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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태왕16

큰 나라 고구려: 고구려인들과 글로벌 리더십 제국적 국토영역은 고구려로 하여금 여러 부족이 연합한 국가를 이루도록 만들었다. 창업 이래 지속적인 확장의 결과였다. 고구려에는 소노부(消奴部)·절노부(絶奴部)·순노부(順奴部)·탁노부(濁奴部)·계루부(桂婁部)의 다섯 부족이 있었다. 평양으로 천도하고 부터는 혈연적인 오족제도(五族制度)에 지연적인 요소를 가미해 오부제도를 만들었다. 하지만 고구려 사회는 대체적으로 혈연적 부족사회를 기반으로 했다. 부족제도에서 통치자는 부족들의 선거에 의해 결정되었다. 3세기 말엽 기록에는 처음에 소노부에서 왕이 나왔으나, 뒤에 차츰 약해져서 계루부에서 대신 왕이 나왔다고 전한다. 또한 고구려는 적극적으로 서진정책을 펼쳐 요동(遼東)·현토군(玄菟郡)을 서쪽으로 후퇴하게 했다. 이런 활동의 결과 태조 때에 와서 고구려 영토는.. 2010. 4. 3.
힘과 국제관계의 상관성이 글로벌화를 촉진하다 이러한 지정학적 특성과 다양한 문화적 특성으로 말미암아 광개토태왕의 경영의 특징은 개별성이 아니라 상호관련성에 집중된다. 바야흐로 제국적 토양이 마련된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듯 국토의 확장과 함께 고구려는 국제성을 강화시켜 나간다. 나아가 글로벌화의 중심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 낸다. 고구려가 지닌 국제적 발상은 스텝지역을 비롯한 다양한 종족과 문화를 연결하고 아우르는 확장성의 결과였다. 국토가 팽창됨에 따라 다종(多種)과 이기(異岐)의 문화권과의 교류가 더욱 가속화되며 제국다운 면모를 지니게 된 것이다. 예컨대, 고구려는 전통적으로 농업정착문화권에 있는 한족과 이에 대립하는 유목문화권의 흉노(匈奴)·선비(鮮卑)·유연(柔然)·돌궐(突厥)·거란(契丹)과 같은 제(諸)스텝세력, 나아가 동북만주에 산재하며 시대.. 2010. 3. 30.
고구려는 전사들의 국가 고구려는 주지하다시피 처음부터 강대국으로 창업된 게 아니었다. 경제적 기반도 열악하기만 했다. 거친 조건에서 살아남기 위해 고구려는 출발부터 전사국가(戰士國家)를 지향했다. 군사력으로 주어진 환경을 극복하고자 한 것이다. 이러한 팽창책은 국초부터 일관된 정책이었다. 이는 이후 고구려가 환경 제약을 극복하기 위해 힘으로 주변 세력을 통합하고 지배해 나가는 방식이 된다. 철저하게 힘에 의한 정치, 힘에 의한 균형, 힘에 의한 확장책을 꾀함으로써 국세를 떨치고자 한 것이다. 이처럼 고구려의 발전과정에는 대내외적 환경이 큰 영향을 미친다. 즉, 환경이 전형적인 전제적 군사국가로 발돋움해 나가는 배경이 되는 셈이다. 고구려가 창업 이래 군사편제와 군사역량을 강화한 것도 이 같은 맥락에서였다. 나아가 온 국민이 생.. 2010. 3. 26.
5세기, 그때 둥북아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4세기 전반, 동북아를 둘러싼 각국은 서로의 이해관계에 따라 이합집산이 이루어진다. 위기와 기회가 병존하고, 5호 16국이 각국의 득실에 따라 역학 관계가 성립되었다. 이것이 국제 정치의 본질이었다. 실익은 그 어떤 대의보다도 중요했다. 대륙의 패권을 놓고 생존과 멸망의 선택이 놓여있던 극도로 첨예한 대립과 우호, 경쟁과 협력의 국제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이 시기 동북아는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고 있었고, 이에 따라 활발한 움직임이 감지되고 있었다. 예컨대, 동진(東晋)과 연(燕)은 우호관계를 맺었고, 중간의 후조(後趙)는 고구려와 군사적 동맹 관계를 맺게 된다. 반면, 고구려는 연을 적대시하는 후조와 긴밀한 관계를 맺으면서도 한편으로 동진과 동시교섭 정책을 펼친다. 이런 와중에 후조와 연, 연과 고구려는.. 2010. 3. 24.