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렌체의 개방적인 문화가 낳은 르네상스와 미켈란젤로

 

이탈리아에서 1300~1500년의 시기는 다음 두 측면에서 성공적인 시기로 평가된다. 첫 번째 요인은 경제적 호황이다. 이로 인해 생겨난 세속적인 생활양식과 기존의 크리스트교 신앙 간의 부조화는 이탈리아 사회 전반에 적지 않은 갈등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 같은 갈등이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이는 두 번째 요인으로 충분히 입증된다. , 옛 믿음과 새로운 생활양식을 상호 화해시키기 위해 이교적인 고대의 문학과 미술을 차용한 것이다. 바야흐로 고전의 부활이 시작되었다. 개방적 태도는 문화 자산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었다.

 

요새처럼 성을 쌓고 그 안에서 폐쇄된 삶을 산 유럽의 다른 귀족 가문들과 달리, 로렌초 데 메디치를 비롯한 피렌체의 부유한 은행 가문과 상인들은 도시 한복판에 화려한 저택을 짓고 살면서 시민들과 격의 없이 어울렸다. 로렌초의 저택은 당대 최고의 학자들과 예술가들이 모이는 사랑방 구실을 했다. 그곳에서는 플라톤의 저작이 라틴어로 옮겨지고, 조각 학교가 열렸으며, 호메로스와 아리스토텔레스 강의를 비롯한 인문학 토론이 매일같이 벌어졌다. 심지어 멸망한 동로마 제국의 학자들을 받아들이고 서적을 수집할 정도에 이르렀던 개방성은 피렌체와 메디치가를 역사에 길이 남을 르네상스의 주역으로 만들었다.

 

미켈란젤로도 로렌초 덕분에 그의 저택에서 공부할 수 있었다. 어린 시절의 그는 그곳의 인문학자들이 벌이는 열띤 토론을 귀담아 들으면서 고대 철학과 기독교를 한 데 묶는 신플라톤주의에 눈을 떴고, 정원에 지천으로 널려 있던 고대 조각들을 관찰하고 모방하면서 자신만의 솜씨를 갈고 닦았다. 미켈란젤로는 평생토록 기존 관념에 속박되지 않고 자유롭게 창작 활동을 펼쳤다. 정치적 반대파에 서 있던 인물일지라도 돈만 지불하면 얼마든지 일을 해 주었고, 늘 이교도적인 요소와 기독교적인 요소를 나란히 인정하였다.

 

그러나 로렌초의 사후 2년 만에 피렌체는 프랑스의 침공을 받았다. 프랑스가 진격해 나간 뒤 생긴 권력 공백을 채운 것은 독실한 수사(修士) 지롤라모 사보나롤라였다. 사보나롤라와 수도원은 수많은 율령을 쏟아 냈다. 시민들에게 금식을 강요하고, 아이들에게 부모의 행동을 감시하게 했으며, 거울, , 그림 등을 모조리 불태웠다. 때마침 흉작과 전염병, 전쟁이 겹쳐 피렌체는 통제 불능의 상황에 빠졌다. 이에 대한 어떤 해결책도 제시하지 못한 사보나롤라는 결국 교황청의 파문장을 받게 되었고 시민들에게도 외면당하다가 이단이란 죄목으로 화형에 처해졌다.

 

사보나롤라가 억압적인 전횡을 휘두르는 동안 미켈란젤로는 꿋꿋이 유연한 작품 세계를 유지했다. 그가 만약 다른 예술가들과 마찬가지로 공방에 가만히 앉아서 주어진 것만 학습했다면 후세에까지 칭송 받는 위대한 대가가 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공방을 빠져나와 피렌체 시내 곳곳을 장식하고 있던 조각과 교회에 걸린 프레스코, 그리고 인문학자들의 저서와 토론을 보면서 가리지 않고 소양을 쌓았기에 그는 걸출한 작품들을 창조할 수 있었다.

 

르네상스 정신은 개방성과 직결된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경영 일선에서 업계에 혁신의 바람을 일으키는 조직은 하나같이 유연하고 개방적인 조직 문화로 창의성을 발휘하고 있다. 더욱이 세계가 하나의 경제 권역으로 통합되고 있는 세계화 시대에는 다양한 가치와 생각을 포용할 수 있는 개방성이 필수적이다. 유연한 조직 문화의 구축이야말로 현대 조직에 활력을 불어넣는 핵심요소인 것이다. ⓒ전경일 인문경영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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