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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의 역사를 살펴보면, 흥미로운 사실이 발견된다. ‘사실’보다 지금까지 믿고 지켜온 ‘관성’에 집착한 역사가 오랫동안 바닷사람들을 지배해 왔다는 점이다.

바닷길은 바람과 함께 해류의 조건을 파악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런데 1700년대 말까지만 해도 북대서양 지도에는 해류가 표기되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이 지역을 항해하는 뱃사람들은 북아메리카 연안을 따라 흐르는 거대한 해류를 이미 경험하고 있었고, 이 해류가 멕시코 만에서 흘러나온다는 것 역시 알고 있었다. 이 지역의 이름을 따 ‘멕시코 만류’라고 부른 것도 그 때문이다. 항해자들은 해류의 존재를 인식했지만, 그것이 하나의 ‘지식’으로 자리 잡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해류를 무시한 항해는 항해에 소요되는 시간과 비용이 막대하게 들었다. 정확한 바다 지식은 효율적인 항해를 위해서 대단히 중요한 것이었지만, 사람들이 지켜온 ‘관성’은 계속 지켜졌다. 1768년 영국의 보스톤 관세국은 영국에서 뉴욕으로 수송되는 우편물이 로드아일랜드로 가는 상선보다 항상 정해진 것처럼 수 주일이나 더 많이 시일이 걸린다는 데 불만을 갖고 있었다. 왜 우편선은 상선보다 늘 느릴까? 여기에 본격적인 관심을 갖고 연구한 사람은 열성적인 과학자 벤자민 프랭크린이었다. 그는 이 두 도착지 사이가 하루의 항해 일정만큼도 떨어져 있지 않은데 왜 이런 차이가 나는지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

그때 그는 우연히 런던에 있는 사촌인 포경선 선장 티모시 폴져에게 이 문제를 물어 보았다. 당시 폴져는 직업상 플랑크톤을 먹고 사는 고래를 쫒아 만류 가장자리를 늘 항해하고 있었으므로 이 만류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었다. 폴져는 상선의 선장은 대부분 아메리카인이기 때문에 서쪽 방향으로 항해할 때에는 만류의 흐름을 거슬러 가지 말 것을 포경선 선장에게서 배워서 알고 있지만, 영국 우편선의 선장을 그렇지 못하다고 말해 주었다. 영국인 선장은 해류를 무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말에 의하면, 포경선이 고래를 뒤쫓을 때 우편선이 흐름을 거슬러 나가는 것을 본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선원들은 그때마다 그들이 해류를 거스르고 있고, 유속이 시속 1.8km나 된다고 가르쳐주었다. 그러며 흐름의 밖으로 나와 항해하도록 충고해 주었다. 하지만, 그들은 어부의 조언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어부들이 뭘 안단 말인가? 그들은 그들보다 지식이 짧고 정규 교육도 받지 않은 어부들에게서 바다의 지식을 얻는다는 것에 대해 귀 기울이지 않았다. 그들 스스로 너무 똑똑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보다 못한 프랭크린은 이 해류에 대한 주의 내용을 담은 해도를 작성해 영국 폴머스 우편선 선장들에게 발송했다. 그러나 많은 선장들이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해도를 처박아 두었다. 지도가 발행된 다음에도 그 후 수십 년 동안 아메리카로 항해하는 모든 배의 선장은 지도를 무시한 채 만류를 거슬러 항해하여 수 주일이나 더 허비했고, 결과적으로 계속해서 시간과 비용을 낭비했다. 그간 쓴 시간과 비용을 따지자면 엄청난 돈이 바다에 그냥 버려졌던 것이다.

프랭크린의 연구를 더욱 강화한 것은 미해군 지도 제작관인 매튜 폰테인 모리였다. 그는 1800년대 몇 만권이나 되는 항해일지를 정리하여 바람과 해류의 관찰 내용을 세심하게 선별해 해도에 표시하는 작업을 수행하고 있었다. 그는 좀 더 상세한 정보를 얻고자 해군과 상선의 선장에게 특별히 만든 ‘항해일지 요약’을 배부한다. 각 일지의 뒷부분에는 12페이지에 달하는 여백이 남겨졌고, 선장들은 그 여백에 항해시 발견되는 특정 해류, 바람, 수온, 기타 관련 현상을 기록할 수 있도록 했다.

모리가 작성한 해도를 이용해 어느 작은 상선의 선장이 보통 110일 요하는 발티모어와 리오데자네이로 사이의 왕복을 35일이나 단축하면서 모리의 해도 수요는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지식이 검증된 것이다. 모리는 항해일지 기입에 협력해 준 선장들에게 그의 출판물을 제공했고, 그로 인해 자료는 속속 더 많이 모여들었다. 모리는 해류의 움직임에 대해 더욱 자세한 것을 알고 싶어 하던 중 드디어 그 자료를 손에 넣을 새롭고 획기적인 방법을 생각해 내게 된다. 선원들에게 때때로 날씨와 배의 위치를 기록한 종이를 병에 넣어 바다에 던져 줄 것을 부탁한 것이다. 이 종이에는 이 병을 발견한 사람에게 발견한 날짜와 장소를 기입해서 워싱턴의 모리에게 회송해주도록 부탁하는 말이 들어 있었다. 선원들은 이 종이를 병 속에 넣어 해류에 던졌고, 얼마 있다가 이 병들은 건져 올려져 모리에게 종이가 전달됐다. 이런 정보 입수 방법을 통해 모리는 해도에 해류의 방향과 속도에 대해 더욱 자세하게 기록할 수 있게 되었다.

프랭크린에서부터 모리까지 이들은 평범해 보이는 현상에서 원인이 뭘까를 찾아내고 이를 지식으로 새롭게 탄생시킨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현장의 어부에게 지식을 전해 들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참여해 가장 정확한 해류 지도를 만드는 집단지성을 활용했다. 인터넷과 소셜 커뮤니티가 생겨나기 훨씬 전에 만인의 지식을 끌어 모아 새로운 지식세계를 열었다는 것은 새로운 도전이었다. 시대를 불문하고, 현상 속까지 파고들려는 호기심과 치밀한 노력은 오늘날 기업에서 애기하고픈 창조니 혁신이니 하는 말들의 대표격 아닐까? 
전경일. 인문경영연구소장.《초영역 인재》저자.

 


국내 CEO분들을 모시고 헌능과 영능을 탐방하는 워크샵을 진행했습니다. 헌능에 들러서는 조선 창업의 과정과 태종 이방원의 역할에 대해 현장 강의드렸습니다. 봉황포란형의 지세에 대해서도 설명을 겯들였고요. 영능에 들러서는 대왕의 치세와 국가경영의 참다운 도를 현장 강의하고 풍수에 대해 아는 바를 설명드렸습니다. 봉황포란형과 모란반개형의 지세지요. 400년 운명의 조선을 100년 연장해 500년 역사로 빚어낸 풍수라고 평가되는 곳이지요. 말 그대로 천하제일의 명당 자리입니다. 곧바로 강의장으로 이동해서 <세종 리더십과 창조적 지속가능경영 전략>을 주제로 강의를 했습니다. 조선 500년을 이끈 리더십의 원형과 600년 지속된 창조적 혁신의 산물이 오늘날 인문과 경영의 만남을 통해 어떻게 기업에 접목되는지 CEO분들이 많은 관심을 가져주셨습니다. 인문경영연구소는 지속적으로 우리 역사에서 경영의 원류를 찾아내는 작업을 하려 합니다. 저희 기업체 대상 워크숍에 많은 관심 바랍니다.


ⓒ전경일 인문경영연구소

나를 보되 숲을 보고, 숲을 보되 직원들을 보라. 그중 어디 하늘을 찌를 재목이 있는지...

등로 옆의 메숲을 지날 때면 산꾼 경영자들은 빽빽이 도열한 나무를 보며 상념에 젖어든다. 나무들이 이만큼 자랄 때까지 땅은 과거의 어느 순간에 작고 여린 싹을 내놓아 주었을 게다. 씨앗들은 어디선가 날아와 제자리를 잡기까지 수없이 방황하고 자기연민과 두려움에 온몸을 떨었을지도 모른다. 그처럼 힘들게 제자리를 잡고 모진 비바람을 맞으면서도 쑥쑥 자라난 것을 보면 감격스럽다 못해 탄성이 나온다. 대체 어떤 싹이 이처럼 우람한 모습을 만들어냈을까?

기름지고 넙데데한 땅일수록 나무들은 미끈하게 솟는다. 그런 땅을 만난 씨앗들은 누구보다 행운아이다. 그래서 나무도 팔자소관이겠거니 한다. 그렇다고 그들을 키워낸 토양에만 눈이 가는 건 아니다. 비탈길이든 바위틈이든 비집고 들어가 숫한 세월을 인고하며 온몸으로 바위를 붙잡고 뿌리를 뻗어 내려간 녀석들에겐 더 큰 애정이 솟구친다.

인생사 자기가 할 나름이라는 원칙을 고스란히 비춰주는 그 녀석들을 보면 환경 탓만 해온 나 자신이 부끄럽기도 하다. 세상 모든 산의 후미지고 황폐한 조건을 이겨낸 끝에 우람하게 서 있는 나무들을 보면 흡사 그늘에서도 묵묵히 제몫을 다하는 직원들을 보는 것 같아 감동이 느껴진다.

 
열악한 자연은 그저 환경에 불과할 뿐이지만 그래도 싸가지 없는 나무들은 산 탓만 한다. 그래서 삐뚤빼뚤 왜곡되게 자라고 서로 뒤엉킨다. 늘 뭔가가 부족하니 더 달라고 투정을 부리는 직원들 같다.

송문호 사장은 늘 메숲 앞에서 발걸음을 멈춘다. 꼿꼿하게 제몫을 다하며 숲을 이루는 나무를 보면서 상념에 젖는 것이다.

‘직원들을 저렇게 키웠다면...’

속 터지게 하고 답답하고 옹그라진 직원들의 모습이 마음속을 휘휘 휘젓는다. 작은 생각만 하는 그들을 볼 때마다 잡목을 보는 듯한 답답함이 밀려든다. 못난 숲을 보면 배퇴감(背退感)과 그 같은 직원을 길러낸 자신에 아쉬움이 앞선다. 그러나 미끈하게 뻗어 올라간 숲에서는 그 숲을 닮은 직원을 길러내고 싶은 간절함이 더해진다.

아무리 회사 사정이 어려워도 가까스로 월급 날짜를 맞춰주면 늘 월급봉투의 두께를 투정하기 십상이고, 자기가 없어서 회사가 굴러가지 않을 것 같다 싶으면 그간 공 들인 거 다 무시하고 냅다 회사를 바꿔 타는 직원, 기술이 좀 있다 싶으면 수시로 무리한 요구를 해대는 직원, 실력도 없으면서 억수로 잘난 체를 하는 직원들의 뒤틀어진 모습을 생각하면 입맛이 탕약을 삼킨 것처럼 쓰다. 그러다가 회사 사정이 어려워지면 대개 저 살 궁리만 한다. 송 사장은 눈을 질끈 감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내가 바꾸는 게 낫지. 직원들이 내 맘 같지 않다고 탓해 봐야...’

나무는 산을 닮고 직원은 사장을 닮는다고 하던가? 송 사장은 자기 책망을 앞세웠다.

‘내가 회사의 산이니 부족한 직원들이 늘 어떤 식으로든 요구하는 것은 당연한 거겠지...’

그는 산에서 나무를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 직원을 보고 있었다. 산이 펼쳐 놓은 풍경을 보며 경영의 산에 함께하는 숱한 나무를 보는 것이다. 그는 등로를 가로막는 치받이길, 바윗길, 에움길 같은 것들은 산행을 하며 겪는 흔하기만 한 장애물들, 그 장애를 넘어 등로변에 펼쳐진 온갖 나무들을 보며 나무를 키워낸 산을 본다. 등로를 꼭꼭 다지고 선 나무의 인고와 함께 한다.

“대한민국에서 중소기업을 한다는 것은 말이죠, 헛되이 나무를 심고 가꾸는 것과 다를 바 없어요. 기껏 키워놓으면 대기업으로 날아가고 돈 많이 준다면 언제 그랬냐 싶게 훌쩍 떠나가죠. 이런 일이 일상사죠. 그렇다고 대기업처럼 대우를 해줄 수도 없고. 그야말로 인재 고갈입니다. 쓸 만한 사람 찾느라 발품을 팔다보면 복장이 터집니다. 그래서 산을 찾게 되죠. 산에 와서 나무들을 보면 스스로 반성도 합니다. 저런 나무를 품는 산이 부럽고 나는 왜 저런 큰 산이 되지 못하는가, 왜 큰 나무들을 품지 못하는가 하는 생각이 들죠. 내가 아무리 커다란 비전을 얘기해도 그때뿐이고 누구도 사장이 기울이는 공은 알아주지 않아요. 참 씁쓸하죠. 당장이라도 때려치우고 싶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잡목만 우거진 산을 보면 불을 지르고라도 종자 좋은 나무로 다시 심고 싶다는 송 사장은 그래도 산을 내려갈 때는 다시금 마음을 다잡는다고 한다.

“우리 업계에서 잘 알고 지내는 분이 있는데, 그분은 사업한 지 한 30년 되셨어요. 그분이 그러시더군요. ‘여보쇼, 송 사장. 너무 실망할 것 없어요. 당신도 언젠가 모시던 사장 섭섭하게 하고 나온 거 아니오. 사장은 전생에 죄가 있어서 하는 거라니까.” 그러면서 그 분은 ‘중소기업은 그저 못난 나무가 산을 지킨다’고 생각하고 경영하는 거라고 하더군요. 30년을 겪어보니 그 말이 딱 맞더래요. 참 마음에 와 닿는 말이더라고요. 하지만 좀 억울하긴 합니다. 숱하게 소주잔 돌리고 상갓집 찾아다니며 밤샘하고 애 입학이나 졸업식 챙겨줘 가며 할 일 다 해 줘도 쥐꼬리만한 잇속에 떠나더라구요. 개중에는 형님 소리하며 달라붙던 녀석이 꼭 같은 업종의 회사를 차리기도 합니다. 실망스런 인간 참 많습디다.”

송 사장이 산을 찾는 이유는 땀을 실컷 흘리고 정상에서 바람을 맞으면 인간사에 찌든 때가 모두 씻기는 듯해서라고 한다. 마치 뽕을 맞은 것처럼 시름이 훌훌 날아가는 맛에 취해 산에 오른다는 것이다.

대한민국 중소기업 사장들이 산에 오르는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물론 그 이유는 산 아래서도 수없이 생겨나지만, 무엇보다 배낭을 짊어지고 산에 오르면 산은 어떤 식으로든 위안을 주고 가슴을 쓸어준다. 송 사장은 자신이 전생에 산에 뿌리 내린 나무라 그곳을 찾지 않고는 못 배기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덧붙여 자신은 뭐 좀 해보려고 산 아래로 내려간 홀씨에 불과해 바람만 불면 이리저리 흔들리며 사는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한숨을 지었다.

아마도 많은 산꾼 경영자가 그의 말에 공감할 것이다. 그러기에 그들은 산을 탄다. 숯처럼 새까매진 가슴으로 눈물을 삼키며 산을 오른다.
ⓒ전경일, CEO 산에서 경영을 배우다 


권력에 어찌 나눔이 있을 쏜가. 나이 어린 조카가 어찌 나라를 경영할 수 있겠는가? 자칫하다간 조상들의 창업이 한낱 물거품이 되어 버릴 수 있는 것, 내가 나서서라도 창업가의 지분을 지켜야지. 허나 이를 두고 나의 권력욕 때문이라고만 한다면, 이 또한 명분 없는 처사일터... 헌데 측근들은 왜 한사코 나를 두둔하며 권력 잡기를 종용하고 있는가? 나를 위해서인가? 저들의 권력욕을 드러내고 싶어서인가? 어차피 피를 보지 않으면 권력과는 멀어지는 법, 그럴 땐 내가 정적의 칼끝에 겨누어 지는 것. 그러니 선제공격이 최선의 방어일 터.

어린 조카를 밀어내고 왕좌를 꿰찬 세조. 그는 어떤 경위와, 어떤 목적을 가진 왕이었을까? 조카의 뒤를 돌보며 왕실 측근으로써, 종실 어른으로 부왕의 형제인 양령이 그리 했고, 효령이 한 방식을 왜 선택하지 못했을까? 이제 조선의 7대왕 세조를 만나보자.

-왕 만큼 비정하고, 권력욕에 눈이 먼 이가 없다고 하는데...

"왜 그런가? 내가 대답하기보다 그대들 후대 사가들이 먼저 얘기해 보게.

-왕께서도 알다시피 문종이 서거하고 3년상을 치뤄야 하는데, 스스로 쿠테타의 시기를 앞당기기 위해 서둘러 탈상케 하고 단종의 혼사를 서두르게 된 것 아닌가요? 그걸 기회로 금성대군, 화의군을 위시하여 단종 측 사람들을 제거한 것 아닌가 말이죠. 측근을 옥좨니까 결국 어린 왕이 선양하겠다고 선언하게 한 것 아닌가 말이죠. 그때 왕께서는 눈물을 흘리며 보위를 사양한다고 하셨죠? 그게 진실이 아니라는 것쯤은 누구보다 왕께서 잘 아실텐데요.

"왜 그것이 비정한 짓이라서? 음-. 정치라는 게 그런 것 아닌가. 정치인이란 악어와 같은 거짓 울음을 보여야 할 때가 있는 법이네. 이 나라 조종이 영속하기 위해선 그만한 비장미 정도는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건 나나 선왕이나 모두 마찬가지일 텐데..."

-그래서 권력 찬탈은 생각대로 잘 맞아 떨어졌나요? 명분이 더 중요하지 않았나요?

"한껏 가시돋힌 말이로군. 왜? 나의 집권을 인정하지 않는 이른바 대역죄인들의 단종복위운동을 말함인가? 그래서 나는 역사에 죽고, 저들 사육신은 영원히 사는 그런 명분을 획득하거라고?

-그렇죠. 역사란 게 뭔가요. 실리를 얻어도 명분이 없으면 그건 한때의 실리에 불과하고 그럴 때의 권력과 포부란 한낱 종이장 위에 떨어진 물방울처럼 곧 말라버리는 것 아닌가 말이죠.

"음-. 꽤나 깊이 찌르시는군. 그런 생각이 후세 사가들의 생각인가?

-아무튼 그렇다는 거죠. 역사는 명분을 세우는 것이라는 걸...

"이 보시게. 잘 생각해 보게. 후대들이 말하듯, 대역죄인 사육신들이 명분하나 때문에 목숨을 버렸다고 생각하는가? 그들이야말로 내가 일으킨 계유정란 이후 공신 세력이 득세하자, 권력이 소외되어 이를 만회코자 역모를 일으킨 것 아닌가? 권력과 무관한 채 오로지 의(義)와 절(節) 때문에 지금 노량진 산 기슭에 묻혀 있다고 생각하는가? 왕실을 끼고 누가 권력을 잡느냐 하는 것은 예로부터 '신(臣)'을 칭하는 자들의 불온한 욕망인 것을. 불사이군(不事二君)이 어찌 그들을 정당화해줄 것인가. 세종대왕 재임기부터 저들 책상물림들에게 연구만 하라 했건만, 권력의 중심부로 나서고자 발버둥 치더니 그 꼴이 뭔가? 결국 떼죽음과 집현전 혁파로 이어지지 않았는가?"

-왕께서는 대단히 주관적이신데요. 그렇다면 훗날 숙종 조 때 이 노량진 기슭에 그들의 충성과 의를 추모하고자 민절서원을 세운 것은 충과 무관하다는 것입니까?

"내가 언제 그리 풀이했나. 충이란 왕을 위한 것이네. 왕은 충의 수준을 높이는 것이고. 그들은 높임을 받았고, 그로써 살아났고, 왕들은 그 수준을 요구하면 되는 거네. 그게 정치라는 거지.

-역시 대단하시군요. 왕께서는 사육신을 권력욕에 빠진 사람들로 폄하하셨는데, 그렇다면 왕의 측근들의 이후 행태는 어땠습니까? 한명회는 왕과 혼인을 맺고, 공신끼리 겹사돈을 맺는 등 모든 정국이 그들 중심으로 돌아갔고, 모든 혜택이 그들로 귀속되지 않았습니까? 여기 어디에 백성이 있습니까? 정란의 대가치고는 너무 한 것 아닙니까?

"그 점은 나로서도 부정할 순 없네. 그런데 말야. 왕이란 게 뭔가, 결국엔 자리보전을 위해 이리떼 같은 신하들과 권력을 나누는 거야. 사육신은 그 권력을 상왕을 중심으로 싸고 돌려했고, 정난공신들은 나를 두고 자신들의 뜻을 이루려 한 것이지. 군왕의 사랑이나, 국가의 자원은 한정되어 있네. 결국 누가 더 많은 파이를 갖느냐는 거지. 그런 면에서 나는 그들을 적당히 이용한 거네."

-그 결과, 엄청난 국가적 부패 고리를 만들어 냈군요. 탈세와 권력세습과 모든 이권의 독점과... 심지어는 홍윤성이 숙부를 때려 죽인 살인까지 눈감아 주는...

"나의 허물만 되짚지 말게. 나는 그래도 민생안정을 위해 정부 재정을 줄여 백성들의 조세부담을 덜어주기도 했네. 그 경감액이 2/3나 되었지. 어디 그뿐인가? 조선의 최고 법전인 <경국대전>을 편찬하지 않았는가? 이로써 조선은 법을 통한 국가 경영이 이뤄지게 되었네.

-후세에 하실 말씀이 있다면?

"나를 보아 주겠나? 말년에 내가 차례를 어기고 왕위를 이어받았으나 재주가 없고 덕이 없어 옛날의 정사를 변경한 것이 많았다며 자기반성을 하였네. 나의 부덕함을 후세가 탓하는 건 인정하겠으나, 그 또한 정치의 한 면이라는 것을 알아주었으면 좋겠네. 정치는 비정하기도 하지만, 회한에 젖은 눈물이 늘 뒤따르는 것이지. 잘하든 못하든 아쉽기만 한 것 정치네. 그걸 알아주게나."

전경일. <창조의 CEO, 세종>의 저자. 인문경영연구소장.


국가 경영이란 중책을 어린 왕에게 맡길 만큼 세상은 녹녹한 게 아니다. 하여 어린 왕세자는 자신의 가장 큰 후원자인 부왕이 유명을 달리하는 때로부터 한없는 나락으로 굴러 떨어진다. 권력 앞에 어제의 신하들은 야수가 되어 물어뜯는 게 정치판일 터! 여기 못다 핀 꽃으로 남아 영월 청령포 모래사장에는 푸른 물결 세월을 감고 도는 홍위(弘暐)의 넋이 지금도 잠 못 든다. 조선의 제 6대 임금, 단종. 그의 생애는 바람의 넋으로 떠돈다.

-왕은 스스로 왕이 되리라고 생각했습니까?

"선왕이 붕어하셨으니 내가 왕이 되는 건 당연한 이치겠죠. 헌데, 내가 너무 어려 만기를 찬람할 수 없었던 게 한이지요. 그러다보니 권력에 눈 먼 자들이 숙부를 사주해 왕위를 농락하고자 한 거고, 그게 계유정란이었던 게지요."

-왕을 보좌하겠다는 신하들이 딴 마음을 품고 있던 게 찬탈의 이유였다고 생각하시는 모양인데, 실은 수양 대군 자신의 욕망이 불러일으킨 결과 아니었나요?

"나는 숙부를 그렇게 보고 싶지는 않소. 그가 어찌 처음부터 역모의 마음을 품을 수 있었겠소. 조선 최고의 성왕 세종대왕의 2자 아니던가요? 게다가 위로는 형님인 문종이 계셨고. 한명회 따위의 간신의 꾐에 넘어간 게지."

-참, 속도 없으시군요. 속이 없는 건지, 속내를 알 수 없는 건지.

"문제는 부왕이셨소. 부왕의 허약함과 단명이 내 명을 재촉한 것 아니겠소. 그저 타고 난 박복한 운명이라고 할 밖에."

-선왕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왕의 안위를 부탁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마저도 지켜지지 못했죠?

"그렇다오. 부왕께서는 붕어하시기 얼마 전 성삼문을 비록한 집현전 학사들을 불러 술자리를 마련하셨소. 그 자리에서 나를 무릎에 앉히시고 훗날을 간곡히 부탁하셨소. 이미 병이 깊어지신 걸 알았던 것이지요. 내 나이 12살에 왕위에 올랐으나, 승냥이 떼를 막서 설 수 없었고, 나를 보호해줄 권신들도 이미 계유 정란으로 유명을 달리했으니... 세종께서 아끼시던 김종서와 황보 인, 조극관, 이양 등이 궐문에서 철퇴를 맞고 그렇게 비명횡사 했소. 참, 안타까운 일이었소."

-그것 뿐입니까? 조선은 세종대왕 시절 이룩한 찬란한 문명이 기울어 가는 계기가 되지 않았나요?

"그렇소. 그 중 가장 가슴 아픈 일은 나의 복위를 주도하던 집현전 선비들이 사육신으로 죽임을 당한 것이오. 세종대왕께서 보위에 오르고 심혈을 기울여 만든 조선 최고의 학술기관이자, 인재들의 집단인 집현전도 이를 계기로 해체되고 만 것이죠."

-생각해 보니 왕은 조선의 르네상스와 중세의 암흑기를 잇는 고리 역할을 하신 국왕이시군요. 그 고리가 튼튼했다면 더 큰 도약을 이뤄냈을 텐데. 끊어지며 역사의 어둠 속으로 스며들고 말았으니 왕가는 물론이요, 만백성들과 우리 역사에도 큰 손실이 아닐 수 없었죠.

"이르다 뿐이요. 대왕시절의 맥을 내가 잇지 못한 게 천추의 한이 되어 내가 죽어서도 잠들 수 없소. 태백산 산신령으로 남게 된 것도 그 때문이고...

-왕께선 뭔가 각별한 노력을 하셨을 테지만, 사실은 그 무렵엔 ‘황표정사’라 해서 김종서 등 조선 창업 이래 공신들이 국사를 처지하고, 왕께선 형식적인 결재만 한 것 아니었나요? 수양이 나선 것도 그 때문이고.

"그렇기도 하겠소. 그러나 어쩌겠소. 나를 형식적으로 대하는 세력도, 나를 치려는 세력도, 다들 왕을 능멸한 불충으로나 남는 것이지. 내 한이 역사 갈피에 그대로 남아 있소.

- 짧은 왕위 기간이었지만, 나름 국사를 돌보는 노력을 하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국사라... 너무 짧아서... 허나, 1453년(단종 1)4월엔 유생들의 시험을 보이고, 온성과 함흥엔 성을 쌓고, 나난(羅暖)·무산(茂山)에 두 성보(城堡)를 설치했고, 또 악학제조 박연(朴堧)이 세종의 『어제악보 御製樂譜』를 인쇄해 반포하기를 청하길래 허가하기도 했소, 계유정란이 일어난 다음에도 할아비를 생각하며『세종실록』을 찬진하였소. 생각해보니, 그때 할아버지의 극진한 사랑을 받던 때를 떠올리며 눈물을 흘렸던 기억이 나오. 어디 그뿐이요. 1454년 5월엔 좌승지 박팽년으로 하여금 경연에서 왕에게 안일과 태만을 경계하도록 진언케 했소. 실은 내가 대궐 안에서 자주 활쏘기를 구경하면서 경연을 여려 차례 중지시켰기 때문이었으나, 속내는 답답한 마음을 달래려 한 것인데, 팽년이 학문으로 위안하라는 뜻을 전하려 했던 게지 뭐겠소? 아무튼 그때 나는 활쏘기를 보며 나의 어림과 약함을 탓했고, 어서 빨리 자라기만을 바랬소. 헌데, 승냥이들이 기다려주지 않고 먼저 달려듭디다."

너무 어린 나이에 왕위를 물려받은 홍위.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되며 영월로 추방되고, 영원히 불귀의 객이 되고 만 임금. 그가 귀양 가서, 자규루에 올라 남겼다는 시는 누각에 빛바랜 채 풍상에 젖어 흐느끼고 있다. 두견새 슬피 우는 달 밝은 밤에/피나게 우는 네 소리 / 네 울음 없으면 내 시름도 없을 것을...
ⓒ전경일 인문경영연구소장

영원히 지지 않는 도전이 있다. 처음에는 작은 도전이었으나, 추구하는 바의 원대함으로 훗날 큰 족적을 이루는 것이 있다.

처음의 흥분감과 신선함은 차차 대중에 보급되어 일반화되고 나면 별것 아닌 것으로 치부될 수 있다. 하지만 어떤 혁신이든 초기에는 대단히 어렵다. 이 점을 알게 되면 혁신자들의 숨은 공로에 깊은 경탄을 금치 못하게 된다. 어떤 기술혁신이나 산업혁신도 밟아온 길은 이와 같다.

우리나라 주요 수출 효자품은 반도체, 휴대폰, 자동차, 조선, 철강 등이다. 기술 개발과 도입 초기에는 대단히 어렵고 힘든 과정을 겪었지만, 피나는 노력의 결과로 한 나라를 먹여 살리는 핵심 산업이 되었다. 물론 그 수혜자는 대다수 고객들, 국민들이다. 나아가 글로벌 시대, 해외시장의 고객들도 주요 수혜자가 된다.

중요한 점은 어떤 기술이나 산업도 도입․성장기를 거친 후 적절한 시점에 혁신을 이뤄내지 못하면, 뒤처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6백여 년 전, 문익점이 들여온 목화씨가 그렇다. 도입과 더불어 최초의 혁신이 이루어진 다음, 지속혁신을 이뤄내지 못했을 때의 처참한 결과를 잘 보여준다.

지금 우리가 문익점과 그가 가져온 씨앗(Seed)에 주목하고 집중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목화 도입을 기점으로 이후 6백여 년의 시간을 꿰면, 오늘날 우리가 무엇을 해야 생존하고 번영할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혁신의 결과는 또 다른 혁신이어야 한다. 이런 이유로 역사는 경영의 산 교육장이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이 역사와 경영이 맞물리는 접점이다. 이것은 또 미래 경영을 위한 열쇠가 된다.


문익점이 들여온 목화씨는 하나의 단순한 농작물의 씨앗이 아닌, 모든 산업의 패러다임을 전환시킨 ‘혁신과 창조의 원천 씨앗(Innovative and Creative the Original Seed)’이었다. 그러기에 우리는 지금 한 알의 씨앗에서부터 기업의 과제이자 국가담론인 생존과 번영을 위한 혁신이야기를 풀어나가고자 한다. 생존조건은 여기서부터 마련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문익점의 목화씨에는 수많은 피땀이 어려 있고, 혁신의 몸부림이 배어 있다. 또한 사명감과 애정이 녹아 있다. 원나라 사행(使行) 길에 눈여겨보고, 비밀리에 들여온 목화씨는 문익점과 그의 장인인 정천익 일족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그들도 예상하지 못한 놀라운 결과를 빚어낸다. 하나의 작은 의지가 의료(衣料)혁명을 일으킨 폭발제가 되었던 것이다.

그 무렵 목화씨는 원나라 해외유출 금지품목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사료(史料)에 따라 다른 주장도 있긴 하다. 지금의 말로 하면 원천 기술, 시료, 소스(source)와 같은 것이다. 문익점은 바로 이 원천 씨앗을 가져옴으로써 우리의 의료생활은 물론 일본에까지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



그가 가져온 목화씨는 단 10알! 그 중 한 알만이 구사일생으로 꽃을 피운다. 그 한 대의 목화 줄기에서 첫해 100알의 씨가 맺히고, 3년에 걸친 집중 재배와 종자 채집의 결과 10년 내 한반도 전역에 보급되기에 이른다. 배양과 재배에 성공하여 보급․확대가 임계치에 도달한 것이다.

그로부터 대략 25년 후인 1392년 조선왕조가 들어서며 목면은 본격적인 재배에 들어가고, 4군 6진의 개척 시 북점화(北點化) 정책에 힘입어 북방 지역의 경제활동과 국토 확장에 크게 이바지한다. 의(衣)생활은 물론 다양한 분야에서 신성장 엔진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이런 일련의 과정은 매우 지난하고, 고된 작업이었다. 초창기에는 우리나라 기후 여건상 서리가 내리지 않는 무상일(無霜日)이 짧고 장마가 길어 재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민․관 협동으로 이루어진 보급 확대로 이전에는 감히 상상치도 못한 혁신을 이뤄냈다. 씨앗의 보급만이 의미 있지 않다. 목화송이에서 씨를 빼내고 이를 다시 자아내는 직기인 씨아, 활, 물레, 가락, 날틀 같은 면직기구가 고안․제작됨으로써 섬유혁명은 폭발적으로 확산된다. 이때의 의료혁명을 훗날의 산업혁명에 견주어보아도 결코 손색없다. 오히려 더 원천에 가깝다.

지금이야 의료생활에 아무런 어려움도 느끼지 않지만, 불과 1백 년 전만 해도 집집마다 무명옷을 손수 만들어 입었다. 무명은 백성들의 옷과 이불이 되었고, 목화씨로 짠 기름은 면실유가 되었다. 또한 목화줄기는 사랑방 문화를 만들어내 우리만의 훈훈한 문화콘텐츠를 형성해왔다. 나아가 목화는 우리 민족을 ‘백의민족’으로 불리게 했다. 문화적 상징 심벌이 되었으며 민족공동체를 이룬 산물이 되었다.

목화 전래 후 목화씨와 방직기술은 다시 일본에 전파되어 일본의 의료생활은 물론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목면이 전래되기 전, 일본의 서민들은 추위에 처참한 고통을 겪어야 했다. 그러다 목화 도입 후 의생활이 획기적으로 개선되자, 생활과 경제에 안정을 꾀할 수 있게 된다. 한편, 임진왜란 때에는 화승총의 심지나 선박의 돛 등으로 쓰이며 오히려 조선 침략의 도구로 사용된다. 그뿐만이 아니다. 훗날 개항을 전후로 한 시기에 급속도로 발전한 일본의 방직기술은 오히려 조선 면업을 초토화시켜버리는 결과를 가져온다. 조선은 원료 공급기지와 소비지로 전락하고, 제2차 세계대전 동안에는 병참기지화되고 만다. 두 나라의 운명이 뒤바뀐 것이다.

일본에 목화가 전래되고, 그 후 일련의 변천사에서 등장하는 기업이 토요타자동차의 전신인 토요타자동직기주식회사이다. 이 회사의 창업자인 토요다 사키치(豊田佐吉)는 실로 탁월한 엔지니어였다. 그는 평생 직기 개발에 힘써 인력직기를 동력직기로, 동력직기를 다시 자동직기로 발전시키고, 또 평면직기에서 환상(環狀)직기를 개발해내며 자동직기 혁신에 평생을 바친다. 혁신적인 발전을 이뤄낸 토요타는 마침내 산업의 패러다임 전환기에 토요타자동차를 출범시킨다.



토요타생산방식(TPS, Toyota Production System)으로 잘 알려진 1백 년간의 생산성 향상을 위한 혁신적 노력은 토요타이즘(Toyota-ism)이란 말을 만들어내며, 전 세계 기업의 벤치마킹 대상이 된다. 현재 토요타는 매출 180조 원에, 10조 원 이상의 이익을 내며 ‘지속성장 가능기업’으로 평가받고 있다. (2009년 이후 토요타 리콜 사태는 토요타가 향후 어떤 혁신을 이뤄낼지 가늠자가 된다.)

문익점 자신이 직접 전한 것은 아니지만, 일본 목면이 조선으로부터 전래된 것은 부정키 어렵다. 우리는 선도자 역할을 했으나, 그 덕을 톡톡히 본 것은 일본이었다. 일본은 조선 목면을 받아들여 지속적으로 혁신시킨 반면, 안타깝게도 우리는 도입 초기의 발전을 근대에까지 이어나가지 못했다. 결국 가내수공업에 머문 조선 면업은 끝내 일본 면방직업의 식민지가 되고 만다. 일본은 조선의 목화를 받아들이고, 종자개량을 통해 선험자의 경험과 지식을 뛰어넘는 성과를 낸다. 이 과정에서 혁신의 릴레이 현상이 벌어지고, 산업 전환이 이뤄지며, 토요타는 자동차산업으로 환골탈태했던 것이다.

일본 나고야에 위치한 토요타산업기술기념관에는 방적기 등 일본 기계공업의 역사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전시관이 자리 잡고 있다. 토요타자동차의 발전 과정도 한눈에 볼 수 있다. 토요타이즘이 확산되면서 한국에서도 많은 기업인들이 이곳을 견학한다. 하지만 생산성 향상이나 효율성 차원의 벤치마킹을 넘어, 오늘날 한국의 경영자들은 목화씨 한 알을 놓고 깊은 반성의 시간을 가져야 할 것이다. 토요타 1백 년 역사가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가 우리의 생존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지속혁신의 노력 없이는 곧 뒤처지고, 잊히고 만다. 또한 개인이나 기업, 국가 차원의 혁신적 노력 없이 발전을 기대할 수도 없다. 문익점 시대의 탁월한 성과는 21세기 우리의 생존과 직결되어 있다. 문익점 시대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혁신과 도전은 절대 멈춰서는 안 될 것이다.
ⓒ전경일, <더 씨드 : 생존을 위한 성장의 씨앗>

역사상 “레오나르도 다 빈치만큼 평생 ‘왜’로 일관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내가 상상하는 레오나르도는 ‘페르케, 페르케, 페르케‘하고 혼자 중얼거리며 방 안을 오락가락하는 모습이다. ’페르케(perche)‘는 이탈리어어로 ’왜‘라는 뜻이다. 레오나르도는 만능인으로 불렸지만, 이것은 뭐든지 잘하는 사람이라는 뜻은 아니다. 그보다는 ’왜‘를 해명하는 방식이다. 어떤 경우에는 회화가 적합했고, 또 다른 경우에는 인체 해부가 가장 적절한 수단이었기 때문에 다방면에 손을 대서, 결과적으로 만능인이 되어 버린 것.”으로 볼 수 있다.


다 빈치에 대한 시오노 나나미의 이 같은 분석만큼 정곡을 찌른 통찰은 없을 것이다. 이탈리아에 다 빈치가 있다면, 우리에게는 세종과 그 벗들이 있다. 세종시대의 풍부한 상상력은 바로 통섭에서 나왔다. 그 시대의 창조적 기풍은 가히 혁명적이었다. 거의 전 분야에서의 기술적, 문화적 통섭을 이뤄내며 창조시대를 열어젖혔다. 그들은 어떻게 해서 이 엄청난 일을 해낼 수 있었을까?

단연코 국왕인 세종 자신이 창조적 천재상을 구현했다. 세종은 국가의 흥망(興亡), 군신(君臣)의 사정(邪正), 정교(政敎), 풍속(風俗), 외환(外患), 윤도(倫道) 등 유교적 철학원리에 입각해 국정을 운영한 것은 물론, 수학, 음운학, 음악, 천문학 등 당대 전 학문분야에서 르네상스형 만능인이었다. 조선 초의 지식 대혁명은 국가경영자의 창조적 역량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국왕이 이렇듯 창조적이다 보니, 당시 요구됐던 인재상 또한 언필칭 크로스 오버형이었다. 이 시기 세종과 더불어 창조시대를 열어 나간 천재들, 예컨대, 장영실, 정초, 이천, 남급, 신숙주, 박연 등은 대표적인 통섭형 인물에 해당된다. 이들 모두 세종과 더불어 앞선 시대를 이끌어 나간 특정 분야에 한정되지 않은 초영역 인재들이었다.


예컨대 장영실은 천문 지리, 천문 관측 및 수학적 재능이 풍부했고, 당시 최첨단의 이슬람 과학기술에 정통했다. 15세기 세계에서 최첨단이었던 초정밀 자동 물시계인 <자격루(自擊漏)>와 <옥루((玉漏))>를 발명하고, <측우기(測雨器)>, <해시계>, <대간의(大簡儀)>ㆍ<소간의(小簡儀)> 및 기타 기계건축과학 분야에서 놀라운 개발을 해냈다.


장영실이 개발한 <간의(簡儀)>는 갈릴레이의 망원경이 나오기 전까지 가장 정밀한 관측기구였다. 그는 과학기기는 물론이고, 악기 제작 분야에서도 정밀한 측정과 제작의 역량을 발휘해 500여 매의 편경이 각기의 정해진 음정을 맞추도록 하는데 탁월한 성과를 드러낸다. 이런 그의 공학적 지식과 경험은 당시
30만 명이 투입된 초대형 토목 공사인 도성성곽수축공사에서 일획을 긋는다. 과학 기기를 발명해 낸 것뿐만 아니라, 그가 참여한 조선 초 지상 최대의 건설토목공사는 그의 영역을 뛰어 넘은 천재성이 발휘된다. 이때의 도성성곽수축공사는 당대 최고의 지성들이 참여한 국책 프로젝트였다. 정인지ㆍ정초 등이 고전을 조사하고, 이천ㆍ장영실 등이 그 제작을 감독했다. 또한 <자격루> 개발시에 장영실은 이천ㆍ김조 등과 머리를 맞대고 과학적 역량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그가 이 같은 업적을 낼 수 있었던 배경은 폭넓은 지적경험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정초는 어떨까? 그는 조선 농업의 생산성 증대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농사직설(農事直設)》을 변효문과 더불어 편찬한 것은 물론, 금속 활자인 <경자자(
庚子字)> 제작에까지 뛰어들어 탁월한 결과를 도출해 낸다. 군졸 수백 명을 한번 보고 다 기억했을 정도로 놀라운 기억력을 지닌 그는 농업과 금속학이라는 영역을 뛰어 넘어 통섭의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남급은 제기(祭器)주조 및 주전소(鑄錢所) 감독을 맡았고, 주자(鑄字)의 일을 맡아 성공시켰다. 또한 활자제조 및 인쇄분야에서 혁신적인 성과를 낸 명실공히 기기 제작 분야의 실무 전문가였다. 그들은 십 수 년간의 연구 끝에 새로운 자판을 만드는데 성공하여 활자 주조술과 활판법을 혁신시킨다. 이에 따라 세종시대 지식혁명의 핵심도구인 갑인자는 1434년 4월부터 9월까지 20여만개가 주조되어《동국통감(東國通鑑)》등 학술서의 대대적 보급에 기여하게 된다. 이 무렵, 조선의 국영인쇄소에는 150여명의 직인들이 일하고 있었는데, 인쇄공정에 따라 목판 작자장(作字匠), 활자주조를 맡은 주장(鑄匠), 인쇄담당 인출장(印出匠), 교정장(校正匠), 균자장(均字匠), 제본장(製本匠) 등으로 나눠어졌다. 유럽이 18세기 중엽에 이르러 채 40명이 안되는 인쇄소가 있었던 것에 비해 세종시대의 인쇄혁명은 가히 3세기나 앞선 선진성을 드러냈던 것이다.


<갑인자>
1437년 갑인자로 찍은자치통감강목. 청동활자의 정밀한 규격화를 이뤄내며 세종시대 조선활자의 표준화·규격화를 통한 기술혁신의 결정판으로 불린다. 이 활자는 목판 인쇄를 주류로 하는 중국의 기술적 한계를 뛰어 넘은 것으로, 16~17세기 일본 및 중국의 청동활자 인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이 활자는 두 종류 20만자로, 당시 기술 과학자들이 총동원된 국가적 프로젝트였다. 세종시대 청동활자를 통한 인쇄는 양과 질 면에서 당시 세계 최고·최대 수준으로써 동북아 문화를 크게 향상시켰다. 활자 혁신은 조선화포(세종 27년, 1445년) 제작시 원천기술로 작용하며, 나아가 민간에 놋그릇이 급속히 보급되는 계기가 된다. 성공 프로젝트를 통한 지식과 혁신의 확대재생산이 산업 전 분야에 걸쳐 나타난 셈이다. (참고: 손보기, 세종시대의 인쇄 출판, 『세종문화사대계 제2집 총론편, 세종대왕기념사업회, 2000, 85~232쪽.)

이천의 경우에도 대마도 정벌 시 원정용 군선 개발 사업에 참여하였고, 원정 부대와 더불어 직접 참전했다. 또한 청동활자인 경자(更子)·갑인자(甲寅字)를 개발해 내는 것은 물론, 음악 분야에서 이론 분야를 세우고 악기를 만들었다. 악기 개발에는 그 외에 당대의 초영역 인재들인 박연ㆍ맹사성ㆍ남급ㆍ정양ㆍ장영실 등이 공동 참여했다. 이 무렵에 대략 200여개의 악기가 개발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어 화포제작을 비롯, 환도(還刀)와 창 제작 체계의 정비와 조선(造船) 체계 정비에도 크게 기여했다. 나아가 도량형을 통일해 1,500개의 정확한 저울을 만들어 낸다. 이는 정교한 금속공예와 주조법에 뛰어난 역량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게다가 정초는 장영실, 김빈 등과 각고의 노력 끝에 <대간의>와 <소간의> 등을 건립했으며, <해시계>, <자격루>, <옥루>, <혼상의> 제작에도 깊이 관여하였다. 가히 음악, 기계공학, 조선, 무기, 활자 등 다방면에 걸쳐 두루 그 역량이 미쳤던 것이다.

신숙주의 경우에는《훈민정음》창제를 위해 음운학적 역량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그는 중국어ㆍ일본어 등에 능통하였으며, 외교가ㆍ시인ㆍ정치가 및 국방 전략가 등의 임무를 두루두루 수행했다. 천하 최고의 ‘음재(音才)’인 박연의 경우에는 음의 기준을 새로이 세웠는 바, 그는 곡식의 낱알인 기장 100알을 쌓아 올린 길이를 황종척 1척으로 정해 음의 표준 창시자로 부상했다. 박연과 관련되어 “앉으나 누우나 늘 가슴 사이에 두 손을 포개고 악기를 다루는 시늉을 하고 입 속으로는 율려(12율) 소리를 내곤 하였다.”는 일화는 당대 천재적 인재들의 노력이 얼마나 치열했는가를 잘 보여준다. 이런 영역을 뛰어 넘는 인재들에 의해 세종시대의 찬란한 문물은 드디어 어둠 속에서 나와 빛을 발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세종시대의 초영역 인재들은 어떻게 해서 크로스 오버형 지식을 쌓고, 강화해 나갈 수 있었을까? 더구나 핵심인재를 뛰어 넘어 초영역 슈퍼인재로 육성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해답은 다름 아닌, ‘학습의 힘’에 있다. 임금과 신하가 매일 진행하는 학술세미나인 경연(經筵)을 비롯해, 변계량의 기획 작품인 ‘사가독서제(賜暇讀書制)’의 효과를 톡톡히 본 셈이다. 사가독서제란, 독서를 주어 복수전공제를 실시하도록 한 것이었다. 기간 중 학자들은 한두 가지 연구주제를 주어 전문적으로 파고들게 했다. 그 예로 권채에게 주어진 과제는 《대학》과 《중용》이었는데, 그는 책에 붙어 있는 주석까지 철저히 파고들어 확실하게 깨닫는데 꼬박 3년이나 파고들어야 했다.

집현전이란 지식탱크는 지식을 모으고 엮는데 주요한 ‘앎틀’이었고, 세종시대의 문풍이 드높아지게 된 하나의 이유이기도 하다. 이 시기 인재들은 전문지식을 더욱 고양시키고, 다방면의 지식을 통섭해 내기 위해 경학ㆍ사학ㆍ과학ㆍ음악ㆍ의학ㆍ천문ㆍ지리ㆍ의약ㆍ복서ㆍ문자학ㆍ음운학 등 각 분야의 학문을 연구했다. 즉, 세종시대의 정치철학인 ‘유학(儒學)’ 이념을 실현시킬 목적으로 실물 분야에 한 두 가지씩 몰입토록 한 것이다. 이를테면 철학을 배경으로 한 인문학(요즘 유행하는 말로 문사철)이 만개했던 셈이다. 의심할 바 없이 이러한 학문적 성취는 훗날《훈민정음》, <정대업>ㆍ<보태평>, 각종 과학 및 IT기술, 의학서적의 발간 등으로 확산되고 이어지며, 경계를 뛰어 넘어 뭉치고 흩어지며 세종시대의 문화 대회전을 여는 지적 기반이 된다. 이것이 한국형 르네상스 요컨데, 세종 자신이 꿈꾸었던 극도로 풍요롭고 평등한 경지인 ‘대풍평(大豊平)의 세상’을 여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게 되는 것이다. 지금의 우리 눈으로도 그 시대에는 통섭을 통해 최고의 경영단계를 이뤄냈던 것이다.

이탈리아의 르네상스는 앞서 시오노 나나미가 언급한 바와 같이 ’왜‘를 찾는 적합한 방식을 통해 이루어진다. 반면에 세종시기 르네상스는 굳건한 위민(爲民)철학의 실천과정에서 크게 부각된다. 다수 인민을 위한 고양된 정치철학의 결과물로 창조가 채택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 같은 지식과 경험은 어떻게 해서 하나가 되어 폭발적인 지적 혁명을 이뤄낼 수 있었을까? 여기에는 각 학문 영역을 연결하고, 뛰어넘고, 파괴까지 하는 학습이 새로운 창조 방식으로 받아들여진 게 주효했다. 집현전 인재들의 학제간 연구에는 통섭형 사고가 축을 이루고, 그들은 세종의 정치철학을 수반하는 방식으로 왜 사물의 이치가 그런지 묻고 대답했다. 실마리를 잡은 듯한 것에 대해서는 실험을 통해 발견해 냈고, 피나는 노력 끝에 놀라운 성과를 이뤄냈다. 일테면, 윤사웅은 세종과 더불어 서운관 천문대에서 밤하늘을 우러러보며 천문의 수학적 원리를 상상했을 거고, 그러기에 조선에 맞는 천문, 역학을 생각해 냈을 것은 너무나 자명하다.

이런 학습풍토와 노력이 작용해 세종 시대의 지식은 심화되어 갔다. 거의 모든 분야에서 집적된 지식, 경험을 상호간에 연결해 지식의 수레를 이루고, 창조의 바퀴가 굴러가게 했다. 그 같은 창조시대의 개막을 국왕으로서 세종은 전폭적으로 지원하며 지식과 경험의 궤(軌)를 꿴 것이다. 이 바퀴를 움직이는 궤는 유교적 철학 원리로 법도(法度)에 맞는 '경영의 길'이었다. 한편, 이 같은 굴대는 새로운 시대로 힘차게 굴러가는 창조의 완성을 뜻하기도 했다. 창조의 바퀴를 굴려 역사의 바퀴를 진전시키고자 한 그 시대 초영역 인재들의 노력은 오늘날 경영자에게 멈추지 않은 창조방식의 전형으로 보여질 만하다.

이탈리아 르네상스나 세종시대처럼 오늘날 기업들이 창조경영을 이루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은 창의성, 전문성, 다양성, 개방성, 유연성과 같은 보다 창의적인 기풍이다. 나아가 이들 혁신 요소간의 결합이다. 그간 우리 사회는 무엇 때문에 역사적으로 출중했던 창조적 경험과 그 시대의 성취를 묻어두고 있었을까? 여기에 오랜 창조의 암흑으로써 세종시대와 현재의 간극이(영정조 시기와 같은 특정 시점은 제외하고라도) 놓여있다.

창조가 풍미하는 시대와 사회는 영역을 뛰어 넘는 통합적 사고와 실천력을 요구 한다. 지금까지 한국 기업에 팽배한 순혈주의, 균질한 인재, 근면성, 통제, 폐쇄성과 같은 것들은 21세기 생존방식과는 한참 거리가 멀다. 혁신을 부르짖으면 어느 조직이건 내부의 저항과 기득권층의 교묘한 이해가 개입돼 자칫 퇴색될 수 있으나, 창조에는 눈 가리고 아웅 할 수 조차 없다. 세상에 새로운 것은 새로울 것들뿐이다. 남다른 생각과 행동만이 미래를 위한 경영으로 다가올 것은 자명하다. 오늘날 우리 기업에서 융합형 인재, 창조적 실험이 각별히 주목받고 있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전경일, <초영역 인재>


열악한 경영환경은 해녀들에게 오히려 적극적인 개척 동인이 된다


뭍의 사람들은 출퇴근 시간에 맞춰 바삐 직장으로 향한다. 바다를 직장으로 삼는 해녀들에게도 출퇴근이란 게 있을까? 물론이다. 해녀들도 출퇴근을 한다. 출퇴근만 하는 게 아니라, 휴가도 있다. 다만 다른 점은 작업환경이 뭍 아닌, 바다라는 점이다. 하루 일과는 바다 가장자리에서 시작되고 마무리 된다. 그런 까닭에 물결을 타고 바다로 나가고 다시 갯가로 들어오는 과정은 해녀들에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 사이가 일을 위한 시간이며, 생명을 담보로 한 시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해녀 코칭엔 바다로 나아가고 뭍으로 들어오는 과정이 반드시 포함된다. 바다로 들고 나는 그 사이에 본격적인 ‘업무’인 채취활동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해녀들은 해변과 바다를 오가며 변화무쌍한 자연 앞에 적응하는 훈련수위를 높여 나간다. 그러다 원숙한 역량을 발휘할 때쯤이면 자연스럽게 본격적인 생산 활동에 들어간다.

해녀들은 두 말할 나위 없이 물에서 작업한다. 물결 위에 몸을 싣고 하루 업무에 임한다. 따라서 물결 타는 기술은 대단히 중요하다. 바다에서 체력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사용하느냐는 것은 물질성과의 관건이다. 기업으로 말하자면, 본격적인 생산 활동을 시작하기 전의 워밍업이 여기에 해당된다. 이 때 너무 많은 에너지를 쓰지 않도록 철저하게 자원효율 시스템을 가동한다. 마치 기러기 떼가 기류를 타고 이동하듯, 해녀들은 작업하는 바다에 도착할 때까지 물결을 타고 이동한다. 물결은 견뎌 내야할 도전이자, 역설적이게도 의지해야 할 버팀목이기도 하다.

작업 장소로 가는 동안 헤엄을 치면서 체력을 소모해 버리면 그만큼 해산물 채취에 사용할 체력이 떨어진다. 따라서 ‘기러기 법칙’처럼 최소한의 저항을 받고자 한다. 이는 뭍으로 돌아올 때도 마찬가지. 지친 몸을 물결에 싣고 들어온다. 이런 ‘물결타기’를 통해 자연의 힘으로 뭍까지 나온다. 그래서 물질은 순응이자, 순리를 따르는 것이다. 만일 물결타기가 서툴다면 금세 파김치가 되어 버려 물질을 다녀와서 다른 일을 할 수 없다. 물결을 어떻게 타느냐는 과정에서부터 해녀 소질은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셈이다. 물론 생산성도 결정 난다.

해녀로서의 삶은 녹록한 게 아니다. 무엇보다도 절박하다. 제주 해녀의 삶은 역사적으로 모질고, 험난하기만 했다. 바람 많고 물 많은 제주라는 황량한 삶의 조건이 그럴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어디 농사지을 땅이라도 넉넉한 곳이던가. 이런 척박한 삶의 조건이 어렸을 때부터 빠르게 물질을 익혀 나가는 요인이 됐다. 열악한 경영환경이 오히려 적극적인 개척 동인(動因)이 됐다는 점에서 현실을 불평하는 사람들과는 전혀 다르다. 자원 없는 우리나라가 세계 교역 7위가 된 것도 이와 같은 이유일 게 분명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전 세계에서 1등 하는 상품을 173여개나 갖고 있다. 철강하나 제대로 나오지 않는 나라가 조선 1위국이며, 반도체 산업 후발주자이기만 했던 나라가 D램 생산 1위 국가이다. 어디 그뿐인가? 석유 자원 하나 없는 나라가 석유제품으로 세계시장을 뚫어대고 있다. 자원이 없으면, 피땀으로 만들어 낸다, 자원은 머리와 용기라는 철학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해녀의 삶도 마찬가지다.

어린 소녀는 빠르면 12살, 늦어도 15살이 될 때쯤이면 어느덧 정식 해녀가 된다. 성인식을 하듯 정식 해녀가 되는 날은 그동안 멘토링과 코칭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 준 어머니나 이모와 함께 바다로 간다. 이제 정식 해녀가 되기 위한 최종 점검 과정이 남아 있다. 어른들 틈에 낀 소녀는 능력을 드러내기 위해 열심히 자맥질한다. 하지만 산전수전 다 겪은 고수들이 보기엔 그저 안쓰럽기만 하다. 처음 하는 물질에서 좋은 결과를 기대하기란 아무래도 무리다. 게다가 어른들과 함께 하는 물질이라 마치 첫 출근한 신입사원처럼 바짝 긴장되고 정신없이 바쁘기만 하다.

열심히 물질을 했으나, 텅 빈 망사리를 들고 나올 때면 누구든 기죽기 마련이다. 풀 죽은 어린 해녀가 물 밖으로 나오면 코치인 어머니는 이때를 놓치지 않고 물가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자신이 채취한 우뭇가사리나 소라 따위를 덜어준다. 이걸 ‘게석’이라고 부른다. 자그마한 기프트(gift)를 통해 파이팅해 주는 것이다. 해녀사회에 이어져 내려온 오랜 전통적 배려 문화다.

‘게석’은 초보 해녀에게만 주어지는 것일까? 만일 곁에서 물질하는 할머니 해녀가 있으면 ‘망사리’에 미역을 한 줌을 넣어주거나 전복을 한 개 넣어 준다. 해변엔 저절로 훈훈한 정이 퍼져 나간다. 어른 해녀들은 초보 해녀에게 훈훈한 덕담도 건넨다. 인생의 간난고초를 다 겪은 베테랑들이 보기에 얼마나 귀엽고, 한편으론 안쓰럽기만 한 소녀 해녀인가. 등을 두드려주며 위로해 줄만 하다.

“전복도 한 짐, 구젱기도 한 짐 허는 대상군이 뒈라이.”

바다에서 가장 귀하고 값비싼 해산물은 전복이다. 이 전복을 한 짐이나 캐고, 구젱이도 한 짐 가득 채취하는 으뜸 해녀인 대상군(大上軍)이 되라는 격려의 말이다. 마치 기러기들이 서로 울며 용기를 북돋워주듯, 동기부여해 주는 해녀들만의 방식이다. 기업으로 얘기하자면, 이제 갓 사회 초년병이 된 신입사원이 기죽지 않도록 여러 선배들이 용기를 북돋아 주는 것과 같다.

제주 해녀들은 할머니, 어머니, 어린 딸, 이렇게 3대가 아우러져 물질을 한다. 서로간의 동병상련이랄까. 여성으로서 험난한 물질을 하며 해녀들은 이렇게 팀웍을 쌓아나가고, 거칠고 힘겨운 삶에서도 희망을 키워 나간다. 물질 공동체는 바로 이런 배려와 팀웍에서 파도를 헤쳐 나갈 힘을 얻는다. 물질을 끝내고 돌아오는 바다는 언제나 출렁이며 해녀를 부른다.
ⓒ전경일, <경영 리더라면 해녀처럼>


인문경영/CEO산에서 경영을 배우다 | Posted by 전경일 2010/02/22 13:43

북한산에서

올 해의 마지막 눈을 볼 것 같은 겨울 북한산행을 다녀왔습니다. 앞에 보이는 게 숨은 벽 능선인데요, 우이동 쪽인 동남쪽에선 안보인다고 해서 숨은 벽이라고 하죠. 병풍처럼 치둘러선 능선을 보며, 겨울산의 매력에 푹 빠져들었습니다. 이제 머잖아 잔설마저 사그러들면 봄이 점령할테고, 그러면 겨울의 요정들은 한 동안 북극으로 사라졌다 다시 오겠지요. 산은 죽은듯 조용하지만, 곳곳에 봄을 숨겨두고 있습니다. 얼음 밑으론 눈 녹은 물이 흘러내립니다. 세월이 이렇듯 가고, 한 인생이 또 다시 다음 계절을 맞이합니다. 올 핸 당차게 글을 써야 할 것이로되, 인간의 진면목을 드러내는 글잡이에 가늠없는 붓을 일으켜 세워야 할터인데...

 ⓒ전경일

 


 

제가 오래 전 외국의 한 방송국에서 프로듀셔 보조 일을 할 때였습니다. 미국 각지에서 선발된 인턴사원들이 있었는데, 연수 기간이 끝나던 날, 그들에게는 각자의 소감을 밝히는 시간이 주어졌습니다. 무엇을 배웠는지 발표해 보라고 하니까, 한 여학생이 일어나 불평에 가득 찬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저는 이제 복사도 할 수 있고, 심부름도 잘 하고, 잡무도 잘 처리하죠. 여기서 배운 건 이게 다죠.”

여학생은 같은 인턴사원들의 동의를 구하는 듯 주변을 둘러보며 냉소적으로 말했습니다. 질문을 했던 관리자는 그녀의 얘기를 듣는 순간 당황한 듯하더니 잠시 후 이렇게 대꾸했습다.

“그렇습니다. 그건 여기 들어온 누구건 거쳐 간 프로세스죠. 보람 없고, 인내심에 한계를 보이게 되지만, 적어도 그 일을 통해 자기를 참는 법은 배웠을 겁니다. 카메라를 들고 전쟁터를 누비거나, 파도가 출렁이는 먼 바다로 나가 똥물을 토해내며 몸집이 10톤이나 되는 지상에서 가장 큰 흰수염 고래를 찍을 때가 되어서야 이런 인내심을 배우려 한다면 그땐 너무 늦을 테니까요.”

관리 직원의 말에 냉소적 분위기는 한순간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습니다. 저는 그때 프로근성이라는 것, 일에 대한 태도라는 것, 꾸준한 노력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보기에는 하찮아 보일지라도 그 일을 대하는 태도와 그 직원을 결코 떼어 놓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일에 대해 어떤 자기 관점을 갖고 있습니까? 대부분은 회사의 기획부서나 재무조정실 같이 뭔가 탑의 의사결정을 이끌어 내는 일이 가장 폼 나고 힘 센 일로 인지하곤 합니다. 그러나 정작 일은 자신이 어떤 보람을 느끼느냐에 따라 가치가 달라진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증명해 보이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어떤 신념을 갖고 있는지요?

제 주변 이야기를 하자면, 제가 다니는 회사 화장실을 도맡아 청소하는 용역회사 아주머니는 자신의 깔끔한 성격 때문에 세면대에서부터 변기까지 청소를 마무리 하고 나면 직원휴게소에서 커피를 마시며 하루의 보람을 느낍니다. 그 분이 그렇게 느끼는 것은 하루 일을 통해 자신의 시간을 완결했기 때문입니다. 그 일이 하찮은가, 중대한가 여부가 아닙니다. 시작과 끝을 본 하루의 완결판이기에 느끼는 만족감인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하는 일에서 만족감을 느낄까요? 이런 느낌은 나중에라도 생기게 되나요?

우리는 일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 기존의 시각을 재조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돈을 많이 버는, 누군가에게 지시하고 피드백을 받아 처리하는 일만이 존귀한 것이 아닙니다. 제 아무리 화려해 보이는 일일지라도 자신에게 만족감을 주지 못하는 일은 그 일 때문에 불행해 지기만 합니다. 일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사랑하는 연습을 우선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일을 하는 사람의 눈빛과 표정은 아름답습니다. 자신이 하는 일에 긍지를 느끼는 사람의 몸짓은 남들조차 감동시키기에 충분합니다.

어느 일을 하느냐가 아니라, 내가 하는 일이 나를 만든다는 생각 하에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높이며 재창조해 나가야 합니다. 일상적인 일의 굴레에 빠져 매일 같은 일을 반복하는 것은 결코 창조적이지 않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정신을 살찌우는 일이 아닙니다. 제가 아는 한 지인은 국내 내노라는 기업의 구조본에서 그룹의 재무 파트를 송두리채 주물럭거리는 분입니다. 누구나 부러워할만한 그 일에 대해 그 분은 오히려 죽을 맛이라고 푸념합니다. ‘내가 만지는 돈이 전부 남의 돈‘이라는 생각이 들 때면 한낱 월급쟁이인 자신이 그렇게 초라해 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루 빨리 창업해야지.‘하는 생각 밖에 들지 않는다고 그는 푸념을 늘어놓습니다. 게다가 오너 일가에서 쓰는 돈을 보면, 왠지 자신도 모르게 정말 없이 사는 빈민들에게 미안한 마음만 들어 당장이라도 그만두고 싶을 지경이랍니다. 그가 맡고 있는 일이 그에게 행복을 주고 있을까요? 그는 스스로 ’불행의 품을 팔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일이 자신을 어떻게 만들어 가고 있는지 보셨을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하는 일은 어떤 것입니까? 여러분은 크든 작든 일에서 만족을 느낍니까? 불만족스러운 일을 통한 하루의 시간이 8시간이면, 1년이면 2,112 시간을 직장에서 불행하게 보내는 것이며, 10년이면 2만1천1백 시간을 불만족 속에서 지내는 것입니다. 라디오를 틀어 놓고 흥얼거리며 구두를 닦는 여러분 빌딩 앞의 신기료 아저씨보다 여러분이 과연 행복할까요?

우리는 일에서 얻어야 할 것의 본질과 우리의 허상을 명확히 구별해야 합니다. 일이 나를 잡아먹는지, 나를 만들어 가고 있는지 냉철하게 구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얼마 전, 어떤 신입사원과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는데 친구 중에 금융회사에 들어간 동기는 올해 펀드가 대박 터지며 자신이 받는 연봉의 두 배나 되는 돈을 벌어갔다고 하더군요. 한편으로는 부러운 면도 있을테지만, 그 사원은 현명하게도 “아마도 제 친구는 이제 곧 집안사람들 다 끌어다가 펀드에 가입시켜야 할 테고, 곧 죽을상이 될 거예요.”라며 말을 끝맺었습니다. 슬기로움을 지닌 사원인 것이죠.

우리는 일 속에서 자신을 잃기 쉽습니다. 일은 우리에게 경제적 대가를 부여해 주지만, 때로는 유혹의 길로 빠져들게도 합니다. 제 경험상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일은 자신을 키우는 일입니다. 자신을 부단히도 단련시키고, 한계를 두지 않고 키워내며, 인생과 일의 보람을 알게 하는 것이야 말로 가장 훌륭한 일 아닐까요?

여러분의 직장은 어떤가요? 여러분이 지금 하는 일은 평생 걸고 픈 일인가요? 우리가 너무 늦게 이 질문을 하면, 그때는 이미 그 좋은 일들을 더 이상 해 낼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나를 제대로 만들어 가는 일을 찾고 거기에 신명을 불어 넣는 건 지금부터 해야 할 일입니다.
ⓒ전경일, <20대를 위한 세상공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