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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경영/나에게 묻는다

새해 첫날이면 일몰을 보러 간다

by 전경일 2012. 12. 28.

새해 첫날이면 일몰을 보러 간다

 

새해 첫날이면 일몰을 보러 갑니다.

남들처럼 부지런하게 전날에 출발해 지리산 노고단이나, 동해안 정동진에서 일출을 맞이하는 것이 아니라, 일몰을 보러 가까운 강화도나 임진강변을 찾습니다. 애들과 아내도 데리고 해지는 광경을 넉넉히 볼수 있는 풍경 좋은 카페나 횟집을 찾습니다. 일몰이 잘 보이는 곳이라면, 새해 첫날을 보내는 방식치고는 멋진 하루겠지요.

내가 일몰을 찾는 건 다른데 있지 않습니다. 해 뜨는 광경은 너무나 찬란해 그 광경 하나만으로도 지난 한 해의 기억이 고스란히 남게 될까봐서 입니다. 장엄한 일출 장면을 맞이하는 것도 부산스러워 보이지만, 해 뜬 아침에 정상을 내려오는 것도 내게는 왠지 어색하게만 느껴집니다.

서해의 일몰은 일출 광경만큼이나 장관입니다. 출렁이는 바다를 어둠으로 잠재우며 수평선 너머로 사라지는 햇 덩어리는 그야말로 자연의 압권입니다. 그 뒤로 떠오르는 푸른 이내며, 밝았던 하루에 대한 오록한 기억하며, 서해는 그래서 멋있습니다. 가장 찬란하게 빛났음으로 이제는 어둠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저 태양은 역사의 순환 원리나 돌고 도는 인생의 원리마저 장엄하게 느끼게 합니다.

일몰 앞에서는 일 년을 계획하는 심정으로 새해를 맞이하지 않고, 일 년을 마무리하는 심정으로 새해를 맞이합니다. 지금 시작하는 한 해를 이미 보낸 지난해로 반성하면서 새롭게 준비한다고나 할까요. 미래를 사는 건, 미래에 가서 지난 과거를 돌아보는 것처럼 사는 것이란 얘기처럼, 혹시 내가 지난 일 년을 어느 한 수라도 잘못 두지나 않았나 돌이켜 보게 됩니다. 그럴 때 나는 반석 위의 기사처럼 되는 것인지 모릅니다. 인생의 한 수 한 수를 두는 기사 말입니다. 그러다보면 어느새 앞으로 다가올 일 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여러 상념이 떠오릅니다. 어려운 일에 임해서는 궁리가 생겨나고, 힘든 일에 대해서는 새로운 각오와 용기가 용솟음칩니다.

올 해도 어김없이 앞으로 다가올 일 년을 지난 일 년처럼 생각하면서 해지는 풍경을 바라봅니다. 우리나라 서해 바다는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이런 아름다운 땅에 유구한 시간 동안 우리와 같은 핏줄의 사람들이 살아왔었다는 사실에 깜짝 놀라게 됩니다. 그들과의 질긴 유대감도 자연스럽게 느끼게 됩니다.

일출을 보러 멀리 가족 여행을 가는 것처럼 폼 나는 건 아니지만, 일몰의 풍경은 일 년을 미리 살고 난 사람처럼 나를 더욱 성숙시켜 줍니다. 휘황찬란하게 뜨는 해가 아닌 지는 해를 바라보며 더욱 겸손해 지도록, 더욱 알곡처럼 인생을 보내도록 기원합니다. 늙으신 부모님과 애들과 아내의 건강, 그리고 나의 발전과 소원성취를 비는 극히 무속적인 바램을 모아보면서, 나는 임진강이나 서해가 바라보이는 강화도에서 새해 첫해의 지는 광경을 바라봅니다. 아마 지금보다 더 나이가 들면, 저도 지는 해처럼 더욱 붉게 타오를 수는 있을런지요. 그것이 늘 궁금하기만 합니다.

 



마침내 나는 지는 해도 바라보게 되었다




퇴근길에 한강을 건너며
이제야 나는 지는 해도 바라보게 되었다


서쪽 하늘 푸른 숲의 요정에게
붉은 비단을 뿌리며 안겨 드는 저 고단한 해도
이젠 아무런 망설임 없이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어디 뜨는 해만 전부인가
뜨고 지는 해의 각별한 본새처럼
오늘 하루해가 뜰 때 환한 얼굴로 직장에 나가고
퇴근길에는 지는 해를 바라보며
버스 정류장 앞에서 애들 장난감도 사 들 수 있는 것이라면
지는 해면 어떤가


수많은 시간을 뜨는 해에 매달려 폐타이어처럼
굴러 왔던 지난 날들을 보내고 지금은 퇴근길,
소주잔에 내 마음은 붉게 익어 간다


그래, 어디 지는 해면 어떤가
헐고 낡은 것이 그리운 내 마음에 뜨고 지는 해


강물은 해묵은 나의 일상을 비워둔 채 말없이 가라앉고
마침내 나는 이제 지는 해도 바라보게 되었다.


헐은 폐타이어처럼 인생이란 순례를 돌고 돈 끝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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