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의 CEO 세종] 두뇌 그룹, 집현전에 대한 구상
세종은 이전과는 완전 차별화된 국가 경영의 혁신적인 시스템이 뭘까를 생각해 보았다. 문제와 해결은 ‘구조’와 ‘사람’ 모두에 있었다. 구조를 변혁시키는 일은 그 일을 맡아서 충실히 수행할 인재들을 절실히 필요로 했다. 그것도 수천 명의 범상한 인물이나, 한 두 명의 비범한 인물이 아니라, 절대적이고 완벽한 ‘인재 풀(pool)’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들은 철저하게 신생 조선의 ‘두뇌 집단’으로 기능해야 했다.
세종은 이전의 역사와 가장 가까이로는 고려의 역사에서 ‘집현전(集賢殿)’이라는 조직을 발견해 냈다. 집현전(集賢殿)’이라! ‘현명한 자들을 모아 놓은 집.’ 세종이 보기에 싱크탱크의 이름으로써는 그만한 것이 없어 보였다. 정말 그럴 듯한 명칭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그 싱크탱크 안에 자신이 설정한 미래를 같이 준비하고 실천할 인재들을 불러들이기 시작했다. 조선을 경영하는 모든 사상과 연구의 핵심 브레인 집단은 바로 이렇게 출범하게 되었던 것이다!
[자기실현적 예측을 한 CEO]
세종은 언제나 사업적 낙관주의를 강하게 밀고 나갔다. 위기 없는 CEO란 빛을 발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어쩌면 그가 살던 시대적 소명이었다. 상황이 이상적일 수 없다는 현식 인식은 상황을 개선하려는 그의 자기 의지를 더욱 강화시켜 나갔다. 세종은 결코 숙명론자가 아니었다.
유학(儒學)이란 게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실제(實際)에 기반하고 있는 사상 체계가 아닌가? 따라서 조선의 현 위치, 백성들의 현 위치는 오히려 세종에게 개선의 여지가 무궁무진한 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는 차원에서 너무나도 호(好) 조건인 셈이었다.
그는 이 변화의 풍랑 속에서 자기가 반드시 거대한 성업을 쌓을 수 있다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스스로 믿고 가면 되는 것이라고 세종은 생각했다. 그런 차원에서 그는 분명 멀리 보고 자기실현적 예측을 한 CEO였다.
세종의 그러한 자기 예측은 빗나가지 않았다. 그리하여 현시대에도 그의 인권 존중사상은 초시대적 사상으로 평가되고 있을 정도다. 그가 추구한 만 백성의 ‘인간다운 삶,‘ ‘삶의 질 향상’은 그 후 600여년을 지난 지금에 이르러서도 그의 ‘백성’들에 의해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는 정신으로 계승되고 있다. 그것은 바로「헌법」제 10조에 나와 있는 대원칙이다.
세종의 이러한 인간 존중 정신은 실제로 한참 뒤 영국과 프랑스의 혁명정신이나 미국 독립선언서의 정신 그리고 유엔의 세계인권선언문에도 그대로 나타나는 정신이었다. 이것은 세종의 정신이 시대를 뛰어넘어 얼마나 인간의 본질을 제대로 꿰뚫어 보고, 인간의 삶에 의미를 부여했던 것인지 너무나 잘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위대한 CEO를 우리 역사는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내게는 ‘빠름과 새로움을 좋아하는 병’이 있다 ]
세종의 이러한 변화에 대한 추진력은 확고한 지도 이념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그것은 또한 최고경영자로서 그 자신의 일관성 있는 ‘정책적 힘’을 항시 얻었다. ‘변화’에 대한 세종의 생각이 그러했듯 변화를 실제로 따라 잡는 추진력은 ‘속도’를 필요로 했다. 나중에 다시 얘기하겠지만, ‘한글반대파’의 일원인 최만리의 상소문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세종의 스피드 경영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한글반대파’의 대표격인 최만리는 「훈민정음」 반포시 그 반대 시위 상소문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그 내용을 요약ㆍ인용하자면, “낡음을 싫어하고 새로움을 좋아함은 예나 이제나 두루 있는 병환” 인데, 이제 쓸데없이 “신기한 재주에 지나지 아니하는” 글자를 만들어 쓰는 게 결코 좋을 리 없다는 것이다. 또한 “무릇 일의 공을 세움에는 가깝고 빠름을 귀히 여기지 않는데, 근래 국가의 조치가 모두 속성을 힘쓰니, 이는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에 어긋남이 아닌가” 한다는 것이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세종은 “새로움을 좋아하는 병”이 있고, “가깝고 빠름을 귀히 여겨”“속성”에 힘썼다는 것이다. 세종은 이처럼 그 시대를 앞서간 변화와 스피드 경영의 주도자였던 것이다.
ⓒ전경일, <창조의 CEO 세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