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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경영/나에게 묻는다 | Posted by 전경일 2010/03/30 23:18

요약 좀 해 봐

후배 중에 그림을 꽤나 그리는 녀석이 있다. 이른 바, <그래픽 디자이너>라는 직업을 갖고 있어서 그런지 쓱쓱 연필을 몇 번만 움직여도 그림 한 장은 거든히 그려댔다. 오랜만에 만난 녀석에게 다짜고짜 달려들어 나를 그려보라고 했다. 녀석은 멀뚱하게 눈을 뜨더니 손사래를 쳤다.

“형, 그런 거 나 못해요. 뭘 그런 부탁을...”

나는 피식 웃으며 재차 요청을 했다.

“나를 좀 요약해 보라고. 왜 그런 거 있잖아? 캐리커천가 뭔가 하는. 뭐, 이렇게 비싸게 굴거야야? 술 한잔 산대두.”

후배를 한참 다둑거려서야 예술작품으로 그려 주는 것이 아니라는 꼬리표를 달고 그림 하나를 얻었다. 거기에다가 나는 내 나름대로 제목까지 덜렁 붙였다.

<나의 summary.>

후배 왈, 내 얼굴을 요약하면 이렇다나. 안경을 꼈고, 코가 크며, 머리는 쭈뼛쭈뼛하다. 내 머리카락은 너무 굵다 등등. 아무튼, 나는 이 캐리커처를 종종 보게 된다.

한참 지나서 생각해 보게 된 것인데, 그때 나는 왜 후배에게 내 얼굴의 그림을 요청한 것일까?

분명한 것은 그 무렵 나는 생각이나, 생활이나 모든 게 헝클어져 있었었다. 은행 잔고는 바닥나 있었고, 몇 달 째 실직상태였으며, 쥐고 있던 주식은 휴지조각이 되어 버렸다. 한마디로 거덜난 인생이었다. 그 무렵, 인간에 대한 배신감이 정점을 이뤘다. 그러다보니 몸도 마음도 말이 아니게 피폐되어 있었다. 헝클어진 실타래를 끊어내고 처음부터 다시 이어 갈 수만 있다면? 그런 욕망이 그런 요구를 하게 만들었는지 모른다. 후배에게 요청한 ‘나의 요약본’도 그런 내 상태를 반영한 게 아닌가 싶다. 그땐 그랬다.

그 후, 나는 용케도 복잡하고 뒤엉킨 상태에서 벗어났다. 아마 나를 요약해 봄으로써 구질구질한 잔가지는 다 쳐내고 나의 본질에 다가갈 수 있었기 때문 아닐까? 그때의 경험으로 나는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되었는데, 그건 삶을 단순화시키면 더 많은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었다.

우리가 하루 종일 느끼는 감정과 상태는 사실 삶을 구성하는 모든 부분들은 단순히 늘어 뜨려 놓은 것에 불과하다. 만일 이런 것을 간단히 모아 보라면 인생을 대하는 방법은 훨씬 더 간결하고 정밀해 질 것이다. 가치 있는 것들이 가장 중요한 집중 대상이 될 것이다. 사랑, 우정, 믿음, 도움, 희망, 의리, 노력, 땀, 웃음, 가족, 껴안음, 입맞춤, 탄생, 슬픔, 죽음... 이 모든 가슴 벅찬 감정 앞에서 가장 간결하게 힘이 되는 부분은 키우고, 어렵고 복잡하게 만드는 일은 요약해 내는 단순 명료한 가치만 남는다. 그걸 알게 되었다.

내 캐리커처를 볼 때면 늘 눈이 가린 얼굴 때문에 생각해 보게 된다. 단순히 안경알 때문에 이렇게 그리게 된 것일까? 아니면, 세상을 보는 눈이 없어서 그런가? 내 삶엔 화룡점정의 마무리가 없다는 뜻일까? 요즘에도 이 캐리커처를 볼 때면 내 삶을 간결하게 하려고 몸부림치던 그 시절이 떠오른다. 나는 이제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갖게 되긴 했나? 그림 속 나는 여전히 허공만 응시하고 있는 건 아닌가? 적지 않은 질문이 계속 떠오른다.
ⓒ전경일, <나에게 묻는다>



“아니, 퇴원이라뇨?”

“환자분 데리고 집으로 가시지요. 맛있는 거나 실컷 드시게 해드리세요.”

건강검진 때 위 내시경 검사를 해봤더니 급히 큰 병원엘 가보라는 말을 듣게 된 친구였다. 부랴부랴 큰 병원에 예약을 하고 검사해 보니 위장 암 말기라고 했다. 병원에서는 묻는 말에 그저 같은 말만 되풀이 했다. 주치의는 조직검사 결과 수술을 해도 이미 늦었다고 말했다. 환자가 고통만 받을 뿐이지, 아무런 효과도 기대할 수 없는 수술은 뭐러 하냐는 거였다. 친구의 아내는 순간, 실성한 사람처럼 눈이 팽 돌더니, 다리에 힘이 풀리며 주저앉았다. 나는 엉거주춤 친구 부인을 부축해 의자에 앉혔다.

암-. 안 걸리면 팔십까지는 무조건 산다는 얘기처럼 암은 정말로 무서운 병이었다. 어떻게 멀쩡한 사람 속에 저렇게 파고들어 썩은 사과 속처럼 다 망가뜨릴 수 있나 싶었다. 겉으로는 멀쩡하고, 아무 이상 없어 보이는데 말이다.

며칠 후, 친구 부인한테 전화를 해보니 퇴원해서 지금은 시골에서 요양 중이란다. 그러며 남편이 먹고 싶다는 거 다 해주고 싶은데, 별로 먹고 싶은 게 없다고 한단다. 그러며, “당신 나 죽으면 어떻게 살래?” 자주 같은 말을 물어 온단다. 그럴 때면 둘이 껴안고 한참을 운단다. 서러워서. 속아 산 인생이 서럽고, 남편을 더 위해 주지 않은 자기가 미워서.

차를 몰아 친구가 머무는 요양소까지 가는 길에 나는 착잡한 심정뿐이었다. 마음만 무거웠다. 그러면서도 알 수 없게도 마음 한편에서는 ‘조금 일찍 가는 거지.’하는 경박한 생각이 고개를 들었다. 사람은 참 알 수 없는 존재다.

친구를 만나서 시골 길을 같이 산책했다. 친구 부인은 쑥물을 받치고 있을 테니 나갔다 오라고 했다. 무슨 얘기를 한단 말인가?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까? 망설이는 내게 친구가 먼저 말했다.

“이렇게 살아서 걸을 수 있는 것만도 기막힌 일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을 언제 또 보지? 머지않아, 나는 죽어서 땅 속에서 누워 있을 텐데...”

“다 죽잖아.” 나는 담담하게 대꾸해 주었다.

“내 집사람... 재혼, 부탁한다. 아직 젊잖아. 어디 좋은 사람 있으면 소개 좀 해 줘. 나 죽어서도 너 고마워할게.”

친구나 나나 고개를 돌렸지만, 그건 서로의 눈물을 감추려 한다는 것을 모를 리 없었다.

“대학 다닐 때, 너 나 때문에 아버지한테 진땅 얻어 맞었지? 소 판 돈으로 친구 학비 도와줬다고?”

“그랬었나?”

“나, 그 돈 못 갚고 가네... 인생이 너무 짧아서 못 갚는 거야.”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친구는 하늘을 바라보며, 목울대를 울렁거렸다. 그렇게 친구와 마지막 밤을 보냈다.

친구와 헤어지고 나서 섟 달 뒤, 나는 친구의 장례식에 갔다 왔고, 첫눈이 내리는 광경을 휴게소에서 차를 세워놓고 바라보았다. 사람들은 수없이 어디로 갔다 오는지 차량의 행렬은 끝이 없다. 나는 잠시 멈추어 섰다.

‘이런 아름다운 풍경을 언제 또 보지?‘

친구의 말이 환청이 되어 들렸다. 그랬다. 산다는 건, 매일 매일 새로운 날들을, 인생의 첫날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라는 걸, 왜 몰랐던가? 무수한 인연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 죄를 짓고, 돈 버느냐고 아등바등 거리고, 예쁜 여자 얻어서 새끼도 낳고 하면도, 왜 하루하루를 속절없이 살기만 했었던가?

고속도로는 연말 차량으로 정체였지만, 나는 천천히 차를 몰며 이 어둠이 가시고 나면 보다 용기 있는 삶을 살리라 다짐했다.

‘산다는 거, 그거 아무나 하는 거 아니잖아. 그런데도 그걸 모르고 살다니. 인생? 정말 처음처럼, 태어난 첫날처럼 사는 거라구.‘

그런 생각을 하며 부지불식간에 나는 친구 부인에게 소개할 만한 사람이 누구일지를 생각해 보고 있었다.
ⓒ전경일, <나에게 묻는다>

감성경영/나에게 묻는다 | Posted by 전경일 2010/03/23 23:49

별을 따다

직장 생활에 푹 빠져 지내다 15년 근속 상으로 가족을 데리고 해외 휴가를 갔다 온 친구가 있었다. 친구가 호텔에서 체크인을 하는데, 갑자기 호텔 카운터 직원이 "네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었었다.

“내 이름?”

그는 곧, 대답을 했지만, 그때 불현듯 자신을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고 한다.

‘00회사 00부장이 내 이름이었지.’

그 전까지 사회적 직위와 무관하게 자기를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친구는 뭔가 둔기로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별 것도 아닌 일에 괜히 휴가 와서 신경 쓰게 될 것 같아 잊어버리기로 했지만, 아내와 애들이 다 잠들고 나자, 그 친구는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는 밖으로 나왔다고 한다.

동남아 호텔의 벤치에 누워 오랫동안 밤하늘의 별을 올려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대학을 나와서 처음으로 직장을 갖고, 결혼을 하게 되고, 첫애를 낳고, 처음으로 회사에서 누락 없이 간부 진급도 해봤고, 지금은 몇몇 협력 업체를 거느리고 있는 사업부서의 장이다? 그게 자기 전부였다. 지금까지 누구도 자기 보러 “네 이름이 뭐냐”고 물은 적이 없었다. 그런 질문을 받은 적이 있어도 특별히 자기를 생각해 보거나 하지는 않았었다. 자기소개를 할 때조차도 그저 시니어 매니저 아무개라는 자기 명함에 찍힌 직책 딸린 이름이 전부였다는 것.

친구는 밤하늘에 무수히 찍힌 별들을 바라보며, 별의별 생각을 다 했다고 한다.

앞으로 더 나이 들면 무엇 하나, 나의 은퇴 이후는? 애들 교육비? 노후는?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자기 처지가 한없이 처량하더라는 거였다. 그렇지! 월급쟁이로 버텨봐야 얼마나 더 벌겠나. 버는 건 고사하고 이젠 버티기도 힘든 세상이니...

생각이 그런 쪽으로 가다보니 부모님 살아생전에 해드린 게 없다는 자책감도 일었다. 그러며, 주위 일가들에게 도움이 되어주지 못했던 거며... 온갖 상념들이 밀려 와 혼자 소리 없이 울었단다.

대책을 세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이디어는 마땅히 떠오르지 않았다. 일단은 회사에 더 있어보지 뭐...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 지금은 속 편할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구나 어쨌든 지금은 잘 나가가는 편이어 15년 근속으로 가족 휴가도 오게 되지 않았는가? 그러며 그는 스스로 위로했다고 한다.

한동안 마음을 달래다 너무 늦은 것 같아 호텔로비에 들어오니 잠에 골아 떨어져야 할 아내가 호텔 이 곳 저 곳을 뒤지고 있더라는 것. 아내를 부르자, 아내는 다짜고짜 와서는 한다는 말이, “그래, 잠 안자고 나와서 얼마나 잃었어?” 그러며 추궁하더라는 거였다.

그 친구, 부인 질문에 말문이 막혀 버렸다. 그도 그럴 법 한 게 호텔에는 심야 카지노가 밤새도록 불을 밝히고 있었다.

“아냐, 땃어. 많이 땃지... 별도 따고, 세월도 따고, 나 송 인철이도 따고...”

친구는 아내의 손을 잡고는 호텔 방으로 돌아왔다. 호텔에 들어오는 길에 그는 푸르기만 한 밤하늘을 가리키며, “내가 하두 많이 따서 별들도 많이 줄었네.”하며 농담을 던졌다.

“딴 거 있음 다 내놔. 내일 아침에 맛있는 거 먹게.”

그의 아내는 끝까지 그가 한 얘기가 무슨 얘긴지 모르더라는 거였다.

‘그래, 인생엔 부부도 모르는 게 많지...’

그 친구, 왠지 서글픈 느낌만 들더라며 전화를 끊었다. 그나 나나 마흔 넘은 남자들이었다.
ⓒ전경일, <나에게 묻는다>


감성경영/나에게 묻는다 | Posted by 전경일 2009/09/16 21:24

그 여름의 못나니 꽃

그 여름의 못나니 꽃

이태 전이었던가? 여름휴가를 이용해 시골에 갔다 왔다. 새해가 시작되고 나서 정신없이 지내다 가까스로 낸 휴가였다. 특별히 갈 데도 마땅치 않았고, 바캉스하면 으레 떠오르는 바가지 요금에, 12시간 이상 차를 몰아야 하는 고충까지 생각하니 바닷가는 아예 겁부터 났다. 게다가 눈을 밖으로 돌려 해외여행이라도 갈라치면 몇 백 만원 깨지는 것은 한순간이고 빠듯한 살림에 애들을 둘씩이나 매달고 떠나는 그런 해외여행은 쉬운 게 아니었다. 마흔까지 살면서도 해외여행 하나 제대로 가지 못하는 남편으로서 가족에게 미안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애들에게는 거창한 계획이 있는 양 시골 풍경을 그려대기 시작했다. 개울물이 흐르고, 물고기가 노닐며, 반두로 물고기를 잡아 천렵을 하고, 들판에 뛰어 다니는 메뚜기를 잡고, 밤이면 여치나 귀뚜라미를 쫓아 후레쉬 불빛을 비추고, 모깃불을 피워놓고 옥수수 먹고, 별을 보며 옛날이야기를 듣는다.

애들은 그 말 한마디에 군침이 넘어갔다. 아니, 내 얘기에 완전히 뿅, 갔다. 그 다음부턴 술술 풀려갔다. 아내는 내 계획이 뻔한 걸 알면서도 애들 성화에 못 이겨 짐을 꾸렸다. 물론 애들은 시골을 디즈니랜드 정도로 알고 떠났을 것이다. 아무튼 그래서 우리는 먼 친척이 사는 시골 마을로 휴가를 떠났다.

하지만 현실은 늘 상상의 세계와는 다르지 않는가! 시골에 오니 벌써부터 화장실 냄새부터 역겨웠다. 애들은 변소에 들어가려고 하질 않았다. 며칠을 참더니 나중엔 어쩔 수 없이 밍기적 거리며 들어가기까지 했다. 자기들의 습관과 다른 것이다.

어렸을 때 넘치던 개울물은 말라 버렸고, 멀리 강까지 나가보았지만 물고기는 눈씻고도 찾아볼 수 없었다. 메뚜기는 정말이지 어쩌다가 눈에 띄일 정도였고, 밤이면 모기떼들이 덤벼들어 평상에서의 옛날이야기는 하룻밤 만에 물 건너가고 말았다.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곳은 무더운 찜통방일 뿐이었다.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이 난처한 상황을 만회해야만 했다. 다행히 낚시 도구를 가져와 낯에는 근처 저수지에 가서 보낼 수 있었다. 무척 무더웠지만, 이튼날 새벽, 손바닥 만한 잉어를 두 마리 건져 올리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대충 휴가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애들은 첫날부터 모기에 물려 긁적거리고 있었다. 요즘 애들은 왜 이렇게 면역성도 없는지... 타박을 해봐야 아무 소용없었다. 그때 애들을 데리고 귀뚜라미나 여치같이 으악스럽게 울어대는 밤 곤충을 잡으러 앞마당엘 나갔다.

이파리를 젖히고 몇 마리를 잡는 동안 내 전등불에 닭 벼슬같이 생긴 맨드라미 꽃이 잡혔다. 이 식물은 내가 어렸을 때 본 거하고 생긴 게 똑같았다. 못생긴 거 하며, 쓸데없이 벼슬만 세우는 거 하며, 향기도 없고, 어디서나 그냥 말없이 잘 자라는 거 하며... 마치 평범한 직장인인 나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 맨드라미가 왜 맨드라민 줄 아니?”

애들 사촌 언니가 묻는 소리가 들렸다.

“옛날에 힘세고 옳은 말하는 한 장군이 있었데. 그런데 그 장군은 간신에게 모함을 받아 죽게 되었데. 쓰러지는 마지막까지 장군은 왕을 지켜주었대. 그 뒤 장군이 죽은 무덤에서 꽃이 피어났데. 그게 바로 맨드라미래.”

그 얘기를 들으며 나는 학교 다닐 무렵을 떠올렸다.

은정씨 얘기는 지금도 귓전에 들려오는 듯 했다.

“철수씨, 맨드라미가 무슨 뜻인 줄 알아요?”

“......”

“맨드라미는 말라도 모습이 변하지 않아서 '시들지 않는 사랑'이라는 뜻이 있대요.”

대학 시절 학교 회원 앞에 피어있는 맨드라미를 보며 나의 첫사랑이 들려주던 이야기였다. 그녀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가슴이 뭉클했다.

“요즘엔 이걸 복용하고 있거든.”

기술영업 담당 황 차장이 비닐봉지에 든 걸 가위로 자르며 말했다.

“요즘 과로 했는지 코피가 쏟아지더군. 맨드라미 끊인 물이 지혈에 좋다며, 마누라가 달여 주더군.”

나는 그때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가물가물한 기억들.... 그리고 지금의 나.

여름휴가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자, 우리 집 좁은 거실엔 맨드라미 화분이 하나 놓였다. 아내는 뭐 그리 멋없는 꽃을 집안에 들여 놓느냐고 투정부렸지만, 나는 왠지 그 꽃만 보면 어떤 이유에서건 나와 인연이 깊다는 생각이이 들었다. 휴가가 끝나고 회사에 가게 된 날, 나는 인터넷을 샅샅이 뒤져 보았다.


<맨드라미>

-여름철에 쉽게 볼 수 있는 꽃으로, 빨간색과 노란색이 가장 흔하다

-닭의 볏과 비슷한 꽃부리의 모양 때문에 계두화(鷄頭花) 또는 계관화(鷄冠花), 콕스콤(Cock's comb)이라는 여러 가지 이름을 가져다.

-가을이 되어 밤 기온이 떨어지면 꽃 색이 더욱 찬란해진다.

-맨드라미 꽃은 한 줄기에 여러 개의 잔 꽃이 줄을 서서 핀다. 한 송이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은 많은 꽃들이 모여서 핀 것이다.

-꽃피는 기간은 길고 꽃모양이 흐트러지지 않으며, 햇빛이 잘 들고 약간 건조한 곳에 씨를 뿌리면 잘 자란다.

-1년 이내에 발아·생장·개화·결실을 하고 난 뒤 죽는 식물이다. 일년초·일년생식물·한해살이풀이라고도 한다.

-주로 사막·길가·경지(耕地) 등 척박한 자연조건에서 잘 자란다. 생활형으로 진보된 단계의 종이 많다.


나 같이 못생긴 그저 평범하기 짝이 없는 꽃이었다. 사람들에게 전혀 애지중지 보살핌을 받지 않으면서도 때가 되면 그 때를 먼저 알고 어김없이 아무데서나 잘 자라주는 꽃. 그러다 한 두해 살이로 죽고 마는 꽃. 제 모습은 없어보여도 하나하나가 서로 잘 어울려 꽃 모양을 이루는 꽃. 그럼에도 불구하고 찬바람 불어 힘들어질 때면 가장 든든하게 옆의 동료를 부여잡고 땅을 움켜쥐면서 자기의 충성스런 마음을 드러내는 꽃...그런 생각이 들자, 맨드라미라미 꽃야말로 나 같이 평범한 사람의 꽃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맨드라미를 사람에 비유하면 틀림없이 나 같은 사람일 거야, 너무나 평범해서 주목도 모끄는...’

그날 이후로 나는 내 책상에 맨드라미 꽃 화분을 하나 두었다. 시골서 가져온 것이었다. 그리고 나의 분신과 같은 꽃을 가까이서 보면서 나는 나 같이 못난 그 꽃에서 인생의 참다운 의미를 찾았다. 그래서 그런가? 마흔 넘어 다시 찾아 온 위기 앞에서도 나는 그 꽃 먼저 챙겼다. 앞으로 살아 있는 동안, 대부분의 사람들은 저런 부질없어 보이는 꽃으로 살아가야 하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냥 행복하고, 자신에 넘치는 것은 왜일까? 내게 매달린 아이들의 자는 모습을 내가 들여다보았기 때문일까?
ⓒ전경일, <나에게 묻는다>


어렸을 때 포천 사는 큰 이모네 집에 갔었다. 초등학교 4, 5학년 무렵이었던가. 이모는 6.25 동란 중에 과부가 되셨다. 꽃다운 스무 살, 그 때 이복자를 가졌다. 개가도 하지 않고 평생 혼자 사셨다. 이모네 집에는 논이 꽤 컸다. 일하는 일꾼을 두었을 정도였으니까.

영섭이라는 친구였던가? 아무튼, 지금은 기억조차 가물가물하다. 큰 이모는 군수품 장사를 하셨다. 시댁에서 물려받는 토지와 당신이 평생 가꾸며 벌은 돈을 조금씩 모아 근처에 논밭을 사셨다. 무슨 일인지 작은 형과 나는 어머니와 함께 그 해 여름 이모네 집에 갔었다.


그날 밤, 우리는 일꾼 영섭이가 꼬득여 <화랑>담배를 피웠다. 이모가 피엑스(PX)에서 빼온 게 분명했다. 영섭이는 중학생은 되어야 할 나이였지만, 학교 문턱도 못간 친구였다. 집안의 온갖 잔무를 도우며, 밥을 얻어먹고 있었다. 쇠죽을 끓이는 일, 고추 심는 일, 가마니 터는 일 등. 물론, 노임은 받았던 모양이다. 나중에 노임을 챙겨 야간도주를 했다고 했으니까.


처음으로 피워 문 담배는 군불 때는 냄새와 똑 같았다. 목이 칼칼했다. 그 때 내 기억으로 어른들은 이게 뭐라고 피우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으로 담배를 나는 그렇게 접했다. 초등학교 시절에 멋모르고 말이다.

본격적으로 담배를 피우게 됐던 것은 대학에 들어가면서 부터였다. 그 무렵 담배는 내게 하나의 상징물이었다. '담배=고민=성인' 내지는 '담배=멋'이라는 등식이었다. 한편으로 담배를 즐기는 걸 성인이 된 것으로 간주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나는 그 후 18년 동안 담배를 피웠다.


그런 담배를 몇 해 전 끊어 버렸다. 몇 가지 이유가 있었겠지만, 가장 컸던 것은, 나의 잘못된 믿음이 건강을 해친다는 것 때문이었다. 담배와 고민과 성인은 별 상관이 없는 것이다. 그런 그릇된 사상에서 나는 벗어났던 것이다.

그 다음으로는 아내의 질책이었다. 담배 하나 끊지 못하면, 의지박약이다.


그때의 기억이 새로운 것은, 나는 담배를 통해 잘못된 믿음을 줄곧 지켜왔다는 것이다. 그걸 나중에야 깨달았다. 돌이켜보면, 우리 인생엔 이런 잘못된 믿음, 잘못된 습관이 무척 많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런 잘못된 믿음으로 우리 삶을 해치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 마찬가지로 나의 잘못된 믿음이 지금의 나를 규정하고, 나의 미래까지 제어하려 든다면, 나는 용기 있게 과거의 잘못된 믿음이나 습관 따위와 결별해야 하리라. 그럴 때 인생은 자신의 기대를 초월한다.


그런 내가 얼마 전, 직원들에게 담배를 한가치 빌려 태웠다.

회사를 그만두게 되면 무엇을 하나? 담배 연기 한 모금을 뿜어내는 동안 나는 이 지독한 니코틴만큼이나, 여전히 내게 잠복해 있는 불안한 고용 환경을 다시금 깨달을 수 있었다. 갑작스런 충격 앞에서 담배는 조그마한 위안은 되었을까?

문득, 어릴 때 내게 담배를 가르켜 준 영섭이가 생각났다. 그는 여전히 담배를 태우며, 숨 죽인 채, 미지의 세계로 도망을 치려고 궁리하고 있을까? 그는 무엇을 동경했을까?   


경호원의 거짓 진술로 드러났지만, 노무현 대통령이 부엉이 바위 위에서 담배를 찾고, 어제 공개된 고인의 생전 사진에 담배를 피워 물던 장면이 보인다. 담배를 피워 물며 수많은 생각이 오가는 것을 알아 차린다. ⓒ전경일, <나에게 묻는다>

 


가장 기본적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당신은 이것을 기억해야 해요. 키스는 여전히 키스예요. 한숨은 한숨이구요. 세월이 흘러도 이런 기본적인 일들은 여전히 그대로예요.’


영화 <카사블랑카>에 나오는 대사다. 키스는 키스다. 내가 십 수 년 전 아내와 연애를 할 때 나눴던 키스가 세월이 지났다고 해서 뽀뽀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살며 가끔씩 잠 못 이루는 밤에 창밖을 내다보며 내쉬는 한숨도 그냥 한숨일 뿐인 거다. 그렇다. 세상이 아무리 달라졌다 해도 내가 알고 있는 사랑은 변치 않으며, 내가 사랑하는 사람도 변치 않을 것이다. 내가 변하지 않는 한, 가장 기본적인 사실인 나의 언젠가 다가 올 죽음도 결코 변하지 않을 것이다. 주변의 사람들이 그렇게 주위에서 사라져갔듯이 말이다.

사랑에 의미를 두는 것은 그것이 가장 기본적인 사실이기 때문이다. 누굴 좋아한다는 사실. 그래서 나는 매일 사랑한다, 고 고백한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이것 말고 이  세상을 버텨 나갈 가장 귀중하고 힘이 되는 고백이 있을까?


세상은 혼자서는 살 수 없는 곳, 누군가에게는 마음을 허락하고, 고백도 하며, 때로는 짐승처럼 같은 우리에서 뒹굴며 새끼도 낳아 기르면서 사는 것이다. 새끼를 낳아 기르며 내가 인류의 한 존재임을 깨닫고 남들과 더불어 행복하게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언제든 가장 기본적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 모든 그럴듯한 인삿말로 포장을 해도 미워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항시 같은 마음을 품고 있을 것이며,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서도 여전히 애틋함이 솟구칠 것이다. 그런 연유로 나는 보통의 느낌과 보통의 사고를 가진 대한민국 중년 남자인 것이다. 그런 내게 마음이 흔들리는 일이 있었다.


오늘 퇴근 무렵 지하철에서 흐뭇한 광경을 목격했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아리따운 선남선녀가 지하철에 오르는 것이었다. 둘이는 좋아하는 게 분명했다. 서로 바라보는 지긋한 눈길하며, 마주 잡은 손하며... 여자는 이뻤다. 그래서 질투가 났다.


예전의 나의 젊음은 왜 더욱 격렬한 사랑으로 출렁이지 않는가? 몰랐음으로 무모하기조차 하고, 그럼으로써 불같은 사랑에 왜 휩싸이지 않았던가? 사랑은 철없을 때 하는 것이다. 그런 가장 기본적인 사실을 나는 왜 몰랐었는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진실이여! 나의 열정이여, 열애의 감정이여!

생활이란 한 보 앞의 낭만에서 발을 돌리게 만드는 힘이 있다. 지하철에서 내리며 나는 회한과 아득함과 부드러움과 내 청춘이 있던 자리에서 헤어졌다. 굿바이 나의 청춘이여!


집으로 오며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나는 행복한가?’


사랑하는 여자와 결혼했음으로 나는 지극히 행복한 남자일 것이다. 중년에 접어들면서도 여전히 사랑하는 여자와 살 수 있다는 것만큼 행복한 게 어디 있을까? 이런 가장 기본적인 사실에 나는 늘 감사한다. 그래서 그런가? 새끼들을 내가 사랑하는 건 마누라가 여전히 밉지 않아서일 것이다. 모든 유혹 앞에서도 나는 이점을 기억해 두어야 한다. 가장 기본적인 사실은 변치 않는다! 그래서 오늘 엄마에게 화를 내는 첫째 애에게 경고를 했다.

“내 여자한테 함부로 굴지 마라!”

나는 내 여자의 남자다. 
ⓒ전경일, <나에게 묻는다>

        



중국집 아강춘


지금은 없어진 중국집이 내 추억엔 하나 있다.

아니, 가본 지 오래되어 정확히는 모르지만, 지금은 없어졌을 것이다. 벌써 삼십 년도 넘은 얘기니까.


내 고향에는 중국집이 하나 있었다. 알고 보면, 서너 개 더 있었겠지만, 그 중에서도 <아강춘>이라는 중국집이 제일 컸고, 기억에 남는다. 고향에서 군청 다음으로 가는 가장 큰 기관인 농협 바로 옆에 있었으니까. 어린 내게 이 이상한 이름의 중국집은 우선 뜨물통과 미끌미끌한 돼지기름을 연상시킨다. 그 다음으론, 짜장면이다. 생각만 해도 목에 감기던 그 구수하고 들척지근한 맛.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하던 날, 아버지가 데려가서 짜장면 곱빼기를 사주시던 바로 그곳이다. 곱빼기라. 이 얼마나 흐뭇하고 푸짐한 얘기이냐? 지금 생각해도 호사스럽기 그지없다.


우리 집이 <아강춘>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아버지 때문이었다. 아버지가 새마을 운동 지도자로 농협에 종종 들락거리셨고, 그 덕에 그 집에서 회식을 하시게 된 모양이다. 집에 돼지를 놓았던 아버지 눈에는 쌀겨보다도 푸짐한 뭔가가 중국집 뜨물통에 보였을 것이다. 철버덕 거리는 뜨물통. 뜨물이 누군가에게 흘러가는 것을 보고는 아버지는 머리를 쓰셨으리라. 내게 다오. 내가 이렇게 농협 사람들과 자주 오지 않나? 이런 식으로 말이다.


어느 날인가 부터 고등학생이던 큰 형은 저녁이면 어김없이 아강춘의 뜨물을 지게에 지고 집으로 날라 왔다. 나는 형이 무거운 뜨물통을 진채 훠청거리던 모습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가다가 힘이 다하면 징검다리를 건너듯 쉬기도 했다.


뜨물이라고는 했지만, 거기에는 문어 뼈며 먹다 남은 음식 찌꺼기가 그득했다. 아강춘 뜨물로 집에서 키우던 돼지는 살이 붙고, 숫자도 불어나 축사도 두어 칸 더 늘어났다. 아침이면 뜨물통은 돼지기름이 뻐덕뻐덕하게 엉켜있었고, 형은 저녁이 되어 아강춘 문이 닫힐 때쯤이면, 지게를 지고 시내로 나아갔다.

형이 동네 깡패들과 한판 붙은 것도 아강춘에서 뜨물통을 지고 오다 벌어진 일이었으며, 어떤 때에는 옷에서 뜨물내가 질펀덩하게 묻어나 투덜거리기조차 했다.


그런 아강춘을 나는 멀리서 동경하며 바라보았고, 국민학교 졸업식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졸업식 날엔 짜장면을 먹지 않는가? 더구나 내가 그토록 기다려왔던 아강춘에서 말이다. 마침내 국민학교를 쫑치던 날, 나는 내 소원을 이뤘다. 짜장면 곱빼기를 입에 피칠하듯 떡칠을 해가며 후루룩 삼켰고, 나는 의기양양하게 둥근 배를 끌어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트림 속에서 들척지근하게 익은 양파와 밀가루 내가 풍겨 나왔다. 지금도 내 기억에 그날 형들이나 누나가 함께 갔었던 영상은 남아있지 않다.


그날 밤에도 형님은 아강춘에서 뜨물을 져 날랐고, 나는 그런 뜨물을 보며 언젠가는 그 중국집을 다시 찾아가리라 다짐했다. 물론 형에 대해 일말의 미안한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건 당연한 게 아닌가? 나는 막내였으니 말이다. 이게 나의 특권이었다.


그 후, 삼십년의 세월이 흘렀다.

얼마 전, 회사 근처에 있는 중국집을 갔다가 우연히도 그 <아강춘>을 떠올리고, 형님을 생각하게 되었다. 왜 그랬을까? 분위기 때문이었을까? 그렇게 생각해 보니 나는 여태껏 형님한데 짜장면 한 그릇도 사드리지 못한 게 생각났다. 수 없이 밥을 먹고, 식당에도 갔었지만, 정작 다 커서 밥벌이 하는 나이를 넘겼어도 왜 짜장면 한 그릇 대접하지 못했을까? 형님한테 미안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 다음에 만나면 짜장면 하나 시켜 드리지. 요즘엔 그때 짜장면보다 맛있는 게 훨씬 더 많지 않은가? 그러며 주방에 대고 소리칠 생각이었다.


“여기 짜장면 곱빼기 두 개!”

그날, 직원들은 영문을 몰랐지만, 입에 칩갑칠을 하듯 형님과 짜장면 먹는 장면을 생각하며 나는 끼룩끼룩 웃고 있었다. 갑자기 목이 메어 짜장면이 넘어가지 않았다.

형님-. 

ⓒ전경일, <나에게 묻는다>


감성경영/나에게 묻는다 | Posted by 전경일 2009/02/17 17:01

[나에게 묻는다] 촌지

촌지


사범대를 나와 중학교 선생님이 된 내 친구는 처음으로 발령받은 학교에서 촌지라는 것을 받게 되었다. 받을까 말까. 온갖 생각이 그 앞에 내밀어진 봉투 앞에서 해일처럼 밀려왔다 밀려가곤 했다. 전광석화와 같이 수만 가지 생각들이 어디 숨어 있다가 튀어 오르는지, 일시에 터져 나오더라고 그는 말했다. 거절을 할까, 말까 하면서도 당장 아쉬움이 그를 유혹하는 걸 느끼게 되었다. 작은 것에의 흔들림. 그 다음의 무너짐. 애써 웃는 어색한 웃음...


첫 촌지의 추억을 갖고 있는 친구는 끝내 그 일을 어떻게 처리했을까? 나는 몹시 궁금했지만, 진실이 묻혀버릴까 봐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안 받으려고 했다!


그런데 순간, 부모님 생각이 나더라고 그는 말했다. 얼마 전 형제들끼리 모여 연로하신 부모님의 한약 값을 보태기로 한 가족회의가 떠오르더라는 것이었다. 그는 봉투를 접어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침을 삼켰다. 학부모를 보내고, 잠시 교무실 의자에 앉아 있다가 그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교직원 화장실을 찾았다고 한다. 봉투를 열자, 거기에는 새파란 만 원권이 스무 여장이 들어있더라는 것. 뛰는 가슴을 누르고 그는 다시 자리에 돌아와 하루해를 너무나 길게 보냈다고 했다.


돈은 받았으되, 마음은 불편함으로 가득 찼고, 마음의 불편함은 형제들 앞에 거리낌 없이 내 놓을 수 있는 약값의 든든함으로 양해되었고, 무마되었다고 한다. 그러며 이 돈은 정말이지 단순한 선물에 불과할 뿐이다. 결코 뇌물이 아니라는 자기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 자기 합리화란 그런 것이지.’

친구는 그렇게 생각하니까 별로 두근거리는 느낌도 들지 않았다고 했다. 그래서 촌지다. 한마디의 마음의 표현일 뿐이지... 


며칠 후, 친구는 시장에서 장사를 하는 반 아이의 아버지가 그만 차에 치여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일어서지도 못하는 홀아버지 수발로 얘는 학교에 계속 빠졌다.  친구는 수업을 파하고 집에 보관해 둔 촌지 봉투를 들고, 병원을 찾아가 봉투 채 애 아버지 앞에 내 놓았다고 한다. (순진한 녀석... 그래서 녀석 별명이 순둥이다.)


친구는 빨간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속으로 민망할 게 분명했다.


“나는 뭐 그렇게 올바른 선생은 아닌가 봐. 아무튼 받았으니까. 아이 아버지께 전달하고 나서도 한편으로는 섭섭하더군. 내 간뎅이가 콩알만해서 그랬는지도 모르지. 번지수를 잘못 찾은 봉투였던 셈이지. 우리야 그냥 콩알 인생으로 살아가야지 뭐.”


이렇게 얘기한 친구는 처음으로 받게 된 촌지봉투는 결국 그걸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돌아갔다며 말을 끝맺었다. (싱거운 녀석.)


친구처럼, 아마 이 나라의 선생님들은 간뎅이가 더 작아져야 할런지 모른다. 몰론, 마음이 더 말랑말랑 해야 할 건 두말 할 나위없다. 이렇게 촌지를 아낌없이 쓰는 선생님이 있는 한, 우리 애들을 맡기는 데에 큰 문제는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촌지. 그래, 겨우 손가락 한 마디만한 마음일 뿐이지. 그래서 촌지지.

정말이지, 촌지 앞에선 어떤 심정이 들까?

나는 뭐든 다 이해할 것 같았다.   

ⓒ전경일, <나에게 묻는다>


친구 장례식에 가게 알다


‘아직 죽어서는 안 될 친군데...’

정말이지 아직 죽어서는 안되는 친구가 죽었다. 세상 사는데 선하고, 남 좋은 일 많이 하고, 늘 서글서글하기만 하던 친구가 세상을 떠났다. 아직 꼬마인 애 둘에 이제 삼십대 후반인 부인까지 남겨놓고... 이러면은 안되는데. 운명이 이렇게 가혹하고 모질면 안되는데 하고 나는 넋을 놓았다.

너무나 어이없는 친구의 죽음을 보면서 장례식장 한편에서 혼자 술을 따랐다. 술에 취할수록 내 기억은 이리저리 헤매었지만, 나는 또렷하게 친구 부인의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 그 표정 하나만은 잊을 수 없다. 울음, 절망, 깜깜한 앞날, 애들의 입, 황당한 친구처지, 남들의 이목과 눈빛, 빛 빛...

그녀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이 이제는 사라진 것이다. 사라져 다시는 볼 수 없는, 다시는 같이 누워 대화를 하거나, 서로의 살을 덥히고, 쓰린 가슴을 어루만지는 그런 남편이 없어진 것이다. 눈물은 이럴 때 흐르라고 있었는가? 너무 울어 이제는 목소리만 꺼이 꺼이 하는 친구 부인 옆에서 애들은 울다 마른 때국물 얼굴로 딱지놀이에 정신이 팔려 있다.

“우리 아빠 온 댔어~”

딱지놀이를 하던 아이가 먼 친척벌 되는 형아 한데 하는 말을 듣고 나는 왈깍 눈물을 쏟았다. 제기랄... 세상은 왜 이리 공평하지 않은가! 선한 사람들은 왜 이리 쉽게 떠나는가? 오래전 고향 친구라 아무도 나를 알아보지 못했을 장례식장에서 나는 친구를 보내고 혼자 남아 하염없이 술잔을 따랐다. 세상은 뱅뱅 돌다가도 우리같이 평범한 사람들은 어지럼증 나기 전에 내려놓아 주어야 하는데, 왜 운명은 세상에서 가장 작은 둥지부터 터는가.

친구의 죽음. 가장 가까이 있던 친구의 첫 죽음을 목격하면서, 나는 죽음이 서서히 내게로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친구의 죽음은 그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을 것이나 나에겐 처음으로 다가올 것이다. 언젠가 내게 닥쳐올 죽음도 이런 것이리라. 내 주변에서 이렇게 죽어가는 친구를 보면서 나는 그것이 나와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가장 가까이 하던 친구의 죽음을 본 내 나이는 그와 동갑이었다.


친구의 죽음을 통해 내가 다시 태어난 날, 나는 과거의 나를 죽였다. 그날은 내가 내 인생의 시간을 온전히 살아내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첫날이었다. 온 힘과 마음을 다해 세상의 풍파와 싸우며, 밀어내 가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그러기 위해 살아 있다는 것을... 친구의 장례식장에서, 나는 눈부신 깨달음을 맞이했다. 

ⓒ전경일, <나에게 묻는다>      



머리카락을 발견하다

“세상 모든 건 다 때가 있다.”

고등학교 시절 아버지는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공부에도 다 때가 있다는 것. 하지만 그땐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


“납기는 꼭 맞춰야 해! 기한 지나면 다 끝장이라구!”

사회에 나와 첫 직장에서 상사한데 듣게 된 얘기도 ‘때’와 관련된 것이었다. 그때, 내가 다니던 회사는 대기업이었지만 통신 장비를 납품하는 계약상으로 보면 분명히 ‘을’인 회사였다.


“지금 이때를 놓치면 다시는 창업을 못할 것 같아.”

오랬 동안 다니던 회사를 나오며 아내한테 한 얘기다. 아내는 묵묵히 응원하며 나를 따라주었고, 나는 조그마한 회사의 사장이 되었다.


‘일신상의 이유로 사직하고자 합니다.’

이사직을 사임하면서 내가 내민 사직서였다. 사직서를 쓸 때, 나는 이제 그 회사를 그만두어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나는 낡아가고 싶지 않았다.


“타이밍을 놓치면 마케팅 코스트가 10배 더 들어가도 시장점유율을 높이기 어려울 것입니다.“

다른 회사에 입사해 내가 사업 임원으로 있으면서 여러번 되뇌였던 말이다. 하지만, 세상 일은 늘 올바른 선택만을 하는 건 아니라는 걸 다시 깨닫게 되었다.


때... 

내 인생에 ‘그 때’는 언제이었는가? 살며 수많은 ‘때’와 만나왔으나, 대부분은 사회적인 시간에 불과한 때였다. 거기엔 한 개인에게 너무나 중요한 ‘때’도 있었을 것이다.

나이가 들어가는 지금은 앞으로 어떤 때를 만나게 될런지 모른다. 사회생활을 그만두고 은퇴하는 때를 조만간 만나게 될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도전을 해야 할 때를 만나거나, 어뻐면 불행하면 병들어 누워있을 때를 만날런지도 모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영원히 먼 길을 가야할 때? 아마... 내 앞에는 수많은 때들이 머뭇거리며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혹은, 어떤 때에는 잔인하게, 어떤 때에는 비정하게, 어떤 때에는 남들에게 함정을 파고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내가 행운아라면 보다 럭키한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마흔이란 시간을 살아왔지만, 때에 대해 내가 아는 건 거의 없어 보인다. 다만, 나는 나의 시간의 때를 내 나름의 가치와 소신을 갖고 살아가는 것뿐이다.

그런데 요즘 와서 부쩍 예전의 시간과 지금의 때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루하루 손가락 사이로 빠져 나가는 시간을 보게 된다. 빠르다. 너무 빠르게 머리칼이 탈색되고, 얼굴이 푸석푸석해지며, 피부는 탄력을 잃어 가고 있다. 나는 늙어 가는 것이다. 안단테로 왔다가 000로 가는 내 젊음. 나는 늙음을 온 몸으로 맞이하고 있다.

그런 며칠 전, 거울을 보다가 내 흰 머리끝에서 검은 머리가 솟아나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제기랄! 질겁했다. 나는 회춘하는 건가?

내 인생의 첫날은 이런 식으로 오는 건가? 웃다 못해 나자빠질뻔한 몸을 추스르고 나서 나는 놀라움과 당혹스러움이 동시에 겹쳐지는 묘한 감정을 고스란히 받아들여야 했다. 내 나이가 벌써 이럴 때는 아니지...

그러면서도 기분 좋은 날처럼, 그날, 나는 첫날처럼 눈부신 하루를 맞이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