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인문경영/이끌림의 인문학

세계를 읽는 4장의 별난 지도

by 전경일 2023. 6. 9.

1960, 미국 상원 위원회는 의회보고서에 4장의 지도를 첨부해 제출한 적 있다. 이 지도를 펼치면, 여행시간을 기준으로 1840년대 범선시대로부터 1960년대 제트기 시대에 이르기까지 120년간 세계의 상대적 크기가 드러난다. 첫 번째 지도가 사람의 손바닥만 하다면, 마지막 지도는 압정 대가리보다도 작다. 그로부터 50여년이 훌쩍 지난 지금 세계는 바늘 끝보다도 작다.

 

작아진 세계를 말할 때 흔히 교통과 통신의 발달에 따른 거리의 협소화(狹小化) 현상을 주원인으로 든다. 하지만 보다 본질적 요인으론 국가 간 정책의 공조화 현상을 들 수 있다. 이는 자본이 움직이고 통제할 수 있는 거리이자, 국경이며, 자본의 논리가 만들어 낸 세계이기도 하다.

 

오늘날까지 국제정세를 좌우하는 대부분 국가들은 두 가지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그 중 하나는 폭력적 제국주의 약탈 경험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근대 시기 동양보다 유럽이 먼저 흥기한 점은 실용적 과학 지식을 바탕으로 제국주의를 추구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헤게모니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다른 또 하나는 개방적 사고를 들 수 있다. 근대 시기 유럽에서는 수많은 과학자들이 등장하며 학문적으로 크게 약진을 거듭했다. 오늘날의 학문적 개방성내지 다양성과 견주어보아도 손색이 없을 만큼 변혁적이었다. 이 둘이 결합되어 근대사는 유럽 주도로 오랫동안 전개되었던 것이다.

 

이 그림을 보라. 코페르니쿠스의 우주상()에는 지구가 아니라 태양을 우주의 중심에 놓음으로써 세상을 바라보고 해석하며, 이후 인간의 모든 관념을 바꾸어버린 혁명적 사상이 깃들어 있다. 이는 2세기경 프톨레마이오스 이래 믿어져 온 천동설을 1300년 만에 부정한 것이다. 인류 역사상 전무후무한 개방적 인식 세계는 전 인류를 새로운 출발선 위에 세워 놓았다. 그것은 근대의 여명이었고, 향후 몇 백 년에 걸쳐 세계사의 주역이자 주도자를 결정짓는 것이었다. 이 그림은 영국의 수학자 레오나르도 딕그스가 자신의 저서에 삽화로 그려 넣은 것이다.

 

과학 분야에서 근대를 예비한 첫 주자는 폴란드의 천문학자 코페르니쿠스(1473~1543)였다. 그는 중세적 우주관에서 탈피해 열린근대적 우주관으로 이행을 촉발하며 지구를 태양의 궤도 위에다가 들어서 번쩍 올려놓았다. 그로부터 약 50년쯤 뒤에는 코기토 명제(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Cogito ergo sum)로 유명한 데카르트(1596~1650)가 태어나 열린 눈으로 세상을 또 다시 통찰해 냈다. 그는 대수학과 기하학을 편리한 그래프 형식으로 정리해 해석기하학을 창안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와 엇비슷한 시기, 윌리엄 길버트(1540~1603)는 지구 자체가 거대한 자석이라고 주장해 사랑하는 남녀들이 서로에게 끌리는 이유를 보다 명확히 알게 했고, 요하네스 케플러(1571~1630)는 행성의 법칙을 만들어 죽은 뒤에도 여전히 마음은 하늘에, 몸은 땅에 묶인 채빙빙 돌게 되었다. 이어 떨어지는 물체의 가속도를 계산해 냄으로써(이른바 낙체(落體) 법칙’) 수학을 확고히 물리학의 기반 위에 올려놓은 갈릴레오 갈릴레이(1564~1642)가 나타났다. 그는 돌아가는 지구 위를 걸으며 역학의 기본법칙을 발견해 냈다.

 

또 윌리엄 하베이(1578~1657)는 우리 몸에 피가 도는 혈관계의 법칙을 찾아냈다. 뒤이어 아이작 뉴튼(1643~1727)은 저 유명한 만유인력의 법칙을 찾아내 지구 아래쪽에 사는 사람도 우주 밖으로 떨어지지 않는다는 점을 뚜렷이 안심시켰다. 이처럼 근대 200여년은 인류사의 미래를 완전히 바꿔 버린 놀라운 과학적 발견이 이어진 시기였다.

 

그런데 이 같은 발견은 어디에서 영향 받은 것일까? 그것은 중세가 깨져 나가며 르네상스다운 개방적이며 코스모폴리탄적 사고가 작용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학문 대발견의 배경이다. 대외 침략과 과학적 세계관이 유럽식 질서와 이해를 전 지구적으로 강제했던 유럽 흥기의 원인 가치가 바로 여기 있는 것이다. 이 근본적인 원인 가치를 우리 역사로 끌어오면, 근세 시기 우리와 일본의 차이를 벌려놓은 원인도 찾아진다. 한일 간에 이 무렵 벌어진 격차가 지금도 상당 부분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근현대 1백년이야말로 한반도 역사상 유일하게 우리가 일본에 비해 인구, 국력 등 모든 면에서 밀렸던 시기라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카네기 멜론 대학의 리처드 플로리다 교수의 주장에 의하면, 일본은 외래 유입에 개방적이던 때 이후로 창조성이 강하게 분출된 시기가 뒤따랐다. 근대 개항시기 일본은 외부 문물을 적극 수용해 도약의 발판으로 삼았다. 의학 분야에서는 포르투갈, 스페인, 네덜란드의 의학을 마른 스펀지처럼 쭉쭉 빨아 들였다. 당시 서구 의학은 초보적 지식에서 과학적인 것으로 급발전해 가는 중이었고, 조선기술, 무기제작기술 등 다른 분야의 약진이 보여주듯 가장 뜨끈뜨끈한 과학 지식이 쏟아져 나올 때였다. 1868년 일본이 공식적으로 독일 의학체계를 채택한 것도 동양 내 서양국을 자임한 그들의 변신 능력을 잘 드러내 준다.

 

개방으로 인해 서양과 문명적으로 조우한 일본은 문명적 인접성을 획득하고 그로 인해 새로움을 가져왔다. 예상치 못한 다른 세계와의 새로운 연결으로 기존 인식을 뛰어넘는 세계관을 보게 되었고, 이는 어제까지 유지해 온 인식의 틀을 뒤흔들었다. 더구나 외국의 정신문화는 거부하되 기술은 받아들인다는 화혼양재(和魂洋才)’의 사고로 서구 이외의 민족으로는 처음으로 일본은 근대화를 이루어 냈다. 우리와 일본을 가른 차이라면, 일본은 서양의 과학기술과 사상을 분리해서 받아들였지만, 우리는 이 둘을 하나로 묶어 본 까닭에 과학기술의 수입마저 사상의 틀 안에 넣고 제한시켜 버린 점이었다. 근대 일본이 비뚤어진 제국주의로 나가는 힘을 축적할 수 있었던 것도 이때 만들어진 역량 때문이었다. 그 낚시줄에 걸려든 것은 불안한 눈빛으로 19세기와 20세기를 응시하던 수많은 동양의 국가들이었다.

 

그렇다면 당시 우리는 일본의 이 같은 도약을 막을 순 없었을까? 생각 여하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그랬을 수 있다. 당시까지만 해도 일본이 만들어 낸 것은 유럽의 훌륭한 복제물 수준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이 점은 훗날 일본 자동차 산업에서도 잘 드러난다. 오늘날 일본 자동차 경쟁력은 2차대전시 독일 제트기 엔진 도면을 입수해 복제한 후 지속적으로 기술향상 시킨 것이다. 우리와 일본이 달랐던 점은 그들은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고자 했으나, 우리는 변화하는 세계에 눈감고 쇄국의 빗장을 걸어 잠근 것이었다. 개방성과 폐쇄성 차이가 앞으로 다가올 시대의 국가 성쇠에 지대하게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 가 ) ( 나 )

 ()

 ()

서양의 대항해시대로 일본을 접하게 된 서구 사회는 동서양의 차이가 가져온 다름과 새로움이 불러 온 현상으로 일본풍열병을 앓게 된다. 일본 나가사키 항을 통해 서구와 일본과의 문화적 교류는 네덜란드 화가 반 고흐(Vincent Van Gogh)모네(Claude Monet)같은 인상파 화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다. 서양 미술과 일본 미술은 상호 상대를 경이의 눈을 바라보았다. 서양은 일본 미술의 색채와 평면성에 관심이 많았고, 일본은 서양 그림의 소실점과 투시도에 큰 관심을 가졌다. 이 같은 상호 교류는 일본으로서는 서구로부터 영향 받은 일본 미술이 다시 서구로 가는 바탕이 된다. 문화적 교류가 융합 현상을 만들어 낸 것이다. ()는 우타가와 히로시게(歌川廣重)오하시(大橋) 아타케의 소나기, () 반 고흐의 모작인 비오는 다리(Bridge in the Rain, ()는 모네의 일본식 인도교(The Japanese Footbridge), ()는 당시 포르투갈에서 제작한 남만(南蠻)풍의 병풍이다.

 

개방적 효익은 근대 일본의 경우에만 적용되는 건 아니다. 몽골 칭기즈 칸의 세계제국 건설에는 문화적, 정치적 개방이 크게 한몫했다. 몽골은 샤머니즘에 근거한 종교관을 가지고 있었고, 세계 모든 종교가 존중되고 인정되었다. 유사 상 최대의 세계 제국은 종교적 다양성을 받아들였기에 끝없이 확장되고,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인류사상 대부분 통치자들이 타자의 사상을 부정하고 자신의 사상과 종교로 일색화(一色化)하려는 분별없는 시도와는 한참이나 거리가 먼 것이었다.

저명한 저술가 장폴 루는 칭기즈 칸과 몽골제국에서 몽골 제국의 특성과 성공 요인을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몽골제국은 관용의 나라였다. 다양한 종교공동체를 위해 수많은 칙령이 공표되었고, 왕들은 종교 간 토론을 열었다. 유교와 도교의 나라에서 불교가 융성하고, 그리스도교가 사방으로 전파되었다. 이슬람의 나라에 수많은 탑과 교회가 세워졌다. 이 모든 것이 몽골의 종교적 관용을 증명한다. 몽골제국에서는 모든 인종이 평등했다. 물론 몽골족에게는 그들만의 정신이 있었지만, 특정 인종을 찬미한 흔적은 어디서고 찾아볼 수 없다. 그들이 유일하게, 지속적으로 찬미한 것은 바로 칭기즈 칸이었다.”

 

종교적인종적 개방성이 제국 확장의 원동력이었다는 이야기다.

국가든 어떤 조직이든 흥망사를 살펴보면 하나같은 공통점이 있는데, 그건 폐쇄된 사회는 성장의 한계를 보이며 쇠락을 길을 걷게 되고, 반대로 외부로 눈을 돌린 사회는 보다 큰 세상과 만난다는 점이다. 찬란했던 문화문물의 영락은 열린 사고와 직접적으로 관련 있다.

 

위대한 성취를 이뤄낸 위인들이나 예술가들의 경우에도 개방성은 큰 영향을 미친다. 그들은 다양한 시도로 자신의 기존 사고를 부정하며 남다른 발견과 차이를 가져왔다. 우리가 알고 있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나 미켈란젤로 같은 역사적인 창조자들이 이와 같다. 그들이 지닌 남다른 조건은 개방적 통섭력(統攝力)에 있다. 이들 예술가 집단은 전인적(全人的) 역량을 갖춰 화가는 그림에만, 건축가는 건축에만 전념한 베네치아인과 전혀 다른 방식을 띠었다. 어느 하나가 다른 것에 영향을 끼치며, 각기 분리되어 있던 지식이 통합적 결과를 만들어 내는 효과를 냈다. 거대한 상상과 세계사적 실험의 지렛대가 증폭되며 도처에서 대융성과 창조 사회를 이루어 냈던 것이다.

 

이처럼 개방과 혁신은 상호 상승작용을 일으킨다. 미국에서는 서부의 실리콘 밸리가 뜰 때, 동부의 보스턴 외곽에 있는 128번 도로가 쇠퇴의 길을 걸은 것은 양쪽 모두 IT 관련 기업들이 몰려 있었지만 보스톤은 개방적 태도와 체제가 미약했기 때문이다. 열린 생각이 성패를 좌우한 것이다.

 

세계 지도는 여행시간을 기준으로 줄어들었지만, 이제는 사람들의 다른 인식이 지도의 크기를 결정한다. 세계를 읽는 눈, 다시 말해 열린 생각이 키(Key)이다. 지식과 경험이 무한 광합성을 일으키는 시기, 명실상부한 개방적 다문화야말로 창조의 거푸집이다. 조만간 세계가 무엇으로 태어날지 지켜보는 건 대단히 흥미롭다. 하지만 이보다 직접 뛰어 들어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내는 건 인류사의 방향조차 바꾸어 버릴 것이다. 가만히 귀 기울여 보면 변혁을 알리는 나팔소리는 어디서건 울린다. ⓒ전경일 인문경영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