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의 CEO 세종] 사상을 통일하라
세종은 ‘유학(儒學)’이라는 새로운 세계관 밑에서 자라난 신생 조선의 첫 CEO였다. 따라서 그는 인륜을 바탕으로 한 왕도정치(王道政治)를 자신의 국가 경영 목표로 삼았다. 국가 경영을 ‘정자정야(政者正也)’- 즉, ‘정치란 바로 잡은 것.’ - 이라고 인식한 것도 세종의 그러한 세계관을 반영한 것이다.
세종이 신생 조선의 CEO로 임명된 조선 초는 유ㆍ불교체기로써 유교가 시대적 흐름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는 시기였다. 조선의 제1대 CEO인 태조로부터 세종에 이르기까지 27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신생조선의 CEO들이 겪어야 했던 사상적 조류는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예컨대, 창업자 태조의 경우에는 유교와 불교가 각기 다른 측면에서 영향을 미쳤다. 즉, 국가 경영 철학은 유교였으나, 개인적으로는 불교를 지향하였다. 이는 그가 정신적으로는 아직 ‘고려인’이라는 것을 의미했다. 이어 정종은 유(儒)ㆍ불(佛)ㆍ도(道) 모두에 관심을 가졌고, 태종은 불교와 도교를 배격함으로써 세종시대 유교중심 국가를 만드는 기초를 놓았다.
세종이 처한 15세기 초는 바로 이러한 사상적 교체기였으므로 세종은 유학을 국교로 삼아 이를 국가 운영의 전범(典範)으로 정착시킬 필요가 있었다. - 그러나 특정 사상만을 고집한다는 것은 그리 쉽지 않은 일이어서, 그 조차 말년에는 불교ㆍ성황당ㆍ무당ㆍ풍수지리 등에 대해 매우 관대한 입장을 취한다. - 따라서 세종은 국가 경영의 기반이 되는 핵심 사상을 통일해야 했다. 또 규범적 측면에서 ‘레퍼런스(reference)’를 만들어야 했다. 세종이 CEO가 된 이후 집현전이나 의례상정소를 통해 조선왕조의 예악제도(禮樂制度)를 마련하는 데 그의 재임 기간을 다 보낸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조선은 정ㆍ교 분리를 선언한 선진국]
일반적으로 유학의 세계관은 이(理)를 기본으로 하여 인간이 자연 내에 존재한다고 믿는 철학이다. 이러한 유학은 조선의 국가 공식이념으로 채택되었는데, 이는 ‘백성들을 개혁시키는’ 수단으로써 유학이 국가 CEO들에게 각별한 의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즉, 유교의 사상과 교훈을 백성들의 마음속에 명백한 가치 기준으로 내면화시킴으로써, 조선의 사상 체계를 완벽하게 구현하려는 목적이 내포되어 있었다.
이것은 고려에서 조선으로 경영 주체가 바뀐 것을 의미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고려의 불교적 개념을 유교적 개념으로 바꾼 지적(知的) 변형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더구나 세계 역사상 비종교적 이념이 이렇듯 국가 경영 이데올로기로 사용된 적은 그때까지 거의 없었다. 아직도 세계 대부분의 나라들은 정교일치(政敎一致) 속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어둠의 중세에서나 가능한 의식이었다.
[‘한글’도 유교에 근거한 것이다]
한글도 실은 유학적 세계관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다. 음(陰)과 양(陽)의 상보적 대립쌍과 역동적 상호작용의 상징인 목(木)ㆍ화(火)ㆍ토(土)ㆍ금(金)ㆍ수(水)의 5가지 기본적이며, 상호적인 작용 유형에 근거해 창안된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변화에 따라 고려의 귀족을 대신하여 유교적 이데올로기로 무장한 새로운 지배 엘리트층들이 출현하였고, 이들에 의해 조선은 리드되었다. 특히, 세종이 CEO가 된지 얼마 안돼 명나라에서 수입된 『성리대전』과 『사서오경대전』은 유학에 근거한 엘리트층 의식 확산에 크게 기여했다.
이러한 유교적 지침들은 실제 백성들의 생활의 아주 작은 부분까지 규제하는 등 대단히 전면적이었으며, 침투력이 강했다. 따라서 일반 백성들을 교화시키고자 하는 목적으로 세종대에는 『효행경』『삼강행실도』 등이 편찬되었고, 전국적으로 무가지로 배포되어 조선을 경영하는 지배 이념으로 실제 생활 속에 뿌리 박게 했다. 그리하여 민간내 효자ㆍ효부ㆍ충신ㆍ열녀 등 유교 사상을 대변할 만한 사례들이 제시되었고, 이것을 교화의 수단으로 삼았던 것이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당시에 만들어진 유학에 관한 PR 자료들은 세종의 문화적 자신감과 함께 일반 백성들에게 더 가깝게 다가가려는 희망이 반영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그것들은 한국의 예와 중국의 예가 아닌, 다른 나라의 예들도 포함시켰으며, 일반 백성에 더 가깝게 다가가하도록 하려는 목적에서 삽화와 시가를 첨가하였다. 그것은 대다수 문맹의 백성들에게 쉽게 다가가려는 목적에서 정책적으로 배려된 것이다. 그래픽과 엔터테인먼트적 요소의 가미는 백성들의 관심을 이끌어 내려는 세종의 계산된 유교 홍보용 책자의 편집 방향이었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효과는 분명 더 커졌다. 당시 『삼강행실도』는 비매품이었는데, 만일 판매를 목적으로 하는 책이었다면 그래픽 때문에라도 베스트 셀러가 되었을지 모른다. 그만큼 책의 편집이 대다수 독자층에 어필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던 것이다. 세종이 도화원을 활성화하여 각종 권계화(勸戒畵)를 그려 백성들로 하여금 본보기로 삼게 했던 것도 이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삽화 넣기’는 다른 출판물에서도 그대로 나타났다.
[예(禮)가 경영 원칙이다]
이러한 ‘바른’ 행동을 강조하는 ‘예(禮)’는 사회의 모든 제도와 기준을 묶어 두게 된 통제와 개혁의 가장 효과적 수단이었다. 이에 대해 마티나 도이흘러 런던대학교 교수는 “조선의 교육 과정의 중심에는 의례 행위가 있었다” 면서, “이러한 의례 행위는 인간의 감정을 조절하고 백성들로 하여금 순종하게 하기 위해 고대 중국의 모범을 바탕으로 주희가 편찬한 『주자가례(朱子家禮)」를 활용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 책은 한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지침서가 되어, 수없이 중판을 거듭하여 출판되었으며, 쉽게 배포하기 위하여 한글로 번역되기도 했다.
여기서 말하는 ‘예(禮)’는 인간관계로부터 나오는 원칙이며, 실제 규범적인 사회 질서의 일부분을 이룬다. 조선초기의 유학자들은 사회의 질서를 세우는 수단으로서 예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건전한 질서의 모범을 찾았고, 국가 경영은 유학의 가르침에 따라 ‘천명(天命)에 근거한 경영’을 실현하는 것이었다. 이렇듯 세종시대는 통일된 사상을 마련해야 하는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시기였다. 그리고 이러한 예(禮)는 세종 경영의 근간을 이룬 핵심 사상이었다.
[세종으로부터 배우는 경영 정신]
* 핵심이 되는 사상을 통일하고, 규범적 ‘레퍼런스(reference)’를 만들라. 이는 경영의 지속성을 위해 반드시 투자할만한 가치가 있다.
* 마음속에 명백한 가치를 내면화하라. 그럼으로써 생각의 체계를 완벽하게 구현해 내라. 이는 당신이 무엇인가를 해나가는데 통일성을 부여해 줄 것이다.
* 생활의 작은 부분까지 침투할 수 있는 효과적이며, 전면적인 방식을 찾아라. 이것이 사람들의 실생활 속에 뿌리 내리도록 하라.
* 항시 목표에 더 가깝게 다가가려는 수단을 강구하라. 그러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활용하라. 오늘날의 매스 미디어 활용법은 오래전부터 중요하게 지적되어 왔다. 여기에 다가가지 못한다면, 실제 아무런 효과도 없다. 이 점을 명심하라.
* ‘바른’ 행동을 강조하는 ‘예(禮)’는 어느 시대나 중요한 가치이다. 규범이 없으면, 실제 국가든 기업이든 방종에 흐르게 된다.
ⓒ전경일, <창조의 CEO 세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