한 결단의 원칙은 부드럽게 대응하면서, 현실을 참작하였고, 또 그 필요성과 혜택을 지속적으로 홍보해 나간 것이었다. 공법 실시(주2)의 성과는 바로 세종의 그러한 결단의 지속성에 있었다.


한시대가 바로 서기 위해서는 이렇듯 결단의 원칙을 중심에 두고 항시 서릿발 같이 자기 실천을 한 CEO 가 있었음을 역사는 결코 잊지 않았던 것이다.


[세종으로부터 배우는 경영 정신]


* ‘할 일’이 많다는 것은 즐거움이자, 도전이다. 이런 매혹적인 도전에의 초대는 자기 결단에서 나온다. 결단하라! 그것은 당신에게 새로운 장을 열어 보일 것이다.


* 결단의 원칙은 간단ㆍ명료ㆍ정확ㆍ확고 같은 것이다. ‘부동(不動)의 동(動)’을 유지하라. 그것이 당신을 확고한 신념을 가진 리더로 만들어 줄 것이다.


* 새로운 프로젝트 진행에는 언제나 반대 진영이 나타나게 되어 있다. CEO의 과감한 결단력과 치밀함이 일이 틀어지지 않도록 한다.


* 반대세력도 잘 활용하라. 그들의 ‘소란’은 훗날의 큰 ‘환란(患亂)’을 미리 막아 주는 효과가 있다. 그것이 경영 전략상 복선으로 기능하도록 해야 한다.


* 합의 체제를 만들라. 그것은 활발하고 합리적인 회의 문화를 만들어 낸다. 당신의 기업에도 바로 이러한 ‘경연(經筵)’ 제도가 뿌리를 내려야 한다.


* 자기중심이 없으면 당신은 루머의 희생자가 되어 그 속에 파묻힐 것이다. 가장 치명적인 상대는 바로 이런 뜬소문들이다. 이를 제거하는 길은 오로지 중심을 잡고 나가는 길 밖에는 없다.


* 항시 경영의 책임을 통감하고, 반성하라. 그것은 ‘감동 경영’을 불러일으킨다.


* 결단이 퇴색되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꾸준한 자기 실천뿐이다. ‘계속’을 이길 수 있는 것이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


(주1) 국가 CEO에게 유교의 경서(經書)와 역사를 가르치던 교육제도이면서 동시에 정책협의기구. 운영 방식은 유교적 가르침에 따른 강의 내용을 주로 하였고, 강의가 끝나면 국왕과 신하들은 당면한 현안들을 협의했다. 특히, 아침 강의에는 CEO를 비롯하여 의정부ㆍ육조ㆍ승정원ㆍ홍문관ㆍ사헌부ㆍ사간원 등 권력의 핵심부가 한자리에 모였기 때문에 정책을 협의하기가 편리하였다. 본래 조선에는 CEO와 신하들의 연석회의가 따로 없었으며, 주요 관청 사이의 정책협의기구도 없었다. 따라서 경연은 중요한 정책협의기구로 발전하였으며, CEO의 일상생활 및 정치과정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오늘날 최고경영자 교육과정 또는 세미나나 임원 회의를 합쳐 놓은 것으로 보면 된다. 이는 이론과 실무의 통합적 성격을 지닌 것이었다.


(주2) 공법(貢法)은 그 논의가 부분적으로 시작된 세종 12년(1430년)부터 공법이 일단 확정된 세종 26년까지 끊임없는 논의와 연구가 있었다. 또한 관료로부터 농민에 이르기까지 한국 최초로 여론조사도 실시해 의견을 청취했으며, 이를 시험적으로 실시하기도 했다. 세종은 12년 3월에 마침내 중외의 관민에게 널리 공법 실시의 가부(可否)를 묻게 했고, 호조에서는 공법에 대한 찬반의 상황을 종합하여 보고하였다(세종 12년 8월 10일). 이때에 중외의 전현직 관료는 물론 시골 사람들까지 논의와 여론조사에 참여하였는데, 총 98,657명 가운데 반대자가 74,149명으로 약 75%가 반대한 것으로 나타났다. 당시 영의정 황희도 반대 의견이었다. 이에 세종은 황희 등의 논의를 따르도록 했다. 세종은 공법 실시는 반드시 해야 할 것으로 믿고 있었으나 이에 반대하는 사람이 많았으므로 보류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세종 19년 7월에 다시 호조에 지시하여 공법의 시행규칙을 마련하여 보고하도록 지시했고, 호조에서는 곧 이를 보고하였다(세종 19년 7월 9일). 세종은 공법의 시행을 확정하고‘지금 공법의 시행은 본래 백성에게 편리하게 하고자 함이다.’라고 단언하였으나, 시행하는 처음부터 각도의 풍흉의 정도가 달랐으므로, 작황이 좋지 못한 도에서는 차등 있게 전세를 감하도록 명했다. 시행이 확정된 후에도 논의가 분분하여 보류되기도 하였으나, 결국 세종 26년 6월에 공법이 확정되었다. 오랜 진통 끝에 공법을 확정시킬 수 있었던 것은 공법이 백성에게 편리하다는 세종의 신념과 결단의 지속성 때문이었다.


ⓒ전경일, <창조의 CEO 세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