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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 강의/이순신 | 경제전쟁에 승리하라

옥포해전: 경영자라면 태산같이 무거이 하라

by 전경일 2012. 8. 6.

옥포해전: 경영자라면 태산같이 무거이 하라

1592년 4월 13일 부산포에 상륙한 적은 다음 날 오전 전투를 개시해 불과 5시간 만에 정발(鄭撥)이 지키던 부산성이 떨어지자 파죽지세로 북상한다. 경상감사 김수가 4월 20일 이순신에게 공문을 보내 전라수군의 경상도 지역으로의 지원 출격을 조정에 상신했다는 전갈을 급히 보내온다. 왜적선은 500척에 달했지만, 이순신이 동원할 수 있는 함대는 고작 85척에 불과했다. 구름 떼처럼 몰려오는 적들을 맞아 어떻게 싸울 것인가? 이 미지의 싸움에 응하는 장군의 전략은 가장 기본적인 원칙을 준수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수군 병영의 분위기를 일신하고, 실전 훈련을 끊임없는 쌓는 것이었다.

 

수군조련도. 이순신 장군의 23전 23승이라는 무결점의 완벽한 승리 뒤에는 철저하고 고된 훈련이 있었다. 임란 승리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장군은 군대 내 규율의 가치와 전투에서의 협력의 중요성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첫째, 적과의 전투를 앞두고 병사들을 철저하게 훈련시켰고, 장수들이 전투계획을 완전하게 이해하도록 지도했다. 조선수군의 전투능력은 팀 단위로 훈련하고 세부계획을 숙지하는 데서 배가됐다. 장군은 훈련된 군사가 있어야 전투에 이길 수 있다는 믿음을 가졌다.

 

수전은 해상에 흩어져 있는 병력을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예정된 전투 일에 작전지역에 집결시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본격적인 전투를 위한 준비과정이 이것이다. 요동치는 해상의 특수상황은 자연의 불리함을 훈련을 통해 유리하게 바꿀 때라야 승리의 전기를 마련할 수 있다. 장군은 휘하 장수들이 약속된 날짜와 시간에 제대로 모이는 훈련을 거듭 반복했다.

 

‘훈련, 훈련, 훈련···’

 

이순신 진영에서는 매일 같이 실전 같은 훈련이 반복됐다. 장군이 적시(適時)의 시점을 얼마나 중시했는지⟪난중일기⟫를 보면 비인현감 신경징이 제 때에 맞춰 오지 못한 죄로 곤장 20대를 맞았다는 기록이 나온다. 좌조방장과 해남 현령도 같은 죄로 처벌을 받았다.

 

장군은 스스로 모범을 보이면서 군기를 확립하고 고된 훈련을 이끌어 갔다. 학익진법 활용을 위한 노 젓기 및 함대 형성 훈련, 방향전환 훈련도 함께 했다. 각 해전에서 일사불란한 함대 운용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은 이 같은 피나는 훈련 덕분이다.

 

훈련과 함께 승리의 원칙으로 창조적 혁신에 나섰다. 거북선을 선봉으로 한 공격 및 방어 전투법, 화약무기와 함포를 장착한 해상기동전술의 완성, 수군에 의한 육전대 조직, 항만에 집결한 적에 대한 공격전투전법, 다양한 전투서열의 편성 등 풍부한 전법이 포함됐다. 각 전법은 상황에 맞게 변용됐고, 조합되었다.

 

첫 싸움의 기세는 이후 전쟁 판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군사들의 사기 면에서도 그렇고, 작은 성공을 관리함으로써 성공 공식을 계속 써나간다는 선례 차원에서도 그렇다. 생사의 결단을 앞둔 장군의 비장한 각오는 다음의 말에 그대로 드러난다.

 

원컨대 죽음을 불사하고 곧 호랑이의 굴을 바로 두들겨 요망한 기운을 쓸어버림으로써 나라의 부끄러움을 만 분의 일이라도 씻으려 하오니, 성공과 실패, 잘되고 못 되는 것은 신이 미리 헤아릴 바가 아닌가 하옵니다.

 

이는 작전 수행의 최고지휘자로서 최선을 다함으로써 담담히 결과에 응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또한 곧바로 모든 군력을 모아 부산의 왜 적선과 일대 결전(decisive battle)을 벌리겠다는 결의였다. 그날 밤 암구호는 ‘용호(龍虎)’, 복병(伏兵)시 암호는 ‘산수(山水)’였다. 첫 전투인 옥포해전에서 장군은 정확한 상황 판단과 이길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해 두고자 경상도의 지형과 물길에 대해 낱낱이 숙지하고 이미 도상훈련을 끝냈다. 이제는 적과의 한판 승부만이 기다리고 있었다.

 

왜는 파죽지세로 북상하고 있었다. 이들은 일본 전국시대를 거쳐 고도로 단련된 실전 경험이 풍부한 무사들이었다. 충주 탄금대에서 적장 고니시가 이끈 1만8,000명의 일본 제1군에 신립 장군이 맞섰지만, 조선군은 무참히 패배했다. 충주가 무너지자 서울로 향하는 길에는 거칠 것이 없었다. 적의 선봉이 서울로 북상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한강변에 주둔하던 1,000여 명의 조선 군사들은 도망치기에 급급했고, 왕은 급기야 4월 30일 피난길에 오른다. 적은 임란이 발발하고 나서 18일 만에 460km를 주파했고, 왕이 서울을 비워야 할 만큼 전세가 다급해진 것이다. 왕은 몽진 길에 나섰고 무능한 국왕에 항의하는 백성들은 경복궁, 창덕궁에 불을 지르고, 노비문서를 불태웠다. 5월 2일 왜 제1군은 텅 빈 서울에 무혈 입성했다. 외부의 적을 인지하지 못한 내부의 적들과 한심하기 그지없는 선조의 행태가 빚어낸 참담한 결과였다. 그로부터 1년 뒤인 1593년 4월까지 수도 서울은 완전히 적 치하의 공백 상태가 된다.

 

왜군이 서울에 입성하던 날은 장군이 출전을 하루 남긴 때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장군은 육전에서 왕이 이미 서울을 버리고 개성으로 피한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이순신은 옥포, 합포, 적진포 해전까지 승리로 이끈 5월 9일이 되어서야 왕의 몽진 사실을 알았다.

 

뱀의 대가리를 주춤거리게 만들고 돌리게 하려면 꼬리를 잘라내야만 한다. 장군은 5월 4일 새벽 운건과 만나기로 되어 있는 당포 앞바다로 향하며 혹시 숨어 있을지 모를 적 수색에 신중을 기했다. 협선을 통해 원균의 행방을 알아보았으나, 원균은 다음날 오전 8시경에나 기껏 판옥선 1척을 타고 나타났다. 왜 수군 앞에 아군 함정을 스스로 침몰시키고 몸을 숨겼다가 이제야 나타난 것이다. 이순신 함대는 당포항, 거제도 송미포 앞바다를 거쳐 옥포로 향하며 적과 만났다.

 

옥포해전은 옥포, 합포, 적진포 전투를 말한다. 적이 쳐들어온 지 24일 만에 이순신과 적은 바다에서 만난 것이다. 이 해전은 장군이 전라좌수사로 경상도 지역에 출전하여 처음 실시한 왜군과의 작전이자, 적과 맞서 승리한 첫 해전이다. 장군은 적 발견 신호가 있자, “가벼이 움직이지 말고, 태산같이 무거이 행동하라(勿令妄動 靜重如山)”고 명하고 옥포만 안으로 돌진해 들어갔다. 적선에 나부끼는 깃발은 눈이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화려함은 그로 인한 취약함을 감추고 있다. 적의 주전략은 전국시대를 통해 훈련된 백병전을 중심으로 배를 가까이 붙여 근접전을 펴는 것이었다. 이에 맞선 이순신의 전략은 적선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화포와 불화살로 배를 태워 버리는 것이었다. 장군은 제자리에서 급회전이 가능한 판옥선의 특징을 살려 기동성을 높이며 화포를 주무기로 한 원거리 공격에 나섰다.

 

그날 적은 대패했다. 적의 참패는 우리의 승리였고, 이는 곧 옥포해전을 계기로 우리가 전장의 주도권을 쥐게 된 것을 뜻한다. 싸움의 승패엔 경영자의 심적 상태가 크게 작용한다. 태산같이 흔들리지 않는 굳은 마음으로 이순신은 첫 해전에 임했고, 이는 모든 승리의 밑바탕을 이뤘다. 옥포해전의 승리는 이순신의 깊은 수양의 자세에서 나온 것이다.

 

첫 해전에서 승리하기 위해 장군은 조선 수군에게 침착성을 잃지 않을 것을 주문했다. 바다로 나가기 전 신호 체계, 척후 등 전투 진용을 편성하고 치밀한 작전계획을 세웠다. 또한 대열을 지어 일제히 신속하게 전투력을 집중해 돌격하는 전략을 취했다. 이날의 승리로 우리가 크게 얻은 것이 있다. 경상우수사 원균이 대패한 이후 반신반의하는 조선수군에게 승리의 자신감을 심어 준 것이다. 힘겨운 싸움을 하는 육군에게도 ‘이길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가 처음으로 바다에서 전해졌다.

 

장군은 싸움 이후 곧바로 기상 상황을 고려해 함대를 이동시켰다. 장기전에 대비하기 위해 휴식과 차후 전투 준비를 할 수 있는 역량을 높이기 위해서였다. 이는 전략적 승리를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장군은 어떤 상황일지라도 목표달성이 가능한 조건을 만들어 나갔다. 옥포해전 이후 등장하는 장군의 준비역량은 그 자신 치밀한 준비만이 성공조건이라는 것을 잘 알고 실행에 옮긴 결과였다. 이 출전으로 적들의 수륙병진 전략은 좌절되고, 조선수군은 희망의 등불을 치켜들 수 있었다. 이처럼 옥포해전은 향후 승리의 교두보를 장식한 첫 싸움이었던 것이다. 기업 활동으로 말하자면, 시장 내 지위나 점유율 같은 방어선을 확고하게 틀어막아 경쟁사가 감히 넘볼 수 없는 조건을 마련한 셈이었다.

 

옥포해전이 있은 거제도는 우리에게 최초의 승리를 가져왔지만, 이순신 실각 이후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원균의 함대가 칠천량에서 대패하며 거제도는 첫 승리와 첫 패배가 고스란히 교차하는 공간이 된다. 누가 지휘봉을 잡느냐에 따라 기업 성패가 달라진다는 것을 절실히 되새기게 하는 역사적 현장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옥포 앞바다에서 그날의 일대회전을 돌아본다. 이 경제전쟁에서 이길 방법은 무엇인가? 이순신의 바다에는 그날 바람이 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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